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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땅끝해남문화관광해설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민영란
<目 次>
1. 海南 尹孤山家의 家系
2. 綠雨堂의 形成과 特徵
3. 綠雨堂의 典籍
4. 綠雨堂의 古文書
5. 綠雨堂의 指定文化財
1. 海南 尹孤山家의 家系
해남의 尹孤山家는 고려 중엽의 인물로 전해지는 尹存富를 시조로 계승되고있다. 해남윤씨 가문 중에 孤山 尹善道(1587~1671)를 비롯해 尹斗緖․尹德熙․尹용 등은 임란 이후 17~18세기 새로운 사상이 발아했던 시대에 藝壇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孤山家의 학문, 예술, 그리고 삶의 태도는 대부분 家風의 전수를 통하여 형성되었다. 특히 이 가문은 전통적으로 선조들의 유업을 잇는 ‘實事求是’의 사상이 전승되었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해남 윤씨의 가계와 가풍을 살펴보는 일은 본 강의를 이끌어 가는 매우 의미 있는 배경적 지식이다.
해남윤씨 가문은 본래 강진 지방의 吏族으로서 下級武官職에 종사하였으나, 12세손인 尹孝貞(1476~1543)에 와서 해남에 본관을 두고 士族化 되었다(부록 1 참조). 漁樵隱公派의 시조인 윤효정은 가업을 형성했던 중추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촌 동서지간인 崔溥(1451~1504)에게서 학문을 배워 후진 교육활동에 힘썼으며, 慕齋 金安國(1478~1543)과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그 역시 사림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대부호였던 海南鄭氏인 貴瑛의 딸과 혼인하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비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향촌사회에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함으로써 지주계층으로서의 공고한 경제적 기반과 안정된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어서 13대조인 尹衢(1495~?)의 둘째 아들 尹毅中(1524~1590)은 36세(1559)에 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三司와 吏․兵曹의 要職만을 역임한 사림의 중심 인물이었다. 윤의중은 특별히 理財에 밝아 일생 동안 재산을 증식하여 그 부가 당시 호남의 제일로 일컬어졌다. 그가 東西分黨 때 東人에 가담한 이후 西人에 의해 蓄財 혐의로 탄핵을 받게 되었으며, 甥姪인 동인의 李潑(1544~1589)이 1589년 己丑獄死(鄭汝立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완전히 失勢하였다. 이처럼 고산 가문은 16세기에 이르자 호남의 대표적인 士林과 在地士族으로서의 가문의 立地를 확고히 하였다. 이 가문은 己丑獄事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벌어진 세력다툼에서는 동인으로 입지를 구축하였다가, 17세기에 접어들어 尹善道가 남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입지를 펼치면서 격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
孤山은 尹唯深(1551~1612)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8세에 그의 숙부인 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가 16대 종손이 되었다. 17세기 대표적인 남인인 윤선도는 문학사에서는 시조의 제1인자로, 당쟁사에서는 ‘服制說’로 명성을 남겼으며, 세자의 사부로서 鳳林大君(후에 孝宗)을 보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己亥禮訟(1659, 1차 예송)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여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해남윤씨의 家法․學風․文風은 그에 의해서 체계화되었고 그 후손들에 의해서 가통으로 이어졌다. 윤선도의 후손들은 그의 정치적 입지로 인해 관로가 막히게 되었다.
한편 윤선도는 四書五經에 정통함은 물론 醫藥․卜筮․陰陽․風水地理․史書․老莊․佛家書․道家書 등 두루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詩․書․禮․樂을 구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학자의 자세를 굳건히 하면서 한편으로 불교․도가 및 신선사상을 예술작품에 구현해 내고 있다. 특히 그의 시문은 부분적으로 불교 및 신선사상의 색채가 엿보이고 있다. 이 같은 박학풍의 태도는 당시 近畿南人의 학풍과도 일맥상통되는 면이다. 특히 윤선도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17세기 중․후반 이른바 ‘近畿南人’이라고 일컬어지는 許穆(1595~1682)․尹鑴(1617~1680)․柳馨遠(1622~1673) 등은 주자성리학만 고집하지 않고 제자백가의 학문과 천문․지리․노장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와 사상에서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한편으로 노장, 불교 등 이단사상에 대한 관용과 천문, 상수역학 등 잡학, 기술학에 대한 강조 등의 박학풍은 당론과 상관없이 17세기 초반 서울 지역의 학풍의 특징으로 17세기 중․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윤선도 학문과 예술은 그의 아들 尹仁美(1677~1674)를 거쳐 尹爾厚(1636~1704)․윤두서․윤덕희 등의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아들 尹仁美(1607~1674)에게 내려 준 家訓에서 修身謹行하고 積善行仁할 것과 사람의 됨됨이를 만드는 『小學』을 학습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 가훈의 말미에 “우리 가문의 흥성과 멸망이 이 한 장의 종이에 있으나 절대 범연히 보아 넘기지 말 것이며, 손자 아이들에게 명심해서 읽도록 하여 잊지 않도록 하여라”라고 명시하였으며, 이 遺敎를 윤두서와 윤덕희는 철저히 엄수하였다. 윤두서가 남쪽에 빚을 진 사람들의 채권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거나, 윤덕희가 은닉노비 명단을 불태워 버렸다는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이 가훈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었던 개방적 태도나 나아가서는 친민의식으로 발전해 그들이 풍속화를 그리는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윤두서는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 다른 경서를 배우기 이전에 먼저 『소학』을 배우게 했으며, 윤덕희 역시 가법을 따라 『소학⌋에 더욱 힘썼다.
고산의 장남 윤인미는 三水 유배의 환란 속에서도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며, 윤선도의 영향으로 천문․지리․의학에 능통하였다. 그는 부친의 예론으로 인하여 13년간 금고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尹爾錫(1626~1694)은 후손이 없자 동생 윤이후의 넷째 아들 윤두서를 입양하여 종통을 이었으며, 1678년부터 1680년 가을까지 尼山(현재 논산)縣監을 지냈다. 그는 조부의 편지식 가훈서를 “忠憲公家訓”이라는 표제로 책자를 꾸미는 등 가전유물을 보존하는 일을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이러한 가통은 윤덕희에 의해서 완성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윤이석의 동생 윤이후는 윤두서의 생부로 西人이 득세한 시기에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54세 문과에 급제한 후 兵曹佐郞․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56세 때 관직을 그만두고 전라도 竹島에 別墅를 짓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는 조부 윤선도의 영향을 받아 문학에도 재능을 보여 국문으로 된 ⌈逸民歌⌋ 62句를 남겼다.
