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정창균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설교학) 주승중 교수(장신대 설교학)
진행: 장병두 목사(「목회와신학」 편집장)
장병두: 설교를 주제로 대담을 하게 되는데요,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설교 문제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먼저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승중: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의 설교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봄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첫째는 자신들의 설교사역 자체에 대한 부분입니다. 설교에 대한 이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즉 설교에 대해 자신이 정의를 내린 대로 설교를 이해하고 그 정의에 충실하게 설교사역을 하고 있는가, 설교에 대한 이해대로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측면입니다. 둘째는 설교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설교자 자신에 대한 정체성 측면입니다. 이런 구분을 기준으로 우리의 설교 문제를 다루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창균: 저는 먼저 두 가지 현상에 주목하고 싶은데요, 첫째는 요즘 신학생들에게까지 설교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순수 이론 신학에 대한 관심이 컸지, 설교같은 실천적 영역은 신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배울 정도의 분야는 아니라는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학생들 자체가 설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설교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설교에 대한 공부들도 이제는 신학교 안에서부터 진지하게 시도되고 있는 경우들을 자주 봅니다. 한편, 목회 현장 쪽의 경우를 보면, 설교를 중요시 여긴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설교를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현상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대로 나가면 안되겠다 싶은 현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점점 이벤트 회사처럼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들 가운데 첫째는, 일단 목회를 시작할 때는 설교가 중요하다, 말씀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설교에 초점을 두어 목회를 시작하지만, 기대한 만큼 또는 목회 현장이 요구하는 것만큼 설교가 현장에서 어떤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서 대개의 목회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간단히 말하면, 설교만으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교회성장에 효과가 있다는 처방이나 프로그램들에 관심이 쏠리게 되고 자연히 설교에는 그만큼 열정이 식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의 부흥이 목회의 보람과 열매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빠른 교회부흥에 대한 극심한 압박감에 사로잡히게 된 우리의 상황에 큰 원인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병두: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 말씀이라면 한국교회 안에 설교에 대한 중요성이 많이 대두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실제적으로는 복음의 능력이 그다지도 약하게 나타나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주승중: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분명하게 말하는데, 그는 설교를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란 바로 그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한다면, 먼저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설교가 무엇이냐 하는 개념적 정의가 선명하지 않은 것 같고, 또 설교자 스스로가 내가 누군가, 설교자가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로서의 자의식이 분명치 않다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미국 보스턴에서 목회하셨던 고든이라는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느 토요일에 늦게까지 설교 준비를 하다가 그만 잠깐 잠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설교준비를 하는데, 설교시간은 가까워 오고 해서 급하게 준비하다가 겨우 시간에 맞춰 강단에 올랐답니다. 그런데 설교시간 내내 청중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눈에 띄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목사님은 자기가 마치 그 한 사람을 위해 설교를 하는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예배 후에 저분을 꼭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후 현관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사람이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안내 집사님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벌써 나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안내 집사님이 하는 말이 “아니 목사님,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세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닙니까?”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목사님은 잠이 깨었는데, 이에 고든 목사님은 충격을 받고, 자기의 설교 현장에 늘 주님이 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설교가 변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는 도대체 설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고, 자신이 말씀 전할 때마다 회중 가운데 성령께서 운행하신다는 것을 확신케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설교 말씀을 통해 심지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설교학자가 말한 이런 유명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설교자의 왕좌는 설교단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 있고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의 주위에는 영혼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구세주께서 그의 곁에 계신다. 성령께서 회중들에게 역사하시고 천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천국과 지옥이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큰 특권이고 얼마나 막대한 책임인가?”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 영혼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점을 좀 실감했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포사이드의 “교회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흥왕하고 말씀과 함께 죽었다”라고 한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는 교회가 성장했지만 말씀이 사라질 때는 교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해야 합니다.
