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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독립운동
(I.) 독립군 [獨立軍]
1. 광복단 光復團
2. 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
3.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4.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5. 대한독립군단 大韓獨立軍團
6.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7. 한국독립군 韓國獨立軍
(II.) 광복군 [光復軍]
(I.) 독립군 [獨立軍]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전후해서 일어난 의병은 민종식(閔宗植) ·임병찬(林炳瓚) ·신돌석(申乭石) 등의 주도 아래 국내에서 독립을 위한 항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 이후에는 국내에서의 무력 항쟁이 불가능하여, 독립지사들의 무력항쟁 무대는 서북간도 ·연해주 등 국외로 옮겨졌다. 1910년 이후의 항일 무장세력을 통틀어 독립군이라 부른다.
*참조:
의병(을사조약 후, 국내)
독립군(1910 ~30년대, 만주)
광복군(1940년대, 중국 대륙)*
*참조: 민종식 [閔宗植, 1861~1917.6.26]
188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 사직하고 충남 정산(定山)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듬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격파당하고 공주(公州)에 은신 중 체포되었다. 1907년 평리원(平里院)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주청(奏請)으로 감형,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조: 임병찬 [林炳瓚, 1851.2.5~1916.5.23]
전라북도 옥구(沃溝)출생. 1889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동첨절제사(順天鎭同僉節制使)로 전임,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모집, 200여 명을 인솔하고 담양(潭陽)으로 가던 도중 순창(淳昌)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었다. 1909년 최익현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와, 1910년 왕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순무대장(全羅南道巡撫大將)이 되어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191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었으며, 1916년 단식(斷食) 끝에 순국하였다. 저서에 《돈헌문집》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조: 신돌석 [申乭石, 1878.11.3~1908.11.18]
경상북도 영덕(盈德)에서 출생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寧海)에서 의병 3백여 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도 증원되어 부득이 일월산(日月山), 백암산(白岩山) 등지로 퇴각하면서도 일본군에게 요소요소에서 큰 타격을 입혔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 하고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고종(姑從) 김자성(金子聖)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형제가 무참히 도끼로 찍어 죽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10년 이후, 국내의 지사들은 국외의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를 설치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등에 의해 서간도 ·북간도 등의 독립운동기지가 세워지고, 아울러 신흥학교 ·대전학교 등이 설립되어 독립군 요원을 양성하였다. 또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상설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의 무장항쟁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100만을 헤아리는 한인이 사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일대와 시베리아에서는 곧 일제와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을 편성하고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 광복단 光復團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조직 중의 하나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병수(姜炳洙)·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相圭)·이각(李覺)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대구의 우재룡(禹在龍)·박상진(朴尙鎭)·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김한종(金漢鍾)·엄정섭(嚴正燮) 등이 합류하여 광복회(光復會)로 개칭하였다. 다시 1916년에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신두현(申斗鉉) 등이 가담하여 광복단이 되었다.
이들은 수백 명의 단원을 포섭, 단을 확장하고 〈오등(吾等)은 대한독립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구적(仇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기로 천지신명께 서(誓)함〉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단 회원은 약 200명 정도이며 국내에서 국외로 독립운동의 터전을 넓힐 때 노백린(盧伯麟) 등 10여 명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박성태·김좌진(金佐鎭) 등은 만주로 건너갔다.
조직은 군대식으로 중앙에 총사령(總司令) 박상진(朴尙鎭), 부사령 이석대(李奭大:후에 김좌진), 지휘장(指揮長) 권영만(權寧萬)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선전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도(道)에는 지부장을 두었다. 이석대가 남만주 회인성(懷仁城)에 주재하면서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그후 우재룡이 지린[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양재훈(梁載勳)·손일민(孫一民)·이홍주(李洪珠) 등과 협의하여 광복회의 만주지부를 결성하였다.
