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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3 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배병만
살아보지 못했으나 솜 옷 하나에 짚신 그 속에 살아야 했던 선조들의 혹한의 겨울나기와 강인함
요즘 같은 시절에 거위털 옷으로 무장을 해도 온몸으로 스며드는 북풍한설을 견디기 어려운데
영하 20도 이상의 겨울에 설산을 넘고 강을 건너 평지를 어떻게 걸어 다녔을까
한겨울에 조선 천지는 산도 들판도 경계가 무너지고 온통 민둥산이었터...
부자들이야 가을부터 굵은 장작을 담벼락에 차곡차곡 쌓아두어 겨울을 대비했겠지만 민초들이야 낙엽이나 부자들이 버린 나무 찌꺼기만 주워 기나긴 겨울을 대비했을 것 같다
추위에는 장사가 없다는데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 중 삼남대로인 해남에서 서울로 천리를 추위를 벗 삼아 올랐을 길 저도 한번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지난번에 걸었던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차이점도 알아볼 겸...
누군가 길을 걸으며 하루에 몇 번 정도 삼남길을 생각하냐? 고 물으신다면 하루 한 번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 한 번이냐!
새벽부터 잠들 때까지 그치지 않고 한 번만 생각하니...
18세기 무렵의 조선 10대간 선도로
1로 의주대로 의주에서-평양-개경- 한양
2로 경흥대로 경흥-서수라-경흥-회령-경성-북청-원산-회양- 한양
3로 평해대로는 동해안으로 오는 평애-울진-강릉-진부-원주- 한양
4로 영남대로(좌로)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새재-충주-음성-용인-한양
5로 영남대로( 우로) 통영-고성-함안-현풍-성주-상주-영남대로와 동일
6로 통영대로 통영-고성-함양-운봉-전주-삼례-공주-차령-천안-수원-과천-동작나루-한양
7로.삼남대로의 삼남대로 제주-해남-나주-장성-노령-정읍-익산-논산-전주-이후는 통영대로와 동일
8로 충남 보령 오천항- 예산(신례원)-천안-한양
9로 강화대로는 강화도에서 김포를 지나 한양이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인데 조선초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전국 주요 도로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X자로 이루어진다.
영남대로. 삼남대로. 통영대로. 의주대로. 경흥대로는 거의 천리길이며 나머지는 거리가 조금 짧다
그 외 29개의 주요 지선도로가 있었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천리길을 마쳤으니 이제 자잘한 길만 몇 개 남겨 두고 있어 시간만 나면 며칠 만에 끝날 것 같다.
영남우로길(통영-상주)과 통영대(통영-천안)로 두 개는 한꺼번에 이으면 천리길이 될 것 같기도 한데...
밤이 아름다울 때 천리길 시작이라...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에 클럽 내에서도 노송님, 콜리님, 동강님, 깽이님, 밤도깨비님
그리고 가볍게 뛰시는 분들 몇몇 분을 제하고 나면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천리길 공지후 타키님과 민규님이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넘고자 댓글을 달아 주셨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멀리 남도의 끝자락 해남 땅끝으로 향한다.
지나간 경로 470km
하루 60km 8일간 진행
코스:해남-나주-강진-광주-장성-노령-정읍-전주- 완주=익산-논산-공주-차령-세종시-촌안-평택-오산-화성-수원-의왕-과천-남태령
서울-동작대교-용산-경복궁
이곳 남쪽끝자락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송호리)는 우리나라 남해와 서해를 가르는 곳이며 국토의 끝부분이기도 하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 문답"에는 땅끝에서 서울까지 1천 리(400km)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2천리(800km)에 이르기에 3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였던 곳이다
함경북도 온성군 두만강가의 연두봉에서 시작한 132km의 산줄기는, 두만강 하구 서수라곶에서 시작되어 백두로 올라오는 장백정간과 조두령봉 0,4 지점에서 만난다
이후 산길을 두만강 우측의 장백정맥길이 되어 백두대간 설령봉(1,839m 원산)과 만나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지리산
혹은 이곳 해남군 땅끝으로 향한다
장백 정간과 백두대간길을 지나는 동안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길의 종착지점, 직선거리로는 1천200km이며
삼천리 금수강산을 이루는 뼈대가 된다.