장병두: 설교의 능력은 결국 설교자의 자의식과 밀접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신학생의 경우 자기를 누구로 인식해야 할까요? 즉 자신을 설교자로 인식해야 하느냐, 아니면 목회자로 인식해야 하느냐, 또 설교자와 목회자는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한편, 설교의 영광에 대한 충분한 동의와 생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그만큼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떻게 하면 실제로 한 목회자가 설교의 영광을 드러내는 설교자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정창균: 제가 석사 공부를 하면서 지도교수와 대화하며 고민했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에 대한 감정적 기복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설교가 잘 될 때에는 마치 온 천하를 휘어잡은 것처럼 우쭐하다가도 또 설교를 몇 번 죽을 쑤거나 교인들이 은혜를 안 받는 것 같으면 깊은 좌절에 빠지고 심지어 내가 이것을 계속 해야 하는가 하는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설교자들에게는 유난히 심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도교수에게 이런 나의 느낌을 말하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얻은 결론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가 설교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설교자인 것에 대해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확신이 없을 때 그럴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학 강의를 언제나 ‘설교하기 위해, 즉 설교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온 사람 손들어 봐라’ 하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처음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대여섯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학생들에게 한국교회 교인들은 다 사기 당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유학 시절에 잠깐 보았던 「빛과소금」의 어느 설문조사 기사에서, 교인들에게 왜 교회 가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지금 정확하게 기억하는 못하지만, 약 80여 퍼센트가 설교 듣기 위해서라고 답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설교 들으러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설교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온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설교를 하고 있다면, 심하게 말하면 성도들이 사기 당하고 있는 게 아니냐 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첫째는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지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언제나 감격과 확신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신학적인 결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왜 내가 설교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은 여기에 대답해야 합니다. 설교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가, 내가 가장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 왜 내가 설교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답해야 합니다. 셋째는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첫째, 둘째의 질문에 대해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셋째 질문에 대해서는 50퍼센트 이상이 이미 답을 깨닫는 것을 봅니다. 저는 설교자의 자기 인식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바울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바울을 논설가로, 혹은 뛰어난 논리를 가진 신학자로 이해하지만 바울은 자기를 신학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를 설교자로 말합니다. 자신을 설교자로 인식합니다. 방금 주 교수님께서 인용하신 사도행전 20장 24절의 고백은 설교자로서의 긴 여정과 고민 끝에 결론을 얻자 자연스레 터져 나온 자기 고백입니다. 그 고민의 흔적들을 우리는 디모데전서 1장에서도 볼 수 있고 디모데후서 1장과 데살로니가전서 등 여러 곳에서 봅니다. 바울에게는 적합성과 부적합성 사이의 긴 고뇌와 번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설교가 뭔지를 알고 난 다음 나를 보면 도저히 나는 설교자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데, 그럼에도 지금 자신은 또 설교를 하고 있거든요. 이 모순 사이에서 마침내 바울이 깨닫는 결론이 있습니다. 내가 자원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능하게 하는 이가 있었고, 내가 충성되어서가 아니라 나를 충성되게 여겨주는 분이 있었고,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큰 긍휼을 입음으로 비로소 설교자가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설교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한 커뮤니케이션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 관계의 핵심은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로 오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설교를 통해 일어나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오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가운데로 오신다는 것도 기적이고, 또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에 인간이 끼여 들어 그 일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설교자에게는 두 가지가 따라오게 되는데요, 감격과 책임감입니다. 즉 이런 일이 내게 주어졌다는 감격과, 이런 일을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책임감이죠. 그래서 설교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뇌와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마주치는 이런 사건은 설교자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설교자로 안수 받은 자가 거기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냐 하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일어납니다. 내가 안수 받은 설교자이기에 내가 설교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설교자로 안수 받았다는 것으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면 말씀에 대한 고민과 집착이 엄청나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과연 있느냐 하는 거죠. 