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설
○ 이렇게 형성된 마을이 번성하고 나주임씨가 부와 명성을 얻어 마침내 인근의 마을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는데 한 도사가 나타나 임씨를 찾았다고 한다. 임씨가부자가되고 권세를 얻은 까닭은 대성산의 3개 봉우리가 모인 곳에 형성된 연소혈이라는 명당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는 도사는 나주임씨가 더 크게 번성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곳에 있는 묘를 파 옮겨야 한다는 속임수로 임씨를 꼬이자 임씨는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고 도사의 말을 믿고 명당을 파헤치자 집채만한 황소가 앞발을 구부 린채 무릎을 꿇고 있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 그때서야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린 임씨는 도사를 뒤쫒았으나 도사는 이미 연소혈 부근의 돌재모퉁이를 돌아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도사는 이 모퉁이를 돌아가다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놓쳐버렸는데 지금도 비가 오면 돌제 모퉁이에서 딸그랑거 리는 쇠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렇게해서 번성했던 나주임씨는 망해버리고 타성받이들이 대성산의 정기를 받아 성인을 배출한다는 이 마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 기 타
○ 이 마을에는 옛부터 대성산의 정기를 받아 생성된 반월형의 명당이 마을 중앙에 있는데 이곳에 남원양씨가 묘를 썼다. " 동네 가운데 반월형 명당이 있는디 거그에 사람이 살고 있었당마, 전에 동네사람 들이, 근디 그, 남원양씨들의 세력에 밀려 동네가운데에 묘를 쓰게 했다고 그전 어른들이 그래쌌는디, 그래가꼬 그때 당시에는 장 됐는지 몰라도 시방은 동네아무도 없어… "
○ 이 묘를 쓸 때 남원양씨들이 세도를 부려 반월혈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도 그들을 몰아내고 묘를 썼다는 것이다. 이 묘 바로 위에는 당산이 있는데 수령이 5백년이 훨씬 넘었다는 당산나무가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이 나무는 마을의 형성과 더불어 마을의 안녕을 빌며 심었다고 한다.
" 전에는 정월 초이튿날 당산제를 지냈는디, 아들 못낳는 사람이 제를 모셨는디, 요 새는 나도 밤나무가 된게 우상을 섬기냐 마냐하고 서로 안모실라고 그래, 그래안지낸 지가 한 10년이 넘되, 근디 그, 아들 못낳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서 그랬 는지 자석을 봤제… "
○ 여느 마을처럼 당산제가 폐지된지 오래지만 특이한 점이 자식을 못 본사람이 제관 이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제관이되어 당산제를 모시고 자식을 얻었다는 김운혁(70 세)씨의 말이다. " 긍게로, 정씬디, 당산제를 솔찬히 모셨제, 그랬는디 그뒤에 자석을 봤어… "
○ 이 마을은 옛부터 산동면에서는 두 번째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 저 웃점, 상신이라고 그런디, 거가 젤로 못살았고, 그담에 여근디, 해방되고부터 형편이 쬐께 풀렸제… "
○ 해방후에는 마을 앞 요천에서 한지를 생산했다고 한다. 한지를 생산하는 공장이 여 러개 있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참여해 소득을 올렸는데 당시 요천의 물을 이용해 물래방아를 돌려 한지를 생산 했다고 한다. 주로 걸레종이(포장지나 초배지 인 듯), 도배지, 문종이를 약 20여년간 생산했다고 한다.
○ 그밖에는 별 자랑거리가 없다는 김운혁씨는, " 그저 농사나 짓고 가나하게 살다본게 뭐 마을 내력 어쩌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없 제, 그전 어른들은 그런 말씀을 많이 해 주었는디, 어디 학자가 있어가꼬 딱 정리 를 해노먼 몰라도 시방은 잘몰라… " 라며 마을 내력을 잘모른다는 자책의 말이다.
○ 이 마을은 봇들(마을 앞 요천부근의 넓은 들로 약 450마지기 정도 된다고 함)외에는 평지면서도 산세가 험해 농토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나마 봇들외엔 물길이 짧아 농사 짓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 그러나 마을 안길 포장과 마을 환경은 다른 지역 어느곳 보다도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을 뿐아니라 마을 회관 앞에는 마을의 유래를 적은 마을 유래비를 세워 마을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수지면 초리(草里)
* 3백여년전 두문동 72현 박문수 후손 죽산 박씨 처음 정착 * 지형상 용의 꼬리 부분, 꼬리가 초리로되 마을 이름 사용 * 1907년전까지 수지방의 방청있어 주변마을의 중심지 역할 수지면 초리는 남원시의 최남단 마을로 전라남도 곡성군 고달면 백곡리와 경계에 있는 전형적인 논농사위주의 가난한 마을이다.
□ 연 혁
○ 초리는 본래 조선조 말엽까지 곡성군 고달면과 송동면 일부, 그리고 수지면 일부로 형성된 초리방의 방청이 있었으나 1907년 행정구역개편때 수지방으 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남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 지면의 행정리로 바뀌었다.
□ 정 착 조
○ 초리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은 인근 전남 곡성군 고달면 죽림리에서 온 문화 유씨 유원화다. 유원화는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여러 곳을 떠다니다 1715년 경에 부인 죽산박씨와 함께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 부인 죽산 박씨는 고려말 충신 박문수의 후손이다. 박문수는 조선이 개국하 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두문동으로 들어가 분사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그 후손들이 뿔뿔히 흗어져 이곳까지 흘러 왔다는 것이다. 이후 이들은 수지면 호곡리 안홈실로 이주하여 오늘날 죽산 박씨의 세거지가 되 었다.
○ 이 마을에는 약 34호가 살고 있는데 인구는 104명이고 문화 유씨의 집성촌 으로 타성받이는 김씨와 박씨 단 두 가구뿐이다.
□ 마을 유래
○ 마을을 둘러 싸고 있는 산이 용정산(龍精山)인데 이 산의 형태가 용이 또아 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마을이 용의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 다고 해서 초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 요 뒤쪽으로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용정산(龍精山)인디, 저짝 동네 초입의 뭉텡한데가 용머리고, 저짝 끄트머리가 꼬리라고 한디, 긍게 용 끄 트머리에 동네가 있응게 초리라고 했등게비여, 긍게 꼬랑지를 사투리로 초리라고 안헌개비, 근디, 옛날에 초리방이 있었다고 초리라고 했는가도 모르제… " 마을 유래에대한 유해열(64세)씨의 말이다.
○ 초리는 꼬리의 고어임에는 틀림없으나 왜 한자로 풀 초(草)를 썼는지에 대 해서는 명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일설에는 산이 없고 들이 많아 갖가지 풀들이 많아 그렇게 불렀다는 설과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차달이 황해도 문 화현 초리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지의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 전 설
○ 이렇게 형성된 마을이 번성하고 나주임씨가 부와 명성을 얻어 마침내 인근의 마을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는데 한 도사가 나타나 임씨를 찾았다고 한다. 임씨가 부자가되고 권세를 얻은 까닭은 대성산의 3개 봉우리가 모인 곳에 형성된 연소혈이 라는 명당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는 도사는 나주임씨가 더 크게 번성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곳에 있는 묘를 파 옮겨야 한다는 속임수로 임씨를 꼬이자 임씨는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고 도사의 말을 믿고 명당을 파헤치자 집채만한 황소가 앞발을 구부 린채 무릎을 꿇고 있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 그때서야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린 임씨는 도사를 뒤쫒았으나 도사는 이미 연소혈 부근의 돌재모퉁이를 돌아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도사는 이 모퉁이를 돌아가다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놓쳐버렸는데 지금도 비가 오면 돌제 모퉁이에서 딸그랑거 리는 쇠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렇게해서 번성했던 나주임씨는 망해버리고 타성받이 들이 대성산의 정기를 받아 성인을 배출한다는 이 마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 기 타
○ 이 마을에는 옛부터 대성산의 정기를 받아 생성된 반월형의 명당이 마을 중앙에 있는데 이곳에 남원양씨가 묘를 썼다. " 동네 가운데 반월형 명당이 있는디 거그에 사람이 살고 있었당마, 전에 동네사람 들이, 근디 그, 남원양씨들의 세력에 밀려 동네가운데에 묘를 쓰게 했다고 그전 어른들이 그래쌌는디, 그래가꼬 그때 당시에는 장 됐는지 몰라도 시방은 동네에 아무도 없어… "
○ 이 묘를 쓸 때 남원양씨들이 세도를 부려 반월혈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도 그들을 몰아내고 묘를 썼다는 것이다. 이 묘 바로 위에는 당산이 있는데 수령이 5백년이 훨씬 넘었다는 당산나무가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이 나무는 마을의 형성과 더불어 마을의 안녕을 빌며 심었다고 한다.
