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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28품중에서 오늘은 제3품「비유품」이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끔 법문을 하시다가“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써 잘 알아듣느니라.”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법만 이야기하면 또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으시고 그 깨달으신 내용을 설명하시는 것인데, 그것은 순수히 우리의 마음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 그런 것이에요.
또 마음으로 경험하고 또 마음에서부터 모든 것을 지어나가고 그래서 어떤 평화나 행복이나 이런 것들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현상설명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안경을 설명한다하면은 안경 딱 내놓고 이것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것이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만은 그런 어떤 현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사 현상을 설명한다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존재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비유가 불교에는 많이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면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어떤 정신세계, 우리 마음의 세계에 대한 이치를 환희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비유를 자주 드는데,『법화경』에는 이제 법화7유라고 해서 일곱가지 비유를 아주 유명한 비유로 듭니다. 여기「비유품」이 있지만은, 저 뒤에가면「약초유품」이렇게 해서 그것도 일종의 비유품이에요. 여기서 이제 비유는 화성유라고 어.. 삼계화택유라고 해서 화택유(火宅喩)그래요. 불 화(火)자, 집 택(宅)자. 화택유 이것을 이제 여기서 이제 비유로 드는데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은, 보통 우리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은 사실 사바세계라고 하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가‘반고반락(半苦半樂)’이라. 이렇게 해요. 반은 고통이고 또 반은 살만한 그런 곳이다. 그래서 이제 고통의 순간이 있었지만은 그 고통의 순간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나고 나면은 그래도 숨 돌리고 그런데로 달콤한 시간도 있고 편안한 시간도 있고 그런데로 즐거운 시간도 있고 그렇습니다.
또 그런가하면은 때로는 즐겁고 달콤하고 편안한 그런 가운데서도 또 걱정근심이 나한테 따라다니고 그 걱정근심이 현실화되면은 아주 고통스럽고 괴로운 그런 그 어떤 상황을 맛보게 되고, 이것의 연속이에요. 계속 그것이 반복해가는 거야.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를 빌어서 내 지혜로 만들어서 그런 어떤 그 상황들을 잘 소화를 하면은, 잘 이해하고 잘 소화를 하면은 그런 고통들이 반감 내지 완전소멸이 가능합니다. 완전소멸이 가능해.
따라서 고통이 반감됨과 아울러 달콤하고 즐겁고 고소한 그런 사바세계의 어떤 그런 그 맛도 역시 반감이 되요. 그것도 반감됩니다. 같이 반감되버려요. 그럼 이제‘불고불락(不苦不樂)’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그건 아주 편안함. 나는 편안함이라 이렇게 표현하는데, 아주 편안한 그런 어떤 그 삶이 말하자면 불교에서 바라는 삶이라.
이를테면은 꿈속에서,(마이크가 고장이 나서 고치는 와중에) 저렇게 잘 할라고 하다보면 더 이제 못 쓰게 만드는 것 이게 중생들이 하는 짓이 대개 그래. 잘 할라고 했는데, 뜻은 좋았는데 이게 뭐 어리석으니까 잘 몰라가지고 이치를 몰라가지고 그만 버려놓는 거지. 작품을 버려놓고 인생을 버려놓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버려놓고 잘할라고 했어. 처음에는, 그런데 상대에게도 그게 잘하는 것이냐? 아니야. 그게,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이치를 알아라.”고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는 게 그거야. 이치를 알면은 거기에 딱 맞게 그 할 수가 있습니다. 딱 맞으면 그게 잘 된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그 고통과 즐거움의 연속인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꿈 속의 일이다 이렇게 봐요. 그래서 꿈을 깨버리면은 편안해요. 즐거운게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꿈을 아주 심하게 꾸다가 잠 깨버리잖아요. 그럼 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 정말 아주 따뜻한 이부자리밑에 그대로 손끝도 하나 까딱하지 않는 편안한 잠자리 그걸 느끼게되요. 그럼 그건 즐거운게 아니야. 편안함이지. 그냥, 그래 꿈속에서 고통스러운 것을 깨거나 꿈속에서 즐거운 것을 깨도, 크게 뭐 횡재를 해가지고 즐거웠던 것을 설사 그 꿈꾸다 깨도 역시 그것은 편안함입니다. 편안함이지 그건 뭐 다른거 아니야.