그냥 피상적으로 대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다음 주일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를 넘어서서 내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어쩌면 설교를 한 동안 쉬면서라도 말입니다. 두 번째는,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자상 즉 설교자에 대한 이미지의 불균형으로부터 오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설교자상은 선포자라는 상입니다. 이것은 권위가 나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데로부터, 즉 왕으로부터 주어진 권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나는 나의 권위로 말하는 게 아니라 왕이 내게 준 권위로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모두 나의 말에 무릎을 꿇어야 하고 내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설교자에게는 이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그렇게 삽니까,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는, 설교자의 삶과 인격에 대하여 물을 여지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심화되면 설교자가 무책임하게 되거나 혹은 한없이 방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자에게 개발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할 이미지가 바로 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인이라는 말은원래는 법적 용어로서 목격자라는 의미이지만, 예수님이 그 말을 사용한 이후 신학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많았지만, 증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11명밖에 없고 또 이후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그들이 단순히 목격자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당사자 혹은 참여자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울의 말대로라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혹은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는 등의 말은 다 증인의 개념으로부터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설교자가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목회자와 설교자는 같은 거냐 아니면 다르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함으로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그 장소가 어디일지, 또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맡겨줄 사람이 있고, 나는 하나님이 맡겨주실 그 사람들을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책임을 지느냐 하는 거죠. 가장 강력한 근거와 수단은 결국 말씀입니다. 결국 설교자라고 하든 목회자라고 하든 그들은 다같이 말씀의 사역자들이고,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책임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승중: 목회자가 설교자냐 하는 문제에서, 우선 목회라는 말의 개념이 정리돼야 할 것입니다. 목회는 영어로 미니스트리(ministry)인데, 이 말은 한국말로 목회 혹은 교역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사실은 너무 협의적인 의미로 번역됐어요. 미니스트리의 헬라어는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섬김의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교역자 하면 대개 안수 받은 자를 생각하는데, 원래 성경적인 개념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섬기는 모든 일에 대해 미니스트리라고 할 있습니다. 반면 안수 받은 자를 영어로는 오데인드 미니스터(ordained minister)라고 구분된 명칭을 사용합니다. 오데인드 미니스터는 말씀을 증거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전문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바로 이 개념에서 혼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한국교회에서는 흔히 교역자를 안수 받은 목회자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라는 개념을 원어를 따라 디아코니아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목회 혹은 교역이란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역을 말하며,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거듭나서 교회 공동체의 회원이 되고 교회를 섬기는 자들은 모두가 목회 혹은 교역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수 받은 목회자나 교역자들은 누구입니까? 즉 목사님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기 위해 교회가 따로 안수해서 세운 전문사역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설교자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목회자는 다 설교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학생의 경우 자신을 누구로 인식해야 할 것인가, 자신을 설교자로 인식해야 하는가, 목회자로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저는 신학생은 목회의 사역 가운데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목회 예비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안수 받은 목회자가 하는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또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증거하는 사역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병두: 그런 면에서 신학생은 결국 설교자로서 훈련받는 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실제 목회현장에 가게 될 때 설교가 배운 것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요구를 청중들에게 제시하는 일에 있어 그리 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고, 이런 와중에서 고민하다가 이른바 이벤트형 목회 쪽으로 가기도 하는데요,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보십니까? 다시 말해 설교에 대해 잘 준비되었다고 하는 목회자의 경우라도 목회현장에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설교만으로는 안 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현상들이 흔히 나타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정창균: 설교는 역사(history)입니다. 다시 말해 단회적인 것으로, 즉 한 번 설교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죠. 