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김종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김종대
한줌 빛에도 눈이 부시다
경기전(사적 339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 경기전 입구 전경 ▲ 경기전 입구에 있는 하마비
▲ 하마비 측면 후면 전경(1614년에 세웠으며, 1856년에 중각) 경기전 내부로 들어서면...
▲ 경기전 내부 전각 전경
▲ 전각 좌측에 걸린 어진 ▲ 전각 중앙의 태조 어진 ▲ 전각 우측에 걸린 어진 조선 태조왕 이성계상(보물 931호)
조선왕조의 태조인 이성계(1335∼1408)의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다. 고려후기에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등을 지냈으며,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왕조를 일으켰다. 물론 모두 영전(影殿)이나 진전봉안용(進展奉安用)이다. ·영희전(永禧殿) ·남별전(南別殿) 등에 봉안되었다. ·조중묵 ·조석진 ·채용신 등이 있다. ( )안의 연대는 모사년대(模寫年代)이다. (翼宗御眞)(1826), 철종어진(哲宗御眞)(1852), 고종어진(高宗御眞)(1891 ·1899 ·1901 ·1909) 등이다.
▲ 고종 어진 ▲ 정조 어진 ▲ 세종 어진
▲ 영조 어진 ▲ 철종 어진 ▲ 순종 어진 경기전 내부에 전시된 가마...
경기전 우측으로 나가면...
▲ 이름 모를 석조물 ▲ 조선왕조실록 보존 기적비 ▲ 전주사고(1991년 복원) 예종대왕 태실 및 비(전북 민속자료 26호)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의 자손이 태어났을 때 그 탯줄을 모셔두는 곳을 이르는 것으로, 그 형태는 승려의 사리탑과 비슷하다. 옆에 태실비가 함께 놓여 있다.
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비석 뒷면의 기록에는 조선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워두었다고 적고 있다. 경기전 좌측에 위치한 부속 건물
조경묘(전북 유형문화재 16호)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 부부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 영조 47년(1771) 세웠다. 철종 5년(1854) 경기전을 고칠 때 같이 수리하였고, 고종 31년(1894) 위봉사에 잠시 모셨다가 이곳으로 다시 모셨다. 위패는 영조 47년에 왕이 친필로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경기전 안내도
경기전 위치도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 지도 중앙의 화살표가 있는 넓은 부분이 경기전입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에 의하면 태조어진(太祖御眞)은 모두 25점이나 그려졌는데, 면복본(冕服本) ·정건본(幀巾本) ·익선관본(翼善冠本) ·곤복본(袞服本) ·황룡포본(黃龍袍本) ·입자본(笠子本) ·마좌본(馬坐本) 등이다.
이들 태조어진은 문소전(文昭殿) ·선원전(璿源殿)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영숭전(永崇殿) ·목청전(穆淸殿)
태조어진 봉안에 참여한 화가를 보면 윤상익 ·조세걸 ·이재관
현재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어진은 고종 9년(1872)에 조충묵이 모사한 익선관본이다. 물론 현재 유일의 태조어진이다.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 놓은 청포를 입고 용상에 정좌한 태조의 모습은 공식적인 어진도상형식(御眞圖像形式)으로 그려졌다.
참고로 현존하는 조선왕조의 어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어진(1872), 모조어진(模祖御眞)(1714 ·1744), 익종어진
경기전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태실은 예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으로,
* 하마비(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태조로에서 경기전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 우선 하마비를 만나게 된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진
풍상에 닳은 비석. 그 앞에서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울러 경기전 내부로는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리라.
