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 제302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 남내리
낙안읍성 안에는 번듯한 기와집의 관아 건물이 있긴 하지만, 낙안읍성은 무엇보다도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어서 더욱 정감이 가는 민속마을이 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전국의 초가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전통 한옥의 부속채에서나 일부 그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이곳 낙안읍성의 경우 마을 전체에서 초가집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민가옥인 초가집에 대해 보고 배우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제 낙안읍성을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낙안성 민속마을에서는 우선 경직된 기와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지붕의 곡선과 담들의 우아한 선을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다. 지붕이며 담들의 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정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들을 목격하게 된다. 더러 주춧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이라도 보게 되는 날에는 금방이라도 안채에서 다듬이질 소리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만큼 정겨워진다. 잘 생긴 우물마루 널이 아닐지라도 투박한 대청마루 널은 세월이 묵을수록 결이 그대로 느껴져서 고풍스런 느낌도 나고 초가집과 잘 어울리면서 소박한 멋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민속마을로 지정된 곳은 낙안읍성을 포함하여 제주도의 성읍마을, 안동의 하회마을, 고성의 왕곡마을, 성주의 한개마을, 월성의 양동마을, 아산의 외암마을 등이 있다. 이들 민속마을 가운데 이곳 낙안성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에서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면서 예전과 같은 생활 모습이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읍성(邑城)이 여기처럼 잘 보존되어 있고, 또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도 없다. 특히 이 마을은 성벽을 따라 초가집이 안과 밖으로 형성되어 있어 성벽 위를 걸어가면서 마을의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봄에는 봄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초가 마을의 돌담과 어울려 피고 지는 각양 각종의 꽃과 풍경은, 시간이 이 마을에서 정지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초가삼간이 대부분인 이곳 낙안성의 집들에서 가장 정겨운 공간은 바로 부엌이다. 안채 옆 나무문을 열면 어느 집에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부엌이 나타난다. 나무를 때는 아궁이며 부뚜막이 보이고, 부뚜막 위에는 조왕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어머니가 올려놓은 맑은 물대접이 보이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이랴. 부엌에는 골목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에게 군것질 거리인 누룽지도 만들어 주었을 커다란 무쇠솥도 보인다. 모든 살림살이에 우리 옛 어머니들의 삶과 한숨과 기쁨이 묻어 있다.
이 마을의 가옥들이 이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건축의 소재와 관련이 있다. 자연에서 생산된 소재를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하여 집과 자연이 하나로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목조 가옥에서는 기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목조로 지은 우리 전통 한옥은 물기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단을 만들어 비가 왔을 때 물에 잠기거나 집이 습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햇빛을 넉넉히 받도록 하여 목조 재료들이 더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마을 집들의 기단은 잘 가공된 장대석을 높이 쌓는 사대부 기와집의 기단과 다르게 둥글 넙적한 막돌을 주워다가 한 줄 내지 많게는 서너 줄 쌓아 올린 것이 전부다. 둥글둥글한 모양이 우리 서민들의 심성을 나타내는 것 같아 더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가을날 마을의 돌담 너머로 지붕 밑을 보면 추녀 아래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장작을 볼 수 있다. 땔감도 하고 벽의 한기를 막을 수 있는 효과도 주는 우리들의 지혜이다.
토석담은 황토색의 흙과 강돌로 되어 있는데 크고 작은 돌들이 각자 자기 모양을 가지고 어우러져 있어, 우리들의 얼굴이 다르듯 자연의 모든 사물에는 같은 종류일지언정 조금은 달라도 조화를 이루고 사는 생활의 한 부분 같아 편안하다. 이처럼 이곳의 토석담은 요즘 주택들의 모습이나 담처럼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모습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게 만들면서 더욱 정이 가게 만드는 것 같다. 또한 낮은 담장과 싸리문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내부는,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서민적 가옥의 형태인 초가집에 애착을 갖고 바라보게 한다.
