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어머니, 그 자리에 아직도 코스모스는 피어 있습니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는 인생길같은 고독한 길에 섰다.
고향의 편안함이 자만과 여유로 변해갔고 동심의 추억은 마지막 긴장조차 사라지게 하여 결국 이 힘든 시간을 만들었다.
김제 시민운동장을 나선 발걸음은 어느새 색깔이 극명한 코스모스를 따라 허리띠처럼 이어진 지평선 외길로 들어서고 있다.
3일 새벽에 출발하려던 것을 개막식에 참석하라기에 일정을 변경하여 2일 서울을 출발하여 오후에 축제마당에 도착했다. 수십개의 애드벌룬, 고음과 저음이 합쳐진 음악소리가 웅장한 서막을 알리고 전국노래자랑 인파로 벌써 열기는 하늘을 뒤덮고 남았다.
요기(療飢)도 하고 고향 어르신들께 인사라도 할 마음으로 먼저 부량면 주막에 들어서니 일찍 도착한 재경 향우회 회원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 반갑게 해후했다. 서울에서도 고향일에 애정을 가지고 앞장서 참여하는 존경하는 선배님들이다.
얼마전 영면(永眠)한 면장님을 대신하여 부량면을 이끌고 있는 부면장의 환대가 친근하고 자식을 반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덥석 손을 잡아주시는 자원봉사자 어르신들의 인정이 따뜻하기 이를 데 없다.
고마움에서인지 함께 간 벽량동문회장은 즉석에서 격려금을 지불하는데 서로간 웃음이 넘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행사를 즐기며 다니는데 역시 대한민국 최우수 페스티벌다운 규모와 볼거리다. 쌍용의 위용과 함께 말끔하게 정돈된 행사장, 과거와 달리 구역을 정하여 공연거리, 음식거리등을 구분하여 질서를 잡았고 다양한 체험관을 신설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흥겨운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 두었다.
주최측 김제시의 노력과 정성이 피부에 다가올 정도로 세심한 준비가 놀라울 정도다. 다만 종합축제의 틀을 갖추려다보니 농업과 연결되는 벽골제와 지평선의 테마가 희석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형틀에서 곤장을 맞는 감옥체험이나 행사장 정문에서 현수막까지 걸고 군부사관을 모집하는 모습은 다음 기회에는 다른 모양이었으면 좋겠다.
연날리기가 한창인 벽골제 방죽언덕으로 올라서니 건너편 논길로 자동차 수백여대가 일렬 종대로 또 횡대로 주차되어 마치 들판에서 불쑥불쑥 자동차가 자라고 있는 듯하다. 신태인천의 끝지점으로 과거에는 어둠과 잡초만 무성했는데 세월이 흐르니 문명의 이기(利器)가 이곳까지 잠식해 왔다. 오래전 이곳을 떠난 조상들의 넋이 온다면 상전벽해(桑田碧海)- 생소한 광경에 놀라 뒷걸음으로 도망하실 것 같다.
오후 4시에 개최된 리셉션현장인 청소년 수련관으로 들어서니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홀, 내빈자리에 앉아 있는데 조금전 밖의 기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이 모든 행사의 비용과 노력은 시민(농민)의 몫일진데 그렇다면 정,관계 초청인사보다 고향을 지키는 농민, 효부나 효자, 모범적 학생이나 다문화가족 대표라도 선정했다면 더 빛나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소고기 국밥과 황금(?)보리소주를 마시는 내가 시종일관 불편함이었다면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개막식 현장에서까지 맨 앞줄 초청인 중심으로 그들만의 시간을 오랫동안 할애하여 보내는데 뒷쪽이나 옆에서 선채로 계시는 어르신들께 앉아있는 나로서는 미안함이 많았다. 그 간의 행사 관행을 언급할 수 있을지라도 주객이 전도되는 이런 상황은 반드시 개선 되어야 마땅하다.
어둠이 내려오고 낮과 밤이 교차되는 시간, 조명까지 비쳐진 검푸른 벽골제 하늘의 구름은 천지개벽의 순간을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롭게 펼쳐져 간다.
다음 날 김제 시민운동장 지평선 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처음 본 운동장은 아담하고 깨끗하며 특히 관중석의 담이 낮아 정이 많은 김제시민을 닮은 느낌이다.
수 천명이 참가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참가한 주자들은 신기록이라도 세울 것처럼 여기저기서 날렵하게 몸을 움직인다. 국민의례에 이어 개회선언을 알리는 대회장의 구령이 낭낭하다. 지역 행사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분이라 기억을 하는데 의외의 자리에서 만나니 반가움이 더 크다.
코스 맨 앞에서 출발준비 하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웃음으로 응원을 보낸다.
9시에 출발 총성이 울리고 시민운동장 트랙을 안쪽으로 한 바퀴 돌아 가로수 길을 통과하여 운동장 외곽을 향해 나갔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그 사이 많은 도시의 변화로 인하여 방향 감각조차 무디어 간다.
큰길 4거리에서 지하도를 통과하여 오르막을 지나 완만한 경사길로 내려오니 시내 끝지점 3킬로 군산방향 이정표가 기다린다. 출발 15분이 지났음직한데 땀이 흐르고 숨이 가쁘다.
다른 대회를 준비하면서 아침마다 한강변을 달렸고 그런 자신감으로 우승의 영광까지 안겠다고 주변인들에게 호기를 부리고 참가했는데 고향의 내음에 취한 정신력의 해이와 마라톤의 기본을 경시한 무리한 초반 질주가 이내 고통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5킬로 지점까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스스로에 대하여 질타하는 중얼거림이 달리는 내내 계속 되고 있다.