눈썰미가 제법 있는 사람이라면 하마비를 떠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가 짝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시라……,
오랜 풍상도 차마 다 깎아내지는 못하고 남겨둔 그 귀한 눈빛을. 그 눈빛에서 세월의 무상함이나 뼈아픈
역사의 그늘을 보더라도 엎드려 통곡할 필요는 없다. 혹자는 우리 조선 하늘 같이 맑고 깊은 그 눈빛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비쳐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이 달라져 신분의 귀천이 사라진 지금, 하마비 앞에서 잠시 속세의 나를 버리고
옛 시간 속으로 회귀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기전. 조선 건국과 함께 왕국의 위용을 세우기 위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태조의 어진은 전주뿐만이 아니라 경주와 평양 등지에도 봉안해 두었다.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고 전주는 경기전이라 한 것은 세종 24년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화마로 태조 어진은 조선 산천을
떠돌기도 했고, 병자호란때는 무주 적상산성까지 치욕의 원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가까운 위봉사로 피난가는 수난의 세월을 건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애써 상기해서 무엇하랴! 과거의 시간은 소멸하고 소멸하여 무극의 지점에
고스란히 모여있는 법.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알아두자.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은 1872년(고종9년) 원 어진이 너무 낡아 불태워서 경기전 뜨락에 묻고
새로 모사한 어진이 봉안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999년 훼손을 염려하여 또 다시 어진을 모사하여
전시하고 원 어진은 영구 보존하고 있다.
숱한 발길에 닳은 세월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앉힌 문턱을 넘어 경기전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높이 선
홍살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官衙)·능(陵)·묘(廟)·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대개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넣었다. 홍살문에 단청의 오방색 가운데 붉은 색을 칠한 이유는 태양을 숭배하던 의식에서
비롯했다. 태양의 색은 음양에 있어 陽의 색인 붉은색이다.
붉은색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준다는 이유인데, 동짓날 팥죽을 끓여먹는 풍습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홍살문 가운데에는 삼지창이 만들어져 있는데 삼지창의 목 부분에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다.
삼지창 역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홍살문은 경기전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악한 마음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무심코 지나가버릴 일이 아니다. 태조 어진에 대한 경의와 엄숙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홍살문을 지나가는 동안이라도 잠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 줌 빛에도 눈이 부시다
가지런하게 놓인 포석(鋪石)을 따라 걷는 동안 저절로 발걸음이 단정해짐을 느낀다.
문턱을 넘을 때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문의 처마가 낮아서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연유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홍살문을 지나오는 동안 내 안에서 조그만 변화가 생겼던 탓이다.
마음이 바로 서고 심기가 숙연해졌던 것이다.
아마도 경기전 뜨락에 고인 시간의 밀도가 저절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경기전 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전의 뜰은 그리 넓지 않다.
깨끗하게 비질이 된 뜨락에는 시시각각으로 처마 그림자가 그 모양과 색을 달리한다.
그늘이 있어 오히려 한 줌 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곳.
정전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 형식을 갖추었다.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 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두었다. 이 첨각 기단의 동 ·서 ·남면에는 각 1개씩 계단을 두어 벽돌을 깐 보도와 연결하였다.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선비들의 두루마기 자락처럼 단아하고 곧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대개 태조 어진 앞에서 태조의 풍모를 감상하는 것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젖혀들고 천장을 올려다볼 필요가 있다. 마치 화려한 색깔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새떼의 비상으로 어지러운 단청의 군무(群舞) 앞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지게 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형상화 한 삼태극이 대들보를 지탱하고 있다.
대들보가 경기전 정전을 떠받치는 것만 아니라 이 나라의 오랜 역사를 지탱해 온 근본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기전 정전에는 태조 어진뿐만 아니라 영조, 정조 고종 등의 어진도 봉안되어 있다.
물론 근래에 모사한 어진이지만 태조 어진과는 색다른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원래 경기전에는 많은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있고, 서남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과 북동쪽에는 별전과 조산(造山) 등이 있었다. 그것들은 세월과 함께 소멸하였다.
그 많은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경기전의 위용과 규모에 압도당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지금 이대로의 경기전 모습이 소박하나마 인간적이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최근에 몇 채의 부속 건물을 복원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갑론을박의 세평이 있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복원된 건물이 아직 기존의 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세월에게 맡겨두자.
아직 우리는 경기전 뜨락에 선 은행나무 한 그루만도 못하지 않은가?
경기전을 지켜본 세월의 길이에서 만큼은.......
아! 전주사고여…
그 문을 열고 나오면 오른쪽에서 소소한 살랑거림이 있다.
대숲. 대나무의 크기로 보아 식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자잘한 식재들이 경기전의 숨겨진 매력이다.
