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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도서출판 부키, 2000)에 실린 글입니다.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
북왕국과 남왕국
「호세아」는 구약성서의 12소예언서 중 가장 분량이 많아서, 모두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언자 호세아의 성격과 사상은 그보다 여러 해 앞서 활동했던 아모스와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갖고 있는 여러 특징들은 아모스와 서로 비교함으로써 한층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두 예언자는 먼저 출신지에서 차이를 보였다.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출신이었던 데 반하여, 호세아는 북왕국 출신이자, 북왕국이 배출한 최대의 예언자였던 것이다.
영주(英主) 솔로몬 왕이 죽고 나서 다윗 왕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왕국 유다는 예루살렘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에 각각 도읍을 정했다. 유다는 산세 험준하고 바위 많은 척박한 지역에 위치, 사해를 옆에 두고 있었으며, 그 남쪽으로는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한편 이스라엘은 요단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하여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었고, 이에 더하여 훌륭한 경관과 풍부한 자연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판이한 자연적․지리적 조건은 각각 그 땅이 배출한 인물들의 성격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남방인 가운데는 굳건한 의지의 인물이, 그리고 북방인 가운데는 열정적 성품의 인물이 다수 배출되었던 것이다.
고난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아모스를 비롯하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구약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척박한 유다 땅에서 배출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북왕국 이스라엘이 산출한 비중 있는 예언자로는 호세아 한 사람밖에 들 수 없으니, 인물 배출이란 점에서는 북방이 단연 남방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나다니엘은 빌립에게 “나사렛(북왕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 46)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 말에는 은연중 이스라엘에 대한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곳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또 베드로, 요한, 야곱 등 대사도들이 출현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경박한 인간의 의표를 찌르는 신의 섭리라 할 것이다.
호세아가 북왕국 출신임을 말해 주는 분명한 증거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예언자가 사마리아 왕을 “우리 왕”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7: 5). 둘째로, 「호세아」에는 전편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동정이 흘러 넘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호세아의 동족에 대한 사랑이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모스와 호세아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와 호세아는 다같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재앙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쉽사리 예견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입장을 달리한 두 사람의 관점은 필연적으로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아모스의 경우, 남왕국 출신인 그의 북왕국에서의 활동은 역시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그는 북왕국 수도의 혼란에 의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고향인 유다의 드고아 벌판에서 초연히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북왕국에서의 제반 사태는 아모스로서는 강 건너편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모스와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인으로서 자국민을 상대로 예언 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예레미야를 방불케 하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동족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정치, 사회 등 각 방면이 속속들이 부패하여 멸망을 재촉하고 있었고, 호세아는 그런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생활을 꾸려 나가는 한편, 동족을 상대로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는 일생 비극적인 고독을 사무치게 느끼며 살았다.
아모스는 야훼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에 전한 후, 북왕국의 죄에 물든 도시들을 떠나 유다 땅 드고아의 한적한 광야로 홀연히 잠적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일생 조국 이스라엘에 머물며 백성의 죄를 정죄했고, 또한 그들이 파멸 당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조국에 밀어닥친 심판의 손길로부터 얼굴을 돌릴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호세아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돌이키려 하지 않았건만, 예언자는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백성으로부터 돌이켜 발아래 묻은 먼지를 떨어버릴 수 없었다(「마가복음」 6: 11). 동족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으로 인해 호세아의 마음은 이스라엘에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언 활동을 전개한 기간 면에서도 두 예언자는 대조적이었다. 아모스는 비교적 짧은 기간 단 한 차례의 예언으로 사명을 종결지었다(기원전 760년경, 기간은 1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훨씬 오랜 기간 활동했다. 그는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말년, 다시 말해 여로보암의 사망(747/6)보다 적어도 5년 전, 그러니까 늦어도 752년경에 예언을 시작했다.
그의 활동은 그 후 사마리아가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기(721)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대략 724/3년까지 활동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향해 치닫던 위난의 시기에, 그는 거의 30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야훼의 예언자로서 조국의 멸망을 선포했던 것이다.
직업 종교가들의 적개심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호세아도 예언자 조직에 속해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단적인 증거로서, 호세아는 제사장과 예언자를 다음과 같이 한꺼번에 정죄하고 있다.
