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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성경연구
◈ 죄(罪)란? - 선악체제를 가지고 생명나무의 공로를 갉아먹는 현상이다 !!
* 죄라고 하는 것은 선악을 가지고 생명나무의 공로를 갉아먹는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꼭 티를 낸다는 것이다. 내가 너보다 이렇게 열심히 했기에 나에게 복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란 것은 바로 선악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왜 그 당시의 똑똑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제외시키고,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셨는가? 세리와 창기들은 자기들이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몽땅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많이 사랑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침 9시나 12시나 오후 3시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 놀고 있는 자라도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다들 보는 앞에서 삯을 주는가? 먼저 온 자들에게 삯을 먼저 주어서 보내버리고 주면 되는데 말이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라는 것은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생명나무는 공짜로 준다는 것이다.
*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주님만이 생명인데, 목사직이 생명이 되면 되겠는가? 예수님만이 생명이라면 오직 예수님만 드러내면 되지를 않는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면 되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를 언약에서는 세팅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이 세팅에 의하면,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윗이 상한 심령이란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기존 이스라엘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박수나 치려고 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을 불러서 한 세트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잘나고, 우리는 못난 놈으로 말이다. 우리들이 찬양을 한답시고 박수를 치고 드럼을 치고 하는 것은 사실 인간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조직을 보다 활성화시켜서 뭔가 하려고 하는 다단계 판매방식과 같다는 것이다.
* 사실 이러한 짓을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가서, 호세아서, 아모스 등에 들어오면 다윗 찬양을 때려치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찬양도 제사도 아니고,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미 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오캄의 유명론(唯名論) - 하나님을 믿지만, 그러나 그분이 직접 관여는 하지 말라 !!
*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도, 그 하나님의 뒷방을 지키는 어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아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주는 용돈이나 잘 받아서 챙기라는 것이다. 효심은 지극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에게 정성을 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윌리암 오캄의 '유명론' 이라는 것이다. 즉, 이름만 있다는 것이다.
* 과거 중세 때 '말의 이빨이 몇 개인가?' 라는 것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말의 이빨은 12개라고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진한 마부가 '어, 말을 이빨은 직접 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라고 하다가 잡혀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에, 보이는 것은 나타남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했기에 말이다.
* 중세 때의 신앙은 무엇인고 하니, 실제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 체제에 어떤 도움을 주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위주의 나라가 아니고 신 위주의 나라이기에 말이다. 사실은 교회위주이지만 말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교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예수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고, 그러나 다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일에 간섭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기 싫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선악과 따먹은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로 밀어놓고 자기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하나님이 한번 되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의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가? -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
* 그래서 '신이 있다' 라는 것도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는 마침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드디어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발견했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과학협회의 주장인데, 차라리 마귀과학협회라고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들러리인가?
* 여기에서 참고할 책이 하나 있는데, '신 과학은 없다' 라는 것이다. 숙명여대 교수가 지은 책인데, 상하 두 권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철저한 과학 신봉주의자가 기존의 모든 종교와 동양학과 사이비 과학들을 완전히 박살낸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생화학과 약리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왜 과학만이 유일한 복음인가?' 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과학의 업적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당신들이 예배당에서 박수치고 아멘 할 때에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코피를 쏟으면서 열심히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찬란한 과학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과연 이 말이 맞는가? 예수 사진을 걸어 놓고 수술을 하든지 안 하든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주님의 뜻은 아주 독특한데, '먹고 마시고 장가갈 때 인자가 온다' 라고 할 때에, 그것은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그 어떤 짓을 해도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 미가서 6장 9절에 뭐라고 했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완전한 지혜라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독특하다는 것이다. 물론 잠언에도 있지만 말이다.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가? 여호와가 바로 '심판 주' 라는 것이다.
(미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
* 예를 들어서, 환경미화원이 쓰레기를 치울 때에, 그 쓰레기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쓰레기라는 것이다. 그것처럼 인간의 행동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매우 독특하다는 것이다. 생명과학, 유전자 공학, 로케트 발사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 더 살겠는가? 길어야 100년이라는 것이다.
* 다시 한번 묻지만, 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현대인들은 예수를 대체할 만한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한 완벽함을 이룰 때까지 서로 힘을 합쳐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의 날에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 구속사적 메시야 개념
* 다윗은 이 땅의 나라를 시온성으로 보지 않는다. 오직 하늘에 있는 것으로만 본다. 그래서 다윗이 바로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야의 죽음을, 장차 올 메시야가 택한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 희생 제물로 보는 것이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이러한 일을 담당해야 여호와 종이 되고, 왕이 되는 것이다. 담당하지 않으면 하늘의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사적인 메시야 개념이다.
