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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든지 아니 듣든지 (겔2:1~7) ……..
일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는 복음전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요나처럼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상황이나 지금이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항상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들어주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보통은 아예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거절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크리스찬들이 전도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듣고 반응을 보인다면 복음의 감격이 희박할른지 모릅니다. 정말 힘들고 어렵게 고통을 받고 만들어진 진주가 가치를 인정 받듯이 거절과 반박 속에서 거두어지는 복음의 열매는 상상할 수 없는 복음의 감격과 기쁨이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상반된 두개의 감정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한가지 감정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패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한가지 감정만을 받아드리다가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 감정(듣든지 / 아니 듣든지)를 모두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성공만 생각하고 가던 사람이 갑자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당황하고 의기소침하고 낙심합니다. 또한 실패만 생각하던 사람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항상 좌절과 패배의식 속에서 삽니다. 이들은 모두 한가지 감정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감정을 모두 인정하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치우치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합니다. 특히 위기능력이 돋보입니다. 세상일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들은 마음이 여유가 있고, 이해심이 많으며 도량이 넓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 보면, 비록 극소수이지만 문을 열고 듣는 자가 있고, 대다수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다 보면 듣는 자도 있고, 전혀 안 듣는 자도 있습니다. 안 듣는 자가 기분 나쁘고 무서워서 설교를 못한다면 잘못된 목사입니다. 목사는 은혜 받는 자 보고 설교를 합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굽니까?
물가에서 낚시하다 보면 미끼를 보고 낼름거리다가 무는 고기도 있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고기도 있습니다. 모두가 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낚시 좋아하는 사람이 무는 고기 쳐다 볼까요? 안 무는 놈 쳐다 볼까요? 몇 시간이라도 무는 고기 쳐다보고 낚싯대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바로 듣지 않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실패하는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인 감정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복싱선수가 상대선수에게 얻어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맞는 것이 두려워서 링에 오르기를 싫어한다면 선수가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이 절대적으로 전도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최악의 상태입니다. 아예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성경에서 보십시오. 패역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배반한 자(3절),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4절), 패악한 족속(5-6), 패역한 자(7절),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팍한 자, 말을 듣지 않는자(3:7). 한마디로 옥토 같은 심령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가시떨기, 길가, 돌짝밭과 같습니다. 그러니 누가 가서 전하고 싶겠습니까?
이번 청년회 필리핀 단기선교 때였습니다. 청년들은 두개조로 나누어 아리헨다의 빈민지역에서 4영리전도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임에도 이슬람권 지역이 있고, 비이슬람권 지역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청년들에게 이슬람권 지역은 전도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들어주지도 않으며 거절할 것이다. 절대 다투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나오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긴장을 풀지 말고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접근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제 청년들은 AB 두개조 중에서 어느 조가 갈 것인지 가위바위보로 결정을 해야 됐습니다. 이긴조가 원하는 지역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개조 모두가 원하는 지역은 비이슬람권 지역이었습니다. 왜냐면 안들어주는 사람들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디 청년들만 그러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지명하시고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자기 민족에게로 파송하십니다. 3장 5절을 보십시오. 분명히 파송국가를 지명하여 주시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까지 진단하신 후 정확하게 알려 주십니다. 한마디로 선교의 정확한 정보를 모두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선지자의 앞날이 무척 험난하고 힘들 것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거의 선교의 결과는 부정적이잖습니까? 3장 7절을 보면 “…..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미 답은 나온 것입니다. 머리 좋은 여러분 같으면 계산은 나온 것입니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계산적, 논리적입니다.
언젠가 어느 작은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기 교인 한사람은 교회에서 3백만원 이상을 투자한 성도라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그만큼 물질적인 전도비가 많이 투자되어 얻어진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 한분은 저에게 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목사님, 요즘 할수만 있다면 1억을 주고라도 성도 한사람을 사오겠어요.” 잘 새겨들으세요. 그만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 한사람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목사의 마음일진대 하물며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분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잖아요. 비록 유대땅에 말씀을 듣지 않는 영혼들이 가득할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듣는 자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하고 사람을 투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에스겔을 이스라엘로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국가의 4대의무인 교육, 국방, 납세, 근로가 있듯이 성도에게도 영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도의 의무는 필수적입니다. 사실상 지금 하나님의 백성 유다는 국가가 파산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은 극에 달했고, 하나님의 진노는 촉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급속도로 침몰되어 가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바벨론의 3차례 침공으로 유다는 더 이상 소생할 수 없이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때(BC593년경 여호야긴왕 사로잡힌지 오년에) 하나님은 부시의 아들 에스겔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유다백성들의 죄악과 심판, 예루살렘 파괴와 회복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주시며 세번씩이나(5, 6, 3:11) 강조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입니다. 이 말씀속에는 수많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저는 그 말씀을 전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전도하는데 장애물을 제거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분명히 손익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손해가 없습니다. 특히 전도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유는 전도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전도의 실패를 말하는 것일까요? 책임과 의무를 혼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도는 나의 의무이지만, 책임은 하나님의 몫입니다.(고전3:6-7) 우리가 전도자로 세움을 입고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장애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3가지를 극복하면 된다고 봅니다.
