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2001년 여름호 특집
삶에 기반을 둔 시의 당당한 표정
-배창환, 이중기의 시를 읽으며
김용락
1.
계간지 "창작과비평" 2001년 여름호에 발표된 고은 선생의 '미당 담론'을 두고 문단 일각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는 일간지들의 보도와 몇 문인들의 반론문을 보고 서점에 나가 창비 여름호를 사서 문제의 평론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은 선생의 문제제기는 원칙적으로 옳다. 가령 고은 선생의 글 가운데 특유의 비약적이고 현란한 수사가 우리말의 문법에서 다소 벗어난다거나, 선택한 미당의 시가 태작이라거나, 아니면 미당시 해석, 특히 '자화상'의 해석이 보다 섬세하고 풍부하게 진행되었더라면 하는 부분적인 아쉬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고은 선생의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다. 그리고 고은 선생의 문제 제기는 역사의식의 문제이고 삶의 태도의 문제이다.
'미당담론'을 두고 문단 일각이 요란스럽기는 하지만 사실 고은 선생의 주장은 우리 문단에서는 이미 하나의 상식이다. 이 상식을 두고 새삼 반발하는 쪽의 논리가 궁색하게 느껴졌다.
이번 논란은 문학을 대하는 태도, 즉 삶의 태도와 연관된 것이고 이 태도는 결국 각 개인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새삼 강조하는 것이지만 문학의 삶의 기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문학을 삶에 대한 단선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문학 특유의 어떤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장치를 고려하고, 문학은 단지 삶의 기록이라는 투박한 주장에 대해 보다 섬세하게 고찰해야할 어떤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종국에는 문학의 삶의 기록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문학을 삶의 기록으로 본다면 문학하는 자들의 삶의 태도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삶의 태도나 방식이 사적인 범위를 벗어나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함의를 가질 때는 더욱 그러하다.
고은의 '미당 담론'에서 드러나듯이 사실 우리나라 시인 작가들에게 이 삶의 태도는 의외로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지만 뜻밖에도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문인들은 허약하게 대응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태도는 90년대 우리 문학에서도 광범위하게 드러난다.
90년대 우리시는 하나의 뚜렷한 지형을 그렸다기 보다는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나타났다. 이는 지나간 80년대에 대한 질적 대타의식 대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전 시대에 대한 강한 변별의식과 1980년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적 방법론과 안목만이 새로운 연대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시인들의 인식 변화 때문이다. *주 1) 유성호, "한국현대시의 형상과 논리"(국학자료원, 1997) 450쪽
이런 시인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식의 전환 끝에 새로이 드러난 시단의 지형도는 도시적 해체시, 신비주의 시, 생태시, 선적 초월시, 내면시 등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지난 70-80년대 우리시의 주류를 형성했던 노동시, 농민시, 교육운동시, 여성운동시, 분단 극복 통일시, 민중적 서정시 등 리얼리즘 시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기획과 패션으로 치장한 시들이 대거 시단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 시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간 우리시의 주류를 형성했던 리얼리즘 시를 밀쳐내고 시단의 헤게모니 장악과 새로운 질서 수립이라는 목표를 염두에 둔 치밀하게 기획된 기획상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말 그대로 기획상품은 육화된 경험적 삶이 뒷바침 되지 않은 일회성 패션에 불과하다.
물론 시인이 시대나 상황의 변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리얼리즘 시만 써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의 변화에 따라 미학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변화에는 타당한 논리가 뒤따라야 한다. 좌측으로 질주하던 자가 아무 이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을 거꾸로 바꾸어버린다면 그의 질주에 신뢰가 주어지겠는가?