“제사장아, 이 일로 네 백성은 너에게 불만이 크다. 그래서 낮에는 네가 넘어지고, 밤에는 예언자가 너와 함께 넘어질 것이다”(4: 5).
이렇듯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 전체를 상대하여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건 호세아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악의와 적대감에 에워싸인 채,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나님은 나를 예언자로 임명하셔서 에브라임(이스라엘)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예언자가 가는 길목마다 덫을 놓았다”(9: 8).
수십 년 동안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질시와 모멸을 감내하는 가운데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겨웠겠는가. 이점 호세아는 아모스보다도 한층 더 고달프고 쓰라린 세월을 인고해야만 했다. 아모스는 “신중한 사람들이 이런 때에 입을 다문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아모스」 5: 13). 아모스다운 말이라 하겠다.
그에게는 툭툭 다 털어 버리고 고향의 친족들에게 돌아가 안연히 거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입장과 처지가 판이했다. 예언을 시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동족의 죄악을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지켜보는 일도 고역이었지만, 직업종교가들의 공공연한 적개심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호세아는 “너희가 보복을 받을 날이 이르렀고, 죄지은 만큼 벌받을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예언자는 어리석은 자요, 영감을 받은 이 자는 미친 자다”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호세아는 이에 대해 “너희의 죄가 많은 만큼 너희의 원한 또한 많다”고 말한다(9: 7). 예수가 말한대로,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마가복음」 6: 4). 호세아는 동족 가운데서 낯선 사람 취급을 받았으며,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처럼 살지 않을 수 없었다.
호세아의 문장
아모스의 문장은 강직, 단순하고 절제된 퓨어 스타일로 유명하지만, 호세아는 이점에서도 그와 대조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문장에는 분노와 슬픔, 부드러움과 심각함이 교차하고 있어, 야훼의 절대적 사랑에 대한 믿음과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실망, 좌절이 아무런 논리적 구조 없이, 그때그때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겉잡을 수 없이 휘감겨 들어간다. 논리가 있다면 그것은 “감성의 논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모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호세아에게 있어서도 문체는 그 사람됨을 여실하게 반영해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호세아는 구약의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깊은 사랑과 온화한 시인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지극히 온유한 심성의 소유자인 그는, 야훼의 엄격한 징벌의 말씀에 자신의 신랄한 언사를 조금도 가첨하지 않았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고결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의 말씨는 그 사람의 마음의 목소리”인 것이다.
야훼를 등진 백성들 가운데 섞여 살며, 제자도 친구도 없이 외로이 지냈던 호세아에게는 가정적인 위로마저 없었다. 아니, 위로는커녕,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그의 가정은 수치와 슬픔 바로 그것이었다. 그와 같은 철저한 소외 속에서도 그는 이스라엘에 대해 한없는 사랑을 기울였다. 그가 멸망을 선고한 이스라엘은 예언자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무서운 심판의 비전 앞에서 그는 냉철한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예언은 고뇌에 찬 절규요 울부짖음이었다. 파멸을 향해 내리막길을 줄달음치는 동족을 향해 거듭 거듭 돌이킬 것을 간곡히 당부했건만, 수십 년에 걸친 그의 예언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멸망의 조짐이 점차 뚜렷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33년에 아람, 유다,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 정치적․군사적으로 복잡한 국제관계에 휘말리게 되었다(7: 9). 그러나 이스라엘은 야훼에게 돌아오지 않고, 이집트, 아시리아 등을 기웃거리며 외세에 의존하고자 했다(7: 11). 그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에서 호세아는 귀머거리 된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사막에 몰아치는 죽음의 열풍과도 같이 아시리아가 나타나 마침내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었던 것이다(13: 15-16).
호세아의 “헤세드”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내뿜는 예언은 사실상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사랑”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예언자의 맥박은 야훼의 심장 고동에 맞추어 뛰고 있었다.
야훼는 일찍이 아직 어린 시절의 이스라엘에 사랑을 베풀어,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끌어올린 바 있었다(11: 1). 마르지 않는 야훼의 사랑이 멸망이 임박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할 것인지에 대해 호세아는 아무런 구체적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 즉 야훼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바로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 조종(弔鐘)이 울리는 가운데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희망의 약속을 힘차게 외칠 수 있었다.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이제는 다 풀렸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다.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올리브 나무처럼 아름다워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롭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질 것이다.