끝은 곳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곳
세 사람은 땅끝탑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첫날 걸어야 할길 강진으로 향한다.
송지면 사무소 방향으로 가는 길에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좋고 가면서 그동안 살았던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송지면 사무소를 지나며
한겨울 찬바람 속에도 싱싱함을 잃지 않은 배추들
이렇게 싱싱함을 잃지 않은 건 이곳이 해남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가격의 폭락과 폭등 제일 심한 채소중 대표 격이라 할 수 있고
배추의 종류는 알배추(김장용), 청방배추, 대략 한 달간 키워서 파는 단배추, 얼갈이배추
그리고 봄동배추가 있고... 동해바다에 사는 명태처럼 이름 많은 배추 가격이 저렴할때 많이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달마산은 유서 깊은 미황사를 품고 있으며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정도로 공룡의 등줄기를 빼다 박은 암봉으로 형성된 아름다운 자태를 품었으며 어느 산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자태를 하고 있는 산이다.
오래전 배 타고 왔다 갔다 하던 외국 사신들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며 조선 지식인들 중 유배를 와서 보던 달마산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천 개의 불상을 품은 산으로 보였을까 사랑하는 가족이나 여인의 모습으로 보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날은 밝아지고 있다.
달마고도 민박집
고통을 알아야 고통을 이길 수 있는데 어찌 보면 미련한 짓이다 할 수도 있겠고
그 미련한 짓이 내 발끝 앞에 줄지어 있으니 가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미련하다 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은 내 발끝에 두고 있는 이상 그 끝에 서야만 진정한 미련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미련함에 과감히 몸을 던진 두 분께 진정 감사를 드리고
두륜산 배경으로
두 분의 배낭 무게는 대략 10kg 정도이며 중력의 법칙대로 모든 하중은 두 다리가 견뎌야 하기에
앞으로 3일(백양사역)이 최대의 고비가 될 것 같다.
닭목재
두륜과 달마를 연결하는 닭목재를 지나며
버리면 가벼워지는 것들
그러나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중력의 법칙은 고스란히 두 무릎이 감당해야 하고
여름이라면 매미소리와 함께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 이글거리겠지만
겨울이라 그나마 시원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천리길 여름이라면 얼반 죽을 각오해야 하는 이유도 더위와 야간에 모기 때문에 견디기 힘들다
북평면
북평면에서 본 두륜산 방향
한양까지 과거 보는 심정이며, 죄를 지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유배(流配)를 왔다가 해배(解配)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걸음을 걷고 있지만 중력의 법칙은 늘 두 다리와 무릎에 묵직하게 전해진다.
실록에 기록된 조선시대 지식인 4천 명 중 700명 정도가 유배를 다녀왔으며 의금부 노정기를 살펴보면 전라도의 유배지역은 56곳이며, 가장 많은 곳이 경상도 71곳이다.
하루 평균 35-38km 정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의금부에서 두 다리에 주리를 당한 후 유배를 다녀와야 어깨에 힘 좀 들어갈것 같은 유배자 700명
그중에 선비의 표상이셨던 연산군 시절 조광조 선생이 한양에서 노령을 넘어 광주로 향한 후 화순 능주면까지 걸어가셨으니
대둔산과 두륜봉 그리고 위봉과 투구봉
동해마을 앞을 지나
배낭 무게는 인생을 짊어진 듯하고
느려지는 발걸음은 빠르게 지나는 시간을 붙잡는 듯
이렇게 걷다 보면 시간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다.
행여라도 이 모든 걸 붙잡고 있다면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수 있고...
위협적인 위봉과 투구봉
저곳 정상에 서면 남도의 산들이 내 발아래 모두 머물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훗날 기회가 되면 저곳에서 두륜봉과 대둔산으로 한 바퀴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도 덧붙여 본다.