낙안읍성의 늦가을은 초가집 이엉을 엮느라 마을 전체가 부산하다. 미리 이엉을 엮어 두었다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을 택해 마을 사람들이 전부 품앗이를 통해 이엉을 올린다. 정다운 우리 이웃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낙안읍성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들은 대부분 일자형 집으로, 이는 이 지방의 풍토와 관련이 있다. 우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몇 집을 선택하여 이들 집들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박의준가옥(朴義俊家屋)〉
낙안성 안의 옛 감옥이 있던 자리에 이웃한 향리(鄕吏)의 집으로, 박의준 가옥(중요민속자료 제92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367)이 있는데, 이 집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와 아래채가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서남향집이며, 콘크리트 기둥에 대나무를 이용한 이 집의 사립문은 마을의 분위기에 그런대로 어울리는 듯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당이고, 오른쪽에 안채가 있으며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부엌, 안방, 안마루, 건넌방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방과 안마루의 기둥 사이는 조선시대 때 일반적으로 쓰이던 넓이를 준수하고 있는데, 부엌은 오히려 넓게 잡아놓았다. 방과 안마루 앞에는 개방된 작은 툇마루가 있다. 아래채는 창고와 축사로 구성되어 있으나 일부가 개조되었다. 지금은 시멘트 지붕이 낡고 한쪽은 무너져가고 있어 안타까운 모습이다. 안채는 자연석으로 두 줄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부엌에는 널문을 달았고 방에는 분합문, 안마루에도 분합문, 건너방에는 외짝문을 달았다. 최근 복원되면서 당시의 전통적인 멋은 많이 사라졌지만 넓은 안마당 끝에 있는 채소밭과 곡선으로 이어진 돌담 위로 박 넝쿨이 올라가면 소박한 시골풍경이 느껴지는 자연미가 아름답다.
〈양규철가옥(梁圭喆家屋)〉
작은 초가집에 넓은 앞마당을 가진 양규철 가옥(중요민속자료 제93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79)은 대문에 들어서면 북쪽으로 안채가 있고 서쪽으로 돼지막과 외양간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커다랗고 넓적한 냇돌을 골라 외벌대의 기단을 만들고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춧돌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워 초가지붕을 받치고 있다. 집의 규모는 초가삼간집으로 온돌방 2개와 큰 부엌으로 구성된 남향집이다. 방문은 큰방과 작은방의 크기가 다르며, 큰방의 문 옆에는 눈꼽재기창이 하나 더 달려 있다. 이 눈꼽재기창은 겨울에 밖에 인기척이 있으면 큰 방문을 열고 닫는 것이 아니라 얼굴만 내밀 수 있도록 만든 창문으로, 편리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창이다. 이러한 유형은 서민주택과 남부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마루는 높고 마루 끝에 장귀틀을 받치는 나무를 하나 세워 받치는 사례도, 재료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없었던 서민의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방문 앞에는 크기나 형태가 다른 모습의 툇마루가 있어 더욱 소박한 느낌을 준다. 방문은 큰방이 2분합 띠살문이고 작은방이 외닫이 문으로 되어 있어 대청이 없던 서민들은 큰방의 출입이 잦았던 모습이다. 부엌의 동쪽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고 나머지의 넓은 터는 텃밭이다. 가구기법이나 마루귀틀의 짜임새는 제법 모양을 갖추고 있어 제법 솜씨있는 목수에 의해 지어진 모양의 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 앞 골목길의 구부러진 곡선의 부드러움과 대나무로 만든 사립문의 모양새, 텃밭과 생나무 울타리, 수목들이 이루는 외부 공간 등은 민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보여준다.
특히 이 집의 가구 구조를 보면 방 쪽 상부의 평주와 고주사이에 굽이쳐 휘어 오르는 듯한 우미량형의 퇴보가 멋스러우나, 그 하부구조는 토벽집의 허름한 특성을 보여 마음으로의 서민들의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 밖으로 표출될 수 없던 시대의 사회상을 엿보는 것 같아 더더욱 향토적이다. 돌담아래 봉숭아꽃이 활짝피고, 텃밭에 각종 채소들이 푸르르게 자랄때면, 풍성한 시골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그 옆에 누렁이 소가 맛있는 여물을 먹고 되새김질하며 쉬는 모습의 풍경은 낙안읍성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골풍경이다. 그리고 지붕 위로 보이는 마당 앞 커다란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면 풍성한 느낌을 주는 것도 멋스럽다.
〈이한호가옥(李漢皓家屋)〉
마을중심에 이한호가옥(중요민속자료 제94호전남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73)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옥으로 가는 길에서는 돌로만 쌓은 돌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제멋대로 생긴 메주만한 크기의 돌을 사람의 키만큼 쌓은 조상들의 기술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나무로 만든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고, 마당 깊숙한 북동쪽에 담에 맞대어 안채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의 앞쪽으로는 헛간채가 있고 서남쪽의 담 모서리에 측간이 있다.