그래서 부처님은 뭐 꿈깨는 이야기는 불교에서 수없이 많지만은 그래 이제‘꿈을 깨는 것이 말하자면 제일 바람직한 삶이다.’라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죠. 우리는 달콤한 꿈을 꾸고 싶은데 부처님은“그 꿈 깨라!”달콤한 꿈도 꿀 수 있지만은 따라서 아주 고통스럽고 괴로운 꿈도 꾸게 된다. 그래 꿈을 깨버린 상태는 이제 고통스러운 꿈도 없고 달콤한 꿈도 없는 거야. 그래 꿈깬 자리는 그냥 편안한 자리야. 어떻게 보면 그게 불교에요. 그 자리가 불교야.
우리는 자꾸 달콤한 꿈 꿀려고 하지. 그리고 뭐 아주 마음속에 희망하는 바가 많습니다. 희망하는 바가 많은데 대개 사람들의 희망은 달콤한 꿈이야.‘뭐 소득이 많았으면 싶고 뭐 좋은 사람 만났으면 싶고 일이 아주 잘 풀렸으면 싶고 뭐 마음에 바라는 가정의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렸으면 싶고 그런 이제 꿈을 꾸는 거지요.’그래봤자 그 모든 마음에 소구소망(所求所望)이 다 해결돼도 역시 꿈임에는 틀림없어.
이게 이제 우리하고 부처님하고 그 견해차이라. 그래서 부처님은 여러 가지 그 중생들의 그 마음에 맞춰서 이런저런 견해를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 이제「비유품」이것은 화택비유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통스럽다. 불타는 집속에서 거기서 이리저리,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아니 불이 난 것을 알아도 거기서 이제 아이들이 그만 불장난하면서 노는 것과 같은 그런 그 상황이다.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해요. 여기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지만 중간에 가면‘화택의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 사바세계의 삶의 현실을 아주 리얼하게 잘 그리고 있어요.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했던것 까지도 아주 부처님은 속속들이, 그 분의 영혼 참~ 맑거든요. 거기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런 밝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사물을 보고 세상사를 보는데 우리가 보듯이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텐 하나 쳐놓고 보는 것같이 그래 봐요. 그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은
부처님은 속속들이 환하게 명경지수처럼 그렇게 밝게 보고, 가을날이 비온 뒤에 확 개이면은 저~ 멀리 앞 산까지 그 나무샊갈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분별할 수 있는 그런 그 투명한 영혼을 가지고 투명한 안목을 가지고 세상살이를 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하고는 많이 달라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은 중생들이 사는 삶은 큰~ 저택이 있는데, 큰 저택에 불이 났다 말이여. 근게 거기는 사람들이 한 500명 살아. 아이들이 특히, 그런데 그 아이들은 불이 나니까 그 불장난꺼리로 삼고 불장난하는 거야. 그리고 있으면은 결국 타죽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타죽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거야. 그리고 그냥 장난이 좋아서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는 거라.
그래 그건 낡고 험한 집이라. 아주 뭐 형편없이 낡은 집이 돼놔서 그냥 불이 났는데 거기다가 서까래가 떨어지고 그 속에는 온갖 살쾡이나 뱀이나 독사나 온갖 그 독충, 짐승도 그 속에서 들끓고 있다. 이런 그 이야기들을 뒤에 가면 아주 재미있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요. 그게 우리들의 마음과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그런 현상들인데, 근래 한국사회 뭐 한국뿐만아니라 뭐 어느 나라든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비슷비슷할 것입니다만은 그 여러 가지 그 참 좋지아니한 뉴스를 보면은 꼭 그 이「비유품」에, 부처님 말씀에는 화택의 비유하고 똑 같아요.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거라. 그런 현실을 그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비유를「비유품」에서 이야기하려고 하지요.
그 이야기에 들어가기전에 앞에 이제『법화경』의 안목이라고 하는 소위「방편품」이 있었습니다. 정말「방편품」이것은 정말 아주 훌륭한 한 권의 경전이에요.「방편품」하나만 가지고 또 훌륭한 한 권의 경전 역할을 하고『법화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이야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그렇게 이제 뜻이 아주 깊고 그리고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듣고 사리불이 깨달음이 있어가지고 아주 환희용약하지요.
1. 爾時舍利弗 踊躍歡喜 卽起合掌 瞻仰尊顔 而白佛言 今從世尊
이시사리불 용약환희 즉기합장 첨앙존안 이백불언 금종세존
聞此法音 心懷踊躍 得未曾有
문차법음 심회용약 득미증유
爾時舍利弗이 踊躍歡喜하야
그때 사리불이 뛸 듯이 기뻐했다. 우리가 대개 기쁘면은 펑펑 울거나 뭐 몸부림을 치거나 펄쩍펄쩍 뛰거나 그렇게 하지요. 아주 순수한 사람일수록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아주 더 강렬하지요. 그렇게 이제 사리불이 그렇게 기뻐하는데, 그것은 이제 자신이 앞에 설법을 듣고 깨달음이 있었다.
