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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창건과 시련, 그리고 발전 (1945-1960)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5년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유구한 민족의 전통을 되살려 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수립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기대와 달리 8·15는 완전한 의미의 해방이 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과정에서 한반도는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었고, 양지역에는 서로 다른 체제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고 있던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15 해방은 곧 35년간 이 땅을 무자비하게 지배하며 수탈했으며, 민족성 말살에 광분하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이기에 그것은 단절되었던 한민족의 주권활동 회복의 계기였다. 교육사적으로 해방은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교육주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루 속히 식민지 노예교육을 청산하고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세계현대사의 추세에 발맞추는 새로운 교육체제를 마련하여 자주와 발전을 지향하는 민족교육을 추진하여야 하는 역사적 과업을 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올바른 인간상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매우 중요시해 왔다. 우리나라가 유교의 모범국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서, 유교는 무엇보다도 교육과 학문을 중요시하는 정치사상이었고, 배워야 산다는 것이 우리 민족의 생활신조였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교육은 국가의 공교육과 사회교육, 그리고 가정의 차원에서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고대국가인 高句麗의 太學은 최초로 설립된 공교육이었고, 이후 신라의 國學, 고려의 國子監과 鄕學, 조선의 成均館과 지방의 鄕校 등으로 이어졌다. 사회와 가정 차원에서의 교육도 점차 발달하여 조선시대의 書院과 鄕約, 그리고 書堂은 교육의 확대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전통시대의 교육은 대체로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哲學, 史學, 文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른바 文·史·哲로 대표되는 人文敎育이 교육의 중핵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근대교육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였다. 1876년 개항 후 朴泳孝, 金玉均 등의 개화사상에서 근대교육에 대한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근대교육의 효시는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뜻 있는 민간인들에 의해 선도되었다. 즉 1883년 원산의 유지들에 의해 첫 근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元山學校가 설립 운영되었고, 한반도에서 선교사업을 벌이게 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1884년에 韓漢學院, 1885년에 培材學堂 등의 선교학교들이 개교되면서 근대적 교육활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울과 지방에서의 근대학교의 설립은 전통적인 지방교육과 민간교육의 맥을 이으면서 근대적인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시도의 하나였다. 한편 정부에서도 개항 후 근대적 지식을 가진 인사를 키워야 할 필요에서 1883년 同文學을 설립했고 1886년에 귀족학교인 育英公院을 개교하였다.
이처럼 민간과 정부에서 시작된 근대적 교육활동의 의의가 널리 인식되면서 근대교육활동을 위한 각종 조치가 계속 추진되어 많은 근대적 교육기관이 정부와 민간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다. 1895년에 내외에 발표된 맛洪範十四條맜에서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육 진흥에 힘쓸 것을 천명했으며, 이어 맛敎育立國詔書맜를 내려 교육을 통한 국가 중흥에 매진할 것을 국민에 계도하였다.
1895년의 맛小學校令맜에 의해 초등교육의 보급과 진행의 노력이 적극 추진되어 서울과 지방 각지에 많은 소학교가 생겨났으며, 어학전문학교와 교원양성을 위한 漢城師範學校가 국가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또한 1905년에 한성중학교가 개교되었고, 민간에서도 여러 중등교육기관을 창학케 되어(1905년 養正義塾, 1906년 徽文義塾, 淑明學校, 進明學校 등 17개교) 근대적 중등교육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편 1905년에 普成學校, 漢城法學校 등 고등교육기관이 개설되어 고등교육을 향한 민족의 의지를 드러냈다. 이제 신교육을 위한 한민족의 의지는 더욱 굳세게 발휘되는 가운데 많은 인재를 키우게 되었다.
개항 이후의 근대교육은 개화에 따른 근대의식을 진작하고, 선진문명 수용을 목적으로 실용학문과 민족적 각성을 위한 민족교육에 그 목적을 두었다. 개화사상과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개화기의 근대교육활동은 한말의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자 보다 선명한 민족주의를 내세우게 되었고, 마침내 교육구국의 민족운동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주권국가에서 보호국으로 전락을 강요당하는 위기에 직면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선각자들은 국권회복의 방도를 교육에 의한 민족적 역량의 배양과 투쟁의지의 진작에 있다고 믿고 각지에 많은 私學을 세워 민족주의를 선명하게 내세웠다. 私學의 설립은 이미 1905년 이후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간도지방에 설립된 학교 중에는 직접 독립투쟁에 나서기 위한 무관학교도 있었다.
일제는 1910년 한반도를 무력강점하여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일제에 순종하는 도구적 인간의 창출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육은 저급의 초등교육의 기회와 노동인간을 공급하기 위한 직업교육만 부여했을 뿐이었다. 또한 고급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 활동을 극력 억제하는 愚民化정책을 강행했다.
특히 한말 민족교육의 거점이던 사립학교의 탄압을 위해 맛私立學校規則맜(1911), 맛改正私立學校規則맜(1915) 등을 제정하여 민족주의적 사학활동을 말살시키는 교육정책을 폈다. 이로 인하여 1912년 1,362개교의 사립학교가 1917년 742개교로 줄어들었고 학생수는 57,377명이 38,204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맛사립학교규칙맜의 적용을 받지 않았던 서당의 민족교육을 말살하기 위하여 1918년 맛書堂規則맜을 제정하여 서당교육마저 봉쇄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의 거족적 투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교육의 문호를 다소 넓히는 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교육정책은 한국인들의 반일의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기만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즉, 수탈을 위한 산업진흥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중등 실업교육의 문호를 개방하고, 총독부에 협력할 소수의 협력분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한된 고등교육의 기회를 열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민족지도자들은 ‘朝鮮民立大學旣成會’를 조직하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각지에서 강습회, 야학운동을 일으켜 민족교육을 계속하기에 힘썼다. 이러한 교육운동은 주로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던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이들의 일부가 ‘自治論’을 주장하며 친일화해 나가자 교육운동도 그 힘을 잃고 말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되면서 ‘皇國臣民化’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민족성 말살을 목적으로 일제의 통치정책은 보다 강압적으로 전개되었다. 1938년 「朝鮮敎育令」을 발표하여 확대되는 침략전쟁에 한반도의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고 인적자원을 전선에 투입하여 그들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제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교육을 통해 먼저 민족성을 말살하고 노예적 인간을 키워 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 역사의 교육을 전면 봉쇄하고, 학생들에게 ‘皇國臣民誓詞’를 매일 제창케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며 학도동원이라는 이름아래 강제노동을 강요하였다. 마침내 1940년대에는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강제 입영시켜 그들의 침략전쟁의 희생물로 전선에 투입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한반도에서의 교육은 사실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었다. 이렇게 식민지시기 우리 민족의 근대 교육활동은 민족의 뿌리를 잃은 채 식민지적 노예상태를 강요받았다.
8·15 해방은 잃었던 교육주권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하루 속히 일제의 군국주의적 우민화정책을 청산하고 민족적인 현대교육의 튼튼한 재출발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수용하는 세계사의 추세에 걸맞는 새로운 교육이 추진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새 역사의 지도적 인물을 양성하여야 하는 고등교육활동이 필요했다. 이미 우리에게는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의 太學, 신라의 國學, 고려의 國子監, 조선의 成均館으로 내려오는 국학기관에서의 고급인재 양성과, 서원·서당 등 지방·민간에 의한 교육의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 세계에 웅비할 현대적 인재들을 키워 내야만 했다. 또한 식민지 상태를 장기간 거친 우리 민족은 보다 빠른 학문적·교육적 발전을 위해 국가주도의 강력한 추진력이 요구되기도 했다.
국립대학의 새로운 발족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여망 속에서 해방조국의 교육 주권의 결단으로 나타나야만 했다. 그리고 국립대학의 설립과 발전은 우리 교육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지방·민간 교육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만 했다.
1919년 3·1운동 후 한국인에 의한 ‘朝鮮民立大學 설립운동’은 결국 일본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대한 민심수습책의 마련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자극을 받은 총독부는 본국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더니, 1923년 「京城帝國大學令」을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에 豫科를 모집하였고, 1926년에는 法文學部와 醫學部를, 1936년에는 理工學部를 개설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이후 일제는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의 공학을 실시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 학생들의 입학을 표면으로는 실력경쟁을 가장하여 전체 정원의 1/3밖에 합격시키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식민지하의 경성제국대학이라는 교명이 없어지고, 대학내의 한국인 직원들로 구성된 ‘京城大學 자치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45년 9월 10일에 법문학부, 이공학부의 3학년과 의학부 4학년 졸업자에 대한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 18회, 의학부 17회, 이공학부 3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은 모두 810명이었다.
그러나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면서 9월 19일 대학의 행정사무가 미군정으로 이양되고, 교명을 ‘서울대학’으로 개칭하고 총장에 해군 소령 크로프츠(Alfred Crofts)를 임명하였다.1)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반도에 진주해 온 미군은 9월 11일부터 정식으로 북위 38도선 이남에 軍政을 시작했다. 美軍政시대의 교육은 미육군 직제에 따라 공보부문의 일부로 취급되었으며, 군정장관 아놀드(A.V. Arnold) 휘하에서 교육부문의 행정을 담당한 것은 육군대위 로커드(Earl N. Lockard)였다. 학무국장 로커드 대위는 원래 시카고의 초급대학 영어교사였다. 그는 2차대전 중에 육군 민정 훈련학교(Civil Affairs Training School)에서 일본의 교육에 관한 단기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로커드와 함께 교육을 받았던 에레트(Paul D. Ehret)는 「제국주의의 교육칙서와 수신 교과서에 대한 분석」이란 연구보고서를 써냈고, 학무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한국의 교육실정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한국인의 판단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았다.
로커드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嚴祥燮이었다. 그는 일본고시 사법과에 합격, 검사생활을 하다가 해방 직전 총독부 학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로커드는 吳天錫을 만나게 되었다. 오천석은 1921년 코넬(Cornell)대학을 졸업한 후 노스웨스턴(North Western)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으며, 다시 컬럼비아(Columbia)대학교로 옮겨 사범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 1932년 귀국하여 약 10년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과 교육관계로 연결이 이루어지자 한국의 교육계 지도자 7명을 추천하여 9월 22일 ‘한국교육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이 위원회는 11월에 10인으로 확대되었다. 이때의 위원은 초등교육담당 金性達, 중등교육담당 玄相允, 전문교육담당 兪億兼, 고등교육담당 金性洙, 교육전반담당 白樂濬, 여자교육담당 金活蘭, 일반교육담당 崔奎東, 의학교육담당 尹日善, 농업교육담당 趙伯顯, 학계대표 鄭寅普 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우선 학무국 직원을 한국인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12월 19일 유억겸이 한국인 국장에 임명되었다. 학무국은 1946년 3월 29일 문교부로 승격되어 초대 문교부장에 유억겸, 차장에 오천석이 취임하였다.
‘한국교육위원회’의 공식성격은 자문기관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교육의 모든 부문에 걸쳐 중요한 모든 문제를 심의 결정하였고, 각 도의 교육 책임자, 기관장 같은 주요 인사문제를 다루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 도의 학무국장, 공립 중등학교 교장, 대학장을 선발 인선하는 일에서부터 학무국의 관리들을 선임하는 일을 전담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10인의 위원들 중 대부분이 친일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은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한반도를 자본주의의 영향권내에 묶어두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 사회적 개혁을 강력히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에 있었던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세력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친일파 척결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사회주의세력에게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보수세력은 바로 친일 경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따라서 미군정은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친일 경력의 여부에 상관없이 반공 보수적인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에서 한국교육위원회의 위원들 선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아울러 교육계 인사들의 중요한 특징은 대부분 미국이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교직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은 미국의 삼부조정위원회(국무부·육군부·해군부의 정책 조정기관으로 최고 정책결정기관)의 미군정에 대한 최초의 기본훈령인 SWNCC 176/8(1945년 10월)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안보적 요인이 허용할 경우, 유능한 한국인이나 기타 적절한 요인이 부족한 범위 내에서 귀하는 기술능력상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본인 및 일본인들에 협력했던 한국인들을 일시적으로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하며,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학무국은 1945년 11월 23일 교육계와 학계의 권위자 100명을 초청하여 ‘조선교육심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들 100명 가운데 28명이 韓國民主黨 소속이었으며, 7명이 民族靑年團에 소속, 그리고 31명이 興士團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단체의 이념적 성향은 自由主義와 반공이념, 그리고 온건한 민족주의로 특징지어진다. 이에 따라 조선교육심의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육 주도세력은 미군정 정책수행의 기본방향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심의회는 주로 교육이념과 교육제도의 정립문제에 대하여 심의하였다. 연희전문 교수였던 白南雲은 홍익인간이 일본제국주의의 ‘八宏一宇’의 재판이라 하여 채택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심의회에서는 우리의 교육이념으로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弘益人間’을 채택하였다. 교육제도로서는 종래의 소학과 중학의 이원제를 배격하고 미국의 학제를 모방한 6·3·3·4제로 일원화하기로 결정하였다.
문교부는 이상과 같은 작업들을 마치고 난 뒤 고등교육기관의 설치를 위한 작업을 개시하였다. 일제 말기 서울의 고등교육기관은 일제시대에 운영되던 식민지 고등관리의 양성과 식민지 경영에 참여할 고등지식인 양성을 목적한 종합대학인 京城帝國大學과 각 방면의 고급직능인 양성기관인 각종 전문학교들이 있었다.2) 해방 후 교육주권이 회복됨에 따라 이들 학교의 교수진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채워져야만 했는데, 일인 교수들이 모두 탈락한 자리에 유능한 교수를 일시에 충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고등교육의 질을 저하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고급인력의 신속한 양성이 요구되었고 효율적인 고등교육기관의 개편운영이 필요하였다.
문교부는 1946년 4월 시범적으로 京城大學 醫學部와 京城醫學專門大學의 통합을 지시했다. 그러나 두 학교는 모두 이 안에 반대하였다. 경성대학측에서는 경성의학전문대학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들의 격을 저하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경성의전측에서도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학교를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문교부는 부분적인 개편을 철회하고, 전면적인 개편을 독자적으로 결행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전면적인 개편에 관한 구상은 그 발의자인 문교부 차장 오천석에게 맡겨졌다. 오천석은 서울시내와 그 근교에 있던 관·공립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하여 8개 단과대학으로 만들고, 새로 음악과 미술 전공을 위한 예술대학을 신설키로 하는 동시에, 그 위에 대학원을 두는 대규모의 종합대학을 세우고자 계획했다. 그리고 대학의 자주성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최후의 정책결정기관으로서 민간인으로 구성되는 이사회를 두기로 했다(군정기간 동안은 공무원 6인으로 구성되는 임시이사회를 두기로 함). 이것이 소위 「國立서울大學案」, 약칭 맛國大案」이라는 것이었다.
1946년 7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과 미국인 문교부장 피틴거(Aubrey O. Pittinger)중령은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국대안’ 추진계획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국대안’은 서울시내에 있던 경성제대 후신인 경성대학과 일제시대 설립된 각 전문학교를 통합하고 그 통괄기관으로 하나의 이사회를 두고, 그 아래에 총장과 부총장을 한 사람씩 두어 학교를 통괄키로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단과대학으로는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예술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그리고 그 위에 대학원을
둔다는 것이었다.3) 이러한 발표가 있자,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일부
교직원과 학생들은 맹렬한 반대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7월 31일에는
조선교육자협회와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가 공동으로 전국교육자대회를 열고, ‘국대안’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의도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전제 아래 5개항을 결의했다.
① 국립 서울대학교안 반대공동대책위 조직
② 학생 및 교직원 생활문제대책위 조직
③ 교육자의 無故파면에 대한 항의
④ 학생 및 교육자의 신분에 대한 경찰의 부당침해에 대한 항의⑤
트루먼 미대통령에게 메시지 발송
이어서 광산전문학교, 경제전문학교, 경성사범, 경성의전 등 통합대상으로 되어 있는 전문학교의 일부 교수나 학생들도 합세, 반대운동에 가담하고, 반대투위 대표들은 러취 군정장관을 면담, ‘국대안’ 철회를 요구하는 등 반대운동은 점차 거세어져 갔다.
이처럼 반대운동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문교부에서는 8월 27일 법령 제102호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에서는 기존의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대학,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10개교를 ‘국립 서울대학교’로 흡수하고, 국립 서울대학교 안에 농림과대학, 상과대학, 치과대학, 사범대학, 공과대학, 예술대학, 법과대학, 문리과대학, 의과대학, 대학원 등의 대학, 대학원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 이사회는 문교부장과 총장 및 각 대학 1명의 이사 등 총 12명의 이사로 구성하되 군정기간 중에는 잠정적으로 한국인 미국인 문교부 부차장과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등 총 6인으로 구성되는 임시이사회를 두도록 했다. 그리고 총장도 군정기간 중에는 군정장관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사회의 직능은 ①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반적 방침을 수립하는 일, ② 서울대학교 총장을 천거하는 일 등이었다.
문교부는 이 안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종합대학의 설치가 “현재 각 학교가 분립하여 수용할 수 있는 학생 수보다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는 동시에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종합대학을 신설함에 따라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고, 교수와 기타 전문기술자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으며, 국가재정상으로 보아 합리적인 이익이 있다”면서 그 이점을 설명하였다.
‘국대안’ 발표에 이어 문교부는 9월 개학을 위해 곧 총장과 학장을 내정하였다. 이때 내정된 총장에는 법학박사 앤스테드(Harry Bidwell Ansted) 대위,4) 대학원장에는 尹日善, 문리과대학장에는 李泰圭, 의과대학장에는 沈浩燮, 법과대학장에는 高秉國, 공과대학장에는 金東一, 농과대학장에는 趙伯顯, 상과대학장에는 李寅基, 사범대학장에는 張利郁, 치과대학장에는 朴明鎭 등이었다(<표 1> 참조).
문교부가 ‘국대안’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대안’에 대한 반대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국대안’에 대한 반대가 광범위하게 전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대다수 교수나 학생들, 그리고 교육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바탕 위에서 ‘국대안’이 나온 것이 아니라 오천석을 중심으로 한 몇몇 교육관료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안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기안에 대해 미군정측 관료들만이 찬성의 입장을 보였을 뿐, 교육계 내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교육문제를 결정하기로 한 ‘한국교육위원회’나 ‘조선교육심의회’에서 ‘국대안’을 발의한 적도 없었다.
둘째, 국립대학을 창설하는 데 있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창설된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한다는 점에 대해 일부에서 비난이 표출되었다. 즉, 민족적 정통성을 고려한다면 대의 명분상으로도 해방 한국에서 설립된 국립대학으로 논의되거나 제안될 수 있는 것은 경성제대가 아니라 성균관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한국 역사에 대해 무지한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인 상황에서 국립대학을 설립한다는 사실과도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곧 수립될 한국정부로 모든 문제가 이양되겠지만, 아직 우리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국립대학을 설치한다는 것 또한 모순되는 일이었다. 국립대학의 초대 총장에 미국인이 취임하는 사태도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셋째, 각 대학들이 통합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대학의 통합이었다. 1946년 ‘국대안’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표출될 때, 구경성대학 의학부에서는 의학전문대학의 학생들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5) 이것은 기존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한 움직임의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반대가 있었던 이유는 ‘국대안’의 성립
배경에 정치적인 목적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오천석의 증언6)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즉, 문교관계의 핵심자들이 ‘정치적으로 반대파의 입장에 서 있던 교수들을 축출’하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1945년 12월에 발생했던 경성대학에서의 총장선출 파문에서 잘 드러난다.
“1945년 12월 어느날, 별안간 일부의 젊은 조교들이 들고 일어나서 총장선거를 하라고 나섰다. 국대안 반대의 첫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말려도 들을 리가 없었다. 이들 좌익분자들은 의대강당에서 젊은 金台俊을 총장을 선출했다. 김태준은 우리와 같이 경성제대에 재학했을 당시 조선어문학회를 꾸민 同學이었다. 그런데 좌익에서는 대선배를 제쳐 놓고 이 김군을 총장으로 뽑아 놓다니 …… 그가 중국 연안으로 도망쳐 갔다가 귀국한 공산당원이었듯이 바로 그들이 꾸민 각본대로라고 할 수 있다. 이튿날 하지 중장의 격앙된 성명을 계기로 대학가의 좌익계가 마련해 온 봇물은 터지고야 말았다. 하지 중장은 ‘돼지가 XX해 내는구나’ 등의 욕설을 퍼부었다. 사실 우리 교수들도 ‘어떻게 그 자가 총장으로 나선단 말인가’ 하고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7)
즉,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을 좌익세력이 장악하자, 기존의 대학체제의 개편을 통해 대학교수와 학생들 중 좌익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국대안’ 자체가 당시 미군정이 정치적으로 좌익성향이 강했던 학교를 폐쇄하는 조치와 맞물려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46년 3월 4일 미군정의 학무국은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공포하고 ‘학교인가서류’와 ‘교사사용허가서류’를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전문학교 중 하나였던 法政專門學校가 이러한 미군정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동년 3월 25일 폐교조치를 하였다. 이러한 폐교조치는 8·15 직후 법정전문학교를 재건하기 위하여 동창들이 만든 ‘재건위원회’에 좌익세력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법정전문학교에 조선공산당의 이론가 중 하나인 鄭泰植이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법정전문학교의 폐교로 인하여 1946년 4월 7일부터 10일까지 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가 동맹휴교에 들어갔고, 이들의 요구사항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학원봉쇄, 교수파면, 학생퇴학을 반대한다’와 ‘법정전문학교의 즉시 복교 요구’라는 조항이 공통적으로 표출되었다. 급기야 동년 4월 10일에는 ‘서울민주학원 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4월 17일에는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의 각 전문대학의 50여 명의 교수가 ‘전문대학 교수단 연합회’를 발족하여 미군정의 조치에 항의하였다.
‘국대안’의 입안시기가 전술한 바와 같이 1946년 4월부터 7월 사이임을 감안할 때 결국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국대안’이 입안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쉽게 제기되는 것이다. 즉, 좌파 교수들과 학생들을 군정청에서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 ‘국대안’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또한 ‘국대안’의 핵심사항 중 하나인 관선이사회를 둔다는 조항은 학원의 자치권을 박탈하려는 정책이라는 비판도 쏟아져 나왔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수였던 李仁榮은 맥조선일보맦 1946년 12월 10일자를 통해 “학문의 자유는 문교당국일지라도 이것을 간섭할 바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은 자치를 절대로 요구한다. …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대학은 교수의 자치, 학생의 자치를 필요로 하며, 자치이념은 조선인 총장의 취임을 필연화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국대안’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민주당이 운영하는 맥동아일보맦는 1946년 9월 12일자를 통해,“넉넉지 못한 재정 밑에서 풍족한 시설은 통일적으로 확실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수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각교가 할거치 못할 현상이며 그 분산을 방임할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활용하면 그 유능한 교수의 지도를 다수의 학도에게 均霑시키는 의미에 있어서도 종합대학안은 실정의 요청에 적응하려는 안이다.”
라고 하면서 ‘국대안’에 대해 지지하였다. 이러한 지지 내용은 문교당국의 ‘국대안’ 제출 이유 해명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해방 직후의 교육계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일면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교수들과 학생들의 반발은 계속 거세게 제기되었다.
반론은 먼저 관련된 학교에서 쏟아져 나왔으며, 교직원과 학생들은 보조를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공업전문대학 학생회,8) 경성대학 이공학부 직원회,9)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회10) 등을 시발로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회11) 등의 ‘국대안’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다.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직원의 경우에는 국립서울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였다.12)일부 학교의 경우 교수진이 사표를 제출하는 등 찬반론이 엇갈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9월 11~18일 사이에 등록이 실시되었다. 전체 취학예정학생 8천2백여 명 중 등록을 한 학생은 약 5천여 명, 그리고 미등록자는 3천여 명에 달하였다. 학교당국은 등록에 이어 곧 개학을 하여 9월 18일 8개 대학이 개교하였으며, 10월 10일에는 상대가, 14일에는 의대가 개교하였다.
이처럼 비록 개교는 하였으나, 좌익 계열의 정치세력이 ‘국대안’ 파동에 개입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국대안’을 반대하는 학생들은 이제 수업거부운동을 펴기 시작하여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의대의 조교수, 강사, 의국원 등 113명의 의료진이 학원의 자치권 부여와 관선이사회의 개선을 요구하고 파업에 돌입하는 등 ‘국대안’ 파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1946년 11월 4일 좌익계열의 民主主義民族戰線(이하 ‘민전’으로 약칭)에서 ‘국대안’에 대한 4개 항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국대안’ 파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전의 안은 ① 관료이사회의 철폐, ② 교수 및 학생의 자치 승인, ③ 미국인 총장의 사임, ④ 조선인 문교부책임자의 인책 사퇴 등이었다.13) 민전의 성명에 이어 12월 10일에는 문리대가 비슷한 요지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에 돌입하였고, 이에 상대·법대도 맹휴를 단행함으로써 ‘국대안’ 파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군정당국은 이 맹휴에 대하여 18일 이들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명년 2월 3일 등교를 명하여 만약 전부가 등교치 않으면 9월 신입생 모집시까지 폐교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문교부는 이러한 맹휴에 직면하여 교육계획을 새로 입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제시되지는 못했다.14)그러나 1947년 2월 3일 개학날 등교하지 않으면 퇴학처분하겠다는 학교당국의 언명에도 불구하고, 3개 대학의 학생들은 각각 학생대회를 열어 요구조건의 관철을 위한 투쟁의 계속을 결의했고, 공대 학생대회에서는 ‘국대안’의 철폐를 다시 들고 나왔다. 이를 계기로 상대·법대 외에 문리대 예과·공대·약대·의대·예술대 등도 ‘‘국대안’의 철폐’를 주장하면서 맹휴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맹휴 파동은 급기야는 중등학교까지 파급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부산 등 지방의 중등학교에서도 맹휴가 전개되었다.15) 경성대 이공학부의 경우 교수단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다.16)그러나 서울대의 경우를 볼 때 이러한 맹휴에 모든 학생이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2월 9일 학업을 계속하면서 요구조건을 관철할 것을 주장하는 각 단과대학대표 수십 명은 국립 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를 조직하고, 맹휴는 학원적화를 기도하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이라 비난하면서, ① 국립대학의 행정을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② 휴교령을 철회할 것, ③ 교수진을 완비할 것 등 3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즉, 이들도 ‘국대안’을 인정하였지만, 학교운영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었다.17)이러한 상황 속에서 2월 13일 러취 미군정장관은 특명으로 법령 제102호를 일부 개정하여 이사회를 한국인만으로 구성하고 문교부장 등 행정당국자는 관여할 수 없게 하였다. 이는 ‘국대안’파동에 대한 해결책의 제시로서 이 파동은 여기서 수습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국대안’ 반대투쟁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계속 견지되었다. 수도경찰청장 張澤相은 이번 맹휴가 南朝鮮勞動黨의 지령과 全國勞動組合評議會의 지시, 그리고 朝鮮民主主義靑年同盟의 지도, 선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그 증거문서를 제시하였다.18) 또한 서울대 당국의 요청으로 학내에 경찰이 난입하여 학생들의 소요를 진압하기도 하였다.19) 서울대 건설학생회는 장택상의 발표 직후 맹휴진상폭로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20)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서울대 교수와 일부 지식인들은 ‘국대안’ 건의서를 제출하였고,21) 서울대학의 9개 대학 학장회의에서는 러취 군정장관과 ‘국대안’ 해결책을 논의하였다.22) 결국 이러한 노력에 의해 ‘국대안’ 문제로 인해 전개되었던 맹휴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인하여 맹휴학생들도 마침내 3월 6일 ‘국대안’ 폐지가 아닌 ‘국대안’ 시정을 요구하면서 맹휴를 중지하고 등교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법령의 개정에 의하여 이사진이 5월 26일 새로이 구성되었고, 이 새 이사진은 6월 13일 맹휴관계로 제적처분된 학생들을 무조건 복교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또 이사회는 전년도 이래 ‘국대안’을 반대하면서 끝끝내 등록을 거부하고 두 학기나 지내버린 3천여 명의 학생들을 무조건 복교시키기로 결정하여 이들의 대부분도 복교하게 되었다.23) ‘무조건’이라고 발표하였지만, 당시 학교 측에서는 “앞으로는 여하한 경우에도 절대 맹휴를 이르키지 않을 것이며 학교당국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맹서하도록 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한편 이사회에서는 8월 6일 초대 한국인 총장으로 李春昊를 선출하였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사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47년 6월 시험중단사태로 인해 학교측에서 경찰의 교내진입을 요청하고, 의대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169명이 무기정학, 8명이 제적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24)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년여에 걸쳤던 이른바 ‘국대안’ 파동은 비로소 수습되고, 국립 서울대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립 서울대학은 창립의 과정에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것은 첫째 그 成案과정에서 교육계나 일반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안하여 이를 성급하게 결행하려고 한 점, 둘째 관료로서만 구성된 임시이사회를 둠으로써 민간의 학교운영 참여를 배제한 점, 셋째 이사회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교수진의 발언권을 크게 약화시킨 점, 넷째 총장과 일부 이사진이 미국인으로 되어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들은 1여년에 걸친 파동을 거치면서 여론의 일부를 수렴하여 법령을 개정함으로써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국대안’은 엄청난 파동을 겪어야만 했고, 창학 당시부터 서울대학교는 너무나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었다. 물론 이러한 파동의 가장 근본적인 점은 아직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정부가 서 있지 않은 상황에서 국립대학을 무리하게 만들려고 했던 점에 기인한다. 따라서 서울대학은 창립시 민족 전체의
환호 속에서 ‘민족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없었다. 이제 국립 서울대학은 창설되었지만 이 대학을 진정한 민족의 대학으로 발전시키는 과제가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학교당국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1946년 초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弘益人間’을 해방 후 우리 교육이 추구해야 할 교육이념으로 채택하였는데, 이를 채택한 것은 먼저 우리의 교육이 반드시 민주주의에 기초를 두어야 하겠다는 것과, 우리 민족이 수십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아왔던 만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은 반드시 흐려진 국가이념을 강력히 고취하는 민족적 성격을 띤 것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러한 교육이념에 기초하여 6·3·3·4제의 교육제도가 채택되었고, 그 고등교육을 맡는 최고학부로서 국립 서울대학은 창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울대학의 창학이념은 당시의 교육계가 모두 공감하고 있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교육이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서울대학의 창학 이념은 미군정의 교육정책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책문서인 SWNCC 176/29(1947년 7월 24일자)는 ‘점령의 포괄적인 목적의 보다 심도 깊은 달성’을 위하여 교육정책을 구상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영향들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고’, ‘자유적이고 민주적인 노선에 따른 그들 자신의 전통적 민족문화의 보존과 개발을 하도록 한국민들을 조력하고 고무’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민들 사이에 미국 점령 정책이 그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미국의 역사·기관·문화와 업적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촉진시킬 것”을 교육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로 하였다.