안채 기단은 외벌대 막돌허튼층쌓기를 하였으며 주춧돌 역시 자연석 막돌을 사용하고 있다. 기둥은 방주와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납도리에 초가를 얹었다. 안채가 서민들에게는 사대부집의 사랑채 역할까지 하기에 이집에서 가장 정성들인 건축기법이 표현되어 있다. 초가삼간에 부엌, 큰방, 작은방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운데 두 칸은 한 칸씩의 아랫방과 윗방으로 나뉘고, 문은 외닫이 띠살문과 하나씩 눈꼽재기 창을 달아, 창문을 대신하여 채광을 받아들여 방안을 밝게 하려는 지혜가 돋보인다. 눈꼽재기 창은 기능적으로 매우 편리하게 마당 앞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창문으로, 이집은 방마다 갖추고 있다. 오른편에는 두 짝짜리 판문을 단 부엌이 있는데, 이 부엌은 벽이 곧 이 가옥의 담장 역할을 하므로 앞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부엌 앞에는 우물과 장독대를 만들어 생활에 바쁜 아낙들의 편의를 배려하였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한 칸을 내어 벽을 없애 공간을 만들고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뒷쪽의 벽을 맞담으로 쌓았을 뿐 앞면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부엌에는 부엌신인 조왕신이 모셔져 있고 부엌과 헛간채의 사이에는 잘 정돈된 장독대가 있다. 특히 집 주위로 널찍하게 만든 텃밭은 협소한 성내의 특성상 멀리가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모든 먹거리의 공급처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모습이다.
〈김대자가옥(金大子家屋)〉
현재는 문화재 체험장으로 사용하는 김대자가옥(중요민속자료 제95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서내리 78-1)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많은 생활 민속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집이다. 이 집은 19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는데, 규모는 전면 두 칸에 툇마루를 꾸민 집으로 보가 마루 끝까지 나와서 기둥과 만나는 형식이다. 툇마루를 반 칸 크기로 만들면서 툇보는 사용하지 않아 집의 처마가 낮게 보인다. 특이한 점은 작은방 처마를 길게 빼서 토담을 두른 공간을 꾸미고 안에 작은 아궁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남부지방의 오래된 초가 민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토담안은 부엌도 되고 나뭇간으로도 사용하는 다목적 공간이다. 남서향 집으로 지어진 이 가옥의 대문에 들어서면 왼쪽 담장에 기대어 토석벽으로 둘러쳐진 측간이 있다. 이 측간의 형태는 간단히 널판으로 지붕을 대어 비를 피하게 만들어져 있다.
안채의 서편으로는 2분합 판문의 부엌이 있는데 다른 집에 비하여 부엌이 크기 때문에 동쪽, 즉 마당 쪽으로 별도의 창문을 만들어 부엌의 채광을 하고 있다. 부엌 앞으로 반원의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우물과 장독대가 숨박꼭질 하듯 재미있게 놓여 있다. 가운데 방 전면에는 2분합 세살문을 만들고 방 후면에는 외닫이문을 만들어, 여름에는 대청마루처럼 열어젖힐 수 있게 하여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게 하는 등 최대한 쾌적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이 집은 또 부뚜막 위의 조왕신을 믿는 습성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19세기 말 시골 농가 평민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두 짝의 대문은 남도에서 흔히 구하기 쉬운 대나무로 엮은 대문이어서 대나무가 지천에 있는 이 지역의 특색을 물씬 느끼게 한다. 대청으로 사용하는 문은 2분합 띠살문으로 되어 있고 안방문은 외닫이문을 달았는데, 일반적인 크기의 외닫이문보다 크기가 큰 것이 특징이며 이 가옥 역시 옆에 눈꼽재기창을 만들어 바깥의 동태를 살피기 편리하도록 만든 점이 흥미롭다. 더욱이 우물가 옆에 강돌로 정성들여 쌓은 돌담은 항아리와 어울려 전통가옥의 부드러움이 더한다.
〈주두열가옥(朱斗烈家屋)〉
돌담 골목길을 걷다보면, 담장이 접어드는 양지바른곳에 주두열가옥(중요민속자료 제96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서내리 78)이 있다. 이 가옥은 북서쪽으로 난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우측 끝 모서리에 담장과 붙어서 창고가 있다. 마당에서 보아 좌측에 보이는 장독대는 나지막한 돌담 뒤편에 위치하는데, 수줍어 얼굴을 가린 듯 놓여있다. 집은 부엌 1칸, 방 2칸인 아주 작은 집이다. 막돌 허튼층쌓기로 크고 납작한 돌을 외벌대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주이며 초가지붕과 토벽이 잘 어울리고 운치 있는 집이다. 창문은 안 방문 좌측에 조그맣게 봉창을 두었고 모두 외여닫이에 띠살의 창과 문을 달았는데, 텃밭에 채소를 심을 때면 더 없이 평화로운 시골 풍경의 멋을 보여준다. 툇마루 하나로 방 3개의 출입문이 연결되어 동선을 짧게 하면서 부엌 옆에 붙은 아랫방은 눈꼽재기창을 두어 밖의 동태를 파악하기 좋게 만들었다.
