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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건축
17.1 정복 이전의 메소아메리카1) 건축
정복 이전의 중남미 건축은 주로 종교적이며, 군사적인 의미를 띠면서, 주민들의 종교정신과 전쟁에 대한 문제와 관련지어졌다. 종교적 성향을 지닌 건축은 신전과, 피라미드, 예배중심지로, 시민적 성격의 건축은 주로 궁전으로 구체화되었다. 테오티우아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복 이전의 건축은 규모로 특징지어 진다. 즉 상징적이고, 집합적이며, 또한 총체적이고, 고도로 장식된 예술적 표현이었다. 아스테카와 마야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건축은 최고 수준에 달해 있었다.
스페인 정복 이전에 있었던 멕시코의 톨테카족과 아스테카족이 건설한 고전적이고 거대한 건축유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신성한 도시였던 테오티우아칸은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의 장엄함과 켓찰코아틀(Quetzalcóatl: 깃털로 된 뱀의 모습을 한 신) 신전의 조화로운 선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스페인 사람들은 1325년에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을 건립했던 아스테카족의 유적 위에 현재의 멕시코시티를 세웠다. 아스테카 건물의 장대함에 놀란, 스페인의 연대기 작가들은 스페인의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스테카의 수도를 유럽의 도시보다 더 우월하게 서술하였다. 테노치티틀란은 꼭대기 부분이 평면인 거대한 피라미드와 연결되어 펼쳐져 있던 신전과 궁궐, 광장, 공원, 대로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에 다른 고대문명처럼 독특한 성격을 지닌 마야 건축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즉 역사상, 두 시기로 구분되는 시간 동안에 지역적으로 판이하게 발전하였다. 고전기때 최상의 구조를 지닌 건물은 코판 건설된, 주요한 천문관측 및 연구소이다. 그곳에는 정상부분이 평평하고 가장 완전한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테오티우아칸의 태양피라미드 보다 20배나 작은 마야의 피라미드는 당시의 건축가들이 양적인 면보다 질적인 면을 강조했음을 외견상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고전기때 아크로폴리스(Acrópolis)신전과 유사한 제단을 가진 종교 중심지와, 부조로 조각한 둥글거나 네모난 기둥으로 형성된 열주(列柱)가 건설되었다.
마야의 후기에 속하는 유적들은 최상의 형태로, 유카탄(Yucatán)의 동쪽 해안과, 코수멜, 무헤레스2)(Mujeres)섬 주변에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스페인의 연대기 작가들이 마야족들의 생활방식을 제대로 서술하도록 도와주었다. 도시의 중심지에는 신전과 아름다운 광장이 있고, 그 주변에는 귀족과 사제들의 저택이 만들어 졌으며, 그 바깥에는 주민들의 집이 있었다. 유카탄의 북동쪽에 있는 치첸이차3)(Chichén Itzá)는 후기 고전기의 가장 위압적인 도시였다. 그곳에는 전형적인 마야 양식과, 톨테카 양식이 다분히 남아 있는 건축양식으로 상이한 두 양식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톨테카족의 영향으로 신전은 깃털 달린 뱀의 모습을 지닌 기둥으로 꾸며져 있다. 지금까지 일곱 개의 피라미드와 하나의 거대한 성곽이 발견되었다. 종교회의와 전쟁에 관한 회의를 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열주는, 아마도 시장으로 사용되었을 거대한 광장 주변에 수천 개의 기둥을 지니고 있다.
마야인들은, 특히 톨테카의 영향을 받은 시기에 원형식 건물은 축조할 줄 알았으나 반원형은 모르고 있었다. 마야제국 말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바로크와 유사한 양식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마야문명은 급작스럽게 파괴되었고, 그 원인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건축물들은 식물들의 무성함으로 뒤덮어 버렸다.
17.2 정복 이전의 남아메리카 건축
정복 이전, 남아메리카 건축물의 찬란함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수수한 선으로 이루어진 종교와 군사, 시민적인 구조로 표현하려는 심미적인 의도를 지닌 페루문명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공간과 시간, 예술적 상상력이 양식을 결정하였다.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해안지역의 건물은 주로 벽돌로, 산악지역은 돌, 셀바지역은 나무로 만들어 졌다. 주민들의 거주지는 오늘날 그들의 후손과 비슷하게, 네모 형태를 이루며, 해안이나 내륙지방은 벽돌로, 또한 가끔 내륙지방은 돌로 만들어 졌다. 조그마하고 나지막한 대문을 가진, 주로 일층으로 된 집들은 창문이나 굴뚝이 별로 없었다. 집의 편의시설은 당시의 유럽농부의 집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인디오 가족들은 자식들의 결혼으로 가족 규모가 커지면, 네모로 된 안마당을 중심으로 집을 지어 무리를 이루며 살았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무리를 지우고 있는 건물들 주변에 벽돌이나 돌로 된 성벽을 둘러싸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촌락을 형성했다.
건축의 장대함은 대중들의 건물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이 건물들은 1) 잉카이전 문화에 있었던 해안지방의 양식 2) 잉카이전 문화에 있었던 내륙지방의 양식 3) 잉카 건축양식 등으로 주로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양식에서 가장 귀중한 건축상의 보물들은 페루의 중앙과 북부 해안지역에 퍼졌던 치무문명에서 비롯된다. 주요한 건축들은 당시의 수도였던 찬찬4)(Chan Chan)의 유적과 트루히요(Trujillo)근처에 있는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 리마주변의 파라몽가(Paramonga)에 있는 거대한 요새 등이다.