에브라임이 고백할 것이다.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주마.’ 나는 무성한 잣나무와 같으니, 너는 필요한 생명의 열매를 나에게서 언제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에 쓴 것을 깨달아라. 총명한 사람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주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만 죄인은 비틀거리면 넘어질 것이다“(14: 4-9).
호세아는 논리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심정의 사람이었고, 설교자라기보다는 시인이었다. 그의 예언은 「아모스」처럼 잘 짜여진 논증이라기보다는, 감정이 흐르는 대로 자유로운 필치로 서술되어, 급격한 전환과 기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다. 즉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사랑과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야훼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인간으로서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절대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야훼의 심정이 인간의 심정과 닮은 점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호세아의 견지에서 볼 때, 신의 의(義)는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비인격적인 의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모스가 “야훼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이스라엘만을 알았다”(「아모스」 3: 2)고 말한 데 반해, 호세아는 “이스라엘은 야훼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2: 20, 6: 1, 3, 6, 8: 2, 13: 4). 그리고 야훼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이지(理智)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의 야훼”를 전 존재로서 깨닫는 것을 의미했다. 호세아는 야훼의 사랑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11: 3-4).
“야훼를 안다는 것”에 대해 호세아가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본문의 한 절을 보기로 하겠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仁愛)>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번제)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6: 6).
이 구절을 주의 깊게 보면, 호세아가 “야훼를 아는 것”과 “변함없는 인애”를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인애”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이며, 사랑 관계에서 기대되는 충성, 헌신, 친절, 경건, 은혜, 신실 등을 뜻한다. 호세아는 “야훼를 아는 것”을 말할 때 단순한 지적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전존재가 던져지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야훼를 아는 것”은 신을 한낱 관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의 야훼에 대해 충실한 사랑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이 사랑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터득하게 되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친절과 성실로서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헤세드는 사회적 통합의 원리
호세아는 “헤세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아모스와 구별된다. 아모스는 이 말을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헤세드야말로 인간의 야훼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표현해 주며, 그것이 정의(正義)와 더불어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누차에 걸쳐 “진실과 헤세드(사랑)”(4: 1), “정의와 헤세드(사랑)”(10: 2), “헤세드(사랑)와 정의”(12: 6) 등 두 개념을 함께 사용했다. 아모스는 정의만을 말한 반면, 호세아는 “정의”와 더불어 “헤세드”를 함께 언급했으며, 이점 호세아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을 아모스보다 한층 깊이 통찰했다고 할 수 있다.
호세아가 본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도덕적 의무에 의해 결합된 사랑 관계였다. 그것은 법률적 정의의 규범을 초월하는, 야훼의 긍휼과 이스라엘의 성실한 충성 및 이웃에 대한 친절에 의해 성립되는, 경건에 기초한 결합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이 공동체의 결합 매체 또는 사회적 통합의 원리가 곧 “헤세드”였던 것이다.
이 헤세드는 야훼에게서 이스라엘에 부어질 때는 은혜, 긍휼이었고, 이스라엘로부터 야훼께로 향할 때는 경건, 충성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 상호간에 베풀어질 때는 친절, 사랑, 배려 등이었다. 히브리 정신에서 이 세 가지는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를 사랑하는 것”과 “야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4: 1, 6: 6).
이스라엘 종교는 사랑 관계에서 연역되는 의무의 관계
호세아의 종교 사상은,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사랑 관계이며, 동시에 그 사랑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연역되는 의무의 관계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모스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모스의 예언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주로서의 야훼, 우주의 신에게 주목했다. 신은 열방의 운명을 정하고 전세계에 보편적인 정의의 규범을 유지하는 만군의 야훼였다. 아모스는 보편적인 시각을 떠나, 각별히 이스라엘만을 떼 내어 관심을 기울일 경우에도, 일단 거시적 관점을 확보한 다음, 야훼의 보편적 정의 위에서 이스라엘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을 선언했다. 이를테면 아모스는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접근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호세아의 경우는 이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결코 보편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야훼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이야말로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라 보고, 신앙상의 모든 문제를 여기에 집중시켰다. 요컨대 그는 안에서 밖으로의 접근 방식을 통해 모든 신앙문제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모스는 도덕의 토대 위에 종교를 세우고자 한 반면, 호세아는 종교로부터 도덕을 끌어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모스는 도덕적 논리의 관점에서 신앙문제를 생각한 반면, 호세아는 야훼의 깊은 은혜에 대한 내밀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도덕적 진실을 도출해냈던 것이다.
