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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컴퓨터에 눈을 뜨다.
1990년대 내나이 40대가 됐을때 우리집 큰딸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나는 200만원이란
거액을 들여 586컴퓨터를 입학선물로 사 주었다.
당시에는 386.486의 DOS컴퓨터가 대세였다가 586컴퓨터가 나온지 오래되지않은 때라 비싼
586컴퓨터를 사준다는것이 꽤 부담스러웠지만 앞으로 컴퓨터를 모르면 사회에서 뒤쳐질것이란
나의 판단에따라 무리해서 컴퓨터를 사주었다.
딸의 책상에 놓인 컴퓨터를 바라볼 때마다 참 신기하게 보였고 호기심이 발동해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만져보지만 뭐가뭔지 잘 알지도못했고 어떻게 작동해야 좋은지도 몰라
그저 심심하면 한번씩 전원을 켜서 한참바라보다 끄곤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을 보다가 우연찮게 광고란을 보게 되었는데
컴퓨터에 "사운드카드"라는 부품을 장착하면 음악을 들을수 있다는 당시 유명 사운드카드 회사인
"옥소리"의 광고였다.
요즘 나오는 PC는 멀티미디어장치가 아주 잘되어나오지만 당시PC는 DOS에서 윈도우로
갓 넘어가는 시기여서 멀티미디어 장치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아 음향을 들을 수 있는
사운드카드같은것이 장착된 PC가 많지않아 별도로 부품을 구입해 장착하곤 했다.
평소 음악듣는것이 취미인 나는 그 광고를 보고 용산에가서 광고에 나온 카드모델을 구입해와서
설명서를 보고 카드를 PC에 장착하고 PC에서 음악을 들을수 있다는 부푼기대를 가지고 PC를
작동해 보았으나 기대했던 소리는 나오지를 않았다.
나는 마음에 실망감으로 가득해 뭐가 잘못되서 소리가 안나오는지 설명서를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며 사운드카드를 떼었다붙였다를 수없이 반복해 보았지만 역시 소리는 나지않았다.
급기야는 그 무거운PC를 들고 동네에 있는 PC수리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소리가 안나는 이유를 물어봤다.
PC수리점 직원이 PC를 작동하고 잠시 무엇인가 작업을하더니 이내 우렁찬 음악소리가
나는것이 아닌가..?
나는 어이도없고 참 신기해서 그동안 왜 소리가 안났냐고 물으니 직원이 하는말이 "PC에
새로운 카드를 장착하면 거기에맞는 "드라이버"라는
소프트웨어적인 작업을 입력해줘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비록 수고비를 지불하기는했지만 무언가 신기한것 하나를 배웠다는 생각에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와 PC음악을 틀어놓고 음악감상에 젖어있다가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여 PC를 뜯어놓고
사운드카드를 빼내고 이전상태에서 설명서와 PC가게직원의 설명을 상기하며 다시 카드를 장착하고 "드라이버"라는 것을 입력하고 PC를 켜고 음악파일을 클릭하니 내가 좋아하던 음악이 울려퍼지니
기분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2. 컴퓨터를 직접 조립해 보다.
나는 그이후 PC를 자주 사용하다보니 자판기 두들기는 실력도 많이 늘었고 자판기를 잘 치려면
다른사람과 채팅을 하면 경지에 이를것이라는 말을 듣고 모뎀이라는 부품을 구입하여
직접 장착하여 예전같은 시행착오도 겪지않고 능숙하게 채팅을 할수있었고 점점 PC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 PC에 관련된 서적을 구입하여 정독하면서 PC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기를 수없이
반복하여 이제 PC에 관한 지식을 어느정도 갖추었다고 자부하게되자 이제는 우리집컴퓨터가 아닌
용산에서 한대의 PC를 조립할수있는 부품을 구입하여 스스로 PC를 완성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허구헌날 멀쩡한 PC를 분해하면서 방을 어질러놓고 부품을 구입한다고 돈을 쓰고 이제는
한대분 컴퓨터부품을 구입하겠다고 백몇십만원이나 되는 돈을 달란다고 아내의 볼맨 목소리가
날로 커져갔다.