윤두서는 자는 孝彦․鐘崖이며, 호는 恭齋로 숙부인 윤이석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윤씨 19대의 종통을 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학문과 시서화에만 전념하여 서화에 일가를 이룬 인물로 48세(1715)에 세상을 떠났다. 윤두서는 26세(1693)에 과거에 급제 진사가 되었으나 당쟁이 격심하여 관직에 나아갈 것을 포기하고 李夏坤(1677~1724)․李師亮․閔龍顯 등 서인들과 沈得經(1673~1710)․李灣敷(1664~1732)李衡祥(1653~1763) 등 친인척들, 李潛(1660~1706)․李淑(1662~1723)․李瀷(1681~1763) 許煜(1681~?) 등 남인들, 그밖에 행적을 알 수 없는 李弘莫․崔翊漢․柳竹塢 등과도 친교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학문은 증조부 윤선도의 박학풍을 이어 성리학과 예론은 물론 지리․의약․음악 등에 두루 미쳤으며, 천문․금석학․병법 등 실사구시학과 패관소설에도 새롭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러한 학문을 통해서 독자적인 회화관과 화풍을 정립하였다.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산수․인물․영모․풍속화 등에서 조선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예시해 주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윤두서는 성현, 선승, 나한, 신선 등 유․불․도 삼교의 인물들을 모두 화폭에 담고 있는 점은 증조부인 윤선도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화풍은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에게 가법으로 전해져 그로 인해 3代에 걸친 서화가문이 형성되었다. 또한 그는 李淑(1662~1723)의 東國眞體를 계승하였고, 이 서체가 아들 윤덕희․조카 尹淳(1680~1741)으로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현재 녹우당에는 그의 시문집인 『恭齋遺稿』와 화론서인 『記拙』이 보전되고 있다.
그는 양부 윤이석에 이어 가전 유물의 보존에 힘썼다. 윤두서는 선대의 행적 중 집안에서 보고들은 것과 노인들이 전하는 바를 수집하고 믿을 수 있는 文籍들을 수집․조사하여 家乘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사도중 망실해 현전하지 않는다. 그밖에 선대의 遺文을 수집하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고자 하였으나, 그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윤두서가 중요시 여겼던 대표적인 家傳遺物로는 <瑞蒽臺親臨宴會圖>(尹亨植 소장)이다. 이 기록화는 윤선도의 조부 尹毅中이 참석한 창경궁 내에서의 명종과 군신합동 연회도를 그린 것인데, 유존되어 오면서 상태가 나빠지자 윤두서가 다시 모사한 것이다. 윤덕희의 어머니 전주이씨(1667~1689)는 16세 때인 1682년에 윤두서에게 시집와서 德熙와 德謙(1687~1733)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23세의 나이라 早死하였다.
이처럼 윤두서는 실학자 芝峯 李睟光(1563~1628)의 증손녀이며 承旨 李同揆의 딸 전주이씨와 혼인하게 되면서, 이른바 이만부․이잠․이서․이익으로 대표되는 남인계 근기학파로서 經世致用系 實學者들과 긴밀한 교유를 맺어 실학적 인식을 함양하였다. 실제로 이서가 쓴 윤두서의 제문에 의하면, 이서는 “약관의 나이 때부터 윤두서와 더불어 서로 좋아하고 학문을 닦기가 40여년이 되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윤두서가 전주이씨와 혼인한 15세 때부터 이익의 집안과 교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의 증조 李尙毅는 바로 1612년에 이수광과 더불어 추정사로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으며, 더구나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한 것을 보면 이익과 전주이씨 양가는 오랜 世交 관계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윤두서는 이잠과 이서와 학문적으로 교유가 두터웠고, 이서에게 글씨를 배운 인연으로 윤덕희는 20세 이전에 이서의 제자가 되었다.
윤덕희의 어머니는 李萬敷(1664~1732)의 모친 및 윤순의 모친(1643~1719)과는 친자매지간이다. 따라서 윤덕희는 이만부․윤순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이만부는 박학 위주의 실학적 학문을 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상주로 移居하는 34세(1697) 이전까지 그는 윤두서와 지속적으로 교유하면서 그림에 평을 하기도 하였다. 조부대부터 이어지는 양가의 친분으로 인해 이만부는 이잠, 이서 등과 친밀한 교유를 하였으며, 나중에 이익은 이만부의 행장을 쓰기도 하였다. 원래 전주이씨와 이익 집안은 선대부터 교유가 있었긴 하나, 특히 이만부는 이익의 집안과 윤두서와의 교유를 연결시켜주는 가교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윤두서․이잠․이서․이만부 등은 모두 남인 출신으로 비슷한 학문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윤두서․이만부․이서 등은 모두 글씨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윤덕희의 사촌 형인 白下 尹淳(1680~1741)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필명이 높아 동국진체로 고봉을 이룬 뛰어난 서예가였다. 윤순은 이하곤의 三從弟로 오랜 친구였고, 이하곤이 사망하자 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그는 윤두서에게서 서예를 전수받아 동국진체를 계승․발전시켰다. 윤순이 소론임에도 남인이 창도해낸 동국진체를 전수받은 것은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가계에 따른 전수에 해당된다. 그 후 계모인 李衡徵(1651~1715)의 딸 전주이씨(1674~1716)으로부터 德熏․德煦․德烈․德廉․德顯․德烋․德烝과 두 여동생이 태어나 윤덕희는 도합 11명의 동생들을 두었다. 윤덕희의 막내 여동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인 石北 申光洙(1712~1775)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많은 형제들 중 장남 윤덕희만이 윤두서의 가업을 계승하여 시문서화에 능한 유일한 사람이다. 덕희의 아들 중 둘째 아들 윤용은 자는 君悅, 호는 靑皐․萸軒이다. 그는 아들 중 유일하게 進士가 되었으며 서화에도 뛰어났으나 星州李氏(李明遇의 딸) 사이에서 여식 하나만 두고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세기 조선인물지인 李奎象의 『幷世才彦錄』 중 ⌈畵廚錄⌋에 의하면, “윤용은 젊은 시절부터 科詩로 명성을 날렸는데, 경발한 시어가 매우 많았으며, 산수를 잘 그렸으나 요절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그는 시화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윤용은 화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으나 요절하여 현존하는 작품은 불과 14점 안팎에 불과하며, 단지 『棠岳文獻』(권6)에 그에 관한 ⌈祭文⌋․⌈輓詞⌋ 등의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산수화가 대부분이고, 신선도와 풍속화가 일부 전해진다. 윤용은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산수․도석․초충․화조 등에 다양한 재능을 보이고있으며, 신선사상에도 관심은 그의 형 尹悰이 쓴 「祭文」에서 확인된다. 이 재문은 윤용이 꿈에 선계에 들어가 시를 읊었던 이야기 등 몽유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어 선조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그의 현존 작품 중에 신선도 2점이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가문의 300여 년간의 성장과 침체과정은 조선시대 당쟁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사상계는 守朱子 對 脫朱子, 예송대립, 당쟁에 따른 학문대립 등으로 어려운 논쟁을 겪게 되었다. 이 중에서 집권층의 주류로 부상한 것은 노론이었고, 반면 남인을 고수한 윤씨 가문은 1694년 갑술옥사 이후 권력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게다가 선조 윤선도가 남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입지를 펼침으로 인해 윤두서․윤덕희는 출사를 포기하고 일찍부터 학문과 화도에 몰입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서화가문을 이룩해 내었다. 윤선도의 후손들은 ‘실사구시’의 사실정신이 강하여 선조들의 가전유물을 정리하는 일에 힘썼다. 이러한 정신은 조부 윤이석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친 윤두서를 거쳐 윤덕희에 이르러 정리되었다. 윤두서․윤덕희 부자가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도 수많은 서책과 화보들을 구입해 가면서 학문과 시문서화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여유있는 경제적 기반을 통해서 가능했다. 특히 윤덕희는 실학자 지봉 이수광의 증손녀인 전주이씨가 어머니로, 외가를 통해서 교유하게 된 이만부, 이잠․이서․이익 형제들로 대표되는 남인계 근기학파의 경제치용의 학풍을 이어 실학적 인식의 함양과 서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綠雨堂의 形成과 特徵
녹우당의 건축사적 연구는 전남대학교의 임영배교수를 비롯해서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조사보고서 등 기왕에 많은 연구와 조사가 있었다. 근래에 와서 서울대의 전봉희 교수와 전통문화학교의 김봉렬 교수의 건축사상사적 관점이 가미된 연구가 있어, 이 강의에서는 이들의 결과를 반영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녹우당은 흔히 ‘윤선도 고택’으로 알려져 왔던, 전라남도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상류주택이다. 그 이름 때문에 윤선도가 직접 경영한 17세기 초의 오래된 건물로 알기 쉽지만, 지금의 모습은 윤선도 시대보다 1세기 뒤인 18세기의 것이며, 사랑채는 그보다도 더 1세기의 뒤의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이 본격적인 살림집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 때부터이다. 따라서 ‘윤선도 고택’이 아니라 ‘윤두서 고택’이라 불러야 타당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는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보여주었던 유희정신을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살림살이에 충실하게 대응했던 기능성과 실용성이 돋보인다. 물론 보길도의 놀이시설과 녹우당의 주거시설이라는 유형별 차이에도 기인할 것이고, 시대적 차이는 물론, 윤선도와 그 후손들의 개인적 차이도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건축 사이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적인 건축정신이 있다면, 자유로운 창작정신과 윤씨 가문의 특유의 실사정신이다.