광복단은 만주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투쟁방법으로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의 불법 징수세금을 압수하여 전 단원이 무장하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무관의 양성 및 연락기관을 설치하여 군사상 집회 및 왕래 장소로 사용하며, 일본인 고등관 및 변절자의 처벌과 무력전 개시 등이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지방의 부호를 대상으로 한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집 취지서를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활동을 했다. 영남지방에서는 박상진과 채기중(蔡基中)이, 기호지방은 김한종과 장두환이, 관동(關東)지방은 김동호(金東鎬)가 담당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포고문과 군자금 배정 문서인 특정배당금증(特定配當金證)을 첨부하여 각지의 자산가에게 발송하였으며 일본 관리가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무기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前) 경상도관찰사이며 악질 친일부호인 장승원(張承遠)과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의 암살사건이었다.
조직이 비밀조직이었던 관계로 정체가 좀처럼 노출되지 않았으나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이 1918년 1월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총사령(總司令)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다. 일경의 체포를 피한 한훈 등의 회원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뒤에는 김상옥·한훈·김동순(金東淳) 등 20여 명의 암살단을 국내에 파견, 총독을 암살하려다 비밀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2. 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
3·1운동이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양섭(朴陽燮) 등 각 단체대표와 의병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1919년 4월 15일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임원으로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군사부장 전덕원,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 참모 송상규(宋尙圭)· 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서무 김일(金逸), 고문 안병찬(安秉瓚) 등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류허현에 두고, 각 현에는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을 설치하였다. 국내외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 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국내 총지단장은 홍제업(洪濟業), 평안북도 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 안창일(安昌一),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등이었다. 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 등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 등은 만주 집안현(輯安縣), 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 단원 20명이 함경북도 갑산 동인면 금정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며,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은 평안북도 독판(督辦)으로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였다. 3월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4월에는 영유군(永柔郡)에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삭주·강계·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9월에는 의주·운산·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는 8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8월 15일 밤 은율군의 친일파 군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9월 10일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독립군은 이명서를 비롯하여 6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남은 대원은 중상을 입었다.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 등이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한 의용대를 조직하고, 폭약을 구입, 관공서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자금을 모금하고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계열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19년 말경에는 단군기원 또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호 사용을 주장한 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 등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대립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한족회(韓族會)·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고, 1922년 2월 류허현에서 한족회·광한단(光韓團) 등 독립운동단체들과 회합,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고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3.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1910년을 전후하여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 등은 교포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애국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 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경학사는 1912년 부민단(扶民團)으로 발전하 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 하기 위한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부민단은 1919년 4월 유하현 (柳河縣)·퉁화현[通化縣] ·싱징현[興京縣] ·환런현[桓仁縣] ·지안현[輯安縣] 등 각 현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산하단체로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軍政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군정부의 명칭이 문제가 되자, 대한 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안정근(安定根)·김병헌(金炳憲)의 제의로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확대, 개편하였다.
조직은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독판부(督辦府) 아래 사령부·참모부(參謀部)· 정무청(政務廳)·군무청(軍政廳) 등을 두었다. 주요 간부에는 독판부 독판 이상 룡,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鐸), 군무청장 양재훈(梁在薰), 참모 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내무사장 곽문(郭文),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사장 남정섭(南庭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이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3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는 한편, 치다오거우[七道 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구산쯔[孤山子]·허둥쯔[河東子]에 분교 를 두었다.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독립군 1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실 시하였으며,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예 하부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 의용군이 편성되었으며, 백광운(白狂雲)의 의용군 제1중대는 그 수가 800∼900명에 이르렀다.
재정은 한족회원의 헌금을 바탕으로 평안도, 경상도 지방에서 모집한 군자금으로 유지되었으며,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일제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 삼수군(三水郡)의 영성주재소, 7월 강계군의 삼강주재소와 문옥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을 비롯하여 1920년 5월 문상식(文相植) 등이 경북 지역에서 관공서를 폭파하였다.
1920년 8월 김동순(金東淳)·한우석 (韓愚錫) 등이 조선총독부 총감을 처단하고 일제기관을 폭파하려다가 체포되었으며, 1921년에는 만주의 친일단체 보민회(保民會)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1920년 2월 현정경·현익철 등 다수의 소장년파들이 이탈하여 광한단(光 韓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10월에는 일본군 토벌작전에 의해 본부는 북만주 어무현[額穆縣]으로, 의용대는 안투현[安圖縣]으로 옮겼다. 1921년 어무현에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총사령관 박용만(朴容萬) 등이 임명되었으나, 박용만이 조선총독부에 귀순하는 등 와해의 길을 걷다가, 1922년 2월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광한단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통합되었다.