쇄노재 올라가는 길에
달마와 대둔산
도로길 따라 올라왔으나 가장 쉬운 길이 가장 어려운 길일수 있고
돌아가거나 질러가거나 그 길이 내 앞에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가야 한다
멀리 완도의 상황봉과 해남의 달마가 보이는데
니들도 한양 인근에 살다가 남도로 유배를 왔나...
다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한양에는 북한산이라는 걸출한 산이 있으나
바다를 굽어보는 너희들도 그에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우니...
아마도 발바닥이 아프나 봅니다.
길가에 버려진 슬리퍼를 한쪽씩 주워 들고
환한 웃음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바라며
쇄노재
고난의 길
추사(김정희)도 걸었고, 원교(이광사)도 걸었고, 고산(윤선도)도 이 길을 걸었다
추사 선생께서는 대둔산과 두륜산 사이 계곡의 대둔사 좌측 선방 무량수전의 글씨를 쓰셨고
원교 선생께서는 대둔사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쓰셨고,
만덕산 아래 백련사 만경루 편액 글씨와 나주 금성관 편액 글씨도 원교의 작품이니 가는 길에 꼭 만나보고 와야겠다
그나저나 두 분은 무슨 연유로 같은 절에 빼어난 글씨체를 한 점씩 남겼을까?
잠시 쉬면서 스트레칭도 하고
두륜봉과 투구봉
무딘 명검과 그 곁에 투구까지 벗어던진 장군은 어디로 가셨을까
산을 보고 올려다보고 있으면 전장을 누비던 장군이 마치 산을 뽑을듯한 기세였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며
당찬 모습의 바위암봉에 올라서면 거칠 것 없이 세상을 발아래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해남군 북일면
길이란 예전에는 고을과 고을을 이어주는 오솔길 정도였다면
점차 시대가 바뀌면서 고을과 고을을 이어주던 길은 왕복 2차선의 면(面)과 면(面)을 연결했고
그리고 군(郡)과 군(郡)을 이어 주는 왕복 4차선
다시 시(市)와 시(市)를 연결하니 길은 넓어진다.
오래된 길을 찾아가는 건 면과 면을 이어주는 2 차선길을 찾으면 되니
왕복 2차선은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차량의 이동또한 뜸한 편이다.
해남땅을 벗어나 강진군에 들어서며
가운데: 우후 신홍 송덕불망비, 이 가운데를 놔두고 좌우에 쓴 내용은, 은혜를 입은 바 매우 커서 말로는 그 공을 다 담기 어려우니
간략하게나마 이렇게 돌에 새겨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려는 것이다.
우후는 병마절도사 또는 수군절도사 바로 아래의 부관직이니 무인인 것 같고
신홍이 어떤 분인지는 찾지 못하였으나 추측건대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란에서 이 지역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우신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주 사시는 한문학 박사 친구분이 해석해 주신 글
두 분에게 예쁜 꼬마 미더덕을 닮은 물집은 생기고
이제부터 고난의 길인 악마의 종주길이 시작된다
작은 물집 하나로 인해 전체를 망치게 되니 앞으로 3일간만 어떻게든 버티면 되는데
그 3일이 결코 쉬운 건 아니다.
덕룡산의 암릉이 파도를 닮은 듯 서있고
강진 두레 농요비
신전면을 지나며
배낭 무게가 10kg가 넘으니 허리는 자연스레 굽어지고
발바닥의 꼬마 미더덕(물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도암면을 지나고
현 위치는 진등재
다산 초당을 찾아가는 길에 만나는 진등재
남도 여행의 1번지란 바로 해남과 강진이 아닐까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지만 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 착한 날씨가 좋다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남도의 올망 졸망한 산을 닮은 담장의 돌과 기왓장을 배경으로 해넘이는 시작되고
다산 초당에 잠시 들러 보고 나오면 강진읍에 도착할 무렵이면 저녁 8시 정도 될듯한데
어쩌나 밥은 못 먹더라도 초당에는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이런 말 하면 분명 두 분이 초당에는 안 가겠다고 버틸 것 같고
일단은 가보자...