" 전에는 정월 초이튿날 당산제를 지냈는디, 아들 못낳는 사람이 제를 모셨는디, 요 새는 나도 밤나무가 된게 우상을 섬기냐 마냐하고 서로 안모실라고 그래, 그래 안지낸 지가 한 10년이 넘되, 근디 그, 아들 못낳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서 그랬 는지 자석을 봤제… "
○ 여느 마을처럼 당산제가 폐지된지 오래지만 특이한 점이 자식을 못 본사람이 제관 이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제관이되어 당산제를 모시고 자식을 얻었다는 김운혁(70 세)씨의 말이다. " 긍게로, 정씬디, 당산제를 솔찬히 모셨제, 그랬는디 그뒤에 자석을 봤어… "
○ 이 마을은 옛부터 산동면에서는 두 번째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 저 웃점, 상신이라고 그런디, 거가 젤로 못살았고, 그담에 여근디, 해방되고부터 형편이 쬐께 풀렸제… "
○ 해방후에는 마을 앞 요천에서 한지를 생산했다고 한다. 한지를 생산하는 공장이 여 러개 있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참여해 소득을 올렸는데 당시 요천의 물을 이용해 물래방아를 돌려 한지를 생산 했다고 한다. 주로 걸레종이(포장지나 초배지 인 듯), 도배지, 문종이를 약 20여년간 생산했다고 한다.
○ 그밖에는 별 자랑거리가 없다는 김운혁씨는, " 그저 농사나 짓고 가나하게 살다본게 뭐 마을 내력 어쩌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없 제, 그전 어른들은 그런 말씀을 많이 해 주었는디, 어디 학자가 있어가꼬 딱 정리 를 해노먼 몰라도 시방은 잘몰라… " 라며 마을 내력을 잘모른다는 자책의 말이 다.
○ 이 마을은 봇들(마을 앞 요천부근의 넓은 들로 약 450마지기 정도 된다고 함)외에 는 평지면서도 산세가 험해 농토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나마 봇들외엔 물길이 짧아 농사 짓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 그러나 마을 안길 포장과 마을 환경은 다른 지역 어느곳 보다도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을 뿐아니라 마을 회관 앞에는 마을의 유래를 적은 마을 유래비를 세워 마을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운봉읍 가산리 방현(榜峴) - 두번째
○ 이 마을은 본래 방고개로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방현이 되었다. 두 가지 유래가 전해온다.
○ 그 하나는 이곳은 옛부터 관아가 있는 운봉읍과 권농병마사가 있는 아영면 지역의 중간 통로였던 관계로 이 고개에 운봉의 모든 공지사항을 알리는 방 을 붙이는 곳이었다고 한다.
○ 또 다른 예기는 이웃 마을인 아영면 아곡리에 사는 연안 이씨가의 한 사람 이 전주에서 벼슬(마을 사람들은 방을 살았다고 함)을 살고 돌아오는데 아 곡사람들이 대방젱이에 나와 방(벼슬을 하고 돌아오는 연안이씨를 지칭)을 기다렸다고 해서 고개가 있는 이 마을을 방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 이러한 이야기를 증거라도 하듯 현지에는 이와 관련된 지명과 대상물들이 산재해 있다. 마을 뒤 방고개를 넘으면 바로 아영면 아곡리인데 이곳에 대 방젱이란 지명이 있고, 이 대방젱이에 아름드리 나무가 10여그루 서 있으며 큼직한 바위가 여럿 있는데 그 바위중 하나에 대방정(待榜亭, 1884년 고종 21년에 각자됨)이라 각자되어 있고 그 앞에 있는 바위에는 방고대(榜告臺) 라고 새겨져 있다.
○ 이것을 보면 옛날 이곳이 운봉현에서 공지사항을 알리는, 요즘 말하는 게시 판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대방정의 대자는 기다릴 대(待)이고, 방은 알린다는 의미의 방(榜)으로 이곳에 관아에서 소식을 알리는 방(알림 판)을 볼 수 있도록 작은 정자나 집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기 때 문이다.
○ 그리고 방고대 역시 고(告)자는 알린다는 알릴 고(告)이기에 소식을 알린다 는 뜻으로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력과는 달리 옛날에 운봉 4개면(운 봉, 아영, 인월, 산내면으로 당시에는 운봉 6방이라 해서 남면, 서면<운봉>, 상도방, 하도방<아영>, 산내방<산내>, 동면<인월면>으로 불리었다) 사람들 을 위해 운봉현에서 이곳에다 소식을 알리는 게시판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이를 뒷받침해줄 근거가 앞서 언급한 지명과 그곳에 새겨진 문구들이며 이 마을 원로인 윤일봉(71세)씨의 말에 의하면, "전에 저 큰 질(남원 - 대구간 국도 24호선)이 없고 차가 없을 때는 저 앞 황산 모퉁이 웃도치(鳴石峙), 긍게 울명재라고도 하고 독석재라고도 그런 디, 거그로 넘어 댕겼는디, 그래가고 저 앞 비전마을로 댕겼는디, 전에는 비전에 큰 도개(양조장)가 있었제, 글고 요앞 양촌리 안있등개비, 거그가 물통거린디, 아 긍게 저 황산 꼴째기 물허고 방현리 물이 거그서 합쳐져, 그래서 거그가 물통거린디, 아 거그가 큰 주막이 있었디야, 그때는 저 가 산리도 없었고 양촌리허고 요근동에 한 120여호가 넘게 산 큰 동네였다고 그전 어른들이 그래쌌어… "
○ 큰 도로가 나기전에는 방현리를 중심으로 인얼면과 산내면, 그리고 아영면 과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나드는 길목이 되어 삼거리에는 큰 주막이 자리하 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이 마을이 방현리임에는 틀림없다.
주천면 용궁리 내용궁
* 호랑이 엎드린 형국 영재봉 아래 龍宮 * 세 부자 누석단 쌓아 마을 액운 막아 * 지상의 별유천지 수중궁궐
주천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5백미터쯤 올라가면 길좌측에 용암정이 보이고 그 위로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왼쪽은 바깥용궁, 오른쪽은 안용궁으로 가는 길이다.
□ 연 혁
○ 용궁은 본래 내·외용궁으로 구분되어 외룡리는 남원부 하원천면에, 내룡리 는 주촌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두 개 마을을 병합하여 용궁리라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 정착조
○ 이 마을은 본래 신라 진성여왕(890년경)때 이 마을 동쪽 영재봉(복호몬당 :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의 언덕) 줄기에 부흥사라는 절을 세우고 고승선사들 이 휴양처로 삼아 드나들며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 그 뒤, 채씨, 정씨들이 들어왔고 동학난을 피해 들어온 강화노씨, 김씨, 최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현재 50여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 마을 유래
○ 본래 부흥사가 세워지고 고승선사들의 휴양지로 사용하면서 이 마을이 지상 의 별유천지로 바닷속의 용궁같아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오는데 정확히 용궁이라고 불리운 까닭을 아는 사람은 없다.
" 옛날에는 배고픈 사람을 용궁에서 다 멕여 살렸대요… "
○ 용궁마을은 지리산의 영향을 받아 계곡이 깊고 물이 좋아 토지가 비옥해 옛 부터 주천면에서 제일 부자마을로 소문이나 면소재지인 장안리 밧뜰(밭들: 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사람들에게 이곡(쌀)을 풀어줄 정도였다는 박옥순(54 세, 전부녀회장)씨의 말이다.
○ 이 마을에는 아직도 돌담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민속적인 분위기가 만 연하고 산수유나무가 유난히 많은데다 민속신앙물인 누석단과 당산, 그리고 지명에 대한 별난 얘기가 많아 주변의 육모정과 지리산을 연계한 민속마을 로 가꾸어볼만한 마을이다. □ 7代마다 마을 주인 바꾸는 사립안(전설)
○ 이 마을은 정착한 사람들이 7代째가 되면 주인을 바꾼다(다른 사람에게 터를 비워준다)는 전설이 있다.
○ 이 마을 터는 7代만에 주인을 바꾼다는 얘기다.
○ 최초 정착한 오씨가 7代를 못넘기고 진주소씨에게 터를 물려 주었고, 진주 소씨들이 들어와 오씨의 대를 이어 7대를 살다가 오씨처럼 마을을 광주이씨 에게 비워주었는데,
" 오씨 다음에 소씨가 들어와 7代를 살다가 내내 마찬가지로 이 터를 비워 주게 되얐는디, 소씨 집안 7代째 사는 과부가 비워줫어, 왜 비워줫냐, 이 과부가 시안(겨울)에 불을 담아 놓고 밥해주는 사람허고 방에 앉아 있으 면 정지(부엌)에서 사람 소리가 나, 사람 소리가 낭게 나가봐라 긍게로 가 서보면 사람은 없는디 빈 솥에 불이 살라져 있어, 정지에 아무도 없는디 불이 탄단말이시, 긍게 이 과부가 겁난(현명한) 과부였등개비여, 이 터를 비우라고 벌써 지신(地神)이 이렇게 한 개비다, 터를 비워줄대가 되었나비 다. 그래가꼬 집을 비우게 되얐디야 "
○ 진주소씨가 마을을 떠난후 세 번째로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광주이씨가 의 명천이란 사람이다.
