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미국도 고맙다
조선은 518년 동안 27명의 이씨 성을 가진 왕들이 통치했었다. 그중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치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위인들이다.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들의 침입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하여 있던 길도 폐쇠시키려 한 왕이 있었는가 하면, 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백성을 나 몰라라 하고 중국으로 망명할 궁리를 했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철도를 놓고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을 때 우리 국왕들은 조선 백성과 하층 노예들의 등골만 빼먹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 말기가 되었을 때 518년 동안 수도 기능을 유지했었던 한양은 일부 고관대작들의 집을 제외하면 초가집 일색이었다. 통일신라 때 수도 서라벌 전체가 기와집으로 되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고려 ➔ 조선을 지나오며, 발전은커녕 국가 경제를 도탄에 빠트려 놓은 무능한 왕조가 백성 위에 군림하며, 인권을 짓밟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리마다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진동하는 인분이 널려있었는데도, 조선에는 오·폐수가 정화되는 하수구를 제대로 만들 기술력도 재정능력도 없었다. 이때까지도 석탄을 채굴하는 기술을 보유하지 못해서 아궁이는 나무만 먹는 탓에 삼천리강산은 벌거숭이였다. 그러니 홍수가 나면 시뻘건 각혈을 토해내야 할만큼 미개할 수밖에 없었다. 미신 숭배가 판을 치고, 음모를 일삼는 사람들이 들끓었던 나라가 조선왕조였다.
급기야 고종과 민비 일족은 부정부패로 나라를 거덜 냈고, 이권이 되는 것은 외국에 마구잡이로 팔았으며, 결국 왕과 왕족, 고관대작, 지방 유지들은 일제로부터 한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거금과 높은 작위를 받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임금이 내준 나라를 되찾으려 일본에 저항했던 의병들은 대부분 평생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억눌려 살았던 민초들이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자결하는 대신 일족일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사람들이 군림했던 조선왕조는 부활해서는 안 되는 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에다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 기업을 이전시켜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백성들의 고혈을 짰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백성들의 처지에서 보면 왕조 세도가들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 더 못하지 않았을 수 있다. 왕조시대에는 백성이나 노비들을 재판도 없이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 했었다. 상전이 마누라나 딸을 겁탈해도 저항할 수 없었고, 환대금의 무지막지한 폭리를 감당하지 못해 두탁 노비의 길을 가야 했었다. 노비들은 거들먹거리는 왜놈들보다 양반님네의 에헴 소리가 더 무서웠을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에서 아침부터 공장 돌아가는 소리가 흘러나오며 더 이상 조용하지만은 않은 나라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식민지인들을 독려하여 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3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 미군정청의 집계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이룩한 재화는 남한 23억 북한 29억 등 총 52억 달러였다. 미 군정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까지 뒤져서 돈과 돈 나갈만한 금괴와 패물들을 사그리 압수했었다. 민간인은 1,000엔, 군 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까지밖에 가져갈 수 없었다.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은 47만여 명이었다. 그들이 조선에서 벌었던 돈을 미 군정은 탈탈 털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가야 했었다.
이 중 남한지역의 23억 달러를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게 넘겨주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귀속재산(Vested Property)’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인들로부터 빼앗은 23억 달러를 단 한 푼도 손대지않고 고스란히 이승만 정부에게 넘겨주는 결정을 했었다. 북한을 지배했던 속 시커먼 소련은 29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을 빼돌렸고, 심지어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의 기계들까지 해체해서 자기 나라로 가져갔었다. 미국이 가로채지 않고 그대로 넘겨준 환수재산이 대한민국 건국 자금과 초기 국가 운영자금이 되었다고 볼 때, 재화를 일궜던 일본인들에게도, 그 돈을 그대로 넘겨준 미국에도 감사할 일이다. 툭하면 반일·반미를 내세우는 세력이 있는데, 일본과 미국이 아니었다면 건국 초기 나라 살림을 꾸릴 자금이 전혀 없던 최 빈민국 신흥 정부가 대한민국이었다. 그것을 알고나 하는 일인지 묻지않을 수 없다.
