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섬, 강화도를 가다
강화도는 역사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한 섬이다. 역사적으로는 구석기부터 청동기까지 수많은 선사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조정이 이곳으로 천도하여38년 동안이나 도읍(都邑)의 역할을 하였다. 근대에는 강화도조약(1876)이 이곳에서 체결되었으며, 군사적으로는 한강의 입구에 위치하여 수도방어의 최전선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행궁과 외규장각을 두었던 것도 군사적 요충이라는 특징 때문이었다.
지난 10월 27일 평화센터 역사기행단 네 번째 답사가 있었다. 전반기 2회, 여름방학 2박 3일 역사캠프, 후반기 2회를 계획했으니 이번이 마지막 답사인 셈이다. 답사 며칠 전에 자료집을 준비하고, 하루 전날 가방을 꾸리는데 일기예보에서 토요일에는 전국적으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고 예보한다. 단풍잎 고운 가을에 가랑비 정도야 애교로 봐줄만 하지만 천둥번개에 폭우는 아무래도 걱정스럽다. 아침에 일어나서 베란다 창문을 열었는데 굵은 빗방울이 들이친다. 참여율 저조도 우려되었고 하루 일정을 소화하기도 힘들 것 같다.
걱정을 하며 약속장소인 남부문예회관 앞으로 갔다. 예상대로 10여 명의 아이들이 불참했지만 이철형기자, 노수안 선생님을 포함하여 21명이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21명은 답사하기에 딱 좋은 인원이다. 통상 2시간 반이 걸리는 강화도길을 노련한 기사님은 2시간 만에 도착하였다. 초지대교를 건너며 우선 하늘을 바라보고, 800~900미터밖에 되지 않는 좁은 강화해협을 내려다보았다. 강화도의 하늘과 땅에도 폭우가 쏟아진다.
오늘 우리의 일정은 삼랑성(정족산성)과 전등사, 정족산 사고(史庫)를 답사한 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광성보와 강화역사박물관, 고인돌공원을 답사하는 코스다. 삼랑성 남문 주차장에서 내려 아이들과 함께 남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 좌우의 아름드리 가로수에는 빨갛고 노란 단풍이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남문 앞에서 영조 때 지었다는 종해루 위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 헤매었지만 열쇄가 굳게 잠겨 아이들을 성벽 위로 오르게 하였다. 답사는 한걸음쯤 떨어져서 바라보기보다는,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위치와 시선 안으로 들어가서 보는 것이 좋다. 나의 답사 컨셉은 병인양요의 명장 양헌수장군과 병사들의 시각과 마음에서 병인양요를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좁은 성벽 위로 18명의 아이들과 두 명의 안내자가 올라서니 굵은 빗줄기 속에 우산끼리 서로 부딪쳐 부지하기가 어렵다. 지금부터 146년 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160명의 프랑스 해병대에 맞서 풍전등화같은 조선을 지켜냈던 176명의 병사들과 370명의 민간포수들의 함성과 떨림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려 애썼지만 아이들은 내 말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눈치다.
성벽을 내려와 전등사를 오른다. 전등사는 지난겨울 다녀가고 몇 달 만에 다시 찾았다. 답사는 장소성이 갖는 의미도 있지만, 계절에 따른 이미지도 사뭇 다르다. 가을 전등사를 에워싼 정족산 자락은 온통 노랗고 붉은 단풍잎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그것은 경내의 은행나무, 느티나무도 마찬가지다. 풍경에 눈이 멀어 멀거니 바라만 보다가 아이들에게 20분쯤 자율답사를 하고 대조루 아래로 모이라고 말했다. 20분의 짧은 시간 동행한 노수완 선생님과 전각들을 둘러보았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전등사에는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하사했다는 옥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들과 고승 대덕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숨겼는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추녀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만 요란하게 울린다.
명부전 뒤쪽 계단을 따라 정족산 사고(史庫)에 오른다. 사고(史庫)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국가와 개인의 귀중한 정신문화유산을 보관하던 보물창고다. 정족산 사고는 1653년에 설치되었다. 그 해 마니산 사고가 화재로 귀중한 서적들을 불태우자 정족산에 사고를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고 한다. 병인양요 때는 정족산 사고도 약탈을 면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적의 일부가 분실되었고, 현재는 대부분의 전적(典籍)들이 서울대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를 하려는데 장대비가 아이들 우산 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떨고 있는 아이들을 우선 정족산 사고 삼문(三門) 아래로 피난시켰다. 정족산 사고에서의 나의 멘트는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는 것,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문화적 가치는 어떠한가’, ‘가치 있는 삶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이어졌다. 다소 멘트가 길었지만 착한 우리 기행단은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다. 에구, 이쁜 것들!
삼랑선 남문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격대비 내용은 허술했지만 나름 맛은 괜찮다. 나는 비빔밥보다 강화도 특산 ‘순무김치’가 더 반가웠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점심상을 물릴 즈음 이철형군이 잠시 한쪽으로 불러내더니 폭우에 아이들 옷과 신발이 많이 젖었으니 일정을 하나 줄여서 운영하면 어떡하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던 참이라 단번에 동의하였다.
강화역사박물관과 고인돌공원은 오후에 선택한 답사처였다. 고인돌공원은 강화도가 근대 뿐 아니라 선사시대부터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특히 부근리 고인돌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어서 의미가 깊다. 장대비가 쏟아지자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꺼린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적이니까 한 번은 꼭 보고 가자고 설득해서 겨우 답사를 마쳤다. 작년에 갑곶돈대에서 이전하여 재개관한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사진과 도표, 유물로 설명한 공간이다. 아직까지 향토박물관이 없는 평택시가 한번쯤 눈여겨봐야 할 곳인데 공무원들 가운데 와 본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돌아올 때 쯤 비가 멈칫 한다. 버스 안에서 아이들과 하루 동안의 답사를 정리하고, 몇몇 아이에게는 답사기를 부탁했다. 글을 쓰는 일은 누구에게나 부담인 듯 할 수 없다고 뒤를 빼던 아이들도 끝내 내 요구를 받아들인다. 귀여운 것들, 예쁜 것들, 다음에 또 만나자.(2012.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