한편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의 제1조 목적에는
본령은 조선국민에게 우수한 고등교육시설을 제공하고 활용케 하여서 조선청년으로 하여금 개인으로서의 조선인 자신 및 현대사회의 국민으로서의 조선인민의 향상을 위하여 그 시설로부터 발생하는 온갖
이익과 기회를 적의 이용케 함으로 목적함.
이라 하여 고등교육을 통하여 개인적인 인격의 계발과 민주시민, 민주국민으로서의 자질 향상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서울대학의 창학이념은 교기에 새겨진 ‘VERITAS LUX MEA’라는 라틴어로 된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말 가운데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말이지만, 이 말은 서울대학의 창학이념이 ‘진리탐구’에 있음을 뚜렷이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탐구의 역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개교 후 1여년에 걸쳤던 ‘국대안’ 파동은 진리탐구를 위한 연구와 교수활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일부 학과에서는 시내에 따로 방을 얻어 연구실을 차리고 각기 자기 소유의 도서를 공출하여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등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또 ‘국대안’ 파동이 어느 정도 수습된 이후에도 당분간은 진리탐구의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지 못한 채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초대 총장 앤스테드의 뒤를 이어 한국인 최초의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李春昊 총장은 취임사를 통하여 “학술연구의 자유를 존중하고 학원의 자유를 확립하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사상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학원내에서 정치적 언행은 용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것은 당시 학원내에서 좌익 계열의 학생들과 우익 계열 학생들 간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춘호 총장에 이어 3대 총장으로 취임한 張利郁 총장의 재임기간(1948.5.12~1949.1.4)에는 학내질서가 어느 정도 자리잡혀 갔으며, 崔奎東 총장의 재임기간(1949.1.4~1950.10.6)에는 부총장 李敎善 등의 노력에 의하여 대학운영은 어느 정도 제 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대학운영은 문교부의 통제를 강하게 받았다. 우선 질서를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그 방향은 오도되기도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수립 당시의 총장은 장리욱 박사였는데, 그는 李承晩 대통령과의 소원한 관계로 인하여 사임을 권고받는 압력을 받고 총장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이때의 대학 자치가 어떠한 형태의 것이었는가를 명백히 보여 준다. 대학이 올바른 자치를 누리면서 연구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또 하나 정부수립 후 주목되는 것은 사상통제정책이었다.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하에서의 혼란은 주로 사상적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물론 군정당국에서도 좌익의 활동을 단속하기는 하였지만, 상당히 많은 좌익세력들이 지하조직을 통해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학원내에 많이 침투해 있었고, ‘국대안’ 반대 파동이 그들에 의해 고조되었다. 여기에 우익 계열의 건설 학생회가 발족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기의 미흡했던 규제와는 달리 정부수립 후의 사상통제는 보다 적극적인 것이었다. 즉 사상의 자유를 표방하면서 자행되었던 학원내에서의 좌익적 언동은 이제 일절 용납되지 않았다. 이는 1948년 말부터 제기된 이승만정권의 ‘국가보안법’ 제정을 위한 움직임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초대 문교장관 安浩相의 ‘一民主義’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는 ‘一民主義’란 인간주의와 민주주의로 이루어진 민족주의라고 주장하고, 이 일민주의 사상의 보급을 문교정책 최대의 과제로 삼으면서 학원의 사상적 안정과 국민사상의 귀일을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또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1949년 4월에 결성된 학도호국단은 강력한 종적 조직을 통하여 학원의 사상적 획일화와 좌익활동의 제어를 기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활동에서도 자유가 철저하게 통제됨으로써 학생들의 보다 자유로운 성장을 제약하였다. 학도호국단의 경우 해방 직후의 반탁학련과 건설학생회를 중심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기타 학생들은 이들의 의사에 이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대학당국은 학생의 정치적 관여를 불허한다는 원칙을 천명하였지만, 학도호국단 자체에 정치적 의미가 상당히 짙게 깔려 있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대학분위기 속에서의 학문탐구와 학생활동은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물론 이는 민족분단의 상황 속에서의 대학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제 서울대학은 창립과정에서 제기된 된 ‘민족대학’으로의 발전
과제와 초기 발전과정에서 제기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진리탐구’라는 두 가지 커다란 과제를 안게 된 것이다.
1) 교육기구
美 軍政廳 學務局은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고 종합대학으로서 국립서울대학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에 1개 대학원과 9개 단과대학을 설치하였다. 당시의
대학원과 각 단과대학의 연혁과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大學院 대학원은 “대학교육의 목적을 일층 심오·정치하게 추구하는 동시에 학술연구의 지도 능력과 독창력을 함양함을 목적”으로 하여 서울대학의 창립과 동시에 설치되었다. 당시 설치된 학과는 文科系 12과, 理科系 20과에 학생수는 남 138명, 여 1명(1947년 6월 당시)이었다. 초대 대학원장에는 尹日善 박사가 1946년 9월 1일에 취임하였고, 1947년 9월 25일 대학원 개원식을 가졌다. 대학원 설립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교수요원의 확보와 실험기자재 및 도서관의 부족이었다. 미군정에서는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교수요원의 미국유학과 건물보수, 도서반입 등을 실시하였지만, 교육재정의 부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文理科大學 문리과대학은 경성제국대학의 예과를 모태로 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5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로 개교하여 1926년 4월 개설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 1936년 8월 개설된 이공학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칭되고 이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문과계통과 이공학부 이과계통이 통합되어 서울대학교의 문리과대학을 이루었다. 문리과대학은 文學部와 理學部로 편제되어 발족하였는데 1948년 9월에는 醫豫科部도 편입되었다. ‘大學의 大學’이라 자처하던 문리과대학은 기술인이나 직업인을 배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는 문학을 비롯하여 대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순수기초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함으로써 원만한 인격과 넓은 교양을 갖춘 사회의 지도자를 길러 내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은 문리대 고유의 학문적 경향, 그리고 문리대 초창기 교수와 학생의 정신적 자세는 학문적·사회적으로 예리한 비판적 정신으로 발전하여 독특한 ‘문리대 정신’을 형성하여 나갔고, 그리하여 한국지성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문리과대학에 설치된 학과는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중국어중문학과, 언어학과, 사학과, 사회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정치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지질학과, 생물학과 등이었다.
한편 해방 후 문리과대학이 중등교원양성에 일익을 담당했던 점을
특기할 수 있다. 문리과대학의 전신인 경성대학에서도 1946년 4월 예과에 부설임시중등교원양성소를 설치하여 국어과 22명, 국사과 23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고, 1949년 9월에는 문리과대학부설 이과중등교원양성소가 개설되어 2년 교육을 실시한 뒤 중등학교 교사자격증을
부여하였다. 이 양성소는 1957년 3월 없어질 때까지 제7회 졸업생까지 모두 403명의 중등교원을 배출하였다.
工科大學 공과대학의 전신은 1916년 4월 설치된 경성공업전문학교라고 할 수 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는 3년제의 染織科, 應用化學科, 窯業科, 土木科, 建築科를 두고 附屬工業專習所에 2년제의 土木科, 金工科, 織物科, 化學製品科, 瓷器科를 두었다. 1917년 3월에는 鑛山科를 신설하고, 1918년 2월에는 부속전습소를 3년제로 개편하였다. 1922년 3월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하고, 부속공업전습소는 분리되어 京城工業學校가 되었다. 1939년 4월에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광산학과를 분리, 京城鑛山專門學校를 설치하여 採鑛學科, 冶金學科, 鑛山機械學科의 3과를 신설하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된 공과대학은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 그리고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공과계통을 모태로 하였다. 공과대학은 공덕리(현 공릉동) 校舍에서 수업을 시작하여 1947년 7, 8월에 제1회 공학사를 배출하였다. 당시 설치된 학과는 전기공학과, 기계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화학공학과, 야금학과였으며, 실습을 위하여 부속공장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초대학장에는 金東一 교수가 1946년 10월 취임하였다.
공과대학에는 한때 미군 제29연대가 주둔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제29연대는 훈령의 결여로 인해 도서관과 시설 일부를 파손하여
말썽을 빚기도 하였다. 이것은 미군정 초기 행정과 군대의 명령계통이 일사분란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사건이었다.
農科大學 농과대학은 1918년 권업모범장에서 독립하여 건립된 수원농림전문학교가 그 모태가 되었다. 수원농림전문학교는 1922년 3월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27년 6월 實業補習學校 교원양성소가 부설되고, 1928년 4월 실업보습학교가 부설되었다. 이 교원양성소는 1936년 4월 부설농업교원양성소로 개칭되고, 1937년 4월에는 본교에 獸醫畜産學科가 증설되었다. 1942년 4월 地理博物敎員養成所가, 1943년 4월 농업토목학과가 증설되었으며, 1944년 4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1월에는 대구농림전문학교를 병합하였다가 이듬해 3월 다시 분리하였고, 본교에는 농화학과가 증설되었다. 또 이때 臨時生物中等敎員養成科가 설치, 운영되었다.
이러한 연혁을 가진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서울대학의 창건과 함께 한 단과대학으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학과는 농학과, 임학과, 농공학과, 수의학과, 농화학과, 농생물학과, 농경제학과 등이었으며, 실습을 위하여 부속농장 및 부속연습림이 부속되어 있었다. 연습림은 전북 익산에 2,916정보, 전남 광양에 15,778정보, 경기도 시흥에 5,004정보가 있었다. 초대 학장으로는 趙伯顯 교수가 취임하였다.
1947년 미군정 농무국에서는 서울대 농대를 서울대에서 분리하여 행정부 산하교육기구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학무국과 서울대의 반대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25)
法科大學 법과대학은 1922년 4월 설립된 경성법학전문학교와 1926년 4월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모태로 하였다. 경성법학전문학교는 1944년 일제의 문과계통 폐지정책에 의해 폐교되었으나,
해방 후 1945년 11월 경성법학전문학교가 다시 개교하였고 국립서울대학교의 창건에 따라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와 통합하여 법과대학으로 새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법학과 단일학과였는데 1948년
가을 행정학과가 분리 독립하여 2개 학과를 두게 되었다. 초대학장으로는 高秉國 교수가 1946년 10월 22일 취임하였다.
師範大學 사범대학은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가 통합되어 창설되었다.
일제하에서는 1911년 맛조선교육령맜에 의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 및 부속보통학교가 폐지되어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내에 새로이 설치된 師範科 및 臨時敎員養成所로 계승되었고 부속학교를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부속보통학교라 개칭하였는데, 1921년 4월 조선총독부 사범학교관제 및 사범학교규칙이 제정되면서는 관립경성사범학교가 새로 독립·설립되었고 부속기관도 모두 이에 이전되었다.
한편 京城女子師範學校는 1914년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내의 사범과에서 출발하였는데, 1935년 관립경성여자사범학교가 증설되어 연습과, 심상과, 강습과의 3과를 두고 교육하다가 1943년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경성여자사범학교도 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해방 후 다시 경성여자사범학교로 되었다.
사범대학은 을지로 5가 교사에서 개교하였으며, 교육과, 국문과, 영문과, 사회생활과, 수학과, 물리화학과, 생물과, 가정과, 체육과의 9개학과가 1949년도까지 존속되다가 1950년도에는 사회생활과에서 사회과, 역사과, 지리과가 분리되어 나오고 물리화학과가 물리과와 화학과로 나뉘어 총 12개학과로 되었다. 초대 학장으로는 張利郁 박사가 1946년 10월에 취임하였다. 특히 사범대학에는 부속기관으로 부속국민학교와 부속중학교(6년제)가 설치되어 있었고, 또 中等敎員養成所가 설치되어 광복 후 부족한 중등교원을 양성하였다.
商科大學 상과대학의 전신은 私立京城高等商業學校라고 할 수 있다. 1907년 在日本東洋協會에서 설립한 東洋協會專門學校의 분교에서는 조선어과 제3학년을 경성분교에 파견하여 1년간 조선개발에 필요한 교과를 수학하게 하였는데, 1915년 교명을 東洋協會 殖民專門學校 京城分校라 하고, 1918년 4월 동양협회 식민전문학교와 분리하여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로 독립하였다. 1920년 5월 교명을 私立京城高等商業學校, 1922년 3월에는 재단법인 사립경성상업학교가 관립으로 이관되면서 京城高等商業學校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 후 1944년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학의 단과대학으로서 새 출발한 상과대학은 종암동에서 경제학과와 상학과의 2개학과로 개교하였고, 초대학장으로는 朴容夏 교수가 1946년 10월 취임하였다.
藝術大學 예술대학은 음악부와 미술부로 나뉘어져 음악부는 南山洞
구 경성음악학교 교사에서, 미술부는 동숭동에서 개교하였다. 미술부는 1949년 4월 문리대 옆 國立工業硏究所 자리로 이전하였다. 미술부는 개교 당시 회화과, 조각과, 도안과의 3개 학과가 있었으나 실제 개강시에는 회화과가 동양화과(제1회화과), 서양화과(제2회화과)로 분리되었고, 그 후 동양화과와 서양화과는 다시 회화과로 합해지고 도안과는 응용미술과로 개칭되었다. 음악부 초대 학부장으로는 玄濟明
박사가 취임하였고, 미술부 초대 학부장으로는 張勃 교수가 취임하였다.
醫科大學 의과대학은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통합·개편으로 이루어졌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그 기원을 1899년 3월 설치된 官立京城醫學校에서 찾을 수 있으며, 교장 池錫永과 교관 2명, 서기 2명이 있었다. 1907년에 大韓醫院官制에 따라 관립경성의학교는 大韓醫院 敎育部가 되고, 1908년 1월에는 교육부를 醫育部로 개칭하였다. 1909년 2월에는 대한의원 의육부 부속학교로 개편되었고, 1910년 1월 동교에 의학과(4년제), 약학과(3년제), 산파과(2년제), 간호부과(2년제)를 설치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따라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고 부속학교는 조선총독부의원강습소가 되었다. 1916년 4월에는 새로이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경성대학 의학부는 법문학부와 함께 1926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출발하였다.
서울대학의 단과대학으로 새 출발한 의과대학은 의학과 단일학과로 연건동 교사에서 개교하였다. 예과과정은 1948년 9월 문리과대학 의예과부로 편입되어 나갔고, 초대학장으로는 沈浩燮 교수가 취임하였다.
한편 의과대학의 부속기관으로는 부속병원과 부속간호학교가 있었다. 부속병원은 1899년 4월 24일 醫院官制의 발포에 따라 제동의 이호준씨댁에서 廣濟院을 개설, 의료와 매약업의 취체 및 약품검사, 종두, 가축치료를 맡게 된 데서 시작된다. 1907년 3월 연건동 28번지(옛 景慕宮址)에 자리를 잡고 내무대신이 원장을 겸하였다. 그후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고, 1926년 5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개설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으로 이관되었다. 해방 후에는 경성대학의학부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새 출발하게 되었다.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연건동의 부속병원인 제1병원과 중앙청 옆 전 수도육군병원인 제2병원이 있었다. 이들 부속병원은 의료연구와 임상실습을 목표로 하는 대학병원으로서의 기능과 일반 외래환자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었다. 부속병원장에는 1946년 10월 제1병원장에 明桂完 박사, 제2병원장에 尹致旺 박사가 각각 취임하였다.
부속간호학교는 1910년 1월 대한의원 부속학교에 산파과, 간호부과(2년제)가 설치된 데서 그 효시를 찾을 수 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강습소에는 의과, 助産婦科及看護婦科(1년제)가 설치되었고, 1926년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간호학교가 되었다가 서울대학의
창건과 함께 의과대학 부속간호학교로 새 출발하게 된 것이다. 초대
교장에는 宋仁愛씨가 취임하였다.
齒科大學 치과대학의 연원은 1922년 4월 총독부의원 齒科長 柳樂達見과 진남포 실업가 富田儀作의 주선으로 경성치과의학교를 창설한 데서 찾을 수 있다. 1929년 4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에 통합 출발한 치과대학은 치의학과 단일학과로 소공동 교사에서 개교하였으며, 초대 학장으로는 朴明鎭 교수가
취임하였다. 그리고 치과대학 부속병원에 保存科, 口外科, 補綴科의
진료과목이 있었다.
미군정은 이들 단과대학 가운데, 의대(간호학과 포함), 공대, 농대의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하여 의대, 공대, 농대에 각각 미국인 고문을 두어 학문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 상대에는 Mrs. Bierstadt, 의대에는 Dr. Hirshfield, 수의대에는 Dietrich 소령 등이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모두 독일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장학금 지급과 유학생 선발을 통해 학문의 질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미군정의 노력은 우선적으로 38선 이남의 공공복지의
향상, 식량자급, 경제발전 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지만, 후술할 1950년대의
‘Minnesota 계획’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2) 부속기관
附屬圖書館 부속도서관은 경성제국대학의 도서관시설을 이어받아 1946년 8월 22일 서울대학의 창립과 동시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장서는 1948년 2월 8일 현재 총 594,515권에 동양서가 483,000여 권, 서양서가 115,000여 권, 신문잡지류가 200여 종에 달하였으며, 이외에 동양서로 奎章閣圖書가 16만여 권, 고문서· 복사본도서· 미정리도서가 13만여 권, 서양서로 미정리도서가 3만여 권이 있었다. 그 외에도 사전·참고서류·내외출판서목·他官藏書目錄 등 귀중한 문헌이 있어서 질량면에서 국내 제일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규모는 사무실·열람실 등이 519평, 서고가 392평이었다.
한편 奎章閣도서는 조선 정조 이후 규장각에 수장되어 온 역대 왕실의 장서와 한말, 일제초에 수집된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2년
조선총독부 참사관실, 192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1928~1930년 이후의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거쳐 해방 후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博物館 박물관은 1940년 朴榮喆 씨의 유언에 의하여 그가 소장하던
서화 100여 점과 그 보존을 위한 기금을 기초로 하고 또 몇몇 뜻있는
분의 개인 기부금으로 건립되었다가 서울대학의 창건에 따라 서울대학에 부속되었다. 박물관에는 그 후 국내외의 고고민속품들이 계속
수집되었고, 1950년 현재 우리나라 각 시대의 유물·발해유물·만주·몽고·뉴기니아·덴마크의 민속품 등 4,152점이 소장되었다. 특히
甲骨文字片, 渤海유물, 우리나라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 楊州山臺劇假面, 滿蒙 등지의 민속품 등은 다른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이다.
서울大學新聞 『서울대학신문』은 단과대학별로 발간되던 신문들을 1948년 3·1절을 기하여 서울대학 전체를 위한 신문으로 통합, 창간되었다. 단과대학 신문으로는 문리대의 『大學新聞』, 사범대의 『師範大學』 등이 있었다. 문리대의 『대학신문』은 1947년 7월 1일 창간호를 낸 뒤 9월 6일까지 3호를 발간하였으며 단과대학 기관지로서의 성격을 뛰어넘어 대학의 학문적·사회적 민주화를 역설하였다. 사범대학의 『사범대학』은 1947년 12월 1일 창간되었으며, 그 외에 1946년 7월 31일부터 1948년 5월 28일까지 15호를 발행한 『京城大學豫科新聞』이 있었다.
국립서울대학 전체를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창간된 『서울大學新聞』은 그 창간사에서, 서울대학의 원만한 종합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일절의 非민주적 요소를 배제하기에 노력할 것이며 특히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獨善主義的 경향에 대하여서는 단호한 시정을 전개할 것”이며 “제도상의 종합성은 한 개의 기계적인 공식에 불과한
것이요, 약동하는 生命體로서의 綜合性은 오직 민주적 방법에 의하여
우리 스스로 쟁취할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듯이, 서울대학의 종합화
추진과 학원의 민주화를 위해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대학신문』은 1950년 5월 20일까지 17호를 발간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중지되었으며, 그 후 1952년 2월 4일 『대학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그 뒤를 이어 나갔다.
1) 이사회와 총장
국립서울대학이 창건되면서 그 운영을 위하여 정책결정기관으로서 「국립 서울대학교이사회」(이하 ‘이사회’로 약칭)라는 기구가 설치되었다. 이사회는 문교부장, 국립서울대학교 총장 및 대학교를 구성하는 각 단과대학에서 1대학 1명의 비례로로 구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에 관한 법령」(1946.8.22)에서는 이사회의 직능과 임무를 ① 서울대학의 전반적 방침수립, ② 각 단과대학 및 교육연구기관을 포용할 만한 항구적인 캠퍼스·기숙사 및 기타 시설의 수립 결정, ③ 총장 추천, ④ 단과대학·학부 및 기타 교육연구기관의 증설과 그 규칙의 제정, ⑤ 학생의 수학과 교수의 연구를 위한 장학금 및 보조금 제도의 제정, ⑥ 입학·출석·졸업·학위·졸업장 및 증명서 등의 규정제정, ⑦ 학술표준과 학업규정의 제정, ⑧ 단과대학 및 교육연구기관의 운영·교직원에 관한 규칙의 제정, ⑨ 교과과정의 제정 등으로 규정하였다. 실로 국립서울대학의 가장 중요한 권한을 가지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와는 다른 방식이 임시적으로 운영되었다. 즉, 문교부가 추천한 후 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동의를 얻어 군정장관이 임명한 이사로 구성되며, 각 이사들은 이사회를 대표할 만한 전문방면에서 뛰어난 한국인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였지만, 초기에 이사회가 조직될 때에는 군정기의 임시조치로 문교부 간부직원 6명으로 임시이사회를 구성하려 하였고, 이에 교직원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가 일어나게 되었다. 반대의 이유는 문교부 관료 중심의 임시이사회가 구성되면 대학이 자치권을 박탈당하여 진정한 민주교육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관선이사는 문교부장, 동 차장, 동 고등교육국장(이상 미군, 조선인 책임자 각 2명) 등 6명으로 구성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이렇게 될 경우 학교운영이 자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개입이 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대 때문에 1947년 5월 6일 이사회 설치규정인 맛국립 서울대학교설치령맜이 일부 개정되어 문교부장, 李春昊, 劉在晟, 李容勳, 崔奎東, 徐光卨 , 安東源, 李義植, 安鍾書 등 9명의 이사회가 새로이 구성되었다.
한편,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에 의하면 총장은 이사회가 결정한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이었는데, 그 직능과 임무는 ① 본대학교 이사회의 정책을 집행하는 일, ② 본대학교의 행정과 운영을 감독하고 그 재산을 유지하는 일, ③ 본대학교 교수회를 소집, 주재하는 일, ④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교내 각 대학의 학장 및 교육연구기관의 책임자를 임명하는 일, ⑤ 총장 자신의 발의 및 교내 각 대학 및 교육연구기관의 책임자의 추천에 基하고 본 이사회의 동의를 얻은 교수회원을 임명 또는 결재를 행하는 일, ⑥ 이사회가 제정한 예산 및 기타 제한범위내에서 법률규정에 준하여 사무원, 기타 직원 및 사용인을 임명 또는 해임하는 일, ⑦ 교수회원의 정직을 명하고 이사회에 대하여 교수회원의 해임을 제의하는 일, ⑧ 이사회가 제정한 방침범위내에서 본교의 운영, 교직원 및 학생의 행동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제정하는 일, ⑨ 본대학운영에 관하여 또는 본대학교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는 하시를 막론하고 총장 자신의 발의로 이사회에 의안을 제출하는 일 등이었다.
이러한 직능과 임무를 가지는 총장은 이사회에서 추천하도록 규정하였는데, 단 군정기에는 군정장관이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규정에 의해 임명된 초대총장이 바로 앤스테드(Harry B. Ansted, 1946. 8. 22~1947. 10. 25 재임)였다. ‘국대안’이 나오기 전에 미군정은 경성대학 총장에 한국민주당의 金俊淵을 임명하고자 하였지만, 김준연은 이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국립서울대학교의 총장에 미군을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 특히 맛국대안」 자체가 격렬한 반대에 직면해 있던 상황에서 미국인이 국립서울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서울대학의 출발에 있어서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 규정된 절차에 따라 임명된 최초의 한국인 총장이 제2대 李春昊(1947.10.25~ 1948.5.12 재임) 총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임명에도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는 민족적인 인물이 요구되었는데 이춘호 총장은 미국(Ohio주립대학)에서 주로 교육을 받았으며, 타의에 의해서였지만 친일단체에 이름이 올랐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총장 선임은 이사회와 유억겸 문교부장의 찬성을 얻었으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인준이 거부되었고 군정장관의 재심의 요구에 따라 결국 인준이 가결되었다.
李春昊 총장은 맹휴사건과 등록파동을 마무리짓는 한편 서울대학교의 진정한 종합화를 위하여 애썼지만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 사이의 교수연구실분쟁 등의 난제를 남긴 채 1948년 4월 16일 사임하고 말았다. 교수연구실 분쟁사건은 법과대학이 청량리 교사에서 동숭동으로 이전해 오면서 문리대 교수 연구실을 법대 교수에게 배정함에 따라 문리대 교수들의 항의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종합대학으로서의 당시의 성격과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이리하여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한 교수가 사범대학 학장으로 재임중이던 張利郁 박사였다. 교육학을 전공한 장리욱 총장은 민주주의 교육이념에 철저하였고 대학운영면에서도 이를 적용하였다. 그는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문리대 교수들을 설득하여 교수연구실 분쟁사건을 해결하면서 대학의 정상적 기능을 회복하는 데 노력하였다.
2) 행정기구와 재정구조
초기의 대학본부 직제는 3處·1局·9課로 조직되었다. 최초의 교무처장은 미국인 언더우드(Horace N. Underwood)였으며, 초대 학생처장은 미국시민권을 가진 金聖德씨였다. 초대총장과 함께 교무처장과 학생처장이 모두 미국인 또는 미국시민이었던 점 때문에 좌익계 학생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고, 민족주의적인 학생들도 이러한 현상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사무국장은 李桂元씨였고, 여학생처장은 총학생수 7,295명 중 385명의 여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孫貞圭 여사가 취임하였다.
각 단과대학의 행정기구는 각각 사정에 따라 상이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고, 그로 인한 행정의 혼란도 없지 않았다. 이런 점은 서울대학이 아직 종합대학으로서의 기구통일을 이루지 못한 연립대학적 성격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였다.
한편, 재정구조는 독특한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시기와는 달리 미국식 법규에 의하여 예산집행방식을 수정하였다. 즉, 재무부장이 모든 예산을 총괄·집행하는 방식으로 전환함에 따라 예산지출기관이 소멸하게 되었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 과도적으로 ‘國庫支出官’이 설치되었다. 본교의 예산운영도 이러한 과도적 회계제도하에서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본교에서는 물품취급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1949년부터 物品會計官吏, 物品取扱主任을 두어 물품취급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미군정의 과도적 회계제도는 1951년 12월 1일 財政法 施行令이 공포 실시될 때까지 계속 적용되었는데, 이러한 회계제도하에서 서울대학은 1946년 394,646,000圓의 국고지원을 받게 되었고 그것은 정부 대학교육비의 거의 전부인 93.3%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국고 외에 서울대학의 예산은 학생납입금과 후원회비로 구성되었다.
납입금은 각 대학마다 액수가 달랐던 바, 1948년도의 경우 신입생과 재학생의 납입금 총액이 각각 치대 21,600·11,000원, 문리대
11,900·6,400원, 의대 15,750·10,100원, 미술부 17,090·11,500원이었다. 이러한 격차는 각 단과대학마다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던 후원회비가 학생수에 따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단과대학에 따라 학생 납입금이 달랐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대학 예산운영이 단과대학마다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점은 당시
서울대학교의 연립대학적 성격을 보다 강화하는데 상승작용을 하였다.
1) 학사행정
(1) 學 制
서울대학교는 경성대학과 기존의 각종 전문대학을 통합·개편하여 이루어져 과도기적인 복합학제가 불가피하였다. 4년 연한의 기본학제와 함께 여러 가지 기왕의 유제가 혼재되어 있었다. 구경성대학의 예과제도는 1946년 신입생모집 이후 폐지되었고, 전문학교에서 통합·개편된 법대, 의대, 상대, 농대, 공대, 치대의 경우에도 전문학교의 개편형태로서 專門部가 부설되었지만 1946년 신입생모집 이후 폐지되었다. 또 구경성대학의 학생이 그 일부를 이루었던 법대와 공대에는 구학제인 3년제 과정이 병설되었다. 그리고 사대에는 구경성사범·경성여자사범의 本科 下級學年을 위해 전문부가 일시 부설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합학제는 1946년도 신입생이 졸업하는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4년 대학학부과정을 마치고 계속 학문연구에 뜻을 두는 학생을 위하여 수업년한 2년 이상의 대학원과정이 설치되었다. 초창기에
개설된 대학원의 학과는 국어학·국문학·영어학·영문학·철학·국사학·동양사학·윤리학·교육학·법학·정치학·심리학·물리학·화학·수학·전기학·섬유학·생리학·미생물학·병리학·위생학·내과학·소아과학·외과학·안과학·정신병학·이비인후과학·피부비뇨기과학·산부인과학·방사선과학·해부학·약리학의
32개 학과였다.
