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이나 창고를 뒤지다가 아주 어렸을 때 읽던 동화책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위대한 왕> <꿀벌 마야의 모험> 등의 표지를 단, 누렇게 부풀어 오른 책들을 발견하면 그날 하루는 의례 그 축축하고 노래진 책장들을 넘기는 것으로 훌쩍 넘어 갑니다. 어렸을 때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분홍신>을 다시 읽으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순간까지 자의건 타의건 분망하게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삶이라는 메타포를 읽어내고는 뜬금 없는 비감에 사로 잡히기도 합니다. 물론 <분홍신>은 좀 이상한 동화니 이런 감정이 ‘동화적 정서’라고 볼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즐거운 동화조차 비감과 함께 복원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안데르센을 벗어나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토토로가 착하고 어린 두 자매와 함께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에서 불현듯 눈물을 흘린다면 ‘아, 어렸을 적 나도 날아보는 게 정말 절박한 소원이었건만’ 하는 묵은 사실로 기억이 환기되기 때문이죠. 다락방에 책들을 던져 두었던 긴 시간 동안 쌓아올릴 수 밖에 없었던 생에 대한 씁쓸한 직관이 묵은 동화를 만나면서 시간이 정지된 것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죠. 그래서 동화책을 펼치는 순간 먼지 쌓인 오르골처럼 아롱져 오르는 예쁜 메타포들은 예쁜 만큼 가혹하고, 그 순간 어른이 된 우리는 어렸을 땐 절대 풀지 못했던 태생의 비밀 같은 생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열쇠의 이름은 상실입니다. 동화의 효과는 동화가 그려내는 세상의 이면을 볼 능력이 없는 어린이보다는 그럴 능력이 있는 어른들에게 직효 합니다. 다시 말해 동화 텍스트 안에서 불현듯 부재와 부조리를 느끼는 불행한 어른들에게야 동화는 진정한 미덕을 발휘합니다. 까로의 손을 놓은 쥬네의 세 번째 영화 <아멜리에>는 저에게 그런 동화였습니다.
누렇게 색이 바래고 머리카락 같은 줄이 죽죽 그어지는 필름 조각들이 릴레이로 이어지며 시작되는 <아멜리에>는 소통 불구가 트라우마가 된 익명인들의 삶을 아멜리에(오드리 또뚜)라는 요정의 시선 속에서 구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깜찍하고 유쾌하지만 거기엔 아멜리에 자신의 비극적 성장 과정에 대한 ‘인식적 거부’라는 아픈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애정 결핍으로 인해 자기 반영 능력이 완전히 결여된 아멜리에는 세상과의 소통을 직접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두려워 피하면서 대신 자기와 똑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의 삶을 바꾸는 귀여운 오지랖을 펼칩니다. 마술적이고 유아기적으로 펼쳐지는 환타지의 파노라마는 실재와 필사적으로 숨바꼭질을 하는 아멜리에의 의지적 시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 파리의 풍광이 ‘팬시화된’ 파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귀엽지만 전제적 난폭함도 숨어있는 아멜리에의 오지랖이 노스탤지어와 퇴행적 낭만주의로 가득 차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니노(마띠유 까소비츠)와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필사적으로 소외시켰던 세상과 아름답게 화해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모든 것은 동화가 딛고있는 설정인 ‘가짜’ 세상을 위한 마땅한 장치들이니까요. ‘세계화’니 ‘우민정책’이니 하는 말로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통렬하게 고발한 프랑스 좌파 진영이나, 반 자본주의적 코드들이 생산적이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극찬한 우파 진영이나 모두 저에겐 동화의 장치를 인정하지 않거나 과잉 수용하는 극단적 예로 보일 뿐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쉽사리 일상적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영화에서 보물 상자를 찾은 노인처럼 관객들은 낡은 오르골 안에서 왈츠를 추는 아멜리에 인형을 보면서 미소 짓겠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온전히 할당되지 않을 어떤 행복에 대해 한숨을 지을 것입니다.
