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삼릉을 다녀와서
파주 삼릉,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132만 3105m (4만239평)에는 음택이 세개.
공릉(조선 제8대 예종비 장순왕후의 능), 순릉(제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능), 영릉(추종 진종과 효순소황후)가 잠들어 계신곳, 꽃으로 치자면 피어나지 못하고 맺힌 봉오리로 스러진 분들이다. 17세, 19세,10세에 세상을 떴다.
공릉은 조선 8대 예종(1450~1469)의 비 년장순왕후 추존)) 로 세자빈 이던 15세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17세에 세상을 떠난다. 2년 뒤 한백윤의 딸이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으로 들어가 예종 즉위후 왕비로 책봉되는 그녀가 안순왕후이다.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1457년 까닭없이 죽자 어린 8세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11살 되던해인 1460년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고, 세조의 병이 깊어지자 19세에 조선의 8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나 재위기간이 14개월이었고,20세인 1469년 11월 28일 자미당에서 흉하였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1468년 즉위부터 1469년 붕어 할때 까지 모후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하였다.
순릉은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의 비 공혜왕후 한씨 1456~1474)의 능으로 세조 12년인 1467년 혼인하고 단명한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는데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와 친자매지간으로 한명회의 네딸중 네번째 딸이다.
동생이긴 하나 왕세자비로 죽은 언니와 다르게 왕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능도 좀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석물도 더 많이 조영되었다. 세째 언니인 장순왕후가 인성대군을 출산한 반면 동생인 공혜왕후는 자녀를 낳지 못하고 19세에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자매가 장수의 운명을 타고 나지 못한 것이다.
영릉의 주인은 (추존 진종과 그의 효순왕후 조씨(1715~1751)의 릉으로) 영조의 장남으로 7세에 세자로 책봉된 뒤, 10세 때 장가가던 날 설사를 앓기 시작해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다. 장남이 백약이 무효로 사경을 헤매자, 영조는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그를 끌어 앉은 채 "왕위라도 내놓을 테니 세자만은 구해달라"고 울부짖었다.
진종은 정조의 양아버지이며 장조(추존)의 이복형이다. 비 효순왕후는 풍등 부원군 조문영의 딸로 영조 3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혼인하고 영조27년 (1751) 37세 창경궁에서 돌아 가셨다. 그가 종묘사직과 억조창생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조선 말기 7대 황제 중 첫 번째인 진종소황제로 추존돼 파주 삼릉에 누워있다.
정조 즉위년(1776) 왕후로 순종 진종대왕으로 추존하면서 원이 릉으로 격상됐고 융희2년(1408)에 효순왕후로 추존된 부부 합장의 릉이다. 이전 왕과 왕비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해 황실 계보를 세우려던 고종의 의지로 "황제"로 격상된 것이다.
이 세주인공을 조연으로 연출한 진짜 주인공들이 계시니 그들은 다름 아닌, 수양대군으로 불리다 왕위에 오른 세조,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부친 한명회, 조선의 최장수 왕인 영조. 이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리딩을 하신 풀소리님이 편안함을 주는 이곳을 좋아한다고 하시니 동행한 들메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공감. 이곳의 주인공들이 때가 묻지 않은 "어린영혼'들이 계신곳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숲을 오르며 보니 산세도 그리 높지 않아 산으로도 江이 흐르나 하는 착각을 하게 했다.
골짜기를 흐르던 가녀린 물줄기가 냇물을 만들고 냇물이 강물되어 휘감는 뱀처럼 굽이굽이 바다로 가는데, 이곳에 영면한 어린 영들혼을 위해서라도 혈해(血海)를 이루며 흐르는 그들의 부친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할것 같다. 피묻은 손으로 이룬 권력 찬탈을 보고 성장한 이들이 수를 누리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의 저주를 운운 하지 않더라도 당연지사 아니었을까!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능침공간을 오르내릴수 없게 되어 능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이 있는 곳에서 저곳이 영릉, 이곳이 순릉 이구나 가늠 할 수 밖에 없었다.
풀소리님은 이곳에 묵호와 문인석들이 다른릉에 비해서 크기가 작다고 하셨는데 확인은 하지 못했다.
예약을 하면 해설사와 함께 릉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저 릉의 위치만 보고 갈 수밖에. 왕릉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500년 사직의 영욕을 통해 현재와 미래로 향하는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보물창고(寶物倉庫)를 미리 들여다 볼수 있는 거라 하겠다.
6월, 초여름이 시작되는 삼릉의 숲은 고요기만 하다. 공기는 달디 달고, 내리쬐는 햇빛을 키 큰 참나무가 여기 까지만이야 하듯 가로 막는다. 이곳은 소나무가 아닌 참나무 숲이다,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갈참, 떡갈, 신갈(산에),졸참 , 굴참나무등 여섯종류를 합쳐 "참나무의 육남매' 라고 부른다.
숯은 참나무 숮을 으뜸으로 쳤으며, 나무결이 아름다워 가구와 마루바닥을 까는데 많이 사용하며 결을 따라 쪼개기가 쉬워 너와집 지붕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요즈음은 표고버섯 기르는데 쓰인다. 옛날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도토리 열매가 쌀대신 허기를 채워 주었는데 지금은 웰빙식으로 인기가 대단하다.