(2) 전입·편입·별과생·청강생·위탁생
국립서울대학교의 초기 학생은 전신학교에서 전입된 학생을 주축으로 1947년 이후의 신입생, 편입생, 별과생, 청강생, 위탁생으로 구성되었다. 1946년 10월의 총학생수는 7,295명(남 6,910, 여 385)이었다.
轉入學生 초창기의 학생은 前身學校의 전입생을 주축으로 하였다.
문리대, 법대, 공대, 의대에는 구경성대학의 학부 학생들이 전입하였고, 이들은 의대를 제외하고 구제도에 따라 3년을 수학하면 졸업할 수
있었다. 각 대학에 부설된 전문부에는 구전문학교 재학생들이 전입하였다. 이들은 희망에 따라 전문부를 졸업하거나 또는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진학할 경우 2학년 수료자는 무시험 전입이 허용되었다. 사범대학에서는 구경성사범, 경성여자사범의 본과 2년생(예과 5년 수료학생)이 학부 1학년, 3년생이 학부 2학년으로 전입되었고, 그 이하 학생은 전문부에 편입되었다.
編入學生 전입생으로 채워지지 않은 학년의 정원을 보충하기 위해 6년제 중등학교 이상의 우수한 학교로부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편입하였다.
1학년 편입지원자격은 전문부 2학년 졸업자이고, 2학년은 대학 1학년 수료자와 전문학교 3학년 졸업 또는 수료자, 의과대학 2학년은 다른 의과대학 1학년 수료자 또는 의과대학전문학교 졸업자, 그리고 의과 이외의 대학 3학년 수료자였다. 3학년 편입지원자격은 대학 2학년 수료자 또는 전문학교 4학년 졸업자이고, 의과대학 3학년은 다른 의과대학 2학년 수료자 또는 의과 이외의 대학졸업자였다. 그러나 4학년과 의예과부에는 편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 편입지원자들은 일정한 시험을 치르고 편입하였다. 그리고 이전 학교의 학점증명서류에 기초하여 이전 학교에서 이수한 학점을 인정하되, 많은 학점을 얻을 수 없는 경우에는 그 학과의 시험을 치른 후 학점을 취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편입된 학생수는 1946년도의 경우 문리과대학 339명,
법과대학 7명, 합계 346명이었고, 1947년도 8명, 1948년도 172명,
1949년도 158명이었다.
別科生 1946년부터 별과생제도가 시행되어 학장 및 교무처장의 승인을 얻어 약간명의 별과생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1947년 5월 31일 개정된 별과생 규정에 의하면 별과생에는 甲, 乙 두 종류가 있었다. 甲種別科生은 정식으로 본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자, 본교 교수자녀 및 假入學으로도 본교에 입학할 수 없는 자로서 직업관계로 인하여 경력과 실력이 전문계통에 속한 학과목을 수학할 수 있는 자이며, 갑종별과생이 다른 방법으로써 대학입학자격을 구비하여 입학을 하면 별과생으로서 취득한 C급 이상의 성적은 학부에서 그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전문계통에 관한 과목 이외의 과목은 수학하지 못하였다.
乙種別科生은 대학입학자격이 있는 자로서 직업 기타 관계로 인하여 수업시간마다 등교하여 수학할 수 없는 자이며, 이 을종별과생은 본교 지원생과 동일한 절차에 의하여 出願受驗하되 직업상 소속기관장의 승인서를 제출하여야 하였다.
별과생은 1학기 16학점 이상을 수강할 수 없었고, 재학중 정규학생과 동등한 학점을 취득하여 정규수업이 가능할 경우에는 학장 및 교무처장의 승인을 얻어 해당 정규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8년도
의과대학에는 70명의 별과생이 있었다.
聽講生 수강할 실력이 있는 자로서 청강코자 할 때는 餘席이 있는
한 실력고사를 거쳐 청강생으로 입학이 허용되었다. 청강생으로서의
소정의 입학자격을 취득한 후 입학시험에 합격할 때에는 정규학생으로 편입되며 또 청강생으로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자는 정규학생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청강생의 청강기한은 1년이었으나 신청에 의하여 연장할 수 있었다.
委託生 관공서의 재직자로서 소속기관장의 위탁에 의하여 官費委託生의 입학이 허용되었다. 위탁생은 학생정원에 포함되지 아니하며 학점이 인정되지 않았고 학위도 수여되지 않았다. 위탁생의 재학기간은
1년이었으나 요청에 의해 연장할 수 있었다. 위탁생이 수학중 소속기관의 직을 사임했을 때는 자연히 제적되었다.
(3) 학점제
일정한 필수과목을 이수하는 외에 광범위한 교과과정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하여 학점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점제의 시행에 애쓴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종전의 학년제에서 주간 배당시간수만을 학점수로 고치는 데 그쳤다.
처음에는 1학점 취득에 매주 2시간씩 1학기간의 수업을 요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주 1시간씩 1학기간의 수업을 요하게 되었다.
학점제에 의한 학년 구분은 33학점까지 취득한 자를 1학년, 34학점부터 77학점까지 취득한 자를 2학년, 78학점부터 123학점(48년도부터는 121학점)까지 취득한 자를 3학년, 그리고 124(122)학점 이상 취득한 자를 4학년으로 간주하였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180학점(졸업논문 4~6학점 포함)이었는데, 이를 4년간에 취득하게 하기 위해서 매학기 23학점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만약 매학기 17학점 미만이나 28학점까지 취득하려면 학기초에 학장 및 교무처장의 승인을 얻어야 했으며 매학기 23학점 이상을 취득하려면 전학기 성적이 평점 평균 B 이상이어야 하였다.
당시 재학중 180학점을 이수토록 한 것은 학생들에게 무거운 부담이었다. 歐美 대학들이 당시 120학점을 부과한 데 비하면 60학점이나
더 부과된 것이었다. 또한 교수요원의 부족, 도서관 및 실험실습 시설의 부족 등의 상황에서 180학점을 위한 무리한 강좌의 개설 또한 문제가 되었다.
(4) 입학·졸업제도
서울대학이 설립되던 1946년도에는 국립서울대학교의 이름으로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서울대학 최초의 신입생 모집은 신설된 예술대학뿐이었다.
그 후 1947년 교무처에서는 입학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여 당국의 인정을 받은 6년제 중학교 졸업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서 중등학교 졸업성적이 대학에 진학하여 능히 수학할 수 있다고 인정된 자에 한하여 입학지원자격을 주도록 하였다. 입학자격이 충분치 못한 자 가운데 외국에서 교육받은 자, 잡종학교 졸업자와 2년 이상 학교에 적을 갖지 못한 자에게는 일시 가입학이 허락되었다.
1948년도 신입생모집요강에서는 ① 舊制大學 예과 및 전문부 2학년 수료자 또는 수료 예정자, ② 대학입학자격 검정시험 합격자, ③ 기타 문교부 장관이 전 각처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한 자 등에게도 입학자격을 주었다. 이러한 규정은 1948년 8월 이사회 의결을 거친 후 학칙에 명문화되었는데, 이러한 입학제도로 인하여 신입생 선발과정에 많은 혼란이 초래되었다. 여기에 학생정원을 채우기 위한 편입·별과생·청강생·위탁생제도는 학생선발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미국제도를 본받아 설치된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① 新制大學 졸업자
② 舊制大學(3년제) 졸업자
③ 舊制專門學校 졸업 후 3개년 이상 연구실적이 있는 자④ 외국에서 대학 또는 전문학교를 졸업한 자로서 이상의 각항과 동등 이상의 자격이 있는 자 가운데 1호에 해당하는 자
입학자 선발고사는 필기시험 성적, 신체검사서, 이력서, 종전의 학업성적, 구두시험성적, 性行 평가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필기시험은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구분되었다. 필수과목은 국어·수학·영어·사회생활(역사·지리·공민)이었고 선택과목은 각 대학의 사정에 따라 달랐다. 입학경쟁률은 높은 편이었고 1947년 법대의 경우 18:1의 기록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당시의 입학지원경향은 법학, 경제학 방면에 몰리고 있었다.
서울대학 최초의 입학식은 1946년 9월 18일 등록을 필한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각 대학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 입학식은 ‘국대안’ 반대 파동의 진통 끝에 문리대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생들의 입학식이었다. 이공계통은 9월 16일, 상대는 10월 10일, 의대는 10월 15일에 개교하였다. 종합대학으로서의 출발은 이처럼 매우 험난하였다.
한편, 서울대학 최초의 졸업식은 1947년 7월 11일 앤스테드 총장의 주재로 거행되었다.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대학은 문리과대학 . 공과대학 . 법과대학 . 상과대학 . 의과대학 등 5개 대학이었고 졸업생은 모두 215명이었다. 사범대학은 2회부터, 예술대학 미술부는 4회부터, 음악부는 5회부터, 치과대학은 6회부터 학부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학위가 수여되었는데 당시 서울대학에는 공학사·농학사·문학사·이학사·법학사·상학사·경제학사·미술학사·음악학사·의학사·치의학사·수의학사 등의 학사학위가 있었다.
석사학위는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전공과목 30학점 이상 취득하고 논문을 제출하여 그 심사와 구술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수여되었다. 당시 수여된 석사학위의 종류는 문학석사·법학석사·경제학석사·이학석사·공학석사·의학석사의 6종류가 있었고 1949년부터 학위가 수여되었다.
초창기에는 정규 박사학위의 수여는 없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하지 등에게 명예 박사학위가 수여되었을 뿐이었다.
2) 교과목 편성
(1) 필수과목
필수과목은 교양필수과목을 말하는 것으로 전공학문만의 편협된 수학을 지양하고 인간생활을 풍부하게 하며 지도자적 인격을 도야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폭넓은 교양과 학식을 겸비한 지성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필수과목과 학점은 1948년 당시 다음과 같았다.
① 국어 및 국문학 8학점 이상
② 외국어 및 외국문학 8학점 이상
③ 자연과학개론 4학점 이상 혹은 자연과학계통학과 4학점 이상(문과)④ 문화사 4학점 이상 혹은 국어 및 국문학과 외국어 및 외국문학을 제외한 문과계통학과 4학점 이상(이과) ⑤ 체육 8학점 이상
군정기에는 이들 필수과목을 1학년 때에 취득하게 하고 그 교육은
문리과대학에 위촉하는 한편 교양과목을 담당하는 각 단과대학의 교수도 문리과대학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 각 단과대학별로
교양과목을 개설함에 따라 소기의 교육적 효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2) 전공과목
전공과목은 입학 당시 해당 대학장과 교무처장의 허가로 정하게 되어 있었다. 주전공과목은 최소한 60학점, 부전공과목은 25학점 이상을 취득해야만 했다. 전공의 종류는 1학과에 1전공이 원칙적이었으나
학과설치의 제약 때문에 경우에 따라 1학과에 수개의 전공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3) 선택과목
선택과목은 가능한 한 풍부하게 개설되어 학생들의 의사에 따른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전공학점의 과다, 선택과목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그 의의를 충분히 살리지는 못하였다. 특히 초창기 교수인력의 부족, 강의실의 부족, 실습기자재의 부족 등은 선택과목의 개설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사범대학에서는 필수과목, 전공과목, 선택과목 외에 교직과목이 설치되었고, 총 6학점의 교육실습도 부과하였다.
(4) 교육방법과 성적평가
초창기 도서의 부족과 시설의 不備는 교수의 강의와 학생의 학구활동을 제약하는 큰 요인이었다. 따라서 수업은 자연히 주입식 필기교수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개학년은 2개학기(1학기는 9월 1일부터 이듬해 2월말까지, 2학기는 3월 1일부터 8월말까지)로 나뉘어졌는데 초창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매학기 수업일수는 법정일수에 미달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수업일수 미달이 고질화됨에 따라 문교부에서는 1948년 6월 한 학기에 18주 이상 수업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여건상 제대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출석을 강요하기 위해 각 수업시간의 학생출석을 조사하여 결석생을 교무과에 보고하게 하고 어떤 과목이든지 총 수업시간의 1할 이상 결석할 때에는 출석부에서 제명한다는 임시규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학칙상에는 매학기 수업시간의 1/3 이상 결석한 자는 그 학과목에 대한 수험자격을 상실한다고 규정하였으나 학생이나 학교 측에 모두 쓸모없는 학칙이 되고 말았다. 결국 수학조건의 不備, 맹휴의 지속 등으로 당시의 수업은 불충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성적평가는 ① 출석, ② 매학기 3회 이상의 중간시험, ③ 학기말 시험, ④ 기타 교수의 숙제 등을 기준으로 하였고, 성적은 A, B, C, D,
E, F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W도 1947년까지 쓰였는데 이는 ‘退學生
比例數級’ 혹은 ‘취소’라 불렸으며 F(낙제)에 해당하였다. E(조건낙제)를 취득한 과목은 1년 이내에 학장의 승인을 얻어 교수의 지도하에 E를 제거하고 D학점을 취득할 수 있었다. 낙제된 과목은 그 과목이 필수과목일 때는 그 과목을 재수해야 하고 선택과목일 때는 그 과목을 재수하거나 다른 과목을 선택하여 그 학점을 보충하여야 했으며
한 과목에 대해 2회 이상 재수할 수 없었다. 한 학기 수강과목 중 8학점 이상 낙제되거나 2개 학기 학점 중 30학점 이상 낙제된 자 혹은 재학중 45학점 이상 낙제된 자는 제명처분하도록 되어 있었다.
3) 인사행정
해방 전 고등교육기관의 교수진이 거의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교수의 충원은 대단히 시급한 문제였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시점에서 교수요원의 절대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육이념에 입각한 새교육을 담당할 적합한 교수요원이 필요하였다. 미군정에서는 교수진의 충원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중등학교나 초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교수를 단시일 내에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군정청에서는 교육관계인사로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경성대학의 각 학부 부장과 관립전문학교 교장을 임명하였는데 서울대학의 교수진은 이들 각 부장과 교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경성대학의 경우 법문학부는 일제치하에서 국학을 연구하던 한국인의 학회였던 震檀學會의 구성원들이 교수진의 주축을 이루었고, 의학부는 구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으로 각 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공학부는 그 연구의 성격상 정치·사회적 변동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으므로 과거 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교수들을 중심으로 교수진이 구성되었다.
1946년 8월 서울대학이 설립됨에 따라 전신학교 교직원은 모두 사임을 하고 국립서울대학교 교직원으로 재임명되는 형식을 취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미군정과 교육기구를 장악하고 있었던 한국민주당의 정치적 이유가 내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일부 교수들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게다가 서울대학의 설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소위 ‘국대안’ 파동에 많은 교수들이 반대하면서, 반대교수들은 국립대학에 근무할 의사가 없음을 통고하고 대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국대안’ 반대교수들의 사직은 결과적으로 교수요원 부족을 더욱 악화시켰고 한국전쟁 이후까지 그러한 사정은 계속되었다.
국립서울대학의 연립대학적인 성격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학본부가 종합적인 기능을 가지지 못하였던 시기였으므로 교수의 정원문제도 대학본부의 규제나 계획보다는 각 단과대학의 재정형편에 크게 좌우되었다. 당시 예산이 각 단과대학별로 책정·집행되고 있어서 교직원의 채용도 이러한 단과대학별 예산사정 및 집행과 직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학별·분야별로 교직원의 수급상황은 불균등할 수밖에 없었다.
교직원의 직급은 일제시기 교수·조교수뿐이던 전임교직원의 직급을 1946년 12월 문교부의 직급규정에 의하여 敎授·準敎授·助敎授·專任講師의 직급으로 개정하였다. 이들 교직원을 모두 합하여 교수라고 칭하였고, 준교수는 곧 부교수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강의를 담당할 수 있는, 조교에 해당하는 敎授助務員이 있었다. 교직원의
자격기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붣교 수:박사학위의 소유자, 이와 동등 이상의 학계의 권위자 및 전문학교 졸업 후 5년 이상 연구한 자로서 10년간의 경험년수를 요함.
붣준 교 수:석사학위 소유자, 1년간 대학원에서 연구한 자 및 전문학교 졸업 후 4년간 연구한 자로서 10년간의 경험년수를 요함.
붣조 교 수: 석사학위 소유자 및 전문학교 졸업 후 3년간 연구한 자로서 8년간의 경험년수를 요함.
붣전임강사: 학사학위 소유자 및 전문학교 졸업 후 3년간 연구한 자로서 4년간의 경험년수를 요함.
이러한 자격기준은 식민지 시기 고등교육의 혜택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돌아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다분히 이상적인 것이었다. 또한 교수요원이 부족한 형편이어서 단과대학과 학문분야에 따라 이러한 기준의 적용에 차이가 있었다. 당시 문리과대학과 의과대학은 높은 수준의 교수요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다른 분야는 자격과 상관없이 교수요원의 확보가 어려웠다.
교직원의 임면은 이사회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사회가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운영에 관한 문제는 사실상 학장회의에서 논의되었고, 인사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사회에서는 승인을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교직원을 채용하려 할 경우에는 해당학과의 교수들이 합의하여 학장에게 요청하고 학장은 대학의 정원과 학과간의 교직원 비율을 고려하여 방침을 결정, 총장에게 임명을 요청하였다. 특히 문리과대학과 의과대학의 경우 학장은 때때로 인사문제를 교수회에서 논의케 하였다. 총장은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교직원을 임명하였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단과대학이 쥐고 있었다.
교직원의 신분보장은 법제적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관행에 따라 대체로 교직원의 신분은 보장되고 있는 편이었다. 교수가 해임을
당하였을 때 이사회에 출두하여 불복 사유를 진술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당시의 인사행정은 법제적인 규제가 약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학의 자율적인 영역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문교정책의 미숙, 그리고 ‘국대안’ 파동과 그 후유증 등의 현실적 여건은 교수의 학문연구활동을 크게 제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의 교수들은 강의와 강연, 그리고 연구활동에 인내와 용기, 정열과 노력을 다하여 임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의 제1단계 연구는 민족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그 막이 열렸어야 했다. 그러나 미소양대강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문은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에 휩쓸리게 되었다. 곧 학문의 영역에까지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쟁과 ‘국대안’ 파동의 영향이 미치게 된 것이었다.
인문학의 경우 주류를 이룬 것이 한국문화 또는 동양학 분야의 연구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趙潤濟, 『韓國詩歌의 硏究맦, 李丙燾, 『高麗時代의 硏究맦, 李崇寧, 『韓國音韻論 硏究맦, 孫晉泰, 『韓國民族說話의 硏究맦, 맥韓國民族史槪論맦, 高精玉, 『韓國民謠의 硏究맦, 金庠基, 『東方文化交流史論攷맦, 李相佰, 『韓國文化硏究論攷맦, 金斗憲, 『韓國民族理論의 展望맦, 柳洪烈, 『朝鮮獨立思想史맦, 李秉岐, 『가람詩調集맦, 李如星, 『朝鮮服飾考맦 등이다. 이들 연구는 일제시대에 발표했던 글들을 해방 후 단행본으로 묶은 것들이며, 대부분 乙酉文化社의 韓國文化叢書로 간행되었다. 학술지로는 맥震檀學報맦가 일제시대에 이어 계속 출간되었으며, 어학 전문 학술지인 맥한글맦이, 동양사학 쪽에서 맥역사학연구맦가 발간되었다. 한편 손진태와 이인영은 ‘식민사학’과 ‘맑스주의’에 대항하여 ‘신민족주의’ 학풍을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던 점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학문의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학문연구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식민지 시기 35년 동안의 사회과학분야는 대체로 일본의 사회과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주체적인 사회과학의 연구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맑스이론에 바탕을 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이 자본주의국가들의 식민지 통치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하여 설득력이 강한 분석으로 판단하고 그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경제학의 경우에 강하게 나타났다. 이 기간 중 41명의 경제학자에 의해 간행된 67권의 저작 중 신경제학파에 속하는 책은 3명의 학자에 의한 4권뿐이었고, 맑스주의 입장에서 저서를 낸 학자는 20명, 저술은 36권의 비중을 차지했다.
자연과학 계열의 경우 종합대학교로 될 당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의 4개 학과에 14명의 교수가 있었으며, 거의가 일본제국대학에서 교육받은 理學士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연구성과를 내기보다는 강의에 보다 치중하였다. 이들은 비록 일본의 교육방법과 그들이 써 온 교재에 의존하여 강의할 수밖에 없긴 했으나, 교수요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180학점을 졸업이수학점으로 하는 등 새로운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과과정에 보다 치중하였다.
공학계열의 경우 역시 자연과학 계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립서울대학이 창립될 당시 공학분야의 교수경력을 가진 한국사람은 모두 합해서 8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서울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는 4명에 불과했다. 이들 역시 연구활동보다는 강의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공학계열 교수의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기 위해 1949년부터 맛스미스문트 법안(Smith Mundt Act)맜에 의한 4명의 미국대학 파견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농학 분야 역시 한국전쟁 시기까지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의학계열은 1946년 개교 당시 기초의학교실로서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미생물학, 예방의학, 醫史學 등 8개 교실이 있었다.
여기에 기초의학 교수수는 25명이었다. 의학 계열 역시 교수연구활동의 조건이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한국전쟁 직전까지 9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16명의 석사를 배출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치의학 계열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맥朝鮮齒界맦(症例報告 3, 1946), 맥朝鮮齒科醫報맦(증례보고 6, 1947)에 증상·치료와 관련된 논문발표가 있었고, 朝鮮齒科醫學會에서 주관하는 3차에 걸친 학술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이외 수의학, 약학 계열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뚜렷한 연구성과를 낼 수 없었다.26)그러나 그나마 이 정도의 연구활동이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한 데에는 한국전쟁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우선 많은 교수들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납북되었고,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월북한 교수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연구활동은 전반적으로 이후 시기 연구활동의 기초가 되지는 못하였다.
1) ‘국대안’ 파동
대학의 자치문제는 대학의 운영뿐만 아니라 학문연구의 자유를 보장하고 대학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립서울대학의 경우 창건되는 과정에서부터 대학자치가 이미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1946년 7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과 미국인 문교부장 피핀췰에 의해서 발표된 맛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이 ‘국대안’ 파동은 전술한 바와 같이 대학의 자치문제와 밀접한 관련하에 전개되게 된다.
당시 좌익계의 일부교수와 학생들은 ‘국대안’을 대학의 다원적 운영의 이원화와 한국인의 우민화, 그리고 고등교육문호의 봉쇄를 목적한 신판 식민주의적 교육정책에서 나온 것이라는 반대이유를 내세워 많은 교수와 학생의 동조를 구하였다. ‘국대안’이 일본 식민주의적 교육제도를 청산하고 미국의 민주주의적 교육제도를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군정당국이 교수회의 존재를 약화시키고 임시관료이사회체제를 중심으로 대학을 운영했다는 사실은 대학자치의 신장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학문발전에 역행하는 처사였다. 따라서 좌익계 학생과 교수의 주장은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미군정당국은 대학자치, 학문자유를 위해서는 교육질서의 확립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좌익계에 의한 ‘국대안’ 반대로 해방조국의 고등교육활동이 혼동상태에 빠지도록 방관할 수 없는 중대사로 인식하였다. 당시 미군정보고서의 ‘사회’ 부분은 대부분 ‘국대안’ 파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졌다. ‘국대안’ 파동이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되자 군정당국도 일보 후퇴하여 임시이사회를 폐지하고 9개 단과대학을 대표하는 9명의 한국인 이사로써 이사회를 구성하며 한국인 총장을 임명하기로 하는 ‘국대안’ 수정안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1947년 3월 통과되었다. 그에 따라 4월 새로운 이사회가 구성되고, 이사회의 선출에 의해 李春昊 씨가 8월 제2대 총장에 임명되었다. 또 ‘국대안’ 파동으로 자퇴하였거나 퇴학당하였던 학생들의 복교 조치가 취하여지면서 ‘국대안’ 파동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대학자치와 관련하여 실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교수회의 권한과 기능에 관한 문제는 ‘국대안’ 파동 이후에도 계속 제기되었다.
1947년 3월 대학운영에 관한 입법결의안은 대학운영과 학문연구에 학장과 교수의 건설적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도록 하고 있으나, 실제로 대학운영에서 교수회는 거의 소외되어 있고 대학운영은 문교부의 지도하에 이사회와 학장회가 전담하였다. 교수회의 기능은 단지 학사 문제에 한정되었다. 1947년 3월 군정당국이 밝힌 바에 의하면 교수회는 학부교수회와 대학교수회로 되어 있고 각각 그 회장이 되는 학부장, 대학장에게 자문하는 역할만이 주어졌다.
교수회는 각 단과대학 단위로 운영되었다. 군정당국의 주장과 같이 교수회는 단과대학의 교과과정, 입학과 졸업, 학생지도 등 학사문제에 대하여 학장의 자문역할을 하였는데 대학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교수회규를 제정하여 시행하는 단과대학도 있고, 사범대학의 경우는 평의원회를 구성하여 학장을 그 의장으로 함으로써 학장의 자문기관의 역할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의결기관으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문리과대학이나 의과대학은 강력한 교수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초창기의 교수회는 법적 근거 없이 운영되었으므로 단과대학에 따라 기능의 차이가 있기도 하였지만 무시 못할 힘을 갖춘 단과대학도 있었다.
이러한 기능을 갖는 교수회는 인사문제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대학 일반운영, 학사 등에도 큰 권한을 가졌던 일제하의 교수회 기능과도 큰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일제하에서 공부하고 강의하였던 교수들은 민주주의 교육을 표방하면서도 대학운영에 있어서는 교수회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이사회 중심으로 운영해 나가는데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예는 1948년 4월의 연구실 배당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표출되었다. 1948년 4월 이사회에서는 문리과대학에 대하여 연구실 일부를 법과대학에 양도하도록 명령하였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중 문과는 문리과대학의 일부로, 법과는 법과대학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므로 과거 법문학부에서 사용하던 연구실은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분배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문리과대학에 대하여 연구실 일부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문리과대학 교수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이사회가 개입하여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문리과대학 교수회에서는 이러한 이사회의 개입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사진의 총사퇴와 총장의 인책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사회에서도 강경하게 맞서서 문리과대학장의 사퇴를 결의하여 통고하였다. 문리과대학 교수 일부는 사직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진통 속에서 총장이 경질되었고 제3대 張利郁 총장이 이를 수습하였다.
이 사건은 종합대학으로 출발한 서울대학이 아직 연립대학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또 이사회 중심의 대학운영체제의 문제점이 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교수회의 반발로 말미암은 이 사건으로 결국 이사회는 대학운영에서 제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점차 학장회가 대학운영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울대학의 창건과정에서부터 야기되었던 대학자치의 문제는 ‘국대안’ 파동이 진정되면서 일부 해결되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 때문에 명실상부한 대학자치와 학문의 자유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없었다. 진정한 대학자치와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2) 학생활동
해방 직후 좌우 정치세력의 대립은 학생운동에도 좌우대립을 초래하였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안은 학생운동을 「反託」과 「贊託」(실제로는 ‘모스크바 3상협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 입장)의 두 흐름으로 크게 나누어 버렸다. 그리고 1946년 8월의 ‘국대안’은 그 후 1여년에 걸쳐 학원을 좌우대립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찬탁」의 입장이었던 좌익계열의 학생들이 주로 ‘국대안’에 대해 반대하였던데 반해, 「반탁」의 입장에 서 있던 우익계열 학생들은 「反託鬪爭學生總聯盟(소위 ‘반탁학련’)」을 결성한 이후 ‘국대안’에 찬성하는 ‘건설학생회’를 조직하였다. 이 건설학생회는 각 단과대학 별로 구성되어 ‘국대안’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지고 ‘국대안’ 반대파 학생들에 대항하였다.
당시 건설 학생회에 참여했던 주요 학생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27)
붣법대 건설학생회 - 김봉환, 김택수, 최영근, 전영춘 등붣문리대 건설학생회 - 박준규, 김용성, 엄규진, 윤천주, 오기형, 전해종, 함영훈, 양호민 등붣상대 건설학생회 - 김재순, 고재청, 유호선, 장예준, 홍성철, 현영원, 이원범 등붣사범대 건설학생회 - 정원식, 김찬삼, 함완규 등
붣공대 건설학생회 - 마경석, 차경모 등
‘국대안’ 파동이 수습되면서 학원은 안정을 되찾아갔는데, 그러한 안정은 학원에서의 좌익세력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南朝鮮勞動黨 계열뿐만 아니라 勤勞人民黨 계열의 학생조직들이 비밀리에 지하조직으로 활동하였지만 이들은 학내에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극단적인 반공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던 국가시책에 따라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 9월 1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국대안’에 반대했던 좌익계열교원의 검속을 지시하기도 하였다.28) 그리하여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는 반공을 국시로 한 강력한 사상통제정책이 시행되어 학원에서의 좌익적 언행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에 입각하여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학생조직이 ‘學徒護國團’이었다.