왈츠를 추는 아멜리에… <아멜리에>의 사운드트랙은 <델리크트슨 사람들>의 까를로스 달레시우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안젤로 바달라멘티에 이어 얀 띠에르쌍이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폴카, 행진곡, 왈츠 등의 유럽적 사운드를 색이 바랜듯한 질감으로 표현해 내었던 <델리카트슨> 보다 정격하고 고급하긴 하지만 <아멜리에>역시 의고적인 취향의 사운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화적으로 도식화된 아멜리에의 유년 시절에 대한 설명과 함께 흘러 나오는 “J'Y SUS JAMAIS ALLE는” 프렌치 아코디언과 자일러 폰, 오르갠이 고급한 뮤직박스를 연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음악입니다. 프렌치 아코디언과 함께 조심스럽게 춤 스텝을 밟듯 뿡뿡거리는 관악 사운드, 바로크 시대를 연상케 하는 합시코드 등이 향수로 가득한 프랑스의 풍광을 그려내는 “LES JOURS TRISTES(INSTRUMENTAL) “ “LA VALSE D'AMELIE”도 일품입니다. 궁정 음악과 유랑 극단 음악이 뒤섞인듯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이 음악들은 <아멜리에>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음감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쥬네 영화의 사운드트랙들은 ‘소장용’으로 충분히 가치를 발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멜리에>역시 손색 없는 음악들로 가득 차 있어서 기쁩니다.
델리카트슨에 등장했던 “Una Lagrima Tuya”나 “Dreams of Old Hawaii” 가 좋으셨던 분이라면 <아멜리에>의 “Guilty”나 “SI TU N'ETAIS PAS LA “ 가 퍽 반가우실 겁니다. 전자들이 스페인 탱고나 하와이안 서프 음악에 대한 ‘회고’라면 후자들은 플로어 댄스와 클래시컬 샹송에 대한 회고가 되겠네요. 이른바 ‘축음기’ 시절의 유럽을 그려내고 있는데요. 아멜리에의 축음기에서 이 음악이 울려 퍼지던 것을 기억하세요?
고즈넉하게 가라앉는 피아노 소품인 “La Dispute”나 18세기 집시 무도곡의 정서에 완전히 발을 담그고 있는 “Soir de Fete”역시 쥬네 풍 사운드에 다른 결들을 불러 넣고 있습니다. 앞선 모든 음원들을 한 통에 넣고 돌리는 만화경을 보는 듯한 “Le Banquet”와 함께 <아멜리에>는 훈훈한 결말로 막을 내립니다.
동화가 그려내는 화해적 세상은 가짜 세상입니다. 그것이 동화를 이루기 위한 마땅한 전제입니다. <아멜리에>역시 그런 가짜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 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진위를 구별해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그 모든 가짜들은 명백한 의도를 가진 장치들이며 그 의도는 결국엔 ‘미망’으로 귀착하기 위해 먼 곳에서부터 돌아 들어오는 노란 벽돌길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멜리에>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한 구석으로 마음이 헛헛하고 애틋했던 것은 그때문일 겁니다. 상실과 미망을 위한 동화. 이렇게 부제를 달아도 될까요?
<아멜리에> OST tracks
1. J'Y SUS JAMAIS ALLE
2. LES JOURS TRISTES(INSTRUMENTAL)
3. LA VALSE D'AMELIE
4. COMPTINE D'UN AUTRE ETE : L'APRES MIDI
5. LA NOYEE
6. L'AUTRE VALSE D'AMELIE
7. GUILTY
8. A QUAI
9. LE MOULIN
10. PAS SI SIMPLE
11. LA VALSE D'AMELIE(ORCHESTRA VERSION)
12. LA VALSE DES VIEUX OS
13. LA DISPUTE
14. SI TU N'ETAIS PAS LA(FREHEL)
15. SOIR DE FETE
16. LA REDECOUVERTE
17. SUR LE FIL
18. LE BANQUET
19. LA VALSE D'AMELIE(PIANO VERSION)
20. LA VALSE DES MONST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