사랑은 뿌리, 정의는 열매
아모스와 호세아는 다같이 신앙생활의 건전성을 판별하는 시금석이 그 행위라고 보았다(「아모스」 8: 7, 「호세아」 4: 9). 이스라엘은 그 행한 바에 의해 야훼 앞에서 심판을 받게 마련이며, 이스라엘이 저지른 부패, 압제, 범죄 등은 이스라엘이 야훼를 떠났음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라는 것이다. 아모스의 분석은 여기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범한 죄악의 이면에 감춰진 근원을 좀더 파고들지 않고, 다만 “공의를 행하지 않는 한 야훼 앞에 용납될 수 없다”고 선언할 뿐이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즉 야훼와 이스라엘간의 관계가 사랑 관계라고 하는 근본 전제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 이면에 잠재한 근원적인 성향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모스가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5: 24)하고 선포한 반면, 호세아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번제)보다는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6: 6)고 말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보편적 도덕률을 파기한 행위 자체에 대해 심판을 가했지만,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야훼에게 진실하지 못한 결과 보편적 도덕률을 위배했다고 간파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의 문제 이전에, “그들의 야훼에 대한 관계”에 본질적인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통찰했던 것이다.
모든 종교적 의식과 형식을 무가치하다고 보고, 정의의 실행이라고 하는 열매의 중요성을 깨우친 아모스는 위대한 정의의 예언자였다. 그러나 행위의 열매 이전에, 야훼에 대한 충성스런 사랑이란 “뿌리”가 선행한다는 것을 간파한 호세아는 더욱 위대한 사랑의 예언자였으며, 신앙의 본질을 통찰한 믿음의 예언자였다.
나무의 관건이 열매보다는 뿌리일 수밖에 없듯이, 종교의 핵심도 행위에 앞서 믿음에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뿌리를 오직 신의 대지에 성실히 뻗어 내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히브리 종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행위는 믿음의 결과요 종속변수일 뿐,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 “근본에 힘쓰는 일(務本)”이야말로 헤브라이즘의 본령이다.
이스라엘과 야훼의 가족관계
이스라엘을 주로 하나의 국가로서만 파악한 아모스와는 달리, 호세아는 통상 이스라엘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마치 한 개인의 역사인 것처럼 다루었다. 야곱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한 개인처럼 간주한 것은 물론 수긍이 가는 일이다(12: 2, 3, 12). 하지만 이스라엘이 큰 백성을 이루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시기 이후를 말하면서도, 호세아는 계속 그들을 한 개인인 것처럼 말했다(12: 13, 11: 1-4).
호세아는 특히 야훼가 이스라엘에 베푼 “첫사랑”에 주목했다. 야훼는, 마치 광야를 여행하면서 기갈에 허덕이던 길손이 뜻하지 아니한 포도송이를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하듯, 민족 형성 초기의 이스라엘을 심히 반갑게 여기고 사랑을 쏟았다(9: 10).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의 죄로 말미암아 야훼에 대한 청순한 첫사랑을 더럽히고 말았다. 마치 아침 안개, 새벽이슬과도 같이 그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다(6: 4).
호세아는 항상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의 야훼에 대한 태도와 향배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의 본질이 거기에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는 죄의 뿌리를 한층 더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모스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 한 어떠한 의식도 야훼 앞에서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반면 호세아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철저히 인격적 관계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둘 사이의 관계를 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할 경우, 예언자에게는 여러 형태의 비유적 표현을 사용할 여지가 생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를 왕으로, 그리고 자신들을 그 백성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호세아는 정치적 관계가 자신의 종교 사상의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보고, 그보다 한층 더 가까운 가족 관계의 비유를 사용했다.
호세아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사이를 가족관계로 설명하면서, 이를 두 가지 형태로 즉 “부자 관계”와 “부부 관계”로 표현했다. 첫째, 4장에서 14장까지 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11: 1)고 한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둘째, 1장에서 3장까지에서 호세아는 둘 사이를 남편과 아내 사이로 말하고 있다.