더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논자에 따라 80년대 현실과 90년대 현실이 달라졌다고 강변할 지 모르나 거리에 노숙자가 넘쳐나고, 무료급식자가 수천 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세상이다. 권력은 여전히 가난한 자 보다 부자들의 편이다. 학생들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끌려가는 사상적 금제 앞에 묶여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시만 화려하게 변신한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새로운 현실이 새로운 감수성을 요구한다고 외치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우리시의 모습이라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리얼리즘 시의 신봉자가 어느 날 갑자기 생태시인의 의장을 걸치고 나타났을 뿐 아니라, 초월과 내면이라는 더욱 괴상한 옷을 걸치고 나타나기도 했으며, 그간 숨죽이고 호시탐탐 주류편입의 기회를 엿보던 도시시, 해체시라는 이름의 시들이 본격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90년대 우리시의 모습이다.
이와 때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 문단에서 리얼리즘 문학론의 위기, 민족문학론의 위기가 광범하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리얼리즘 문학의 위기라는 이름의 이 유령은 실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이미 우리문단에서 하나의 기정사실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는데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의 도래에는 평론가들의 불성실과 직무유기도 한 몫 했다.
과연 90년대의 우리시에는 리얼리즘의 풍요한 전통이 사라지고 리얼리즘 시는 자취를 감추었는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리얼리즘 시는 우리시의 주류였다. 단지 평론가들과 문학 저널리즘의 외면 속에서 외롭게 고투하고 있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가령 90년대 후반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문단 일각을 달구었던 '권력형 글쓰기' '비평적 글쓰기' 논란은 비평가들의 불성실과 권력지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논의인데 비평가들은 이론비평에서뿐만 아니리 시 논의에서도 우리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지형 창조에 대한 조급성과 중심 지향성 권력의지 때문에 성실한 논의를 외면해 왔다. 비평가들의 불성실과 권력지향성에 대한 혐의는 90년대 후반 '권력형 글쓰기' 논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훨씬 전인 80년대부터 보여왔던 해묵은 관행인 것이다. 그 증거로 80년대 시 비평의 대상으로 소수의 시인만이 텍스트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즘 진영의 시인으로 김남주, 박노해 등 몇몇 시인에게만 집중되었던 비평의 쏠림 현상은 명백히 비평가들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이런 사실은 비 리얼리즘 진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 진영에서도 역시 이성복 황지우 등 일부에게만 비평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거론된 몇몇 시인들의 시적 성취가 여타 시인들에 비해 도드라 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평의 직무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우리 시의 가능성을 보다 풍부하게 발굴하고 해석해서 우리시의 질적 상승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비평가들의 특정 시인에 대한 쏠림 현상은 이미 권력화 되어있는 시인의 평가에 동승함으로써 스스로 중심이 되고 권력이 되고자하는 의지를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비평가들만의 책임은 아닐지 모른다. 음험한 출판상업자본의 논리가 이 땅의 비평가들을 결코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업적 출판자본은 비평가를 때론 상전으로, 때로는 머슴으로 부리면서 자신의 자본논리를 관철시켜 왔고,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자본의 상업주의 논리에 휘둘리거나 아니면 아예 자진하여 그 밑으로 들어갔다.
이 결과 저널리즘 스타 시인 몇몇을 제외한 다른 많은 시인들은 마땅히 받아야할 평가에서 제외되었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리시의 질적 빈곤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책임에서 비평가들은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80년대 당시에는 비평가들의 이러한 권력의지에 대한 비판보다는 외부의 적-군사 파시즘 등과 같은-에 대한 비판과 싸움이 워낙 시급했기 대문에 미처 내부의 문제를 들출 겨를이 없었고, 아울러 외부의 적에 집중해야하는 전술적 고려도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간과해온 측면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도 문학비평이 여전히 현실의 구체적인 삶을 방기한 채 머리로만 형상화되는 중심의 언어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90년대 내내 80년대의 후광이 사라지고, 비평가들이 리얼리즘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새로운 패션에 몰두할 때도 여전히 자신의 터전을 굳건하게 지키며 삶의 언어를 노래해온 시인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우리 문학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 지역에서 활동해 왔기에 이런 시적 태도의 지속적 견지가 가능했다. 문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처럼 온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 몸으로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공간을 가꾸어온 이들에게는 90년대라는 공간이 본질적으로 80년대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셈이다.