초대 문교부장관 安浩相 씨에 의해 구상, 추진된 학도호국단의 결성은 ‘민주대한을 공산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내일의 역군이 될 학도들의 사상통일과 그들의 유기적 조직, 단체훈련을 통하여 정신을 연마하고 신체를 단련하여 학원을 수호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하여 헌신봉사할 수 있는 실력을 함양’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고 하였다. 문교부는 수개월간의 준비를 거친 뒤 1949년 1월 23일 학도호국단 조직요강을 발표하고, 1월말까지 중등학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 2월에 시·군 학도호국단 결성, 3월에 각 도 및 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을 결성하였다. 각 대학 학도호국단은 중앙학도호국단 직속으로 4월 20일까지 조직을 완료하였다. 4월 22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총재 이승만 대통령과 단장 안호상 문교부장관을 비롯하여 전국의 수만 학도들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학도호국단은 우선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만든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었다. 정부는 반탁학련 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탁학련과 건설학생회를 모체로 하여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당시 반탁학련 지도부내에서는 이승만정권을 지지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김구를 지지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결성된 학도호국단은 정부가 주도하여 교수와 학생을 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구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에서도 학생들의 기존단체가 해체되고, 9개 단과대학에 각 대학 학도호국단이 결성되고, 그 연합체로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각 대학 학장이 각 대학 학도호국단 단장이 되었고, 총장은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장이 되었다. 이러한 정부주도의 학도호국단 결성은 대학교수와 학생이 준군사적인 조직으로 편제됨으로써 대학의 자치와 학문적·사상적 자유 및 학생의 자치활동은 여러 모로 제약받게 되어 활발한 자치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상과 같은 학생의 정치적 관심에서 비롯된 학생운동과 문교당국의 대응책인 학도호국단 결성 이외에도 학생들의 과외활동은 아직 미숙한 단계이기는 하였지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학술활동을 비롯한 예술, 체육, 봉사, 종교 부문의 활동이 그것이었다.
각 대학 각 학과 단위로 학회가 조직되어 학술활동이 이루어졌으며, 문리과대학의 『大學新聞』, 사범대학의 신문인 『師範大學』, 그리고 1948년 3월 1일 창간된 서울대학교 종합신문인 『서울大學新聞』 등이 학내 소식의 전달과 학술소개, 학생들의 연구발표를 위한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각 대학 학도호국단 문예부에서는 학보를 발간하였다. 의과대학의 『醫大』(1950.4. 창간), 농과대학의 『農大』(1950.4. 창간), 치과대학의 『儲慶學報』, 공과대학의 『佛岩山』, 농대 수의학부의 『牧香』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 잡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간이 중단되었다.
또한 서울대학에서는 각 단과대학별로 운동부가 조직되어 체육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대외 출전시에는 연합선발팀을 구성하였다. 체육대회는 단과대학별로 열렸는데 1949년에는 제1회 서울대학교 종합체육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종합체육대회는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주최로 문교부와 서울신문사의 후원을 받아 전교생과 교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러한 행사는 서울대학의 종합대학으로서의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하향식으로 개최되었다.
연극활동을 중심으로 한 예술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사범대의 종합예술제, 치대의 종합예술제, 의대의 음악연주회, 예술대학 미술부의 미술전람회, 음악부의 연주회, 그리고 서울대학 전체행사로서 서울대학교 예술제 등이 열렸다. 제1회 예술제에서는 서울대학교 연극부의 창립기념으로 안톤 체홉의 『惡路』가 공연되었다.
종교활동으로는 단과대학 단위로 기독학생회와 가톨릭학생회가 조직되었고, 이들 단체는 연합하여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와 가톨릭학생회를 구성하여 종교강연회와 정기예배를 가졌다.
이러한 공식적인 활동 외에 학생들의 개인적인 학창생활은 학생들의 생활공간과 학교 캠퍼스내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숙가 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독특한 대학문화가 형성되어 나갔던 것인데, 당시는 각 단과대학마다 학문적인 분위기나 지역적인 위치 등으로 인하여 각각 분위기가 달랐고, 또한 前身 학교의 출신이 다르다든지, 편입생·전입생·청강생 등이 혼입되어 있다든지 하여 학생들 사이의 연령 차이가 심한 점이나 나이 많은 학생과 젊은 선생 사이에 별로 나이 차이가 없었던 점 등도 동질적인 대학문화를 형성하는 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최초로 시행되었던 남녀공학제도도 사회의 많은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학우로서의 동질감이나 연대감을 형성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는 해방 이후 새로운 대학문화를 형성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게다가 국대안 파동으로 인한 정치적인 분위기, 1950년의 한국전쟁은 대학문화가 순수성을 갖출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무력통일전략에 의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남북한의 분단체제를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이 한국전쟁은 직접적으로는 북한측의 무력통일전략에 그 발발동기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부추긴 대내외적 여건이 있었음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바로 남북한의 정권의 불안정성과 미·소간의 냉전체계의 심화였다.
이승만정권은 과거 미군정에 의해서 온존되었던 친일세력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좌익세력의 공격대상이 되었음은 물론 독립운동전선에 참가했던 우익세력의 지지마저도 받지 못하여 그 정치적 기반의 폭은 극히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은 곧 사회·경제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좌익세력은 제주도에서 총선거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1948.4) 정부수립 후에도 여수·순천반란사건(1948.10)을 일으키는 등 사회불안을 고조시켰다. 또 이승만정권은 경제정책의 잇단 실패로 극심한 경제적 불안에 직면했다. 1949년의 경우 정부세출의 60%가 적자세출이었고, 통화량은 미군정 말기보다 2배나 팽창하여 물가가 2배로 뛰었으며, 공업생산실적은 일제말기의 18.6%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치르어진 1950년 5·30선거의 결과 이승만 지지세력은 전체의석수 210석 가운데 30여 석밖에 얻지 못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은 가중되었다.
한편 1946년 처칠의 유명한 ‘鐵의 帳幕’ 연설 이후 개시된 유럽에서의 동·서 양진영간의 냉전은 1949년 중국대륙이 공산화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조짐을 보였다. 즉 북한은 1949년 3월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부대, 비행기 150대의 원조를 내용으로 하는 군사비밀협정을 소련과 체결했고, 또한 중국공산당과의 군사비밀협정으로 중공군에 참가하고 있던 약 5만 명의 한국인을 북한의 인민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군사력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이를 통해 북한은 1949년 이후 무력으로 남한을 점령할 노선을 수립하게 된다.
반면에 미국은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을 전후하여 동북아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정책을 확정하고 있었다. NSC(국가안보회의문서) 48과 NSC 68로 대표되는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반도에서는 육군의 주둔보다는 주변지역, 특히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해·공군력을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전투부대를 완전히 철수시키고 대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 두고, 약 1천만 달러의 군사원조계획을 세우는 한편 1950년 1월 한미군사원조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이후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승만정권은 북진무력통일을 외치고 있었으며, 북한 역시 무장력의 강화와 공비의 대남침투를 통해 전쟁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또한 38선에서의 남북한간의 교전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남북은 각각 38선 근처에 있던 개성과 해주를 위협하는 교전을 계속하였으며, 1949년 5월에 발생한 옹진반도에서의 전투는 한 달간 계속되면서 전쟁에 치닫는 듯한 양태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38선에서의 전투는 195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전국토를 점령하였다. 이에 미국은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였고, 유엔은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여 이를 규탄하는 한편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참전하였으며, 유엔군과 한국군이 합동으로 실시한 인천상륙작전(1950.9)을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10월 하순경부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다시 38도선 부근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나 북한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띠자 미국은 조심스럽게 휴전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미국내 여론의 악화와 1952년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를 고려한 것이었다. 미국은 전소련대사 케난을 통해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에게 휴전을 제안하였고, 소련은 이에 대해 유엔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2년만인 1953년 7월 당시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때 이승만정권은 휴전에 극력 반대하였지만 결국은 미국으로부터 ‘韓美相互安全保障條約’의 체결과 장기간의 경제원조 및 한국군의 증강을 약속받고 이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이후 제네바 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국·중국의 입장 차이로 인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국제적 중재에 의한 평화적 통일은 더 이상 어려워지게 되었고, 분단 고착화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남한은 1954년 미국과의 합의의사록을 통해 방위를 튼튼히 하였고, 북한은 소련·중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철의 장막을 쌓았다.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한국전쟁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인적·물적 손실만을 본다면 남북한에서 약 150만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산업시설과 건물·도로·교량 등은 거의 모두 파괴되어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전란으로 인하여 한민족이 큰 시련을 겪었던 것처럼, 창건 후 4년이 채 안 되었던 신생 서울대학도 전란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이 불과 사흘만에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한강다리가 끊김으로써 대학의 피난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많은 수의 교수들이 적 치하의 서울에서 발이 묶였고, 귀중한 각종 실험 기자재와 장서들을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남겨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서울에 남아 있던 고령의 崔奎東 총장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교수들이 拉北되는 운명에 처해졌고, 또 미처 피난하지 못한 많은 수의 학생들은 이른바 ‘의용군’으로 끌려가 전사하는 등 인적인 피해는 너무나 컸다. 또 9·28 수복 이후, 적 치하에 남아 있던 교수·학생들은 이번에는 ‘附逆’ 혐의로 조사를 받고 일부는 일시적이나마 파면·정직 등의 처분을 받는 등 그 정신적 상흔은 매우 깊이 남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속도서관의 귀중한 장서들은 인민군의 급격한 후퇴로 미처 반출·이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었다.
서울수복 이후에도 대학은 당분간 정상화될 수 없었다. 전쟁은 계속중이었고 그 전쟁이 대학을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또한 1·4 후퇴로 인하여 서울이 다시 점령됨으로써 대학은 물론 모든 교육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소강상태에 들어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에 문교부는 1951년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로 맛大學敎育에 관한 戰時 特別指置令맜을 공포하여 ‘戰時聯合大學’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지역별(부산·대구·전주·청주·대전·제주)로 교수와 학생의 소속대학을 불문하고 각기 피난지에서 전시연합대학을 형성하고 교육받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약 6천5백 명의 학생이 수강하고 있었던 이 전시연합대학은 각 대학이 독자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약 1년간 존속하였다.
1952년 전시 연합대학이 해체됨에 따라 다른 지방에서 수강하고 있던 서울대의 학생들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 온 본교로 복귀하였다. 학생들은 미군의 도움을 얻어 가교사를 짓고 단과대학별로 수업에 들어갔다. 이른바 부산의 ‘바라크 가교사 시절’로 들어간 것이다. 한편 1953년에 들어서 전선이 더욱 고착화되자 서울대학은 재경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하여 1953년 4월 서울의 약학대학 캠퍼스에 분교를 설치하고 신입생들에 대한 강의를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부산 본교─서울 분교’ 시절은 1953년 9월 부산의 본교가 서울로 이전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이러한 전시연합대학─바라크 가교사로 이어진 피난시절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서울대학은 그 기구를 확충하는 등 꾸준한 발전을
계속하였다. 1953년 4월 맛國立大學敎設置令맜의 공포와 함께 예술대학의 음악부와 미술부는 각각 단과대학으로 분리 승격하였으며, 농과대학의 수의학부 역시 단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또 이에 앞서
1950년 9월 약학대학(사립약학대학)을 본교에 단과대학으로 흡수한
바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학교는 이제 대학원과 12개 단과대학을 거느리는 거대한 종합대학으로 확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전란기의 서울대학을 이끌어간 임시관리책임자 金斗憲 박사(1950. 10.
6~1951. 9. 3)와 제5대 崔奎南 총장(1951. 9. 3~1956. 6. 8)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1) 전시연합대학
정부는 1951년 2월 26일 맛戰時下敎育特別指置要綱맜을 공포하여 각급 학교의 수업을 재개할 것을 시달하였다. 그러나 대학은 국민학교나 중등학교와 달라서 상당한 시설과 교수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피난 초기에는 그 재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전황이 차츰 호전되어 가던 1951년 5월 4일 문교부는 맛大學敎育에 관한 戰時 特別指置令맜을 공포하여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연합대학은 이미 1·4 후퇴 이전 수복된 서울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설치된 적이 있었다.
전시연합대학은 1950년 11, 12월 약 두 달 동안 서울에서 실시되었는데 그 운영은 ‘中央運營委員會’에서 담당하였다. 이 中央運營委員會의 위원은 각 대학과 중앙교육위원회의 대표 약간명과 문교부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 행정기관의 직원 약간 명으로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문교부장관(당시는 白樂濬)이었다. 이 전시연합대학에는 文學部·理學部·工學部·農學部·法政學部·醫藥部·齒醫學部·音樂部·獸醫學部·美術部·初級女子大學部·體育部·家政科를 두고, 각각 그 책임자를 정하여 그들로써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실제운영을 협의, 시행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전시연합대학의 학생은 약 500명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속속 징집되어 그 수가 줄어들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수업을 더 이상 계속하기 힘들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서울의 전시연합대학은 남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951년 2월 18일 전시연합대학은 부산으로 이동·설치되었다. 1951년 5월 4일 白樂濬 문교장관은 문교부령 제19호 맛대학교육에 관한 특별조치령맜을 공포하여 전시연합대학은 법적인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맛대학교육에 관한 특별조치령맜은 전시연합대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령 제2조에서는 ‘전화로 인하여 정상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의 학생은 그 기간 동안 타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였고, 제3조에서는 ‘정상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있는 대학은 그 학교 소재지에 疏開한 타대학의 학생이 취학을 지망하는 경우 사정이 허하는 한 이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제6조에서는 전시연합대학에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적합한 학부·학과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였던 바 이에 따라 전시연합대학을 문학부·이학부·의약학부·농수산학부·정치경상학부·수의학부·예술학부·체육과·가정과로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그 경비는 서울 및 부산의 국립대학 예산에 의존하기로 하였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교사의 부족이었다. 합동강의는 府民館에서 실시되었지만 각 학부별 강의는 교사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큰 곤란에 봉착했던 것이다. 사무소·교수사택·숙소·천막·창고 등이 교사로 이용되는 형편이었고, 그것조차 수가 부족하여 큰 곤란을 겪었던 것이다. 당시 부산시내에 있는 학교는 모두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사문제는 한때 국회에서까지 논의되었다.
전시연합대학의 운영은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운영위원회에서 맡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각 대학의 대표자의 호선에 의한 위원 약간 명과 문교부장관이 위촉하는 교육관계자 약간 명으로 조직되었고, 위원장은 위원회에서 호선하였다(맛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맜 제5조).
각 대학 대표 등 20명으로 구성된 전시연합대학 운영위원회의 위원장에는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인 최규남 박사가, 부위원장에는 당시 국학대학장인 姜世馨 박사가 각각 취임하였다. 또 전시연합대학의 학장직은 최규남 박사가 겸임하였고, 부학장은 서울대 문리대학장 方鍾鉉 교수와 세브란스의과대학장 金鳴善 교수가 맡았다.
운영위원회에는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국학대학교, 한국대학, 국민대학, 신훙대학(현 경희대학교), 단국대학, 세브란스의과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서울여자의과대학 등 10개교가 참여하였다. 당시 전시연합대학은 부산 외에도 광주·전주·대전에 설치되었고, 이 4개 대학에 수용된 학생수는 6,455명에 달하였으며, 동원된 교수는 444명이었다.
한편 전시연합대학의 합동수업이 1년여 계속되는 동안, 바라크 가교사가 어느 정도 건축되었고, 각 대학도 독자적으로 수업을 실시할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됨에 따라 각 대학이 다시 분리를 추구하였다. 이에 문교당국은 각 대학과 신중히 협의한 뒤 1952년 5월 31일자로 전시연합대학을 해체하였다.
2) 부산 가교사 본교와 서울 분교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1952년 5월 31일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자 각 지방에서 모두 부산의 본교로 복귀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농과대학만은 전선의 고착으로 전화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미 1951년 3월 수원의 본교로 복귀, 개강하였다. 서울대가 독자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교사의 건축이 큰 도움이 되었다. 즉, 1951년 6월 문교부에서는 ‘생벽돌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서 서울과 제주도를 제외한 8개도의 학도호국단사업으로 교사건축사업을 시작하여 그해 말까지 경남과 부산지역에 288개 교실을 건축할 수 있었다. 또한 1952년 2월에는 미8군과 유엔 민간원조처(UNCACK)를 통하여 가교사 1,000교실분의 자재를 받고 부산을 비롯한 각지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다. 가교사는 비록 바라크 건물이었지만 전시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이라도 수업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서울대학은 서울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하여 서울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분교에는 모두 신입생뿐이었으며, 1953년 4월 약학대학교사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53년도
서울 분교의 입학생은 372명이었고, 성균관대학 등 타대학 학생 150명도 함께 수강하도록 조치했다. 이들은 문과 A·B반, 이과 C·D반으로 편성되었고 분교장에는 金斗鐘 교수, 교무과장에는 全濟玉 교수, 학생과장에는 李廷紀 교수가 각각 임명되었다. 이 분교는 1953년
9월 부산의 본교가 서울로 복귀함으로써 본교에 통합되었다.
3) 교육기구의 변화
부산가교사 시절의 각 단과대학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文理科大學 문리과대학은 종로구 동숭동 31번지에 문학부를, 동대문구 청량리 163번지에 이학부를 남겨 두고 부산시 대신동 저수지를 싸고 도는 우거진 숲 옆(서대신동 3가 54의 3)에 가교사를 건축하였다. 부산으로 疏開한 동 대학은 方鍾鉉 교수의 뒤를 이어 취임한 金庠基 학장의 노력으로 바라크나마 몇 개의 교실이 건축되었고, 실험실도 마련되었다. 이 가교사의 대지는 842평, 건평은 357.5평이었다. 이곳에서 문학부 12개 학과, 이학부 5개 학과의 총 854명의 학생이 수강하였다. 이들을 가르친 교직원수는 56명(교수 20, 부교수 7, 조교수 12, 강사 13, 조교 4), 사무직원은 22명이었다(1952년도 현재).
한편 의예과부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철저한 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따라서 다른 대학 가교사와는 달리 4층 빌딩을 가지고 있었다. 수산회사 사옥의 일부를 임차한 것이긴 하였으나(부산시 대교로 2가 78번지), 대교실 2, 부장실, 교무과장실, 학생과장실, 외래강사실, 사무실을 갖추었고, 또 생물실험실, 화학실험실과 각 준비실 2개, 암실 등의 시설을 갖춘 실험실을 따로 지니고 있었다(서대신동 3가 54의 3).
의예과 등록생수(1952년 1학기)는 324명(정원 240, 재적생 324)이었고, 이들을 지도한 교직원수는 柳洪烈 부장을 비롯한 17명(교수 2,
부교수 2, 강사 13)이었으며, 그 중에는 영국인도 2명이 있었다.
工科大學 서울의 공덕리 본교사를 남겨 두고 피난 온 공과대학은 부산시 서대신동 3가에 있는 가교사에서 金東一 학장 외에 교직원 55명(교수14, 부교수8, 조교수 11, 전임강사 18, 교수조무원 4)과 학생 1,138명(재적 1,542명)이 모여 수업을 했다. 이 가교사에는 비록 빈약하나마 대교실 4, 중교실 1, 소교실 16, 제도실 3, 화학실험실 2, 물리실험실 1, 금속공학실험실 1, 그리고 학장실, 사무실, 숙질실, 창고 등이 있었다.
당시가 전쟁중이기는 하였지만 이승만 정권은 부흥계획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과대학 학생들의 학습과 연구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의 연구와 공부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던
실험기구의 부족, 실험실의 불비 등을 보충하기 위하여 당시 부산시내에 있던 대한발효공업주식회사, 국방부 第一造兵廠 , 國防部 科學硏究所 등 모두 16개 공장과 기타 각 도에 있던 모두 39개 공장의 실험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공대는 사대와 마찬가지로 부산시 괴정동 458번지에 기숙사를 갖추어 5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農科大學 농과대학은 1951년 3월 23일 어느 다른 대학보다도 빨리
수원 본교에 복귀하였다. 전선의 고착으로 수원의 농대 캠퍼스는 전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교수 6명, 부교수 4명, 전임강사 9명, 시간강사 22명, 조교 5명의 교수진은 689명의 등록학생을 지도하였다.
法科大學 종로구 동숭동 32번지의 본교사에서 피난 온 법과대학은 서대신동에 가교사를 마련하였다. 가교사는 대지 360평, 건평 225평이었는데, 당시 가교사의 철문 아치에는 “FIAT JUSTITIA, RUAT COELUM(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1952년 1학기에 등록한 학생은 723명(재적 1,716)으로, 그들은 高秉國 학장 이하 14명의 전임교수와 18명의 시간강사의 지도를 받았다. 사무직원은 6명이었다.
師範大學 사범대학은 을지로 5가 40번지의 본교사를 남겨 두고, 피난지 부산의 서대신동 3가 130번지에 가교사를 세웠다. 이때의 임시 교사는 대지 642평에 건평이 232평이었다. 그 설비내용을 보면 대교실 3, 중교실 8, 생물실험실, 화학실험실, 물리실험실, 가정실험실, 교육연구실, 영문과연구실, 도서실, 체육과연구실이 각각 하나씩 있었고, 학장실, 교수실, 사무실, 숙직실, 창고 등이 있었다. 사범대학은 다른 대학과 달리 피난중에도 남녀 기숙사를 갖추고 있었다. 서대신동 3가 116번지에 남학생 기숙사가 있었고, 본대학 가교사내에 여학생 기숙사가 있어 각각 50, 3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12개 학과, 1,081명(재적생은 1,640)의 학생을 38명의 교직원(교수 14, 부교수 9, 조교수 5, 전임강사 8)이 지도하였고, 사무직원은 10명이었다.
한편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는 가교사를 부산시 寶水公園내에 두고, 교장 이하 20명의 교원이 600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고, 동대학 부속중학교도 같은 곳에 가교사를 두고 28명의 교원이 75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또 동대학 부속국민학교는 서대신동 2가에 가교사를
두고 750명의 학생을 15명의 교원이 가르치고 있었다.
商科大學 상대는 부산시 서대신동 3가 95번지에 임시교사를 마련하였다. 비록 가교사이긴 하였으나 여기에는 5개의 대강의실과 학장실, 사무실, 호국단실, 학예부실, 2개의 교실, 강당, 그리고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다.
약 7백 명의 등록생(재적 966)이 경제학과와 상학과로 나누어 33명의 교직원(교수 5, 부교수 2, 조교수 6, 조교 10)의 강의를 받았다.
藥學大學 전시라는 상황에서 약학은 매우 중요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약학대학은 다른 대학에 비해 조금 더 많은 편의가 제공되었다. 을지로 6가의 본교사를 두고 피난 온 약대는 1950년 9월 본교에 편입되어 제1가교사를 부산시 봉래동 3가에, 제2가교사를 부산시 남포동에, 또 사무실.도서실.실험실은 대청동에 각각 두었다. 등록학생은 423명(재적 598)으로 분석화학교실, 무기약품화학교실, 유기약품화학교실, 생물화학교실, 제조학교실, 생약학교실, 식물학교실 등의 교실에서 수업을 계속하였다. 1·4 후퇴 때 가지고 내려온 2천 권의 도서와 70여 대의 현미경으로 어느정도 수업과 실습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약학대학은 단과대학으로서는 가장 늦게 본교에 편입되었다. 약학대학의 전신은 1915년 6월에 약사양성을 위하여 朝鮮藥學講習所를
설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이 강습소는 수업연한 1년으로, 3년 동안 54명의 졸업생을 내고 , 1916년 6월 1일 사립조선약학교로
개편되었다. 이 학교는 처음에 수업연한을 2년으로 하였으나 1923년부터는 학칙의 변경으로 수업연한 3년의 특별과(本科)를 병설하였다.
1930년에는 전문학교령에 의하여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되어
1947년 5월까지 존속되었다. 1947년 6월 이 경성약학전문학교는 사립서울약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50년 9월 30일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편입된 것이다.
藝術大學 서울 중구 남산동 1번지의 본교사를 떠나온 예술대학 음악부는 일제 때 동양에서 제일 가는 호텔을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은 부산시 암남동 186번지의 대지에 가교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주변 환경은 좋았다. 3부 7개과의 등록생 137명이 27명의 교직원(교수 4, 부교수 3, 조교수 4, 전임강사 2)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악기는 전쟁통에 거의 소실되어 버렸고, 새로 장만한 피아노 몇 대밖에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다. 학생수에 비하여 악기가 너무도 부족했으므로 학생들은 새벽 4시부터 발성연습을 시작하여 인근 주민들의 수면을 방해하기도 하였고, 난방장치가 없는 혹한의 교실에서 얼음장 같은 건반을 두드리기 일쑤였다.
예술대학 미술부는 부산 송도에 가교사를 세우고 대신고교에서 교내미술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예술대학은 원래 창설될 때에는 미술부와 음악부의 두 부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953년 4월 공포된 맛국립대학교설치령맜에 의해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으로 각각 승격·개편되었다.
醫科大學 의과대학은 전쟁 속에서 철저한 교육과 신속한 인재양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따라서 1952년도 제2학기에는 유엔군 군의관 약 10명이 각기 전공하는 분야의 특수의학 강의를 맡기도 했고, 서울여자의과대학생 150명을 수용하여 강의를 받도록 했으며, 일선에 나갔던 현역군인 중 의대재학생은 1951년도 겨울에 복교시켜 학업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평양·함흥의대생으로서 1·4 후퇴 때 남하한 학생을 편입학시켜 학업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의대는 부산의 광복동에 가교사를 지었으며, 학장 李濟九 교수를 비롯하여 교수 21명, 부교수 8명, 조교수 22명, 강사 14명, 기타 조교 등이 수업을 담당하였으나 상당수의 교직원이 군의관으로 종군하였기 때문에 10여 명의 학외 강사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의대의 부속기관인 부속병원은 광복동 3가 2번지에 있었다. 여기에는 임상교실 및 병실이 있어 각과 담당교수를 비롯하여 교직원이 회진하였고, 학생의 임상실습도 여기서 행해졌다. 병원장은 외과의 陳炳鎬 교수였다. 또하나의 부속기관인 3년제 부속고등간호학교는 송도에 두었다.
齒科大學 치과대학은 가교사를 부산시 대청동 4가 2번지에 두었다. 대강의실, 중강의실이 각각 1개, 소강의실이 2개, 기타 학장실·직원실·숙직실·창고 등을 갖췄으나 빈약한 시설이었고, 부속병원은 부산시내 토성동 경찰병원과 광복동 김치과의원내에 설치하였다.
종군·납북 등으로 교직원수는 반감되어 교직원 13명(교수 2, 부교수 1, 조교수 3, 전임강사 5, 조교 2)과 25명의 시간강사가 재적생 296명의 지도를 담당하였다.
獸醫學府 농과대학 수의학부가 피난처로 자리잡은 곳은 우리나라 유일의 國立中央家畜衛生硏究所였다. 이 연구소가 갖춘 완벽한 실험시설이 전적으로 수의학부를 위하여 제공되었고, 吳順燮 교수와 친면이 있는 영국인 수의학자 비치우드(O.T. Beechwood) 박사의 주선으로 가교사로서는 비교적 훌륭한 강의실이 마련된 것이었다. 등록생 210명(재적 300)은 전임교수 8명과 시간강사 9명의 지도를 받았다.
본학부는 1953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 780호로 공포된 맛國立學校設置令맜에 따라 수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우리나라 수의학은 구한말 1908년 수원농림학교에 농상공부령으로서 수의학 속성과를 증설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일제 때인 1938년 4월 1일 맛수원고등농림학교 규정맜이 개정되어 수의축산학과가 신설되어 전문학교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1947년에는 농과대학 수의축산학과에서 수의학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수의과대학으로 승격된 것이다.
그간 수의학부에는 ICA(국제협조처)원조로 약 7만 달러에 해당하는
실습 및 연구기재가 도입되었으며, 부속가축병원도 설치되었다.
이상과 같이 전쟁 중 각 단과대학은 부산에 가교사를 이용하여 수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전쟁의 와중인 1950년 9월 약학대학이 편입되었으며, 1953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780호로 맛국립학교설치령맜이
공포되어 수의학부가 수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예술대학은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으로 분리·개편되었다.
1) 교직원의 수난
해방직후 일본인들의 귀환으로 교수요원이 부족했다는 점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여기에 전쟁의 발발은 그나마 모자랐던 교수요원의 수를 더욱 감소시켰다. 많은 수의 교수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적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고, 그 결과 상당수의 교직원이 납북되었으며, 자진 월북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의 일기(『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는 이러한 상황을 잘 그려주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 혹은 보안서원에 끌려가 납북된 교수들은 고령의 崔奎東 총장을 비롯하여1) 치과대학장 李甲洙교수(생리학), 문리과대학의 학장 孫晉泰 교수(사학), 동 대학의 金九經 교수(중국문학), 金晋燮 교수(독문학), 李仁榮 교수(사학), 상과대학의 姜鋌鐸 교수(농업정책), 예술대학의 尹承旭 교수(조소), 安聖敎 교수(바이올린), 사범대학의 鄭淳宅 교수(수학), 李能植 교수(사학) 등으로 모두 당시 학계를 이끌고 있던 중견학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과대학의 金英根 교수(영어)는 자택에서 동대학의 좌익계 학생에게 납치되었고, 사범대학의 崔敬達 교수(체육교육)도 동 대학 학생자치위원회에 끌려가 감금된 이후 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불행은 오로지 서울대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전기한 바와 같은 중견학자들의 피납은 커다란 민족적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피납은 면하였으나 적 치하의 서울에서 90일 동안 일부 교수는 지하에 은신한 채 전전긍긍하였고, 일부 교수는 본의 아니게 대학에 나가 그들에 협력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교수들만이 아닌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적 치하에서 그들에게 본의 아니게 협력한 사람들은 초기에는 각 단과대학별로 조직된 소위 자치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후기에는 적 치하 서울대학의 교수로서 정식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신분의 위협을 받아 피동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고, 생활의 곤란도 한 이유가 되었다.