" 저 만도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엄남쟁인(엄나무 고개)디, 그전에는 시방 보 절로 가는 큰 길이 나기 전에는 이 길로 댕겼는디, 거그에 큰 주막이 있 었는디, 이 분이 터를 잡으로 댕기다 이 주막에서 묵게 됐는디, 주모가 손 님은 어디를 갔다오느냐고 물응께로 터를 잡으로 다니는 길이요 하니께, 저 짝에 집을 내놨소, 그래가꼬 하룻밤 자고 그 자리에서 과부집을 사가 꼬 들어왔제, 그래서 광주이씨들이 사릅안의 세 번째 주인이 된거여… "
○ 광주이씨가 진주소씨의 터를 사서 이주해온 때가 조선조 헌종무렵인 1830년 경이다.
○ 이렇게 주인을 세 번 바꾼 사립안은 광주이씨가 터를 잡은지도 벌써 7대째 가 되었는데 구전되어온 이야기를 믿는다면 터를 비워줘야 할때가 되었다.
○ 그래서 그런지 광주이씨가의 종손은 대를 이을 자손이 없다고 한다. 과연 7 대째인 지금 터를 비워주게 될지 자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전 설
○ 마을의 형태를 보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데 귀금스런 얘기가 솔찬히 많은 이 마을은 명당욕심에 과객에게 대접이 유달리 융숭했다고 한다.
○ 그래서 오씨들이 부자로 살 때 진주소씨가 명당을 얻어 오씨의 대를 이었다 는 얘기와
○ 마을 앞 소나무가 많은 곳이 이 마을의 당산인데 이곳이 '진주투석'이란 명 당이라고 한다. 이곳에 마을의 어떤이가 몰래 묘를 썼는데 마을사람들의 꿈 에 마을 뒷산이 무너지는 현몽을 주어 묘를 쓴 사람을 찾아내 파보니 오색 흙이 나왔다는 얘기,
○ 그리고 진주소씨의 마지막대인 과부댁이 인정이 많아 3년동안 흉년이 들어 나라에서 빌려먹은 양식을 마을 사람들이 갚지 못하자 이를 대신해 다 갚아 주었는데 나라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과부댁에게 용머리를 새긴 사랑채를 지 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 기 타
○ 사립안은 옛날에 잘 살았다는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는 마을로 퇴락 해 버렸는데 까닭은 여느 마을과 같다(마을에서 나간 사람들은 모두 잘산다 고 한다)
○ 이렇게 귀끔스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사립안은 남원지역에서는 가장 양반으 로 자부심이 대단한데 옛부터 씨족의 공부를 위하여 서당을 만들어 교육을 시켜 스스로 명예와 전통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도 서당으로 사용 했던 가옥과 서당답 3마지기가 남아있다.
○ 이 마을은 15가구중 6가구가 빈집이고 7가구만 살고 있는데 마을을 비워 줘 야할 징후가 아닐까?
" 아 대체 7대째가 됭게 손이 떨어져 부렀어, 손이 떨어져 불고, 증조부님이 그러셨디야, 7대에 가면 망허니께 지둥뿌리라도 붙잡고 있으라고…, 그래 가꼬 긍게 지금 삼칠은 이십일 21대가 되었는디 이 터 생겨가고 좌우간 사릅안이라고 이름 걸어가고 21대째 났다고 하는디, 대체 우리도 7대째 온게로 종손이 손이딱 끊어져분저, 그 뭐 터가 나쁜지… "
○ 광주이씨가도 지금이 7대째란다. 그래서 고민이다. ' 터를 비워 주게 되는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재산관리를 잘하는 것이 살길 이라며 중중에서 재산을 관리 하고 있단다.
○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현대과학으로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일을 통해 선조들의 슬기와 예지를 배워야 하지 않을 까. 단 순히 스쳐지나가는 흥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마을 사람들에겐 오로지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 말이다.
덕과면 신양리 비촌마을(사립안)
* 고려 왕조 후손 오씨 담쌓고 대문달아 '사립안' * 7대째가 되면 다음 사람위해 자연히 터 비워줘 * 최초 오씨 이어 진주소씨, 광주이씨 순서 정착
남원 - 전주간 국도를 따라 사매면 사무소를 지나면 보절면으로 이어지는 제방길이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가에 노송이 숲을 이룬 곳이 있고 그 앞에 장수 팔공산줄기 성산 남쪽에 자리잡은 양반마을로 소문난, 그래서 자부심이 높은 광주이씨들이 모여사는 비촌마을이 있다.
□ 연 혁
○ 비촌마을은 본래 남원부 적과방(迪果坊)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통폐 합때 주변의 양선리, 신촌리, 오현리, 작소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촌과 양촌 의 이름을 따서 신양리라 하고 덕과면에 편입되었다.
□ 정착조
○ 이 마을은 언제인지는 모르나 최초 오씨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 이 오씨는 고려 왕족인 왕씨가 조선개국후 화를 피해 옥(玉씨)로 성을 바꿔 피난와 오씨로 성을 바꿔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 그후 진주 소씨가 들어와 약 30여호를 이루고 살았고, 조선조 헌종때인 1830년경에 광주 이씨 명헌이란 사람이 정착한 후 지금은 7가구(광주이씨 5가구, 진주소씨 2가구) 20여명이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 마을 유래
○ 비촌의 본래 이름은 사립안이라 했는데 한자로 옮겨 사립 비(扉)자와 안 내 (內)자를 써서 비내라 부르다 비촌(扉村)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 이 마을을 사립안으로 부르게 된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온다.
" 여그 신양리 요밑에 마을허고 요리해서 비촌이라 헌디, 여그가 사릅안(사 립안)이여, 사릅안이란 소리는 왜근고허니 성(城)을 싸서 요리 휘-익 둘러 가꼬 외부 사람들이 못들어 댕기게 들어오는 입구에 대문을 달아가꼬 초 저녁에 대문을 딱 닫아불어, 들어오도 못허고, 나가도 못허게 맨들어 뿌렀 제, 그러면 그때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산섬 그랬냐먼, 오씨들이 저앞 교 회 안뵙디여, 거그서 부텀 담을 싸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삼섬 사릅안이라 고 이름을 지었어, 근본은 모르고 여그서 망해가꼬 나갔응께… "
○ 이 마을을 사립안이라고 이름지어진 유래가 오씨들이 잘살아 담을 쌓고 출 입문을 달아 통제 한데서 연유한는 얘기다. 금지면 입암리 입동·입서마을
○ 왜정시대에는 동당골(당산부근)의 5백여두락의 밭에 목화를 재배하여 남원관 내에서는 제일 많은 생산을 했으며 1965년에는 집단뽕밭을 조성하여 높은 소 득을 올려 그때부터 마을이 점차 부유해져 잘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마을 주변에는 '깃발뜰' '건넌들(땅이 건조하다해서 붙여진 이름)' '숙고지(마 을에서 제일 좋은 논)' '동당골' 등이 있는데 특히나 마을 입구의 너른 들린 ' 갓받들'에 바위산(누석단)이 있는데 마을 천석부자 박씨가 행랑채를 지을 때 이 바위산을 헐어다 썼는데 어느날 풍수쟁이가 들어와 이런 사실을 알고 마 을에 해가 올 것이라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이를 염려하여 공동으로 이 바위 산을 쌓아 놓았다는 얘기도 있다.
○ 한편 이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당산나무가 있는데 동학혁명이 있기전까지는 이곳에 '홍북단'이란 단을 모아 당산제를 성대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 당산나 무는 조선시대 어느땐가 배를 만든다는 구실로 베어가고(일제때 공출인 듯 함) 베어낸 뿌리에서 다시 새싹이 돋아나 두 아름이 된다.
"우리 동네 자랑을 하자먼 마을이 원체 크기땜시로 왜정때는 이장이 넷이나 있었고 시방은 경로당을 네군데나 운영하고 있는디 우리 동네같은디도 없을 것이네" 마을 주민 황의현(64세)씨의 마을 자랑이다.
○ 이 마을은 금지면 일대에서는 잘사는 마을 로 정평이나 있는데 실제 입지조 건을 보더라도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이 넓다란 평야지로 모든 농촌이 비어가 는 현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2백여호가 넘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1972년 마을을 두 개로 나누었는데 마을 동편을 입동, 서편을 입서라 했다.
○ 입암마을은 평야지인 관계로 옥토와 풍부한 물을 이용한 쌀 농사위주의 농업 에 주력하고 있으며 요즘들어 특용작물로 포도단지를 조성하여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 이밖에도 마을 공동재산으로 정부양곡보관창고와 정미소, 마을 회관 임대 등 에서 연간 1천3백여만원의 수입을 올려 마을 복시사업에 투자하여 주민의 편 익을 도모하고 있다.
"타지역은 몰라도 우리 동네는 풍물단도 구성돼 있고 경로답이 7-8 두락이 된디 여그서 나온 소출로 매년 경로잔치를 벌이고, 또한 7백평 정도의 이장 답도 있제"
○ 특히 마을 경로당이 네곳이나 있어 연령 구분없이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까닭 에 마을 주민들간에 화합이 잘된다는 자랑들이다.
○ 이 마을에는 1919년 3. 1만세운동에 참여한 방극용(房極鏞) 열사의 기적비를 마을 앞 도로변에 건립하여 선열의 애국심을 기르고 향토의 우국충정을 고무 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 그 곁에는 장수황씨 삼세 효열 기적비가 세워져 있고 마을앞 동산에는 평산 신씨 양세 효행기적비가 각각 건립되어 있으며 밀양박씨 전주사 시혜비, 충 주 지씨 효자정각비, 진주강씨 열부 기적비가 각각 건립되어 있다.
