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트로이의 목마’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아직까지 소개 단계에 있다. 그렇지만 각계의 관심이 점차 늘어가고 있어 조만간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진보적 정당들 가운데에는 사회당이 가장 적극적이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도 관련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본소득은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장애인, 여성 등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전면에 함께 나설 수 있는 훌륭한 매개가 될 수 있다. 보편적 의제를 받아들이고 폭넓은 연대의 의지가 있는 모든 대중조직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유력한 매개이기도 하다.
현대적인 기본소득 개념의 역사는 20여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의 기원을 사후적으로 추적하면 그 기원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소 소득에 관한 아이디어는 16세기 초에 최초로 등장했으며, 조건 없는 일회적 급부에 대한 아이디어는 18세기 말에 최초로 등장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는 이 두 기원이 최초로 결함함으로써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아이디어가 최초로 형성되었다. 20세기에는 전간기 영국에서의 ‘사회 배당’, ‘국가 보너스’, ‘국가 배당’ 논의가 있었고, 60, 70년대 미국에서의 ‘시민보조금(Demogrants)’과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둘러싼 논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70, 80년대 이후 북서유럽에서부터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 1986년 기본소득에 관한 첫 번째 국제회의가 벨기에에서 개최되었고, 1988년에는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asic Income European Network)가 결성되었다. 이후 2년마다 국제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기본소득 논의의 지구적 확산을 도모하던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는 2004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10차 국제대회를 통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의 필립 판 빠레이스 교수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오늘날 가장 원형이 되는 기본소득 개념을 발전시킨 인물이며,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하는 소득 △ 일회적 급부가 아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 △ 국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공동체 단위로도 지급할 수 있는 소득 △ 세금을 통한 재분배 혹은 자원 분배를 재원으로 하는 소득 △ 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지급하는 소득 △ 개인을 단위로 모두에게 균등하게 지급하는 소득 △ 자산 심사 없이 지급하는 소득 △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를 묻지 않고 지급하는 소득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렇듯이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단지 사회구성원이라는 자격에만 근거하여 지급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또한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와 같은 어떠한 조건도 부과하지 않고 지급한다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기본소득 개념에 조금씩 변형을 가한 대안적 소득보장 제도가 주장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사회 활동에 대한 최소한의 참여 의무를 부과하는 ‘참가 기본소득(participation income)’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폭넓게 합의할 수 있는 기본소득의 개념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웹사이트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을 논할 때 주장자들과 비판자들 모두 가장 크게 부딪히는 문제는 바로 실현가능성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실현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이유로 자꾸만 머뭇거릴 경우 실현가능성은 더욱 멀어지고 말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복지 패러다임과 노동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비롯하여 급진적인 세제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환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기본소득이 현재의 사회 위기 속에서 하나의 유력한 사회 대안이자 경제 대안으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면 과감하게 부딪혀 보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또한 단순한 복지 정책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도입을 위해 필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 거시적이고 심층적인 성격 때문에 대안사회를 지향하는 사회 재구성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때문에 고도의 정치 프로젝트로서의 특징이 기본소득 모델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종종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진다고 하더라도 기본소득 모델의 즉각적인 도입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때문에 기본소득의 단계적인 도입 혹은 확산 전략을 사고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거에 기본소득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기본소득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부분적 제도 도입의 중요성 또한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그러한 영역을 확산시킴으로써 포위 및 압박 전략을 구사하는 방법이 유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작게는 예를 들어, 현존하는 다양한 수당 및 급부 제도에 있어서 자산 심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가능한 한 완화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이보다 크게는 현존하는 기초노령연금이나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장애인연금을 보편적인 사회수당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 등이 있을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일국적 수준의 주장에 그치고 있지 않다. 기본소득의 바탕에 깔려 있는 빈곤으로부터의 탈피, 자유, 평등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는 이미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과 빈곤의 해소 문제에 주목하며 지구적 차원의 기본소득 실현을 논의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구적 정의의 차원뿐만 아니라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천착하는 기본소득 논의의 흐름도 있다.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은 이미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2009년 현재 16개 회원국을 지닌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 운동은 점차 확산 추세에 있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 또한 2010년에 회원국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시행을 앞두고 있거나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공상적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점차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에서 기본소득 제도를 실현하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은 이것이 한국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바람직하고 실현가능한 제도가 될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와 함께 이러한 정책 혹은 제도의 실현을 앞당길 수 있도록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 세력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놓일 것이다.
웹진 <행동하는의사들> 2009년 7월호 칼럼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