찬찬은 위엄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길이 19Km, 폭 1.6Km로 된 넓은 도시였다. 그 안에는 윗면이 평평한 피라미드와 궁전, 공원, 시장, 병영, 주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건물들은 여러 성벽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서있는 성벽은, 높은 부조로, 당시의 직물과 유사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피라미드에 있는 성벽과 방호물은 거대한 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벽들은 회반죽으로 예쁘게 칠해져서 흰색을 띠고 있고, 또한 그때의 토기장식과 유사하게 바다새와 맹수들의 모습으로 꾸며지기도 했다. 여덟 개의 요새는 바다에서 안데스산맥까지 펼쳐져 있었다.
페루 중앙지역에 전개되었던, 다른 인디오 해안 동맹국은 파차카막5)(Pachacámac)을 태양에 대한 피라미드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잉카이전의 페루 북부 내륙지방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빈 데 우안타르 문명이 있었다. 그들의 건축은, 돌로 된 윗면이 평평한 피라미드가 역시 유명하였다. 현재 볼리비아의 영토에 있고, 티티카카호수의 이웃지방인, 남쪽지역에는 티아우아나코6)(Tiahuanaco) 문명이 꽃을 피웠다. 이들은 태양의 신전(Templo del Sol)과, 거대한 하나의 돌을 송두리째 조각한, 유명한 태양의 문(Puerta del Sol)을 남겼다. 직물을 발달시킨 고대 페루인들은 주로 장식 면에 치중하여, 장엄한 자연은 부피와 형식에 의미를 두었다.
잉카시대에, 각 도시는 적어도 하나의 신전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화려한 신전들 중의 하나인, 쿠스코의 중앙광장에 있던 코리칸차(Coricancha)신전은 정복자들에 의해 약탈당한 뒤 파괴되었다. 이 신전의 주춧돌은 16세기에 건립된 산토도밍고 수도원의 토대로 사용되었다.
쿠스코와 그 주변지역은 잉카시대에 있었던 최상의 건물들을 보여준다. 쿠스코의 건물 외에,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삭사우아만과 오얀타이탐보7)(Ollantaytambo), 마추피추 등에도 많은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거대한 복합체를 이루는 이 지역의 건물들은 아무 접착제도 없이 거대한 다변형의 돌들로 만들어져 있다. 거석들은 신비롭게도 산으로 운반되었다. 15Km에서 35Km사이에 채석장이 하나씩 있었다. 아메리카대륙에 있는 모든 건축물 중에서 삭사우아만의 건물과 쿠스코의 방호물, 포위될 경우 주민들이 대피하기 위한 요새화된 성벽만큼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없다. 길이 8m, 두께 3.6m의 돌은 그 무게가 200톤이나 된다. 높은 테라스에는 건물과 탑, 그리고 비상시기를 위한 저장소가 들어섰다.
불행하게도, 스페인 사람들은 삭사우아만에 있던 건물들의 높은 부분을 파괴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너무 무거워 이동하기가 곤란했던 받침들만 남기고, 작은 돌은 모두, 쿠스코 시 건립에 이용하였다.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돌들은 너무나 완벽하게 붙어있어, 칼날조차도 들어가지 않는다.
17.3 식민시대의 건축양식
당시에 지배적이던 건축양식을 직접 가져온 이베로인들은, 신대륙에 반도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결합시켰다. 처음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설립된 건물들은 스페인에서 수용 및 발전되었던 양식인 후기고딕양식, 무데하르(Mudéjar: 스페인 치하에서 개종하지 않은 회교도)양식, 이사벨 양식, 바로크 양식, 플라테레스코(Plateresco) 양식, 또는 이들의 혼합양식을 따랐다. 무데하르는 정치적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신하지만, 자신들의 법과 관습, 종교, 기호를 지키면서 그리스도교도들의 영토에 살았던 무술만(Musulman: 회교도)인들이다. 무데하르 예술은 12세기에, 스페인에서 아랍양식에 로마와 고딕양식이 섞여서 태어났다. 무데하르 건축은 말굽처럼 생긴 아랍의 반원형을 사용하지만, 끝 마무리부분은 끝이 뾰족한 홍예문같이 처리하는, 단순화된 고딕의 구조를 가진다. 카톨릭 국왕인 이사벨 여왕의 통치기간 중에 발달했던 이사벨(Isabelino)양식은 고딕과 무데하르식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스페인의 초기 문예부흥기에, 장식이 너무 과도하게 되어 있어, 한번만 봐도, 은세공사(Platero)의 작업임을 상기시킬 수 있는, 화려한 고딕양식과 아라비아식 당초무늬의 장식이 이탈리아 예술에 가미되는 양식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플라테레스코 양식이라고 이름 붙였다.
고딕식의 영향은 16세기 건축물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대륙에서 최초로 건립된 가장 큰 교회인 산토도밍고 대성당(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우리들은 이 요소들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실제로, 도미니카 공화국의 이 성당은 고딕과 로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양식이 모두 혼합되어 있으나, 다양한 색채를 지니며, 끝이 뾰족한 홍예문과 같은 창문과, 아치, 둥근 천장 등을 지탱하는 기둥의 구도와 배열이 독특하다. 멕시코에 있는 산 아구스틴 아콜만(San Agustín Acolman: 1539-1560)신전은 플라테레스코 양식의 정문과 르네상스식 기둥, 고딕식 홍예문 틀로 되어 있다.