녹우당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었다. 우선 전라도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ᄆ자형 집이라는 점, 그리고 안마당이 앞뒤로 길쭉하여 비례가 이상한 점, 안채와 사랑채의 구성법이 서로 다른 점, 여러 차례 증축된 것 같은 지붕의 형태 등등. 전라도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사대부가 형식이어서 적지 않은 학계의 연구들이 있었지만, 이들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준 내용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서울대 전봉희 교수의 연구에 의해서 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해남 일대의 윤씨들의 씨족마을이 산재하는 점에 착안해 광범위하게 조사 연구한 결과, 현산면, 백포리의 ‘윤두서 가옥’이나 초호리의 ‘윤탁 가옥’과의 연관성을 밝혔다. 녹우당의 안채는 이들의 안채와 거의 유사한 형식임을, 그리고 다분히 지역적인 형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녹우당의 건축연혁의 착수는 강진 일대에 세거하던 윤씨들이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 일대에 자리잡은 16세기 초반의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1543)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후 윤선도까지 5대에 걸쳐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대대로 배출하여 일대의 명문가로, 최고의 재력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급제한 종손들은 서울에 자리잡고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해남의 재산은 부재지주로서 관리하게 되고, 종가인 녹우당은 소박한 시골집으로 경영되었다.
남인세력의 선봉이었던 윤선도는 송시열의 서인세력과 예송(禮訟)으로 결사적인 일전을 벌였지만, 여지없이 패배하여 유배와 보길도 은거로 마감했다. 그 이후 해남 윤씨를 비롯한 남인계열은 정권에 참여할 길이 봉쇄되었고, 증손인 윤두서는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양반화가 윤두서는 1752년 드디어 서울집을 정리하고 해남에 정착하게 된다. 그 이전에 있었던 종가집은 재실 형태의 건물이었으며, 윤두서의 낙향과 종손계의 대이동 이후에 본격적인 살림채로 개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전부터 있었던 안채에 사랑채가 신축되어 완전한 ᄆ자집으로 변형 중수되었다. 이때부터 윤두서는 뛰어난 풍속화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에 이르기까지 선비화가 집안의 전통을 세우게 된다.
1821년 가묘 중건을 시작으로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이 중건되는, 사당중건기를 맞이한다. 19세기 말에는 행랑채를 신축하고, 1938년에 녹우당 뒤숲에 있는 재각인 추원당을 신축함으로써 주요한 건축과정을 마무리짓는다. 길게는 400년 간, 본격적으로는 200년 간에 걸친 오랜 증축과 개수의 과정을 겪은 결과가 현재의 녹우당이며, 지금도 녹우당의 내부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동서로 놓인 상징축
녹우당은 진산인 덕음산에 기대어 서향하고 앉았다. 앞으로는 일가붙이들인 연동마을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다시 넓은 논들과 멀리 안산이 놓인다. 마을 앞 들판이 너무 넓어서 허해짐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연못을 파고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마을에서는 이 못을 ‘몰(말)무덤’이라 부르며, 윤선도가 직접 조성한 곳이라 여긴다. 연못을 파낸 흙을 쌓아 5개의 가산을 만들었다.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축조되어 연못의 모양은 마음 心자가 된다. 현재 몰무덤은 메말랐지만, 아직도 남은 30여 그루의 늙은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모습은 고산의 원림 경영 솜씨를 다시 한번 자랑한다.
녹우당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자리잡았고, 뒤에는 사당들의 무리와 어초은 묘소가 비자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있다. 고산이 심었다고 전하는 500그루의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녹우당 뒤 동북쪽에는 어초은 묘소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인 추원당 일곽이 자리잡고 있다. 추원당 부근에 초당이 있어서 공부하는 친족들을 위해 장소를 제공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연동마을은 한때 10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20여 호의 살림집들만 남아 있다. 녹우당 아래 편, 현재 유물관과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자리에는 원래 20여 채의 작은 살림집들이 있었다. ‘호집’이라 불리었던 이 집들은 종가에 반고용된 일꾼들의 주택이었다. 전라북도에서는 ‘호지집’이라 부르며, 경상도에서는 ‘가랍집’이라고도 부른다. 녹우당은 단순한 살림집이 아니라, 앞에는 넓은 들, 뒤에는 준수한 산, 전형적인 씨족마을을 거느리고, 수많은 호집에 둘러싸인 대구모의 장원이었다.
진산과 안산을 잇는 지형체계의 자연축이 동서로 설정되기 때문에 녹우당의 구성축도 동서로 놓인다. 동서축선상의 앞으로는 몰무덤과 연동마을이, 뒤로는 재실과 입향조의 묘소가 놓인다. 동서축은 마을과 종가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간적 위계를 정하는 매우 중요한 축선이다. 여기에는 일상적인 기능보다는 공동체적 장소와, 종가라는 중심과, 묘소와 재실이라는 극히 신성한 의례의 공간들이 놓이게 된다.
녹우당에서 서향을 하고 있는 부분들은 사랑채 전부와 안채의 제례청 부분, 그리고 뒷편의 산신단과 사당군들이다. 남향을 하고 있는 부분이 더욱 기능적이고 일상적인 공간들이라면, 중심축선상의 서향한 건물들은 상징적이고 규범적인 것들이다. 특히 안마당의 정면을 형성하는 안채 제례청은 그 놓인 위치나 규모로 보아 안대청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사 때에만 사용하는 의례적인 장소다. 평시에는 항상 닫혀 있고, 북서쪽 모퉁이 놓인 두 칸의 ‘못마루’가 안대청의 역할을 한다. 상징성과 일상성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서로 분리된 채 직교하도록 구성된 것이다.