다산 정약용 선생
정조 때의 정약용
정조의 의문의 죽음과 천주교 박해로
친인척은 죽거나 유배를 떠났는데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자산어보를 남겼으나
유배 16년 만에 흑산도에서 사망
정약용 역시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으나 중 죄인이 아니라서 몸은 조금 자유로웠던 모양이다
만덕마을에서 잠시 오르면 초당으로 오를 수 있다.
다산 초당
예전에 다산 선생이 살던 초가집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의 외가 집안인 해남 윤 씨 후손들이 새로 지은 초당이다.
읽어 보시고
민규님
다산 선생께서 한양에서 유배온 초당
의금부 노정기를 보면 전라도는 대략 56곳의 유배지가 있고 하루평균 85리 정도 대략 35킬로를 걸어야 했다
이곳으로 오려면 충청도를 내려오셨을 터이니 충청도는 유배지가 54곳 정도
궁둥짝 얼어하게 맞거나 그렇지 못했더라도 짚신신고 오기에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산길 따라 오르면 다산께서 자주 왕래 하시던 동백나무 가득한 백련사로 갈 수 있다.
백련사의 차나무도 여름인양 푸르름을 간직하고
천연기념물인 아름드리 동백나무도 줄지어 서있고
이 길은 다산선생께서도 초의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셨던 명품길로써 2월이나 3월에 동백꽃 피는 날 찾게 되면
왜 남도 여행의 1번지가 강진이며 다산초당부터 시작되는지 알 것 같다.
백련사
8명의 국사를 배출한 명찰인 백련사 만경루 현판은 원교 이광사 선생이 쓴 글
이곳에서 정약용은 초의선사(혜장) 스님을 만나 실학자와 승려로써 인연을 이어간다.
백련사에서 본 강진만
강진읍으로 찾아가는 길에
아직 갈길은 멀고 배고플 텐데
어쩌나
강진읍 남포마을
따뜻한 마을 쉼터인데 찬바람 맞으며 왔더니 더 이상 진행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고
여기서 자고 가도 되지만 더 늦기 전에 저녁밥 먹을 곳을 찾아야 내일 일정을 소화할 수 있어
밖으로 나옵니다.
타키님은 저곳에서 자자고 말씀하시는데...그래도 60km안디니 좀더 가야죠
도로가에 조신하게 꿇어앉은 민규님
10kg의 배낭무게로 뻐근한 다리를 펴고 있는 중
긴 걸음을 걸을 때 다리에 전해오는 묵직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5일 6일 정도 걸으면 거의 걸음 걷기가 귀찮아진다.
어린애들 배낭 같은 것 매고 물한병 넣어 다니면 이런 증상은 없을 수 있겠으나
10kg 이상의 배낭은 저절로 무릎 꿇게 만든다.
더 늦기 전에 강진읍에 도착했으나 첫 번째 찾은 식당은 영업종료
두 다음집에 문 닫을 시간이라 겨우 부탁해서 밥은 먹고 나와 인근 주막에 들러 잠을 청한다.
새벽 2시 50분 정도에 밖으로 나와 오늘 일정은 영암군을 지나 나주까지 가야 한다.
성전면을 졸며 졸며 지나고
성전면 명전교을 지나며
밤하늘에는 보름달, 길가 도로 위에는 가로등이 환하고
강진군 작천면으로 가는 길에
박산마을도 지나고
갈동마을버스 승강장에서
새벽이라 다소 쌀쌀한 날씨지만 그래도 춥다는 말씀은 안 하시는군요
사문로 따라 월남 저수지 방향으로
월출산과 월남 저수지
달이 지면 해가 뜨고
보름 지난날들이라 렌턴 없이도 잘 왔지만 해 뜨는 시간보다 달뜨는 시간이 더 좋고
국도 13번 길인 예향로 옆길 따라 진행해서 누릿재로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면 얼마나 멀리 걸어야 할까
몸은 천근만근이요 새벽부터 찬바람에 걸어왔으니 비몽사몽이요
내 몸은 스스로 관리를 하지만 걷다 보면 한꺼번에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남도 여행의 1번지라는 강진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월출산 자락의 누릿재를 넘으면 영암땅에 도착하니
따뜻한 국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무게로 인해 허리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모습이다.