16세기에는 또한 이사벨 양식과 에레라 양식이 전파되었다. 에레라 양식은 에스코리알8)(Escorial)의 유명한 건축가인, 환 데 에레라9)(Juan de Herrera: 1536-1597)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 특징은 엄격하면서도 수수하다. 그 이후에 들어와 아메리카에 뿌리박게 되는 바로크 양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장식을 많이 하는 정복 이전의 인디오 기호는 아메리카에서의 바로크 양식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인디오의 풍부한 장식 전통은 바로크 예술가들의 장식에 대한 열망과 결합하였다. 부드러운 돌이 풍부하여 아메리카 바로크 양식의 전파는 용이하였다. 군사적인 정복으로 부유해진 관청과 교회는 정신적인 정복을 위한 거대한 사업을 벌이기 위해 예술을 후원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정복 이전의 찬란했던 문명을 인정하여,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에는 관청으로부터 위촉받은 예술가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이 계속되었다.
건물을 설립하기 위한 설계도는 처음에는 백인 예술가에 의해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메스티조와 인디오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정복에 의해 경련을 일으키고 외상을 입은 자신들의 영혼을 작품에 넣었다. 그들의 비통함과 적대감, 반항심은 미묘하게 감추어져, 건축에 아로새겨져 있다. 백인들이 방심하거나, 그것을 허락하였는지 모르는 일이나, 인디오 예술가들은 건물의 정면에 자신들의 신과, 동․식물을 포함시켰다.
때때로 인디오들은 정복 이전의 테크닉을 사용하였다. 그 예는, 교회현관을 지탱하기 위해 계단으로 둘러싼 제방과, 건물의 모서리를 강화하기 위해, 유카탄의 피라미드를 연상하게 하는, 수평과 수직으로 된 대들보에서 볼 수 있다. 전자의 예는 멕시코의 얀우이틀란(Yanhuitlán), 후자의 예는 아토닐코 데 툴라(Atonilco de Tula)에 있다. 그때부터 스페인의 전통적인 문양에, 푸마(Puma), 원숭이, 콜리브리(Colibrí: 참새의 일종), 해오라기, 앵무새, 들국화, 옥수수 등이, 그리고 나중에는, 마닐라로부터 범선을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중국풍의 장식요소들이 나타났다.
스페인 퇴폐주의10)(Decadentismo)의 한 표현방식으로, 반도와 그리고 나중에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 제국에 전파된, 장식을 극도로 강조한 추리게라(Churriguerra)양식이 나타난다. 이 양식은 많은 기교를 사용하고 복잡하여 바로크를 능가한다. 이 이름은 살라망카 출신의 조각가이며, 건축가인 호세 추리게라11)(José Churriguerra: 1665-1723)가 소개하고 전파하여, 그 이름을 딴 것이다.
18세기에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부르봉왕가가 지배하면서 신고전주의가 유행했다. 건축에 나타난 신고전주의는 고전기의 오래된 건물에 국한된다. 신고전주의의 사상은 합리주의와 규율, 선의 완전함을 옹호하고, 바로크의 개인주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극도의 장식을 거부한다. 신대륙에 들어온 신고전주의는 형식상으로 더 완벽을 기했다. 이전의 모든 양식처럼, 신고전주의도 압도하는 분위기에 의해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4 인디오 장식으로 된 종교건축
식민기간에 가장 오래되고 인상적인 건축은 종교와 관련된 것이다. 종교관련 건축물은 열린 예배당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건물들은 대규모의 개종을 위해 설립되었다. 이 예배당은, 정복을 위한 전쟁이 일단락 되자, 상대적으로 많은 인디오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 멕시코와 페루의 농부들을 대상으로 한 교리교육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이후에 열린 교회에 대한 부속 건물로 수도원과 요새가 세워졌다. 이 건물들의 입구는 스페인과 모로족(Moro: 국토 수복 후에 스페인에 그대로 남아 개종했던 아랍인), 인디오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천사들은 인디오 얼굴을 하고 있고, 수도사들의 끈은 끝이 뱀의 머리로 되어 있으며, 여주(Chirimoyo)의 열매와 투나(Tuna: 선인장의 열매)등의 아메리카 과일과, 선인장(Cacto)과 칸투타(Kantuta), 잉카제국이 원산지인 꽃 등의 신대륙 식물들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건물들의 정문은 인디오적인 요소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건축물은 혼합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8세기에 콜롬비아의 툰하(Tunja)에 건축된 산토도밍고 교회의 로사리오 예배당은 인디오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어, 제단의 아랫부분에 칩차족들의 장식을 이어받아, 태양처럼 이상화된 신의 머리가 나타나 있다. 페루의 남쪽에는 동물들 중에서 야마, 비쿠냐, 알파카 등의 낙타와 유사한 동물과 금강앵무새, 앵무새, 푸마 등이 많이 발견된다. 이 지역에 있는 혼합된 양식으로서의 걸작품은 아레키파(Arequipa)에 있는 콤파니아(Compañía)성당(1698)이다. 이 건물은 이층으로, 태양과 달의 이미지와 포도넝쿨로 장식되어 있다. 볼리비아에 있는 종교건축물들은 잉카의 운치를 잔뜩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기간 동안에 설립된 포토시(Potosí)에 있는 32개의 성당과 10개의 수도원은 양식 면에서, 안데스 지역의 인디오적인 바로크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안데스 지역의 인디오들에 의해 변형된 아메리카의 바로크는 건축설계도 보다는 장식에 더 중점을 두었다.