요즘은 PC부품가격이 많이 저렴해져서 몇십만원짜리의 PC도 있지만 그당시에는 PC부품값이
비싸서 한대분의 PC부품값이 아무리 싸게 구입한다해도 백만원이 훌쩍넘어서 회사에서 쥐꼬리만큼 월급을 타오면서 쓸데없는데 돈낭비한다며 컴퓨터는 학생들이나 배우는것이지
당신나이에 그걸배워서 뭘하냐며 아내는 날마다 잔소리를 퍼부으며 호기심에 내마음에 점점
타오르던 PC에 대한 열정을 반대하며 찬물을 끼엊는다.
나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대분의 PC부품을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PC조립에 몰두하였다.
PC관련서적을 참고하여 며칠에 걸쳐 PC조립을 완성해놓고 시운전을 하려하자 과연 아무일없이
PC가 정상적으로 작동할지 마음에 의구심을 가지며 몹시 흥분상태가 되었다.
떨리는손으로 PC의 전원을 누르자 이내 PC가 켜지는 특유의 소리가 났고 PC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후 모니터화면이 정상으로 활짝켜지자 나는 성공했다는 쾌감에 나도모르게 소리를
지르니 아내가 깜짝놀라 웬일인가 싶어서 달려와보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돌아서 가버린다.
나는 그후 자신감을 갖고 시간이 날때마다 PC와함께 씨름을 했고 윈도우를 비롯하여
여러 소프트웨어에 관련된 지식도 넓혀나갔고 PC를 다루다가 잘모르거나 막히는부분이 생기면
메모해 두었다가 밖에나가 초등생부터 대학생까지 지나가는 학생들 붙들고 물어보아 해결하고는
했는데 학생들은 내가 묻는 PC에 관련된 질문에 자기가 아는문제면 자랑하듯 대답해주는
특성이 있는것을 그때알았고 정말 많은 PC지식을 어린학생들에게 배웠다.
3. 친구,친지들의 PC를 수리해주다.
나는 PC를 조립하는데 그치지않고 PC가 작동되는데 필요한 중요파일을 고의로 지워서
PC가 작동되지않도록 해놓고 이것을 고쳐 정상으로 고쳐놓는 것을 반복해 PC에 문제가 생겼을때
고칠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갔다.
어느정도 PC수리에 관련해 터득했다고 생각됐을무렵 나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PC가 고장나면
내가 무상으로 고쳐줄테니 나에게 연락하라고 자칭 PC도사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렇지만 친구나 친척들은 내말에 의아해하며 믿지를 않고 몇달을 기다렸으나 연락해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어느날 한 친구집에 갔을때 친구아들이 자기의 컴퓨터를 하면서 컴퓨터가 먹통이됐다고 푸념하며
A/S센터에 연락해야겠다는 말을 하니까 친구가 아들에게 "너는 컴퓨터를 어떻게쓰길래 구입한지
얼마안되는 컴퓨터를 망가트려놨냐"며 핀잔주는 말을듣고 나는 내심 "때는 이때다" 라고 생각하고
"고장난 컴퓨터 내가 한번 봐줄께"라고 말하며 친구아들을 의자에서 밀어내고 내가 PC상태를
살펴보니 운영체제인 윈도우의 중요파일들이 지워져있는 상태를 발견하고 지워진 파일들을
복구해놓으니 PC가 정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친구와 아들이 신기해하며 대단하다고 나를추켜세우며 칭찬을 아끼지않고 다른친구나
자기 친지들에게 소문을 내주어 그후 심심치않게 PC수리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고장난 PC를 무상으로 잘 고쳐주니 그 소문이 확산되어 나갔다.
고장난 PC를 수리하면서 내가 미쳐 알지못했던 많은문제들을 공부할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4. A/S기사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다.
그러던 어느날...