그러고도 일본인들의 수중에서 나온 환수재산 23억 달러는 그들이 조선 땅에 건설해 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합한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해당한다. 그들이 건설한 사회간접자본이 한국 경제발전의 시금석(試金石)이 된 부분까지 고려하면 일본의 폭망 수준은 백두산이고, 한국의 횡재총액은 한라산 높이쯤 된다. 해방 후 대한민국 경제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주식 회사급 기업들을 기반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만든 기업은 대부분 그 회사의 직원이었거나 관련이 있던 친일 조선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기업들로 성장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세운 업체는 ‘상회’라는 작은 규모의 개인 가게 일색이었고, 일본인이 만든 기업이 오늘날 한국의 대기업이 되는 발판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예를 들겠다.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민비의 인척인 민덕기가 받아서 ‘조선맥주’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된 것이었다.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의 차지가 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를 해방 후 ‘삼화제철’로 상호 변경켜 동국제강을 만든 사람은 장경호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으로 바뀌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의 손을 거쳐 ‘동양시멘트’ 로,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은 김수근의 찾지가 되어 ‘대성그룹’으로 탈바꿈 하였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은 김인득을 거쳐서 ‘벽산그룹’이,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이 해방 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조선우선’은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넘어가서 ‘대한해운’이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 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넘겨져서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선만주단(鮮滿紬緞)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을 따서 지은 것이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은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의 ‘쌍용그룹’ 모태가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고,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가 넘겨받아 ‘한국생사’로 탈바꿈 하였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은 김형남, 김용주에 의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은 처음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는데, 나중에 제일제당(현CJ)이 이를 흡수했다. ‘쥬가이’제약은 서울사무소 관리인에게 불하되어 현 ‘중외제약’이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은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고,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는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한참 후에 ‘대한통운’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이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고,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였던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조선생명’은 이병철에 의해 ‘삼성화재’로 탈바꿈 한다. ‘조선화재 해상보험’은 ‘동양화재 해상보험’이 되었다가, 현재의 ‘메리츠 화재해상보험’이 된 것이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이 ‘신세계 백화점’으로 바꾸었고, ‘조지아 백화점’은 ‘미도파 백화점’의 전신이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에 의해 ‘해태제과 합명회사’로 바뀌었고,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식품은 해방 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 후에 ‘풍국제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된 것이다.
큰 것만 대충 추려서 이 정도인데, 우리나라 기업 중 최초 설립자가 일본인이 아닌 경우를 찾기 힘들고, 일본기업을 불하받아 회사를 키우고 그 회사에서 먹고 살아온 사람들, 앞으로도 그럴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치부한다면, 우리나라에 친일파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일본인들과 인연이 닿아 일본 기업을 인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현재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죽창가를 부르며 해묵은 친일 논쟁을 부추기는 행동은, 몰라도 너무 모르고 누워서 침을 밭고 있는 격이다. 한국 경제의 총화를 누가 무슨 자격으로 환수할 수 있고, 한국의 전 재산을 동결한다면 이로 인해서 생기는 동맥경화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극일의 방법도 아니다.
일본인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일본기업들의 반한 감정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일궜던 재산을 고스란히 빼앗긴데 대한 원한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불하받은 조선인들은 거의 ‘횡재’를 했었다. 조선 땅에서 조선인들을 부려가며 착취한 재산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은 벌기만 했지 제대로 써보지는 못했으니 억울해할 만한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원했던 그림은 절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발전의 기초를 다져주는 역할을 한 셈이니, 고맙게 생각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지난 일이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는 있어야 하지만, 일본인들 미워하는데 국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이제부터는 뒤젓던 일본을 앞질러 갈 책임과 위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극일은 반일 감정 따위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일본도 제대로 알았을 때 가능해진다. 우리는 앞으로 일본을 이겨야 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민낯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피지기(知彼知己)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우리말을 우리나라 사람처럼 할 줄 아는 밀정을 길러 조선에 파견했었다. 드라마에서나 일본인들이 ‘안녕하시므니까’ 식의 조선말을 하지 실제는 밀정들의 조선어 구사능력은 네이티브 스포커 수준이었다. 그런 정탐군들이 수집해간 정보를 통해 조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처럼 훤하게 들여다 보았었는데,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일본을 생떼 쓰는 놈들이이라는 수준 이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일본을 이기려면 죽창가를 부르고 있을 시간에 일본어를 익혀야 한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저들을 배속까지 훤히 들여다 볼 수준이 되어야 극일이 가능해 진다. 말을 잘한다고 매국노가 되는 것이 아닌데, 일본어를 익힌다음 일본의 본모습을 파악하는 노력을 너무하지 않고 있다. 그게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서 쌓은 재화와 그 재화를 창출하게 한 설비 투자를 그대로 환수하여 대한민국 건국 정부에 넘긴 미국 덕분에 오늘날과 같은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가 조성된 것이다. 착취만 하고 발전은 시키지 못한 무능했던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더 신랄한 자아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진상도 제대로 모르면서 반일, 반미 시위가 애국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민중을 호도하는 세력의 비이성적 행동이다. 일본과 담을 쌓는다는 것은 쇄국이 살길인 것으로 오판했던 사람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문을 열어놓고 그들의 속셈을 세세히 파악하여 대처할 방법을 찾는 것이 극일의 시작이다.
잠시 닫아 걸어 재화나 인적교류를 봉쇄시켰던 것은 국익에 도움된 면이 1도 없다. 문을 열어야 우리 것을 내보낼 수 있는 통로도 마련된다. 삼국시대 ➔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7활이면 가져오는 것은 3할밖에 되지 않았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역조가 심했었는데, 이제 옛날처럼 만들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