○ 앞산에 권직상군수 홀학불망비, 평산신씨 성암정자가 건립되어 있어 마을 어 디서나 조상의 빛난 얼을 되새겨 우리정신 자세를 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다.
"생이(상여)소리를 녹음해서 쓴다고 웃을랑가 모른디, 소리허는 사람이 죽으 면 허고 싶어도 못허네, 미리 녹음이라도 해놔야제, 안긍가 " 마을 주민 황의현씨의 말은 그래도 일리가 있다. 그래도 산간벽지나 평야부 부자마을 이나 똑같은 고민 한가지, 이유야 어떻든 동네가 점점 비어간다는 것이다.
금지면 입암리 입동·입서마을
* 학이 날으는 형국으로 바위가 많아 '笠岩' * 마을 네곳 경로당 운영 주민화합 잘 돼 * 민속 지키려 상여소리 녹음해 사용
○ 금지면사무소를 왼쪽으로 돌아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전라선 철길이 지나가고 간이역인 옹정역이 북풍 찬 바람을 그대로 맞고 서 있는 건널 목을 지나면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다.
□ 연 혁
○ 본래 남원부(南原府) 기지면(機池面) 입암리(笠岩里) 지역으로 갓모양의 바위가 있어 갓바우 또는 입암(笠岩)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옹정 리(甕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입암리(笠岩里)라 하고 금지면(金池面)에 편입되 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가 되었다. 1972년 입동(笠東), 입서(笠西)로 분리되었다.
○ 입암리는 입서와 입동의 두 자연마을로 나뉘는데 금지면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여 넓다란 평야지대로 면내에서 부자마을로 소문난 마을이다.
□ 정착조
○ 이 마을은 조선시대 선조 이전에 (연대미상) 지금의 마을에 큰 사원이 있었 다고 전해온다.
○ 이 마을은 최초로 한양조씨와 문씨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마을 동 쪽 두적(斗跡)이라는 삼밭자리(현재는 경지정리로 흔적이 없어졌으나 마을 동쪽 하천 건너 옹정역 사이에 삼밭이 있었음)에 선조 25년 임진왜란 이후 문씨(文氏), 지씨(池氏), 황씨(黃氏) 등이 거주하다가 지금의 위치로 마을을 옮겨왔다.
○ 그 후 박씨(朴氏), 신씨(申氏), 안씨(安氏) 김씨(金氏), 엄씨(嚴氏), 배씨(裵氏) 등의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큰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 마을 유래
○ 입암마을의 본래 이름은 마을 입구에 갓(冠)처럼 생긴 큰 바위(岩)가 있어 [ 갓바위]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관암리(冠岩里)가 되었다가 1920년 2년 간의 대흉년을 만나자 마을 사람들은 관(冠)자와 뜻이 같은 삿갓 입(笠)자로 바꾸어 입암(笠岩)으로 개칭하였다.
○ 그러다가 1972년 행정분리에 따라 입암리를 입서(笠西), 입동(笠東)으로 분리 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을 어디든지 바위를 쉽게 볼 수 있다.
○ 본래 이 마을이 형성된 곳은 이곳이 아니라 마을 앞 '건널몰'이라는 곳이었다 고 하며 현재의 마을 터에는 규모가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 특히 당산 주변은 거의가 암반으로 그 위에 가옥을 지어 놓아 마을 이름을 실증해주고 있다.
○ 또한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마을은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려는 형상으로 학이 날아가 버리면 마을이 흥하지 못해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학의 날개 분(당산근처)과 머리(서매리로 가는 길목), 학의 눈을 상징하는 부분에 바 위들이 있어 학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 주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들이 옛날부 터 자연적으로 형성 되었기에 마을이 부유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마을은 학턴디, 학이 날개를 확 펴고 날라가는 모양인디, 잘 살라고 그 런지 몰라도 저절로 큰 독들이 많아 못 날라가게 눌루고 있제 " 마을주민 안병최(76세)씨의 마을에 대한 설명이다. ○ 평강 채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 1770년경 지사방(임실군 지사면)에서 거주하던 채영국이 당시 만석을 하는 큰부자였는데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주변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선 덕을 하였으나 좋은 명당을 찾지 못하여 고심하던중 어느날 선각대사와 대 화하는 기회가 있어 명당을 찾아다녔다.
그러던중 비암골(지금의 인화리)이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 보 더니 선각대사가 하는 말이 "명당이 바뀌었구나" 해서 무슨 말이냐고 물으 니 현지로 가자고 해서 그 명당으로와서 하는 말이 "복치명당(꿩이 업드린 형상의 명당)이 위에 있고 계화명당(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선이 놀다 심은나무)이 아래에 있어 서운하기는 하나 위치가 서로 비켜 있으니까 큰 문제 는 없을 것 같다" 면서 복치명당이 부모님 운세에 맞으니 묘를 쓰라고 했 다. 단, 묘 옆에는 절대로 무거운 비석이나 망주를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기 까지 하였다. 그래서 현재까지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할아버지 가 부모님의 묘를 쓰고 그 옆에 시묘초막을 지어 살다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본래 마을 이름은 채씨가 시묘살이를 한 골짝의 이름을 따 [제정골] 또는 [ 대습지] 라고도 불렀다. 그 후 제정골에 마을이 있다하여 [제도이]라 이름 지어 부르다가 얼마후 계수나무가 있고 계화낙지의 명당이 있다 하여 [계동 (桂洞)]으로 바꾸었다.
○ 일설에는 백제의 장군이 풍악산에서 전쟁을 하는데 신라군사 25만명이 침입 하자 승산이 없어 고심을 하던 중 꿈에 백제 장군이 큰 고목나무 옆을 지나 가는데 이름모를 도사가 나타나서 적정(敵政)을 자세히 알려주고, 지세를 이 용하는 비법을 알려주어 이튿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장군은 꿈 에서 본 고목나무 밑에 집을 짓고 살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이 장수가 채씨 (蔡氏)의 20대 조부라하여 그 후손들이 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 에 당도해 보니 산수가 좋아 자리를 잡고 정착하여 오늘날 계동 마을이 되 었다고 한다.
○ 이 마을에는 300여년전에 마을 뒷산 중턱에 절과 큰 법당이 있어 많은 승려 들이 있었으며 밤이면 목탁과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멀리까지 울려퍼져 인근 주민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골짜기의 이름을 지금도 법당 골이라 부르고 그 옆에 승려들의 승복을 만드는 가사터가 있다하여 가사골 또는 가자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 설 - 마을 상징물 봉황대
○ 한편 이 바을의 상징인 봉황대의 바위에는 선사시대의 암벽화가 발견되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봉황대가 생긴 유래가 있다.
“ 긍게로 옛날에 어느 선비가, 중국사람이디야, 그 선비가 우리 동네를 지나가다가 저 봉황대를 보니께, 그때는 봉황대가 아니고 그냥 산이었제, 동산인디, 똑 중국에 있는봉황대하고 같으드리야, 그래서 그 선비가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들마,긍게 그 사람이 저 바우에 봉황대라고 글씨도 써놨디야, 참 말인지 몰라도 그렇게들 들었제, 옛날 어른들이 그래쌌는디, 긍게로 우리 동네가 봉황의 알 터라고 글고, 대나무가많은 디 봉황이 대나무 열매를 묵는디야, 긍게로 동네 이름도 그렇게 불렀디야”
○ 봉황대에는 1973년에 지은 봉황정이 있고 마당 바위와 탕건 바위, 말 바위, 소 바위, 등으로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봉황대를 감돌며 흐르는 대곡천을 면하여 1973년에지은 봉황정이 날아갈듯 서 있어 음풍농월하기에 안성 마춤이다.
○ 특히 이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올때면 봉황대가 울었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그런 연유로 명암(鳴岩)이라고도 부른다.
○ 이러한얘기를 간직하고 있는봉황대는 들판에 우뚝 솟아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지만 지금까지 추락사고 한 번 없었고 한 여름에도 유독 봉황대만은 모기가 없고, 개미도 없어마을 사람들은 봉황이 자기의 알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와 현재 마을 공동으로 계(契)를 만들어 봉황대를 공동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금지면 옹정리 고룡
* 통일신라 초기 原州元氏 터잡고 張氏, 金氏 마을 이뤄 * 처음 이름 ‘독우물’ ··· 고룡촌‘해혈(蟹穴)’놓고 내기하여 노씨(盧氏) 차지
□ 연 혁
○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금정마을 고룡은 본래 기지방(機池坊)지역으로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부근의 호리와 옹정리, 주포방(周浦坊 · 주생면)의 제천리 일부를 병합되어 옹정리가 되었었는데 옹정리는 다시 금정과 석정으로 나뉘어져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독립된 마을이었던 고룡마을은 현재 옹정리 금정마을에 흡수되어 마을 주민들만이 고룡이란 명칭을 쓸 뿐 행정에서는 그 명칭이사라진지 오래다.
