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교사저널 2015년 3월호
실패를 말한다
-정동혁 (서울 유한공업고등학교)
1. 무엇이 실패인가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교실은 ‘진리의 규칙(the rule of truth)’이 지배하는 세계의 축소판이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 규칙 아래서 아는 법과 사는 법을 배운다.”
“정 선생, 안 좋은 씨앗에 집중하지 말고 제한된 에너지를 싹 틔울 수 있는 씨앗에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늘 말썽을 부리고 교사의 말이 귀에는 들리지만 머리로 생각되지 못하고 가슴에 머물지 못하는 학생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에게 동료 교사와 선배 교사가 주는 충고다. 이 한 명에게 교사로서 나의 모든 에너지가 들어갈 때마다 스스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블랙홀과 같이 모든 시간을 빼앗아 버리며 끝까지 힘들게 하는 아이 한 명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아이들을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이 한 명을 내려놓고 나의 손길과 수고를 기다리는, 조금의 관심에도 성장할 것 같은 남은 24명을 돌아보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학교를 중단하면 그 학생은 실패하는 건가, 이렇게 적응하지 못하는데 꼭 우리 학교를 졸업시켜야 하는 건가... ...
이런 생각의 중심에는 지금 보이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하려고 하는 조급함이 심어져 있다. 이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서 실패와 성공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 숨어 있는 핵심 요소들을 돌아보려 한다. 그 속에는 교육의 실패든 교사의 실패든 여러 문제들이 섞여서 내재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교사 내면의 문제와 관계성의 문제, 그리고 생활교육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문제를 톺아보고자 한다.
먼저 두 학생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가. 첫 번째 학생 이야기
“교과서 그림을 보세요. 왜 여학생이 메일을 보냈을까요?”
“원조교제하려고요.”
“원조교제, 그 말이 지금 교과서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지, 그게 선생님 앞에서 할 말이야.”
“그냥 해본 소리에요.”
“집에서 아버지 앞에서도 그런 말 하나.”
“(갑자기 화를 내며) 에이씨, 왜 아버지를 연관시키고 그러세요.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냥 농담한 건데.”
“농담도 농담 나름이지. 여학생도 있고 그런데 그게 농담이야. 넌 수업 안해도 되. 교과서 두고 일어나서 복도로 나가.”
“(소리를 높이며 일어나서) 나가면 될 거 아니에요, 왜 아버지 이야긴하고 그래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선생님이 말 안해도 나갈거에요 나가. 에이X.”
나. 두 번째 학생 이야기
“부장선생님, 오늘 아침에 저희 반 교실 컴퓨터 모니터에 있는 낙서를 보고 아이들이 많이 놀랐어요. 일베 애들이 하는 거랑 똑같은 짓을 해놨대요. 섬뜩한 그림과 함께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글씨까지 남겨놓았어요. 어제, 5시 이후에 교실에 들어온 학생들 소행 같은데 절차에 따른 후 CC TV로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누가 그랬을까요?”
“얘네들이네요. 그런데 졸업생들 같은데 누군지 아시겠어요.”
“(신원을 확인하니 2학년 때 우리 반 학생이다. 전화를 건다.) 어제 너 학교 왔다 갔니. 교실엔 왜 들어갔어.”
“일 끝나고 저녁에 동아리 후배들 보러 친구들과 함께 들렀다가 궁금해서 교실에 잠깐 들어갔었어요.”
“그래, 교실 모니터에 낙서와 그림 남겨 놓은 사람이 누구야, 너니?”
“아, 그거, 장난으로 한건대요. 바로 지우고 나오려고 했는데 깜박했네요.”
“낼이나 모레, 아무튼 시간 되는대로 학교에 오렴. 후배들이 많이 놀랐고, 그 반 담임선생님도 많이 화나셨단다. 와서 진심으로 사과해야지.”
“아 네. 그럴게요.”
