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퍼드 기퍼드 - 풍경 속에 빛을 담다

[선동기 라파엘]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새해 맞이 각오와 계획이 다이어리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지만 지금은 한 두 가지로 줄었습니다. 내실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제 자신을 위로 하지만

사실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좀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계획한 것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지만요.  미국의 풍경화가 샌퍼드 R. 기퍼드 (Sanford Robinson Gifford / 1823~1880)의 작품으로

2013년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맨스필드산 스케치       A Sketch of Mansfield Mountain / oil on canvas / 21cm x 33.7cm / c.1858

아, 정말 장쾌한 풍경이군요!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는 능선과 끝없이 흐르는 구릉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기가 햇빛을 담고 있어서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선명하지 않음 때문에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하게 됩니다.

한 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사내의 자세가 오연(傲然)하게 느껴집니다.

이 높은 곳에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한 번 세상을 향해 외쳐 볼만도 합니다.

자, 뭐라고 외치고 싶으신가요?

기퍼드는 뉴욕주 그린필드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허드슨으로 이사를 가 그 곳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물공장을 운영했고 한편으로는 은행의 투자가였으니까 기퍼드에게는 부유한 집안 환경이었겠지요.

열 아홉 살이 되던 해 그는 브라운 대학에 입학합니다. 전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2년 정도 학교를 다니다가

부모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는 학교를 그만둡니다. 이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부럽습니다.

적막    Solitude / oil on canvas / 55.88cm x 75.57cm / 1848

인적 없는 깊은 산 골에 가을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호수는 거울 같아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숲과 나무들 그리고

하늘의 구름까지 담았습니다. 수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는 곳, 새 한 마리 호숫가에서

목을 적시고 있고, 붉고 노랗게 타오르는 숲 사이로 푸른 침엽수가 하늘을 향해 바뀌는 계절과 관계없다는 듯

도도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적막한 것이 아니었군요. 모두들 치열하게 자신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느라 부산한 모습들이 숨어 있거든요.

미술 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자리를 옮긴 기퍼드는 영국 출신의 유명한 화가 존 스미스에게서 드로잉과 원근법,

해부학에 관한 것을 배웁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도 그의 부모의 입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초상화와 인물화가가 되기를 원했거든요. 그러나 기퍼드는 미국 풍경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콜의 길을

따르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리고 싶었던 것이 따로 있었던 것이죠.

황야의 집       Home in the Wilderness / oil on canvas / 19.05cm x 29.21cm/ c.1855

산 속 깊은 곳에 집 한 채가 서 있고 마차 바퀴 흔적이 깊게 남아 있는 길은 집 앞을 지나 산을 휘돌아 가고 있습니다.

산 비탈을 깎아 개간한 곳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은 듯 곳곳에 바위와 나무 등걸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황량한 주변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남겠다는 의지가 작은 통나무 집에 배어 있습니다. 산골 집의 희망이자

살아 있는 꽃, 집 앞에서 노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작품 속 아이들이 없었다면 참 황량했겠다 싶습니다.

1847년, 스물 네 살의 기퍼드는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아카데미에 자신의 작품을 처음 출품하는데 이후 거의

매년 작품 전시를 계속하게 됩니다. 스물 일곱 살 때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고 서른 한 살에는 정회원이 되니까

나름 성공의 길을 걸은 셈입니다. 풍경화에 전념하기로 결심을 한 기퍼드는 초기 허드슨강파의 가장 뛰어난 화가 중

한 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름의 전원 풍경   Summer Idyll / oil on canvas / 46.4cm x 38.7cm / 1860

호숫가의 나무 한 그루, 멋지게 휘어져 마치 큰 양산처럼 보입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까요, 여인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햇빛 좋은 호숫가에는 소 떼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고 먼 산은 뜨겁게 달아 오르는

대기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멀어지고 있습니다. 붉은 꽃을 피워 낸 작은 꽃나무, 여인만큼 곱군요.

요즘 날씨가 너무 추운 탓인지 ‘덥다’라는 생각 보다는 ‘따뜻하겠다’라는 느낌이 먼저 다가 왔습니다.

30대에 이미 기퍼드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진 작품을 제작하지만 1855년부터 1857년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그의 작품은

무르익게 됩니다. 허드슨강파 화가들처럼 그도 열심히 여행을 다녔습니다.