윤씨가의 네크로폴리스-중세의 가을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대종가로서, 4대조 봉사하는 일반적인 안사당 말고도 입향조 어초은과 중흥조 고산을 모신 2개의 사당을 더 가지고 있다. 세 사당은 집의 동남부 모퉁이에 모여 있다. 5대조까지의 안사당은 담장 안에 위치하지만,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은 담장 바깥에 위치한다. 안사당이 비교적 일상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2개의 불천위묘는 더욱 신성한 영역을 형성한다. 담장 바깥을 타고 넓게 형성된 진입로는 따라가면 먼저 고산사당이, 그 뒤로 어초은사당이 나타난다. 어초은사당을 지나면 두 갈래 길에 이른다. 산쪽으로 올라가면 어초은의 묘소에 닿게 되고, 왼쪽 녹우당 뒷담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면 재실인 추원당에 다다른다. 3개의 사당과 묘소, 그리고 재실이 숲속에 자리잡아 망자(忘者)들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고산사당은 넓은 터에 자리잡아 갑자기 밝아지는 장소에 마치 단독주택과 같이 당당하게 자리잡았다. 진입로 한편으로 비껴 놓여서 사각으로 보이게 된다. 사각의 시선에서 잘 보이도록 대문을 낮추고 사당채를 높여 중첩적인 형태가 부각된다. 사당 일곽을 바깥으로 약간 비틀어 놓았기 때문에 사리리꼴로 좁아지는 진입로는 자연스럽게 어초은사당으로 연결되고, 고산사당의 입체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어초은사당은 고산사당과 대각선 방향에 놓였다. 역시 바깥으로 비틀어진 위치 때문에 진입로는 정면으로 대하게 된다. 입향조의 사당다운 최종적인 위치며 정면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당 앞 빈터를 키 큰 소나무들이 빽빽이 감싸고 있어서 어둡고 아늑한 공간을 형성한다. 신성감마저 감도는 곳이다. 고산사당과는 반대로 높은 대문을 설치해 안쪽의 사당채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면성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당 앞 공간은 직각으로 꺾이면서 다시 사다리꼴로 잡아지기 때문에 계속될 묘소나 재실로 향한 연속성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집안에 설치된 가묘는 대문도 없고 어떠한 강조적 수법도 발견되지 않는다. 두 불천위묘에 비해 개방적인 성격이 강하다. 기일 때나 참배하는 불천위묘와는 달리, 아침, 저녁으로 외출 때마다 문안을 드려야 했던 일상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3개의 사당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이룬 것은 19세기 전반이다. 전봉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는 윤씨가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시기이다. 종가의 아들들이 일찍 죽거나 절손되어 종손의 대가 끊길 위험에 처했고, 따라서 가문과 지역사회 내에서의 종가의 위상이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멀리 충청도에서 입양한 먼 친족이 장손의 대를 잇게 된다. 그 기간동안 종가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광주이씨 부인은 입양된 장손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러 친족들의 간섭을 힘들게 이겨 나갔다. 이 와중에서 장손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대적인 사당 중건 역사를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을 전교수는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 비유하고 있다. 윤씨가의 네크로폴리스를 보면 붕괴되어 가는 중세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양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읽게 된다는 지적이다.
‘중세의 가을’의 완결편은 종가 동북쪽에 건립된 추원당(追遠堂)이다. 이 재실이 건립된 1938년은 일제의 수탈이 극성에 달했던 시점, 역으로 대지주였던 윤씨가의 재산이 최대로 확장되어 위세를 떨치던 시점이다. 추원당의 본채는 4×2칸의 규모로 칸살이 넓고 높이가 높다. 역시 서향을 하고 있는 관계로 햇빛을 막기 위해 서남쪽 두 면에 차양을 둘렸다. 차양을 부설하는 기법은 윤씨가 전래의 기법으로 녹우당의 사랑채, 고산 재각의 전면에도 나타난다. 본래 앞에는 7칸의 긴 객행랑을 세우고 가운데 대문을 달랐다. 대문칸을 아주 높이고 그 위에는 다락까지 설치했다. 첫눈에 위풍당당한 윤씨가의 위세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어초은의 묘제 때에는 200~500명의 일가붙이들이 참석한다니 이 정도의 건물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 정도의 위세도 부족했을 것이다.
윤씨가의 사실적 예술정신
녹우당이 본격적으로 건축된 18세기는 실학이 무르익던, 이른바 영정조 르네상스의 개화를 눈앞에 둔 때였다. 알려진 대로 실학은 남인계의 재야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남인계의 골수 윤씨가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녹우당의 실질적 건축주 윤두서는 초기 실학자인 이익-이서 형제와 친교가 깊었고, 외증손자는 대실학자 정약용이었다. 실학적 세계관은 그의 예술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관념적인 문인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토속적인 소재와 민중의 삶을 그린 사실주의적 풍속화를 처음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유명한 ‘자화상’에서는 수염 한올도 극사실 기법으로 그렸지만 목도 몸통도 생략한 실용적 정신을 표현해 냈다.
그의 아들 윤덕희도 뛰어난 풍속화가였고, 요절한 손자 윤용의 ‘망태기를 옆에 끼고 봄을 캐러 나선 아낙네 그림(挾籠採春圖)’은 사실주의 풍속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뒤돌아 서서 멀리 봄을 응시하는 아낙네의 보이지 않는 표정과, 걷어붙인 장딴지의 근육과, 호미를 불끈 쥔 옴팡진 손은 건강한 민중의 생활을 아름답게 또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초기 녹우당 경영을 주도했던 주인공들이다.
녹우당 전체에 흐르는 자유분방한 구성, 격식을 무시한 변용과 임의로운 증축들, 소박한 구조체와 비장식적인 요소들을 실학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규범과 예학적 구도에 얽매인 당대의 다른 양반가들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녹우당 건축의 근저에 흐르는 실용정신이 매우 강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석양빛을 막기 위해 사랑채의 위엄을 포기하면서 정면에 채양을 달았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방아를 찧기 위해 안마당에 2층 건물을 과감히 설치했었다.
남북으로 놓인 실용축
이러한 부분적 시설보다도 근본적인 것은 집 전체를 구성하는 방향성의 문제다. 비록 동서로 놓인 상징적인 축이 집의 구성축을 이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의 실용적 행위를 담기 위한 공간들은 모두 남북으로 놓였다.
우선 주요한 출입구들―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모두 남향하고 있다. 또한 행랑마당으로 들어오는 협문도 남향이다. 출입구를 남쪽으로 냄으로써 양지바른 곳에서 출입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담장을 휘어 골목을 만들고 깊은 곳에 대문을 위치시키는 수법으로 은밀함도 얻고 있다.