결국 주변부 혹은 반주변부의 문학적 가능성은 이것이 중심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본과 기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고, 그래서 새로운 가치가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는 지적*주2) 구모룡 "제유의 시학"(좋은날, 2000) 243쪽.
에서 처럼 중심의 현란한 문학행위들로부터 한 걸음 비껴 선 것이 되레 바람직한 문학을 할 수 있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를 구체적으로 증명해줄 두 시인이 최근 나란히 시집을 출간했다.
배창환의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창작과비평사, 2000)과 이중기의 "밥상 위의 안부"(창작과비평사, 2001)가 바로 그 시집이다. 이들은 각각 이미 "잠든 그대"(민음사, 1984)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실천문학사, 1988) "백두산 놀러 가자"(도서출판 사람, 1994)와 "식민지 농민"(해성, 1992) "숨어서 피는 꽃"(1995, 전망)을 펴낸, 만만찮은 시적 저력을 펼쳐 보인 중견 시인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우리문학의 중심인 서울에 살지 않고, 문학 저널리즘으로부터도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한 주변부의 촌시인에 불과할 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시적 포즈에 많은 이들이 부박하게 휩쓸리던 저 90년대에도 이 두 시인이 자신의 삶의 묵묵히 감당하면서 어떻게 리얼리즘시의 전통을 지켜왔는지를 밝혀 보려는 게 이 글의 목표이다.
2.
배창환은 81년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소위 전형적인 80년대 시인인 셈이다. 80년대 초반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무크운동, 지역문학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구에서 '분단시대' 문학동인을 결성했다. 이 동인은 이후 리얼리즘 시운동과 지역문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범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받고 시작활동을 하면서 1984년에 첫 시집 "잠든 그대"를 펴냈다. 시집은 해설을 쓴 채광석은 그의 시에 대해 어려운 시대의 어려운 삶을 끌어안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도시빈민의 형성과정과 고통이 시인 자신의 사적인 정서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인 자신의 고뇌가 개인으로 부터 사회로, 부분으로부터 전체로, 인식으로부터 실천으로 시원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점을 한계로 지적받았다.
채광석의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타당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 민주화운동, 민족운동의 정보가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민중의식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에게 채광석의 요구는 어떤 점에서 과한 요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순수문학의 본향처럼 알려져 있던 대구라는 지역적 정서를 감안한다면 배창환의 첫 시집은 비교적 시대적 과제에 충실한 편이다. 이는 시인 자신이 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태생적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
일찌기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일생을 불편하
게 사싱 저임금 근로자, 나와 내 형제들의 착한
아버지.....
나를 가난 가운데 있게 하시고 가난한 나라의
시인이게 하신 내 시의 발상지, ....
-'묘비명' 부분
인용시에서 알 수 있듯이 배창환에게 시를 있게 한 것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다. 이 아버지는 영양 봉화 청송으로 송진 따러 다니는 아버지이기도 하고('송진') 대구 변두리 지역인 원대동 달서천 가에서 국화빵을 굽는('하루살이처럼') 행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로 돈벌러 간 형('사우디아라비아') 야간여상에 다니는 삐삐같이 키만 멀쑥하게 큰 누이('누이') 등이 그의 시의 모태인 셈이다.
실체적 민중인 가족들이 시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무의미 시인 김춘수에게 대학에서 시교육을 받았던 시인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보이는데 이는 그 자신이 시대상황이나 현실에 대해 체질적으로 민감한 더듬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달리 말하면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유물론적 명제를 새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심중을 굳혀주는 시 한편을 보자.