하프든 풀코스든 긴장의 정신으로 원칙에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여정임을 나는 분명 망각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무거워 속력은 나질 않는데 그 동안 쌓아둔 풀코스 주자의 자존심이 멈출 수도 없게 만드는 답답한 진퇴양난의 시간이다.
송신탑을 지나 대목리 가는 길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듬성듬성하게 피고 옅은색의 큰 키의 한강의 꽃만 보다가 여기의 작고 소담한 그리고 흰색과 붉은색이 뚜렷한 코스모스의 모습을 접하니 감동이 곱절이나 된다. 더구나 사방이 누런 황금 들녘이고 보면 외줄로 가로지른 꽃길의 장관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40년 전 어린시절 처음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거쳐 도회로 떠났었다. 아들을 두고 돌아오는 길에 흐드러진 코스모스를 보면서 그리움에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훗날 가을이 올 때마다 말씀하셨는데 生前의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옴직하다.
코스모스의 한들거림이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길인가하는 착각에 빠지고 상념에 잠기는 동안 오른쪽 야트막한 언덕길 다복(多福)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복이 많은 마을인가 싶고 아니면 복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가 싶으니 방금 전의 추억의 슬픔이 웃음으로 화(化)하여 간다.
서김제 톨게이트를 지나 8킬로지점 아래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활주로처럼 일자로 펼쳐져 있고 달리는 차량행렬이 쏜살같이 빠르게 미끄러져 간다. 확연히 고가도로 위를 흐느적거리듯 달리는 나와는 대조적이다.
김제 하프코스는 짧은 거리임에도 굴곡이 많은 편이어서 지평선의 명칭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다행히 환하게 트인 사방이 호쾌함을 갖게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들녘의 맑고 시원한 가을바람은 땀을 가시게 하는 시원함이 있어 좋다.
반대 방향으로 1등 주자가 숨소리를 멈춘 듯 사뿐하게 지나친다. 열차처럼 오고 가는 주자들이 무표정으로 비켜가지만 언제나 앞서 달리는 주자는 초인(超人)의 모습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11킬로 지점을 지나 500여미터를 앞으로 더 나가니 환호도 없는 반환 아치가 우두커니 선채로 나를 반긴다.고개를 들어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니 건너편 만경저수지 가장자리에 인공으로 설치한 나무 둘레길이 물위에 떠 산모퉁이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주자들의 숨소리와 발소리는 돌어오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장단을 맞춰가며 12킬로 지점을 통과한다. 한가한 시골길은 고즈넉한 적막감뿐이고 이따금 지나치는 주민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주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태연하게 갈 길을 가고 계신다. 오히려 달리는 내가 반가움으로 인사를 하는 처지인데 그렇다해도 특유의 무표정이시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돌다 이내 흔적을 감추고 마는데 그조차 나에게는 무관심하다.
15킬로 지점 숨소리가 거칠어진 주자를 뒤로하면서 힐끔 돌아보니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의 내 자화상과 다름아니다. 화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지만 더이상 손을 내밀 수도 없는 상황이 마라톤은 인생의 축소판임이 분명하다.
초반과 달리 몸이 가벼워 오고 안정된 자세로 제법 속도가 붙는다. 평소에도 후반 레이스의 기록이 좋은 편인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듯싶다. 먼거리를 갈수록 가속이 생기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라톤의 대표선수라도 된듯 사뿐하게 날아가는 내 신체도 참 알 수 없는 구조다.
오른쪽으로 활처럼 휘어진 도로를 벗어나자 성산과 그 위 전망대가 눈앞으로 불쑥 나타나온다. 달리는 내내 밀어(蜜語)를 나눈 코스모스와 내년을 기약하고 왼쪽으로 몸을 돌려 시내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골인 2킬로 지점앞 출발때 지나온 지하터널 오르막을 오르고 뒤를 돌아보니 듬성듬성 오는 주자의 모습이 지친 수캐가 되어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지평선이 만든 영웅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1시간 40분이 지나 주경기장을 향하여 들어선다. 먼저 완주한 주자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힘을 보태는데 저마다 마라톤 기념품으로 받은 쌀을 메고 가는 모습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면이다.
경상도 영덕에 가면 대게를, 충청도 음성에 가면 고추를 받을 수 있을까 하니 여러 호기심이 생긴다.
메달을 걸고 찾아간 하프코스 먹거리코너, 차림이 진수성찬이다. 밥과 김치, 돼지고기와 인절미에 막걸리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푸짐한 인정의 내 고향 김제다.
나와 같은 빨간색 옷을 입은 주자가 아는 듯이 다가온다. 유니폼 마크로 보아 금년 3월에 광화문에서 함께 달린 동아마라톤 일원인데 구미마라톤 소속이다. 멀리까지 와서 참여해 주어 고맙다고 하니 연신 지평선 경관 쥑인다(죽인다)며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만족감을 표현한다.
어깨가 으쓱한 나와 함께 오래된 동지처럼 막걸리 잔으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시민운동장 뒤편으로 오솔길을 통하여 나오는데 가을바람에 잎이 날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성큼 가을이 들어서고 하늘은 유난히 푸르다.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황금으로 물들어 가는 시간이 다시 돌아오면 나는 지평선 어드메쯤 홀연히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황홀한 10월의 시간 - 내마음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어머니, 그 자리에 아직도 코스모스는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