주요 출입구들을 남쪽에 냈다는 사실은 주요한 마당들의 방향성을 남북으로 생각했다는 점과 일치한다. 특히 동서로 긴 안마당의 비례는 남쪽의 햇빛을 더 받기 위해 남쪽 면을 늘인 결과일 수 있다. 안채의 주요한 방들―안방과 안대청(못마루), 며느리방(모방), 시할머니방(건너방) 모두가 남향하고 있다. ᄃ자 안채는 동서 상징축을 따라 놓여졌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방들은 남북으로 놓였다. 오직 제사용의 제례청만이 서향으로 놓여 종가집 안마당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ᄃ자 안채의 두 날개채는 중심의 제례청보다 그 폭이 두껍다. 날개채의 앞뒤로 퇴칸을 만든데다가, 뒤편에 다시 쪽마루를 가설했기 때문이다. 몸채보다 날개채가 더 두꺼워진 것은 남향한 날개채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안방 부엌 뒤의 고방마당에 대해 모퉁이의 안대청은 정면으로 대할 수 있어서, 고방마당 역시 남향한 마당이 되었다. 안사당 앞의 넓은 일마당은 가사작업의 중심으로, 역시 남향한 안채 날개채들에 의해 정면이 형성된다.
상징축과 실용축의 이중 설정
동서로는 의례와 규범에 충실한 기능들을 수용하면서 건물의 정면을 형성하지만, 실질적인 살림살이는 남북축을 따라 일어난다. 상징과 형태의 축에 대해 행위와 실용의 축이 서로 직교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설정 자체가 실용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안동 일대에 산재하는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의 주택에는 오로지 일원적인 구성축의 설정만이 있을 뿐이다.
녹우당 얼굴인 사랑채는 큰사랑과 작은사랑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큰사랑은 2칸식의 사랑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져 종손이 사용하며, 1칸씩의 책방과 마루로 이루어진 작은 사랑은 아들이 사용한다. 큰사랑보다 작은사랑은 반 칸 앞으로 돌출되어 자연히 사랑마당도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큰사랑 마당은 비어있는 의례적인 곳이지만, 작은 사랑 앞에는 연못을 파서 아늑한 정원을 만들었다. 하나의 마당을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할하는 절묘한 솜씨를 보여준다.
사랑채는 비록 동서 상징축을 따라 놓여졌지만, 그 안에서도 역시 실용축에 대한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다. 남쪽에 형성된 행랑마당을 향해 사랑대청이 열리게 되고, 대청 안의 현판도 남쪽을 향해 걸려 있다. 한 마당을 둘로 나누는 솜씨뿐 아니라, 한 몸체에서 두 개의 방향성을 동시에 갖는 솜씨도 보여준다.
안채의 지붕 구성을 보면 녹우당의 실용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안채의 안마당은 3×3칸 정사각형 크기였겠지만, 몇 차례의 증축과 변형 끝에 현재와 같이 3×5칸으로 길쭉해졌다. 다시 말하면 사랑채가 신축되면서 안채의 날개채는 2-3칸이 더 늘어났다. 그렇다고 지붕을 다시 만들어 말끔한 형태를 갖추지 않았다. 원래 안채부터 사랑채 쪽을 향해 증축될 때마다 지붕을 내달아 계단식 모양이 되었다. 더욱이 남쪽 날개채 일마당 쪽의 퇴칸에는 퇴칸을 따라 좁고 긴 지붕면이 부가됐다. 일체의 격식과 외형보다는 경제성과 실용성에 충실히 적응했던 결과다.
보길도의 유희를 위해 윤선도는 많은 발명을 했지만, 녹우당에서도 못지 않은 발명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안채의 두 부엌 위에는 작은 솟을지붕이 돌출해 환기구로 역할한다. 이 솟을 환기구는 송광사나 선암사 같은 전남지역의 사찰 요사채에서 자주 사용된 것으로, 윤씨 일가는 이를 과감히 살림집에 채용하고 있다. 쓸모만 있다면 절집에서 개발된 것도 상관없다는 자세다. 앞서 언급한 채양은 마치 윤씨가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것이다. 녹우당의 살아채, 추원당, 문소동의 고산재각에 과감하게 도입되었고, 그 규모도 크고 높이도 높다. 건물의 외형과 격식보다 햇빛과 비바람을 막는 실용성을 높이 산 까닭이다.
3. 綠雨堂의 典籍
필자는 지난 2001년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해남 연동리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바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서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는 古典籍은 고산의 고조인 어초은공 효정때부터 집서되기 시작하여 고산생존시에 상당량이 확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대략 공재 윤두서가 시작하여 낙서 윤덕희에 와서 일단 정리되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 후 근래에 와서 연활자본과 석인본이 약간 추가되었을 뿐, 집서과정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집서 및 정리과정을 거쳐 오늘에 전하는 녹우당의 전체 장서규모는 454종 1425책에 이르는 것으로 되었다. 이를 동양의 전통적인 분류방식인 사부분류 체계에 의해서 분류해 본 결과, 이의 세부 현황은 아래의 <표 1>과 같다.
<표 1> 綠雨堂 所藏 典籍現況表
위의 표에 의하면, 경부서적은 모두 77종 368책에 이르며, 대부분 목판본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부서적은 모두 115종 312책으로 종수는 필사본이 많으나, 실제 책수는 목판본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자부서적은 모두 82종 309책에 달하며, 책수로는 목판본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보이고 있으나 종수는 오히려 필사본이 많다. 그리고 집부서적은 180종 436책으로 나타나 있는데, 종수는 필사본이 104종으로 압도적으로 많으나 책수는 목판본이 훨씬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음은 녹우당 소장 전적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결과, 經部에 해당되는 분류현황을 표로 제시한 것이다.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 중에 경부에 해당되는 전적은 論語·孟子·大學·中庸의 ‘四書類’와 ‘五經類’인 詩·書·禮·易·春秋의 서적이 들어 있다. 경부서적은 목판본에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유학공부에 필수적인 서적으로 지방에서는 주로 목판으로 간행한 결과이다. 이들의 세부내역은 아래의 <표 2>와 같다.
<표 2> 綠雨堂 所藏 ‘經部’ 典籍現況
다음은 녹우당 소장 전적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결과, 史部에 해당되는 분류현황을 표로 제시한 것이다. 사부서적 중에는 編年·政法·傳記類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목판본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세부내역은 아래의 <표 3>과 같다.
<표 3> 綠雨堂 所藏 ‘史部’ 典籍現況
다음은 녹우당 소장 전적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결과, 子部에 해당되는 분류현황을 표로 제시한 것이다. 子部는 儒學·醫學·藝術 등 여러 학문분야가 포함되어 있는 주제분야이다.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은 儒家·類書·術數·藝術분야 등에 집중되어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 양반가의 금기서적으로 되어 있는 道家書가 2종이 소장되어 있어 매우 이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밖에도 兵家·醫家·天文算法·譯學書 등 광범위한 주제분야 걸쳐 있어, 고산의 趣向과도 무관치 않은 사실을 보이고 있다. 이상의 세부내역은 아래의 <표 4>와 같다.
