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聖學 (공성학)

1879(고종 16)∼1957. 실업가. 본관은 곡부(曲阜). 개성 출생. 응규(應奎)의 둘째 아들이다.
김택영(金澤榮)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시문에 능통하였고 성균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기업의 성패보다는 민족자본에 의한 향토개발로 일본인들의 자본침략을 극력 반대한 지사형 민족기업가이다.
손봉상(孫鳳祥) 등과 인삼품종개량, 경작방법개선 등 삼포경영방법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삼포경영으로 가산을 이룬 부호의 가문에서 태어나 1910년
대 이래 개성에서 각종 회사를 창립하여 개성실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12년 영신사(永信社) 설립 참여를 시작으로, 고려삼업주식회사(高麗蔘業株式會社), 한국 최초의 민족계 전기회사인 개성전기주식회사의 창립에
대주주로 참여, 취체역에 취임하였고, 1936년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西鮮合同電氣株式會社)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고수하였다.
1920년 김정호(金正浩)의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에 대주주로 참여, 취체역을 역임하였다.
1929년 개성양조주식회사를 설립, 대표취체역에 취임하였고, 1930년 송도고무공업주식회사 감사역, 1934년 춘포사(春圃社)를 창설하였다.
1936년 개성삼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사장에 취임하였고, 특히 개성인삼의 판로개척을 위하여 개성인삼조합 설립에 참여,
제2대삼업조합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중국,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개성인삼의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등 다채로운 기업활동을 하였다.
1938년 개성상회(開城商會)를 창립하여 삼포경영 및 인삼판매업을 경영하였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둘째 아들 진항(鎭恒)에게 가업을 전담시키고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韓國企業家史(趙璣濬, 博英社, 1983),理想鄕을 찾아서(濯菴孔鎭恒稀壽記念文集刊行委員會, 1970). 〈朴光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