우리는 하나씩 군대로 사라지거나 촌동
네의 풋내기 선생으로 잠적하였고 1980년 어느
날 제대 복학해서 맞이한 몇몇과 그해 5월을 남
도에서 보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말을 잊어
버린, 눈에는 번득이는 살기로 범벅이 된, 언제
나 얌전하기만 하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새로 소주파가 되었지만 이미 옛날의
우리는 아니었다 우리 중 아무도 속죄양이 된
친구는 아직 없었고 모두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므로 아무도 할 말은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 마시기 위하여 모였지만 술로써 허송해버린
그 장난 같은 세월을 되풀이 할 수 없음을 서로
가 묵시록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회개하기 시작
한 소주파였다
-'소주파' 부분
술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던 시적 화자가 회개하기 시작한 계기는 1980년, 그해 5월 남도 때문이다. 시적 화자를 시인 자신과 일치시켜 생각해본다면 시인 배창환은 5월 광주항쟁에 의해 비로소 본격적인 사회의식 정치의식에 눈 뜬 셈이다.
이런 각성은 자신의 생활근거지인 교육현장에서의 부조리에도 당연히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지는 운동장, 일렬종대로
엮인 벌거벗은 원주민 포로들 처럼
머리도 못들고 말없이 쪼그려 걸어가는 우리
반 계집아이들의 뒷모습은
내게는 너무나 처참하고 낯익은 풍경이다
십 년 전 이십 년 전 내 고등학교 교련시간이
나 국민학교 뜀틀 시간
(그때 나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 체
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보통학교 시절 큰 칼을 찬
왜놈 선생 앞의 아이들
모두 한 다발로 세월 구분 없이 얽혀드는 희
한한 풍경이다
-'오리걸음'부분
학교에서 흔히 목격되는 체벌의 일종이었던 오리걸음을 두고 시인은 군사문화의 잔재인 교련을 떠올리고, 또 이 군사문화의 원뿌리는 일제 파시즘이라는 사실까지 자연스럽게 상상력이 연결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이 출간된 때가 1984년이고 보면 당시로서는 아직 전교조운동은 물론 그 맹아였던 Y-중등교사회운동도 일어나지 않을 때이다. 그럼에도 배창환은 교육현장의 억압과 군사문화의 잔재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인다.
교육현실에 대한 이러한 날카로운 통찰은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에서는 보다 확대된다. 1988년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은 제목부터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이다. 소위 말하는 교육시집인 셈이다.
마지막 각서를 써 주고 오랜만에 사철나무 푸른 잎을
본다. 잎이 하나 둘 잠깐 내린 빗방울에 떨어져 제 발바
닥을 덮고 있다. 그 위에는 벌써 꽃잎을 다 떨군 목련이
한창 푸른 지붕처럼 덮여있고 참 푸른 하늘은 또 그 위
에 있다. '다시는..... 않을 것을 맹세한다' 라고는 못쓴
다고 버티다 '서약한다'로 고쳐쓰고 볼펜을 던지고 나니
갑자기 시원한 공기와 하늘을 마시고 싶어진다.
종이 한 장, 내 목에 칭칭 감기는 올가미임을 나는 안
다.
-'각서 쓴 날' 부분
교육현장의 모순에 눈 뜬 교사에게 일차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각서'이고 다음 단계는 해직일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을 낼 때까지는 아직 해직의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상태이다. 이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부분적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이 입지를 넓혀 갈 때이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되레 억압이 강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교조가 합법화된 오늘날 이 시를 읽으니 새삼스럽다. 전교조가 오늘의 위치에 오기까지 많은 교사들의 피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새삼 상기되는 시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은 1994년에 나온 "백두산 놀러가자"이다. 교육운동시와 시집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시로 시집이 구성되어 있다.