4.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1919년 대종교(大倧敎)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출범해 그해 12월 중국 만주 왕칭현(汪城縣)에서 조직된 무장 항일독립군 부대다.
주요 임원은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이며, 왕칭현 일대의 삼림지대를 근거지로 하였다.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아 청년들에게 6개월의 군사훈련을 실시, 기초훈련을 마친 총 600명 가운데 300명이 다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등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 독립운동단체와 제휴해 북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20년 8월, 총병력이 1,600명을 넘었고, 소총·권총·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했으며, 재정은 인근 주민과 국내 모금액으로 충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靑山里) 어귀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 혼성부대인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 1만 명과 접전,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니, 바로 청산리전투다.
그 뒤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소만국경으로 이동해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2년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 당할 때까지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참조: 청산리전투 [靑山里戰鬪]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琿春]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張鼓峰)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羅南)의 제21사단이 도문강(圖門江)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滿鐵)의 수비대가 쑹화강[松花江]을 건너 서진하여 3면으로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對日)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근거지를 옮겨 장백산(長白山)으로 입산하여 낭림산맥(狼林山脈)을 타고 게릴라전을 펼칠 계획이던 북로군정서군은 1,500명으로 편성된 전투대대인 제2제대(梯隊:李範奭 지휘)와 비전투요원 1,000명으로 구성된 제1제대(김좌진 총사령관 겸임 지휘)로 하여금 180량의 치중차(輜重車)를 이끌고 대이동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은 장장 80리의 골짜기에 100m 내외의 밀림으로 자연성을 이룬 청산리의 백운평 골짜기로 제대를 진출시켜 우진(右陣:李敏華 지휘)·좌진(左陣:韓根凉 지휘)·중우진(中右陣:金勳 지휘)·중좌진(中左陣:李馭成 지휘)의 기습포진을펴고 적을 기다렸다. 10월 10일 아침, 적의 척후가 나타나 식은 말똥을 만져보고 아군이 이 백운평을 지나간 지 오래된 것으로 오인, 전위사령(前衛司令)을 선두로 기마대·보병·공병의 1만 혼성여단이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적이 함정 속으로 다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이범석이 쏜 총이 전위사령을 거꾸러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 3차로 적의 부대가 몰려들 때까지 적 2,200명을 사살하고 아군 20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타격을 받은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아군은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밤 사이 120리를 강행군하여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함으로써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어 아군은 시마다[島田]가 지휘하는 120기병 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泉水坪)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집단병력을 투입해서 도망자 4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고 시마다 중대장이 가노[加納] 연대장에게 보내는 정보문서를 입수, 19사단의 2만 병력이 어랑촌(漁郞村)에 있음을 알고 기선을 제압,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馬鹿溝)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만 2주야에 걸친 혈전을 통하여 2,000명의 아군 병력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해 2만의 적병 중 1,000여 명을 전사케 하고 90명의 아군 전사자를 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죽인 청산리 3차의 싸움은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5. 대한독립군단 大韓獨立軍團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가 이끈 대한독립군이 왕청현(汪淸縣)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이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일본의 대부대가 만주 전역에 걸쳐 강력한 보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각처에 산재한 독립군은 이를 피하여 러시아·만주 국경지대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모인 독립군부대는 북로군정서·대한독립단·간도국민회·대한신민회·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광복단·도독부·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10개 단체였다.
