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손웟탄이 창설한 "크메르세레이" 반군은 1960년대에 미군의 지원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비교적 정예 군대였다. 1970년대 말 베트남 전쟁의 종식과 크메르루즈의 승리로 창립자 손웟탄이 사망한 후 대부분은 와해됐지만, 일부는 태국국경 지역에서 처음에는 크메르루즈에 대항하고 후에는 베트남 위성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반군활동을 지속했다. 이 사진은 1975-1980년 사이에 촬영된 것이다. 사진작가인 Pierre Toutain-Dorbec이 촬영했다. 이 장면은 "크메르세레이" 병사(좌)가 포로로 잡은 당시의 정부군인 "크메르루즈" 병사(우)를 호송하는 장면이다.
"크메르세레이"(Khmer Serei: 자유 크메르)는 캄보디아의 민족주의자 손 웟 탄(Son Ngoc Thanh)이 창설한 반공 및 왕정반대를 이념으로 하는 게릴라 단체이다.
1. 기 원
"크메르세레이"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캄보디아 국경지역들에서 형성된 크메르이싸락(Khmer Issarak) 무장투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일본점령기에 잠시 동안 총리를 맡았던 손 웟 탄은, 이후 프랑스에 유배되어 연금생활을 하다 귀국한 후 이싸락 운동 전반에 걸친 지도력을 획득하고자 했지만, 목표의 일부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1954년 캄보디아가 독립한 직후, 손 웟 탄은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정권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크메르세레이" 반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주로 태국과 베트남 국경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그 조직원의 대부분은 베트남 남부 메콩 삼각주(Mekong Delta)에 거주하던 크메르계 소수인들인 크메르끄롬(Khmer Krom) 출신들이었다. 이 조직은 반-시하누크적인 라디오 방송을 은밀히 송출하기도 했다. 외부의 관찰자들은 "크메르세레이"를 진정한 위협적 요소라기보다는 약간의 "소요" 정도로 보았지만, 당시의 캄보디아 정부는 이 반군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훗날의 보고에 따르면, 시하누크는 자신의 치세 동안 1,000명 이상의 "크메르세레이" 혐의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주1)
1963년 "크메르세레이"의 활동가로 시하누크와 직접 담판을 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했던 쁘리업 인(Preap In)을 공개적으로 구속한 후 처형한 일은 "크메르세레이"에 대한 "성꿈"(Sangkum) 정부의 탄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다. 전직 민주당(Democratic Party) 당원이었던 쁘리업 인의 처형 장면은 영화 필름으로 촬영된 후 공개되었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캄보디아인들의 뇌리에 남았다.(주2)
(주2) Short, P. Pol Pot: Anatomy of a Nightmare, Henry Holt, 2005, p.156.
2. 크메르세레이와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 전선
(사진) "크메르세레이" 의 젊은 병사의 모습.1975-1980년 사이에 사진작가 Pierre Toutain-Dorbec이 촬영했다.
"크메르세레이"는 미국이 지원하여 베트남 남부에서 활동하던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 전선"(Front de Lutte des Khmers du Kampuchea Krom) 반군과도 약한 연대를 취하고 있었다.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 전선"은 "배색 스카프"(White Scarves: [크메르어] 깡사잉 사 Kangsaing Sar, [베트남어] 짠 센 소 Can Sen So)라고도 불렸다. 이 단체는 원래 크메르끄롬 출신 승려 사모욱 센(Samouk Sen)이 창설한 조직으로 통상 베트콩(Viet Cong)과 교전을 벌였다.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 전선"은 1960년대에 조직을 확장하여, 이후 베트남 내 수수민족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던 군사조직인 "피억압 부족 해방을 위한 통일전선"(FULRO)에 통합되었다.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 전선"과 "크메르세레이"는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 중에 미군으로부터 침투훈련을 받았고, 미군 "기동타격사령부"(MIKE Force)의 예하에 편성되기도 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미국중앙정보부"(CIA)에서 자금 및 군사원조를 받았다.(주3) 전성기였던 1968년에 "크메르세레이" 및 관련 군사조직의 총 병력은 8,000명에 이르렀다.(주4)
1970년 론 놀(Lon Nol) 주도의 쿱테타로 시하누크가 실각한 이후 손 웟 탄은 정부의 각료로 임명되었고,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 전선"과 "크메르세레이" 병력 중 일부가 쿱테타 이전에 캄보디아 군대에 합류하여 프놈펜의 거리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혼란한 군사적 상황과 혹시라도 이 잘 훈련된 군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론 놀의 생각 때문에, 이들은 주로 치열한 전투들에 배치되어 대부분 세력이 와해되었다.(주5)
1972년 손 웟 탄이 정부에서 실각했고, 그는 스스로 베트남 남부로 망명했다 사이공의 함락과 더불어 구속되었다. 베트남 남부에 잔류했던 "크메르세레이" 조직은 북-베트남의 승리와 더불어 종언을 고했고, 캄보디아에 잔류했던 조직은 론 놀 정권이 붕괴된 후 크메르루즈 군대에 의해 소탕당했다.
(주3) Blum, W. Killing Hope: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Zed, 2003, p.125.
(주4) Radu, M. The New Insurgencies, Transaction Publishers, 1990, p.202.
(주5) Kershaw, R. Monarchy in South-East Asia: the faces of tradition in transition, Routledge, 2001, p.221.
(사진) "크메르세레이" 의 젊은 병사들의 모습.1975-1980년 사이에 사진작가 Pierre Toutain-Dorbec이 촬영했다.
3. 1975년 이후
(사진) 1982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하기 위해 난민촌에서 훈련을 받는 나이어린 "크메르세레이" 병사들. 이 당시 크메르세레이는 전 총리 손 산이 이끄는 정파에 참여했다. 사진은 일리노이 대학(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미디아학부 학장 로날드 예이츠(Ronald E. Yates)가 소장한 것이다.
1975년 크메르루즈가 승리하여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정권을 수립한 이후, 일부 "크메르세레이"가 "자유 크메르"(Free Khmer)란 이름으로 살아남아 당렉산맥(Dangrek Mountains) 주변의 북서지방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국경 근처의 난민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손 산(Son Sann)은 이들 전직 "크메르세레이" 부대원들 일부를 1979년 결성된 자신의 조직 "크메르민족해방전선"(KPNLF)에 참가시키기도 했다.(주6)
(주6) Kershaw, R. Monarchy in South-East Asia: the faces of tradition in transition, Routledge, 2001,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