낮은 담장엔 아직도
개나리가 피지 않았나 봐요
온 세상이 빛살 일렁이는 봄일 때도
그곳은 아직 응달입니다
영세자본이 세운 사립 여학교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의 학교에는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가 바보라는 소문입니다
무지한 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선생님들이 더 캄캄하고
바보라는 소문이 깔렸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은 원래 한 몸인데
서로가 제 살을 뜯어먹듯이
감시와 원망, 분단된 철망을
입과 눈으로 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는 선생님을 고발해야 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적으로 알아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밟은 적도 있답니다
교장은 일류 대학 못 들어가면
우리 학교 졸업생이 아니라고 다그치고
분한 아이들은 울면서 가슴을 쳤다 합니다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의 학교' 부분
몇 해 전이던가요. 우리 2학년 1방 교실 뒤에 커다란
백두산 사진이 걸려 있었어요. 천지에는 동해 푸른 물이
넘실거리며 담기고, 넉넉한 기운으로 솟아오른 영봉 너
머 북만주 노을이 끝도 없이 흘러가는 사진을 보면서,
아이들도 나도 아침저녁으로 벅차 오르는 밀물 같은 그
리움 하나씩 키우며 살고 있었지요.
그 서슬 퍼렇던 시절, 교실에 백두산 사진을 걸었다고
쫓겨난 선생님도 정말 있었어요. 나도 그럭저럭 낙인 찍
힌 문제 교사가 되어 여고에서 여중으로 쫓겨다녔지만,
교실에 걸린 백두산 사진은 생이별한 우리 아이들과 나
를 언제나 같이 있게 해주었어요. 아이들이 가끔 보내
온 편지 속에서도 백두산은 살아 크고 있었으니까요.
-'백두산 사진' 부분
교육운동의 와중에 일부 교사들은 해직되고 남은 교사들과 학생들은 서로 불신하면서 반목하고, 영세자본가 출신인 학교 경영자는 오로지 일류대 진학을 위해 아이들을 다그치고, 그 다그침에 동원된 교사들은 속수무책인 채 모두가 바보가 되어버린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게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의 학교'이다. 시적 화자는 학교 바깥으로 쫓겨난 처지임에도 담장 안에 남아있는 학생들에 대한 진한 애정을 보이고, 교사와 학생들이 어두운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6.15 선언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고 부분적이긴 해도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기틀이 마련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백두산 사진' 같은 시는 하나의 코메디 같은 사실이다. 교실 뒤 게시판에 백두산 사진을 붙였다고 교사를 용공으로 몰아 내쫓았던 참혹했던 현실은 되레 배창환 시인에게 "선생이 노동잔 줄은/해고되고 나서야 알았다//선생이 이 땅에선 스승이 아닌 줄은/개 끌려가듯 끌려간 교원노조 여선생의 머리카락에/뒤엉킨 피를 보고 알았다//선생이 선생이 아닌 줄은/수천의 목이 잘려나가도 끄떡도 않는 이 철면피한 세/상을 보고 처음 알았다"('각성' 전문) 와같은 깊은 각성을 주었다.
학생들이 지켜보는 교문 앞에서 교사들이 학교와 공안 당국이 동원한 불량배들에게 폭행당하고 끌려가던 현실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고통은 그대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맞을 수록 단련된는 강철처럼 이러한 억압적이고 불의한 현실과 싸워온 시인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한 단계 더 높은 정신적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눈덮힌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19년만에 불모의 당 대구 일원에 내린 눈도
역시 아름다웠다
기차를 타고 내려올 수록
세상을 더 깊고 두껍게 덮어오는
하얀 눈발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평등하게 겹겹이 덮어버리는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손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세상에서
발자국을 찍어내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전에는 사람이란 그저 작고 추하기만 한 줄 알았다
나이 먹어 불혹에 한 발 다가선 지금
내게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깊이 이해된다
핍박받는 사람이
핍박을 이겨내려고 싸우면서도
가장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그걸 나는 조금씩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눈 내리는 세상만큼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것이고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가 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전문
시인 자신의 미학관이 잘 드러난 시이다. 이 시를 두고 시집 해설을 쓴 김진경은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시라고 평한 바도 있지만 불의와 갈등의 인간사에서 결국 그 모순의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자가 아름답다는 인식은 소중한 것이다. "전에는 사람이 그저 작고 추하기만 한 줄 알았다"가 불의한 현실과의 싸움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모순 덩어리로 느껴지는 세상을 껴안을 수 있고, 그 모순된 현실과 핍박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여 극복하려는 인간의 고투가 더욱 인간답게 해준다는 이 신뢰의 시학은 배창환의 전체 시를 관통하는 시정신이며, 바로 낙관적 리얼리즘의 시정신인 것이기도 하다.