17.5 키토의 성당
키토시에 설립된 가장 주요한 건축물은, 우아이나 카팍(Huayna Cápac)의 광대한 소유지에 세워진,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 1537-1580)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31,000평방 미터의 면적에, 뜰이 딸린 두 채의 사제를 위한 집과, 정원, 과수원, 산프란시스코 교회, 두 개의 커다란 예배당을 지닌, 여러 건물로 된 복합 건축물이다. 양식도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이 수도원의 정문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후기에 있었던 문양으로 장식되고, 종탑은 바로크 양식, 아아치는 무술만족들의 회교사원을 연상하게 한다. 수도원의 주요 회랑은 중세양식으로, 넓다란 뜰 안쪽에 세워져 있다. 회랑의 양쪽에는 두 개의 진열실이 겹쳐져 있다. 아래쪽 진열실은 키토 건축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가운데 부분이 불룩한 기둥과, 모로인 방식으로 장식한 벽돌로 아아치형을 이루는 도리아(Doride: 고대 그리스의 한 국가)식 기둥 위에 있다. 뜰은 페루 부왕청 건물의 모델이 되었다. 이 수도원은 “안데스 지역의 에스코리알”이라고 불린다. 이 수도원을 건립하기 전에 환 데 에레라는 마드리드 근처에 이미 한 건물을 짓고 있었으나, 이 유명한 건축가가 키토의 수도원 마무리시기에 손을 대었다고 말한다. 이 건축물은 17세기 중반에 완성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란시스코파의 수도원이 되었다. 거대한 이 종교건축은 주로 벽돌로 만들어졌다. 돌로 만들어진 곳은 교회의 정문과 앞 복도, 원기둥, 수도원 뜰에 있는 진열실 주석(柱石)과 각주(角柱)등이다. 교회의 각주와 둥근 천장, 지붕은 조각된 후에 색칠을 하고 도금을 한 나무로 덮여있다. 이와 같은 독창적인 건축기술은 나중에 이베로 아메리카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로 전파되었다. 산프란시스코의 앞 복도를 지을 때, 건축가들은 예전의 그리스도교 대교회당이 지니고 있었으나 이후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도 건축가들이 버렸던 요소들을 부활시켰다. 이 건물에 소요된 자금이 상당하여,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건물에 투자한 돈의 액수를 들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왕궁에서 산 프란시스코의 종탑을 보기 위해 왕궁을 더 높이 쌓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식민지시대의 키토시에 있었던 또 다른 보석은 콤파니아 데 헤수스(Compañía de Jesús)교회이다. 프란시스코파의 건물과 동등한 수준을 지닌 이 교회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들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건물은 예수파소속 신부들이 선호했던 이탈리아식 바로크 양식으로 1595년에 건축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원래의 건물은 파괴되고 현존하는 건물은 로마의 산 이그나시오(San Ignacio)교회를 모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무르시아(Murcia: 스페인의 한 도시)에 있는 대성당을 더 닮았다. 이 교회에 있는 세 개의 복도는 로마 카톨릭의 십자가를 이루고 있다. 측면 복도에는 여섯 개의 예배당이 있다. 벽과 내부 각주는 돌로 되어있고, 측면 복도의 높다란 둥근 천장은 정문의 측면에 위치한 여섯 개의 아름다운 꼬인 기둥을 지니고 있고, 로마와 코린트 양식으로 된 두 개의 각주는 옆문의 측면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크식의 정문 장식은 아메리카적인 요소가 없이 순전히 유럽식으로 되어 있다. 내부장식은 흰색과 붉은 색으로 한결 격을 올린, 금으로 되어있다.
에콰도르의 건물 중에서 세 번째 보석은 18세기 초반에 설립된 라 메르세드(La Merced: 은혜라는 의미)교회이다. 키토에서 가장 큰 종탑의 종은 메르세드 교단(1318년 바르셀로나에서 조직된 승병단, 현재는 전도 및 교육 목적을 지님)의 동정녀 마리아를 위한 종으로 불리고 있다. 1773년의 지진으로 프란시스코와 예수파의 건물들은 손상을 입었으나, 강하고 두꺼운 벽 때문에 라 메르세드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 키토의 다른 건물은 대성당(Catedral)으로, 이 건물은 1550년 이전에 건립되어, 가장 오래된 건축물들 중의 하나이다. 성기실(聖器室)의 훌륭한 문은 콤파니아 교회의 정문과 유사한 장식을 하고 있어, 동일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뜰의 상부는 중국식으로 꾸며져 있다.
17.6 멕시코와 15,000개의 교회
식민지 기간 동안에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에 세워진 70,000여 개의 교회 중에서 20%를 상회하는, 약 15,000개의 교회가 멕시코에 설립되었다. 신대륙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건축유산을 지닌 이 지역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양식들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 나중에는 서로 조화롭게 결합되고 말았다. 이들 양식들 중에서 가장 세력을 떨친 것은 바로크 양식이다.
멕시코의 식민시대 종교건축은 주로 산뜻한 색깔의 타일로 붙여져 있고, 아래쪽이 팔각형인 원형지붕을 지니고 있다. 멕시코시티와 푸에블라의 대성당은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에서 가장 소중한 두 건축물이다. 전자는 완성시키는데 83년(1573-1656)이 소요되었고, 후자는 75년(1575-1649)이 걸렸다. 세계에 있는 바로크 건축물의 여덟 개 걸작품 중에서 네 개가 멕시코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수도에 있는 대성당의 내진(內陣)과 테포트소틀란(Tepotzotlán)에 있는 예수회(1606-1762)소속의 학교, 케레타로(Querétaro)에 있는 산타로사(Santa Rosa)수도원, 타스코(Taxco)의 산타 프리스카(Santa Prisca: 1751-1758)교회가 그것이다.