(그러나 그 이후로 문자도, 전화도 받지 않고 한 학기와 두 학기가 지나간다. 이 학생은 성적이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밝고 예의바른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하여 주변의 선생님들에게 칭찬받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함께 성경공부도 하고, 또 동아리활동으로 장애학생과의 통합활동도 한 친구다. 졸업 전에 공기업에 취업이 되어 성공사례로 홍보되었던 학생이기도 하다. 그 겉모습 때문에 내면의 가치관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2. 의미 없는 실패는 없다
“내면적인 변화와 관련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다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은총과 사랑이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을, 변화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 뿐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첫 번째 학생의 경우 담당 교사가 자괴감에 울며 학교를 그만두려 할 정도로 심적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었다. 담당교사는 선도위원회를 요구하며 강하게 처벌할 것을 원했다. 학생은 자신이 잘못한 부분은 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학부모 역시 학생 지도를 잘하지 못한 학교의 과실이라고 주장하여 학교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 후 시간을 가지고 학생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시도했고, 이 학생이 담당교사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담당교사는 그 사과가 과연 진정성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도위원회를 통한 처벌을 요구하지는 않고 그 정도로 마무리하고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 후 11월 초에 학교 상담실에서는 애플데이라는, 평소에 사과할 일이 있는 경우 상담실을 통해서 사과를 전달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위의 학생은 상담실을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과를 준비해서 담당 교사에게 찾아와 사과를 내밀며 그 때는 정말 죄송했다고 후회한다고 사과했다. 담당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도 회복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학생지도의 실패처럼 보였던 일이었지만 교사의 ‘스스로를 다스리려는 노력’과 ‘분노를 내려놓음’이 기다림을 통해 학생의 변화로 이어진 일이었다.
두 번째 학생의 경우는 담임교사와 학교 모두 성공사례로 여겼으나, 교사가 그 학생의 내면의 가치까지 내려가 부대끼지는 못한 경우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학생 내면의 깊은 가치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겉으로 드러난 성취만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모두 돌아보면, 교사 내면의 두려움과 수치로 인한 상처, 서로 다른 기대와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엇갈리는 말들, 그리고 그 말들의 불편함으로 인해 깨어지는 관계성, 무례해보이기 짝이 없는 학생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는 패러다임의 문제 등 어느 하나라도 문제를 바꿔가기 쉬운 것은 없다. 당장이라도 교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하면 더했지 교사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면 지금까지 교사로서 아파하면서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기회를 주었던 것은 실패인가. 설령 그것이 교사 내면의 흔들림, 관계의 파국, 변화하지 않는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이라는 실패를 가지고 왔다고 할지라도 그 동안의 공감하고 존중하려고 했던 시간과 노력이 다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3. 문제의 답은 학생 내면에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시에 절실하게 신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군분투하는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아름다움을 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어둠과 폭력이 지닌 힘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각각 8년, 14년, 17년 이상의 시간과 상황을 가지고 교사 앞에 온 학생들과 30년, 40년, 50년 이상의 인생을 가지고 날마다 학생들 앞에 서는 교사들이 서로 만나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 교실의 풍경이라면, 꼭 드러나게 행동이 변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실패처럼 보이지만 교사의 노력은 아이의 내면에 심어져 있다. 다만 이것이 아직 싹트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아직 싹트지 않았다면 학생의 또 다른 선택과 누군가의 영향력을 통해 언젠가는 싹트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싹트지 않은 것이 과연 실패일까.
교사가 할 수 있는 기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과 그 결과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 때문에 포기하거나 아니면 ‘바로 이거야’하면서 지나친 확신을 가질 일도 아니다. 변함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최소한 오해는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지 않겠는가. 설혹 오해가 있는 경우엔 이를 인정하고 수정하면서 나아갈 뿐이다. 학생 한명 한명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끝까지 연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교사의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에 기준을 둘 뿐이다. 교사는 그저 황폐화된 땅을 약속의 땅, 희망의 땅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작은 희망의 씨앗들로 나무를 심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글쓴이 소개 : 정동혁 서울 유한공고 영어교사, 회복적생활교육 연구회 연구원. 2012년 회복적 정의를 만난 뒤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현재 서울시 교육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회복적생활교육운동의 중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