☆ 선지자 - 다윗이 가지고 있는 이런 희생 제물에 근거해서, 장차 이스라엘은 망하고 하늘나라의 왕이 인간이 되어 담당하는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내다보는 그룹을 선지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국가적 선지자를 다윗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최초의 선지자는 아브라함이지만 말이다.
* 이와 같은 다윗의 정신을 담고서 이스라엘에 외친 선지자는?
① 엘리야, 엘리사 - 이적 선지자 ② 문서 선지자
☆ 선자자의 특징은?
① 참 선지자 - '우리나라 망한다' 라고 외친다. 물론 감옥행이다. -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등
② 거짓 선지자(궁중 선지자) - 우리나라 만세이다. 희망과 비전과 꿈을 심는 선지자이다. 물론 다 가짜이다. 왕으로부터 월급을 받는다. 선지자가 무조건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고, 종말이기 때문에 선지자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종말의 때에는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렘5: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 종말시대의 선지자의 역할
* 지금 선지자와 제사장 등이 문제가 아니고, 그 백성들이 좋게 여긴다는 것이 문제다. 종말에는 이러한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 종말의 때이므로 '대한민국이 망한다' 라고 해야 할 종말의 선지자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인자의 나라가 온다고 해야 되지, 백성들이 원하는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 김진홍의 문제점
* 종말의 때는 언제가 기준인가? - 그것은 다윗 시대를 중심으로 나눌 수가 있다.
(미3: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도다
* 이 미가서의 말씀은 시편 51편의 시온을 주의 은택으로 세우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이미 그 시온이 성전이 아님으로, 그 나라는 이미 이스라엘이 아닌 것이다.
(미3: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이 미가서 3장 11절 말씀이 그 당시의 복음이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이다. 종말이 아니었던 다윗 시대는 평안하다는 것이 해당이 되겠지만, 그러나 이미 성전이 부수어진 이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상태에서는 도끼가 놓인 그 상태를 전해야지, 다른 것을 전하면 반칙이다. 마치 성수대교처럼 다리가 끊어졌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차들을 마구 통과시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평안하다고 하지 아니하면, 그 당시에는 못 먹고 살았다. 항상 먹고사는 것이 문제이다. 월급을 왕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마치 요즘 한국에서 조찬기도회 열어서 대통령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는 것과 똑같다.
(미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그러므로 선지서를 몽땅 생략한 한국교회는 전부 가짜 예수를 전하고 있다. 좋으신 예수로 전환시키고 말았다. 조용기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 좋으신 하나님 ! - 약속을 담고 끝까지 사랑하니까 좋으신 하나님이지, 이 땅에서 복을 준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이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상한 심령이다. 너의 죄를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정신을 가지고, 동참해서 '함께 가자' 라고 하는 분이 예수님이지, 증권투자, 부동산 투자를 하는 예수님은 없다는 것이다.
* 성경은 오히려 그런 것을 한사코 반대한다. 그러므로 순복음은 가짜 예수를 전하는 순 엉터리 복음인 것이다. - 순 엉터리 복음이 바로 순복음이다. 분명하다.
* 구속사의 중요성 - 구속사를 공부하지를 않으면 모든 개념이 다 깨어진다. 계시의 확대에 의해서만 모든 개념을 정리를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개념들이 다 엉망이 되고 만다.
☆ 정리하면 - 다윗언약에 의하면 시온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하늘의 시온성을 둘러 살 누군가가 있다는 것인데, 그 희생타가 우리야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희생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우리의 희생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은 바로 이것을 두고 "주(主)" 라고 한다(시110).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여기서 "여호와?", "주?", 갑자기 주님이 두 분이 되었다. - 이것은 하늘에 있는 시온성에는 희생물이 인간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 자체가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다. 희생자 되시는 그 분이 주님이 되시는 것이다.
* "그러면 주가 되시는 분이 왜 죽는가?" 라고 질문하는데, 과연 주가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야곱언약에 의해서, 섬기는 자가 주가 되기 위해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를 살리는 방식이고, 바로 원수를 이기는 방법은 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 인간은 결코 할 수가 없느니라 ! - 이 표현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았다는 말씀이다.
* 멜기세덱 족보 - 이 멜기세덱의 족보는 인간의 그 어떤 족보와도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 족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마치 하늘의 아들의 표상을 보여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아 너는 이제 끝났다 !