배창환은 네 번째 시집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을 지난해 펴냈다. 시집의 발행날짜는 2000년 8월이지만 90년대에 쓰여진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집에 대해 나는 "부조리한 현실과의 싸움에서 벗어나 자연이나 인간 본연의 문제로 회귀"하는 '돌아옴의 시'라고 밝힌 바 있다. *주3) "녹색평론" 2000년 11-12월 통권 55호(녹색평론사, 2000. 11)
이 시집에는 배창환이 자신의 초기 시에서부터 보여왔던 이농과 도시빈민의 삶, 전교조 해직과 복직 과정, IMF 현실, 통일문제 등 현실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포괄되어 있다. 한가지 특징은 이전의 시집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소시민적 자기분열이나 현실에 대한 회의가 사라지고 현실을 대하는 시각이 당당한 풍모로 일관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이 시인이 현실과 부딪치고 싸우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신념이 굳어져 하나의 사상으로 발전했다는 증거이며 아울러 현실을 보는 눈이 그만큼 크고 부드럽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집이 여전히 첨예한 현실문제에 대해 시선을 늦추지 않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시집에 비해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넓어진 것이 사실이며 다소간 시적 변화도 감지된다. 그 시적 변화의 단초는 자연에 대한 친화적 정서이며,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이다.
배창환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현실과의 철저한 싸움 끝에 얻어진 것이다. 여느 90년대 생태시와 구별되는 점이 바로 여기 있다. 불의한 현실 앞에서 내내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의 변화를 주장하면서 생태문제 환경문제를 들고 나온 기획시 와는 달리 싸움 끝에 비로소 가 닿은 정신적 성과라는 데 그 진정성이 느껴진다. 따라서 그의 자연에 대한 순응이나 귀거래는 현실 순치가 아니라 보다 깊은 세계로의 발전이라 할 만하다.
열두 살, 얼음 녹고 뻐꾸기 울던 봄날,
화물차 짐칸에 실려
점점이 멀어지는 고향산천 떠났다가
마흔 둘, 빈손으로
결국 돌아오다.
자식놈 둘
시집 서너 권 안고
뒷산에 오르면 가야산 소바우도 보이는 앵무동 마을
아이들 가르칠 학교 양지바른 교실도 잃고
몸 기댈 한 이랑 전답도
참외 토마토 비닐하우스에 몸팔 힘도 없이
물 바람 햇살 흙 찾아 예까지 돌아 왔느니
조석으로 토종닭 똥개 모이 주어 키우고
배추 상추 푸성귀 일구어보나
인생 반쪽을 더 산 나이에
신출내기 선생 대처럼 일 아직 손에 낯설고
한 다리 낙동강 저 건너
흙먼지 자욱한 세상에 걸쳐 있어라.
-'귀거래(歸去來)' 전문
전교조 운동으로 해직 당한지 10년,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아들 둘과 시집 서너 권을 전재산으로 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화물차 짐칸에 실려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이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이다. 해직 교사이니 아이들을 가르칠 교실이 없고, 몸과 마음이 피폐했으니 노동력을 팔 힘마저 없다. 더군다나 한 다리는 아직 도시적 삶에, 투쟁적 현실에 담궈두고 있다. 귀거래이긴 하되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의 이런 엉거주춤한 귀거래에는 다음과 같은 끝나지 않는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배추밭 만들려고 햇살 따가운 날
바랭이풀 자욱한 풀밭에 호미를 들이댄다.