인터넷검색을 하던중에 우연히 컴퓨터를 생산하는 유명메이커 컴퓨터회사에서
A/S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나는 그 광고를 보고 나의 PC수리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기사모집에 응시를했는데
며칠후 실기시험과 면접을보러 오라는 연락이왔다.
나는 떨리는마음을 안고 시험장에가서 실기와면접에 임했는데 면접관이 나를보더니
"응시생이 모두 20대 청년들인데 나이많은 사람은 나 혼자라며 그나이에 어떻게 PC수리기술을
배웠냐"며 대단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월급이 많지않아서 가정에 아이들교육 시켜가며
생활해 나가기 힘들것" 이라며 "괜찮겠냐"는 말을 들었지만 합격될 욕심에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
돌아왔는데 며칠후 합격됐으니 출근하라는 통지가 왔지만 나는 많이 망서려졌다.
5. 컴퓨터매장 사업을 시작하다.
나는 A/S맨 합격통지를 받고 며칠을 망서리며 고심하던 끝에 월급이 얼마 안된다는
A/S기사로 일하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PC매장을 내어 조립판매도하고 수리도하고
개인지도도 한다면 수입이 괜찮겠다는 생각에 10수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내고 과감하게
PC매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이런모습을 지켜보고있는 내 아내는 한숨을 내쉬며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오랜동안 다니던 고정된 수입원을 버리고 불확실한 사업을 시작한다고하니
자식들 교육비에 생활비를 걱정하는것은 아내로서는 당연한 일일수 밖에 없는것이지만
나는 그런 아내에게 더 좋은 수입으로 당신걱정을 덜어주겠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며
"컴퓨터는 내친구"라는 간판을 내걸고 PC매장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6. IMF의 시련으로 사업장 문을 닫다.
PC매장 개업이후 내가 예상했던대로 수입이 좋았다.
PC한대를 조립해서 팔면 적게는 10만원에서 많게는 몇십만원까지 이익이 남았고 하루의 영업을
마치고 아내와 하루매상의 돈을 같이 세어보면서 "이렇게 돈벌다가는 금방 재벌되겠다"며
웃기도했고 부품판매,수리,개인지도 등으로 매장을 잘 운영해나가던 어느날아침...
매장으로 출근을하면서 매장가까이 가고있는데 멀리서 우리매장을 바라보니 닫혀있어야 할
매장셧터가 반쯤 열려있는것이 보였다.
순간 불길한생각이 들어 뛰어가 셧터를 활짝열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매장안에 진열해두었던
PC와 부품들이 모조리 도난당하고 빈상자만 매장안에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고 이소식을 들은 아내와 아들 딸이 달려와 나를 붙잡고
어떻하면 좋으냐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어려운 결심으로 시작한사업을 접을수가 없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재정비하여 당장 꼭필요한 부품만을 구비해놓고 다시 매장을열어 영업을 시작하였는데 그즈음 뉴스에 정부에서 국민에게
컴퓨터보급을 위해 싸게 공급하겠다는 내용이 보도되자 그날부터 PC를 정부에서 공급하는 가격으로 싸게 사겠다는 기대로 나와같이 운영하는 PC매장에는 PC를 사겠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설상가상 그 즈음에 IMF사태도 일어나 장기간의 매장적자를 견디지못하고 사업장문을 닫고 말았다.
7. 회사에 복직후 정년퇴직하다.
매장문을 닫은후 몇개월을 허탈감에 허송세월을 보내는중 예전 다니던회사에서
내 소식을 듣고 복직시켜줄테니 다시 출근하라는 연락이왔다.
솔직히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도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와 자식들생각에 마지못해 회사로 출근하여
예전과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PC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못해 시간 날때마다 PC를 켜고 PC와 함께
살다시피했고 반대로 아내는 PC때문에 망했다고 PC를 쳐다보지도않고 살았다.
(먼 훗날 나의 이 컴퓨터의 관심이 나와 내아내의 노후대책이 된 소중한 일이 될것이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어쨋던 당장 자식들 교육비와 생할비걱정에 내키지않는 회사생활도 10여년이 다시흘러
정년퇴직을 맞게되었다.