1. 시간에 관계없이(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시차가 생깁니다. 물론 1-2시간은 큰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10여시간 차이나는 미국이나, 8시간 정도나는 유럽을 간다면 그 곳 시간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표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도시계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도시계는 항상 미래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 안 맞아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지금 하라고 감동을 주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다음이라고 미룹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로 세워 주시는 하나님과 전도자인 내가 사인이 안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야구는 모든 경기를 감독이 사인을 내립니다. 경기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선수의 컨디션까지 파악하여 세우고 사인을 내리면, 선수는 오직 감독의 사인에 따라서 충실하게 경기를 해야 합니다.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는 선수는 방출되든지 퇴출되는 겁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심부름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감독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니까 전도자가 두렵고 힘든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라는 말씀 속에는 시간에 관계없이 전하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지금 이 명령이 내려진 때는 실질적으로 전도하기에 좋은 시기나 시간이 아닙니다. 왜냐면 지금 유다는 너무 어수선하고 국론은 분열되고, 왕과 일부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정신적으로 거의 공황상태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혹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음에 여유,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지요” 라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한데 언제 예수 믿고 교회다니느냐구요. 그래서 전도자들이 그들에게 접근을 못합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됩니다. 전도의 시간표는 분명히 하나님이 짜 주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8).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전도시간표를 다시 고칩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에 실패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 속에는 시간에 관계없이 전하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절대 특정한 시간을 고집하며 전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활 속에 전도가 습관이 되면 됩니다. 이제는 시간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시고, 시간의 장애물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관계없이(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가 전도하면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거절하는 사람이요, 제일 무서운 사람이 배척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분명히 전도하면 거절하고 배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많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마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전할 때 핍박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에서 큰 상을 받는데 공헌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며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안 듣는 사람들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여 들으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감사와 축복이지만, 복음 전했는데 듣지 않아도 절대 낙심하지 말 것은 하늘에 상이 큼이니라, 절대로 슈퍼에서 좋은 과일 고르듯이, 내가 전도의 대상자를 고르지 마세요. 그냥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세요. 끝까지 전하다 보면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미국 소매상협회 조사에 의하면, 판매원의 48%가 손님에게 한번 전화해보고 포기하고, 25%는 두번, 15%는 세번 해보고 포기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12%판매원은 끈질기게 전화하면서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거에요. 즉 88%의 판매원은 20%의 매출액을 올린반면, 12%의 끈질긴 판매원들이 무려 80%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듣든지 아니듣든지 끈질기게 포기하지 말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3. 장소에 관계없이 (되든지 안 되든지)
우리의 전도를 가로막는 방해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장소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변명합니다. “지역적으로 맞지 않아서”, “지역적으로 힘들어서” 라고 말합니다. 전에 영업을 배울 때가 있었습니다. 세일즈를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오늘은 지역을 잘못 선택해서 실적이 없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비겁한 핑계일 뿐입니다. 왜냐면 같은 지역을 나갔던 다른 동료들은 분명히 계약서를 체결하여 돌아오거든요. 물론 옥토가 있고, 박토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자에 따라서 옥토가 박토로 변질될 수도 있고, 박토가 옥토로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전도자의 영혼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소를 너무 따집니다. 지금 내가 처한 곳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로 적합한 일터요, 영적인 산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아니라, 자기 동족에게로 가서 전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의 전도지역이 척박하고 힘든 지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지역마저도 우리가 택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입니다. 전도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전도하려고 하면 아마도 전도가 가장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내신 영혼에게 찾아가서 전도하는 일이야말로 누워서 콩떡먹기 보다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전도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겁내지 말고 전하십시다. 절대로 “전도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번 이렇게 따라 해 보십시다.
“나에게(자신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이 시간(손바닥을 하늘을 향하여)”
“이 자리에(손바닥을 땅을 향해서 펼치며) ”
“이 사람이(손바닥을 옆 사람에게 권하는 자세로) ”
가장 확실한 전도의 대상자이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