○ 옹정리에는 총 223가구(금정마을 116가구, 석정마을 107가구) 691명(금정 362명, 석정 329명)이살고 있는데 고룡에는 7가구 20여명이 살고 있다.
□ 정착조
○ 옹정리에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 초기에 원주에서 원씨(元氏)가 처음 터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하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그후 흥덕장씨와 김씨, 양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해 지금은 금지면의 소재지가 되었는데 마을의규모가 방대해 1972년 마을을 중심으로 동편을 금정(金井), 서편을 석정(石井) 행정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 유래
○ 옹정리 의 두 개의 행정마을중 금정마을에는 고룡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주민김맹곤(72세)씨에 따르면 늙은 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고룡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게가 기어나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 이 마을에는 현재 7가구 20여명이 살고 있는데 처음 김해 김씨 사면파(최고 양반인 甲族으로알려진 가문)들이 들어와 살아 고룡 김가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던 마을로 상(제천)하(옹정)마을중 제일 큰 마을 이어서 정월대보름에 당산제와 함께 뒷산에서 달맞이를 하고 달집을 태웠는데 언제 부턴가 노씨의 위토답을 부치며 살고 있다.
○ 노씨들의 세력이 번창할 때는 노씨 위토답이 100여 마지기나 되어 마을 앞은 물론 주생면 제천리 앞까지 소유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도 매우 풍족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 이마을도 옹정의 독우물과 같이 물이 좋기로 유명했다는데 제각 마루밑에서 나오는 감당샘 물을 인근 마을에서도 길어다 먹었다는데 지금은 메워 버리고 없다. 처음 섶갓(薪村)이 발음에 따라 새로울 新으로 바뀌어 新村
□ 연혁
○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신촌마을은 본래 시(라)산방의 지역으로 신계리(新啓里)였으나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대곡방의 월계리와 노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계와 월계의이름을 따서 신계리(新溪里)라 했다. 현재 신계리는 신촌(섶갓)과 월계 등 두 마을이있는데 섶갓에는 1996년 1월 현재 43가구 334명(남자 207명, 여자 127명)이 살고 있다.
○ 처음 이름인 신계리의 계자가 열계(啓)이고 월계의 계는 계수나무 계(桂)인데 지금에와서 신계리의 계자가 열계(啓)도 아니고 계수나무 계(桂)도 아닌 시내 계(溪)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고난 후 그 내용을 묶어1917년 5월에 발행한 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을 보면 新溪里는 新啓里와 月桂里와 老山里 일부를 병합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도 병합한 후에 신계리는시내계(溪)를 썼다.
○ 그런데 지금의 행정관청에서는 월계리의 계자를 계수나무계(桂)가 아닌 시내계(溪)로쓰고 있는데 왜그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풍악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을 가로지르는작은 냇물이 있어(냇물 서쪽이 응달뜸이고 동쪽이 양달뜸이다)서 그랬지 않겠는가 하 고 추측만 할 뿐이다.
□ 정착조
○ 섶갓마을에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때는 조선 선조조(宣祖朝)인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설씨(薛氏) 3형제가 장수에서 피난을와 정착 하면서 부터다. 그 후 흥덕장씨(興德張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시기가 거의 비슷하다.
○ 최초 설씨가 이곳 섭갓에 정착을 하게된 내력이 재미있다.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마애여래불이 있는데 이 불상과 상당한 연관을 갖는다. 설씨3형제가 임진왜란을 피해 장수에서 피난을 가다 이곳에서 쉬던참에 깜빡 잠이 들었다.
○ 그런데 왠일인지 마음이 평온해지는데 가만히 보니 자신들이 부처님 품속에서 놀고있더라는 것이다. 깜짝놀라 일어나보니 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니 뒷산(풍악산) 중턱에 커다란 마애여래불상이 보이는지라 자신들에게 이곳에 정 착하라는 부처님의 암시라고 생각하고 여장을 풀어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마을 보다 풍악산쪽으로 더 올라간 농경지쪽이라는 기록이 있다.
“아 잘 몰라, 설씬가 권씬가가 살다가 재넘에로 쫓겨 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디 금시초문이구만. 암작에도(아무래도) 저 산에 큰 미륵이 있응게 그런 소리가 있을법도 헌디,그말을 어디서 들었능가, 어디서 다 조사해가꼬와서 뭘라고 그리 물어싼디야” 동네 장홍업(82세)씨의 반문이다.
○ 입향조에 대한 유래는 이 마을에서도 정확히 알려진 내용이 없다. 그래도 양창규(楊昌圭·72세)씨는 설씨하고 권씨가 살다가 재넘어(순창군 동계면 감밭)로 갔다는 기억을 하고 있지만 나간 내력은 역시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단지 장씨들 한테 쫒겨 나갔 다는 표현을 썼다.
○ 그와는 견해를 달리 장형호(張炯鎬·52세)는 “자연적인 교체였제, 그 사람들은 하대 받는 사람들이였응게, 우리 장씨들이 들어온게 못살고 자연적으로 나가게 됐당마, 근디옛날일을 알 수가 있간디, 시방으로 말하자면 밀어낸다고 누가 나가것능가, 긍게 저절로 나간거제”
○ 어찌되었건 설씨 다음에 장씨가 들어와 이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장씨 터를 이룬것은 두말할것이 없다. 현재는 설씨는 한집도 없고 장씨와 양씨(楊氏), 김씨金氏)들이 어울려 살고있다.
전설
○ 이 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무척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외부에서 보면 마을의 형국이 활처럼 보인다고 해서 ‘활 터’로 불리는데 마을 앞 도로가 화살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지형은 고남산에서 흘러내린 산 줄기가 이백면과 운봉을 가로지르는 능선으로 뻗어 주천면 회덕 뒷산 성재를 감아 돌아 다시 가장리의수정봉과 행정리에 황새봉을 거쳐 엄계마을을 감싸안고 돌아 마을 끝 북쪽에다 기를모아 댓봉을 만들고 다시 흘러 마산(소방서 뒷 마을)에서 천마봉을 만들고 멈춰 섰는데 이러한 지형을 이루면서 엄계리를 둘러싼 산 줄기에다 명당혈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정승이 날 묘자리와 높은 사람이 날 집 터가 있다.
○ 그런데 한국에서 인재가 많이 나는것을 두려워한 중국사람들이 지형도를 만들어 그지형도에 붓으로 날줄기를 그어 혈을 끊어 버려 지금은 기를 펴지 못한다는 얘기가전해온다.
“ 긍게 저 엄계 터가 좋은 터여, 명당 터디야, 황새봉에서 보면 날이 마을을 돌아 싸고 있는디, 그 가운데 쯤에 정승이 난다는 묘자리가 있고 댓봉산 날에 높은 사람이나온다는 집 터가 있다고 했디야, 긍게 그 날이 저 마산리 천마봉에서 멈춰 섰는디,중국사람들이 끊어 뿌렀디야, 긍게 그 사람들이 옛날에 한국와서 날을 많이 끊었다 고 그랬어, 전에는 한국에서 인재가 많이 날것이라고 해서 일본사람들보다 먼저 끊었다고 하등마, 일본사람들은 돌아 댕김서로 끊었는디 중국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붓으로 그어 뿔먼 저절로 날이 끊어졌디야, 긍게 끊어진데가 동네서 까빠래로 넘어 가는 질이 되뿌렀는디, 거그다 까빠래에다 저수지를 막아가꼬 물을 넘긴게 기가 물에 잠겨 상구(영원히) 끊어졌디야, 정승날 자리에 묘가 있는디 정승이 났는지는 모르것고 저 서씨가 사는 집이 높은 사람이 날 집 턴디 옛날에 거그서 살던 사람은잘됐었었는디 까빠래다 저수지 막고나서 잘 안돼, 시방 그 집 터는 본래 자리가 아 니고 옆으로 새로 지었당게, 그래서 시방은 심을 못 쓴단디,저 댓봉산 뒤로 머리가 벗껴진 산등성이가 마상고갠디 거그가 이 산줄기의 끄트머리여, 긍게 거그서 기가멈췄제, 근디 말(馬)이 있다고 해서 마상고갠디, 말이 있어, 천마(天馬)가 하늘을 보고 웃는다고 그 산 이름이 천마봉이여, 근디 이망(이마)를 베껴(벗겨)놔 뿌러서 거그도 심을 못 쓴디야, 날이 끊어져 뿔고 이망이 베껴져 뿌러서 그랬는갑서” 행정마을 주민 도길윤(都吉允·72세)씨가 말하는 엄계마을의 풍수 얘기다. 중국인들이 남원 땅에 오서 명당을 잡아 주었다는 얘기는 주생면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들이 우 리나라의 혈을 끊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예기다. 어째튼 귀끔스런 얘기가 아닐수 없다.
○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냇가에는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엄씨 선비가 낚시를 하였다는엄바위가 있다. 물이 말라도 그곳만큼은 깊은 쏘를 이뤄 메워지지 않고 주변 주민들의 목욕장으로 이용했다는 엄바위는 여러가지로 불리운다. 엄계사람들은 ‘억바위’‘엇바위’라고 부르고 행정마을 사람들은 ‘엎바위’라고 부른다. 기록에는 ‘엄거대’ ‘엄바위’라 고 했는데 엄바위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엄씨가 낚시를 했다는 얘기도 모른다. 다만 바위 두개가 서로 비스듬히 포개져 있어 무엇을 연상하게 한대서 엎바위라고 부른다는 얘긴데 장어, 자라들이 많아 자라가 바위에 올라 앉아 놀았다고 한다.