17.7 군사 건축
스페인 사람이 아메리카에 설립한 군사 목적의 건축물들은 사람과 시간의 응징에 가장 잘 견딘 작품들이었다. 안티야스 제도를 비롯한 스페인의 모든 식민제국에는, 군 요새가 구축되었다. 특히 안티야스 제도의 해안지역은 스페인과 적대 관계에 있던 국가들의 해군과 해적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거의 모든 항구는 커다란 규모와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아직까지도 찬사를 받는 당당한 요새와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산토도밍고 헌탑(Torre del Homenaje de Santo Domingo)은 신대륙에서의 첫 번째 서양교회인 산 니콜라스 데 바리(San Nicolás de Bari: 1503-1508)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한 해인 1503년에 완성되었다. 몇 년 후, 아주 어려운 작업 끝에, 산토도밍고에 디에고 콜론(Diego Colón)과 그의 부인이 거주하기 위해 건립한 콜론성(Alcázar de Colón: 제독의 집)이 완성되었다. 이 성은 두케 데 알바12)(Duque de Alba)집안 소유였다. 카리브해에 있는 규모가 큰 섬에, 스페인 사람들은 그곳으로 피난하는 선박과 항구를 보호하기 위하여 위압적인 군사건물을 세웠다. 예를 들어, 엘 모로(El Morro: 바윗덩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보통 불리어지는 유명한 세 왕의 성(Castillo de los Tres Reyes)과, 얼마 전까지도 군사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라 카바냐(La Cabaña: 오두막의 의미)요새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산환만을 보호하기 위해 산 펠리페 데 모로(San Felipe del Moro)성을 세웠다. 스페인에 대한 적군의 공격에 역시 노출된 카리브해에서 가장 중요한 남아메리카 항구인 카르타헤나는 굉장한 규모로 요새화 되었다. 방어벽과 방어탑은 식민지시대의 앞선 토목기술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성벽은 너무나 넓어서 고가도로로 이용할 수 있다.
그 외의 스페인 식민제국에도 인상적인 군사건물이 많이 설립되었다. 대부분의 건축들은 페루의 카야오항구를 지키는 레알 펠리페(Real Felilpe)성처럼, 주로 항구를 방어하였다. 이 성은 난공불락이어서 독립 전쟁때, 스페인 장군인 호세 라몬 로딜13)(José Ramón Rodil: 1789-1853)은 이 성에서 포위된 채로 2년 동안 버틸 수가 있었다.
17.8 시민 건축
식민시대 때 시민건축은 종교나 군사목적의 건물에 비해 그 중요성이나 규모 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아직도 그 건축물들은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들 건축물 중에서 멕시코시티와 리마에 있던 부왕의 궁전은 아직도 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멕시코시티와 카르타헤나, 보고타에 있었던 종교재판소도 소중한 시민건축물이다. 페루와 멕시코의 수도에는 식민시대의 주요한 시민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의 리마 건축물은 무데하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대표적인 건물은 토레 타글레(Torre Tagle)궁전(1753)으로, 오늘날에는 페루의 외무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과테말라 관구의 두 번째 수도인 안티구아(Antigua)시에 있던 거대한 시민 건축물은 18세기의 지진으로 파손되어 수도를 현재의 과테말라시티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안티구아시는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의 멕시코시티와, 리마, 키토를 이어 네 번째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브라질의 식민시대 건축물은 스페인어권 아메리카보다 그 독창성이 떨어진다. 건물들은 언급할 만한 특징이 없이 포르투갈의 건축물을 모방하였다. 바로크 양식으로 된 주요 건축물은 바이아(Bahía)와 레시페 데 페르남부코(Recife de Pernambuco), 리오 데 자네이로, 미나스 제라이스에 있었던 것들이다.
17.9 이베로아메리카에서의 건축상의 신고전주의14)(Neoclasicismo)
멕시코시티에 산 카를로스 학교(Academia de San Carlos)가 설립됨은 복고풍의 로마와 르네상스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에서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승리를 지적한다.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에서 신고전주의 양식도 마누엘 톨사15)(Manuel Tolsa: 1757-1818)가 멕시코시티에 설립한 유명한 건물인 광업학교(Escuela de Minería)처럼, 보석같은 건축물을 남겼다.
이 양식의 역사가 아주 짧지만, 이 양식에도 주요한 건축가들이 있다. 이들 중에서 언급할 만한 자는 프란시스코 에두아르도 데 트레스게라스16)(Francisco Eduardo de Tresguerras: 1759-1833; 멕시코)로, 그는 셀라야(Celaya)에 있는 카르멘 교회(Iglesia del Carmen)건물을 위시하여, 구아나후아토(Guanajuato)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도 주요한 신고전주의 건물이 많이 설립되었다. 과테말라시티(1785)와 보고타(1809-1811) 대성당과, 그리스의 신전을 모방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성당 정문이 그것들이다. 페루의 리마에서, 마티아스 마에스트로(Matías Maestro)는 대성당의 제단 천장과 엘 밀라그로(El Milagro: 기적이라는 의미)교회의 내부, 라 메르세드 교회의 제단을 만들었다. 칠레의 산티아고에서는 이탈리아 건축가인 호아킨 토에스카17)(Joaquín Toesca: 1745-1799)가 여러 건축물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칠레공화국의 대통령관저로 쓰이는, 모네다 궁전(Casa de la Moneda: 동전이라는 의미)은 유명하다.
브라질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은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정부의 보호아래 국립아카데미(Academia Nacional)가 설립되어, 리오 데 자네이로에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이리하여 오늘날 이 도시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신고전주의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유명한 건축물은 조앙(João) 6세의 궁전과, 국립도서관, 상 조아깅(São Joaquin)신학교, 국립박물관, 무역관(Palacio del Comercio), 식물원(Jardín Botánico), 예술학교(Academia de Bellas Artes)의 정문 등이다.