정년퇴직하고 나서 출근할곳도없고 별로 할일도 없어
늦잠도자고 하루종일 방안에서 세상에서 제일편한 자세로누워서 딩굴다보니 너무편하고 좋았다.
다행인것은 오랫동안 직장생활 하는중에 국민연금제도가 처음 시작될때 거의 강제로 국민연금
가입하게 되었는데 가입기간이 오래되서 그런지 적지않은 연금액이 매달 입금되고 있어
생활에 큰 보탬이 되고 있었다.
직장에서 매달 월급탈때마다 떼어나가는 국민연금액을 볼때는 생돈 뜯기는 기분이들어 불평할 때도 많았는데 정년후 수입이없을 때 평생월급이라며 매월 입금을 해주니 이제와서는 국민연금제도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월급날마다 국민연금이 떼어나가는것을 보고 불평했던 내자신이 어리석게만 생각되어
부끄럽기 짝이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8. 지하철택배원으로 취직하다.
내나이 올해로 70세가됐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30대부터 근무하던 직장에서 30년동안의 직장생활을 60세나이로 정년퇴직을하고
집에서 하는일도없이 허송세월을 약3년간을 지나고나니 점점 몸이 찌부둥해지고 나태해지고
정신까지 몽롱해져가는 느낌을 받아 이대로 계속나간다면 머지않아 몸에 이상이 올것같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들어 막일이라도 일자리를 구하여겠다는 생각에 인터넷검색을 하다가
눈에 띄는 직종하나가 보였다.
지하철택배원 모집광고였다.
내용을 읽어보니 운동하면서 수입을 얻는 직종이었다.
나는 이력서를 갖추고 지하철퀵사를 찾아가 면접을하고 간단한 교육을 거쳐 다음날부터
지하철배송원으로 일하기로 하였다.
근무첫날 첫오더를 받고 근무수행을 시작했다.
지하철배송은 퀵회사에서 내 휴대폰에 출발지주소와 도착지주소를 문자로 보내주면
출발지에 가서 물건을 받아 도착지에 갖다주는 단순한일이다.
그런데 당시 배송원들의 가장 어려운문제는 주소지를 찾아가는게 가장 힘들었다.
나는 일찍이 PC를 능숙하게 다뤄봤고 스마트폰도 누구보다 빠르게 구입하여 사용해왔기 때문에
지하철노선검색이나 지도검색을 쉽고 빠르게 찾아 배송업무에 활용해서 배송을 어렵거나 힘들게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미아역에서 700미터정도 떨어진 주소지를 찾아가는데 가는 길에 골목이 너무많아
다른 배송원들은 찾아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나는 주소검색을 하여 지도를보고 우리집가듯이 어렵지않게 찾아갔는데
그 고객이 나를 보더니
"다른 어르신들은 여기 찾아오려면 골목길이 복잡해서 적게는 두세번,많게는 대여섯번씩 전화해서
물어보고 오는데 어르신은 어떻게 한번도 전화 안하시고 잘 찾아오셨냐"며 감탄을 하면서
"다음부터는 퀵사에 배송요청할 때 어르신만 오시도록 요구할테니 어르신만 와주세요"
라며 웃으면서 부탁을 하는것이다.
다른 배송원들은 주소지찾아가는게 어렵다보니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어보거나
부동산등에 들러 주소를 문의하여 가기때문에 위치를 쉽게 찾지못하여 많은시간을 소비하거나
엉뚱한곳으로 가기 일쑤여서 무척 힘들게 일을하고 있었다.
암튼 나는 근무첫날 첫오더를 빠른시간에 끝내고 회사에 완료보고를 하니 회사에서 의아해하며
"어떻게 그렇게 빠른시간안에 끝냈느냐"며 "정말이냐"고 되물으며 믿지 못하겠다는식의 답변을하며 두번째 오더를 주었다.
나는 배송원 일을시작하며 처음부터 나름대로 고객과의 3대원칙을 정했다.