적극적인 협력을 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물론 주로 좌익계 교수·학생들로서 ‘국대안’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파동이 가라앉은 뒤에는 복직·복교하였고, 정부 수립 후 사상통제가 강화되자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등 묵묵히 지내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적극 영합 활동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서울이 수복될 때 대부분 자진 월북하여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남았던 교수들은 대부분 수복 후 대학당국에 의하여 심사대상이 되었다. 교수들을 심사하기 위해서 서울대학에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최규동 총장이 납북되었기 때문에 당시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으로 있던 김두헌 박사가 서울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로 임명되어 그를 중심으로 각 단과대학에서 한 사람씩 차출된 심사위원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사에 착수한 것이 1950년 10월이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각 단과대학에서 일차적인 심사를 하여 보고하면 그 결과를 보고 재차 심사를 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각 단과대학에서 먼저 심사가 이루어졌다. 남하하지 못한 교수들 모두가 심사대상에 올랐고 자술서, 투서 등을 참고하여 심사가 진행되었다. 대학본부 중심의 전체 위원회는 거의 再審 없이 11월에 각 단과대학의 심사결과를 문교부에 통고하였다(<표 1> 참조).
문교부에서의 재심결과 적 치하에서 활동이 현저하였던 소수에게 파면처분이 내려졌고, 정직 혹은 감봉처분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때 문교부에서의 최종처분은 서울대학의 자체심사결과보다는 훨씬 경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징계조치도 그 후 수차에 걸친 赦免 조치를 통해 백지화되었다. 이는 일반인들의 부역심사에 비해 훨씬 관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역심사는 이후 학문활동 발전의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이미 건국 후 반공의 국시 아래 강력한 사상통제가 이루어졌음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었지만, 전란 속에서의 사상정화조치는 이를 더욱 강화시킨 셈이었다. 이후 행정적으로 모든 인사서류에는 수사기관의 조서가 첨부되었다. 그러나 전쟁발발 직후 정부의 북진방송과 한강다리 폭파로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의 경우에도 1950년 10월말 단과대학별로 심사가 있었다. 즉 학생들에게 등록원서를 제출하게 하고, 거기에 적 치하에서의 행적을 자술하도록 하여 교수들이 심사를 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관대하게 처리되었으며, 이때 등록이 허락되지 않고 제적된 학생들도 뒷날 재입학을 허락한 경우가 많았다.
한편 전시라는 특수한 사정에 의하여 많은 교직원이 현역·문관·군의관 등으로 군에 근무하게 됨으로써 교단에 설 수가 없었다. 군에 근무한 교직원은 약 70명 정도였으며 특히 의과대학에서는 군의장교로 출전한 교직원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의 실정을 李崇寧 교수의 증언에 의해 들어보면, 李熙昇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해군문관으로, 權寧大 교수는 해군대령으로 근무를 했다고 하며, 李瑄根 교수(정치학과)가 정훈국장이 되어 그 밑에서 많은 교수들이 전사편찬에 참여했다고 한다. 또 의대교수들은 육군이나 각급 기관의 병원장으로 근무하였다 한다.2)<표 2>는 1951년 11월 현재의 교직원 현황을 보여 주는 표인데, 여기에서 보면 복무하지 않는 교직원이 115명으로 전체 재적교직원 358명(법대 제외)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중 군복무 교직원이 약 70명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40여 명의 교직원은 다른 일에 종사하느라 근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표 2>에서 보면 당시 재적교직원은 358명(법대 제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946년의 491명,3) 1950년 6·25 직전의 650명에 비하면 크게 적은 숫자이다. 그것은 그만큼 많은 수의 교직원이 피납·월북·군복무 기타의 사정으로 교단을 떠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서울대학은 그만큼 많은 인적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인적 손실로 인한 교직원수의 부족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것은 새로 교직원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교직원의 질적 저하까지 파생시켰다. 교수겸직문제와 아울러 또 하나 문제가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수의 질적 저하였다. 즉 교수요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대학교단에 서게 되는 사례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교수자격에 대한 법제적 규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들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엉터리 대학교수’라는 말이 항간에 떠돌기도 하였으며, 이는 곧 대학의 권위와 직결되어 많은 문제를 파생시켰다. 서울대학에서는 자격미달자가 교단에 서는 일은 없었지만 이러한 전반적 추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많은 교수가 타대학교수를 겸직하였고, 신진들이 교수요원으로 등장하는 사례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자연히 겸직교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즉 필요한
교수요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사립대학에서는 타대학의 전임교직원을 자기 대학의 전임교직원으로 채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겸직교수문제는 피난지에서 교수들이 생활근거를 잃고 심한 생활난에 빠져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서울대학에서도 많은 교직원이 타대학에 출강하였고, 또 타대학의 전임을 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교수겸직문제는 한때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교수요원의
부족과 교수들의 생활문제를 고려하여 1952년 6월 전국총학장회의에서는 3, 4개 대학에의 전임은 불허하나 2개 대학 전임은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2) 도서관의 수난
전쟁의 발발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 중 하나가 부속도서관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전쟁의 발발과 발발 3일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부속도서관에 있던 장서들은 고스란히 남겨 두고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9·28 수복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짐에 따라 적군도 도서관의 장서 일부를 반출·이송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1·4 후퇴 때를 당하여 도서관 당국자들은 규장각도서 가운데 귀중본을 가지고 피난하려 하였다. 연세대학의 전도서관장 閔泳珪교수에 의하면,당시 문교부장관이던 白樂濬 박사는 트럭 8대를 긴급 동원해서 그 중 5대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남은 3대를 국립도서관으로 보냈었다. 규장각도서 중 『承政院日記』 3천여 책과 『王朝實錄』 江華本·太白山本, 그리고『日省錄』, 『備邊司謄錄』 등 6천3백여 책이 부산으로 소개된 것은 이때 5대의 트럭 덕분이었으려니와, 나머지 대부분의 도서는 물밀듯이 닥쳐 오는 적군에 송두리째 맡길 수밖에 없었다.4)
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시의 본도서관 副圖書員 白麟 씨가 1962년 1월 革命檢察部長에 보낸 귀중도서 소개에 관한 확인서에서 보다 상세히 증언하고 있다.
一. 규장각도서 중 귀중도서 소개 경위: 1950년 12월 10일 당시 관장 李丙燾 교수의 지시에 따라 본인은 제1차로 承政院日記 3,045책을 부산에 소개하여 동년 12월 17일 釜山管財處(부산시 光徽洞 소재) 창고 4층에 극립도서관·민족박물관·德壽박물관·국립도서관 등의 도서와 함께 보관하였으며, 제2차로 동년 12월 22일 당시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장 金斗鍾 교수에 의하여 이조실록(강화본) 1,188책 및 일성록 2,329책을 부산에 소개하였던바 前記 창고가 협소하므로 경남 대한부인회(부산시 대교동 소재) 하층 창고에 우선 보관하였고, 제3차로 동년 12월 28일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서 扈基顯 씨에 의하여 소개한 이조실록(태백산본) 864책과 비변사등록 237책도 역시 前記 부인회 창고로 이장하였음. 그 후 1951년 1월 23일 동부인회로부터 전기 창고의 명도요청을 받고 관재처 창고에 소개하였던 제1차분 승정원일기를 경상남도 내무국 회계과 제2창고를 차용하여 이장하고, 동시에 부인회 창고에 보관하였던 제2차분 소개도서 및 제3차본 소개도서 전부를 前記 경상남도청 창고로 이장·보관하였던 것임.
二. 서양서 및 동양서 중 귀중도서 소개 경위: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 소장인 양서 및 동양서 중 귀중본의 소개를 당시 국립박물관 연구과장이던 金元龍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음. 1950년 12월 (일자 미상) 前記 귀중본을 미군장교 (당시 서울대학교 도서관 건물은 미8군에서 사용하고 있었음)가 국립박물관으로 싣고 와서 “이것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전해 달라”고 부탁하여 왔기에 국립도서관에서 이를 인수하여 국립박물관의 최종 소개품과 함께 부산에 옮겨 전기 경남도청 창고에 보관하게 되었음.
그리하여 동창고에는 본관 소장인 전기 소개도서만이 보관되었을
뿐이며 당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 소장 소개도서를 보관한 도청창고 옆 방은 당시 내무부의 청사진제작실로 사용하였으며, 타기관의
소개품은 동창고내는 물론 인군 창고에도 보관된 사실이 전혀 없었음은 본인 외에 당시 본관 직원이 알고 있는 사실임. 전기 소개도서는
1952년 8월 (일자 미상) 이병도 관장의 후임으로 취임한 鄭光鉉 교수가 사무인계를 위하여 이를 점검한 바 있으며, 그 후 1954년 6월 18일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 서무과장 李相俊 씨와 서무계원 金馨鎬 씨가
下釜하여 전기 도청 창고에 보관하였던 규장각도서 및 귀중본을 서울의 본관으로 이반하여 왔음.
이상의 증언은 소개 당시의 긴박했던 사정들을 잘 말하여 준다.
이렇게 하여 본대학의 규장각 도서는 그대로 온존될 수 있었다. 한편, 1951년 9월에는 부산에서의 피난수업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장 이병도 교수를 비롯, 정광현·李用熙 교수와 직원 백린 씨는 서울에 올라가 도서관에 남아 있던 도서 가운데 약 2만권의 도서를 반출, 부산에 옮겨와 임시도서관을 개설하였다. 당시 임시도서관은 부산시 동대신동 문리대 임시교사 옆에 서고, 학생열람실, 사무실 등 약 80여 평에 달하는 목조가건물(신축)에 자리잡고 있었다.5)1953년 9월 부산의 피난본교가 해체되고 서울로 본교가 완전히 이전해 왔을 때 도서관 당국자들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책들이 문리대, 법대, 박물관 창고 등에 흩어져 있었고, 심지어 일부는 가마니에 넣어진 채 운동장에 깔려 있기도 했던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어느 누구도 책의 중요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군 막사만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전쟁 중에 散佚된 책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약 1만여 권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오늘날 규장각 귀중도서 가운데 파손된 부분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수난에 그치고 도서관 장서 전체에 큰 변동이 없었던 것, 특히 대부분의 귀중도서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불행 중의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이 시기 도서관과 관련하여 특기해 두어야 할 일은 피난 당시 본교 문리대학장이던 고 방종현(號 一蓑) 교수의 구장서 맛一蓑文庫맜 5,200여 책이 1953년 7월 25일자로 李海羅 여사에 의해서 본도서관에 기증된 것으로, 이 책들은 국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오늘날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전란으로 인한 도서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952년 5월에 출판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국서적의 번역출판을 비롯하여
제반 출판문화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하여 1952년에는 10권,
1953년에는 19권의 외국서적이 번역·출판되었다.
전쟁으로 국방예산의 대폭 증액을 불가피하게 했고, 반면에 문교예산은 대폭 축소 조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문교예산은 정부예산 전체의 11.4%를 차지했지만, 문교예산이 정부예산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도에 5.7%, 1951년도에는 2.6%, 1952년도에는 2.0%로 급격히 떨어졌고, 1953·1954년도에도 각각 2.6%, 4.2%에 머물렀다.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시설의 재건과 실험기구의 복구를 위하여 재정수요는 급증하였으나 문교예산은 반비례적으로 감소되었으니, 각 학교의 운영비 대부분을 등록금에서 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교예산이 대폭 축소하였기 때문에 국고에서 지출되는 서울대학교 예산도 1948년도의 2.0%를 정점으로 1949년 0.8%, 1950년 0.5%, 1951년 0.2%, 1952년 0.3%, 1954년 0.4%로 감소되어 1952년도에는 교직원봉급이 예산에 책정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 국가예산도 균형예산이 아니고 적자예산이었다. 여기에 유엔군 대여금으로 인하여 인플레는 더욱 심각해졌고 정부의 적자재정은 1953년도에 이르러 530억 환에 이르게 되었다. 1951년의 마이어 협정과 1953년의 통화개혁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국가적으로 긴축재정을 실시하게 됨으로써 그나마 축소책정된 서울대학의 예산도 다시 삭감되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재정형편하에서 서울대학은 그 운영에 당장 필요한 총경비 12억 6천만 환(1952년도 본교 국가예산의 약 3배)을 염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서울대학은 외국의 원조에 부득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대학은 韓美財團에서 保健部를 통하여 21,500달러를 원조받고, 본교에서는 이를 의과대학에 비제한용으로 1만 달러, 의과대학 장학금으로 6천 달러, 부속간호고등학교에 1천 달러, 서울대학교 학생 전체에 대한 장학금으로 2천 달러, 사범대학 영어교육비로 2천5백 달러를 각각 배정하였다.
1952년도에는 UNKRA(유엔한국재건위원단) 교육원조비 7,233,633달러가 우리나라에 배정되어 각 대학은 교실신축, 교실 營繕, 도서구입, 실험기재구입 등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동년 UNKRA는 1백만 달러를 추가로 원조하여, 문교부장차관·서울대총장·서울의대학장·이화여대 의대학장·세브란스의대학장 등이 1952년 3월 15일 문교부에 모여 그 활용방법을 논의한 결과 현대적 시설이 완비된 의과대학부속병원을 설치하기로 결정을 보아 의대부속병원은 피난처병원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한편 문교부는 1952년초에 미8군의 주선으로 민간원조처를 통하여
가교사 1,000교실의 건축자재(목재, 시멘트, 洋釘, 유리 등)를 원조받았고, 이 가운데 문리과대학에 10교실, 의과대학에 10교실, 사범대학에 31교실 등이 각각 배정되었다. 미국은 1951년 8월 15일까지 ‘건축장비 및 보급품’으로 총 1,235,000달러의 물품을 한국에 지원했는데, 이 중 일부가 가교사 건축에 소요되었다.6) 이 가교사들이 마련됨으로써 전시연합대학은 해체되고 각 대학은 독자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
서울대학의 종합지인 『서울대학신문』은 1948년 3월 1일에 창간되었으나 처음에 주간으로 발행되다가 경비문제로 월간으로 바뀌고, 그나마 전쟁발발로 인하여 17호를 끝으로 발간이 중지되어 버렸다. 1951년초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자 대학당국과 학생들간의 의사소통은 오히려 더욱 절실히 요청되었고, 의사소통의 기구로서 대학신문의 발간이 요청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하의 여러 악조건은 이러한 당위적인 요청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각 대학이 나름대로 신문을 갖는 것을 지양하고
범대학적인 신문을 갖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갔다. 이 점에 관해서는 1952년 1월 관계기관에 배포된 대학신문 발간취지서 맛대학신문을 내면서맜에 잘 표현되고 있다.
民族恒久의 번영과 인류영원의 복리를 위하여 대학이 負荷한 사명은 크다. 학문과 교육에 있어 대학은 언제나 바른 이념과 높은 수준을 견지하면서 新境의 개척과 俊才의 양성에 전력할 것이니 민족의 긍지가 여기서 자라고 인류의 희망이 여기서 싹튼다. 그러므로 대학은 불순한 사상의 조종에 좌우되거나 무엄한 권력의 억압에 위축됨이 없이 오로지 그 본래의 사명과 독자의 입장에서 진리탐구와 인간도야를 구상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더구나 오늘날 학문과 교육에 있어 선진 제 외국에 멀리 뒤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獨裁傀儡의 浸潤을 막기에 시급하고 민주자유의 기반을 닦기에 日淺한 대한민국에 있어서 대학의 임무는 더우 증대하고 緊切한 바가 있다.
다른 날 百花燎亂의 盛觀을 이루기 위하여 대학마다 각각 특색을 가지는 것도 좋고, 각각 특색을 가지기 위하여 割據主義로 나가는 것도 平穩正常한 시기라면 무방하지만, 학문의 촉진을 위하여 협동작업과 학원의 공동범위가 대학 금일의 중대 且緊한 임무임에 분급할 때 각 대학간에 유기적 유대를 가짐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더구나 전화로 인하여 각 대학이 처처에 피난분산된 관계상 왕왕 소식의 연락이 지연 내지 두절되는 감이 불무한 현상임에랴? 이에 신문의 발간이 착상되어 제하여 『대학신문』이라 한다.
『대학신문』은 그러므로 종래에 흔히 있던 어느 한 대학의 교수와
학생간의 동인지와 같은 체제와 내용을 떠나서 범대학의 공기로 출발한다. 이리하여 각 대학의 碩學 독학들의 주장·견해·연구보고는 물론이요 국내의 문교행정면, 교육계, 학계의 뉴스와 해외의 학계, 문화계의 동향도 수시로 보도하고 그 위에 대학생활 전반의 이모저모를
지면에 수놓아가면서 敍上 대학임무 완수의 협조에 매진하려고 한다.
범대학의 公器로서 대학 상호간의 연락과 학술연구의 협동 연구작업에 이바지하려는 뜻은 창간호에 기고한 당시 연희대학교총장 金允經 교수와 대한교육연합회장 趙東植 선생에 의해서도 표명된 바 있지만 이러한 취지는 전쟁 전의 각 대학교의 신문이 가졌던 특수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고 『대학신문』의 발간이 서울대학교가 중심이 되면서도 전쟁 전의 『서울대학신문』과는 다른 제호와 체제를 갖게 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전쟁 전 제17호까지 발간되었던 『서울대학신문』과는 직접 그 맥이 닿지 않는 『대학신문』이 창간되었다. 1952년 1월 15일 공보처의 인가(제483호)를 얻어 같은 해 2월 4일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최규남 박사를 발행·편집 겸 인쇄인으로 하고, 徐恒錫 씨를 주간, 趙豊衍 씨를 편집국장으로 하여 부산시 광복동 3가 3번지에서 창간호를 내게 되었다. 당시 신문체제는 71호(1984년 3월 29일자)까지는 타블로이드판 4면이었고, 72호부터는 대판으로 확대되었다.
당시의 발행부수에 관해서는 자세한 자료가 없어 확인키 어려우나 초기에 주간을 역임한 徐恒錫 씨의 증언에 의하면 초기의 발행부수는 약 1만 부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 8천부 정도가 본교생에게, 그 나머지가 외부로 나갔는데 전시연합대학 해체 이후에는 본래 범대학신문을 지향했던 『대학신문』이 타대학에 전달된 것은 한 학교에 100부를 초과하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가 되어 사실상 서울대학의 신문으로 되어 갔다. 환도 전후 편집에 관여했던 尹胄榮 씨는 환도 전에 타대학교에 나간 신문의 총부수는 2~3천 부였다고 역시 증언하였다. 그리고 당시 신문발간을 위한 운영비는 학생들의 등록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편 초기 『대학신문』의 지면배정과 내용을 살피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1면: ① 사설 또는 시론 ② 문교행정, 교육계, 학계(때로는 출판계, 종교계, 문화계)의 뉴스 ③ 시사에 대한 학계의 견해 ④ 주간시사 抄錄 또는 해설 ⑤ 단평제2면: ① 학자들의 연구보고 ② 연구소식 ③ 決定語彙 ④ 학자동정 제3면: ① 해외학계·문화계의 동향 ② 외국학자·문화인의 특별기고 ③ 해외유학생의 통신 ④ 해외단신
제4면: ① 대학생활의 이모저모(隨想) ② 각 대학 학생회의 부내소식 ③ 학자의 餘技 ④ 학생의 소리
기고자의 신분을 보면, 창간 후에 타대학 행정가들의 의례적인 글을 약간 볼 수 있지만 대부분 학구적인 글들은 서울대 교수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으며, 한 가지 이채로운 것은 이 신문을 문교부 관계자들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학생의 투고를 보면 역시 대부분 서울대 학생들의 것이고, 연희대·숙대 등 타대학 학생들의 글이 간간이 눈에 띤다. 초기에는 타대학을 서울대와 균등한 입장에서 소개하고, 또 광고란에도 각 대학의 신입생 모집공고가 있어 범대학신문으로서의 기능을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지면의 배분, 기고자의 경향 등을 보아 처음의 시도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의 글을 통해 초기 신문제작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대학이 판잣집에서 셋방살이하던 시절이라 사무실이 있을 리 없다. 우선 총장실 한구석에서 편집을 했다. … 잠시 국제시장내에 있던 음대 가교사내의 한 창고에서 편집을 하기도 했으나 오래 쓰지 못하고 金善琪 교수(당시 학생처장) 사택에서 편집을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신문을 발행할 자금도 확보돼 있지 않았고, 원고를 써줄 만한 마땅한 인사도, 원고를 쓸 만한 여유 있는 학생도 없었다. 또한 전쟁이 막바지에 올랐던 당시 고정 독자를 확보한다는 것도 힘들었다. 1952년 9월 22일 전임기자이던 尹胄榮 씨가 초대 편집국장으로 취임하면서 책임편집체제가 확립된다.
기존문화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기존신문이라는 것이 초라하였기에 『대학신문』은 호를 거듭함에 따라 대학인은 물론 사회인사들의 호응을 받게 됐다. 이런 격려와 성원에 힘입어 51·55·60호 등은 8면으로 증면 발행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간지가 겨우 타블로이드판 4면을 내고 있던 것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7)
초창기, 그것도 전시하의 어려운 여건하에서 『대학신문』은 창간의 목적을 그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불완전하나마 지성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내외 학계의 동향을 전해 주던 『대학신문』의 눈부신 활동의 모습을 우리는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다.
범대학의 신문임을 자부하며 출발한 본신문은 1953년 10월 환도와
더불어 발행소를 동숭동 서울대 구내로 이전하였고, 각 대학도 제각기 신문을 복간하며 발행하게 됨에 따라 현실적으로 범대학의 신문으로서 당초의 이상을 실현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지면을 통해서 볼 때도 제54호(1953.7.6)까지 실리던 타대학 학생들의 문예란 투고가 그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즉 환도를 계기로 『대학신문』은 범대학신문에서 서울대학신문으로 사실상 그 성격이 바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 교직원임면 제도
많은 교직원이 전쟁으로 이산됨으로써 교직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고, 이를 조급히 메우는 과정에 겸직교수문제 혹은 질적저하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교수임용에 대한 자격요건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은 데에서도 말미암은 것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교원의 인사에 관한 기준을 확립하는 문제는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에 문교부는 우선 1952년 4월에 맛敎育法施行令맜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대학은 1개 학과에 7인 이상의 전임교직원이 있어야 하며, 전임교직원은 매주 9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책임시간을 배당받아 수업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단 교직원수에 있어서 2개 학과 이상인 경우에는 다소 감축할 수 있어 매학과마다 7인 이하로 둘 수도 있도록 하였다. 이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이 시행령에는 교직원의 임용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문교부는 1953년 4월 18일 맛敎育公務員法맜을 제정공포하여 교육공무원의 자격·임용·보수·연수와 복무·신분보장·징계·소청 등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또 맛敎育公務員法맜과 함께 공포된 맛國立學校設置令맜에도 서울대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정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인사행정관계로는 직위별로 열거하여 교수·부교수·조교수·전임강사·조교 등의 교직원과 이사관·서기관·사무관·주사·서기의 사무직원을 둔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다. 그리고 맛교육공무원법맜에 의거하여 맛敎育公務員懲戒令맜(1953년 7월 6일), 맛敎育公務員資格檢定令맜(1953년 10월 22일), 맛敎育公務員任用令맜(1953년 11월 1일), 맛敎授資格認定令맜(1953년 11월 13일) 등이 연달아 발표됨으로써 교육행정은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일련의 법령에 따라 교직원의 임명절차, 자격기준, 신분보장에 대한 내용이 규정되었다. 먼저 교직원 임명절차에는 교수회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즉 교육공무원법 제8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① 총장·부총장·학장(대학교의 학장 제외)은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 문교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 대학원장·학장(대학교의 학장에 한한다)·교수·부교수·조교수는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 총장 또는 학장(대학교의 학장 제외)의 제청으로 문교부장관을 경유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즉 조교수 이상의 교직원 임용·승진을 위해서는 교수회의 동의를 얻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한 논란을 겪어 통과된 것이지만, 인사행정면에서뿐만 아니라 대학의 자치라는 관점에서도 상당히 큰 의의를 갖는 것이었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다음 교수의 자격기준을 보면 <표 3>과 같은데, 학사학위 소지자가 경력 10년으로 교수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당시 교수요원의 부족 등의 여건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교육공무원의 신분보장문제를 살펴보면, 우선 그 정년을 65세로 하였다. 그리고 정년에 달하기 전에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免職·休職·停職·轉職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직무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생기지 않는 한 어떠한 사유로든 교육공무원 특별징계위원회의 의결로써만 징계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대우에 있어서도 교육공무원은 일반공무원보다 우대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주요한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던 교육공무원법과 일련의 공포로 서울대학의 인사행정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전시였기 때문에 불합리한 점도 있었다.
1953년 11월에 공포된 교육공무원임용령에서는 취득권 인정을 규정하여 ‘단기 4285년(1952년) 5월 6일 이전에 서울대학교 총장이 임명한 자’는 교수로서 계속 근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 취득권
인정은 법령 공포 당시에 재직중인 자에 한하여 인정되었기 때문에
외국에 유학하거나 종군중이던 교수들의 경우가 문제로 제기되었다.
유학중인 경우는 재직자로 일단 규정할 수 있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종군중인, 혹은 소재불명의 교수들이었다. 그리하여 서울대학교는
동법령 공포와 함께 공고를 통하여 향후 1년간을 기한으로 하여 복직토록 하고 일단 휴직조치를 취하였다. 따라서 그 1년 안에 대학에 돌아오는 경우에는 취득권 인정으로 바로 복직되었지만, 그 기간을 넘긴 뒤에는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서 신규임용의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되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군한 교직원들은 의과대학의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환도 이후 신규임용의 절차를
밟아야 하였다.
2) 대학자치의 제도적 보장
피난지 부산에서의 고등교육의 실상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인적 손실이 있었으며, 시설이라고는 겨우 강의할 수 있는 가교사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건 위에다 1952년 9월
정부는 국립대학교를 각지에 증설하였고, 사립학교들도 그 규모를 크게 하여 종합대학교로 승격되는 예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아울러 살필 때에 이러한 대학의 양적 증가는 전시의 인적·물적 손실을 고려할 때 그 질적 저하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연구와 교육활동은 극히 부진한 형편이었다. 교수는 생활보장이 안 되어 동분서주하면서 호구지책에 급급하는가 하면, 학생들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온전한 대학생활을 해나갈 수 없었다. 즉 대학의 질서는 전화로 마비되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교수는 휴강하고, 학생은 결석하고, 교실은 난잡하여 학교는 학생을 파악 못하고, 학생은 교수의 얼굴을 분별 못하며, 사회의 풍조는 학원 안에 침입하여 도구로서 이용하려고 하고, 학생은 거리에서 헤매며, 교수는 학술행상에, 학생은 학점모리에 전락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학원의 현실이라면 이것도 학원의 자유라고 칭할 수 있을까.8)
이러한 풍토 위에서 대학의 권위는 제대로 세워질 리 없었다. 특히 전란중에 대학생에게는 징집이 보류되어 있었으므로 대학은 병역 기피소라는 말까지 나왔고, 교수진의 질적 저하를 염려하는 세론도 일어났다. 이제 대학은 그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했다.
특히 서울대학은 가능한 한 질서를 유지하고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학장회의에서는 항상 휴강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너무 잦은 휴강사태를 어떻게 지양하고, 대학의 기능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에 대하여 학교당국자들은 부심하였다. 해결책은 교수의 잦은 타대학 출강 등 겸직을 막고, 또 직업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로 하여금 직업을 갖지 않고도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교수·학생의 생활여건을 안정화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전란이 종식되어 사회적 여건이 호전되기 전에는 그 실현이 난망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52년 6월 전국 총·학장회의에서 서울대학교는 맛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구체적 방안맜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이것은 대학이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어떤 시책이
요청되는가를 정리하여 건의한 것으로 임시적 방책과 항구적 방책으로 나누어 상세한 부면까지 언급하였다. 그 내용 중에서 특히 중심이
되었던 것은 역시 대학의 자치에 대한 것이었다. 그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대학의 진정한 자치제도를 확립하여 대학의 권위와 학문연구의 자유를 보장함이 필요하다.
② 국가예산편성에 있어서 국책적 견지에서 전수입의 일정한 부분을 교육부분에 배당하는 원칙을 수립하여 교육행정의 자유성을 확보케 해야 한다.
③ 교육공무원법을 조속히 실시하여 교수의 신분보장, 대우개선에 관한 근본적 조치를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④ 국립대학교의 재정의 독립을 인정하여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대학의 자치’라는 부분을 동 맛방안맜에서 크게 부각시켰던 것은 문제의 소재를 정확히 짚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즉 교수의 신분보장, 대학의 재정적 독립, 자율적 운영 등 대학의 자치가 확립될 수 있을 때 대학의 권위와 학문연구의 자유는 보장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측에서의 이러한 ‘대학자치’요구는 문교당국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전달되어 1952년 12월 발표된 맛교육법시행령맜과 이듬해 4월 제정 공포된 맛교육공무원법맜,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일련의 법령에서는 대학자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몇 가지 규정들이 삽입되었다. 대학자치와 관련되는 규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의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평의원회에 대한 규정은 이미 1949년에 공포된 교육법에서도 나타났지만 1952년 4월 맛교육법시행령맜 공포로 구성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운영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 중요한 사항을 심의함으로써 민주적 운영을 위한 의결기관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동시에 평의회 중 3분의 2 이상이 교내의 인사로 구성되기 때문에 자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사권만은 평의원회에 부여되지 않았다. 평의원회는 총장의 자문기관으로서 교수와 일반인사 약간 명으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둘째, 교수회의 권위가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맛교육공무원법맜에 의하면 총장·학장은 당해 대학(교) 교수회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임명될 수 있으며, 조교수급 이상의 교직원의 임명·승진에도 역시 교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며, 교수회는 조교수급 이상으로 구성된다고 규정되었다. 즉 총장 이하 조교수급까지의 교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교수회가 사실상 장악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법제화되기까지 당연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교수회에 인사권을 주는 경우 파벌조성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수반될 것이라는 우려를 앞세운 반대 견해가 많았다. 물론 정부나 학교당국에서도 반대 견해를 갖고 있었고, 정부가 제출한 동법안에서도 교수회의 인사권만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대학자치를 위하여 교수회의 인사권 장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결국 위와 같은 맛교육공무원법맜을 제정한 것이다.