『금강경』혹시 기억나시죠?『금강경』에는 수보리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중간에 깨달음이 있어서 펑펑 웁니다. 울어요. 눈물흘리면서‘체루비읍(涕淚悲泣)이라’눈물을 그냥 펑펑 쏟으면서 감동해서 운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금강경』에 나오고 또『능엄경』같은데서는 이제 아난존자가 깨달음을 성취해서 거기에 이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촥 이렇게 시로써 읊는 그런 내용도 있고, 이 대승경전에는 보면은 그 중간에 처음에 부처님 법문이 촥 나오고 그 다음에 그 법문이 어느정도 이제 절정에 달하면은 그 법문을 들은 제자들이 깨달음이 있고 감동이 있어가지고 그 감동을 표현하는 그런식으로 거의 그런식으로 이제 엮어져 있습니다.
여기 이 쯤에 와서 여기『법화경』에는 사리불이 踊躍歡喜라. 뛸 듯이 기뻐해서 그리고 가만히 있을 수 없죠.
卽起合掌하고 瞻仰尊顔하며
곧 일어나가지고 부처님께 합장을 하고서 尊顔 부처님의 얼굴을 존안이라고 하지요. 존안을 瞻仰 척 이렇게 우러러 보며
而白佛言하니라
부처님에게 고해 말씀하사대
얼마나 기쁘겠어요? 저한테도 가끔 전화로 이제 뭐 법문듣고 자신의 어떤 그 감동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고, 요즘 뭐 전화가 있으니까 집에 앉아서 그렇게 감동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찾아오는 분들도 있어요. 찾아와서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하고 뭐 책을 읽었든지 TV에서 법문을 들었든지 아니면 인터넷에서 법문을 들었든지“아! 그것이 나는 그렇게 효과가 있는 줄을 몰랐어요.”보통 이렇게 법문하는 자리에서 법문듣고 물론 뭐 스님들도 그렇고 이제 뭐 감동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만은 그런데 인터넷상에서 법문듣고 감동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 감동하기가 조건이 더 좋은 가봐.
자기만의 공간, 자기가 가장 편안한 시간 그리고 자기가 언제든지 듣고 싶은 그런 그 시간과 공간을 딱 마련해놓고 딱 켜가지고 딱 들으니까, 이런 데서 이렇게 모여서 들때 옆에 사람 그 뭐 의식하고 또 뭐 법회식순 의식하고 또 신심으로 왔는데 그 시간에는 또 웬지 마음이 모여지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장애요소들도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인터넷으로 공부를 하면은 그런 모든 문제가 싹 해결돼있어.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시간 커피 한 잔 탁 옆에 타놓고 들어가면서 편안하게 뭐 누워도 좋고 앉아도 좋고 엎드려도 좋고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의식할 필요없이 그대로 들을 수 있어. 그래서 감동이 더 깊어요. 훨씬 감동이 깊어. 내 그걸 이해를 하겠드라구요.
그래가지고 정말 아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고 그래서 감동받은 그런 분들도 간혹 이제 알려옵니다. 여기 사리불처럼요. 그 이제 한 말이 그렇습니다. 부처님께 고해 말씀하사대
今從世尊하와 聞此法音하고
지금 세존으로부터 이 법음을 이 법문하는 소리를 듣고, 그 앞에 이제「방편품」까지 내용입니다. 그래서
心懷踊躍하야 得未曾有니다
마음에 뛸 듯이 기뻐함을 품고 未曾有 그동안 있지 않았던, 생전 처음듣는 그런 아주 기쁨. 법희선열을 이렇게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죠. 요런 정도의 이야기는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야기를 많이 해요.
왜 그런가?