17.10 19세기 말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향
19세기 말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식은 당시의 스페인어권 아메리카의 건축물에 영향을 끼쳤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레포르마 거리(Paseo de la Reforma)는 강한 영향을 나타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보고타, 카라카스,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은 이러한 영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대통령궁인 장미궁(La Casa Rosada)은 벨기에의 영향을 받았다.
리마도 역시 신고전주의 시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요소를 지닌 많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이 건축물들은 볼로그네시(Bolognesi)광장과, 고전주의식 기둥으로 옆문을 낸 여러 은행의 정문, 콜론거리(Paseo Colón)의 주택 등이다.
쿠바에서의 신고전주의는 19세기 초반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양식은 다른 양식과 마찬가지로 다소 늦게 도착하였다. 이 양식의 절정은 1826년 이후의 식민시기에 아바나의 엘세로(El Cerro: 언덕이라는 의미)구역을 개발할 때 일어났다. 쿠바의 수도는 신고전주의 징후 아래에서 확장되고, 현대화되었다. 새로운 양식으로 된 대표적인 예는 사호니아18)(Sajonia)의 여왕인 도냐 아말리아(Doña Amalia)의 생일을 기념하여, 1827년에 만든 템플레테(Templete: 작은 교회라는 의미)이다. 엘세로의 저택들은 이탈리아의 별장을 모방한 것이다. 스페인과 쿠바의 접촉으로, 이탈리아보다는 스페인의 기호에 더 잘 맞는 손잡이와 격자창을 쇠로 주조하고 두드려서 만들었다. 기와지붕이 사라지면서, 나무대들보와 진흙 블록으로 된 평평한 지붕과 내부의 천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저택들은 마룻바닥과 계단, 분수, 조상(彫像)에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면서 예쁘게 꾸며졌다. 사적이거나 공적인 건물에 나타나는 복고풍의 신고전주의 요소는 기둥과 아치로 되거나, 단지 아치로 된 현관이다. 19세기 말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향으로 이미 수입된 유럽양식을 어떻게 열대지방에 적용시키느냐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17.11 20세기 건축
20세기에 들어와 신식민주의 양식은 리마와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과테말라시티 등의 도시에서 우세를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민족주의 건축물은 멕시코시티의 법원(Palacio de Justicia)과 과테말라시티의 정부종합청사(Palacio Nacional), 리마의 대주교 회관(Palacio del Arzobispo: 1924년 완성)과 대통령궁(1938년 완성), 시청건물 등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초기에는 가장 인기가 있었으나, 처음에는 브라질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승리를 거두고 다음에는 베네수엘라로 전파되어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진, 혁신적이고 기능적이며 초현대적인 양식에게 차츰차츰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브라질은 1925년에서 1950년경 사이에, 건축상의 진정한 개혁을 경험했다. 예를 들어, 순수주의 양식으로 유명한 플라비오 데 카르발로(Flavio de Carvalho)는 이 양식으로 정부청사(Palacio de Gobierno: 1927)와 시멘트로 된 자기 집을 지었다. 리오 데 자네이로에 교육부 건물(1937)을 짓기 위한 설계도가 준비되었을 때, 르 코르부시에르19)(Le Corbusier: 1887-1965)는 설계사들에게 충고를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남겼다. 이들은 나중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당당한 건축물을 많이 설립하여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건축가들은 다음과 같다. 벨로 오리손테(Belo Horizonte)에 있는 산 프란시스코(San Francisco)성당을 세운 오스카 니에메예르20)(Oscar Niemeyer: 1907년 출생)는 뉴욕에 있는 국제연합 건물과 교육부 건축에 상당한 책임을 맡고 있었다. 브라질리아(Brasilia)에 초현대식 건물을 짓기 위한 설계도는 대부분 루시오 코스타21)(Lúcio Costa: 1902년 출생)에 의해 이루어졌다.
멕시코에서는 환 오고르만22)(Juan O'Gorman: 1905-1982)과 호세 비야그란 가르시아(José Villagrán García: 1901년 출생), 엔리케 델 라 모라(Enrique de la Mora: 1907년 출생)등이 유명하다. 첫 번째 인물은 현대 감각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선으로, 멕시코 국립 자치대학교(UNAM)의 중앙도서관을 설립했고, 두 번째는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여 혁신적인 양식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세 번째는 1947년에 이 나라에서 최신식 성당을 몬테레이(Monterrey)에 남겼다. 대학도시와 페드레갈(El Pedregal: 자갈밭이라는 의미를 지닌 멕시코시티의 한 구역)에 있는 거주지역은 획기적인 새로운 건물이다.
석유 덕분에, 베네수엘라도 특히 카라카스에서 건축 붐을 경험했다. 훌륭한 고가도로와, 대규모의 공공건물, 시장, 개인주택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많은 건축가들 중에 돋보이는 자는 카라카스의 대학도시를 설계한 카를로스 라울 비야누에바23)(Carlos Raúl Villanueva: 1900-1976)와, 베네수엘라의 수도에 있는 많은 고층건물을 설계한 모이세스 베나세라트(Moisés Benacerrat: 1924년 출생)가 있다.
17.12 아메리카의 독창성을 살린 페루건축
건축양식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미적 개념, 그리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건축요소에 의해 항상 좌우된다. 정복이전의 건축 전통이 강하게 살아 남아있는 중남미의 모든 지역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가지고 온 양식들은 수정되고, 인디오의 강한 장식요소를 수용해야만 했다. 특히 페루의 리마와 트루히요, 아레키파(Arequipa)에서는 식민지 양식이 무차별하게 섞였다. 교회와 단독주택은 페루해안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던 식민지 건축양식으로 건립되었다. 통치를 위한 건물들은 관리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거리와 정치의 흥망 때문에, 사제와 귀족과 마찬가지로 페루를 영구히 거주할 지역으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볼 것이 없다.