셋째, 교수의 신분보장이 법제화되었다. 맛교육공무원법맜에서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免職·休職·停職·轉職되지 아니하며, 현행범을 제외하고는 소속장의 동의 없이 학원내에서 체포되지 않는다는 ‘不逮捕 특권’을 규정하였다. 징계조치도 반드시 교육공무원 특별징계위원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맛교육공무원 임용법맜으로 교수의 자격이 법제상으로 규정되고, 학예의 진흥을 위해 문화보호법이 규정된 것 등도 모두 교수의 신분보장과 관련되는 것들이었다. 이처럼 교수의 신분보장이 법제화된 것은 대학의 자치, 학문의 자유에 직접적인 힘이 될 수 있는 것임은 재론할 여지도 없다.
대학의 자치에 바탕이 될 수 있는 법제적 조치가 취해질 때 서울대학내에서도 학칙이 새로이 정해지고, 『대학신문』이 창간되는 등 일련의 변화가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학칙은 있었으나 1953년 4월 공포된 국립학교설치령 등에 근거하여 새로이 학칙을 제정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반 교무규정과 더불어 학장회·교수회 등 대학의 운영면에 걸쳐서까지 자세히 규정되었다.
이상과 같이 교육관계법령의 제정에 따르는 대학자치에의 제도적
장치들은 이렇게 해서 갖추어졌지만 제도적 여건의 구비와 그에 따르는 운영의 실상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학생들에 의한 대학자치가 전혀 구비되지 않았다는 점도 대학자치의 신장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도 그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은 앞으로의 대학자치의 신장을 위한 커다란 진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 전시하의 교과과정
(1) 교과과정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대피난지에 설립된 전시연합대학의 교과과정은 전란 전의 규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런데 대학(부산·대전·전주·광주의 전시연합대학)에 따라서는 각 과별 전공과목이 제대로 개설되지 못하여 부득이 在學大學長의 허가를 얻어 유사한 과목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만일 재학대학장의 허가를 얻기 어려운 경우에는 就學大學長의 허가를 얻어 다시 재학대학장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1951년 5월 4일 공포된 맛大學敎育에 관한 戰時特別措置令맜 제12조에서는 1950년도에 한하여 매과목 매주 1시간씩(실험·실습·실기는 2시간씩) 12주 이상 수업을 받은 후 소정의 시험에 합격한 경우 이를 1학점으로 인정하였다. 학년 단일제로 편성된 대학에서는 1950년도에 한하여 1년간 수업시간수를 720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게 하였으며, 만일 이 시간에 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졸업년도까지 부족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하였다.
현역군인 및 第二國民兵에 응소중인 학생에게는 더욱 많은 특전을 부여하였다. 위에 정한 수업시간에 달하지 못한 경우라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무가 전공과목과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기간에 대하여 5학점(120시간) 내의 실습과정으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1952년 5월 31일부로 본교의 각 대학 학생들은 각각 소속대학으로 복귀하여 종합된 기구와 조직 밑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과과정은 정비될 틈이 없었다. 따라서 본교는 초창기에 쓰이던 규정에 맛大學敎育에 관한 戰時特別措置令맜 등의 조문을 가미하여, 이에 의거하여 교육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재학기간 동안 총 180학점을 이수하는 외에 군사학점 3학점을 취득해야 졸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교과는 크게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나누고, 필수과목은 다시 일반교양과목과 전공과목으로 구분되었다. 일반교양과목은 필수과목 과정의 3분의 1 이내로 규정되었고, 전공과목은 다시 주전공 과목과 부전공과목으로 세분되었다. 부전공과목은 전공과목의 3분의 1 이내로 하였다. 한편 선택과목은 전 교과목의 4분의 1 이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과대학에서는 일반교양과목을 의예과에서 이수시키고, 본과에서는 전공과목을 이수케 하였다.
당시 일반교양과목 가운데 공통과목은 특히 어학을 중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어 및 국문학 8학점
외국어 및 외국문학 8학점
자연과학개론 혹은 자연과학계통의 교과(文科에 한함) 8학점붣문화사 혹은 국어·국문학과 외국어·외국문학을 제외한 文科 계통의 교과(理科에 한함) 8학점붣체육 8학점
이후 학교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교과내용을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맛교육법시행령맜의
공포였다. 1952년 4월 공포된 이 시행령 제125조는 대학교육의 교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대학(사범대학을 포함한다)의 교과는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하고 필수과목은 일반교양과목과 전공과목으로 구분한다.
일반교양과목이라 함은 일반 지도자적 인격을 도야함에 필요한 과목을 말하며 전공과목이라 함은 해당학과의 전문학술연구상 필수로 하여야 할 과목을 말한다. 일반교양과목은 계열에 따라서 다음 중에서 3과목 이상을 이수하여야 한다.
인문과학계 : 철학, 윤리학, 문학, 역사학, 심리학, 사회학, 종교학, 교육학, 인문지리학, 인 류학, 외국어
사회과학계 : 헌법, 법학, 정치학, 경제학, 심리학, 인류학, 교육학, 역사학, 인문지리학, 사 회학, 통계학, 가정학
자연과학계 : 수학, 통계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리학, 천문학, 인류학, 가정학선택과목은 전과목의 3분의 1 이내로 한다. 일반 교양과목은 필수과목의 3분의 1 이내로 한다.
그러나 이 규정은 사범대학에서는 교직과목의 비중이 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규정이 없어, 이를 결국 전공과목으로 이수해야 한다는 점과 인문·사회과학계 학과에서 자연과학계의 교양과목을 3과목 이상을 수강함은 당시의 실정으로는 힘든 일이었다는 점 등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본교에서는 1952년 9월 20일 교무과장회의를 열고 교과목편성과 학점배당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교과목편성은 교육법시행과 교련에 관한 대통령령 및 문교부장관 지시에 의하여 임시 조치로 필수과목 120학점과 선택과목 60학점 이내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필수과목은 다시 일반교양과목과 전공과목으로 분류하되 일반교양과목은 30~40학점으로 하며, 매과목 학점을 2학점 이상으로 하기로 하고, 전공과목은 80학점 이상으로 하며, 이를 주전공과 부전공 과목으로 나눌 때는 주전공 55학점 이상 부전공 25학점 이상으로 하였다. 일반교양과목 중 국어·외국어·체육을 필수로 결의하였고, 교련은 특별필수과목으로 하여 일반교양과목에 포함하되, 그 학점은 180학점 이외로 계산하기로 하였다. 사범대학에서는 교육목적의 특수성에 비추어 교직과목을 두기로 하였다. 당시 교직과목으로는 교육원리·교육사·교육사회학 등이 있었다.
사범대학생들의 교육실습은 전공과목에 포함되었으며 소요학점은 6학점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란 속에서 실습파견을 요청 해오는 학교가 없어, 실습은 부속학교에서만 실시되었다. 때문에 실습기간은 단축될 수밖에 없어 1주일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교양과목의 향상된 교육을 위하여 교양과목 전체에 대한 기준을 작성하였다. 그 활동으로 1953년도에는 교양과목 중 국어·영어·체육·자연과학 등 과목별 내용을 검토 완료하였으며, 그 결과 통일된 교과서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1954년 5월에 그 첫 산물로 영어·국어 교과서가 발간되었다.
학생들의 학구활동은 실험·실습의 부족으로 많은 애로를 겪었다. 이에 각 대학은 공공시설 및 개인기업체와 교섭하여 학생들의 학구활동을 위한 연구실 및 실험실 등을 조치하여 주었다.
학생들의 성적평가기준은 초창기와 대조하여 큰 변동은 없었다. 재시험자에 대한 성적은 C 이상을 불허하였으며, 추가시험의 경우 B 이상을 불허하였다.
(2) 강의방법과 출석문제
수업시간은 종전대로 2시간 계속수업제를 택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출결문제가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징집연기의 특전을 주는 것은 오로지 학업을 계속시켜, 전쟁으로 인한 국민문화수준의 저하를 가급적 방지하자는 데 있었다. 따라서 학교당국보다는 정부나 사회일반에서 학생들의 출결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교부는 학생들의 출석지도를 강력히 실시하고자 학칙에 규정된 출석시간 미달자에 대한 학점의 인정을 엄금하는 동시에 과거에 있어 그 犯則이 현저한 자, 공직을 가지면서 학교에 졸업한 자에 대해서는 그 졸업인정을 취소하라는 통첩까지 발하였다. 1952년 7월에는 문교·국방당국의 합의로 매학기 수강시간수 혹은 수업일수의 3분의 2 이상 출석하지 않은 자, 군사훈련시간에 5분의 4 이상 출석하지 않은 자, 매학기 15학점 이상 수강하지 않은 자 등은 모두 징·소집을 단행키로 하였다.
본교에서는 1952년 9월 27일 학생과장회의를 소집하고, 출석불량학생에 대하여 가일층 엄격하게 다룰 것은 물론 학생들의 자각을 위해 철저히 주의를 환기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또 학생의 출석이 수강시간수의 3분의 2 이상 되지 않을 때는 학과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하고, 교수의 강의가 법정시간수에 미달할 때에는 보강을 원칙으로 하되 그래도 시간수가 부족할 때에는 해당학과의 학기말고사를 행할 수 없도록 하였다.
1953년 11월 교무과장회의에서는 교원의 출강 및 학생의 수업상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출강표를 비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954년 4월 학장회의에서는 학생들의 출석장려방안으로 강의를 충실하게 하고, 학생수가 100명 미만일 때는 점호를 철저히 하고, 100명 이상일 때는 名列表를 돌려 서명케 하는 등 학생출석지도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출석률은 극히 좋지 못하였다. 문리대의 경우 학생출석 점호제 등을 통하여 학생들의 출석을 적극 권장하였으나 1954년에는 3분의 1만 출석해도 학점을 인정해 주는 정도였으며, 그나마도 이해 9월 졸업생에게는 이 기준은 적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학생들의 출석률이 저조했던 것은 전란중 혹은 그 직후의 시기에 있어 학생들의 생활이 어려워 많은 학생들이 부업으로 일자리를 가져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학급편성은 학생수가 많은 학과의 경우 1개반 50명 정도로 축소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이것은 교수의 증가 혹은 책임시간의
증가를 초래하게 되어 실시되지 못하였다.
2) 군사교육과 실업교육
(1) 군사교육
정부는 1951년 5월 4일 공포된 맛大學敎育에 관한 戰時特別措置令맜 제14조를 통하여 대학에서의 군사교육 실시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본교는 1951년 11월부터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4시간씩 7천여 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군사기초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군사교육의 학점은 2학점이었으며, 필수과목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나 현역군인에 편입된 학생, 제2국민병에 응소중인 학생 및 기타 군사훈련의 실적이 있다고 인정되는 학생에게는 그 기간에 대하여 소정의 군사교육학점을 인정하여 주었다.
그 후 1952년 5월 대통령령 제577호에 의하여 學徒軍事訓鍊이 정식으로 제도화되었다. 본교에서는 이에 따라 보다 강화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 학생처장과 각 대학 학장들로 구성된 학도군사훈련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52년 6월초에는 姜仁魯 대령 등 11명의 장교가 본교 각 대학 교관으로 파견되어 교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도 2학기부터는 각 대학별로 교관과 상의하여 分團別 훈련을 실시하였다. 학급편성의 경우 1·2학년은 학생수가 많으므로 학년별로, 3·4학년은 합동으로 하였다. 훈련일은 매주 토요일로 정하고 훈련시간은 주당 2시간이었다.
군사교육학점은 대통령령 및 문교부장관의 지시에 의하여 임시조치로 재학중 8학점을 반드시 취득토록 하였는데 그것은 졸업사정기준인 180학점에는 포함되지 아니하였다. 한편 군사훈련을 받는 학생에게는 ‘戰時學生證’을 발급하여 그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1952년 신학기부터는 군사훈련의 내용을 더욱 강화하여 4년간 280시간 이수자에게만 졸업을 인정하여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각 학년 재학생에게 1학년생은 주 2시간씩 4년간 이수, 2학년생은 주 4시간씩 3년간 이수, 3학년생은 주 6시간씩 2년간 이수, 4학년생은 주 8시간씩 1년간 이수(4학년의 경우 연 36주의 훈련을 필수로 함)로 군사훈련을 할당하였다.
교련시간 출석지도도 일반학과보다 더욱 엄격하게 하여 5분의 4 이상 출석하지 않는 경우에는 학업태만 학생으로 간주하여 징·소집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전시 조치는 전쟁시에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실시되었지만, 국가 통제력의 강화로 인해 학생활동과 연구활동의 위축을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전시하의 특별조치로 실시되었던 이 군사교육은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듬해인 1954년 7월 12일부로 종료되었지만 국가적인 통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인 학도호국단은
계속되었다.
(2) 실업교육
정부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유엔군민간원호처와 유엔한국재건위원단의 원조를 바탕으로 1951년과 1952년 경제부흥을 위한 재건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이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2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재건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공계통 학생들의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공과대학에서는 1952년 1학기부터 3·4학년생들에게 공장실습을 시켰다.
이 실습교육은 3·4학년생들에게 매학기에 5주간씩 반드시 이수하도록 하였다. 실습공장과 기간은 학교에서 지정하였다. 실습공장에는 광산·연구소·기타 사업장·기관 등이 포함되며, 이를 선정하는 절차는 설비와 기술이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공장 중에서 소속감독 관청의 승인을 얻어 학장의 제청으로 총장이 지정하게 하였다. 1952년도 지정 실습공장은 대한조선공사 등 전국 각지에 소재한 39개의 대공장이었다. 실습지도는 각과 교실주임, 전문강의 담당교원 및 공장별 실습지도원이 이를 담당하였다. 실습성적은 출석률에 대한 평점과 실습기능에 대한 평점을 같은 비중으로 종합 사정하였다.
한편 실업교육의 질적 향상문제가 대두되었다. 전후인 1954년 2월
17일에는 전국 실업대학의 학장들이 본교 치과대학에서 회합을 갖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협의사항으로는 한국의
실정에 적합한 실업대학 교육의 구체적 방안, 기준시설과 교육과정대책, 무시설 실업대학생의 교외 실습대책 등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실업대학교육의 구체적 방안으로 이에 대한 각 대학의
의견서가 제출되었다. 이 의견서는 ① 최소한의 시설확보 ② 교육내용의 질적 향상과 실험·실습의 중점지도 ③ 교수의 질적 향상 ④ 현실에 부합되는 교육실시 등을 공통된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1) 전시학생정원제
1951년도 본교의 학생정원은 총 10,300명으로서 이를 대학 및 학과별로 살펴보면 <표 4>와 같다.
그 후 전쟁으로 인하여 인적 자원에 커다란 손실이 있게 되자 인재양성은 국가사회운영에 있어 급선무로 대두되었고, 본교는 학생정원을 다소 늘려 1953년도 신학기부터는 11,020명으로 정원을 조정하였다.
이때의 정원조정을 과별로 보면 문리대의 인문·사회과학분야와 법과대학 및 사범대학, 예술대학 등에서 현저한 증가를 보였고, 과에 따라서는 정원이 감축된 학과도 있었다. 이때 증감된 학과명 및 인원수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1951년도 정원).
[農科大學]
수의학부 300(320)
[文理科大學]
국어국문학과 100(80), 중어중문학과 80(60), 독어독문학과 80(40), 불어불문학과 80(40), 수학과 120(100), 화학과 160(200), 생물학과 120(80), 지질학과 80(60)
[師範大學]
지리과 120(80), 물리과 160(80), 화학과 160(80), 가정과 120(80)
[法科大學]
법률학과 600(500), 행정학과 600(500)
[藝術大學]
회화과 160(80), 조각과 100(80), 응용미술과 100(80), 성악과 100(90), 작곡과 100(90)
한편 대학원의 정원은 문교부훈령 제8호로 1953년 10월 20일부터 시행된 맛大學院規程맜에 의하여 대학원 각 과정의 학과는 그 대학교에 설치된 학과에 한하며, 대학원 학생정원은 그 대학교정원의 10분의 1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전란이 장기화해 감에 따라 국방당국에서는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입학생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이 제기되어 문교부는 신입생 선발에 있어서 그 모집인원을 자연과학계는 정원의 100%, 인문과학계는 75%, 사회과학계는 50%(1953년도에는 75%)로 제한하는 소위 戰時學生定員制를 하달하였다. 그러나 의학계통은 정원의 50%를 증가 모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자연과학계도 정원의 100%를 모집할 수 있도록 하여 전시의 필요성에 부응하도록 하였다.
이 戰時學生定員制하에서 1952년 2월 현재 재적학생수는 학부 10,602명(남 9,862명, 여 740명)과 대학원 444명으로 합계 11,046명에 달하였다. 이로써 보면 전시학생정원의 실시가 본교 재적학생수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적학생수였고, 당시의 등록학생수는 4,55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재적학생수의 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수였다.
한편 전시 상황에서 편입제도를 이용하여 학생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1951년부터 북한 출신 학생들을 청강생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북한출신 학도들의 학업을 계속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일정기간이 경과한 뒤 정규학생으로 편입을 허락하였다. 1951년 9월 30일 현재 북한출신 학생 청강생수는 모두 100명이었고, 그 후에도 1953년도까지 매년 상당수의 북한출신 학도들이 청강생으로 편입되었다.
둘째로, 정원에 여유가 있는 학과는 타대학에서 본교에 편입을 희망하는 자 중 실력고사에 합격한 자를 총장의 승인하에 입학시켰다. 이
학사편입은 병역에 해당되지 않는 자와 현역군인에게만 허용되었다.
단 현역군인인 경우에는 책임있는 소속기관에서 취학하여도 좋다는
추천서를 내주어야 편입학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2학년에 편입하는
자는 42학점까지, 3학년에 편입하는 자는 84학점까지 前修學點을 인정해 주었다.
2) 입학과 졸업
(1) 입학지원자격의 변화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입학지원자격 규정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1951~1952년도 본교 입학지원자격에 관한 규정은 국민학교 교원 제1종 시험합격자에게도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을 제외하고는 戰前의 규정과 같았다.
그러나 1953년도에는 규정이 변경되어 ① 고등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자 및 그 예정자 ② 대학입학자격검정시험 합격자 ③ 문교부장관이 지정한 학교를 졸업한 자 ④ 외국에서 12년 이상 학교교육과정을 이수한 자에게 입학지원자격을 주었다. 이후 1953년말에는 대학진학자에 대한 연합고시제가 결정되어, 1954년도에는 본교의 입학지원자격을 대학입학자선발 연합고시 합격자로 제한하였다.
그런데 당시 연합고시를 실시한 목적의 하나가 대학생에게 징·소집이 보류된 관계로 대학에 진학하려는 자를 공정하게 선정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징·소집이 해당되지 아니하는 여학생과 제대군인 등은 연합고시를 통하지 아니하고도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대학입학자선발 연합고시의 목적은 위에 말한 것 이외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대학입시의 표준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 수준을 높이며, 학부형들의 과열된 교육열의 부작용 등을 제거하자는 데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항간에서는 대학의 자유를 침해하고 교육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저해하며 대학진학 희망자에게 이중의 시험부담을 주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의 여론이 많았다. 그러나 문교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1953년 12월 28·29 양일에 시험을 실시하였다. 고시과목은 국어·영어·수학·사회생활의 4과목을 필수로 하고 선택과목으로는 과학 또는 실업(농업·공업·상업·수산업) 중 택일하게 하였다.
고시실시 결과 지원자 29,625명 중 25,360명이 합격하여 85%의 합격률을 보였다. 그러나 1954년 2월 “각급 학교의 입시방법의 제한을 철회하고 자유경쟁으로 환원시키라”는 요지의 대통령 명령에 의하여 문교부는 불합격자에 대하여도 각 대학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방침을 변경하였다. 이에 본교도 입학지원자격을 대학입학자선발 연합고시 합격자로 제한하였던 것을 철회하였다.
그런데 신입생모집인원은 문교부에서 공포한 전시정원제에 의하여
제한을 받았다. 경쟁률은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았으며, 특히
과학계통에 지원자가 쇄도하였다. 1952년도 최고경쟁률은 의예과로
7.4대 1이었고, 1954년도에는 전체경쟁률은 4.9대 1이었다. 그러나
미술대학은 모집정원 110명에 지원자가 96명밖에 되지 않아 부득이
제2지망으로 보충하였다. 제2지망 자격자는 본교 각 대학입시 응시자
중 성적순으로 학장의 추천을 받은 자에 한하였다. 대학원입학 자격기준에는 변동이 없었다.
(2) 신입생 사정기준과 특전
입학시험은 크게 필기시험·구술시험·신체검사로 나누어졌다. 필기시험은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구분되었으며, 1953년까지는 필수과목으로 국어·수학·영어 및 사회생활의 4과목과 선택과목 1과목을 과하였다. 1954년도에는 연합고시제가 실시되었으므로, 필수과목을 줄여 국어·영어·수학만을 과하고, 선택과목은 종전과 같이 각 대학에서 제시한 수개 과목 중 1과목을 선택 응시케 하였다.
전시 중임에도 시험문제출제의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지대하였다. 1952년 10월 교무과장회의에서는 1953년 입학시험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수개월간 국내 각 고등학교의 교과내용과 수업실태를 세밀히 파악하여 대학과의 연계성을 더욱 밀접히 하기로 하는 한편 각 대학 관계교수로 하여금 입학시험준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특히 입학시험과목과 입시문제의 완벽을 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1952년 11월에는 본교 관계교수와 고등학교관계자들간에 2차에 걸쳐 회합을 갖고, 각 과목의 교과내용검토 및 입시에 관한 상호의견을 교환하여 시험제도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보였다.
구술시험은 지금의 면접시험과 비슷하였지만, 평가는 더욱 엄격하였다. 구술시험은 1·2반으로 나누어 위조서류, 대리시험, 허위기재 등을 적발하고 학력재검토 및 상식고사 등을 실시하였다. 구술고사의 평점은 A·B·C·D로 구분하였는데 D는 무조건 낙제, C는 조건부 낙제로서 학과시험과 대조하여 교수회의에서 그 당락이 결정되었다.
신체검사는 학업계속의 지장유무를 판정하였다. 색맹·색약을 입학시키지 않는 학과는 지금과 같았다. 예술대학(1954년도에는 음대·미대) 및 사범대학 체육과 등은 실기고사를 시행하였다.
입학시험은 부산·광주·대구·전주·대전·수원 등 각지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전시하에서 학생들의 여행에 많은 곤란이 따랐기 때문이다.
전시였기 때문에 입학지원에 대한 특전이 상이군인, 제대군인, 여학생들에게 부여되었다. 1952년 2월 학장회의에서는 상이군인에 대한 특혜조치로 그들의 경제적인 면과 신체에 대한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가급적 취학시키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문교부에서도 1953년 4월 상이군인에 대하여 학칙상 입학요건에 연령제한이 있을 경우 이를 적용하지 말 것과, 본과에 입학이 곤란할 경우 別科生 또는 청강생으로 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체조·보건·교련 등 학과목은 면제 혹은 수업성적에서 제외하고, 전공과목이수에 큰 지장이 없는 경우에는 불구자라 할지라도 입학을 허가하고, 재학중 입대하여 제대한 자로서 상이로 인하여 이전 학과에서 수학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전과 조치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한편 대학생은 징·소집이 보류되는 관계상 전시학생정원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징·소집과 관계없는 여학생과 제대군인은 전시학생정원 외로 모집될 수 있는 특혜조치를 받았다. 즉 전시학생정원제는 징·소집에 관련되는 학생들에게만 적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교직원의 직계자녀에게도 특전이 주어졌다. 문리과대학의 경우, 총장·부총장 및 문리대 교수 직계자녀에게 명예제대자와 동일한 특전을 주었고, 타대학교수의 직계자녀는 합격권 내에 들었을 때에만 제1·2지망을 고려해 주기로 하였다.
1954년도에는 서울로 환도하여 처음 실시되는 입학시험이었던 관계로 특례자의 종류도 증가하였다. 즉 여자나 제대자 가운데 북한출신자로서 대학 1학년을 수료했다는 당해 도지사의 증명서를 제출한 자, 제대확인증명서 제출자 및 육해공군사관학교 퇴학자 중 자퇴자로서 퇴교증명서를 소지한 자는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설정해 주었으며, 상이군인은 정원의 1할 한도내에서 특별 고려를 해주었다.
대학원 신입생은 전공과목 및 2종의 외국어 필기시험과 구술고사 및 신체검사에 의하여 선발되었다. 각 과목에는 최저득점기준을 두었는데, 1952년의 경우 전공과목 60점, 제1외국어 30점, 제2외국어 25점이었다. 그리하여 이 기준내에 드는 자 가운데 각 과별로 성적순으로 모집정원을 선발하였다. 만일 이 기준에 합당한 자가 없거나 7명 이내인 학과는 그 학과의 위축을 막기 위하여 최고 득점자를 합격시키거나 혹은 그 기준을 낮추기도 하였다.
(3) 學位制度의 확립
[學士學位]
대학의 졸업사정기준은 동란 전의 규정에 전시하의 특수한 사유가 첨가되었다. 즉 1952년도의 경우 졸업생사정에는 전쟁발발 이후 실시한 학생심사에 통과, 군사학점 취득 등이 특수사유로 첨가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회적으로 대학졸업자들의 간부후보생으로의 입대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53년 학장회의에서는 졸업사정기준을 8회 이상 등록, 180학점 이상 취득, 1953년도 군사학점 취득 등 3가지 요건을 갖춘 자로 하되, 7회 등록에 180학점을 취득하였거나 취득학점이 180학점 미만이나 8회 등록을 한 자로서 간부후보생에 지원한 자는 가졸업시키기로 의결하였다. 이 조치는 1952년 7월에 개정된 대학교육에 관한 맛戰時特別措置令맜의 규정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이 개정된 규정에서는 가졸업 외에 하급학생의 가진급을 인정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복귀하면 정규졸업 및 정규진급으로 조치하여 주기로 했다.
한편 졸업논문으로 6~8학점을 인정하여 이를 졸업학점내에 포함시켰다. 각 대학은 매년 졸업생에게 졸업논문을 제출시켰으나 1953년도에는 졸업기간 단축조치로 인하여 이를 작성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으므로 사범대학을 제외한 전대학이 졸업논문제를 일시 폐지하였다. 졸업이 인정된 자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학사학위를 수여하였다. 학사학위의 種別은 藥學士 및 政治學士가 신설되어 총 14부문이 되었다.
[碩士學位]
대학원에서 30학점 이상을 취득한 자가 논문을 제출하여 그 심사 및 구술시험에 합격하면 석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석사학위논문 심사규정은 별도로 정하지 아니하고 맛敎育法施行令맜에 의하였다(1952년 5월 ‘대학원위원회’에서 결의). 따라서 논문심사와 구술시험은 대학원장이 교수 중에서 지정하는 3인 이상의 심사위원이 이를 행하였으며, 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그 합격을 결정하였다.
1952년까지 5부씩 제출되던 논문은 50부로 증가되어 대학원위원 및 同系 대학의 부교수 이상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논문의 제출시기는 6월과 12월이었다.
審査 학위의 종별은 학사학위의 그것과 같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수여된 학위는 文學 碩士·政治學 碩士·法學 碩士·經濟學 碩士·理學 碩士·工學 碩士·醫學 碩士·獸醫學 碩士·藥學 碩士 및 美術 碩士의 10종이었다.
[博士學位]
박사학위 논문은 대학원에서 3년 이상 수학하고 전공과목 80학점 이상(석사학위 과정에서 취득한 학점이 있을 때는 이를 통산할 수 있음) 취득한 자 또는 ‘대학원위원회’에서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라야 제출할 자격이 있었다. 제출된 논문이 심사에 통과되고 구두시험과 2종 이상의 외국어 시험에 합격하면 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대체로 인문분야에서는 박사과정 입학생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학부졸업의 학력을 가진 기성교수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이를 속칭 ‘舊制博士’라 하여 70년대 초까지는 박사학위 취득자의 대부분이 이에 속하였다.
박사학위는 1952년 4월 26일 金斗憲·李丙燾 등 6인에게 수여된 것이 최초인데, 이는 교육법시행령 학위규정에 의거한 것이었다. ‘博士學位論文審査委員會規程’은 1952년 5월 교육법시행령에 의거하여 규정되었다. 논문의 심사기간은 6개월 이내로 제한하였으며, 심사의 통과는 심사위원 5분의 4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하게 하였다. 외국어 시험규정은 1952년 7월에 제정되었다. 어학시험의 합격은 매과목 60점 이상을 취득하여야 했다. 불합격시에는 3개월이 경과한 후 재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명예박사는 동란 전에 맥아더(Douglas E. MacArthur)·하지(John
R. Hodge)·李承晩·덜레스(John Foster Dulles) 등에 수여한 데 이어 1952년과 1953년 미대사 무쵸(John J. Muccio)(법학)와 벤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법학) 2명에게 각각 수여되었다.