설교는 역사를 가지는 것이며, 그러므로 긴 안목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반드시 성공하는 쪽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설교를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설교란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설교를 형편없이 했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설교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설교는 망쳤더라도 결국은 보이지 않는 요소인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짧게 보면 실패한 것 같겠지만, 길게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설교자는 바로 목회 설교자입니다. 하나의 신앙공동체 가운데 함께 살면서 그들 가운데 평생 설교하는 설교자가 그들에게 가장 파워풀한 설교자라는 것입니다. 청중도 설교자를 알고 설교자도 청중을 아는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설교이기 때문이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 같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전도사님이나 부목사님들이 설교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가끔씩 교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전도사님이나 부목사님의 설교가 담임 목사님의 설교보다 은혜가 못한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제게 합니다. 저를 격려하려고 하는 소리이겠지만, 그런 말에 대해 제가 공개적으로 그러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전도사님들이나 부목사님들에 비해 약 15년이나 더 설교를 공부하고 훈련한 저와 그분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오히려 제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웃음) 한 사람의 설교자를 길러내는 심정으로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할 때면 목사님들께 부탁하는 게 있는데, 목사님들 자신이 설교자로 자라야 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을 키우고 배출해내기 위해서는 전도사님들이나 신학생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자주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즉 교인들도 내가 듣는 이 설교가 마지막 설교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듣도록 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참 잘 강조했는데, 청중도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쉬워요. 한편 현실적으로 조급증과 압박감이 많아요. 같은 시장에 있는 동종 업종의 이웃 가계와의 경쟁보다 신도시 이웃 교회와의 경쟁이 더 심한 듯한 상황 속에서 설교를 하게 되니까 오늘 설교가 내일 당장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쉬워요. 그러나 오늘의 설교는 평생에 걸쳐 효과가 나타나야 하고 또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설교란 평생 하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그 말씀에 대한 열매와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현실은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기다려주는 청중도 없고 설교자 자신도 못 기다리지만 말입니다. 루돌프 보렌은, 설교란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설교 강단에 서 있는 설교자가 그 강단에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급증과 압박감 때문에 프로그램이나 이벤트 중심으로 가면 처음에는 신선한 듯하고 되는 것 같지만, 생명이 길지 못합니다. 설교도 유행하는 모델을 따라 할 게 아닙니다. 한번은 기도원에서 어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설교 정보 제공, 설교 자료 은행 같은 데서, 주일 낮 예배용, 저녁 예배용, 수요 예배용, 절기 예배용 등의 설교문을 보내준다면서 한 달에 6만원이면 된다고 회원으로 가입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입니다. 그 정보 제공자들은 자신들이 한국교회에 대해 사명감을 갖고 그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문과 아무리 씨름하고 연구해도, 이미 교회 역사상 걸출한 설교가들이 했던 그만한 설교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설교를 발굴해 질 높은 설교를 하도록 돕는 것이므로 자신들의 설교 정보 제공 사업이 한국교회를 위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도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목회자들에게 설교는 정말 얼마나 큰 부담입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거죠. 그분도 설교에 대한 부담을 좀 내려놓고 싶다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이 설교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기로 하는 그 순간부터 목사님의 교회 교인들은 죽기 시작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분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군요.
주승중: 지금은 설교의 홍수시대인 것 같습니다. 설교는 수없이 많지만, 말씀을 통한 회중들의 진정한 삶의 변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홍수는 생수가 아닙니다. 이런 와중에서 회중들은 메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생수와 같지 않은 설교를 너무도 많이 들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중의 설교도 요식 행위 정도로 생각하는 현상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회중들도 들으면서 그냥 앉아 있는 겁니다. 메너리즘에 빠져 있는 거죠. 설교자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고,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예배의 횟수가 매우 많고, 또 그 모든 예배에 설교가 포함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과도 관련이 깊을 것입니다. 특히 교인수 100명 미만의 소형교회가 대부분인 한국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적어도 주일 낮 예배와 저녁 예배와 수요 예배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부교역자를 둘 수 없는 상황에서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데, 그러면 1년에 156회, 10년이면 1,560회 정도 설교한다는 얘긴데, 30~40년 동안 목회한다면 6~7천 편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설교 역사상의 탁월한 설교자들이라 해도 그만한 분량의 설교를 남긴 설교자는 거의 없습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설교의 역사상 가장 많은 설교를 남겨야 하는 설교자들인 거죠. 그런데도, 그것만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심방도 해야 하고, 상담도 해야 하고 여러 수많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준비된 설교를 제공해 준다고 하면, 유혹 받기가 쉬운 거죠. 또 수많은 설교집들이 나와 있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많은 자료와 설교들을 다운받을 수 있는 손쉬운 길이 옆에 있거든요. 그런데 결국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되게 하지 못하게 하는, 말씀은 선포되지만 거기에 진정한 만남과 깨짐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원인이 됩니다.