첫째...신속히 배송하고. 둘째...고객에게 항상 친절하며. 셋째...분실을 절대 조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일을하며 몇개월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몇개월을 일을 하면서 많은일들을 겪었는데
근무중에 있었던 황당했던일, 재미있었던일, 고마웠던일, 등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일어났던일을
나혼자 알고 있기보다는 여러사람과 공유하여야겠다는 생각에 "지하철퀵 택배사랑방"이란 제목의
인터넷카페를 만들어 일하면서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일기장형식으로 기록해 나갔다.
9. 배송원제자(?)를 양성하다.
내가 인터넷에 일기장을 쓰면서 운영하는 카페의 글이 어느정도 쌓여나가자 나의 글을 읽어본
사람들이 나와같은 배송원이 되고 싶다며 전화로 연락오기 시작했고 어떤사람은 우리집까지 찾아와 배송의 노하우를 가르쳐달라며 부탁을 하였다.
나는 이런분들과 하루동안 배송을 같이하며 손쉽게 배송하는 방법을 실습하면서 알려주어
그동안 다수의 배송원을 양성하여 지금 우리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분도 있고
다른회사에 근무하는분은 종종 안부전화도 오고 직접찾아와 식사를 같이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배송원을 시작한지 일년정도 되었을때 나는 여러 지하철퀵사의 장,단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특히 그중 일부 퀵사에서는 배송원어르신들이 나이가많아 정보에 어둡고
다른곳에 취업할 수 없다는점을 악용해 여러구실로 어르신들에게 부당하게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예를들면 오더내용을 문자로 발송하여주고 그 문자보는 간단한 방법을 알려주고 나서는
교육해줬다며 교육비명목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입사할때 가입비, 입회비 명목으로
적게는 2만원에서 많게는 10만원까지 받아 가로채고 있었다.
그뿐아니라 오더 프로그램을 사용하게하고 프로그램 사용료라며 하루에 550원씩 징수하였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구실로 어르신들의 노동댓가를 착취하는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카페에 글을 올려 문제되는 부분에 대해 퀵회사 경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10. 퀵 회사에서 쫒겨나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일하고 있는 퀵사 사장이 나를 사무실로 호출하더니 인터넷에 내가올린
퀵회사를 비판하는내용에 대하여 묻더니 당장 그런글들을 삭제하라고 명령조로 말한다.
나는"내가 지어낸글도아니고 사실얘기를 있는 그대로 말한것이고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인데 왜 글을삭제하라하느냐? 못지우겠다"고 하니
사장이 대뜸 "내일부터 그만두라..다른회사로 가라" 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어처구니가없어 별다른 답변도 않고 전철을타고 집으로 가고있는데 사장이 내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 충전금잔액을 내 계좌로 보냈다며 퇴사통지를 재차 알려왔다.
이렇게 나는 18개월동안 별다른 실수도없이 나름대로 성실히 일해왔다고 자부해왔는데
졸지에 다시 무직자 백수신세가 되고 말았다.
11. 달인지하철퀵사의 관리자가 되다.
이렇게 나는 백수가 되어 며칠간 집에서 쉬고 있는데 내가 18개월동안 오더배송을 하면서 고객에게 신속하게 친절을 베풀며 일을 한 덕분인줄은 모르겠지만
고객중에 여러사람이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퀵사무실에 오더접수를하면서 차광명어르신을
보내달라고 말하니 퇴사하셨다고해서 직접부탁하는것이니 직접오셔서 배송물건을 가져가
배송해달라고 부탁을 해오곤하여 혼자서 개별적인 배송을 하다보니 이것이 더 재미가있었다.
왜냐하면...누구 간섭도받을필요도없고 수수료도 떼일일없으니 수입이 더 좋은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직접 광고명함을 만들어 배송하는중에 상가,사무실등에 명함을 뿌리고다녔더니
여러사람이 명함을 보고 오더신청을 해왔는데 나홀로 배송을 하다보니 나름대로 여러가지로
애로되는문제들이 발생하여 또다시 "달인지하철퀵"이라는 회사에 배송원으로 다시 입사하여
일을하고있었는데 두달쯤 지난 어느날,사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는 사무실에서 의논할 일이있다면서 사무실로 호출을한다.