*참조: 봉오동전투 [鳳梧洞戰鬪]
1920년에 들어서 만주 독립군부대의 국내 진입 무장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경의 일본군 수비대가 수세에 몰렸다. 그해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싸움에서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가 패하자, 함북 나남에 주둔한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가 인솔한 1개 대대로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였다. 독립군을 추격하여 간도로 들어간 추격대대는, 6월 7일 안산(安山) 후방고지에서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허룽현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당시 봉오동에는 독립군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연합부대를 편성, 주둔하고 있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부장(府長) 최진동(崔振東)과 부관(副官) 안무(安武)가 정치를,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部長) 홍범도(洪範圖)가 군사를 맡았으며, 봉오동 골짜기와 주변 산에는 약 700~900명의 독립군이 집결하였다. 일본군 1개 대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에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은 홍범도는 봉오골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포위망을 구성한 다음,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고려령(高麗嶺)에 대기하여 일본군을 유인해오도록 하였다. 고려령에서 일본군 전위중대(前衛中隊)가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지만, 본대는 대오를 정비하여 봉오동 골짜기의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홍범도의 공격 명령에 따라 매복한 독립군이 3면에서 집중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3시간 가량 응사하다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강상모(姜尙模)가 지휘한 제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또다시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이었지만,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으로 경미하였다. 이로써 독립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의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고, 독립군의 군세가 더욱 증강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이 싸움의 참패에 충격받은 일본군은 관동군까지 동원하는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고집을 버리고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아 각 군단 수령회의 의논 결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김좌진(金佐鎭)·홍범도·조성환(曺成煥), 총사령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이동녕(李東寧),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행동통일을 결의하였으며, 병력은 27소대 3,500명이었다. 그 해 12월 대한독립군단 병력 3,500명은 헤이룽강[黑龍江]을 건너 러시아령(領) 자유시 스랍스케 일대에 주둔하였다. 여기서 50만 명의 교포와 적군(赤軍)의 원조로 무기를 보충하였으며 때로는 적군의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후 일본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한 러시아가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저항하는 독립군과의 사이에 흑하사변(黑河事變:일명 자유시사변)이 발생하였다. 이때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으며, 결국 해산하였다.
*참조: 흑하사변 [黑河事變]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노령(露領)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미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독립군은 다시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문창범(文昌範)과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을 자유시에 집결해,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崔振東) 등의 총군부(總軍府), 안무(安武) 등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 등의 독립군, 서일(徐一) 등의 군정서(軍政署)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林彪) ·고명수(高明秀)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상하이파[上海派]의 이동휘계인 박애 등이 장악했던 극동공화국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그 관할 아래 두도록 하였다.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사할린의용대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참조: 자유시..
자유시의 위치는 헤이룽 강 연안인 스바보드노이(당시 알렉셰예프스크 Alexsievsk)이다.
자유시(自由市)는 소련이 약소민족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다고 선전을 한 지역이다
그래서 간도 참변후 대한 독립군단은 소련 영토내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했으나 소련 적색군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해제 시키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독립군을 공격해 무수한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를 일컬어 자유시 참변이라고 합니다.*
6.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줄여서 통의부라고도 한다.1920년의 경신참변(庚申慘變)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래 일시 침체된 만주의 독립군은 독립전쟁 전선의 재정비와 투쟁역량의 강화를 위하여 연합적인 독립군단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참조: 경신참변(庚申慘變, 間島慘變)
1920년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경신참변 또는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한다. 3 ·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여러번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조작할 음모를 하였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馬賊)을 사주하여 훈춘현[琿春縣]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이 사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 속 또는 중·소 국경지대로 이동해 버림으로써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작전을 전개하였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국인 마을들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이 몰살을 당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 간 간도일대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피해자는 적어도 수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6월 환인현(桓仁縣)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독립군 단체 대표가 모여 통합조직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6월 3일 개최된 중앙직원회에서 ‘통군부를 개방하여 다른 독립군 단체와 무조건적으로 통일하자’는 결의를 한 후, 각 단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교섭하였다. 그 결과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한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통합기구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결성 초기 중앙본부는 마권자에 두었으며, 조직체계는 총장제로서 총장 아래에 민사부 ·교섭부 ·군사부 ·법무부 ·재무부 ·학무부 ·실업부 ·권업부 ·교통부 ·참모부 등 10개 부서를 설치하고 비서과와 사판소(査判所)를 둠으로써 민정과 군정을 겸비한 군정부(軍政府) 형태를 갖추었다.
주요 간부로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을 선출하였다. 지방행정조직은 각 현에 총관사무소를 설치하고 총관(總管) 이하 참사(參事) ·서기(書記) ·검무감(檢務監) ·검무원(檢務員) ·통신원 등 임원을 두었는데, 1923년까지 통화현 ·환인현 ·집안현 ·관전현 ·흥안현 ·유하현 ·임강현 ·장백현 등에 총관사무소 26개를 설치하였다. 의용군 조직은 1개 대대 산하에 5개 중대와 독립중대인 유격대, 헌병대의 7개 중대로 800여 명이 소속되었다.