정창균: 넘치는 자료가 축복이면서 동시에 오히려 엄청난 해악이 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설교자는 세 가지가 아니라고 하는데요, 첫째 설교자는 편집자가 아니다, 둘째 설교자는 텔레비전 리포터가 아니다, 셋째 설교자는 우편 배달부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즉 남의 것을 그대로 전달만 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죠. 언젠가 한 학생이 제게 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학부 시절부터 전도사 사역을 해 지금 7년 째 하고 있다는 그는 최근 고민이 많다는 겁니다. 왜 내 설교에는 사람이 변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심해 얼마전 기도원에 갔답니다. 거기서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도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했었는데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해답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웃음) 즉 너는 설교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뒤 몇 달 후 어느 설교학회 세미나에서 제가 발제한 적이 있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똑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그때 저는 그 학생에게 한 것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원하는 장소에서 네가 원하는 방법으로 네 눈에 보이게 일어나지 않을 뿐이지,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는 거죠. 그 변화 가운데 어떤 것은 그 설교를 들은 지 1년 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기 직전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예를 들어 1년 전에 한 설교를 저는 잊어버렸는데, 어떤 성도는 간증하면서 그 설교를 언급하는 경우를 봅니다. 1년 전의 그 설교가 문득 생각나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를 단순히 위로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론적으로 생각할 때도 옳은 게 아니냐는 겁니다. 둘째는 나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라는 것입니다. 청중 가운데 한두 명만이 변화될 수도 있고,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자극을 주어 변화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나친 낙관은 금물입니다. 셋째는 왜 내 설교에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을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사람이 변하도록 설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말장난 같지만, 설교자의 태도에 큰 변화를 준다고 봅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왜 내 설교에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가라는 말을 할 때, 네 양심이나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을 만큼 그 설교에 전력을 쏟았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하라고 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쳐보지도 않고, 내 설교에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청중이나 성령을 탓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설교자의 무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주승중: 이 문제에 대해 또 다른 측면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설교의 실제” 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꼭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설교의 핵심 사상을 한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개 자기가 한 설교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곧 자신이 한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 설교를 들은 청중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했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설교의 목적이 뭐냐 하는 거죠. 그러면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설교학자는 설교는 행동으로 결론지어 주는 말이라고 했는데, 곧 그 설교를 들었을 때 회중들은 ‘그래 내가 오늘 이거 하나는 해야 되겠다’내지 ‘말씀을 따라 내 삶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설교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면, 긴 시간 많은 설교를 들었을지라도 회중들은 나가면서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할 것입니다. 즉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겁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는 거죠. 이런 점도 설교가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켜주지 못하는 원인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장병두: 어쨌든 많은 분량의 설교가 요구되고, 또 설교에 대한 압박도 많은 이런 와중에서 설교 자료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그럼에도 마치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참된 설교를 찾기란 사실 쉽지 않은 게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설교 현실을 왜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이 없는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지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능성일 것 같습니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자료라 하더라도 베끼는 설교라면 그것이 어떻게 청중을 변화시키는 진실한 설교일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자는 것이죠. 어떻게 우리가 자기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즉 생수를 만들어 내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승중: 이 문제는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신학교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스스로 본문과 씨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직하게 말씀을 연구하면서 설교자로서 본문 해석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신학교에서 훈련과 준비를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제대로 안돼 있으면, 목회 현장에 나가 직면하게 되는 여러 목회적 부담과 바쁨 가운데서도 엄청난 양의 설교를 감당해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결국은 이미 나온 자료들을 베끼는 등과 같은 유혹에 빠져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고 하면서 여전히 홍수를 만들어 내는 설교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장병두: 여기서 어떤 사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데요, 예를 들어 똑똑한 사람들은 쉽게 설교의 내용을 잘 다듬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설교의 전부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해석의 문제도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영성,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설교자의 삶 가운데 적용되고 그래서 설교자를 변화시킬 때 비로소 설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주승중: 물론 그렇죠. 그것은 기본입니다. 우선은 신학교들에서 해석의 과정을 철저히 훈련 시킴과 아울러, 해돈 로빈슨이 말한 것처럼, 설교란 본문의 컨텍스트와 문법적, 역사적 연구를 통해 본문의 분명한 중심 사상을 끄집어낸 다음 그것을 설교자가 먼저 자기에게 적용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 해석학적인 훈련이 되고 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일 먼저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리고 그 말씀에 누구보다 제일 먼저 내가 듣고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이럴 때 자기 고백적이고 증언으로서의 설교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장병두: 이럴 때 무엇보다 나는 이제 설교 못한다는 고백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주승중: 맞습니다. 그런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내가 과연 이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탄식과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설교 못하겠다는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바로 이 지점을 지나야 진정한 설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 속에는 성령께서 반드시 역사하시리라 믿습니다.