* 이 말은 실제로 멜기세덱에게 그러한 족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족보가 있는데, 이 멜기세덱은 족보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적(?) 면이 있다는 것이다.
* 사무엘하 22장 - 다윗이 예언을 하는데, 마지막에는 하늘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쳐버린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14장의 상황 - 다윗 이전 시대에는 이 땅에서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은 괜찮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원수관계로 부각되었지만, 그러나 다윗 시대 이후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핍박받고 희생물이 될 때, 이 땅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즉 이 땅이 심판 받고 난 뒤에는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언약 때문에 자기 백성을 십자가 졌던 그 분이(하나님이 아니고), 자기의 자격을 가지고 자기 백성 골라서 성령을 보내시고, 처소를 함께 해서 영생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은, 한국교회에서 외치는 교회성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의 위락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신이라는 이름을 불러주고, 기타 치고 노는 장소에 불과한 것이다.
*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 바로 그렇다 ! - 십일조는 다리미로 다려서라도 깨끗한 돈으로 드리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성전으로 여겨서 이름도 헌당식으로 바꾸고 말았다. 주님의 재림 시에 이 땅의 모든 인간의 기도와 땀이 담겨 있던 예배당 다 무너진다. 충현교회도 물론이다.
* 그 이유가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요한 계시록 21장에 보니, 하늘에 새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서 함께 할 거처가 바로 성전인데, 그 성전은 오직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다시는 아픈 것도 우는 것도 없다. - 그냥, 그분과 함께 !!
* 진짜 이것을 원한다면,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는 없다. 진짜 믿는다면 사도 바울처럼 빨리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다는 것이 강단에서 날마다 비쳐 나와야 된다.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하늘나라를 진짜 강조하는 것이 강단에서 비쳐 나온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이것을 이상하게 받아 드린다. 그때 우리가 할 말은? - 헤어집시다 !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 여호와 삼마 - 구약 에스겔에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이 동쪽에서 떠난다는 것이다. 성전의 문이 동쪽인데, 그런데 이 동쪽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난다는 것은, 지금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마지막에 보면 다시 새로운 성전이 오는데, 그 성전은 떠났던 성신이 다시 온다는 것이다. 이 성전이 바로 여호와 삼마이다. -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 !
* 여호와 삼마와 임마누엘 - 떠났던 성신이 다시 오는 것, 이것이 에스겔 끝의 여호와 삼마이고, 바로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새 성전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임마누엘 개념은 바로 이 개념이 아니고,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을 구분하겠다는 심판의 개념이고,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누린다는 것은 바로 여호와 삼마 개념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잃었던 성전을 다시 세운다. 즉, 우리의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다윗도 다시 온다. 그때는 다시는 망하지 않는다.
* 그런데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의 백성은 어떤 상태인가? - 해골이다. 그러면 아골 골짜기에 가보자. 아골 골짜기, 즉 이스라엘이 완전 패배했던 그 장소에 다시 가보니, 그곳에 해골이 집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른 해골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그 해골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어서 생기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 인간이 된 자들의 이름이 여호와 군사, 혹은 이스라엘(싸우는 나라)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그 숫자가 채워지는 것이다.
* 여호와의 군대 - 이스라엘(싸우는 군대) - 잡신들과 사람들을 겨루어 이기었다.
* 이것이 바로 그대로 예수님이 완성해야 될 몫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세례 받아서 구약(에스겔)을 그대로 다 이루신다. - 예수님의 행동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겔37:1-6)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 요한복음 14장의 내용 - 예수님은 애초부터 제자들에게 기대를 안 하시고 버린다. 예수님께서 홀로 완성을 하신다. 제자들이 다 떠나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다 아신다. 이미 구약에 다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신약의 열두 제자들이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완성할 때, 성령을 보내실 때에 초청을 할 것이니까, 그때에는 마음을 푹 놓고서 따라와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인 것이다.
☆ 에스겔에서 여호와 삼마 (처소개념) - 처소개념을 위해서 에스겔에서는 성령이 도입되어야 되는데, 성령이 도입된다는 그 완성을 위해 성령을 언급했다. 그러나 성령을 백날 언급해도, 또 구약 이스라엘과 같을 수밖에 없기에, 이제는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는 그러한 처소를 구상하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것을 회복하면서 원점으로 돌리면서, 다시는 구약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섭섭해하지 않는 처소가 완벽하게 마련되어야 되는데, 그 책임에 대해서 예수님이 지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가 없다' 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완벽한 처소가 마련되거든 그때에 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 예수님의 역할 - 성령이 오실 만한 환경,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오라고 하셔도, 에스겔에 보면 종말 때의 성령은 오직 다윗이 다시 와서 언약을 회복을 할 때, 그 뒤에 성령이 오시도록 되어 있다. 즉, 메시아가 먼저 와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줄 때에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실 만한 터전을 닦는 것이 예수님의 하실 일이었다.