깡마른 땅을 찍어나가면
어떤 놈은 허리가 잘려 나오고
뿌리 근처까지 걸려 나오는 일도 있지만
실 뿌리까지 온전히 딸려 나오는 법은 없다
당기는 힘에 저항 못하고 올라올 경우에도
마지막 순간에는 후생(後生)을 위해
한 올의 잔뿌리라도 남겨두고 와서
죽은 체하는
저 풀,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 이 풀들의 실체,
우리는 이 풀뿌리와의 전쟁을 치러온 셈인가
젊은 날 우리는 이 풀뿌리를 비유하여
한줌밖에 안 되는 권력이라 했다.
한줌,
아니었다.
그건 거대한 뿌리였다.
아무리 파뒤집고 찍어대도 도 자욱해질 이 풀밭
저 거대한 뿌리를 향하여
때로는 호미를 던져버리고 싶은
나를 향하여
꼭꼭 찍어가야 할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전쟁.
-'풀, 전쟁' 전문
풀밭에서 김을 매면서 떠오른 착상을 시로 전환시킨 시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싸우는 대상은 풀밭의 풀이면서 또 풀뿌리로 비유되는 세상의 불의이기도 하다. 그는 10여년의 싸움에서 적의 실체가, 불의의 실체가 얼마나 강고한 뿌리를 갖고 있는 지 깨달은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악의 뿌리가 깊을 수록 시인의 전의도 더욱 커지고 있다. 물론 싸움의 와중에서 때로는 호미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그러나 그 싸움이 결코 결코 멈출 수 없고 끝나지도 않을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그의 현실인식은 정당한 것이고 그의 시적 능력을 드러낸 징표라 할 수 있다.
가령 오늘의 현실을 보라. 형식적 민주화가 진전되었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남북정상간에 대담도 있었지만 여전히 현실은 만성적인 부패와 악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부의 편중 현상이 강화되고, 노숙자와 무료급식자의 줄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을 앞에 두고 싸움에 끝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창환의 시가 도달해 있는 현실 인식이야말로 리얼리즘 시정신의 근본이라 할 수 있고, 이 정신은 현실을 안이하게 파악하지 않고 끈질기고 집요하게 대결해온 그의 삶의 자세에 기인한 것이다. 이 삶의 자세에 대해 정대호는 '지사적'이라는 이피셋트를 붙이기도 했는데 배창환의 시가 90년대의 많은 다른 시들과 달리 부박한 일탈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정대호의 이 지적은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이중기 시인의 물적 토대나 문학적 환경은 배창환과 거의 같다. 배창환이 지식인 계급인 교사 출신 시인이라면 이중기는 철저한 농삿군 출신 시인이다. 현재 경북 영천에 살고 있는 그는 고재종의 지적대로라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농촌, 농민시를 쓰는 사람"("밥상 위의 안부" 해설)이다.
그는 지난 1992년 "식민지 농민"이라는 시집을 내면서 시단에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시집 제목에서 이미 이 시집의 문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악화된 상태이지만, 이 시집이 출간되던 90년대 초는 우리 농촌은 내부 식민지였다. 외세 종속적 시스템으로 나라 전체는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상태로 전락한지 오래이고 그 식민지 상태에 준하는 나라 안에서는 조차 농촌은 또다시 도시의 식민지가 된 지가 오래 되었다. 이런 현실을 다음 시는 잘 보여준다.