월남리 마을에서 본 월출산(月出山)과 보름달
월출산답게 바위암봉의 날 선 모습이 매우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는 중천(中天)에 떠있지만 아직 못내 아쉬운 게 많은 달(月)은 월출산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그 자리에 있는 모습
월출산 천황봉은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으로 천황이란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고 제 아래 큰 산을 두지 않아
조망이 일품이다.
월출산 남쪽에서 본모습
강진군 성전면 월남(月南) 마을에서
월출산이란 이름답게 지나오며 월자로 시작되거나 월자가 들어가는 마을이 많이 보인다.
월평 저수지 월남 마을을 지나고 있으며 월남마을 위로는 월하리 마을
송월리와 그 맞은편 마을인 월송리도 있고
월출산 북쪽에는 또 어떤 월자가 들어가는 마을이 있을지 가다 보면 알게 될 것 같다.
월남마을에서 누릿재 올라가는 길에 잠시 우황골로 진행
이고개만 넘으면 영암땅이니 강진에서 다산초당과 백련사는 잊지 못할 것이며
다산을 생각하면 신유교사(申酉絞死)로 순교한 셋째 형 정약종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 유배지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정약전이다.
예전의 길이며 다산 선생께서 나주에서 형 정약전과 기약 없는 앞날을 예견하고 헤어지며 홀로 눈물로 걷던길이며
강진사람들이나 해남 사람들이 영암이나 나주 그리고 한양으로 올라갈 때 이 길을 통해서 지난 길이다.
(설경구씨가 나오는 자산어보 영화 참고)
누릿재 읽어 보시고
남도 1번지 강진땅은 끝나고 이제부터 맹모삼천지교(孟母 三遷之敎) 조선판 버전의 땅으로 입성한다.
월출산은 강진땅에서는 다소 아기자기했다면, 영암땅은 웅장하고 가파르다 보니 명당터가 많아서일까 빼어난 학자들이 모여들고 공부하던 곳이다.
영암으로 내려가는 노루골
그늘진 곳에 잘 자라는 빼빼 마른 전나무 군락지를 내려오며
지구상에는 약 1천만 종의 생물이 저마다 각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저 혼자서는 살 수 있는 생물은 없다.
모든 생물은 서로가 의지하며 복잡한 사슬에 얽혀 살고 있으니 이곳의 전나무도 끼리끼리 모여 하늘을 가린다.
남쪽에서 본 월출산
서울의 북한산을 닮은듯하고
강원도 설악산을 닮은듯하고
지나온 강진의 덕룡산을 닮은 듯도 하고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갈라져 나온 정기가 장수의 천산(千山)을 모두 지나고
정읍의 내장산과 , 전남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에도 정기를 조금 남겨 놓은 뒤
월출산 자락에 모든 정기가 모여있다고 해도 관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하고 대단하다.
당대 최고의 명필(名筆) 가라면 우리는 한결같이 추사 선생이나 석봉을 곱는다
추사 선생은 1786년 충남 예산 출생으로 단단한 벼루 10개를 바닥낸 분이며 붓 1천 자루를 버렸다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셨고
조선판 맹모삼천지교의 주인공인 석봉 한호(韓濩선생은 1543년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스승(신 씨)이 전남 영암으로 낙향하자
어머니 (홍주 백 씨)가 한 분의 스승한테서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황해도 개성 석봉산(石峰山)에서 영암으로 아들 한호를
데리고 와서 떡장사를 하면서 가르쳤다는 곳이 바로 월출산 아래 마을이다.
이곳에서 어머니와의 떡 썰기 대결을 펼친 후 다시 글공부하러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알기에 넘어가고
두 분 외 원교 이광사 선생이나, 경북 청량산 토굴에서 공부하셨던 김생 선생 같은 분들도 있지만 생략하고
이쯤에서 최고의 글씨 물론 가격을 흥정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글씨는 누구의 글일까 궁금해진다.
조선을 대표하셨던 명필 두 분 추사 김정희 선생이나 석봉 한호도 아닌 독립운동가셨던 안중근 의사의 글이다.