☆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의 상황이었고, 즉 처소의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요한복음 15장으로 전개되면서 그 처소 마련은 오직 농부 되시는 예수님 소관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서 5장 2절/베들레헴 예언
마태복음 2장을 살펴보자.
(마 2: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지금 15절은 호세아서를 인용한 것인데, 아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애굽으로 도로 내려간 것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는 것이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불러내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나중에 헤롯왕이 죽고 나서 애굽에서 나올 때라면 몰라도 말이다.
*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왜 이렇게 의도적으로 반대로 인용하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기존의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서 '나사렛 사람' 이라는 것에 대한 긍금증도 풀리는데, 주석가들은 구약에서 나사렛을 찾고 난리를 피우는데, 아니 구약에 무슨 나사렛이 있는가?
* 나사렛이라는 것은, 이사야와 마태복음 4장에 있는 것처럼, 어둠에 속한 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참된 이스라엘이고, 기존의 예루살렘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공(?)하는 작업이 임마누엘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자기 백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마태복음 2장 18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라마'가 어디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에게 잡혀가는 포로들의 집결지가 바로 라마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라헬이 운다는 것이다. 라헬은 야곱의 본처인데, 아니 라헬이 왜 갑자기 등장하는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인데, 즉, 이스라엘의 본처인 라헬이 우는데 누구 때문에 우는고 하니, 헤롯 임금이 그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다 죽이는데, 그때 이 예레미야 31장 5절의 본문을 동원시킨다는 것이다. 헤롯의 칼질(?)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본처인 라헬이 운다는 것이다. 거짓된 이스라엘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라는 것이다.
◈ 자기 백성 -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식을 잃어버린 고통을 !!
*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자기 자식들을 포로로 보내놓고 엉엉 울었던 그 엄마들의 모습이 보여주는, 즉, 신약시대에 예수님 때문에 자기 자식들을 잃어버린 그 부모들이야말로 새로운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백성' 이라는 것이다.
* 미가서 5장에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는데, 그러나 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이 어디 한 두 명인가? 누가 메시야인지 알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이 베들레헴은 '작다' 라는 의미인데, '떡집'이 아니고 말이다. 원어로 풀이하는 떡집하고 베들레헴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원어도 제대로 공부하면 그런 무식한 소리를 안 한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베들레헴하고 떡집이라는 의미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베들레헴이 작기 때문에 아무도 찾아가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왔는가? 인디아나 존스(?)인 동방박사들이 왔다는 것이다. 별을 보고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기존의 유대인들에게는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자기들이 오죽이나 못났으면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왔겠는가? 자기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돌들이 소리치는 경우와도 같다는 것이다.
*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것을 먹고서 살았던 것도 신기한 이적의 차원이 아니라, 선지자가 기존의 이스라엘로부터 얼마나 핍박을 받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니 한번 생각해 보라. 까마귀가 물어다주면 얼마나 물어다 주겠는가? 이것은 바로 이 세상 권세에 눌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주님의 이런 약자의 편에 서있다는 것이다.
* 이것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문자적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즉,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풀어야만 이렇게 되는데,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고 말이다. 성령께서 바로 십자가를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죄에 해서, 의에 대해, 심판(판단)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미가서 6:7-8/제사는 번제와 속죄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는 것
◈ 로이드 존스 - 구약은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 !!
* 이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로마서 강해' 라는 책에서, '구약은 인간이 어떻게 죄인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 라고 했는데,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말이다. 모든 종교적 실험을 다 동원해서 보여줌으로서, '인간은 이렇게 해서 죄인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좀 더 어렵게 말하면,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는 것은 기존의 언약체제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투입이 되는데, 즉, 다윗언약이 들어오는 것은 기존의 모세언약의 문제점을 고발하면서 들어오는데, 그래서 아직도 모세언약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윗언약을 고수하는 사람을 핍박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다윗언약의 시대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시대(카이오스)에 도착을 했기 때문에 기존의 모세언약을 고수하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와 속제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 이라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제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미가서 6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전혀 새롭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제사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자기들을 공격하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미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왜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는가?