<표 4> 綠雨堂 所藏 ‘子部’ 典籍現況
다음은 녹우당 소장 전적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결과, 集部에 해당되는 분류현황을 표로 제시한 것이다. 집부는 주로 선인들의 시문을 모아서 편찬한 문집이 해당되는 분류분야이다. 따라서 녹우당 장서에도 목판본 문집 36종 162책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보이고 잇는 것이다. 이들의 세부내역은 아래의 <표 5>와 같다.
<표 5> 綠雨堂 所藏 ‘集部’ 典籍現況
이상과 같이 해남 녹우당에는 목판본과 필사본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간행된 서적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장서를 경사자집의 분류형식으로 구분하여 살펴 보았다. 그 결과 녹우당 장서는 특정 주제분야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전체적으로 고루 분산되어 있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4. 綠雨堂의 고문서
해남 윤씨의 종가에 소장된 고문서에 관한 조사작업은 지난 1986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실시하여 『고문서집성』 제3권에 ⌈해남윤씨편⌋으로 간행된 바 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이미 조사된 결과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첫째, 해남 윤씨 종가의 고문서은 다른 종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恩賜狀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은사장은 일반적으로 왕 및 왕실이나 관부에서 받은 선물의 物目을 적은 것이다. 녹우당에 소장되고 있는 은사장은 윤선도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師傅로 있었을 때에 받은 것으로, 1628년(무진년)으로부터 1660년(경자년)까지 발부된 92통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은사장은 물품을 누가 보내느냐에 따라 문서양식이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왕이 직접 보낸 은사장에는 사명을 띤 관료의 표시로 ⌈奉使之印⌋이 날인된 30건이 전하며, 왕이 공식적으로 내수사를 통해 보낼 때에는 ⌈內需司印⌋을 날인한 은사장은 13건이 있다. 세자 등이 물품을 보낼 때에는 ⌈大君房⌋의 掌務官이 手決한 문서로는 19건이 전하고 있다. 특히 대비 등의 내전에서 보내는 경우에는 국문으로 쓰여졌는데, 이 문서에는 圖署이나 手決이 없는 문서가 11건이며, 기타의 은사장이 19건이 보관되어 있다.
둘째, 해남윤씨 고문서에는 토지 및 노비문서가 대단히 많다. 토지문서는 토지 매득시에 판 사람으로부터 받은 문서로서 일단 토지를 사게 되면 그 이전에 거래된 토지매매문기가 전부 딸려오기 때문에 이를 고찰하는 데에는 지목과 면적 등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토지문서는 총 661매가 실려 있는데 17세기의 것이 465건, 18세기의 것이 15건이나 되어 17․18세기에 많은 토지를 구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녹우당에 토지의 구입문서가 이처럼 다량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토지를 구입한 이후에 적어도 상당기간 그 토지를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비문서도 사드린 문서가 55건이 있는데 18세기의 것이 41건, 19세기의 것이 13건이 전한다. 노비를 구입한 경우에는 국가에 등록하는 입안조처를 하였기 때문에 등록 절차상 필요한 소지와 증인들의 조회서 등이 구입문서와 함께 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토지나 노비의 매득문기는 대체로 매득자인 주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호노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였으며 모택호노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宅名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한 택명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이 보이고 있다.
尹唯幾-監司宅, 尹善道-參議宅, 尹仁美-生員宅(正字宅, 別坐宅)
尹爾錫-典簿宅(尼山宅), 尹斗緖-進士宅, 尹顯緖-星山宅, 尹柱興-監役宅
또한 본서에는 奴婢成冊이 전하고 있는데 이에는 노비의 연령에 따라 老壯弱으로 구분하고 있다. 老婢는 50세 이상, 壯婢은 15세에서 49세까지, 弱婢은 14세 이하의 어린 노비이었다. 이러한 노비성책 또는 奴婢案에는 지역별로 파악된 것, 연령별로 파악된 것 등 상당히 이질적인 문서가 있는 바, 이는 앞으로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셋째, 이 집안의 재산 상황을 알 수 있는 分財記類에는 고려 말 1354년의 許與文記로부터 15세기의 자료는 없고 16세기의 것에 3건, 17세기의 것에 17건, 18세기의 것으로는 6건이 전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넷째, 해남윤씨 고문서에는 659통의 簡札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서울에 사는 아버지가 시골에 있는 아들에게 가사의 처리를 당부한 편지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으며, 특히 40통의 언문간찰이 전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집안에서는 윤선도 이후 자부들에게 국문교육을 시켰던 것 같으며 18세기 이후에는 장문의 국문 편지도 있다. 국문 편지의 내용은 한문 편지보다도 난해하여 이를 주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국문학계의 연구 업적이 있으나, 본 고문서집성이 발간됨으로써 많은 연구가 기대된다.
다섯째, 이 집안에는 앞의 가계에 대한 설명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여러 번의 입양 조처가 있었다. 본서에는 입양하여 예조의 입안을 받은 문서가 종가의 경우 1602년에 윤선도를 입양한 立案文記가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적실과 첩실에서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입양을 허락하도록 되어 있으나 조선 시대 양반 가문의 입양 관례에서는 경국대전의 이 규정은 사문화되었다. 그래서 庶子는 종가를 잇지 않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었다. 또한 경국대전의 규정에는 양자로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차자 이하이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후반부터는 종가의 입양에는 생가의 장자를 입양시키는 사례가 일부의 추세가 되었다. 그러나 해남윤씨의 경우에는 경국대전의 이 규정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상같이 해남의 연동 종가에 전해 오는 고문서는 한 가문의 문서로는 대단히 많은 분량이다. 그 것은 시대적으로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부터 일제시대의 秋收記, 賭租記 등 중요한 자료가 많으며, 문서의 종류도 각 종의 敎旨를 비롯해서 所志類‧立案類‧完文類‧分財記 등 다양한 유형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고문서자료를 통하여 당쟁사, 사회사, 경제사, 법제사, 풍속사, 생활사, 국문학사, 한문학사 등의 다방면에 걸친 학문 연구에 귀중한 기초자료로 널리 활용되어 조선후기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5. 綠雨堂의 指定文化財
□ 國寶
恭齋 尹斗緖 自畵像(제240호)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인 윤두서의 자화상. 종이바탕에 淡彩. 세로 38.5㎝, 가로 20.5㎝. 국보 제240호. 전라남도 해남 녹우당 소장.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문헌상으로 보면 이미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듯 <恭愍王照鏡自寫圖>가 허목의 『眉叟記言』에 보이며, 김시습에게도 老少 두 자화상이 있었음이 『매월당집』에 보인다. 또한, 18세기에 들면 이광좌(李光佐)․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 등도 전해온다. 특히 윤두서는 그의 친구였던 심득경(沈得經)의 초상화를 사후에 제작한 바 있으며, 그 때 화폭 속에 그 인물이 지닌 특징적인 분위기 표출에 성공함으로써 전신사조(傳神寫照)에 뛰어남을 보여주어 가작으로 평가되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상용형식이나 표현기법 등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화폭 가득히 안면만을 사출하였는데, 자아인식이 수준높게 묘사되어 있다. 우선 안면은 보는 사람이 정시할 수조차 없으리만큼 화면 위에 박진감이 넘쳐흐르는데, 자신과 마치 대결하듯 그린 이런 자화상은 전후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초상화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화법은 당대의 기법을 응용하여, 안면은 깔끔한 구륵(鉤勒)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그 붓질이 몰리는 곳에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게끔 하였다. 또한, 이 화상에서는 점정(點睛)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다지 많지 않은 연발수(蓮髮鬚) 형태의 수염이 안면을 화폭 위로 떠밀듯이 부각시키고 있다.