식민시기때, 리마는 조각된 옷장처럼 닫혀있고 툭 튀어나온 나무로 된 발코니와 정문들이 바싹 붙어 있어 고르지 못한 높이의 커다란 담벼락이 온 동네에 걸쳐 있는 듯하여, 무술만인의 도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색채가 칠해진, 반반한 벽의 단조로움은 5 내지 6 미터 간격으로 나타나는, 쇠로 된 칸막이를 씌운, 커다랗고 나지막하게 튀어나온 창문으로 된, 네모진 큰 현관으로 중단된다. 내부적으로 대부분의 집은 그리스․로마식의 구조와 배치를 하고 있어, 비도 오지 않고 춥지도 않은 리마의 기후는 이 양식을 스페인 보다 더 잘 수용하였다. 기본적인 벽은 벽돌로 쌓고, 보조역할을 하는 벽과, 만약에 이층의 벽이 있는 경우에는 갈대발(guincha)로 벽을 만들었다. 갈대발은 처음에는 갈대로 뼈대로 세우고 그 다음에는 진흙으로 바른 나무 벽이다. 그것은 철근 콘크리트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즉, 나무와 갈대는 철근의 기능을 하고 진흙은 콘크리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뼈대가 들어있는 진흙은 지진에 가장 잘 견디었다. 관리들의 집은 내부 벽이 직물이나 금은 무늬의 가죽으로 종종 덮여 있었다.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토레 타글레 궁전은 식민지시기에 페루에서 시민건축물로서는 최고다. 당시의 추리게라 양식을 따르지 않은 이 건축물은, 동양과 향토색 요소가 가미되어, 수정된 무데하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정문의 비대칭적인 구성은 중국의 탑과 매우 유사한 장식을 지닌 페루식 바로크 양식이다. 모로인 양식의 발코니를 지탱하는 까치발의 조각은 중국의 영향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질이 좋은 나무로 된, 문과 내부천장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고, 벽은 비단이나 중국에서 만든 금은 무늬의 가죽으로 도배를 하였다. 또한 마루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져온 떡갈나무(Oak)와 삼나무로 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의 집(La Casa de Pilatos: 그리스도가 처형될 당시, 유다를 지배했던 로마의 총독)과 교도소(la Quinta Presa), 리마의 다른 몇 개의 건물과 같이, 토레 타글레 궁전은 실제로 건축상의 특이한 예이다. 시민건축의 전형인, 일층이나 이층으로 된 집은 앞에서 서술한 윤곽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식민지시대의 리마 건축은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상당한 독창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건축자재의 부족으로, 보상법에 의해, 관리들의 집 내부만 화려하게 장식하도록 한정하였다. 교회와 모로족들의 강한 영향으로 시인인 호세 산토스 초카노는 리마의 대저택의 반은 기도실로, 반은 규방으로 꾸며져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아레키파와 트루히요의 시민건축들은 리마와 유사하다. 현관과 내부는 약간 덜 화려하지만 상부의 유리창은 격자가 튀어 나와 있다.
식민시기 동안에, 리마 인구의 10%를 차지했던 영향력 있는 수도자들은, 그 도시에 두, 세 구역마다, 교회와 예배당이나 수도원을 하나씩 짓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리마의 종교건축은 그 규모 면에서 키토와 멕시코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돌과 나무의 부족으로, 1746년 지진 이후로, 원형지붕을 지을 때 강제조항으로 되어 있던 벽돌과 갈대발의 사용은 교회건물을 상당히 수수하게 만들었지만, 대신에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하도록 했다. 도시가 조성되고 난 후에 곧 세워지고, 1609년과 1687년, 1746년, 1970년에 있었던 대지진 후에 복원된 대성당은 여러 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나 플라테레스코 양식이 지배적이다. 16세기 말에 트루히요의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베세라(Francisico Becerra)가 이 성당의 설계를 마무리지었다.
트루히요에 있는 교회도 역시, 그 정면을 보고서는 내부에 있는 제단과 설교대의 화려함을 상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대성당은 합창대석을 바로크적인 조각으로 꾸며놓고, 제단은 추리게라 양식으로 장식했다. 내부장식이 가장 잘 된 곳은 카르멘 성당이다. 가장 높은 제단의 병풍만 은으로 되어 있고, 그 이외의 모든 제단은 금으로 되어 있다. 이 성당의 내부 전체는 페루식 바로크 양식을 보존하고 있어 매우 중요성을 띠고 있다.