* 이렇게 모세언약이 다윗언약으로 바뀌는 것은,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사실 무척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 모세언약에서는 레위지파가 핵심역할을 감당하지만, 그러나 다윗언약에서는 유다지파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유다지파가 장자라는 것이다. 장자가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다지파가 장자지파가 될 수밖에 없는 레위지파의 한계성을 누가 회복시켜주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모세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원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 다윗의 자손에 의해서 실현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실현시키는 임무를 띄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 007 !
미가서3:5.11/인간과 종교와 복음
사람은 처음부터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가 시작해서 서서히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의 세계는 장난감의 세계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이들의 장난감이 된다. 뭐든지 환상적 이미지를 풍겨 내는 신기한 것들이다. 매일 같이 꿈꾸는 재미로 사는 시절이다. 자기 자신은 이 넓은 우주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큰 궁창 안에 조그만 자기가 들어가 살고 있을 뿐이다. 구름 위로 멋진 시계가 펼쳐 있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 지상에서는 힘세고 잘 생기고 지혜로운 영웅이 자기와 엄마 아빠와 지구를 지켜 준다고 믿는 시절이다. 장난감은 곧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 수 있는 시절이다.
그러나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 어린이는 장난감을 버린다. 동시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버린다. 남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이제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 모래 장난이나 하면서 놀 입장이 못된다. 옛날에는 그저 장난감처럼 여겼던 것도 사투를 하면서 벌어들여야 될 것들이다 장난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장난감이든 뭐든 사 드릴 수단인 돈이 필요하다. 돈은 현실이다.
돈과 무관한 것은 현실과도 무관하다. 하나님과 예수도 성경도 돈이 되는 경우에만 관심들뿐이다. 신학생이나 선교사나 목회자나 선교 단체 간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님이요 예수이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미자립 상태에 머무는 어린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이는 어른이 되면 자연적으로 스스로 서고자 한다. 하나님이든 가족이든 누구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저 돈을 있는 곳을 찾아 발길을 옮길 뿐이다. 하나님을 좀 더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저만치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낯익은 장난감처럼 느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은 떠나 보내고 오직 자기 자신만 남았다. 내가 곧 그 옛날의 부러웠던 하나님이 되었으며 예수님이 되었으며 영웅이 되었다. 옛날에 꿈꾸었던 신화는 지금의 자기 역사이다. 왕자처럼 살고 싶고 공주처럼 화사하게 꾸미고 싶었던 것이 어른이 되니 모든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신화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만들어 내기 나름이다 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어른이 되었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될 덕목이 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목숨 바쳐 충성을 해야 된다는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금의 자기 자신뿐이다"는 신념이 있어야 어른답다고 느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어른이 되었어도 아직도 종교를 갖고 있다?
이것참 신기한 일이다. 아직 어린이 때를 못 벗었다는 말인가? 현실을 제대로 감지하고 못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꿈속을 헤매면서 동화 속의 공주를 그리워하고 말인가? 아직도 장난감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 어른이라고 해서 장난감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보다 어른에 걸맞은 장난감이 요구된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정신적으로는 독립되지 못한다.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는 미래의 자화상, 신선감이 떨어져가는 우울한 세상, 가족끼리라도 깨어지는 유대감, 닭아 없어져가는 매혹거리, 흔들거리는 사회 체제, 이 모든 것이 어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의미 없는 손가락 놀림에 하나 둘 씩 넘어가는 묵주 구슬처럼, 뭔가 쥐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미래의 불안을 해소되는 그런 장난감 하나라도 꼭 쥐고 있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 생활이다. 성숙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놀이 장소가 바로 종교단체들이다. 이 공간에서는 신비감을 한 몸에 풍겨 내는 영적 지도자를 원한다. 요상하고 무게 있는 긴 가운이라도 걸친 채 무대에 등장되기를 바란다. 꿈속의 인형이 자기들 눈앞에서 실제화 되기를 원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자꾸만 미숙아로 되돌아간다. 그 지도자에게 회초리라도 자진해서 맞고 싶은 심정들이다.