(4) 卒業式
1951학년도의 졸업식은 문교부공문 맛1951년도 대학졸업·학년말에 관한 건맜 및 맛1951년도 학년·학기조처에 관한 건맜 등에 의거 1952년 4월 26일에 거행되었다. 부산대학 강당을 빌어 거행된 서울대 제6회 졸업식에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이하 내외귀빈의 참석하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1952년 졸업식 광경을 1952년 4월 28일자 『大學新聞』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개식 시간이 박두함에 따라 서울대학교 관계자는 물론이요 李대통령을 비롯하여 白문교장관, 申국회의장, 金고시위원장, 무쵸주한미국대사 등 내외귀빈이 입장하여 참석하자 식은 예대 음악대의 주악리에
엄숙히 개시되었다. 서울대학교본부 사무국장 金性燦 씨의 개식사에
이어 國旗拜禮, 애국가 봉창, 묵념이 있고 곧 교무처장 金善琪 교수의
호명으로 졸업생 각과 총원 565명에 대하여 총장 崔奎南 박사로부터
長久 4년 동안 면학의 結晶인 영예의 졸업장이 수여되었다. …… 졸업증서수여에 이어 박사 및 박사학위 수여가 있고, 대통령으로부터 決戰下 지식인의 임무와 졸업생들의 앞날을 격려하는 훈시가 있고, 崔總長으로부터 간곡한 訓辭가 있었다. 이어서 白문교부장관이 훈시를
하고 나자 내빈축사로 들어가 申국회의장, 무쵸미대사, 벤플리트 장군(代讀) 등 귀빈들의 축사가 있었고, 이에 답하여 졸업생을 대표한 法大 盧隆熙 군의 장차 사회에 나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
일하겠다는 씩씩한 답사가 있은 후 다시 우렁찬 주악리에 3시 반경 끝마치었다.
이 졸업식장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 이날 박사학위를 받은 자는 문학박사에 李丙燾(맛고려시대의 연구맜), 金斗憲(맛한국가족제도사 연구맜), 이학박사에 金東一(맛纖維狀 三醋酸纖維 등에 관한 硏究맜), 田豊鎭(맛闊葉樹 펄프 製造에 관한 硏究맜), 元泰常(맛輩水 曲線의 新合理的 解法맜), 그리고 의학박사에 李春根(맛銅의 生物學的 硏究맜) 씨 등이었다.
이때의 박사학위 수여에 관하여 당시의 崔奎南 총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당시 박사학위에 대한 학내의 여론은 신중론이 지배적이었다. 총장 자신도 학위를 경솔히 남발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논문내용이 창의적이고 學的 가치가 충분히 공인된다면 학위를 수여하여 후배들의 학문연구심을 북돋우어 주자는 것이 총장의 소신이었다. 최초의 두 명의 박사(문학박사를 가리키는 듯-인용자)를 내는 데 있어 學內의 일각에서는 아주 잡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즉 묵은 논문에 새 박사의 시비였다. 과거의 묵은 논문을 상대로 하여 이 나라의 최초의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 대학의 전통과 권위를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냐의 시비였다. 그러나 나는 이 시비에 귀를 기울이려고 아니했다. 이것은 대학의 초창기에 있어 과거의 학문의 업적을 질서 있게 그리고 신중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요, 미래의 신진들의 길을 개척하여 주는 이른바 溫古而知新의 正路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특히 倭政 36년간의 학문의 암흑시대를 회고할 때에 더욱 그렇다고 믿었던 때문이었다.9)
한편 1952학년도 졸업식은 1953년 3월 28일 부산시내 영성국민학교에서 가졌다. 그러나 이후 국군의 대폭 증강에 따른 초급간부 확보의 긴급성에 비추어 인적 자원을 양성 배출하는 대학의 졸업식을 3월까지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1953년 5월 문교·국방당국은 敎保의 특혜를 받는 사범대학을 제외한 전대학의 졸업시기를 4개월 단축하여 1953년 11월말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1학기를 4월부터 7월까지, 2학기를 8월부터 11월까지로 하고, 夏期와 冬期 휴가를 가급적 최대한으로 단축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로 인하여 사범대학을 제외한 본교 제8회 졸업식은 1953년 11월 28일 본부 대강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사범대학은 1954년 3월 단독으로 졸업식을 가졌다.
그러나 1953년 7월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졸업시기 단축의 긴급조치는 1954년부터 자동 폐지되었다.
피난지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은 정상적인 연구활동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책이나 자료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며, 전쟁중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겸직을 하는 교수들이 많았고 그나마 전쟁에 참여했던 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던 전쟁의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학문의 연구 또한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피난지의 가교사 속에서나마 대학이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게 되자 교수들의 외국학계와의 긴밀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러한 교류는 미국의 대학 교육지원에 의해서 더욱 활발히 진행될 수 있었다.
1948년 미 의회에서는 맛미국정보 및 교육교환법맜(Smith Mundt Act)이 통과되어, 이에 근거한 미국무성 인사교류계획에 의하여 한국교수들의 미국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동인사교류계획에 의하여 1949년도에 제1차 파견이 이루어졌고, 9·28 수복 후 제2차 파견이 있었다. 1953년에는 제3차로 미국무성 초청에 따른 국내 저명교수들의 도미유학이 있었다. 이때 본교 교수로서는 교무처장 金善琪교수가 언어학 연구를 위하여 하버드대학에, 법대 劉基天 교수가 형법 연구차 예일대학에, 사대 高光萬 교수가 교육학 연구차 코넬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한미문화교류를 목적으로 교내 교수 12명이 파견되어 미국에 10개월간 체류하면서 각각 전공분야를 연구·시찰하게 되었는데, 이때 본교에서는 상대의 李常薰 교수(하버드대), 법대의 申泰煥 교수(노스웨스트대), 문리대의 李熙昇 교수(캘리포니아대), 사대의 李鍾洙 교수(뉴 멕시코대), 법대의 金曾漢 교수(듀레인대) 등이 도미하였다.
1954년도에도 ‘스미스·문트법’에 의한 미국무성 인사교류계획으로 본교의 법대 李漢基 교수, 사대 皮千得 교수, 상대 金容甲 교수, 문리대 姜永善 교수 등이 도미 유학길을 떠났다.
한편, 의대와 치대 교수들의 국제 할술회의 참석도 눈에 띠게 늘어났다. 1951년 11월 대학원장 尹日善 박사는 리스본에서 개최된 世界癌學硏究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의대의 김영소 교수는 같은 해 12월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太平洋外科醫學會議에 참석하여 연구논문을 발표, 주목을 받았다.
1953년에 들어서는 국제학술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져 치대 학장 朴明鎭 교수는 日本 岡山대학에서 개최된 日本口腔科學會에 참가하였고, 음대 학장 玄濟明 교수는 9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유네스코국제음악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문리대의 李敭河 교수는 미국학술원의 재정적 보조로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한미사전 편찬차 도미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교수들의 외국유학을 돕기 위하여 국비유학제도를 마련하고 교수들을 선정 파견하였다. 이것은 주로 공대와 농대에 한정되었는데 본교에서는 공대의 田豊鎭 교수(제지학), 李宗日 교수(전공학), 金在瑾 교수(조선학), 鄭善模 교수(기계공학)가 MIT에, 그리고 농과대학의 李甲彬 교수(낙농학)가 미네소타대에 유학하였다.
또 서독정부의 초청에 의해 공대 黃得炫 교수(소립자연구)가 渡獨했고, 유엔기술원조계획에 의해 廉永夏 교수(열기관연구)가 영국에 유학했고, 林應極 교수(시멘트공업학)가 캐나다로 유학하였다. 또 농대의 趙伯顯 교수(토양연구)가 유네스코 초청으로 덴마크로 유학했고, 운크라(UNKRA) 원조에 의해 동대학의 李昌福 교수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상과 같이 이공계에 한정되어 자금지원과 유학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 정부의 시책 및 미국의 대한원조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정부는 다른 분야보다도 산업부흥 및 식량문제와 관련된 분야에 우선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는 전후 복구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리과대학에 대한 지원이 줄어듦으로써 상대적으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기초과학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대한교육 원조가 공대와 농대에 집중된 것 역시 전후 복구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정부분에 편중된 지원으로 인하여 일부 특정 학문만이 발전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의 지원에 의한 학문발전은 결국 학문경향이 미국에 편중될 수밖에 없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 교수들의 해외유학은 국제적 학술교류를 통하여 국내 학술활동에 자극을 주어 전후의 침체기로부터 학술계가 생동할 수 있는 탄력과 여력을 제공하였다. 당시 유학교수들의 학문적 성과는 대단히 큰 것이었고, 국내학계만이 아니라 국제학술계에 공헌한 점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무성 초청에 의하여 캘리포니아주 미국 삼림연구소 및 버클리대학에서 약 2년 동안 임목육종에 관한 연구를 하였던 농과대학의 玄信奎 박사의 연구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현박사는 이때 交雜育種法에 의하여 생장이 신속하고 병충해에 강한 임목의 신종 합성법을 연구하는 한편, 당시 세계임목학회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던 임목의 4개체 및 3개체의 유도법을 창안하였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세계유전학회에 발표되어 크게 주목을 받았다.
식민지시대와 해방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전란으로 이어진 시기에
우리의 학문과 문화는 그만큼 낙후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유능한
교수들을 외국에 파견하여 세계적 수준의 학문동향을 익히고 연구하게 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였다. 비록 양적으로 극소수이긴 하였으나
이 시기 일부 교수들의 해외파견은 바로 그러한 과제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었다.
1) 학도대의 활동
한국전쟁의 발발은 학생들이 수업에만 열중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였고, 학생들은 전쟁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징집에 의해 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학생들은 각처로 흩어졌지만 일부 학생들은 남하하면서 1950년 6월 29일 수원에 집결하여 경기도 일대의 타대학생들과 함께 ‘非常學徒隊’를 조직하였다. 이들 일부는 전투대로서 당시 국방부 정훈국의 지도하에 맨주먹으로 실전에 참가했으며, 일부는 선전대로서 각 지방에 파견되어 전황보도, 가두선전, 피난민구호, 남하학도 규합 등에 종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편 남하하는 정부를 따라서 대전에 집결한 학생들은 충청도 지방의 학생들과 더불어 남하하는 공산군을 제2선에서 저지하기 위해 7월 1일 ‘義勇學徒隊’를 조직하여 역시 학도병을 모집하고 국민의 사기를 독려하는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해 7월 중순에 錦江 방어선을 뚫고 계속 남하하하였고, 이에 앞의 두 학도대는 정부를 따라 대구로 이전하여 ‘大韓學徒義勇隊’로 합세 개편하였다(7월 19일). 이 곳에서 그들은 빈약하나마 국방부 지도하에 소정의 훈련을 받고 무장을 갖추고 일선으로 배치되었다. 부산에 집결한 학생들도 ‘大韓學徒義勇隊’를 조직하여 대구에서 결성된 의용대와 함께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아군 최후의 보루였던 부산을 사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많은 학생들이 전투원으로서 실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사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후방에서는 ‘學徒治安隊’, ‘學徒救護隊’, ‘學徒啓蒙隊’ 등을 조직하여 그들대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한국전쟁 발발로부터 약 4년 후인 1954년 10월 21일 중앙학도호국단 전국중앙학생회에서는 전쟁 당시 학도의 신분으로서 자진 입대하여 전선에서 산화한 학도의 공훈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충혼탑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중·고·대학생들의 성금과 본교 미술대학 조각과의 金鍾瑛 교수의 설계·감독으로 동란 당시 의용학도가 가장 많이 희생되었던 포항에 충혼탑이 세워졌다(1957년 6월 15일 제막식).
당시 본교 재학중 참전하여 전선에서 산화한 학우들은 모두 22명이었다.
2) 학생병사문제
1951년에 들어 전선이 고착화되자 문교부는 학도의용대를 해체하고 학생들을 학원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국방부에 요청하였다. 수차에 걸친 협의 끝에 수업이 가능한 후방지역에 있는 학도의용대원은 전원 복교하기로 하고 전방지역 또는 후방 빨치산 활동지역에 있는 학도들만 군의 지휘하에 활동하기로 하였다(1951년 9월 24일).
이리하여 근 1년 동안 학원을 등지고 펜 대신 총, 수업 대신 훈련, 연구 대신 전투라는 전도된 생활을 해오던 학생들이 일부나마 학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대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병역이라는 문제가 義務와 嫌忌가 뒤범벅이 된 착잡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1952년 2월 국방부·문교부·서울대학교 합동회의에서는 1951년 5월 4일의 문교부령에 의하여 실시해 오던 학생군사훈련에 관한 안을 보다 구체화시켜 학생들에게 재학중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그 기간 동안 징집을 보류할 것에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해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현역장교를 훈련교관으로 배치하여 남학생에게는 매주 4시간씩 교련시간을 갖게 하고, 여학생에게도 처음에는 남학생과 같이 훈련을 받게 하였으나 나중에 이들에게는 체육 및 가사시간으로 대체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5월 학도군사훈련에 관한 요강이 대통령령 제577호로 제정되었다. 동령 제4조에 의하여 국방, 문교 주무자협의회에서 마련된 1·2 두 안 중 전국대학장회의에서 제1안이 채택되었던 바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각 대학에서는 매주 2시간씩 70시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이에 참가하는 학생에게는 병역법 제10조(군사훈련을 수료한 자의 재영기간은 1년 이내로 한다.) 및 제40조(징집 및 소집 보류)를 가능한 한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학교당국에 병적계를 제출할 때에 充用記號라는 일련번호를 매기어 분류하고 이들의 졸업 후 징집에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문교부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뒷받침하고 학생들의 학업계속을 위한 특수신분을 보장하여 ‘戰時學生認定制’를 설정하고, 소정의 부인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학생에 한하여 ‘戰時學生證’이라는 신분보장증명서를 교부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 2학기 전시학생등록을 완료한 본교 4,400여명의 남학생은 징·소집 보류라는 특혜조치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징집이 보류되고 재학중에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졸업 후 사범대학생을 제외한 전원이 간부후보생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되어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에 응시, 간부호보생으로 출정하였다.
이는 1953년 2월에 발표된 국군간부후보생 확보계획요강에 의한
것으로 대상은 전시학생으로 인정된 자 중 만 18세로부터 만 28세까지의 졸업생 전원이었다. 그리하여 동년 5월 2일에는 제1차 간부후보생 出征壯行式이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거행되었으며, 6월 1일에는
제2차, 6월 15일에는 제3차 출정장행식이 거행되어 많은 졸업생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 학도호국단의 강화
학도호국단은 전란을 맞이하여 학생들이 사방으로 분산됨으로써 그 기능을 다할 수 없었다. 학도호국단은 원래 학생들의 사상통일과 훈련을 목적으로 정부에서 하향식으로 조직한 것이었는데,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51년이 지나면서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면서 학도호국단의 활동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학도호국단의 강화는 이전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즉, 학생회가 없는 상황에서 학생자치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였고, 이를 학도호국단이 맡게 된 것이었다.
이에 1952년 전국총학장회의에서는 학도호국단을 학생자치단체로 개편하기로 결의하였다. 1953년부터는 학생운영위원장을 학생들이 직접 선출하고 학도호국단 지도위원회에서도 학생들의 자치를 상당부분 허용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제 학도호국단은 단순한 어용 학생단체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치적인 활동을 주관하는 단체가 되었던 것이다.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초기에는 규율부가 가장 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상의 활동도 나타나게 되었다. 학도호국단의 문예부에서는 학보발간 및 웅변대회 개회를 주도하였다. 또한 유엔학생부에서는 영어웅변대회를 개최하는 등 학생활동의 국제간 교류를 맡았다.
2) 부산정치파동과 민주수호선언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내각책임제개헌을 주장하는 국회와 맞서 장택상 국무총리를 통해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였다(5월 14일). 이승만은 1951년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지만, 국회에서는 이를 부결하고, 오히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5월 25일 부산을 비롯한 경남, 전남북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도하고 있었던 야당의원 50여 명을 헌병대에 연행하는 이른바 ‘5·26 釜山政治波動’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개헌안뿐만 아니라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규명하려 했던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승만은 유엔군사령부와 미대사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땃벌떼와 민중자위단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기 위한 데모를 사주하였고, 전선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부산, 경남, 전남북의 계엄령을 유지하였다. 국회는 동년 7월 4일 경찰의 포위 속에서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개헌은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단적인 정치운영을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이 전개되자 대학생들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해 6월 16일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선언대회를 가졌다.
1852년 6월 16일 월요일 점심 때 한 천막교사에 1백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文理大 政治學科 4학년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뭔가 선언하자는 것이었다. 문리대 학생회장인 朴大浣(정치 4)이 단상에 올라갔다.
“지금부터 반공, 반파쇼 민주수호선언대회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막 개회사가 끝나자 方鍾鉉 문리대학장과 李彙榮(불문), 李敏載(생물학) 교수 등이 달려왔다. “자네들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이러나.” “지금은 비상계엄하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큰일나! 큰일나네 이 사람들아.” 학생들이 그대로 대회를 강행하려고 하자 方학장은 박대완의 손을 끌며 만류했다.
그 사이에 李文弘, 金有根 등이 단상에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길다란 선언문을 그대로 읽을 여유가 없었다. 결의문부터 읽었다.
“우리는 비상계엄령의 즉각 해제와 구속된 국회의원의 즉시 석방을 요구한다!” “우리는 반공 반파쇼를 위해 결사투쟁한다!” 큰 소리로 이문홍, 김유근 등이 외치자 다른 1백여 명의 학생들은 따라서 외치며 주먹을 올렸다. 5~6명의 교수들이 몰려왔지만 교수들은 실력으로 이 집회를 방해할 힘이 없었다. ‘반공 반파쇼 전국학생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된 삐라가 뿌려지고 누군가 그들의 결의문과 격문을 강의실 한 쪽에 붙이기도 했다. 경찰이 즉각 동원되지는 않았다. 10여 명의 경남도경 형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학생들이 해산한 뒤였고, 주동학생들은 어느 새 피신해 버렸다.10)
이때 박대완, 김유근, 이문홍 등 문리대 반공·반파쇼 궐기대회의 주동자들은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또한 연대의 조철학, 동국대의 김영필, 이화여대의 정명은·신봉수 등은 서울문리대의 선언과 거의 같은 시각에 각기 자기 대학에서 수십 명 또는 1백여 명이 모여 집회를 갖고 정부의 국회탄압을 규탄했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박대완, 김유근, 이문홍 등은 지명수배되어 피해 다니다가 후일 체포되어 부산지구 계엄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부산정치파동 시기의 민주수호 선언은 1회성 시위에 불과하였지만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이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이 강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은 이후 한국전쟁 직후까지 더 이상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고
오히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통해 관제데모에 동원되었다. 1953년
2월의 ‘학생출정 계몽선전운동 및 전시학도 궐기대회’, 1953년 4월의 ‘북진통일 학도총궐기대회’, 1953년 6월의 ‘휴전회담 반대
데모’ 등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3) 학생과외활동
전쟁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의 일부는 참전하고, 일부는 피난지 생활에 고초를 겪고 있는 어려운 형편에서 정상적인 과외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학생들은 과외활동을 통하여 독특한 대학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1) 학술활동과 언론활동
전란으로 인하여 도서관이나 연구시설이 거의 갖추어지지 못한 부산의 가교사에서도 학생들의 학회활동이 점차 재개되었지만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전란 전에 발간되던 학생들의 간행물인 학내신문과 학보는 대부분 전란으로 인하여 속간되지 못하고, 오직 의과대학에서 『醫大』를 1951년 속간했을 뿐이다. 이외에 상대에서는 『상대논평』을 창간하였고, 1952년에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범대학신문의 성격을 가지는
『대학신문』이 창간되었다.
(2) 문학활동
구차하고 가난한 학생들이었지만 삶에 대한, 문학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던 시대였다. 제대로 제본된 책 한 권 없었지만 타이프로 찍은 英·佛·獨의 원서를 통해 각국의 문예사조가 물밀듯이 부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조들 가운데 학생들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당시 구미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었던 실존주의였다. 실존주의는 강의실에서, 그리고 학생들이 모이는 술집·다방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사르트르는 학생들을 가장 매료시킨 철학가였다. 하이데거가 당시 朴鍾鴻 교수 등 교수진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반면 사르트르와 말로, 까뮈 등은 주로 젊은 문학도에 의해 진지하게, 그러나 아직 덜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대학신문』의 학생문예란에는 이러한 사조의 영향을 받은
시·소설·수필·평론 등이 많이 실렸다. 시를 예로 들어보면 맛귀로맜, 맛여명맜, 맛다시 웃을 날이맜, 맛굶주림맜, 맛폐허의 노래맜 등이
그러한 사조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3) 예술활동
예술활동은 전교적인 것은 없었고, 다만 단대별 활동이 있었다. 사대의 종합예술제, 예대 미술부의 미전, 음악부의 전국남녀중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 및 졸업연주회 등이 1952년부터 열렸다. 이 밖에 농대
연극부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4) 체육활동
전시하에서 신체단련은 크게 강조되어 전교체육대회 및 서울대학교 총장기 쟁탈 전국남녀고교 및 각 대학대항 구기대회가 열렸다. 전교종합체육대회는 1949년 제1회 대회를 개최한 후,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2년 11월 부산 대신동에 신설된 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전교 교직원, 학부형 및 일반 관객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배구, 농구의 단대 경기와 열차경기 등이 있었다. 1953년 전교체육대회는 4년만에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흩어졌던 전교 학생, 교직원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자리였다.
한편 전시하 청년학도들의 정신통일과 체력향상을 위하여 1952년
제1회 서울대학교 총장기쟁탈 전국남녀고교 및 각 대학 대학탁구대회가 개최되었고, 이듬해에는 대학대항 축구, 배구, 농구 등 경기 종목이
첨가되어 이후 연례행사가 되었다.
(5) 계몽 및 봉사활동
1952년 하기방학 때부터 학도군사훈련을 받은 4학년생 이외의 대학생들은 이 문맹퇴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계몽반학생들은 며칠간의 계몽훈련을 받고, 자기 고향 특히 읍·면의 농촌으로 돌아가 당해 읍·면장 중심으로 조직된 계몽추진위원회와 연락하여 각
부락에 국문강습반·공민학교반·성인반을 개설하고, 국문을 보급시키고, 사회·역사·과학 등도 교육하였다. 1953년 겨울에는 계몽반원
13만 명이 40일간 동원되어 국회의원 총선거를 위하여 문맹퇴치에 노력을 경주한 결과 문맹자는 전국민의 27%로 줄었다. 1955년에는 계몽활동과 향토실태조사에 중점을 두고 생활실태·종교실태·교육실태·문화실태를 조사하였다. 한편 의대와 치대학생들은 순회진료반을 조직하여 무의촌, 피난민수용소를 찾아 치료와 위생계몽 활동을
하였다.
전시하에서 학생들의 학습을 가장 어렵게 한 것은 학술서적의 부족이었다. 1953년 5월 11일 전년도에 계약된 UNKRA 원조도서 제1차년도(1952년도)분 39,200권이 부산항에 도착, 전국의 국립 및 종합대학에 배분되어 서울대에는 12,500권이 배정되었다. 물론 1952년 서울에 있던 책 2만 권을 부산으로 가져 가 도서관을 열기는 하였지만
연구활동을 위해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분량이었다.11)한편 전쟁으로
인하여 학생들은 생활에 곤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피난지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많은 학생들이 부직을 가져야만 했다. 당시
학생들의 부직이 문제가 된 것은 그것이 사실상 본직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즉 태반의 학생들이 공무원, 회사원 등 전문직을 가지면서 학생신분을 보유했고, 따라서 강의에의 출석률은 지극히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3월 3일자 『대학신문』 제5호에
실린 당시 학생들의 부업실태에 대한 보도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학생들 중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50~60%에 달했다. 그
중 관공서의 서기·주사급은 수두룩하며, 과장급도 있고, 은행·회사의 중견사원도 더러 있고, 군인으로는 영관급, 경찰관으로는 총경까지 있었다. 기타 신문기자·악사·교원·가두의 책장수·약장수·부두노동자·식당보이까지 있었다고 하니 대학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슨
강습소 같은 인상을 풍겼을 만도 하다. 업종별로 보면 군관계 종사자(현역 및 문관) 20%, 경찰관계 8%, 관공서·은행·회사 32%, 미국기관 8%, 부두노동 7%, 개인기업체의 점원 혹은 잡무종사자 12%, 교원·기자·악사·기타 자유직업 13%였다.
문교부는 전시에 학생들에 한하여 징집을 보류하는 특권을 주었는데 취업을 하는 경우가 빈번한 점을 들어 돌연 1952년 3월 각 대학에 직장을 가진 학생들의 취학을 금지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학생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교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부직을 갖지 않고는 학업·생활 모두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부직문제는 심심치 않게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생활여건으로 인하여 직업을 가지면서도 학업에 열중하고자 했던 학생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시하의 후방에서 사치와 퇴폐의 풍조로 학생들의 풍기정화문제를 일으킨 학생들도 있었다. 1952년말에 열린 학도호국단 중앙학생위원회 창립총회에서는 학생들의 풍기정화문제를 토의하였고, 그해 10월초 문교부는 학생의 다방·요정 출입금지, 사교댄스 금지, 자가용차·합승차 이용 금지, 여학생의 짙은 화장 금지, 학생의 정치운동 참가 및 정당·사회단체 가입 엄금 등 ‘전시학생의 기풍을 수립, 선도코자 학생 특히 대학생들의 풍기에 관한 새롭고 강력한 신단속조치’를 마련하였다.12) 이어 11월에도 문교부에서는 학생풍기를 엄중단속하고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각 대학에 훈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부는 부산에서 경찰력을 동원, 학생의 다방출입 등을 단속하였다. 즉 『대학신문』 1953년 4월 27일자에 보면 어떤 학생은 평소 다방·극장 출입을 하지 않다가 어느날 고향에서 온 선배를 모시고 차를 대접하다가 풍기단속을 나온 임검경관에게 걸렸다고 한다. 이 학생은 『대학신문』의 <학생의 소리>란 투고를 통하여 학생풍기 단속에 대한 재고를 요망하면서 “대학교육은 음악에 대한 지식도 연극·영화에 대한 교양도 포함하는, 현대인으로서 지녀야 할 온갖 교양과 지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의 실정으로서는 그것이 학원내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원컨대 학생의 건전한 과외교육을 위한 학생집합소가 설치되든지 학생의 다방출입에 어떤 한계가 있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작가 吳尙源(당시 불문과 재학)의 회고에 의하면 다방이 사치의 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의 하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다방·술집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었고,
그 문화의 내용은 ‘虛妄’과 ‘實存’이었다. 전쟁의 상황 속에서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적 사조가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13)『대학신문』 100호 기념으로 실린 맛대학가 풍속도의 변천맜이라는 글에서는 당시 재학생들의 회고를 정리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숱한 죽음, 그 폐허 앞에서 그들은 허망한 세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보다는 남포동 골목 2층의 <아리랑 다방>이나, 탁자나 의자가 낡을 대로 낡은 암울한 분위기의 <스타다방>, 부산역전의 피난 온 <돌체> 속에 파묻히던 그들에게 단 하나 구원의 손낄은 독한 술과, 갓 수입된 불란서의 신사조 ‘實存主義’였다.
남포동 뒷골목 막소주집에는 가장 인기높던 사르트르의 로깡땡이, 알제리아해변의 에뜨랑제가, 짙은 엘레지 실존주의의 키에르케고르가, 지옥의 천재 보들레르와 랭보가 설익은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질식할 것만 같은 극한상황 속에서 그저 절인 콩이나 소금을 안주로 하여 마시는 독한 알콜의 기운과 전후의 전위적이고 자극적인 ‘실존’의 이름은 그들에게 한 도피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휴전협정은 미국대통령선거, 스탈린의 사망, 중국 내부의 사회주의 건설문제 등 국제적인 상황변화와 맞물리면서 2년이 넘는 기간의 회담 끝에 체결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3년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은 통일을 이루지도 못한 채 막을 내리고, 이제 폐허를 재건해야 할 과제만이 남게 되었다.
1953년 8월부터 서울로 환도하기 시작한 정부는 곧 모든 분야에 걸친 재건에 착수하였다. 우선 1953년 10월 1일 맛韓美相互安全保障條約맜, 1954년 맛韓美合意議事錄맜을 체결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또한 경제재건과 재정안정을 위하여 1953년 12월의 맛韓美合同經濟委協約맜과 1954년 5월의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on Korea Rehabilitation Association; UNKRA)과의 맛경제원조에 관한 협정맜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승만정권은 종신 집권을 위한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면서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재건 분위기 속에서 서울대학은 민족의 대학으로서 새 출발하기 위하여 시설 및 기구·학사의 재정리,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정부의 환도에 따라, 부산 구덕산 기슭에 가교사를 짓고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서울대학은 캠퍼스의 복귀를 서둘러야 했다. 이미 1953년 4월 15일 서울지구의 고교졸업생을 위해 서울 분교를 열어야 할 정도로 캠퍼스의 서울 복귀는 시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즉각 서울로 오지 못했던 것은 많은 건물과 시설이 파괴되었고, 동숭동의 대학본부와 문리대 교사, 그리고 연건동의 의대 캠퍼스 등을 미8군사령부와 제5공군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3년 8월 2일 미8군사령부는 51년 5월 이후 사용해 오던 동숭동 캠퍼스에서 용산으로 이전하였고, 9월 15일에는 崔奎南 총장에게 정식으로 본교 교사를 반환하였다. 그러나 의대는 아직 미 제5공군이 사용중이었고, 음대 교사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그래서 캠퍼스가 없는 대학은 남아 있는 다른 캠퍼스에 임시 수용되었다. 공대는 용두동의 사대부중 임시교사에, 수의대와 음대는 문리대 임시교사에 세를 들었다.
