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리 수도산
북일면 익산총부에서 금강리 수도산 화장막으로 가는 장의행렬의 노선은 다음과 같다. 익산총부-새말지서(현신동파출소)-작은새말 꽃밭재(현 소신동삼양라면 앞)-벽돌막(이리공과와 남중동파출소 사이)-천일고무공장(남성아파트 뒷길)-대전사거리-농림학교 옆길-마동-화장막. 익산총부에서 화장막까지 5.6km이다.
장의행렬에 참여하지 못한 제자들은 일경들 눈을 피해 논길로 밭길로 정신없이 마동 수도산 화장막에 갔다. 총부에 사는 아이들도 먼발치로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면서 화장장 가까이까지 가서 멀리서 화장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막 굴뚝 위로 연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훅훅 솟아올랐다.
빈손 공허감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은 자꾸 화장막을 뒤돌아보았다.
굴뚝에서 계속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총부에 도달할 때까지 그들은 슬픔에 겨워 울었다.
수도산은 이리읍의 교외 금강리에 있는 구릉이다.
수도산은 예전엔 ‘운룡산’ ‘통술뫼’ ‘닭뫼’라 불리웠다. 이 산 뒤로 왕지평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산아래 신성리, 운룡, 금강리 등의 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은 현재 이리시 금강동에 편입되었다. 산 앞으로는 이리읍을 향하여 기슭에 화장막이 있다.
운룡리 뒷산 수도산을 풍수가의 말로는 이곳에 雲中盤龍이라는 穴이 있다고 하여 雲龍山이라고도 하며, 그 산 남쪽 자락에 불당이 있었기 때문에 당뫼〔堂山〕이라고도 한다. 또 풍수가들은 당뫼들 닭뫼〔鷄山〕로 풀이하여 닭이 알을 품는 지형(金鷄抱卵의 穴)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일제는 명당의 혈을 끊기 위해 닭뫼를 공동묘지로 지정하고 이리읍 지정 공동 화장막을 설치하였다. 일제는 신흥도시 이리읍에 수도를 대기 위해 대아리 저수지에서 흘러 오는 물을 닭뫼 정상으로 끌어올려 이리읍내에 공급하였는데, 수도산이란 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닭뫼 정상에 물 탱크를 만들고 그 아래로 수도관을 묻은 배수로가 생겨났으며 이 새로 생긴 길이 현재 원광대학교 부속 제 2병원(신경정신과)으로 올라가는 아스팔트길이 되었다. 원래 이 길은 이리읍에서 마동-화장막으로 하여 잿배기를 넘어 금강리로 가는 길이 나 있었다.
화장막은 현재 숯불구이 불고기집으로 유명한 ‘고래등’ 뒷길 건너 대명교회(전 광성교회)앞마당에 위치해 있었다. 공동묘지는 화장막앞과 왼쪽과 현 동중학교와 제2병원, 동남국민학교까지 펼쳐져 있다. 이 화장터와 공동묘지는 시유지로서 1974년 시 승격을 전후하여 이리시에서 택지로 정리되었으며 화장막은 팔봉으로 옮겼다. 택지로 조성된 이 넓은 빈터에 민주화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1987년 초겨울에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유세장으로 수십만 대중이 운집하여 기운을 북돋은 적도 있었다.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은 1968년(1953)봄부터 법좌를 신도안으로부터 소태산이 사바의 색신을 사룬 수도산으로 옮겼다. 대산은 수도산 아래 금강리(신성 마을)신 면장댁에 주석하여 스승을 추모하는 시묘살이처럼 몇 년 동안 정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