하루 종일 불안한 예감에 조바심 치며 마늘 파종을
마쳤습니다 수상한 세월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쌀값보다 커피 한잔 값이 더 비싼
세월이 왔습니다 눈 내리는 거리마다 집집마다
속수무책의 점령군이 진주해 와 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이 점령군의 강철군화에 짓밟히며
겁탈 당해도 정부군은 팔짱끼고 먼산 봅니다
成下之盟입니다 농산물수입 완전 개방입니다
눈물 한 방울도 없이 군주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밖에서
제국주의의 말 발굽아래 무릎 꿇고 도장
찍었습니다 치욕의 시대입니다
몽고나 거란족의 침입보다 암울한 세월이 왔습니다
식민지의 백성이 된 이 땅의 농민과 농업을 어찌합니까
곳곳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정부군에 의해 무참하게 거세
당합니다 이백 년, 삼백 년 세거지를 버리고
망명길에 오르는 저 백성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식민지 농민입니다
치 . 욕 .의 . 시 . 대 .입니다
-'絶陽歌-식민지 농민' 전문
산업화는 기본적으로 농촌의 침탈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산업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은 좀 심하게 말하면 자원 공급지와 상품 소비지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 원리는 제국주의적 부유국과 제3세계 가난한 나라와의 역학관계와 같다. 국내적으로는 도시로부터 약탈당하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수탈 당하는 이 이중의 수탈 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결국 이삼 백년 세거지를 떠나 도시 빈민이 되는 길뿐이다.
부자들과 외세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식민지 약소국가의 정부는 먼저 알아서 기느라고 제국주의의 이익만 받들 뿐 자국내 농민들의 봉기는 앞장서 무참하게 거세시킨다. 이것이 90년대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쌀값보다 커피 한 잔 값이 더 비싼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농촌현실에 대한 이중기의 인식은 두 번째 시집 "숨어서 피는 꽃"(1995)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시집에는 첫 시집에서 보다 '슬픔' 이나 '쓸슬함'과 같은 정적 언어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데 이것은 첫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분노가 어느덧 체념의 단계로 접어든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슬픈 오늘
쌀 두 되 팔아 양말 한 켤레 사 신고
쌀 세 되 팔아 이발하고
쌀 세 가마니 팔아 산 양복을 입고
저무는 서산처럼 왼쪽 어깨 기울여서
맞선 보러 가는 저 총각 뒷모습
캄캄한 뒷모습
슬픈 새벽
오늘은 영천 장날, 서둘러야 한다
쌀 열 가마를 팔아야 막내아우 대학등록금이 빠듯하다
망할 놈의 가래는 목구멍에 걸려 그렁그렁할 뿐
기침 한 번 시원하게 터져 나오지 못했다
고작 이천 여 명의 미국의 大農을 위해
조선의 농민들이 희생의 제물로 간택되었다니
이 세월은 아무래도 거푸집 같아 쓸쓸하다
내 삶이 거푸집 같아 더욱 쓸쓸하다
-'슬픔시' 부분
오늘도 식당밥으로 점심을 이우셨군요
은유와 상징으로 맛보신 농촌은 어떠했나요
표고버섯 고사리 도라지 바지락에
된장국 곁들인 삼치구이 백반을 드시다가
버릇처럼 간혹 손이 간 김치 몇조각이 혹
그대 입맛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얼핏 젖갈 냄새 풍기는 김치쪼가리
걸쳐먹은 밥 몇숟갈에서
몸파는 어린 조국의 안부를 들었습니까
-'밥상 위의 안부' 부분
마지막 시는 최근 출간된 이중기의 세 번째 시집 "밥상 위의 안부"(2001)에 실린 시이다. 이미 서양식단화 되어버린 밥상에 대한 야유를 통해 오늘의 농촌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중기는 첫 시집 출간이래 10년 동안 세 권의 시집을 냈다. 근래 시집에 와서는 수사학이 좀 더 세련됐다는 점 외에 문제 의식은 첫 시집이나 세 번째 시집이나 같다. 이것은 그의 삶이 변함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 현실, 특히 농촌 현실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되레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중기나 배창환이 하릴없이 중심만 쳐다보고, 중심의 패션만 좇았다면 과연 이렇게 진솔하고 당당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날카로운 역사 의식과 현실을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자기 앞에 놓인 삶의 조건과 그 삶의 부당한 억압에 맞서 회피하지 않고 고투한 결과가 바로 이 두 사람의 시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 기반을 둔 당당한 표정의 시가 90년대뿐 아니라 2000년대에도 여전히 우리시의 주류적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