“이 나라가 주를 버리고 떠나서, 음란하게 살고 있다”(1: 2)고 하는 표현에서, 그리고 “그가 귀고리와 목걸이로 몸단장을 하고, 정부(情夫)들을 쫓아다니면서 나를 잊었다”(2: 13)고 한데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남편인 야훼를 저버린 부정(不貞)한 아내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개의 비유는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실제로 1장에서는 두 가지가 마치 단일한 비유인 것처럼 쓰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야훼의 아내이자(1: 2) 자녀로(1: 10) 나타나고 있다. 호세아에게 있어서 야훼가 이스라엘의 아버지인 동시에 남편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버지로서의 야훼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야훼에 대한 관념은 물론 호세아가 새롭게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으로서의 야훼에 대해서는 잠시 설명을 미루고, 먼저 아버지로서의 야훼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근동의 이방 종교에서도 신은 그 백성의 아버지였으며, 백성의 조상신으로 숭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경우 백성은 부족신, 민족신의 혈연상의 후손으로 인정되었다.
예컨대 「민수기」 21: 29에서 모압인은 “그모스의 아들과 딸”로 일컬어졌으며, 「말라기」 2: 11은 이방 여인을 “이방신의 딸”로 부르고 있다. 이방 종교에서 신은 오직 육체적․혈연적 의미에서 아버지로 불릴 뿐이었다. 즉 이방 백성은 신의 혈통상의 후손이었고, 신은 그들의 선조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방신들은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하는 존재로서, 다른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는 이방종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야훼를 아버지라 불렀다. 구체적인 증거를 보기로 하겠다. 히브리인의 가장 먼 조상인 아브라함의 선조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 살았을 때 분명히 야훼가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여호수아」 24: 2). 따라서 야훼는 결코 이스라엘의 조상신이 될 수 없었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자연적․혈연적 관계가 아닌, 은혜에 입각한 관계였고, 야훼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에서 가장 잘 표출되었다.
그러므로 야훼는 이스라엘을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아들로 선택한 것이었다(11: 1). 이스라엘 종교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종교가 아니라 계약 종교였으며, 계약에 입각한 관계는 당연히 자연적 관계가 아니라 도덕적 관계였다.
모압인의 경우 그들과 그모스신 사이에는 아무런 계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모압인의 행위의 도덕성 여부와는 무관한 자연적 관계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야훼의 관계는 판이하게 달랐다. 즉, 이스라엘이 야훼와의 계약을 위반할 경우, 야훼는 이스라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취소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들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오직 그가 야훼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동안, 다시 말해서 도덕성을 유지하는 동안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야훼를 버렸고(4: 10), 야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9: 17), 미련한 아들처럼 행동했다는 점(13: 13)에서 죄를 범했다. 이에 야훼는 예언자를 보내 돌이킬 것을 타일렀고(12: 10), 수만 가지 율법을 기록해 주었건만, 그들은 이를 자기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8: 12).
남편으로서의 야훼
호세아는 야훼의 아들로서의 이스라엘을 매우 강조했다. 그가 부자 관계를 강조한 것은 특히 이스라엘민족의 어린 시절, 야훼가 친히 교육을 베풀던 시기를 언급하면서였다. 그러나 호세아의 견지에서는 이 부자 관계의 비유마저도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깊고 오묘한 관계를 이루 다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고대근동 사회에서는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를 대할 때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듯 하는 습속이 있었다(「말라기」 3: 17, 1: 6).
최근까지 근동 사회에서 장성한 아들과 그 집의 노예는 거의 동등한 자격으로 천한 일을 맡아보았고, 아들과 노예는 가장(家長) 앞에 설 경우 다같이 조신하게 삼가는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다정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은 “어린 아들”에 대해서 뿐이었다. 그리고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아들로 비유한 것도 어린 시절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야훼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그 사랑에 대한 배신을 좀더 철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자 관계 이상의 긴밀한 관계, 즉 부부 관계의 비유를 사용해야만 했다.