대 숲을 지나올 때는 화려한 단청에 피로한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어두어도 좋다.
대숲을 오른편에 세워두고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주사고
(全州史庫)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전주사고에 대해서는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춘추관과 충주사고, 성주사고에 있던
실록들이 잿더미가 되었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 두기를. 만약 전주사고의 실록마저 불에 타 없어졌다면
조선의 역사 자체가 한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지금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텅 빈 전주사고를 보면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조선의 역사를 담아냈던 전주사고가
무심하게 비어 바람소리만 가득해서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실록의 사본이라도 채워 넣는다면
전주사고를 지켜냈던 손홍록, 안의 등 많은 지역민들의 충정을 뼛속 깊이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경기전 뜨락에 다시 서게 된다.
그곳에서는 은행나무 그늘에 외람되게 서 있는 예종대왕 태실과
비를 만날 수 있다. 원래 완주군 덕천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북방으로 옮겨졌다가
1970년 경기전에 옮겨 놓은 것이다.
태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사각의 기단석 위에 상하가 약간 긴
구형의 돌을 올리고 팔각의 옥개석을 덮었으며, 그 둘레를 팔각형의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실의 총 높이는 234cm, 옥신 둘레는 255cm, 난간둘레 1,540cm, 난간주의 높이는 108cm이다.
태실비는 귀부, 귀신, 이수를 다 갖추고 있는데, 거북이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형태의 돌 위에 세워졌으며
윗부분은 용을 조각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는 높이 1m, 폭 46㎝, 두께 21㎝로서 네 모퉁이에 각을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이라고 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비의 건립 연도가 새겨져 있는데,
선조 11년(1578)에 세웠으며, 영조 10년(1734)에 고쳐 세웠다고 되어 있다.
예종대왕 태실 앞에서 잠시 시간을 잊고 경기전 뜰을 거닐어볼 필요가 있다.
우람한 은행나무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맥박을 느껴보기 위해서다.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이 뜨락에 새겨지고 또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렇게 다져진 뜨락이
고스란히 역사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을 나무는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는 낡은 기와의 처마선을 오래 바라보기를 희망한다.
처마선이 끝나는 곳에서 곧장 허공으로 내질러 시선을 옮기면……
조선의 마음씨같이 맑고 깊은 하늘 끝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홍살문
조경묘 홍살문
홍살문과 외삼문
어진각
조경묘
조선왕조실록비
종 목 : 사적 제339호
면 적 : 49,590㎡
지 정 일 : 1991.01.09
소 재 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풍남문에서 동쪽으로 150m 쯤 가면 울창한 숲속에 고색이 창연한 경기전이 나온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이성계 어진(왕의 초상화)과
유형 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조경묘가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1410년)에 창건하였다.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 전화를 피해 아산과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어 다시 돌아왔으며
동학혁명 때는 위봉산성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기전에 인접한 북쪽에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판을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판을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
주변에 풍남문, 전주객사, 한벽당, 전주향교, 오목대, 이목대, 남고산성 등이 있다.
[경기전기호]
풍남문에서 동쪽으로 150m 쯤 가면, 고색이 창연한 경기전이 나온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경기전과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조경묘가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창건하였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태조의 어용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년)에 건립되었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은 창건 당시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네 곳에 있었던 태조 어용전은 전부 소실되었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내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 때에 그 서쪽을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인 수상소학교를 세움으로써 경기전 절반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으며, 부속된 건물은 이때 거의 철거되었다. 현존 건물인 전각은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서,
전면에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등이 있다.
경기전에 봉안된 어용은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년(1442년)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은 고종 9년(1872년) 9월에 개화한 것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내장산에 피난하였다가 정읍, 태인, 익산, 용안, 임천, 은산, 정산, 온양, 아산을 거친 다음
강화도, 안주를 경유하여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되었다.
그 후 어용은 여러 번의 수난을 겪었는데, 즉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으며, 영조 43년(1767년)이른바 정해대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긴급 피난한 일이 있었으며,
고종 31년(1894년)에는 동학군의 전주입성으로 한때 위봉산성에 피난하기도 했다.
경기전에 인접한 북쪽에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패를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
첫댓글 역사 공부 제대로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