터너를 흠모했던 기퍼드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터너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사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와 독일로 그의 여행은 계속 되었죠.

뒤샐도르프에서는 이미 와 있던 미국 화가들과 교류도 갖고 친구도 사귀게 됩니다.

외국 여행 중에 한국인을 만나면 어찌나

반갑던지요.

맨체스터 해변    Manchester Beach / oil on canvas / 75.4cm x 124.2cm / 1865

바다를 향해 불쑥 머리를 내민 해안의 바위는 마치 바다를 건너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짐승처럼 보입니다.

바위에 부서진 파도는 잔 물결로 변해 흰 띠를 두르고 해변을 향해 다가 서고 있습니다. 철이 지난 바닷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바람과 물결이 남긴 흔적만 보입니다.

아, 저기 한 사람이 있군요!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는 사내, 바다 건너로 떠난 지난 계절의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그의 대표적인 기법이 되는, 빛나는 햇빛과 옅은 대기가 묘사된 작품을 제작해서

아카데미로 보냅니다. 물론 그의 작품은 미국에서 환대를 받았습니다. 1857년 봄, 기퍼드는 또 한 명의 허든슨강파 대가인

알버트 비어스타트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2421321)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를 여행합니다.

이후 북부 오스트리아와 독일 그리고 다시 북부 이탈리아를 거쳐 9월 뉴욕으로 돌아 옵니다.

유럽을 쓸고 다녔다는 생각이 드는데, 풍경화가에게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지는 호수    Lake at Sunset / oil on canvas / 25.3cm x 35.5cm / 1861

지는 해는 눈이 부시지 않아 좋습니다. 그러나 사선으로 다가오는 빛은 그림자 길이를 늘어 나게 하고 덩달아 마음까지

한없이 내려 놓게 합니다. 저녁이 되자 물을 건너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은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길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 하루 열심히 움직인 몸을 달래면서 가는 길에 그 것 이상

더 무엇이 필요할까요?

뉴욕으로 돌아 온 기퍼드는 11번가 빌딩에 화실을 임대합니다.

이 빌딩에는 이미 비어스타트와 프레데릭 처치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3633145) 같은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그의 미국 내 여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계속 걸작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 기간 중 볼티모어와 워싱턴 D.C.를 지키는 국민방위군으로 참여합니다.

전쟁 기간 중에 화가로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림 속에 둥글게 퍼져 나가는 빛의 묘사는 대단했지요.

호수의 황혼     A Lake Twilight / oil on canvas / 16cm x 28cm / 1861

온통 붉고 검은색입니다. 하루의 끝이 장엄하게 정리되고 있습니다. 구름은 핏빛 꼬리를 서쪽을 향해 날리고 있고

잔광이 가득한 하늘을 담은 호숫가에는 뭍에 오른 사내가 배를 끌어 당기고 있습니다.

산 그림자 때문에 어둠이 일찍 찾아 오는 곳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근사하게 마무리했다면 내일도 문제 없겠지요.

이제 깊은 자연의 숨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릴 차례입니다. 호흡을 고요히 하고 귀를 크게 열어야겠습니다.

남북전쟁이 기퍼드에게 행운만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생 에드워드를 전쟁 중에 잃었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동생 찰스는 전쟁이 일어나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의 충격 탓인지 그의 작품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 앉습니다.

일몰을 그린 작품들에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나타나지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 닥치면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 하지 않겠습니까?

캄포 호수 옆 스텔비오 로드    Stelvio Road by Lago di Compo / oil on canvas / 63.7cm x 52.3cm / 1868

스텔비오 로드는 운전하기 어려운 세계 10대 길 중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이 그 길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바위를 뚫고 길을 낸 사람들의 힘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더구나 요즘 사용하고 있는 중장비도 없던 시절이니

대단하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길 바로 옆은 호수입니다. 길을 가다가 아무 곳이나 서면 그 곳이