정창균: 저는 설교학 강의에서 해석의 문제를 다루는 데 많은 비중을 둡니다. 설교의 어떤 부분들은 설교자의 연륜이 더해지면서 자연히 해결되는 부분이 있고, 어느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함으로써 고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무리 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부분, 체질이 되어버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해석의 영역입니다. 첫째 영역이나 둘째 영역은 상당히 고쳐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접근하는 체질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아무리 보더라도 자신에게 이미 체질화된 익숙한 시각으로 본문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익숙한 관점으로만 본문을 계속 보기 때문에 이 해석의 시각이라는 요소는 참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 설교자를 염두에 둔다면 신학생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영역은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방편들이 있는데 설교자는 그 방법들에 익숙하고 다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에게는 파워가 있는데 그 파워는 새로운 지식이나 새로운 계시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대부분 새로운 시각(perspective)으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다양한 본문 접근의 방편들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목표를 정조준하고 그 목표물이 넘어지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 설교의 실제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경 본문해석의 문제이고, 이 부분은 특히 신학생 시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성 목회자가 되면, 예를 들어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좋다고 여기면서도 그런 관점에로의 변화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학생의 경우는 이런 변화가 쉽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설교자가 본문에 대해 가져야 할 전제와 순수 해석학자가 가져야 할 전제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목회를 하느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느냐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본문을 대하는 입장이 설교적이냐 아니면 순수한 해석학자로서의 입장이냐 하는 거죠. 후자의 경우는 본문에 대한 전제가 본문이 독자인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접근하는 목적은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본문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행하고자 한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본문을 접근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본문이 우리에게 행하고자 하는 바를 순종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때 설교자로서의 해석자는 혼자서가 아니라 청중을 그 등에 업고 본문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하는 본문의 의미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이해 없이는 본문이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해석에 철저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본문 해석에 이런 자세로 철저하게 접근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병두: 마지막으로, 설교학 교수님들로서 한국교회 강단을 위해 꼭 하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주승중: 저에게는 앞에서 언급한 고든 목사님의 이야기가 참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설교할 때마다 회중 가운데 주님이 앉아 계시고, 그 말씀을 통해 회중들의 삶 속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내가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에 저에게는 아주 마음을 간절하게 하는데요, 이런 의식이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모두 있었으면 합니다. 물론 나 자신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리처드 박스터가 한 말이 생각나는데요, 그는 “나는 결코 다시 설교하지 못할 것처럼 설교하였고,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 그리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다면 결국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자세로 생명의 말씀을 증언하는 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정창균: 오늘날 우리의 설교가 너무 흥미 위주 스타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청중들을 설교의 관객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을 우려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 헌신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던 차에 한국을 방문한 릭 워렌 목사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강연을 들으면서, 새들백교회의 활력의 근본은 릭 워렌의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교회의 헌신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워렌이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이며, 이 말의 구체적인 실현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처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올 때부터 헌신하기 위해 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교회도 교인들의 헌신으로 이런 성장을 경험한 교회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교인이 떨어져 나갈까봐 마음을 졸이는 상황입니다. 프린스톤에 있는 티스데일은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에는 거침돌(stumbling block)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참된 거침돌(genuine stumbling block)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 거침돌(false stumbling block)이라고 했습니다. 후자는 청중은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순종하고 싶어하는 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설교자들이 제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전자는 청중이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여 설교를 알아듣는데, 단지 그대로 하기 싫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설교자들은 참된 거침돌을 놓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즉 죄를 지적하거나 헌신을 요구하면 청중들이 다른 교회로 가 버리지 않을까 혹은 너무나 큰 상처를 받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등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겁니다. 설교란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인데, 여기에는 첫째, 청중이 예를 들어 ‘나 마음이 너무 아파요’라는 식의 말로 드러내는 필요(expressed need)가 있고, 둘째 청중에게 진정으로 있어야 할 필요(actual need)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청중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설교자가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바울이 경고한 대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려는 태도가 있지 않은가 혹은 너무 두려워하는 태도나 무감각함 가운데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설교는 교회성장을 위한 방편인가, 아니면 성장이 늦어도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을 살려내는 방편인가 하는 질문 앞에 진지하게 서보았으면 좋겠어요. 설교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설교는 반드시 교회성장의 방편인가요? 다섯 명 앞에 평생 설교한다면 그 설교는 실패한 것인가요? 그 설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요?
주승중: 한국교회 강단을 위협하는 적신호가 있다고 보는 데 그것은 설교가 목회의 수단과 방편으로 활용되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장병두: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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