주두열 가옥의 아래채는 나지막한 외벌대 기단 위에 툇마루 없이 방 앞에 다듬이돌 만한 디딤돌을 놓은 아주 서민적인 모습의 건물이다. 또 안채와 마찬가지로 토석담을 벽으로 둥글게 돌려 부드럽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부엌에는 그야말로 약간의 살림이 있어 이곳이 부엌임을 알려줄 뿐, 너무나 서정적이고 서민적인 정서가 듬뿍 느껴진다. 문은 이분합 띠살문으로 덧문 없이 홑문으로 되어 있다. 토석으로 만든 벽체는 보온의 역할도 뛰어날 뿐 아니라, 목재를 풍족히 사용할 수 없었던 서민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소재이며, 그러한 모습의 정서가 우리에게는 정겹게 느껴진다.
〈최선준가옥(崔善準家屋)〉
이 가옥은 낙안읍성에서 성벽을 이용해 만든 집 가운데 하나로 특별한 분위기를 준다. 특히 안채는 유일한 밭전(田)자 모양의 평면을 가진 집으로, 외벌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다. 초가집의 완만한 곡선과 기둥의 둥근 선은 서민적이지만, 옆에 서 있는 단청으로 화려한 겹처마 기와집인 성문의 문루와는 비교되는 모습이다.
방 벽이 집의 울타리이면서 경계인 이 집에서는, 집의 반은 마을길로 내주고 반만 돌담으로 집의 경계를 삼은 것이 흥미롭다. 그러니 두 개의 방은 창문을 열면 마을길을 볼 수 있어 동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이 집에 사는 사람과 들창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진다. 곳간채는 토석담으로 기둥 없이 두르고, 그 위에 도리와 서까래를 엮어 만든 지붕 구조다. 원시적인 한옥의 모습으로 문 없이 사용하고 있다.
〈김소아가옥(金小兒家屋)〉
김소아 가옥은 낙안성의 서문이 있던 자리를 나가면서 오른쪽 골목안에 있는 초가집이다.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마당이 있는데 동쪽 끝은 성벽으로 막혀 있어 따로 담을 쌓지 않았다. 마당의 북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부엌 하나에 방이 네 개인 집으로, 안방 뒤쪽에는 후원으로 나가는 문과 툇마루가 있고 부엌문도 후원으로 나가는 판문을 달았다. 부엌은 앞과 뒤쪽으로 넓혀 공간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 부뚜막은 안방 쪽의 벽에 설치되어 있고, 그 옆쪽으로 널판벽을 설치하여 위에 벽장문을 달고 찬장처럼 사용하였다. 윗방의 옆으로 헛간이 있는데 토담으로 쌓은 부분은 나중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의 오른쪽으로는 돼지막, 헛간, 측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있다. 특히 이 집은 마루가 높게 되어 있어 섬돌을 밟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마당 한 켠으로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직접 성벽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성 안에서 외적이 침입했을 경우 요긴한 비밀 통로로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곽형두가옥(郭炯斗家屋)〉
기단은 다듬돌 바른층 쌓기로 세벌대로 쌓았고 초석은 막돌초석으로 얹었으며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한 2고주 5량집으로 비교적 굵은 부재를 사용하였다. 기둥머리는 사개맞춤인데 보머리에 받침목을 끼워 보를 받쳤으며 장혀는 받침목과 함께 맞추었는데 이런 수법은 고식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짜임새를 갖추었으며 구조기법 역시 양반가옥 기와집의 형식을 따른다. 곽형두 가옥은 초가지붕이면서 기와집 가구 형식으로 만든 부농의 운치가 풍기는 가옥이다. 성 안에서 가장 단아하고 건실한 구조를 지녔던 초가집으로 향리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원형의 서까래와 부연은 대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이곳 마을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안채는 부엌, 방, 창고방, 건넌방으로 배열된 ‘一’자 집이며, 동쪽 끝방의 경우는 앞쪽과 동쪽에도 툇마루가 있다.
방은 흙벽인데 반해 창고방은 널판벽을 설치한 후 문짝을 달았다. 장독대는 부엌 앞에 기단과 같은 높이로 만들었는데, 외부 공간에 있어 입구 앞의 적당히 좁고 긴 고샅과 돌담장 출입구의 꺾은 기법과 도랑을 내고 그 위에 넓적 돌을 덮었다. 집 주위의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게 만들고 집 앞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을 심고 텃밭에는 풍성한 채소들이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안읍성(樂安邑城) 민속마을 (한옥의 미, 2010.7.15,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