2 所以者何 我昔從佛 聞如是法 見諸菩薩 受記作佛 而我等
소이자하 아석종불 문여시법 견제보살 수기작불 이아등
不預斯事 甚自感傷 失於如來 無量知見
불예사사 심자감상 실어여래 무량지견
所以者何오 我昔從佛하야 聞如是法호니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옛날 부처님으로부터 이와같은 법을 들었으니
見諸菩薩은 受記作佛이어니와
여기 이제 중요한 말이 나와요. 앞에「방편품」에서 최상승법문을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들어서 그런데 여러 보살들에게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하는, 諸菩薩은 受記作佛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리불같은 사람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줄 알았어. 그랬는데 그러나 우리들은 그래서
而我等은 不預斯事라
我等은 이 일에 斯事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우리는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얘기했다 이거여. 똑같은 사람인데 뭐 보살이 다르고 무슨 뭐 아라한이 다르고, 다른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이제 공부하는 그런 어떤 연륜이라고 할까? 또 마음자세라고 할까? 또 신심의 상태라고 할까? 또 불교안에도 다양한 무슨꺼리가 있는데 거기에 대한 관심사, 관심의 대상 뭐 기도가 좋던지 무슨 기도중에도 지장보살이 좋은지 뭐 관세음보살이 좋은지 삼신이 좋은지 아라한이 좋은지 각자 관심의 대상따라서 그렇게 이제 차이가 나요. 그런 차이가 있다구요.
그런 차이가 있어서, 사람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평등한 점이 물론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불평등한게 이게 당현한 거라. 사람은 본래로 불평등하다. 이런 소리 처음 듣죠? 평등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은, 사실은 알고보면 불평등한게 그게 당연한거라. 얼굴 다 틀리잖아요. 그게 불평등이지 뭐여. 나이 다 틀리잖아요. 그게 불평등이야. 일체가 불평등입니다. 이게, 평등하지 않는 거요.
그 불교에 대한 관심사도 전부 달라. 그래서 여 사리불같은 사람도 저런 보살지위에 있는 사람들하고 자기는 다르다. 그래서 이 일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거여. 그런데 같은 사람이다보니까 뭐라고?
甚自感傷하야
심히 매우 스스로, 感傷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슬프고 소외감이 들어서 마음이 상했다 이런 뜻입니다. 마음이 아팠다 이 말이여. 안 그러겠어요? 같은 자리에 있는데, 누구는 수기주고 누구는 해당 안되고 그래가지고서 똑같은 사람으로서 아주 슬프고 소외감이 들고 그래서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지. 그런 상황이었었다 하는 것입니다.
失於如來無量知見이니라
그래서 여래의 무량지견.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죠. 한량없는 지혜를, 失 잃어버렸구나. 우리는 거기에 해당 안되는구나. 부처님의 그 한량없는 지혜의 경지는 우리하고는 그냥 별 볼일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거요. 얼마나 마음 아프겠어요. 똑같은 형제인데 맏아들만 뭐 재산 많이 물려주고 둘째부터는 소용없다 이래버리면은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그러니까 이 사리불이 그동안 참 속을 많이 썩였나봐요. 여기 이야기 대로라면은, 아니 다른 사람들인데는“너는 부처가 될거야. 너는 부처가 될거야.”하고 이렇게 칭찬하고 수기를 줘가지고서‘뭐 앞으로 잘할거다. 100점 맞을 것이다.’이 정도 수기가 아냐. 이거는, 아! 부처가 될거라고 이렇게 수기를 했거든요. 그렇게 했는데, 사리불이 누구입니까? 인도사회에서 최고로 지혜롭고 제일 지식인이고 제일 빼어난 사람이라.
그 내가 아까 좀 소개하지만은 이 사리불은 얼마나 지혜가 있었던지 불교역사상에 최고 훌륭한 절‘기원정사’기원정사를 건립하는데 사리불이 설계하고 감리하고 자재구입하고 공사감독하고 일체를 다 맡아서 총 감독을 한 사람이 사리불입니다. 이렇게 법에도 뛰어나지만은 세상일에도 그렇게 밝았어요. 무슨 뭐 자기가 건설회사 다닌 적도 없는데도 그런 그 위대한 사찰을 짓는데 감리감독을 다 하신 분이 사리불이라. 대단한 분이요. 그런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제 부처님 지혜의 입장에 있어서는 영 거리가 멀었더라 이거지. 그러니 얼마나 자존심 상했겠어요. 자존심 상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비로소 털어놓는 거지. 그것도「방편품」듣고나서「방편품」듣고 나니까 이게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 경지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경지더라.