□ 寶物
1) 海南尹氏家傳古畵帖(제481호)
윤두서의 그림을 엮어 만든 화첩. 해남 윤영선 소장. 보물 제481호. <가전보회 家傳寶繪>와 <윤씨가보 尹氏家寶>의 두 종류가 있다. 비단에 채색. 32.8×40.3㎝. 윤덕희가 1719년에 아버지 윤두서의 작품을 화첩으로 꾸민 것이다.
1722년 남쪽 지방을 여행하던 이하곤(李夏坤)이 11월 16일에 해남 녹우당에 들러 잘 때 윤덕희가 윤두서의 화권(畵卷)을 보여주면서 남의 집에 소장한 윤두서의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바꾸어 와서 그 중에 좋은 것만을 골라 화첩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두 화첩이 그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전보회>에는 산수화 및 산수인물화 15점, 화조화 3점, 마도가 1점, 고사인물화 1점, 사군자 1점, 용도 1점, 초서 1점 등 22점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화첩은 모두 부채그림으로 되어 있다. 초서로 쓴 <차의정무사 此意靜無事> (1715년)는 과감한 장법과 유려한 흐름 속에서도 힘찬 필세를 구사한 작품이다.
<희룡행우 戱龍行雨>는 용을 그려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화룡기우(畵龍祈雨)의 화제로서 부채 상단에 비구름을 몰아오는 용의 모습이 부채살의 흐름과 상응하여 비를 쏟아 붓는 듯이 표현하였다. <윤씨가보>에는 산수화 및 산수인물화 23점, 풍속화 5점, 나한도 2점, 인물화 4점, 사생도 3점, 마도 5점, 화조화 2점 등 모두 44점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화첩에는 그의 회화사적 의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 다수 실려 있는데, 풍속화인 <짚신삼기>, <나물캐기>, <선거도> 등은 18, 19세기에 유행하는 풍속화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짚신삼기>를 보면 이전의 산수인물화의 형식에 등장인물만 고사(高士)에서 농부로 바꾸어 새로운 풍속화를 시도하고 있다. 윤두서는 말을 사랑하여 말을 타지 않았고 시종들에게 말을 함부로 부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극진한 애정 속에 그린 말그림이 그의 장기가 되었는데, 이 화첩에 실린 <유하백마>가 그의 대표적인 마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매우 정연한 자세의 말을 대비시킨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치밀하게 그린 버드나무와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말에서 사실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을 본 이하곤은 “이것들은 평생에 뜻을 얻은 보배들이다.”라고 평가하였는데, 그의 화풍과 회화사적 업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2) 尹孤山 手蹟關聯文書(제482호)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尹善道)의 수적과 관계문서. 보물 제482호. 수적으로서는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금쇄동기 金鎖洞記』․『산중신곡 山中新曲』이 있다. 『금쇄동집고』는 윤선도가 금쇄동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도연명(陶淵明)․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 중국시인들의 시구를 모아 자필로 쓴 것과 자신이 지은 한시, 우리말로 쓴 단가를 합하여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금쇄동기』는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자필본 한시집이다. 『산중신곡』은 보길도(甫吉島) 금쇄동에서의 자신의 불우한 생활과 풍자적인 내용을 담아서 지은 단가 20편을 모은 고본(稿本)으로, <만흥 漫興>․<조무요 朝霧謠>․<오우가 五友歌>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국문학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문서로는 ⌈은사첩 恩賜帖⌋ 2권, ⌈예조입안 禮曹立案⌋이 있다. 그 중 은사첩은 인조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孝宗)이 윤선도 집안에 쌀․베․잡물 등을 내린 사송장(賜送狀)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이다. ⌈예조입안⌋은 1602년(선조 35) 6월 2일에 예조에서 발급한 계후입안(繼後立案 : 생전이나 사후에 자신의 대를 잇도록 양자를 세운 것을 문서로 작성한 것)이다. 그 내용은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인 선도를 큰댁 유기(唯幾)에게 양자로 들이는 일을 예조로부터 입안을 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가족제도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종손가인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다.
◦ 금쇄동집고
조선 인조 때 孤山 尹善道가 자신이 국한문으로 지은 시조와 한시를 모아 친필로 엮은 가첩(歌牒). 단권 필사본. 이 저작은 윤선도가 자신의 시우(詩友)였던 이명원(李明遠)에게 부치는 글인 집고의 부기(附記)에 “말하고 싶은 회포를 무료히 옛 시구로 모아 보았다. 이는 진실로 이른바 난제를 버리고 고인의 시를 돌이켜 생각함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창작의도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2폭으로 접은 절첩본으로 크기는 가로 11㎝, 세로 28.6㎝이며, 표지는 남색(藍色)천으로 되어 있다. 이 가첩에는 <증반금 贈伴琴>․<추야조 秋夜操>․<춘효음 春曉吟> 등 시조 3수와 기타 한시(집고시)를 수록하고 있다. 시조의 경우 작품의 제작연대가 밝혀져 있어 중요한 자료적 의의를 가진다. 이 가첩이 윤선도의 친필본이란 점에서 그 동안 이들 작품이 모두 을유년(1645)에 지어졌다고 한 『고산유고 孤山遺稿』 등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유고』에서 ‘山中續新曲二章(산중속신곡 2장) 古琴歌一章(고금가 1장)’이라고 한 세 편의 시조가 곧 <추야조>․<춘효음>(산중속신곡 2장)과 <증반금>(고금가 1장)이다.
윤선도의 한시 집고 중에서 <집고제선기인 集古題扇寄人>이라는 제목의 5수로 되어 있다. ‘집고(集古)’란 중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시구를 모아서 일관된 주제 아래 작자의 정서와 의도 혹은 취향에 부합되게 가려 뽑아 새로이 한 편의 통일된 시로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해학(海鶴)이 한번 날아간 뒤로/가을 하늘에 밝은 달이 걸렸네/찬바람 때로 대나무를 흔드니/거닐며 찬 하늘을 노래하네(海鶴一爲別 秋空明月懸 霜風時動竹 散步詠凉天).” 여기서 기구(起句)는 유종원(柳宗元)의 시구에서 취한 것이다. 승구(承句)는 맹호연(孟浩然)의 시구에서, 전(轉)과 결구(結句)는 위응물(韋應物)의 시구에서 가려 뽑아 이들을 모두 합쳐 한 편의 새로운 시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집고는 원래 중국 유명 시인의 시구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저작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집고를 통해 작자의 시작(詩作) 수업의 상황과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있어서 자료의 측면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집고시에 모은 한 글자 한 구절이 모두 작자의 정서와 부합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하여 작자의 시적 정서의 지향점을 파악할 수도 있다. 고산의 집고시는 모두 7편인데, 여기에 선택된 중국 시인은 모두 52인에 이른다. 그 가운데 소식(蘇軾)의 시구가 12회, 두보(杜甫)가 11회, 이백(李白)과 위응물이 8회, 한유(韓愈)가 7회 인용되어 있어, 이들 다섯 사람이 가장 많이 인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집고에 선택된 시인은 모두 당․송(唐宋)시대의 인물이며 빈도는 당나라의 시인이 우세하다. 그 가운데 자연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노래한 자연파 시인들인 맹호연․왕유(王維)․위응물․유종원․도잠(陶潛) 등의 시구가 두드러지게 선호되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시가 윤선도의 자연미에 대한 시적 형상화에 중요한 정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란 점을 가늠할 수 있다. 이 ≪금쇄동집고≫는 전라남도 해남 녹우당의 고산유물관에 다른 고산의 가첩인 ≪산중신곡 山中新曲≫ 등과 함께 소장되어 있다.