전망대가 될 것 같습니다. 몸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마음 만이라도 난간에 기대고 호수에서 불어 오는 미풍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1867년 여름, 기퍼드는 뉴저지의 롱비치와 샌디 훅을 그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다음 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럽 여행 길에 오릅니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따라 내려갔고 터키와 그리스를 거쳐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들을 방문합니다. 특히 베니스에 매혹 당한 그는 6주일이나 그 곳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기퍼드는 여행 중에 기록한 수 많은 장면들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이 좋은 점은 몸은 힘들지만 새로운 영감으로 머리를 채울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파이어 아일랜드 해변    Fire Island Beach / oil on canvas / 34.3cm x 69.9cm / 1878

지금은 해변 휴양지로 유명한 파이어 아일랜드의 옛 모습입니다. 해수면과 육지가 거의 수평에 가까워 밀려드는 파도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보는 제가 겁이 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 속 남자들은 태연한 모습입니다.

길게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혹시 사냥총이 아닐까요? 바닷가 근처 습지를 찾은 물새들을 잡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데

상상만으로는 알 수 가 없군요. 수평선과 지평선이 이렇게 나란히 달리는 곳을 보기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오히려 낯설게 다가 옵니다.

1877년, 쉰 넷의 기퍼드는 매리라는 미망인과 결혼합니다. 많이 늦은 나이였지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그의

성격 탓에 많은 친구들이 그를 신뢰했다고 합니다. 멋진 사람이었군요. 기퍼드의 작품 제작 방법 중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잘 된 작품 몇 점을 기준으로 삼고 새로운 작품을 그릴 때 참고했다고 합니다.

최고였을 때를 기억하고 그 것을 떠 올리는 것, 좋은 방법 아닌가요?

위험지대에서의 배스 낚시    Bass Fishing on No Man's Land / oil on canvas / 23.5cm x 41.3cm / 1877

바닷가 바위 위에 걸쳐 놓은 난간에 앉아 배스 낚시가 한창입니다. 저 정도 얕은 곳에서 고기가 잡힐까 싶은데

낚싯대를 드리운 사내는 아주 자신 있는 자세입니다. 바닷바람과 쉬지 않고 밀려드는 파도에 앉은 자리가 흔들거려

낚시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꾼’은 다르겠지요. 언덕 밑에 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검은 옷의 이 사내가 자리를 비워주어야 이 자리를 차지할 것 같은데,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석양에 바위는 붉게 물들고 있는데 기다리는 사내의 속도 그렇게 붉게 물들고 있겠지요.

낚시광이었던 기퍼드는 슈피리어 호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호흡기 질환에 걸리고 맙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병으로 쓰러지고 세상을 떠납니다. 말라리아였다고 전하는 자료도 있습니다. 참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쉰 일곱이었고 계절은 여름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작품 목록에는 모두 735점이 올라 있었다고

합니다. 적은 양이 아니지요.

뉴저지 롱비치의 일출   Sunrise, Long Beach, New Jersey / oil on canvas / 1864

수평선 위로 해가 막 떠 올랐습니다. 파도는 스스로 몸을 무너뜨리며 해안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 바다 위, 아직 사라지지 못한 어둠이 일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다 전부를 붉게 물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요. 벌써 배를 가지고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한 해가 밝았으니 좀 더 부지런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마음뿐입니다. 떠 오르는 신년 아침의 해를 보며

소원을 비셨는지요?  올 한 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쁘고 행복한 일이 슬픈 일보다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허드슨강파의 리더로서, 빛과 부드러운 대기의 묘사로 유명했던 기퍼드는 허든강파의 분파 (分派)라고 할 수 있는

루미니즘의 선두주자이기도 했습니다. 한 해의 시작을 풍경화로 열었습니다. 19세기 미국 풍경화는 ‘이발소 그림’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의 주제가 주는 장대함은 그 어떤 것과도 비할 데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올 한 해도 모든 분들에게 장대한 세상이 열리길 기원해봅니다.

[김종금 리드비나]

여름이면 땀을 많이 흘려서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데...요즘 같은 날씨에는 그 더운 여름이 그립기까지 하네요'
여름의 전원 풍경속은 멋지게 휘어진 나무아래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여인이 부럽고
이렇게 멋지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부럽고....또한 그림을 읽으시는 단장님이 부럽고.ㅎㅎ
고맙습니다.

[선동기 라파엘]

저도 언젠가는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이런 풍경 속을 거닐 수 있겠지요.
그 때까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