뭐라고? 부처님 앞에 와서 손 한 번 번쩍 들어도 皆已成佛道라. 다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얼마나 편안합니까? 또 망상과 온갖 욕심이 부글부글 끓는 그런 그 마음상태로써 부처님 앞에 절 한 번 해도 그걸로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이렇게 했으니까, 사리불이야 뭐 말할 것도 없죠. 사리불은 수 억만번 성불하고도 남는 그런 정도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비로소 꿈을 깬 거여. 중생으로써의 꿈을 깬 거라. 그래서 여기에 이제 이런 자기의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3 世尊 我常獨處山林樹下 若坐若行 每作是念 我等同入法性
세존 아상독처산림수하 약좌약행 매작시념 아등동입법성
云何如來 以小乘法 而見濟度 是我等咎 非世尊也
운하여래 이소승법 이견제도 시아등구 비세존야
世尊하 我常獨處山林樹下하야 若坐若行에
세존이시여! 내가 항상 獨處 저기 산이나 숲 속에 저기 나무 밑에서 홀로 독처에 홀로 있으면서 앉거나 걸어다님에
그 이제 불교는 그래서 이제 숲의 종교라. 그리고 기독교는 사막의 종교라.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사막에서 탄생한 종교, 불교는 숲 속에서 탄생한 종교 그래요. 부처님은 항상 그 숲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하고 여기도 보면은 항상 山林樹下에서 앉거나 行하는 걸어다님에
每作是念하대
매양 이러한 생각을 하대. 이러한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이 왔노?
我等同入法性이어늘
우리들도 법의 성품, 진리의 성품에는 다 해당된다 이거여. 사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정, 무정이 다~ 진리의 성품속에 다 해당되는데
云何如來가 以小乘法으로 而見濟度아
어째서 여래께서는 소승법으로써,‘저기 뭐 기도하면 잘 된단다. 무슨 뭐 칠성당에 빌면은 명이 길어진단다.’요런 소승법을 가지고‘법당에 불 밝히면 무슨 뭐 지혜가 난단다.’하는 요런 소승법으로써 우리를 제도했느냐? 제도를 보였는가? 이런 말이여.
우리에게는 맨날 기도만 하라하고 기도해서 무슨 뭐 마음에 있는 소원성취하라하고 아『법화경』같은 이런 좋은 법문은 왜 안해주느냐? 이 말이야. 따지고보면 그 이야기에요. 이게, 우리가 뭐 수준이 그것뿐이냐고 우리 다 알만치 알고 배울만치 배웠고 날만치 났다 이거여. 근데 왜 우리에게는 맨날 기도만 하라 하냐? 맨날 성지순례만 하면 복 받는 줄 알고, 그런 것만 가지고 저가 하급 아주 수준낮은 거 그것만가지고 내 가르쳤느냐? 이렇게 따지는 거에요. 이게, 사리불이 그 얘기라. 소승법이라는게 그거거든요.
야! 대단한 대목입니다. 이게,‘我等도 同入法性이라’우리도 다 법의 성품, 진리의 성품에 다 해당된다 이거여. 아 석가모니가 해당되면 나도 해당되고 말이야. 보살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해당되면 우리도 다 해당되지 뭐가 다르냐 이거지. 이제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지 있기는, 그것도 이제 말하자면 수요에 따라서 공급이 이루어지는 거야. 수요에 따라서 허허허 수요에 따라서 공급이 이루어지다보니까, 우리가 그걸 필요로 하니까 자꾸 그걸 공급하는 거야.
다짜고짜 와가지고“무슨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무슨 기도하면 좋습니까?”하고 그렇게 물어오니까 어떻해. 그 상품을 내 줄 수밖에 없는거야. 그렇게 안하고 탁 비우고 비우고나서 자기 생각은 비우고 와가지고“아 나는 부처님한테 관심이 좀 있는데 무슨 공부를 어떻게 뭘 공부를 해야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할 수가 있느냐?”고 이렇게 이제 물어오면은 이제 제대로 가르쳐 줄 수가 있죠.
그래서 그런 관계들은 뭐 여기서 구구히 설명할 필요없고, 여기에 이제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전부 법의 성품에 다 들어있는데, 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인데‘云何如來는’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소승법으로 우리를 제도했느냐? 따지는 거에요. 부처님한테 아주 그냥 원망을 늘어놓는 거야. 사실은 따지고보면, 이렇게 부처님한테 원망 늘어놓을 줄 알아야 되. 부처님한테 원망해. 왜 내한테는 소승법만 가지고 가르쳤느냐고, 그런 좋은 다이야몬드를 놔두고 맨날 구리나 동이나 말이야 흙덩이같은 거 우리에게 던져주느냐? 이런 뜻입니다. 사실 깨놓고 이야기하면
그러면서 하는 말이라.
是我等咎라 非世尊也로소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허물이지 세존의 허물은 아닙니다.