1820년경부터 1차 세계대전 다음 해까지 걸쳐있던 페루공화국의 100년 동안에 이 나라의 건축은 휴면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설립된 약간의 건축물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트루히요에 있는, 이투레기(Iturregui)건물은 외부는 신고전주의 양식이고 내부는 식민지 양식으로 된 대표적인 예이다. 리마에 있는 박람회건물(Palacio de la Exposición)은 전통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이라고 주장했으나, 거짓으로 밝혀졌다. 추운 겨울과 눈, 비가 지나가자 유럽 신고전주의의 우수하고 균형 잡힌 인공적인 선이 강조되었다. 파나마운하의 개통으로 시멘트와 철, 유리, 현대위생장비 등의 건축자재가 쉽게 운반되자, 개성 없는 모방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과거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였다. 바로 이때, 신식민지 양식이 나타나, 주교청과 정부청사, 시청 그리고 볼리바르 호텔(Hotel Bolívar)과 수많은 저택들이 강한 식민시대의 전통을 지닌 채 설립되었다. 인디오의 양식과 건축자재, 그리고 수입된 양식과 건축자재의 융합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자, 두 요소가 다양한 방식으로 혼합되어 독창적인 건축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와 페루의 진정한 건축은 바로크적인 혼합을 강조하고 있으나, 균형과 조형성, 편리함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인디오적인 장식을 한 스페인식 건물이라고 말할 수 없고, 실질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건물들은 외부에 인디오 요소와 스페인 식민지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산 마르틴 광장(Plaza San Martín)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과 리마 교외에 있는 저택들은 페루 건축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페루는 아메리카의 독창적인 특성을 나타내면서 고유한 건축양식을 고안하였다. 이 건축은 정복 이전과 식민시대라는 과거로부터 심미적인 요소를, 현대식 기술과 손에 넣을 수 있는 건축자재를 이용한 현대의 기능주의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 치무와 잉카, 식민시대의 절충주의, 르 코르부시에르 등의 공간적인 개념을 혼합하여, 오늘날의 페루인과 그들의 리듬, 형식을 공간과 일치되게 하고 있다.
17.13 개요
I. 정복 이전의 메소아메리카 건축
가. 테오티우아칸: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 켓찰코아틀 신전
나. 코판과 치첸이차의 꼭대기 부분이 평평한 마야 피라미드와 신전, 광장
다. 테노치티틀란의 아스테카 신전과 궁궐, 광장, 공원, 대로
II. 정복 이전의 남아메리카 건축
가. 모치카: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를 포함한 수많은 피라미드
나. 치무: 진흙으로 장식된 파라몽가 성과 찬찬의 유적
다. 차빈: 꼭대기 부분이 평평하고 돌로 된 피라미드와 신전, 화려한 궁궐
라. 티아우아나코: 직물 양식으로 장식된 태양의 신전과 태양의 문
마. 잉카: 삭사우아만, 오얀타이탐보, 세상의 경이로움인 마추피추
III. 식민시대의 건축양식
가. 16세기: 고딕, 무데하르, 이사벨, 에레라 양식 등의 영향
나. 17, 18세기: 아메리카 바로크의 절정
1. 정복이전의 장식전통과 원주민의 영향
2. 풍부한 부드러운 돌과 관청 및 교회의 지원
3. 마닐라와 아카풀코를 왕복하는 범선에 의한 중국의 영향
4. 세계 8대 바로크 걸작품 중, 네 작품이 멕시코에 잔존
다. 키토의 성당
1. 산프란시스코 수도원(1537-80)의 다양한 양식
2. 콤파니아 교회(16, 17세기): 양식상의 동질성
3. 라 메르세드 교회(18세기)와 유명한 종
4. 대성당(1550) 성기실의 훌륭한 문
라. 멕시코와 15,000개의 교회
1. 스페인어권 아메리카 식민지 교회 70,000여 개의 20%
2. 멕시코 시티와 프에블라의 대성당: 누에바 에스파냐의 두 가지 보석
3. 타스코의 산타 프리스카 교회: 바로크의 전형
마. 군사 건축
1. 산토도밍고 헌탑(1503)과 성
2. 아바나의 엘 모로와, 산환의 엘 모로
3. 카르타헤나의 방어벽과 방어탑
4. 페루의 카야오에 있는 레알 펠리페 성
바. 시민 건축
1. 멕시코 시티와 페루에 있는 부왕의 궁전(오늘날 대통령 관저)
2. 멕시코 시티와 카르타헤나, 보고타의 종교재판소
3. 무데하르 양식으로 된 리마의 토레 타글레 궁전
IV. 브라질과 스페인어권 중남미에서의 신고전주의
가. 산 카를로스 학교 설립(멕시코 시티, 17785)
나. 마누엘 톨사(1757-1818)의 광업학교 설립(멕시코 시티)
다. 트레스게라스: 셀라야의 카르멘 교회와 구아나후아토의 건축물
라. 과테말라(1785)와 보고타(1809-11)의 대성당
마. 왕실의 후원을 받은 브라질 신고전주의
1. 남미에서 가장 많은 신고전주의 건물
2. 주요 건물: 조앙 6세의 궁전, 국립도서관, 상 조아깅 신학교, 국립박물관, 무역관, 식물원, 예술학교 정문
바. 19세기 말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향
1. 멕시코 시티의 레포르마 거리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 보고타, 카라카스, 칠레의 산티아고 등의 국회의사당
2.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장미궁: 벨기에의 신고전주의 영향
3. 볼로그네시 광장, 콜론거리의 주택, 리마의 은행
4. 템플레테(1827)와 아바나의 엘세로 구역의 주택
V. 20세기 건축
가. 멕시코 시티와 구아달라하라, 리마, 과테말라 시티에서의 신 식민주의 양식 우세
1. 멕시코시티의 법원과 과테말라시티의 정부종합청사
2. 리마의 대통령궁과 대주교회관, 시청사
나. 혁신적이고 기능적이며 초현대적인 양식의 승리
1. 르 코르부시에르의 영향을 받은 브라질의 개혁
ㄱ. 플라비오 데 카르발로의 정부청사 건립(1927)
ㄴ. 오스카 니에메예르: 벨로 오리손테에 있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
ㄷ. 루시오 코스타: 브라질리아 설계도 작성
2. 멕시코의 역사적 독창성
ㄱ. 엔리케 델 라 모라의 몬테레이 소재 최신식 성당 건립
ㄴ. 환 오고르만: 멕시코 국립 자치대학교 중앙 도서관
ㄷ. 대학도시와 페드레갈 거주지역
3. 대학도시와 카라카스의 고층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