나는 사무실로 가면서 내심 인터넷에 내가 쓴 글때문에 또 쫒겨나는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고
사무실에가서 사장과 대면하게 되었는데 사장은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올린 카페의 내용을 모두 읽어보았고 두달동안 내가 일하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배송하는 과정이 다른사람들과는 다르게 매우이상적이고 컴퓨터작동능력이나 스마트폰활용능력이 남다르시니 교육부장이라는 직함을 드릴테니 내일부터 사무실에 들어오셔서 가지고계시는
배송노하우를 우리 달인퀵사 배송원전체를 관리하면서 전수해달라" 는 부탁을 하는것이 아닌가.
12. 관리자가 된후 업무영역을 넓혀나가다.
나는 교육부장이라는 직함을 얻은후 내게 주어진업무에 열성을 다해 나갔다.
이후 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과 내가 운영하는 카페를 보고 주요 여러 방송사에서 인터뷰나
촬영을요청해왔는데 하루는 KBS에서 일요일마다 방영하는 "강연100도C"PD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강연100도C에 출연해 강연해달라고 요청해왔으나 나는 라디오에 목소리만
나가는 인터뷰는 몇번했지만 카메라앞에 서면 얼굴이확근거려 못하겠다고 사양을하니너무아쉽다는 말과함께 그러면 부장님과 함께 근무하는어르신중 한분을 추천해달라고하여 우리회사에서
나와함께 근무하는 어르신한분을 추천해드렸는데 그분이 강연을 하시고난후 전국에 알려져 크게
인기를 받아 여기저기로 초대받아 다니고 배송중에도 고객들이 알아보고는 많은 칭송과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후 KBS의 "다큐3일""생생정보"등에 출연하여 유명세를 타기도했다.
나는 내가 알고있는 모든것을 방송사에 제공해 제작진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나는 인사관리까지 도맡아 하게되어 지금은 인사,교육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각 시청,구청 일자리센터 담당자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어르신들의 일자리 확보에 한몫하고 있으며 안국역 5번출구앞에 위치한 "서울시립노인복지회관"
부설 "서울시립어르신직업훈련센터"의 초청을 받아 직업교육과 관련된교육을 매달 정기적으로
가서 강의도 하고있다.
주어진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활동해서인지는 몰라도 나를 경계하는 퀵사 경영자들도 있지만
달인퀵 대표와같이 나의 본심을 알아주는경영자도 있어서 내게 큰힘이되는가운데 그곳에서
약 4년가까이 근무하다가 2016년 10월. 지금 내가 몸담고있는 퀵퀵주식회사에 스카웃되어
더 크고 넓은 회사에서 일할수있는 계기도되었다.
지난7년동안 지하철퀵사에 몸담은후 전반 2년가까이는 직접 배송일을 하면서 일선에서의 경험을
풍부하게 얻었고 이제 후반 5년은 사무실에서 퀵사경영 사무의 경험을 충분히 익혀왔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퀵사를 퇴직하게 되면 내가직접 퀵사를 운영하며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방황하는 어르신들을 불러모아 일거리와 수익을 함께나누며 복지관련 일에도 힘써볼 생각으로
내일의 보람된일들을 계획하며 나는 오늘도 열심히 내 업무를 위해 힘쓰고 있다.
요즈음 주말이되어 집에서 쉬면서 조용한시간이 되면 아내와 예전에 컴퓨터사업을 실패해서
고생하던 생활을 회상하며 함께 웃는데 아내는 내가 컴퓨터에 미쳐 있을 때 반대하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해하고, 그때 내가 컴퓨터를 포기하지않고 더 열심히 일해왔던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이제는 우리 아들,딸을 모두 출가시킨 요즈음 우리 부부만둘이 함께 살면서
노후생활에도 별로 부족하지 않게 생활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내 아내는 매일아침 열심히 출근하는 내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한 미소를지으며 생활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