아까 내가 이야기했죠.“무슨 기도하면 좋습니까?”하니까 뭐 거기에 맞는 상품 던져줬지. 그게 주지스님 허물입니까? 어디, 아 와서 그런 상품 달라는데 주문한 상품 줄 수밖에 없지. 그래서 그 말이야. 이것은 我等의 咎라. 우리들의 허물이라 세존의 허물이 아닙니다.
4 所以者何 若我等 待說所因 成就阿縟多羅三藐三菩提者 必以大乘
소이자하 약아등 대설소인 성취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필이대승
而得度脫 然 我等不解方便 隨宜所設 初聞佛法 遇便信受 思惟取證
이득도탈 연 아등불해방편 수의소설 초문불법 우변신수 사유취증
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인고? 이 아주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해요. 경전은요. 논리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 까닭이 왜 그런고 하면은
若我等이 待說所因하야
만약에 우리들이 所因 원인되는 바, 깨달음의 원인, 씨앗 제대로 된 씨앗을 기다려가지고, 그러니까 지 상품 먼저 내놓을게 아니라 네가 필요로한 것을 말할 것이 아니라 기다려가지고 정말 좋은 씨앗이 되는 것을 이야기해주도록 기다려서 待說所因 참 중요한 말이여.
만약에 우리들이 기다려 본다. 待자 무엇을? 씨앗이 될 만한, 정말 부처가 될 수있는 씨앗이 될만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을 기다려서 그런 뒤에
成就阿縟多羅三藐三菩提者인댄
성취한다 말이여. 무엇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진댄 최상의 깨달음, 최상의 깨달음 꿈을 확 깨버리는 그런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면은
必以大乘으로 而得度脫이어늘
반드시 대승으로, 큰 법가지고 최상의 법 가지고서 度脫을 얻게 한다. 반드시 큰 법을 가지고서 정말 훌륭한 법을 가지고서 제도, 度脫은 제도입니다. 제도함을 얻게된다. 하거늘
然이나 我等不解方便과 隨宜所設하고
그러나 우리들은 몰랐다.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을? 方便과 隨宜所設을, 편의를 따라서 설한 것. 그러니까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그거여. 사람근기 맞춰서 하다보니까 항상 방편법문 있지도 않는 방편법문 지어내서 하는 이야기 그래서 자꾸 지어내서 하는 그런 그 이야기가 많이 생겨요. 99%는 거품이야. 그래 따지고보면 99%가 방편이야. 거기서 꿈을 깨버리면 편안해요.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안달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거요. 그런 꿈 깨버리면, 그래서 방편과 수의소설을 알지 못해서. 우리들은 그동안 방편, 부처님이 방편으로 하는구나.
그 이제 어린아이가 울면은 호랑이 한 번도 본적도 없지만은 어디서 들어온 이야기로 그것도 부모들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로“밖에 호랑이 왔다.”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 어린아이는 모르니까 不解 방편을 모르니까 그만 호랑이 온 줄 알고는 그냥 울음을 덜컥 그쳐버리잖아요. 그게 일단은 좋기는 좋은데 그게 이제 너무 지나치다보면은 그만 그것만 가지고 살림살이를 삼는 그런 경우가 불교안에 너무 많습니다. 참 그 문제에요.
방편으로 수의소설, 편의를 따라서 설한 바를 알지 못하고
初聞佛法하고 遇便信受라
처음에 부처님의 법을 듣고는 뭐 어떤 법도 부처님이 설한 것이라면 무조건‘遇便信受야’만나자마자 곧바로 믿고 받아들여. 아 호랑이 왔다 그러면 아이고 호랑이 왔는갑다고 그냥 울음 딱 그쳐버려. 그게 遇便信受여 이게. 어디가서 무슨 기도하면 된단다하면“아이고 좋구나!”하고 그냥 거기에 껌뻑 넘어가가지고, 뭐 아비라기도한다 좋단다 그러면 거기에 그만 껌벅 넘어가가지고 그것만 하고 있는거야. 그리고 그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까지 봐 버려.