○ 그러나 기록에 엄바위 옆에 임씨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바위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름은 비슷하지만 행정 마을 쪽에있는 바위를 지칭하고 있다.
○ 마을이장 서흥석씨(45세)의 어머니 김덕례씨(73세)는 15살에 시집을와 지금까지 살았어도 엄씨 얘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며 시집올 당시만해도 방천도 없고 댓봉산 부근이 모두 깊은 쏘라 무서웠다고 한다.
“ 몰라, 들어보도 못했어, 근디 신축년에 큰 홍수가 났는디 그 바람에 동네 당산나무가 다 떠내려 가뿌렀는디, 시빙 저 당산나무는 그 때 뿌랑구가 살아 남아서 저 만치 컸당게, 글고 억바우라고는 있는디, 저 행정쪽에 있는디, 물이 짚어가꼬 무서웠 어, 거그로는 잘 가도 안했는디, 뭔 이약이 있간디, 그저 그것뿐이 몰라, 남자들이잘안디...”
○ 어찌되었건 엄계마을은 좋은 명당 터를 갖고 있었던 마을로 사람들이 들며나며 재미나게 살았다고 하는데 풍산유씨 가문의 두 며느리들은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었어도서로 의좋게 지내면서 가문의 대를 이어와 운봉향교에서 열녀의 포양을 해 마을의 자랑이 되고 있다.
○ 정승과 높은 사람이 나올 명당 터가 두군데나 있어 마을이 번성하고 큰 인물이난다고 했으나 중국사람이 그 명당혈을 끊어버려 지금은 기를 쓰지 못한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엄계마을은 처음 정착한 영월엄씨의 성을 따서 마을 이름이 되었고 그가 낚시를 즐겼다는 엄바위(엄거대, 엎바위)가 남아있다.
전설
○ 양선마을에 풍양 조씨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타성들이 1대를 못넘기고객지로 떠나고 조씨들이 정착한 뒤 7대에 걸쳐 천석꾼이 나왔다고 한다.“ 긍게 요 앞집이 7대에 걸쳐 갑부로 산집인디, 옛날에 조홍구라는 분이살았던 집이여, 시방이야 집이 묵어자빠져 있지만 참 거창한 집이당게,남원에서도 유명한 집이여, 옛날에 과객들이 지나가면 동네 밖에 까지나가서 모셔와 대접을 하고 그랬단디, 긍게로 과객들이 이 집을 선전하기를 장수 팔공산의 정기를 받은 천황봉의 성산 날줄기가 요 집 뒤로와서 딱 멈춰 가꼬 이 집으로 들어왔는디 ‘성산 날줄기 조홍구 댁’이라고 그랬디야, 긍게로 집 터가 명당 터제”
○ 그런데 이 집에 사랑채를 새로 지었다가 다시 뜯어 버린 웃지 못할 사연이있다.
“ 긍게 이 집 아들이 옛날에 벼슬을 얻으러 한양에 갔는디, 요새말로 얘기가 잘되 벼슬을 얻게 되었디야, 그래서 손님을 맞을라고 사랑채를 안채보다 높게 지었는디, 글고난게 주인의 놋밥그릇이 새카맣게 변하드리야, 그래서 아이구 이거 큰일났다 싶어, 주인이 서울로가 부탁한 고관대작을 만 나본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드래, 그래서 5백냥이요? 하고 물었디야, 긍게로 너는 대과 뱃보가 아니다고 벼슬을 안주드리야, 긍게 사랑채를 높이지어가꼬 주주결망 거미집을 가로막아 벼슬을 못했다고 도로 뜯어뿌렀 데...”
○ 천황봉에서 해가 떠오르면 그 햇살이 제일 먼저 드는 양선(陽先)마을은 풍양조씨의 집성촌으로 7대에 걸쳐 갑부로 살았던 조홍구家의 집 터 명당과동네의 명국이 똑같은 주주결망혈(宙蛛結網穴)이다. 집 터는연소혈(燕巢穴)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마을의 형국이나 집 터의 주변 상황을 고려할때 주주결망혈(宙蛛結網穴)이라고 봐야 한다는 조남연씨의 설명이다.
“옛 부터 ‘동네 밖으로 나가면 먹을 것이 없다’고 전해 내려오는 애기가 있는디, 요새 마을 앞 동산이 제비가 한쌍 날아 들어오는 모양이라고 연소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디 그 동산이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모양이여,글고 요 집 앞에있는 귀목나무 두 그루를 봐도 거미가 줄을 칠때 이어주는 지주같이 안보이능가”
○ 이에 대해 이장 조길구씨(65세)는 “ 그 집에는 제비가 집도 안짓고 새가지붕을 안넘어가고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며 거미가 집을 짓는혈이 맞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거미가 줄을 치고 그 속에서 걸려든 곤충을 먹이로 삼 듯 이 마을에 옛 부터 전해온다는 애기 즉, 동네 밖에 나가면먹을 것이 없다는 그 얘기가 지금까지 이 마을에 조씨들을 붙들어 놓은 신앙인지도 모르겠다.
○ 이미 7대에 걸쳐 천석을 했다는 가문은 객지로 나가고 없지만 양선마을 사람들은 그때 그 영화(榮華)의 뒤자락을 부여잡고 조씨들만의 집성촌이라는자부심을 갖고있다. 타성받이들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세력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살지 못하고 떠나 자신들만의 마을로 살아왔다는 자부심은그만큼 이 땅이 그들의 영원한 고향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 오랜 세월을 단일 성씨들의 집성촌으로 살아온 양선마을에는 기미년 남원만세운동의 발상지인 도화동(동해골)이 있어 그들만의 자부심으로 여기고있다.
○ 천황봉에 해가 뜨면 햇살이 가장면저 드는 마을에서 유래된 양선마을은 거미가 집을 짓는 주주결망의 형국으로 1400여년전 진주소씨가 터를 잡았으나 그 후 풍양 조씨가 들어와 현재는 풍양조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이 마을에는 기미년 남원 만세운동의 봉기지인 도화동(동해골)이 있다. 전 설
○ 이 마을의 이름에 대한 정착과정이 상당히 복잡하여 본래 뜻을 잃은 취암就岩)이 되었지만 본래의 취암(鷲岩)에 얽힌 귀끔스런 얘기가 무긍무진 많다. 그 대표적인 얘기가 수리바위가 있는 집터에 관한 것인데 이 집터에서천석꾼이 나왔다는 얘기다.
“금산김씨 澤鉉씨가 덕과면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동네로 이사와서 수리바우밑에다 집을 짓고 살았는디 그 양반 성품이 호걸이고 넘한테 못할 짓을 안하는 양반이라, 천석꾼이 됐어, 천석꾼이 도지만 쳐서 긍게 얼마나 부잔가는알만하제, 긍게 이 양반이 부자라도 부자티 안내고 인심이 후한게 죽었을때만장(輓章)이 여그서부텀 황산 모팅이까지 늘어 섰당게, 그 집에서 일하던 서기나 하인들이 최근에사 다 돌아 가셨는디 얘기를 들어보면 대단 했었디야, 근디 그 양반 죽고나서 집을 새로 지었는디 망해 뿌렀어, 첨에는 사랑채가 없었는디 사랑채 지은 자리가 언덕맹키로 도도록해가꼬 다무락(담)역할을 했는디 그것을 헐어내고 집을 짓고 나서 그랬디야, 근디 그터가 명당은명당인개비여, 뒤에 김00씨가 이사를 와서 그 양반도 부자가 됐어...”
○ 이 집터가 동네 밖에서 보면 수리가 날개를 편 형국의 가장 중앙인 수리의머리, 즉 눈과 입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구지 풍수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동네 터가 좋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또 마을 옹담박거리(마을 정 중앙)에 있는 동네우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마를 날이 없고 한 겨울에도 얼지않는 명당 이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 마을의 재물과 관련된 또하나의 ‘노적바위’얘기는 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 터를 올곧게 지키게 하는지도 모 른다. “수리봉 우에 골자기가 있는디 거그에 노적바우가 있어, 모양이 나락가마니 쌓은것 맹키로 생겼는디, 남동쪽으로 바우밑이 패인디가 있는디, 그것이 문이디야, 그 문을 닫으면(메우면) 성산이 흥하고 열어 놓으면 취암이흥하다는 설이 있어, 그래가꼬 옛날부터 그 바우 문을 여닫는 쟁탈전이벌어져 동네끼리 열고 막고하는 일이 있었는디, 한 30년전까지만해도 그랬는디, 그것이 복을 주는지도 모를 일이여, 안글먼 뭐땜시 동네끼리 그래 쌌것능가”
○ 이러한 것들이 취암마을이 다른 마을에 비해 사람이 많이 살고 생활이 풍족하게한 여건이 되었지만 아쉬움은 있다. 그것은 욕심이지만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이야 욕심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순리를 아는 사람들이 산다.
