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8대 현종
991(성종 10)∼1031(현종 22). 재위기간 1010∼1031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안세(安世).
태조(太祖)의 여덟째아들인 안종욱(安宗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종의 비 효숙왕후 황보씨(孝肅王后皇甫氏)이다.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우거하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하여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고려왕조가 성립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였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 十訓要〉 등을 통하여 제시하였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하여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북진정책의 실천으로 북방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현종대에 들어서면서 구체화되었던 동시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책과 군현제의 완성이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이때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같은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하여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특히 태조 이래 북방외교의 현안문제였던 대거란(對契丹)관계가 현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을 보게 된다. 현종의 대거란정책은 거란의 제2차침입(1010년, 현종 1)과 제3차침입(1018년, 현종 9)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제2차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江東) 6주의 반란을 요구하여 제3차침입을 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하였고 퇴각하다 강감찬(姜邯贊)에게 귀주(龜州)에서 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하여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고려는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덕종·정종조의 안정기를 오게 한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특히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하여 착수, 제작한 6,000여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