활동은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과 부일배 응징, 일본 영사관 ·경찰서 ·주재소 ·남만철도 등의 일제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외에도, 광동학교(光東學校)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警鐘報)》 《대한통의부공보(大韓統義府公報)》 등을 발간하는 등 교육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구성원과 지도이념의 차이 등에서 오는 갈등으로 1923년 2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이탈하여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였다. 의용군 1 ·2 ·3 ·5중대가 그 해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하고,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면서 통의부는 참의부 ·정의부에 흡수되었다.
김규식(1881~1950)은 선전부장을 거쳐 신설된 부주석을 맡았다. 한말(韓末)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임시정부 초기 파리강화회의 대표와 구미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됐지만, 성도(成都)의 사천대학(四川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중국에서 영어·영문학 관련 저술과 영문 시집까지 발간한 학자풍의 인물이었다.
외교를 전담한 조소앙(1887~1958)은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가담했다. 이어 2년여 유럽 지역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특히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승인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제창한 정치·경제·교육 균등의 삼균주의(三均主義)는 한국독립당의 정치이념이 됐으며,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되어 독립 후 민족국가 건설론으로 자리잡았다.
*참조: 삼균주의 [三均主義]
조소앙(趙素昻)이 독립운동의 기본방략 및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진영에는 민족혁명론·무저항주의·계급투쟁론 등 다양한 좌우익(左右翼) 사상이 혼재, 제각각 자기의 방식으로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삼균주의는 그러한 다양한 운동 중의 하나로,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완전한 균등(均等)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김원봉(1898~1958)은 광복군 부사령을 거쳐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반일(反日) 테러 투쟁을 지속하다가 황포군관학교를 마쳤고, 1932년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한 바 있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 결성을 주도한 그는 좌파적 경향이 강했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이청천(1888~1959)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30년대 중반까지 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단·고려혁명군·정의부·한국독립군 등을 지휘했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임정에 참여한 그는 1939년 10월 국무위원에 선임됐다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광복을 맞았다.
*참조: 김원봉
경상남도 밀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에 서울로 올라와 중앙학교를 다녔다. 그 후 중국으로 가서 텐진의 덕화학당에서 독일어를 배우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학당이 폐쇄되자 1918년에 난징의 진링대학에 들어갔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다른 동료들이 귀국한 것과 달리 만주에 남아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했다.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19년 길림성에서 13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백(단장)이 되었다. 그는 의열단을 이끌며 조선총독,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등의 암살과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종로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같은 일본 관청의 파괴를 지휘했다.
조직적인 투쟁을 하고자 1952년에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했고, 1927년에 중국 국민당의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1930년에 조선 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베이징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여는 한편 국내에 조직원을 파견했다. 다음해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난징에 조선인혁명청년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들을 양성했다. 1933년에 중국 관내에 있는 독립운동 정당, 단체 5개를 모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을 결성했고, 이듬해에 군사 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대장을 맡았다.
김원봉 중심의 이러한 단체는 중국에서 김구 중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과 대립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39년 5월에 임시정부의 김구와 함께 단일조직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1941년에 조선민족혁명당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했으며, 그 후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의 부사령이 되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임시정부 계열과 함께 귀국하여 활동했으나, 임시 정부 계열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여 결별했다. 1946년 6월에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선인민공화당으로 재편하여 독자세력 기반을 마련하고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한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에 북한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창여했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그 후 북한에서 초대 국가검열상을 비롯하여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1958년에 숙청당했다.*
7. 한국독립군 韓國獨立軍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이 1920년의 동만주 지방에서 있었던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항일전투였다면, 사도하자대첩과 대전자령대첩은 주로 북만주지방에서 활동하던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이 동만주지방으로 이동하여 중국국민당과 연합하여 거둔 1933년의 전승기록이다.
1931년 日帝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당(洪震, 1930년)은 조만간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할 것을 예견하고 이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종전후 강화회의에서의 발언권 획득 등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1931년 11월 길림성 오상현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긴급 중앙회의를 소집하여 지청천(池靑天 :가명 李靑天)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韓國獨立軍을 결성하고,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지하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키로 하였다.