남편인 야훼와 아내인 이스라엘의 결혼 비유, 다시 말해 남편으로서의 민족신 개념은 호세아가 처음으로 창안한 것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특유한 개념도 아니었다. 아버지로서의 민족신 개념과 마찬가지로 남편으로서의 민족신 개념 역시 그 뿌리는 이방 종교에 있었다. 이미 이방 종교에 있어서도 신과 백성은 종종 남편과 아내로 이해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방 종교에 있어서, 그와 같은 개념은 지극히 조야한 육체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었을 뿐, 전혀 정신적 내용을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 종교 역시 이방 종교와 같은 수준으로 타락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는 이미 부패하여, 종교적인 매음이 성행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동시대의 가나안 풍습과 별 차이 없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4: 13, 14).
이러한 상황에서 호세아는 아모스가 했던 방식대로, 남편과 아내라는 종교적 비유를 묵살하고, 초월적․보편적 도덕률을 부여하는 창조주, 만군의 야훼를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당시의 종교적 비유를 배척하는 대신, 그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했다. 이스라엘 종교를 자연 종교의 차원에서 끌어올려, 야훼에 관한 가장 심원한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방도로서 이 비유를 사용했던 것이다.
금송아지 숭배에 대한 질타
호세아는 야훼를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그는 둘 사이의 결혼관계의 진정한 본질이 육체적인데 있지 않고 도덕적인 데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가장 긴밀한 사랑 관계이며, 배우자에게는 정절(貞節)이 요구된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2: 19-20).
그것은 “정의와 공평”, “사랑과 긍휼”, 그리고 “성실”을 토대로 한 관계였다. 따라서 북왕국 각지의 사당에서 야훼의 상징으로서 숭배되던 금송아지는 결코 진정한 이스라엘의 배우자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간부(姦夫)에 불과했다.
금송아지에 대한 호세아의 단호한 태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를 선배 예언자들로부터 확연히 구분 짓는다. 실제로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아모스마저도 금송아지 숭배를 정죄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야훼를 바알 수준으로 격하시킨 금송아지 숭배야말로 이스라엘의 죄악과 파멸의 근본 원인이라고 이해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야훼 숭배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길갈과 벳아웬의 사당에서 예언자들은 야훼의 살아 계심을 가리켜 맹세했고(4: 15), 바알의 절기를 야훼의 절기로 여겼으며(2: 11, 13, 9: 5), 금송아지 사당을 야훼의 집으로 간주했고(9: 4), 금송아지에 바치는 희생을 야훼에게 드리는 제물로 생각했다(8: 13).
그러나 호세아의 판단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야훼 숭배는 겉보기에만 야훼 숭배였을 뿐 사실은 야훼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였다(3: 1). 야훼와 금송아지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야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지만(1: 10), 금송아지는 세공업자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 불과했다(13: 2). 그러므로 저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우리의 신”이라 부르는 민족은(14: 3), 야훼와의 결혼 서약을 파기하고 다른 사내를 연모하는 부정한 여인과 다를 바 없었다.
금송아지 숭배에 대한 호세아의 질타는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한 십계명의 두 번째 계율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호세아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예언이 제2계명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명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모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아모스는 호세아 못지 않게 십계명 준수에 열심이었던 예언자이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부정과 배신의 근본적인 증거로서 지적한 금송아지 숭배를, 그보다 불과 수년 전에 활동했던 동시대의 예언자 아모스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결국 호세아는 아모스에 의해 포착되지 못한 채 간과 될 수밖에 없었던 종교적 국면을 특유의 통찰로써 민감하게 느끼고, 그 의미를 깊이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를 샤머니즘으로 만드는 금송아지
호세아의 종교사상의 기조를 분석해 보면 이점을 좀더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상태를 판단함에 있어서, 종교가 사회 정의의 실천에 미친 실질적인 영향력에 주목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모스와는 초점을 달리했다. 그는 야훼에 대해 인격적인 성실과 정절을 바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 관계를 올바르게 깨우치는 데 히브리 종교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호세아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각지의 사당에서 행해진 금송아지 숭배는 결코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남편인 야훼와는 아무런 유사점도 없는, 천박한 배우자에 대한 저급하고 불순한 애정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육체적 애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제2계명이 우상숭배를 금지했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정죄한 것이 아니다. 사당의 의식이, 이스라엘이 야훼를 향해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종교의 범주에서 금송아지를 일소하고자 한 것이다.
금송아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말과 실제가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사실은 샤머니즘일 수도 있고, 그들이 믿는다는 하나님은 사실은 산신령이나 칠성님일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이 구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실제로는 재운(財運), 관운(官運)일지도 모르며, 그들이 바치는 헌금은 실상은 복채(卜債)일지도 모른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태복음」 7: 22, 23).