◦ 금쇄동기
이 책은 금쇄동 주변의 산천초목을 대상으로 심회를 서술한 작품으로 모두 3,834건으로 구성된 장편 수필이며, 전체적 구성은 4단락 25경으로 이루어 있다. 고산은 이 장편 수필을 서차적․묘사적․연상적 형식으로 서술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금쇄동 절정처에 이르는 과정을 행로를 따라 서술해냄으로써 서차적 진술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대경에 이르렀을 때마다의 주변이나 사물 묘사는 뛰어나다 할 수 있고, 특히 회심당에서의 술회는 연상적 진술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배경에는 유학과 도교사상이 스며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는 풍수사상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금쇄동이 고산에게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멀어져 있었다면, 고산은 아마도 그곳에서 은거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산의 시가작품과는 정서적․철학적 측면에서 밀접한 친인성을 지니고 있어 작품의 장르와 지어진 장소를 뛰어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의 정서와 사상은 이 보다 약 10년 뒤에 지어진 ≪어부사시사≫에까지 일관되게 흐르고 있어, 고산의 恒常性과 사상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산이 이 작품에 담고 있는 정서와 사상은 장르를 초월해서 교차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시공을 초월하는 시대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 산중신곡
1642년(인조 20)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연시조. 윤선도는 성산현감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병자호란 때에 의병으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된 뒤 임금의 환도에 즉시 문안하지 않았다 하여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풀려 나온 뒤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고산이 전라남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서 머물면서 지은 시조로 모두 18수이다. 세부 내용은 <만흥 漫興> 6수를 비롯하여 <조무요 朝霧謠>․<일모요 日暮謠>․<야심요 夜深謠>․<기세탄 饑世嘆> 4수, <하우요 夏雨謠> 2수 및 <오우가 五友歌> 6수 등18수이다.
특히, <만흥> 6수에는 벼슬하지 않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을 작자의 분수에 맞는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애써 자신의 울분을 달래는 쓰라린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인간세계에서 소외된 작자의 고독을 절실하게 드러내어 말하기도 하였다. 결론에 해당하는 제6수에서는 임금의 일을 도와 충성을 바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음의 <조무요>․<하우요>․<일모요>․<야심요>․<기세탄>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을 써서 당대의 정치현실의 암흑상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기세탄>에서는 환자(還子)의 폐해를 시운으로 돌림으로써 현실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계층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우가> 는 자연을 탐구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자연 속에서 인간적 윤리를 발굴해 보이고 있다. 여기서 ‘물․바위․솔․대․달’의 다섯 가지 자연물은 긍정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선택된 것이다. ‘구름․빛․바람소리․꽃․풀․잎․나무’는 부정적 가치를 지닌 자연물로 ‘물․바위․솔․대․달’에 대비되어 나타난다.
즉, 전자는 유교의 실천덕목인 청결성․항상성․의연성․강직성․중용성․통달성․고고성(孤高性)․겸선성(兼善性)․침묵성을 표상하는 데 반해, 후자는 그 반대지향인 혼탁성․일시성․응변성(應變性)․편벽성을 표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바위․솔․대․달’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벗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달’에서 표상된 관념인 겸선성이 여타의 관념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산중신곡>에는 작자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집약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 恩賜帖 : 4장 참조
◦ 禮曹立案文書 : 4장참조
3) 高麗 至正14年(1354) 奴婢文書(제483호)
1354년(공민왕 3) 8월에 직장동정(直長同正) 윤광전(尹光琠)이 아들 단학(丹鶴)에게 노비 1구를 봉사조(奉祀條)로 물려준 문서. 고려시대 노비의 양여와 이의 입안(立案)하는 절차를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이다.
문서의 구성을 보면, 재주(財主)인 아버지 윤광전이 노비 1구를 아들 단학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증보(證保)․필집(筆執)을 갖추어 작성한 허여문기(許與文記), 단학이 받은 노비 1구에 대한 입안을 위하여 탐진감무(耽津監務)에게 올린 입안신청소지(청원서), 증인과 필집이 탐진감무에게 올린 입안신청소지, 탐진감무가 발급한 입안 등으로 되어 있다.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면서 크게 훼손된 것을 윤광전의 12대손 윤덕희(尹德熙)가 1755년(영조 31)에 장첩(裝帖)으로 꾸미고 ‘傳家古蹟’이라 표제를 붙였다. 문장 내용은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다. 해남윤씨(海南尹氏) 종택(宗宅)인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녹우당의 고산유물전시실에 보전되어 있다.
□ 史蹟
綠雨堂(제167호) : 2장 참조
□ 天然記念物
蓮洞 비자나무숲(제241호)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비자나무숲. 천연기념물 제241호. 면적 99,000㎡.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중시조 효정(孝貞)의 사당 뒤에 있다. 나무의 나이가 530년 가량 된 숲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 20m 내외에 가슴높이의 줄기지름 1m 정도, 수관(樹冠 : 나무의 줄기 위에 있어 많은 가지가 달려 있는 부분)의 지름 15m 정도 된다. 숲 바로 밑에는 곰솔이 우거진 가운데 소나무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 곰솔 중 가장 큰 것은 높이 25m에 가슴높이지름 1m 내외이다. 숲 밑에는 사스레피나무․참식나무․마삭덩굴․개비자나무․남오미자․송악․모새나무․보리밥나무․자금우․동백나무 등의 상록수종과 더불어 맥문동․실맥문동․춘란 등이 여기 저기에서 자라고 있다.
숲의 윗가장자리에는 커다란 참식나무가 특히 눈에 띈다. 흔히 자라고 있는 종류들은 굴참나무․상수리나무․갈참나무․졸참나무․서어나무․개서어나무․말채나무․노린재나무․덤불작살․말오줌때․노간주나무․청미래덩굴․댕댕이덩굴․조록싸리․길마가지나무․진달래․감태나무․철쭉 등이며, 그 밑에 구절초․새․개솔새․개억새․신감채․며느리밥풀꽃․반디지치․싱아․네잎갈퀴․활량나물 등이 자라고 있다.
한편, 산록에는 효정의 아들 4형제가 각각 한 그루씩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뒷산의 비자나무숲을 잘 보호하여 왔는데, 이것은 시조의 유언을 잘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윤씨의 시조는 뒷산의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부록 1> 海南 尹氏의 家系圖
<綠雨堂 所藏 典籍現況>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