처음에 북만주에 있던 중국 길림자위군과 동맹을 하였으나 이 부대가 1932년 2월 관동군의 하얼삔 침공때 대패하는 바람에 중국군측으로부터 식량과 탄약을 공급받지 못한 한국독립군은 뿔뿔이 흩어져 의란현(依蘭縣), 방정현(方正縣), 동빈현(同賓縣) 등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32년 5월 조경한(趙擎韓)등 뜻있는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한국독립군 비상회의'를 다시 소집하고 대석하를 중심으로 한국 독립군부대를 정돈하는 한편, 길림자위군 제 7려(旅)인 고봉림부대와 합작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6월에 지청천 등이 한·중 연합부대의 주둔지인 쌍성현 랍립장(拉立場)에 도착함으로써 분산되었던 한국독립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한국 독립군 3천명과 중국국민당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고봉림부대 2만 5천명이 연합군을 이루고, 1932년 9월과 11월에 걸쳐 제 1·2차 쌍성보(雙城堡) 전투에서 일본군·만주군 연합부대를 격파하여 일본군 1개 중대를 전멸시키고 만주군의 전원투항을 받았다.
1. 사도하자(四道河子) 대첩
그후 1933년 3월까지 독립군은 길림성 영안현 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하여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날로 증강되어 갔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만주군과 연합하여 공격을 하였다. 4월 14일 일·만군 대부대가 공격하여 온다는 것을 안 독립군은 중국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 국민당군)의 오의성 부대와 합세하여 적을 포위 공격하기로 하고 부대를 4개로 나누어 3개 부대를 사도하 계곡에 매복시키고 1개 부대로 하여금 적을 유인케 하였다. 4월 15일 새벽 적은 약 1개 사단의 대병력으로 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로 진격하여 왔다. 적이 매복권내로 들어오자 아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급습하니 적군은 미처 저항하지도 못하고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적군 1개사단의 과반수가 쓰러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들은 도망하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극히 미약했으며 연도에는 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이 부지기수였다.
2. 대전자령(大甸子嶺) 대첩
1933년 6월 28일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의 연합부대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진군하였는데 이때 요녕성 무순시(撫順市) 인근의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독립군 연합군을 공격하려고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연합군은 일본군을 맞아 섬멸시키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지점에 있는 노모제하(老母諸河)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1933년 7월 3일 대전자령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7월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 완료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Z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20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 미터가 되는 절벽이 솟아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였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한국 독립군이 2천 5백명, 중국길림구국군이 6천명인데 한국독립군 전원과 길림구국군 2천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한국 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한·중연합군의 매복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일본군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듯이 꽃을 꺾어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군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일본군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이 대전자 전투는 한국독립군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항일전투사상 특기할 만한 대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군복 3천벌, 박격포 10문, 소총 1천 5백정 대포 3문 등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II.) 광복군 [光復軍]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1932년 이후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재정상 운영의 내용도 부실하였다. 더욱이 1937년 중 ·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단체들은 충칭에 이전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광복군이 조직되었는데, 광복군의 편성문제는 치장[綦江]에 있을 때부터 추진되어 오던 일로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시안[西安]에 파견하는 한편, 광복군은 많은 경비가 필요한 군사조직이므로, 중국정부의 양해를 얻는 교섭을 벌였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하였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金元鳳)계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과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성립전례(成立典禮)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과 그 밖의 선전 전단(傳單)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으며, 총사령에는 이청천(李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 ·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 ·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 ·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 ·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委員部規定) 등 군사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취임하였다. 또, 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羅月煥)이 통솔하였는데, 제5지대는 원래 전지(戰地)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하였다.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旅團) ·사단(師團) 등의 6단(段)으로 기본적인 편성이 되었다. 또한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는 한편,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살포하여 애국 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다.
1941년 11월에는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은 항일작전 기간 중에는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야 한다는 등 9개 항(項)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을 제의해 왔으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1941년 12윌 1일 수락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수물자의 충당은 일단 해결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共産陣營)과의 합류가 추진되어 1942년 7월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副司令)에 취임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의 조선 의용군은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지 않고 중국공산당과 함께 옌안을 중심으로 중국 화북 지방에서 항일 투쟁 전개.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게 되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하여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