독립 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분이셨죠
참고로 조선판 최고의 아들 교육은 어떤 어머니께서 최고였을까?
1번째. 1537년 태어난 율곡선생(고도장원공)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이며 누구나 신사임당하며 아하 역시나 최고셨지 하는 분으로 5천 원, 5만 원군에 모델로 유명세를 치르신분이다.
2번째, 1542년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사촌리에서 태어나신 서애 류성룡 대감(조선 5대 명재상) 어머니 김소강 여사
점곡면 사촌리에서 안동으로 시집간 안동 김 씨 소강이란 여인이 똘똘한 아들 낳으려고
별별것 다하며 시집인 이곳에서 아기를 낳으려 했지만 친정아버지의 반대로 문전 박대 당한 후 사촌리 마을을 지켜주는
느티나무 아래서 사내아이들 낳으니 그가 바로 서애 유성룡 대감이시다.
사촌리는 예전부터 영의정이 나온다는 명당터였다는 걸 안 친정아버지는 풍산 류 씨에게 영의정의 기운을 주기 싫어서
반대를 하셨고, 서애 대감 어머니는 어떻게 하던지 이곳에서 사내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싶으셨던 것이라 보인다
3번째, 1543년 항해도 개성 석봉산 아래서 태어난 한석봉과 어머니 홍주 백 씨
맹모삼천지교의 조선판으로 스승 따라 개성에서 영암까지 내려오셨던 분으로써 최고의 명필로 만드신 어머니
그리고 영암은 고려를 세운 왕건이 왕이 될 것이라 예언하셨던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던 인물이 이곳 영암 출신이다.
영암을 지나며 대략 아는 내용만 적었으니 자세하게 깊이 공부하실 분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영암군 용흥리에서 광주에서 오신 지음님
나주에서 가장 잘한다는 곰탕집에 들러 곰탕 3인분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감사히 잘 먹었고요 친구님 고마웠습니다.
영암에서 나주로 가는 길은 13번 국도를 따르며 타키님 배낭에 신발만 주렁주렁 매달고 가는 모습
마치 보부상이 그러했던 것 같이 어디 산발 팔러 가는 모습이다.
월출산의 땅인 염암의 국도길에는 갓길이 조금 넓은 편이지만
홍어의 땅인 나주로 들어서면 도로옆으로 자전거길이나 산책로가 별도로 있어 걷기에 부담 없고
나주는 곰탕과 배 그리고 몇날 몇일 발효시킨 시큼한 홍어 그리고 고려 때 8대 왕 현종이 거란 2차 때 피란온 곳이기도 하죠
아무도 반겨 주지 않았고 죽일 듯 달려드는 지방 호족세력 앞에 현종의 몽진 길에 최고의 보디가드 지채문 장군이 있어
덜 외로웠던 길...(고려 거란전쟁 참고 하시면 좋을 듯)
나주에 도착하면 그 길을 걷게 되는데 기대가 크다.
도로변이라 편의점은 많고 쉴 곳도 있어 좋으나 마음 놓고 편하게 오래 쉬지를 못한다
갈길은 멀고 발바닥에 열이 나니 삼다수 한병 부어 식혀 보고...
이 길을 통해서 가거나 해배되어 서울로 올라가는 길
직선으로 올라가도 무려 470km나 걸리니 하루 60km씩 꼬박 걸어 8일이다.
전 국민의 40% 이상이 노비였던 시절
같은 민족을 노비로 부르던 시절
공부만 죽어라 하던 양반과 새벽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서 일만 하던 노비
평생 노동을 하지 않은 양반
평생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노비
우리는 양반인가 머슴 혹은 노비인가? 약골이면 양반이고 튼튼하면 노비 출신아닐까 생각도 곁들여본다.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45만 자라는 한자를 외워야 했는데 하루 200자씩 외워도 6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고
유교경전과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사기, 한시 송시 당시 인문학을 고루 통달해야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공부 안 할 것 같으면 노비로 살아야 했나... 당시에 살지 않은 것에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해 본다.
첫댓글 J3 배병만 방장님의 삼남길을 잡아 왔스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