遇便信受라는 게 그것입니다. 만나자마자 곧바로 믿고 받아들여버려. 부처님이 말했으니까, 큰스님이 말했으니까 또 큰스님이 말했으니까 까지는 괜찮은데 스님이 말했으니까. 스님이 말하면 무조건 법인 줄 아는거야. 그 참 큰일이요 그게. 제대로 불교를 아는 스님도 있지만은 모르는 스님이 태반이니까 그래 또 무슨 꿍꿍이 속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전혀 신도들은 모르는 거야. 그런데 그만 스님이야 하는 그것 때문에 가짜스님인지, 무슨 뭐 땡땡이중인지 아니면은 이제 막 중 됐는지, 며칠 되지도 않는 스님인지, 아니면 하다못해 군대 기피할려고 찾아와서 임시로 중이 됬는지 전혀 모르고 스님복장만 딱 입고 있으면 그만 遇便信受야.
만나자마자 바로 그말하면“아 그 스님이 말했다고”내한테 와서 하소연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라.“아 그 스님이 이야기했다고, 그 스님이 이야기했다고”내가 다니는 절에서 스님이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그래서 그것만 믿고, 어제도 어떤 청년이 왔는데 자기가 직접 들은 이야기도 아니야. 거기에 있는 스님이, 그 절에 있는 스님이 어떤 스님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전해주드라고 그 한 번 건너뛴 말까지도 그만 遇便信受하더라고“아 그 스님이 그렇다는데요. 그 스님이 그렇다는데요.”지금 내가 바로 그 절하고 스님 이름을 들먹거리면은 문제가 될 것같아서 말을안하는데, 개인적으로 알고 싶으면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지.
그래 내가 봤느냐? 그랬거든, 내가 봤느냐?“아니요. 그 스님 상좌가 그런 이야기 하대요.”그러드라구요. 그렇게 된다구요. 아 참 사람이 어리석기로 말하면 끝없이 어리석어. 끝없이 어리석어. 遇便信受 이것도 우리가 주의해야 되. 그래서
思惟取證하노이다
그것을 생각해가지고 取證 뭐 그냥 받아들여버린다. 취해서 자기것으로 삼는다 이말이여. 그런 어떤 방편을
그 전에 강원도의 어떤 젊은 청년들이 삼을 시내에 갔다 팔려고 한 짐씩 짊어지고 시내를 가는데, 가는데 큰 고개가 하나 있어. 그래 고개넘어 재 넘어서 이제 짊어지고 가는 길에 구리가 한 무더기 있어. 그래서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은 그 삼을 얼른 버려버리고 구리를 짊어졌어. 그 한 사람은 가만히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아 그동안 뭐 구리가 값은 더 나가겠지만은 그동안 짊어지고 온 공이 아까운거야.’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높은 언덕을 올라와가지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시내에 갔다 팔 판인데, 그 공이 아까와가지고 그만 그대로 삼을 지고 가는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이제 은을 만나도 그대로 삼을 지고가고, 구리로 바꿔 진 사람은 은 만나면 얼른 버려버리고 은을 짊어지고 그 다음에 또 가다보니 금이 한 무더기 있는데, 은을 짊어진 사람은 은을 얼른 버려버리고 금을 한 짐 짊어졌어. 근데 삼을 짊어지고 간 사람은 의리때문인지 뭐 하여튼 뭐때문인지 계속 삼을 짊어지고 가는거야.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담마기금(擔麻棄金)이라.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렸다.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리는 경우다.
경전에서 이걸 그렇게 부처님이 중생들의 어떤 집착과 어리석음 그것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담마기금이다. 그리고‘전공이가석(前功而可惜)이라’그래요. 앞에 지고 온 그 공이 아깝다. 그런 사람은 발전없습니다. 발전없어요. 그러니까 얼른얼른 떠날 줄 알고 버릴 줄 알고 가뿐가뿐하게 옮길 줄 알아야 되.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 모든 분야에 그래서 담마기금이니, 전공이가석하다 하는 그런 말 아주 그 불교공부하는데, 불교공부의 차원이 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 방편이 있다보니까 이제 그렇게 되는 거에요.
여기서는 이제 우리 일상생활에 이끌어서 이야기할라니 그렇지만은, 내용인즉슨 삼승과 일승의 문제. 저 앞에서 물론 있었습니다만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방편설 또 성문, 연각, 보살이라고하는 그 삼승을 이렇게 받아들여서 있었다. 그래서 말하자면은 같이 법성에 들어있었지만은 소승법으로써 우리를 제도했습니까? 하지만은 그것은 우리의 허물이요. 세존의 허물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원인을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려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해야 되는데 그랬으니까 반드시 더 대승으로써 대승법으로써 우리를 제도했겠지만은, 우리는 方便을 이해못해서 隨宜所說을 이해못해서 그래서 그만 방편이야기 하는 것에 그만 덥썩 받아들여져서‘遇便信受야’덥썩 받아들여가지고는 고걸 그냥 붙들고 수 십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 불교인들, 어디서 그 옆집 사람한테 배웠거나 친구에게 들었거나‘아~ 이게 좋은 일이란다.’하면은 그걸 가지고 수 십년 발전도 없이 그렇게 불교를 믿어온 사람들이 많아요. 한 번도 제대로 된 불교에 눈 뜨지 못하고 그냥 일생을 마쳐버리는 사람들도 또 있어.