상수리 나무에 얽힌 이야기 하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비가 없었던 당시 임금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양이 곧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것이다. 몽진 길, 선조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음식이 변변히 있었을까?
어느날 수라상에 올라온 음식중 입맛을 끈것이 있었으니 당시에 가난한 백성이 먹던 도토리 묵이었다.
허나 처음 먹어보는 선조 임금에게는 특별식 이었던 도토리 묵, 이후 선조 임금의 수라상에 항상 오른다 하여 '상수라'라 불리다 나중에 상수리가 되었고 나무의 이름도 상수리 나무로 불리게 되었다.
곳곳에 나무 밑기둥은 까만 비닐에 뒤덮혀 있다. 병풍해가 심한 상처에 붕대로 감긴 것이리.
산들 바람에 초록잎들의 부딛침이 싸르르 소리를 내며 환히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은 나무 가지를 부대끼게 풀무질을 한다.
나무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밑등 이끼들도 물기를 머금고 있다.
물기가 뿌리에서 나무 꼭대기까지 도달 했으나 부산하지 않아 좋다. 땅에서는 풀, 꽃 , 키작은 나무들의 소곤거림이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듯 하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詩心까지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Henry David Thoreau(1817~1862)의
소로의 윌든에서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수 있는지 알아 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 했을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 세상에는 큰 소리를 처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섬세한 것들이 있다.
그대의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맞부딪쳐 살아가거라
회피하거나 욕하지 말라
그대가 나쁜 사람이 이니 듯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그대가 가장 풍요로운 때에는 삶은 초라하게만 보인다
불평쟁이는 낙원에서도 불평만 늘어 놓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는 비록 '달동네'의
형편없이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 해도 즐겁고 가슴 떠리며
멋진 시간을 보낼수 있으리라.
황혼의 빛은 부자의 집 창문뿐 아니라 가난한 집 창문도 밝게 비친다.
또한 초봄에는 가난한 자들의 집앞의 눈도 녹는다
그대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거기서도 궁전처럼
즐겁고 만족스런 삶을 살수 있으니까
* 소로는 숲속에 세개의 의자를 마련해 두었다고 했다
고독을 위해
친구를 위해
친교를 위해
Walden은 미국 매사추세스 주의 콩고드에 에서 1만마일 떨어진 작은 호수. 소로는 (1845년~1847년)
2년2개월 이곳 숲속의 생활을 그렸다 (수필가)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또 한번
헤어지는 아쉬움을 시원한 얼음과자와 맥주로 달래며
아까 숲에서 꽃우물님께 강의 받은 카독전화 사용방법은 보너스중에 보너스 .
리딩의 풀소리님, 꽃우물님께 감사 드리며 해모수님.수호천사님,청풍님,미루님,페니로즈님,나겨비님,
블랙님,작은길님,초록세상님, 들꽃님,고우니님,가을정원님,나로님,푸르미님,은하수가 함께 했던 날
첫댓글 두번째 삼릉을 간날, 권효숙샘과 능침에 올라갔다.
예종비는 세자빈으로, 공릉의 진종왕은 왕세자로 영면 했기에 석물의 차이가 많이 났다, 석호, 석양도 반인 두마리씩 이었고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었다. 그러나 성종비는 왕비의 능이었기 때문에 두 릉에 비해서 석물이 아주 달랐다. 4번에 공신에 책록된 친정아버지 한명회, 시아버지 세조의 권위가 느껴지는듯, 3단에 위치한 장명등, 혼유석, 문인석, 무인석의 조각도 우람하면서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었다.무인석의 갑옷은 호령이 떨어질듯한 기세를 느끼게 했다.
'참나무'는 진짜 나무 라는 뜻으로 재질이 좋아 배를 만들거나 곡쟁이나 쟁기등의 연장을 만들때 사용했다. 참나무를 태워 만든 숯은 고기 구울때, 간장을 담글때(간장속의 해로운 물질 흡수), 사용했다. 서양에서는 술을 발효 시키는 술통을 참나무로 만들었다. 참나무의 한 종류인 떡갈나무는 잎이 길죽하고 넓어 에전에 시루떡을 찔때 깔개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참나무의 종류는 졸참, 상수리, 갈참, 떡갈, 신갈나무, 굴참등 여섯가지가 아닌 일곱 종류가 있다. 신갈 나무는 옛날 나무꾼들이 산에서 나무할 때 짚신 바닥이 닳아서 미끄러우면 신갈나무 잎을 짚신 받닥에 깔고 신은 데서 유래했다. 굴참 나무는 골이 깊이 팰 정도로 두꺼워 굴참 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아니라 비가 세지 않고 보온성도 좋아 지붕의 재료로도 사용햇다. 지금도 강원도 지방에서는 굴참나무 껍질을 이은 굴피집을 볼 수 있다. 또 굴참나무의 껍질은 병마개를 만드는데 사용 된다. 속담에 '도토리 키재기' '개밥에 도토리'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