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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히틀러와 유태인 학살에 관하여
독일을 여행하면서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히틀러가 과연 그 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와 내용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또 다른 하나는 독일인 루터는 종교개혁을 왜 했을까? 내가 믿는 개신교는? 카도릭은 개신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등에 관한 의문을 갖게된다. 그래서 난 여행을 하면서도 그리고 여행후에도 그 두가지는 좀 짚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글을 쓰는 기회가 있어 자료들을 수집하여 찾아 보았다. 내가 본 내용을 최소화하여 알아본다. 첨언하는 것은 이 자료가 전부는 아닐수 있다. 많은 역사학자, 의사및 과학자들이 이미 유태인의 학살에 관한 많은 것들을 연구하여 밝혀진 사실들도 방대하다. 그 많은 자료들을 종합한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문외한이 보는 단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두고져 한다. 부담없이 참고 하면 좋겠다.
우리나라 중3 국어 교과서 50p 10번째줄 “유전학 및 진화론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낳게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와 실상도 염두에 두며 알보본다.
젊은 시절의 히틀러는 한때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2번에 걸쳐 미술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만다. 그가 그렸다는 그림을 몇점 본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그림> 아돌프 히틀러는 꿈이 화가였다기 보다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정뱅이에 폭군이였고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죠. 당시 히틀러가 가진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능뿐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화가를 하기위해서 그 당시 엄격하기로 유명한 학교에 시험 보지만 떨어집니다. 히틀러의 형편없는 학력과 그의 그림 실력이 그들의 눈에는 맞지 않았던거죠. 히틀러는 자신이 그림을 몰라주는 그들을 원망합니다. 그 후로 1번더 시험을 보지만 떨어집니다.
히틀러의 생애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사생아로 태어나 시클그루버라는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다가 1876년 히틀러로 성을 바꾸었다. 알로이스는 국민학교를 나왔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오스트리아 재무부의 세관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수도인 린츠 근교로 이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히틀러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1906년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이에 찬성했다.1903, 1908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죽었지만 히틀러는 부모의 유산과 국가의 고아연금이 있었으므로 생활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있는 미술학교에 2차례(1907, 1908)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그후 몇 년 간 빈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신문, 소책자를 읽었고, 역사·정치·민족 문제에 대해 공부했다.엽서나 광고의 그림을 그려서 버는 수입은 불안정했으므로 여러 하숙집을 옮겨 다녔다.그러나 1911년 부모의 유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숙모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자 고아연금은 여동생에게 양보했다.그는 술·담배·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생활은 검소했다.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서 당시 민족문제로 고심했다.독일인 대귀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지식인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특히 20세기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기초로 한 그의 반유대주의는 중소상공업자와 중소농민으로 구성된 독일인 중산계급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전활동과 직장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신자 합숙소에서는 하층시민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또한 그는 독일민족지상주의자이며 반가톨릭 교회주의자인 쇠네르(1843-1921)파에 동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이 제국 내에 있는 독일인 거주지역의 독일합병을 지지했다.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성격적 특성, 즉 원만한 대인관계의 실패, 기존 부르주아 사회와 비게르만인(특히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 성급하며 위협적인 격정, 가난과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등을 보였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근거
[유전형질은 자손에게 전해진다.]
[유전형질에는 우성과 열성이 있다.]
[게르만인은 유전형질의 진화결과 보기가 드물 정도로 완벽한 우성인자들의 집합이다.]
[유대인들은 유전형질의 진화결과 보기가 드물 정도로 조잡한 열성인자들의 집합이다.]
[유대인들의 열성인자가 우수한 우리 게르만인을 더럽히면,
국가적 손실인 동시에, 전세계적 손실이다.]
[국가적, 전세계적 손실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열성인자는 철저히 제거되어야 한다.]
[인간의 우수인종으로의 진화를 위해서, 우리는 자연적인 자연선택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위적인 선택이 불가피하다.]
-> 유대인, 장애인, 동양인, 흑인 대 학살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2,루터 Luther,Martin 에 관하여
16세기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저항)주의의 창시자이다. 1,수도사인 루터 2,종교개혁가 루터
1,수도사인 루터 (1)초기생애와 교육 : 루터는 튀링겐의 작센(독일)지방 아이슬레벤에서 1483년 11월10일에 태어났다. 부친 한스 루터는 동광산에서 용광로를 임대하고 1491년에는 의회의 의원이 될 정도로 성공했다. 루터는 그는 1501년 봄에 독일에서 유명한 에스프르트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류트(기타의 일종)를 연주하기도했다.
(2)마르틴 루터 신부 1505년 7월 17일에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의 부모는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들이 상의도 없이 수도원에 들어가자 분통을 터트렸다.
2,종교개혁가 루터
(1)면죄부 논쟁 1, 면죄부의 성격 : 면죄부는 죄로인한 현세의 벌의 일부 또는 신부의 사면이 요구되는 고해성사에서 돈을 주어 경감시키는 것을 말한다. 면죄부는 교황의 권위로서 인정되었으며 신임장을 가진 대행자에 의해서 집행되었다. 중세기를 통하여 교황청의 재정난이 점점 더 악화되고 면죄부 판매가 너무 잦게 되었다.
2, 95개조 논제 : 면죄부에 대해서 루터는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95개 논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모든 성인들의 교회" 문에 붙였다.
3, 아우그스부르크 회견 : 교황은 루터의 로마 출두를 요구하는 소환장을 아우그스부르크에 있던 카예타누스 추기경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지방의 영주인 프리드리히 영주가 반대하여 결국 카예타누스와 직접 면담하도록 했다. 신문에 응하던 중 면죄권에 대한 토론을 했다. 루터는 공로 없이 주시는 은사와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를 주장했다. 루터의 주장은 교황청의 공로의 寶庫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작센의 참정관들은 루터에게 그가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압송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주었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강권에 못이겨 성채 뒷문으로 빠져 아우그스부르크를 탈출했다.
루터는 단순한 성서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반인에게 읽히지 못했던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해 누구나 읽도록 했고 찬송곡도 일반인에게 보급했다. 종교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농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도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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