“250년전쯤에 치백이란 양반이 태어났는디 눈동자가 둘이고 기골이 장대해보통사람이 바로 보지를 못했디야, 눈에서 광채가 나서, 고함을 지르면 먼데있는 황새가 날아가는 풍채를 지녔는디 요절을 했제 그뒤부텀 인물은 없어, 그대신 사람들이 순해, 탄 동네사람들이 여그에 정착을 많이 하고 젤로중요한건 상부상조 협동이 잘돼, 긍게 생이 나갈때 생이에 거는 돈을 생이꾼들이 안쓰고 다 상가(喪家)에 돌려 주고 노제는 동네서 지내준디, 동네 위 친계가 하나밖에 없어, 왜냐면 말썽이 나니께 모두 통합해서 공동으로 운영하니께 말썽도 없고 협동도 잘되니께...” □ 마을 유래
○ 효동마을의 본래 이름은 ⌈會原洞⌋이다.
○ 마을 이름이 최초 마을의 터를 잡은 이회원과 양원규 두 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원회동⌋이라 한데서 유래한 ⌈원회동⌋이 ⌈孝洞⌋으로 바뀌었는데 정확한 사유를 아는 사람이 없다.
○ 다만 ⌈고도남원의 얼⌋에는 1749년부터 1908년까지 효자(그중 1894년에 태어난 梁相傑 이 대표적인 인물)가 많이 나와 마을 이름을 ⌈효동⌋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 효동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솥⌋의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도 도로(국도 17호선)보다도 아래에 위치해 있고 옥률천의 제방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저지대에 속한다. 전설
○ 효동마을은 뒤로 수덕봉(修德峰)이 솟아있고 앞으로는 옥률천(玉栗川)이흐르는 동향(東向)마을로 풍수설에 따르면 오른쪽으로는 국도 17호선(남원 곡성간)이 白虎 구실을 하고 왼쪽으로는 전라선 철도가 靑龍이며 수덕봉이 玄武며 옥률천이 朱雀이 있는 ⌈솥⌋명당이라 한다.
○ 하지만 1910년 경술년의 대홍수로인해 터의 형국이 무너져 ⌈빈 솥⌋이 되어 버려 마을이 가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경술년에 홍수가나 동네가 다떠내려가고 쑥대 밭이 됐당게, 13채가 파손되고, 전답이고 뭐고 하나도 없이 싹씰어 뿌렀디야, 그래가꼬 한 30여호 살았는디 곤궁허니께 다떠나뿔고, 남산아래서 제일 가난한 동네가 됐제, 긍게 저다리가 놓기전에는 배고픈 다리였는디, 안글것어 홍수로 다떠내려가고 물길이 달라져뿌렀는디, 건너댕길랑게 다리를 놓은 것이 시늉만 낸 다리였제, 글고나서부터 동네 별호가 생겼는디 ⌈솥텡이⌋가 되뿌렀어, 까뜩차야할 솥이 텡텡 빈 솥이 됐단 말이시, 그래서 나가는 것을 막는 뱅이를 했는디, 다리도 높이고 신작로와 방천을 쌓고 했는디, 조 앞 둥구나무하고 요 방천에서 저 다리 건네까지 뽕나무 밭을 만들고 뽀뿌라도 심고 소나무도 심고 그랬는디 시방은 저 둥구나무만 남았는디, 수구맥이를 한께 쬐끔 잘살게 됐제, 그전에는 젤로 가난한 동네였어』
○ 마을 별호가 ⌈솥텡이⌋라는 유래가 경신년 물난리 이후 생겨났다는 얘기다. 또하나 솥텡이로 불리게된 가장 사실적(?)인 얘기가 있는데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아닌 마을 밖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진 내력이다. 『집안에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괄괄한 할머니가 한 분 있었는디, 부석에서 불을 때다 큰 물이 나니께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솥이 텅비었으니 어찌 살끄냐⌋고 그랬디야, 글고 나서 싹 떠내려가뿌렀는디, 나중에 너무동네 사람들이 솥이 텅텅 비었다고 ⌈솥텡이⌋로 불렀당마, 그래가꼬 동네 별호가 됐디야』
○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별호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은 아니다. 마을 터가 가득찬 솥이 아닌 물난리로 인해 솥이 비어 버렸기에 가난해졌다 고 빈정거림을 받는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 마을이름이 효자가 많이 나와 효동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효자로는 양상걸(梁相傑) 일명 양원일 이다. 그는 1894년생으로 부모에 대한효행만이 아니고 충의 면에서도 남다른 애국심이 있어 이 마을의 발전과 향토 번영을 위해 전력을 다한 공이 많아 근처에선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그래서인지 효동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형국에서 유래된 별호인 ⌈솥텡이⌋나본래 이름인 ⌈원회동⌋보다는 효자가 많이 나와 바뀐⌈효동⌋이란 마을 이름에더 애착을 갖고 살고 있다. 그것은 풍수에 ㅛ기행관련된 지형때문에 생겨난오명을 씻어내려는 의지와 우리 생활의 근본인 ⌈孝⌋를 실천하고미풍양속을이어 가려는 아름다운 심성의 발로에서 일 것이다.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老鼠下田⌋형국 * 고려때 진주강씨 터잡아 ... ⌈鼠堂⌋이 ⌈書堂⌋으로
□ 연혁
○ 남원시 수지면 초리 書堂마을은 南原府 草里坊에 속했던 마을이었으나 1906년 수지방과 초리방이 합쳐져 수지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부근의 남창리의 일부와 합병되어 草里라하여 초리의 법정마을로 지금에 이른다.
□ 지리적 위치
○ 수지면 소재지에서 송동, 금지면으로 빠지는 도로변 약 2km지점 북서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서당마을은 1995년 12월 현재 28가구 1백8명(남자 49명, 여자 59명)이 살고 있다.
□ 리세(면적)
○ 1997년 6월말 총면적은 61.9ha로 수지면 전체면적의 2.2%를 차지하며, 전답별 비율은 전이 9.9ha로 농경지의 27.3%, 답은 26.3ha로 농경지의 72.7%이다. 임야는 25.7ha로 총면적의 41.5%이다. 가구는 27호로 수지면 전체의 4% 이고, 인구는 100명(남46명, 여 54명)으로 수지면 전체의 5%이다.
□ 정착조
○ 고려말 공민왕때(1370년경) 진주강씨(晋州姜氏)가 화를 피해 경남 안위군 위천면 당산리에서 고요하고 적막하며 양지 바른 이곳에 터를 잡아 글쓰기에 필생의 업을 삼아 조용히 살았다 한다. 그후 진주 하씨가 이주해와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마을 유래
○ 書堂마을의 본래 이름은 쥐와 관련이 있는 쥐서(鼠)字를 쓴(鼠堂)이다.
○ 풍수지리적으로 이 마을에 늙은 쥐가 도장(창고)에 들어있는 격, 또는 늙은쥐가 먹이를 구하러 밭으로 내려 오는 형국인 노서하전(老鼠下田)이라고 하는데, 병풍을 친듯한 아름답고 기름진 곳에 쥐(鼠)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들판에 있는 곡식을 물어 날라 야적하여 쥐의 왕국을 건설하여 쥐 서(鼠)의 서당(鼠堂)으로 부르다 1800년경 서당(鼠堂)을 서당(書堂)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여전히 쥐가 많다고 한다.
○ 마을의 (쥐명당) 이야기가 재미 있다. 『우리 마을의 모양이 (노서하전)이디야, 긍게 마을로 들어오는 초입 왼손편으로 보이는 쬐깐한 산이 (쥐대가리 산)이라고 부른디, 요앞에 남창리 뒷산이 노적봉이여, 쥐가 노적봉으로 곡식을 물러 가는 디, 마을 앞에 냇가 (마을 입구 다리 왼쪽)에 솔개 바우가 있어, 그 솔개가 쥐를 노리고 있는 형국이여, 그런게 쥐가 오도가도 못허고 웅크리고 있제, 근디 쥐대가리 산뒷쪽으로 깐치멀(까치몰:까치명당)이 있는디 쥐가 움직일라먼 까치가 깍깍 울어싸니까 마을이 부자가 안되제, 쥐가 곡석(곡식)을 물어와야 된디, 그런 얘기가 있어 그전 어른들이 그랬는디,그래가꼬 마을에 요건너 홈실 박씨 문자수자 쓰신 어른의 선친이남창리 동(銅)다리(橋)에 살았는디 우리 마을에 서당을 지어가꼬 그 어른이 다녔는디 개울을 건너야 된께 동(銅)으로 다리를 놨디야, 그 뒤부터 마을 이름이 書堂으로 바꿨디야...』
○ 본래는 마을의 형국이 (노서하전)이어서 쥐와 관련있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마을에 서당이 생기고 나서 서당으로 유명해지자 마을 이름을 서당으로 고쳤다는 얘기다. 전설
○ 쥐가 노적봉의 곡식을 물어 오려해도 까치가 울어대고 솔개가 지켜보고 있는지라 쥐가 움쩍달싹 못하고 웅크리고 있으니 그래서 마을이 부자가 못되고 그저 그렇게 살았다는데, 요즘엔 마을의 형세가 핀다고 한다.