학대받고 꾸중듣고 매맞는데서 오는 쾌감, 바로 그 달콤한 아품이 어릴 쩍 자아 모습이다. 그때는 부모로부터 꾸중듣는 것도 그분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어른이 되고서부터 그런 관심조차 받아 본 것이 언젯적 일이었던가! 종교 단체 안에서 모두가 어린애가 된다. 어른은 당회장밖에 없다. 교주는 특정 교단에만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같은 교주, 어머니 같은 교주를 찾아 사람들은 종교 단체를 결성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잔인하고 폭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는 교주를 만날 때 사람들은 더욱 더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 카리스마적인 쾌감에 몸을 맡기려 한다. 마치 철없는 어린애처럼 ….스스로 억지로라도 정신적 미숙아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보호받고 사랑 받고, 관심 받았던 어린 시절을 재생하고 싶은 것이다. 신체는 이미 어른이기에 주위에서는 항상 큰 실적과 업적을 기대하는 책임자처럼 대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너무 나 큰 스트레스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압박감에서 잠시 일탈하여 다시 신화의 세계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싶어한다.
이런 도피자들이 모임이 오늘날 헤일 수없이 많이 등장한 종교 단체들이요 교단들이다. 어른? 종교에서는 어른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계에서의 어른 교주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일반 교인들은 몸체가 컸다뿐이지 그저 기대기를 좋아하는 어린애들이다. 학식과 학력? 설교 강단에서 날리는 강압적인 한마디 앞에서 소금처럼 녹아져 버린다.
종교계에서는 일반 교인들을 그저 죽어 가고 늙어 가는 어린애로 볼뿐이다. 정말 어른으로 사는 자는 종교 단체에 등록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가족들과 건전한 취미 활동이나 하고, 동우회나 동창회에 참석하고 정치 활동에 나서기도 한다.나서게 된다.
참으로 어른인 자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나름대로 종교를 따로 갖고 있다. 어린이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지만 진짜로 어른인 자들은 종교를 창시하는 자들이다. 종교계, 그곳은 기와 기의 만남이요 힘과 힘이 대결하는 공간이다. 자신들을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준 대가로 그들은 교주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한다.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이 진실된 마음을 종교계에서는 신심(신앙심)이 깊다고 말한다.
교주는 장난감 속에나 있을 법한 신화적 존재이다. 신비로 싸여 있기에 누구도 함부로 손대면 부정탄다는 소문을 민중들이 오히려 반기고 있다. 신비로움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신화의 세계는 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민중들의 희망이 되기 위해 오늘도 종교 단체에서 종사하는 수많은 교주들은 자신을 속이고 위장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 보다 내일을 보다 멋있게 보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그 중의 하나가 '돈 마구 쓰기'이다. 해외에서 부흥된 교회 견학, 각종 세미나 참석 차 출장, 해외 선교지 시찰 등 상상도 못하는 막대한 금전을 소비하므로서 자신이 지닌 카리스마적 권력이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만약 반발이 나오면 그 일단 반발의 선까지만 자기 권력의 한계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인내력은, 자신의 장난감으로서의 교회와 그리고 그 교회 유지를 위해서 계속 바쳐야 하는 기부금의 눈금이 상호 균형을 맞출 때까지이다. 계속해서 교회 예산에 압박을 가하게 되면 교인들은, 보다 헐값에 강단에서 세울 수 있는 목회자로 교체되기를 원한다. 교인들에게는 궁극적인 진리는 오직 돈이다. 따라서 보다 싼값에 종교 오락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원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종교란 결코 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신화적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신화적 세계를 위하여 그들은 애써 모은 돈 중에서 일부를 비용으로 각출한다.
구약 성경 미가서는 이 광경을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3:5,11)
이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함께 계시다'는 상투적인 축복의 말을 상품으로 내놓고 그것을 통해 종교인들이 생계비를 마련해서 안정된 직업인 행세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복음이란, 바로 이런 광경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분노의 표출이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애통하는 심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토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큰 사건이다. 종말적 사건이다. 세상이 최후가 되었다는 점을 알리는 사건이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아품에 동참되어 있는 마음을 지닌 자이다. 복음이란, 자기 처지를 호전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우는 것이고 함께 죽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으면 오직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서만 나올 수 있는 종말적 현상이다. 인간의 약함과 외로움과 모자람을 보충하기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인간 세계의 모든 아품이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저주임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사건이다. 주님의 저주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자만이 영생 얻은 자 임을 말해 주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 앞에서는 어른도 어린애도 없다. 오직 죄인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가지고 놀면서 즐기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예수님 앞에 세워 부정하기 위해서 던져진다. 복음은, 싫어 버린 바 되기 위해 선포된다.
복음은, 우리 모두가 제 갈 길로 도망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매맞음과 고통과 죽음은, 죄인인 우리 자신들의 허물 때문에 생긴 징벌 사건임을 임을 말해 준다. 복음은 청명한 공포이다. 하나님의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