참 부처님이 이렇게 많은 그 방편을 개설해놓는데, 그 방편은 우리가 떠나야 할 방편이지 거기에 목숨을, 목을 매라고 하는 방편은 결코 아닙니다.
5 世尊 我從昔來 終日竟夜 每自剋責 而今從佛 聞所未聞未曾有法
세존 아종석래 종일경야 매자극책 이금종불 문소미문미증유법
斷諸疑悔 身意泰然 快得安穩 今日乃知眞是佛子 從佛口生
단제의회 신의태연 쾌득안은 금일내지진시불자 종불구생
從法化生 得佛法分
종법화생 득불법분
世尊하 我從昔來로 終日竟夜토록 每自剋責이더니
세존이시여! 우리가 옛날부터 하루가 다하고 밤이 끝나도록 매양 스스로 책망했다. 剋責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심히 책망했더니
而今從佛하사 聞所未聞未曾有法하사옵고
지금 부처님으로부터, 앞에서「방편품」에 있었던 최상승의 법문입니다. 정말 밤낮으로 참 여기에 몸담고 이렇게 살아오면서 대승법을 배우지는 못하고 항상 소승법으로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걸 가지고 항상 책망했어. 자책했어.
그렇게 살아오다가 오늘 이『법화경』설하는 법회에 와서 지금의 부처님에게 들었다. 무엇을? 未聞 듣지 못했던 거 未曾有 그동안 있지 않았던 거, 일찍이 있지 않던 그런 법을 듣고 그리고는
斷諸疑悔커는
모든 의문과 뉘우침을 다 끊어버렸어. 속이 시원하게 그래서 뭐라고?
身意泰然이라
내가 편안함이라고 했죠.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서, 태연해져서‘아! 이제 살았다.’큰 고개를 하나 넘어가가지고 이제 정말 편안해진 그런 그 상태 또는 꿈에서 아주 악몽으로 시달리다가 꿈이 깨가지고 아주 편안해진 상태 그래 身意泰然이야. 참 좋은 말이죠. 身意泰然해서
快得安穩이야
이건 아주 유쾌하게 편안함을 安穩함을 얻어. 身意泰然 快得安穩 가뿐하게 快得安穩이라. 가뿐하게 편안함을 얻었다. 안온함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중요한 말입니다.
今日乃知眞是佛子라
금일에사 참으로 이 진짜 불자라고 하는 것을 이제사 알았다. 그러면은『법화경』공부 못한 사람들은 불자 아니에요. 불자라도 가짜불자야. 요 보십시오. 사리불이 여기와서‘아 내가 진짜 불자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 이건 내 말이 아니에요.『법화경』말이지.
『법화경』공부 안하면은 제대로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불자라고 할 수도 없어요. 여기와서 비로소 사리불도 진짜 불자가 됐어. 그 전에도 불자는 불자지 그렇지만은 이제 불자도 불자 나름이지. 어느정도 불자냐? 무게가 몇 근 나가는 불자냐? 그게 그 사람의 관심사와 정신수준과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신심과 이런데 따라서 이제 불자의 차원도 천차만별입니다. 쉽게 한 100단계로 나눌 수 있어. 100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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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我等(아등)도 同入法性(동입법성)이라...우리도 다 법의 성품, 진리의 성품에 다 해당된다.(유정,무정 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투명한 영혼, 투명한 안목...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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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等이 待說所因하야 成就阿縟多羅三藐三菩提者인댄 必以大乘으로 而得度脫이어늘... 우리들이 깨달음의 원인되는 바를 이야기 해 주도록 기다려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면은 반드시 큰 법을 가지고서 제도함을 얻게 된다 하거늘...화풍정 님! 수고하셨습니다.._()()()_
今日 乃知 眞是佛子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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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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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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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써 잘 알아듣느니라...........
꿈을 깨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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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
인터넷을 통해서,영상 보다 녹취를 통해서 스님 가르침을 가슴에 더 절실히 새기는 분들이 저 말고도 많은 것 같아 반갑습니다
眞是佛子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2번째 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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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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