호세아의 아내 고멜
1장에서 보이듯이 호세아가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처음 자각한 것은 아내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서였다. 야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섭리를 보여준다. 아모스에게는 아시리아 군대의 진군을 통해서, 호세아에게는 가정의 수치와 비극을 통해서, 야훼는 그 뜻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야훼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명을 자각한 호세아는 자신의 부끄러운 가정생활의 베일을 젖히고 그 내밀한 사정을 온 세상에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소명 받은 자는, 필요하다면 인간적인 프라이버시마저도 팽개쳐야 할 만큼 철저히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호세아는 아내에게 최선을 기대했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아내의 정결치 못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지극했고, 아내를 돌이키고자 하는 심정이 너무나 간절했던 나머지, 그는 아내에 대해 아무런 율법상의 절차를 적용하지 않고, 아내가 낳아온 세 자녀를 모두 자신의 자녀로 인정했다.
그와 같은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고멜은 이를 배신하고, 끝내 정부(情夫)와 함께 불륜의 도피행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악의 사태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사랑은 식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정부의 버림을 받고 비참하게 노예로 팔려갔음을 알고는, 몸값을 치르고 집으로 다시 데려왔다. 성경 주해자이자 시인인 딘 플럼터(Dean Plumptre)는 이 정경을 다음과 같은 시로 담아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나는 속전을 지불하고 아내를 데려왔다.
(내가 처음 그녀에게 구혼했을 때 젊은 그녀가 지참금을 가져왔던 것과 기이한
대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내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헤어져 있던 시절의 부드러운 소망은 내게 없었고
이전에 내가 쏟아주었던 자유와 사랑은 그녀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이젠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침묵과 고독 속에서, 수치와 슬픔 속에서,
눈물과 금식과 기도 속에서
그녀는 자기 삶의 오점을 말끔히 씻어내야만 했다.”
고멜의 부정과 이스라엘의 죄악
그러면 호세아는 과연 고멜의 부정을 알고 결혼한 것인가, 아니면 결혼 후 비로소 알게 된 것인가? 「호세아」 1, 2장을 읽으면 호세아가 야훼의 명령에 의해, 고멜이 부정한 줄 알면서도 짐짓 결혼한 것이 아니가 하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호세아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결혼 생활의 비극을 공개했는가 하는 점이다. 호세아가 털어놓은 이야기의 핵심은, “고멜이 결혼 후 저지른 부정”과 “이스라엘의 야훼에 대한 죄”가 대응 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이다.
만일 호세아가 결혼 전부터 고멜이 부정한 여인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는 결혼 후의 아내의 부정에 대해 그토록 비통한 슬픔과 수치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혼 전의 호세아에게 아내의 부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혼 생활 중 이 슬픈 경험을 겪으면서, 불신의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안타까운 심정을 마음 속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또한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불행이 무의미한 재앙이 아닌, 야훼의 섭리가 계시되는 통로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호세아는 그 이전의 어떤 예언자들도 얻을 수 없었던,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의 기계적인 계시에 의해서는 얻을 수 없었던 중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즉 야훼의 본질은 정의라기보다는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서」 4: 8)라고 말했다. 같은 의미에서 호세아는 아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 8)라는 예수의 말처럼, 고결한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의 청순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그 본질로 하고 있는 야훼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높이 이상의 위대함과 선량함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호세아는 그 고결한 사랑이 야훼의 높이에까지 도달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 호세아의 인생 드라마에 등장한 고멜은, 야훼가 주관하는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여인이었다. 순결하던 시절의 고멜은 야훼가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같이” 보던 초기의 이스라엘을 상징했고(9: 10), 부정한 고멜은 “바알을 섬긴” 이스라엘을 상징했다(2: 13).
그리고 과분하게도 고멜이 차츰 아내의 지위를 회복해 가는 과정은, 버림을 받고 광야에 던져졌다가 다시 영원한 사랑의 신 야훼에 의해 제자리로 복귀하게 될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한편, 호세아의 고멜에 대한 착잡한 감정은 야훼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정을 반영해주었다. 즉 죄와 부정에 대해 한때 증오가 타오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