○ 『긍게 참 믿어야 할랑가 모를 일인디, 역부로 깰라고 깬건 아닌디 중년에 냇물 가운데 있는 솔개바우를 폭파시켜 덕을 봤제, 사실은 바우가 물길을 막아 서 그랬는디, 깨고 난 뒤는 남창에서 논을 팔라고 내놓으면 우리 동네서 다 사 들였는디, 긍게 덕을 본것이 아닌개비...』
○ 이렇듯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의 이 마을은 옛부터 명당이 많기로 유명해 지금도 ⌈유지앵소⌋명당을 찾으려 뭇사람들이 들며난다.
○ 마을의 형국이 ' ‘老鼠下田’인 쥐명당을 비롯해 까치명당과 鵲巢 그리고 버들가지 꾀꼬리집의 ‘柳枝鶯巢’이 그것이지만 특별히 쥐에 대한 금기나 신앙 같은 것 보다는 명당에 대한 얘기만 무성하다.
○ 『깐치(까치)명당에는 남원양씨들이 묘를 썼는디 전에 양씨들이 곡성에있는 '躍馬분敵'명당을 잡을라고 풍수를 데려다 삼년이나 살렸는디 풍수생각에 그 자리가 양씨들한테는 과해, 그래 생이(상여)가 나가는디 풍수가 양씨 자식들한테 메라고 했당마, 긍게 양반 자제들이라 힘이 없응게 하루 점드락 유촌백기(까지)못간게, 풍수가 요근방에 깐치명당이있는디 약마분적과 같으니 그곳에 쓰라고해서 깐치명당에 써서 집안이 잘됐는디 그 뒤에 묘에다 石物을 하고나서 젊은이 열서너이가 죽는 변고가 일어 석물을 묻어뿌렀당마, 그 명당이 동네 뒷산에 있는디, 참 허망한 일이여...』
○ 또 이보다도 더 마을을 사람들을 흥분케 하는 것은 '유지앵소'명당이다. 『유지앵소라고 버들가지에 꾀꼬리집이라는 명당이 있는디, 긍게 저 아래 공동산있는디가 아랫버들메고 동네 뒷산이 웃버들멘디 찾을 수가 없어, 혹자는 우리 동네터가 유지앵소라고 하는디 우리가 생각하면 동네터가 아니여, 동네가 이런디(잘살지 못한데) 어찌 기당가, 딴데 어디 있것제, 유지 앵소를 찾을라고 무던이도 왔었제, 돈많은 양반들이 풍수데꼬, 근디 인자 는 노력하면서 살면되제 무신 땅 심을 빌리것능가, 시방세상이 어떤 세상 인디...』
○ 동네 터가 '유지앵소' 됐더라도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라는 듯한 강신철 옹의 回想은 '유지앵소명당에 대한 한결같은 신앙이며 지금까지 풍족하지 못한 생활속에서도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 마음속 깊이 숨겨둔, 지금까지도 아니 앞으로도 찾지못할 이 마을 사람들만의 영원한 유토피아인지도 모른다.
○ 부채모양으로 둘러싼 대밭과 산등성이에 둘러 싸인 서당마을은 처음 진주강 씨가 후학을 가르치고 평생을 글을 쓰면서 조상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고 살아온 터라 지금까지 풍족하지는 않지만 타성받이 보다는 진주강씨 후손들 이 대를 이어 조용하게 살고 있는 마을이다. ○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의 이 마을은 옛부터 명당이 많기로 유명해 지금도 ⌈유지앵소⌋명당을 찾으려 뭇사람들이 들며나지만 영원히 찾지못할 마을 사람들만의 유토피아인지도 모른다.
본래 남원군(南原郡) 하원천면(下元川面) 외평리(外坪里)지역으로 과거 하원천면의 소재지로 원터, 밭들 또는 외평리(外坪里)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외평리(外坪里), 무수리(無愁里), 호정리(湖亭里)와 신기리(新基里), 내룡리(內龍里) 각 일부가 병합되어 장백산(長百山)의 안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장안리(長安里)라 하고 장안리에 편입되었고 면소재지가 되었다.
○ 이때 무수동은 장안리에 편입되어 장안리의 자연 부락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지리적 위치
○ 주천면 소재지인 장안리 외평마을에서 동남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앞 도로에서 좌측 도로로는 전남 구례방면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남원시 어현동으로 이어지는 국도 19호선과 접경지역이다.
□ 리세(면적)
○ 1997년 6월말 총면적은 57.3 ha로 주천면 전체면적의 1%를 차지하며, 전답별 비율은 전이 5.8ha로 농경지의 23% 답은19.5 ha로 농경지의 77%이다. 임야는 25.9ha로 총면적 44%,기타가 6.1ha로 총면적의 0.9%이다. 가구는 32호로 주천면 전체의 3%이고 인구는 93명(남43명, 여 50명)으로 주천면 전체의 3%이다.
□ 정착조
○ 무수동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때는 1320년경으로 채씨(蔡氏)가 정착후 밀양 박씨(密陽朴氏)와 김해 김씨(金海金氏) 10여호가 들어왔고,1572년에 풍천 노씨(豊川盧氏)와 수원 백씨(水原白氏) 20여호와 풍산 홍씨(豊山洪氏)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 마을 유래
○ 무수동의 본래 이름은 하원천면의 내방으로 불리웠으나 나중에 춤출 무(舞), 소매 수(袖)를 쓰는 무수동으로 바뀌었다.
○ 이 마을이 형성된지 40여년이 지난 어느날 도사가 이 마을을 지나가다 “이 곳은 신선이 춤추는 형국이라 참으로 명당이로다”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을 무수동(舞袖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 또 다른 설로는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하여 풍족한 농촌으로서 넉넉한 생활을 해 근심걱정이 없는 마을이라하여 없을 무, 근심 수를 써서 무수동(無愁洞) 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본래 주천면의 소재지인 외평마을과 무수동은 과거 하원천방(下元川坊)의 소재지로서 무수동은 내방(內坊)으로, 외평리는 외방(外坊)으로 불렀는데 물이없는 외평리와는 달리, 내방은 물이 많아 근심이 없다하여 무수(無愁)라 불렀다는 것.
○ 주민들의 설에 따르면 옛날 무수동에 한 도인이 지나가다 “이곳은 신선이 춤을 추는 형국이라 참으로 명당이다”고 했단다.
○ 그래서 마을 이름을 무수동(舞袖洞)이라고 했는데 어느때 부턴가 무속인들 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마을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무당과 관련이 있는 것 처럼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이 본래의 이름을 버리지는 못하고 뜻만 바꿔 無愁洞이라하였다고 하는데 앞서말씀드린 신선이 춤을 추는 형국의 선인무수혈의 명당 터에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 명창 권삼득과 김정문 배출
○ 그런데 사실 무수동은 마을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무속과 깊은 인연을 맺는 곳으로 조선조 말기의 판소리 명창 권삼득(權三得)과 김정문(金正文)의 출생지라고 한다.
○ 권삼득은 어려서부터 서당을 다녔는데 서당에는 가지않고 매일 용호폭포의 바위위에 앉아 하루종일 노래공부에만 열중했다고 하는데, 노래 한곡을 부르고는 콩 한알씩을 용소에 던져 넣곤하여 그 콩이 서 말이나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그가 명창이 된 것은 타고난 천재적 소질과 피나는 노력의 소산이며,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선인(仙人)이 춤을 추는 명당이기에 권삼득, 김정문과 같은 훌륭한 명창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명창 권삼득은 무수동의 안꺼데이(안동네)에서 살았다. 권삼득이 살았던 집터는 마을 안길에 편입되고 일부는 밭으로 사용되고 그 일부가 하길호씨가 집을 새로 짓고 살고 있다. 그러나 김정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은 없다.
○ 주민들의 말에 다르면
“긍게, 옛날에 소리 잘하는 사람이 났디야, 그 이가 권삼득인가하고 김뭐시더라, 아 김정문인가 하는인디, 글고 근자에는 강씨, 긍게 이름이 백찬이인디 시방은 죽고 없어, 그이가 피리를 잘했어, 소리도 잘하고, 그이 모친이 무당이었제,... 아 잘모르것어, 뭘라고 자꾸 물어 싼디야...”
○ 무수동에서 판소리의 명인 권삼득과 김정문이 낳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명과 또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를 뒷바침해 주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 전 설
○ “오래된 일인디, 마을 입구에에 신선들이 두고 놀았다는 바둑판이 새겨진 바우하고 똑(꼭) 북맹키로 생긴 바우가 있었는디, 북같이 생긴 바우는 꼭북이여, 어찌나 크고, 참 잘생겼었제, 생김새가, 근디 근자에 아 새마을 사업을 안했능가, 아 그때 마을 길 넓힌다고 없애 뿌렀는디, 글고낭게 마을에 변고가 생기등마, 아마도 소리를 즐기는 마을의 상징물이였었는갑는디, 그래서 그런개비여, 바우가 있었던디를 지나가면 잡귀 소리가나고 그랬어, 상당히 오랬동안 소리가 났는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비손을 하고 그랬는디...”
□ 기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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