전쟁은 시설면에서 서울대학에 큰 피해를 주었고, 이의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458동, 62,527평에 달하던 건물 중에서 수리 혹은 재건해야 할 건물이 276동, 24,313평으로 이를 위해서는 4억5천만 환의 재원이 필요하였다. 모든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12억6천만 환의 비용이 필요하였고, 이는 1953년도 국가예산의 약 1할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설의 복구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國庫·期成會費·外國援助 등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졌다. 특히 ‘미네소타 계획’에 의한 미국의 원조는 서울대학의 재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캠퍼스의 복귀, 시설복구와 함께 교육내용과 제도에 대한 재검토, 개편이 추진되었다. 1954년 2월 敎科課程委員會를 구성하여 교양과목의 필수와 선택, 전공과목의 주전공과 부전공, 학점규정 등 교육내용에 대한 개편을 단행한 것이 그것이다. 그 뒤 1959년 1월에는 맛국립학교 설치령맜의 개정을 통해 10여 개 학과의 통합·증설을 단행하고 보건대학원과 행정대학원을 신설하였다. 또한 이 법령에 의거하여 사무기구의 통일적인 운영도 가능하게 되었다. 1957년에는 학장회의에서 敎養課程部 설치규정을 마련함으로써 교양과정교육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도적인 교육내용의 기반확립과 함께 대학의 본원적 사명인 교수와 연구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있었다. 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교수들의 연구진작을 위해 연구비를 지급한 것이 그것이다. 연구비의 액수는 교수의 연구활동을 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으나 연구활동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고 또 연구의욕을 고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한편 대학자치를 확보·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서울대학교 평의원회의 성립으로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대학의 권위, 즉 학문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강압이 나타나면서부터 사회여론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이를 통하여 대학의 사명과 사회적 위치를 새삼 인식하게도 되었다.
학생들의 활동도 학회활동의 태동과 발전을 통해 활발하여졌다. 여러 가지 학내의 학술·문예활동과 함께 학생의 사회적 발언의 강도도 자유당정권의 부패가 노정되면서 더욱 강하여져 학생들은 4·19 혁명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학생자치 활동의 강화는 학도호국단의 폐지문제를 대두시켰으며, 이는 대학인과 사회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상에서 볼 때 1950년대는 여러 분야에서 전란의 상처를 치유, 극복하여 안정을 도모하려는 시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반공분위기를
이용한 독재정권의 강화로 침체와 정체가 만연하고, 이에 대한 저항의 흐름이 잠복하여 새로운 비약을 위한 힘을 축적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의 재정은 국고, 후원회비, 외국원조, 경특회계에 의한 자금, 기성회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예산지출에서 항목별 구성을 보면 <표 1>과 같다.
국고는 정부예산 중에서 서울대학에 배정되는 예산액으로서 문교부 예산 중에서 할당되었다. 국가 전체 예산 중에서 문교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5, 1956년에는 9.3%, 1957년에는 9.4%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52년도의 2.0%에 비하면 4배 이상 증가한 것이고, 1958년도에는 10.8%, 1959년도에는 14.9%로 상승하였다.
정부예산에서 서울대학의 국고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5~1961년에 걸쳐 대체로 0.4~0.5 수준에서 고정되었다. 그리고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울대학교 전체예산에서 국고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3년 85%, 1954년 86%까지 이르렀다가 1955년 이후 점차 감소하여 50% 전후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국고지출액이 절대적으로 감소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절대액은 훨씬 증가하고 있으며 외국 원조액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세출총액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1957년의 경우 외국원조액이 전체예산의 33.2%를 차지하고 경특회계세출이 17.1%를 차지하여 전체예산의 절반을 상회한 액수가 외국원조에 의존한 셈이었다. 그러나 외국원조는 그 이후 조금 줄어들어 1/3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국고예산이 줄어든 반면 후원회 예산은 점점 늘었다. 1960년도에는 후원회예산이 전체예산의 24.1%에까지 달하였다.
그리고 국고세출에 대한 본교 세입액의 비율, 즉 국고로부터 서울대학에 배정되는 예산과 서울대학에서 국고에 납부하는 액수의 비율이 해마다 증가하여 1960년도에는 34.6%에까지 이르렀다. 후원회지출액과 본교세입액의 증가는 결국 학생부담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재정상황과 국고지원의 결핍은 본교의 시설재건 및 확충 그리고 운영자체를 상당히 어렵게 만들었다.
국고지원의 부족으로 서울대학은 전란 후의 시설복구를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후원회비와 외국원조도 있었지만 시설복구 및 확충에는 크게 부족한 형편이었다. 국고지원이 부족한 것은 전란 후 국가재정의 궁핍에서 초래되는 것이지만 그뿐 아니라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4~5개의 국립대학이 증설됨으로써 국고가 부족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문교부는 부산 피난 시절 대학설치기준을 假校舍의 시설기준에 두었는데, 이 때문에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대학이 남설되었다. 대학의 수는 세계 4위를 점할 정도로 증가하였지만 수준에는 극히 미달되었다. 그래서 문교부는 1955년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하여 교원배치기준, 시설기준, 자산 및 경영에 관하여 재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 때 사립대학은 起債, 학생의 징수금 증가, 기타 수입금으로 어느 정도 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국고에 의존하는 국립대학은 오히려 설치기준에 미달하는 형편이었다. 서울대학교에는 대학설치기준을 상회하는 대학과 그 기준에 미달하는 대학이 있었다. 단과대학 사이에 시설을 교환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설치기준령에 미달하는 시설이 적지 않았다. 교사 부족이 12,548평, 교지 부족이 64,000평, 체육장 부족이 10,247평, 모두 86,795평으로 이를 갖추기 위해서는 약 35억 환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은 재정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1957년 3월 7일 각 국립대학에 훈령을 내려 수익자 부담원칙에 입각한 ‘시설확충기성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 훈령에 의거하여 기성회비를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7년 4월 6일 기성회 발기인을 구성하고 4월 19일 평의원회 의결을 거쳐 7월 25일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 서울대학교 ‘시설확충기성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57년 8월 9일에는 제1회 대의원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각 단과대학별로 선출된 27명의 대의원이 참석하여 기성회비를 1957년도 2학기부터 1인당 1만 환(사범대학은 면제)씩 걷기로 하였다.
1957년 제2학기부터 1961년 제2학기까지의 기성회 총수입은 약 9억 6천만 환이었고, 이는 같은 기간 국고예산인 10억 환과 비슷한 액수였다. 그러나 1960년 제2학기부터 기성회가 해제되어 기성회비의 수입은 없고 건물매각수입, 통지예금에 의한 이자수입밖에 없었다.
기성회 시설확충사업을 위한 지출내역을 살펴보면 기성회 존립기간 동안 총 9억 6천만여 환이 지출되었다. 1957년도 제2기에는 문리대와 상대, 1958년도 제1기에는 상대, 수의대, 행정대학원에 집중지원하였다. 1959년도부터는 각종 기관에 골고루 안배하였다.
문리대에는 기성회비 존립기간 동안 114,700,000환이 지출되어 이학부 실험실, 화학과 건축공사, 연구실 수리공사에 투입되었고, 상과대학에는 도서관, 연구실 신축을 위해 1억 환이 투입되었으며, 음악대학에는 음대교사 신축과 국악과 악기 구입에 1억 환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사범대학의 교사부지 매입, 행정대학원 임시교사 수리, 약학대학 본관 신축, 법과대학 도서관 신축, 수의과대학 강의실과 실험실 신축, 미술대학 학생실습용 기구 구입에 기성회비가 지출되었고, ICA 원조를 받은 농과대학, 법과대학, 공과대학은 기성회비 보조를 적게 받았지만 농가정학과 기구 구입, 공과대학 차고 및 창고 신축 등에 기성회비가 지출되었다.
이와 같이 학생들이 납부한 기성회비는 서울대학의 시설확충을 위하여 요긴하게 쓰였으나 사실은 국가 재정에서 부담해야 할 부분이었다. 자유당 말기 비합리적인 정치구조와 재정운영 속에서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부과되었던 기성회비 납부제는 4·19 혁명을 경험한 뒤
학생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여 폐지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1960년 제2학기 등록기간에 이르러 학생들은 시설확충기성회비의 납부를 거부하는 등록파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서울대학이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12억 환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국가재정형편에서는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기대하게 된 것이 외국의 원조였다.
서울대학의 시설재건을 위하여 정부의 지원을 얻는 데 실패한 崔奎南 총장은 미국 원조당국과 수차에 걸쳐 접촉한 결과 정부측에서 승인만 하면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 원조당국의 승락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金法麟 문교부장관은 서울대학에만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최총장은 원조액을 균형분배하는 방법보다 집중투자하는 방법이 더욱 긴요하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대학에서는 미국 원조기관으로부터 30만 달러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서울대학에서는 이 원조를 바탕으로 하여 대규모의 서울大學校 再建計劃書를 작성하여 문교부를 경유, 미국 원조기관에 제출하였다. 美國海外開發本部(FOA)에서는 이 계획서를 근거로 하여 서울대학의 교육과 연구활동의 부흥발전을 위하여 1954년 농학·공학·의학 분야를 중심으로 다시 서울대학과 원조계약을 체결하였다.
1954년 9월 28일 미네소타대학과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해외개발본부), 이후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국제협조처)간의 협정에 의해 3개년간 180만 달러에 이르는 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계약은 서울대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임시조약은 1954년 8월 1일에 맺어졌으며, 동년 10월 19일 자문위원장이 서울에 도착하면서 상호교류가 시작되었다(미네소타 계획은 처음에 FOA, 나중에 ICA, 최종적으로 AID와 계약을 지속하였다. 이 계약은 17번에 걸쳐 수정이 가해졌다.).
미네소타대학이 주관한 서울대학의 재건과 부흥을 위한 계획은 미국의 대학들이 여타 ‘아시아’ 국가─태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의 대학에 대해 지원한 계획 중 가장 큰 규모의 계획이었다. 1955년에서 1958년 7월 31일까지 총 5백4십5만 1천 달러가 소요되었으며, 한국정부 측에서 2백6십5만 달러를 보탰다(총 8백10만 1천 달러). 다른 계획과 마찬가지로 이 돈은 ICA의 자금으로 지원되었으며, 지원부문은 농업, 공업, 의학, 일반행정학에 국한되었다.
이 계획의 시작은 1953년 서울대학의 요청을 받은 OEC(the Office of the Economic Co-ordinator for Korea,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FOA에 협조요청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FOA의 처장인 Harold Stassen은 미네소타 주지사 출신이었다.
이 계획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나라의 대학지원처럼 학교 대 학교로 모든 학과에 걸쳐 전체적으로 지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농대, 공대, 의대가 1대 1로 교류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 교류를 주도할 대학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하버드·예일·프린스턴·컬럼비아·시카고 대학 등이 거론되었지만 이 대학들에는 농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선정 대상에 오른 학교는 미네소타대학과 오하이오대학이었다. 이중에서 미네소타대학이 선정된 것은 미네소타대학의 농학이 뛰어났다는 점과 Herold Stassen의 연고가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의 총장인 James I. Morril은 미네소타 계획의 책임자로 교육학 교수인 Tracy F. Tyler를 지명하였다. 미네소타대학은 FOA와 1954년 협정을 맺었고, 1955년부터 계획을 실행하였다. 미네소타대학의 학국측 책임자로는 임학을 전공하고 있는 Arthur Schneider가 선임되었다. 그는 미군정기인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임업 전문가로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미네소타 계획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 서울대학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원
② 행정학 분야에 대한 지원
③ 서울대학이 한국 내의 다른 대학과의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지원
④ 국립 공무원 연수원의 전반적 수준 향상을 위한 지원
따라서 서울대학을 한국에서 최고의 고등교육 연구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또한 서울대학은 내부적으로 이 계획에 따라 ① 교수들의 연구·지도·행정력을 배양하는 것, ② 도서관·연구소·체육관 등의 장비지원을 통해 보다 효과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
미네소타 계획의 업무진행구조는 서울과 미네소타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미네아폴리스에서 이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는 책임자인 쉬나이더(Schneider) 교수 밑에 3명의 자문(advisors; 최소한 1년간 근무하며 쉬나이더에게 직접 업무상황을 보고)이 있었으며, 그 밑에 30명의 각 학과 대표자들(representatives)이 활동하였다. 미네아폴리스에서는 의학, 공학, 농학의 미네소타대학 책임자들(미네소타 대학의 교수들)이 최소한 한 번 이상 서울대학을 다녀와야 했으며, 다녀온 뒤 Tyler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서울에서 활동하였던 미네소타의 staff(=representatives)들은 ① 새 건물의 신축 ② 장비검열 ③ 도서관 재정비 ④ 미네소타대학에서 공부할 학과 교수들을 선발하는 것 등을 감독했다. 이러한 일들에는 많은 한국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각 부문에서 미네소타 계획을 보조할 한국인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서로간의 생활 문화차이, 언어의 장벽 등으로 양자간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일례로 1958년의 맛정례보고서맜는 한국의 직원들이 미네소타대학의 직원들이 그들이 일한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얻는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하였다.
미네소타 계획의 실행과정에서 또 하나 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수의학부의 이동문제였다. 당시 수의과대학은 의대와 같이 연건캠퍼스에 있었으나 미네소타대학의 자문위원들은 수의과대학이 학문영역상 농대에 속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자문하였다. 아울러 농업관계 정부기관 역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위치한 수원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두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첫째로 수의과대학의 교수들의 집이 연건캠퍼스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수원으로 이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둘째로 농대는 교육부 산하였고, 농업기관들은 농림부 산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장소로 모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연구·작업의 능률과 관계없이 이전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의대, 농대, 공대 외에 행정학 분야의 지원은 1957∼1958년(1958회계년도)에 가서 추가된 부분이었다. 행정학 분야 지원의 핵심은 법학과나 정치학과에서 행정대학을 분리하여 독립된 단과대학을 설치하는 것과 미군정하에서 설립된 국가공무원 연수원을 지원, 강화하는 것이었다. 1957년부터 1958년까지의 준비과정을 거쳐 1959년 4월 행정학 분야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었다.
행정학 분야의 책임자는 미네소타대학 출신이 아니었다. Texas 대학의 Stuart McCorkle 교수가 처음 2년간 책임자로 일했으며, 미네소타대학원 출신의 농무성 관리 E.R. Draheim이 국가공무원 연수원을 자문하였다.
1959년의 여름기간 동안 11명의 학생, 조교, 강사들이 미국행정기관에서 ‘인턴’사원으로 연수를 받았다. ‘인턴’과정 후 7명은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갔으며, 4명은 계속해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였다. 미네소타대학에서의 행정학 교육은 두 가지 점에 중점을 두었다. 첫째로 1년간 행정학적인 기초를 바로 잡는 것과 둘째로 미국학생과의 counterpart system을 통해 실질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아울러 서울대학교에는 행정대학원이 신설되었다. 행정대학원은 총 18~24개월의 코스로 개설되었으며, 1년은 course work, 나머지 6개월에서 1년은 정부기구에서 ‘인턴’ 훈련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편 미네소타 원조계획은 韓美合同經濟委員會에 의하여 1961년 9월 28일까지 다시 연장되었다. 그리고 이 계획에는 농대·공대·의대 외에 다른 단과대학도 포함되었다. 이 원조계획에는 434만 달러와 대충자금 약 73억 환이 책정되었다. 이 원조는 인사교류, 기계기구 도입, 건물복구 등에 사용되었다.
미네소타 계획은 반 년 단위로 결산이 이루어졌으며, 1954년 9월 28일부터 1961년 10월 31일까지 총 15회에 걸쳐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Schneider는 1961년 6월 30일까지 서울에 있었으며, 마지막 보고서를 1961년 10월 31일에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1961년 6월 30일에 미네소타대학을 통한 모든 지원이 끝났다(1961년 다시 학부로 축소개편된 수의학부만 7월 31일까지). 그러나 미네소타대학에 파견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1962년 6월 30일까지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상과 같은 미네소타 계획의 지원의 결과에 대해 미국정부의 공식 보고서는 “서울대학의 교육적인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지만, 미네소타대학의 농학, 의학, 공학, 행정학 분야에 있어서 주요한 목표는 성공적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구체적으로 지원된 분야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서울대학 교수들에 대한 지원(파견 교육) - 218명의 서울대학 교수들과 8명의 공무원들이 미네소타대학에 파견되어 6개월에서 4년까지 교육을 받음. 15명이 박사학위를 받고 71명이 석사학위를 받음(박사학위 중 4명이 농대, 2명이 수의학, 6명이 공학, 2명이 의학 1명이 행정학. 석사학위 중 농학 23명, 수의학 4명, 공학 21명, 의학 11명, 행정학 12명).
② 미국인 전문가 고문들이 서울과 수원에서 활동 - 43개의 서로 다른 분야에서 59명의 미국인 고문들이 활동. 모두 합하면 76명이 넘는 인원이 한국에서 활동. 이들은 교육의 향상과 연구, 행정의 개선을 위해 한국인 교수들과 함께 일함. 이들은 커리큘럼의 작성, 연구기술, 기계작동방법, 체육관, 도서관, 학교 행정 등에 관해 자문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61년 6월 30일자로 마감되었지만, 행정학 분야의 Elwyn Mauck, Lloyd Short, 그리고 공무원 역수원의 Clifford Jurgensen, James Fritze, 대학본부의 Chester Wood의 활동은 1962년 6월 28일에 종료되었다.
③ ICA/AID에서 지원된 물품으로 서울대학에 지원 - 물품지원은 Tracy F. Tyler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지원된 물품의 총액은 7년 9개월 동안 모두 3백만 달러였다.
④ USOM과의 협조하에 체육관과 필요한 새로운 빌딩들을 재건. -
수원에서 7개의 빌딩이 새로 건축되었으며, 나머지 빌딩들도 수리작업이 진행되었다. 공대에는 6개의 새로운 건물이 섰으며, 19개의 건물을 수리하였다. 간호학과와 간호원 기숙사에 대한 수리가 있었으며, 대학병원의 식당, 세탁소를 새로 지었다. 수의과대학의 경우 3층짜리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행정대학원도 3층건물로 증축하였다. 이러한 작업에 총 300만 달러가 들었다.
이 계획에 의한 전체 보급품 액수는 2,790,800달러에 달하였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볼 때 건물 재건축에 2,915,700달러, 장비구입에 2,735,300달러가 소요되었다(합계 5,651,000달러. 여기에 도서관 지원을 위한 55,000달러를 포함하면 5,706,500달러). 인사교류에 할당된 금액은 180만 달러였다. 시설재건을 위한 비용은 의대·농대·공대의 건물수축 및 내부시설, 실험용 계산기, 전기 뇌촬영기 등을 비롯한 각종 실험기구의 설치로 쓰여졌다. 또한 1957년도에 할당된 79만 달러는 문리대·사대의 이공계통 기구를 도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공공행정비로 약 30만 달러가 책정되어 행정대학원 및 법대 부속도서관 신축에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장비구입에 212,000달러가 소요되었으며(이중 20,000달러는 여타 국립대학 지원으로 넘어감), 이 액수를 합치면 전체는 5,918,500달러에 달하였다. ICA나 USOM의 재정으로 실시한 보급품제공을 제외하면 1962년 5월 31일까지 전체 지출액은 2,730,973.12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지원액수는 미국이 여타 나라 대학에 지원한 액수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한편 FOA는 ‘미네소타’ 계획 외에 서울대학에 학술연구기구 및 보조물자구입비로 150만 달러를 원조하였다. FOA에서 관장하던 敎育部門援助事業은 그 뒤 1955년부터 國際協助處(ICA)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미네소타’ 원조계획 외에 ICA 원조계획에 의하여 177,084달러가 도입되어 사대와 미대의 교사훈련에 필요한 실험기구·서적구입에 사용되었다. 또한 외국원조기관의 직접원조 외에 1955년부터 經特會計에서 서울대학의 건물복구와 기구설비에 활용하도록 자금을 배정받았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ICA대충자금 방출계획에 의한 경제원조 특별회계로 서울대학에 배당된 금액은 4억1,545만 환이었다.
이와 같이 국고재정의 부족은 민족대학으로서 성장하려는 서울대학의 이상과는 달리 외국원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였다. 한편 공과·농학·의학 등 이공계통에 집중적인 외국지원이 이루어져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왔고, 이는 1960년대 공업화의 초석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농학·의학·수의학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1950년대 중반까지의 미국의 대한정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미국은 1950년대를 통하여 한국의 경제개발이나 경제부흥보다는 한반도의 군사적 중요성과 구호를 통한 내부의 정치적·심리적 안정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195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은 미국의 정책문서인 NSC 170(1953년 11월 9일자; 맛한국에 있어서 미국의 목표 및 행동방침맜)을 통해 잘 나타난다. 이러한 미국의 대한정책은 1945년 이후 일관된 것이었다.
물론 1957년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의 군사감축과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한국이 미국의 원조 없이 자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는 미국의 정책문서인 NSC 5702(1957년 1월 14일자), NSC 5817(1958년 8월 7일자)로 나타났고, 이것이 미네소타 계획 중 공과대학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기본적으로 군사논리가 우선하였고, 한국정부의 안정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군사원조와 구호의 문제가 보다 중심에 위치하였다.
외국원조에 대한 의존성이 크면 클수록 학문의 자주성과 과학·기술의 자립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지원의 편중성은 모든 학문의 균형잡힌 발전을 가로 막았다.
즉 인문, 사회과학 분야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학문발전의 편중현상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1) 교육기구의 변화
1953년 국립학교설치령의 공포로 그때까지의 ‘국립서울대학교’라는 명칭이 ‘서울대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내에 1개 대학원, 12개 단과대학, 5개 학부(문리대의 문학부와 이학부, 사범대의 교육학부, 문학부, 이학부), 64개 학과가 설치되었다. 1959년 1월에는 법과대학에 행정대학원이, 의과대학에 보건대학원이 특수대학원으로서 각각 설치되었다.
大學院 대학원은 문리과대학과 같은 건물에 있었고, 대학원위원회가 학사행정을 심의하였다. 학과는 1960년 2월 당시 52개였으며,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석사과정 정원은 서울대학교 학생정원의 20분의 1, 박사과정 정원은 석사과정 정원의 2분의 1 이내였다.
박사과정의 입학시험은 전공과목 및 2종의 외국어 필답고사와 구술고사로 행하여졌으며, 수업년한은 4년, 재학년한은 5년을 초과할 수
없었고, 취득해야 할 최저 학점은 36학점이었다. 박사학위의 종별은
공학·농학·문학·철학·이학·법학·경제학·의학· 수의학·약학박사 등 10종이 있었고, 1957년 4월 선발시험에서 21명이 합격, 진학하였다.
文理科大學 1953년 4월 당시 문리과대학은 문학부, 이학부, 의예과로 구분되어 있었다. 문학부에는 국어국문학과·중어중문학과·영어영문학과·불어불문학과·독어독문학과·언어학과·사학과·철학과·종교학과·정치학과·지리학과·심리학과·사회학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학부에는 수학과·물리학과·화학과·생물학과·지질학과·천문기상학과가 설치되어 있었다. 1958년부터 지리학과와 천문기상학과의 학생모집이 시작되었다. 1959년 1월에는 문학부에 외교학과·사회사업학과가 신설되었고, 이학부의 생물학과는 식물학과와 동물학과로 분리되었으며, 치의예과가 1개 학부형태로 신설되었다. 미학과는 1953년 4월 예술대학이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으로 나누어질 때 문리과대학으로의 이전이 명문화되었지만, 줄곧 미술대학내에 남아 있다가 1960년 문리과대학으로 이속되었다.
工科大學 1959년 1월 통신공학과가 전자공학과로, 채광학과는 광산학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기존의 10개 학과에 원자력공학과가 신설되었다. ICA의 원조에 의하여 실험실과 제반시설이 계속 구비되어 가기는 하였으나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고, 교수요원도 충분치
못했다.
農科大學 1953년 3월 당시 농과대학에는 농림학부와 수의학부의 2개 학부가 있었으며, 농림학부에는 농학과·임학과·농공학과·축산학과·농예화학과·농경제학과·농업생물학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1956년 7월에는 잠사학과가, 1959년 1월에는 농가정학과가 설립되었다. 수의학부는 1953년 4월 수의과대학으로 승격·개편되었으며, 1953년 9월에는 동물사육장이 설립되었다. 1959년 1월에는 농예화학과가 농화학과로, 농업경제학과는 농경제학과로, 농업생물학과는 농생물학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美術大學 1953년 3월 당시 미술대학에는 회화과·조각과·응용미술과·미학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1959년 1월에는 조각과가 조소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7년 2월 부설 중등교원양성소를 폐지하였고, 1960년 10월 미학과를 문리과대학으로 이관하였다.
法科大學 1953년 3월 당시 법과대학에는 법학과와 행정학과가 있었다. 그리고 1959년 4월에는 행정기관에 종사할 인재의 양성훈련을
목적으로 법과대학 부속으로 행정대학원을 신설하였다.
師範大學 사범대학은 1954년 12월 23일 을지로 교사를 용두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1954년도에는 사범대학의 교육과가 교육학부로 승격하여 교육과, 교육심리과, 교육행정과로 분리되고 학생정원도 120명에서 80명이 늘어나 200명이 되었다. 사범대학 문학부는 역사과·지리과·사회과가 교과편성관계로 사회과로 통합되면서 정원은 60명이 줄어든 300명으로 되었다. 그리고 국어과와 외국어과가 각각 160명의 정원에서 140명으로 20명씩 줄어들었다. 이학부는 수학과·생물과·가정과가 각각 20명씩 증원되어 정원이 140명으로 된 반면, 물리과와 화학과가 160명에서 140명으로 각각 20명씩 감소하였다. 농과대학의 수의학부는 수의과대학으로 승격하면서 20명이 증원되어 320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학사과정 정원은 1953년에 비해 20명이 늘어난 11,040명으로 되었다.
1956년 7월에는 사회과가 일반사회과·역사과·지리과로 분리되었다. 1954년 3월 31일 교육행정연수원이 병설되었고, 1960년 10월
31일 부설교육행정연수원이 개설되었다. 부속기관으로는 부속국민학교·부속중학교·부속고등학교가 있었다.
商科大學 1953년 3월 상과대학에는 상학과와 경제학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1959년 1월 무역학과가 신설되었다. 상과대학은 상품진열관·경제조사연구소·실습관 등을 설치하였고, 학생들은 학생연구회를
발족하여 전쟁 후의 한국경제의 진단에 힘을 기울였다.
獸醫科大學 1953년 4월 농과대학 수의학부에서 1개 단과대학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수의과대학은 연건동의 구경성의전에 자리를 잡았고, 1954년 2월에는 부속가축병원을 부설하였다. 이 병원은 1959년 1월 대통령령에 의해서 부속가축병원으로 정식 설치되었다.
藥學大學 약학대학은 1950년 9월 서울대학에 통합 신설된 이래
1957년 2월까지에는 1,695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고 석사학위
수여자도 20여 명이나 배출하였다. 1959년에는 부속약초원과 부속실습약국이 설치되었다.
音樂大學 1953년 3월 당시 음악대학에는 성악과·작곡과·기악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1959년 1월 국악과가 신설되었다. 부산피난 시절 피아노 한대로 수업을 했던 음악대학은 1958년 2월에 이르면 30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80여 대의 악기를 갖추게 되었다.
醫科大學 1957년 2월 당시 의과대학은 78명의 교수진 중 34명의 박사를 갖고 있어 서울대학에서 가장 많은 박사를 가진 단과대학이었다. 기초연구실로는 해부·생리·약리·병리·생화학·미생·醫史學의 연구실이 있었다. 한편 1959년 1월에는 의과대학 간호기술학교가 의과대학 간호학과로 승격 개편되었다.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1953년 4월의 국립학교설치령에 그 기구편제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부속병원에 서무과·간호과·약국을 설치할 것, 서무과는 기밀·인사·관인관수·서무·회계와 기타 타과에 속하지 않은 사항을, 간호과는 환자간호에 관한 사항을, 약국은 약제에 관한 사항을 분장시킬 것이 각각 규정되었다. 환도 후 병원관사에서 임시진료소를 개설하였던 부속병원은 1954년 3월 미공군으로부터 병원건물을 인도받아 4월 12일, 전쟁 발발 후
45개월만에 다시 개원하여 내과를 비롯한 10科의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 뒤 부속병원은 ICA 원조를 1955년부터 6년간 받아 시설복구에 사용하였다. 1954년 9월초 부속병원의 명물 시계탑수리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시계탑이 설치된 지 50여 년만에 처음으로 하는 수리였다고 한다.
齒科大學 환도한 후 치과대학은 UNKRA와 FOA의 원조로 실습기구와 부속병원 등의 시설을 복구하였다. 그리고 치과교육의 증진을
위해 1959년 문리과대학에 치의예과를 설치하였다. 치과대학 부속병원은 부산피난 시절에는 부산의 김치과의원을 임시 사용하였는데
1953년 9월에는 서울로 돌아와 개원하였다.
保健大學院 보건대학원은 1959년 1월 13일 대통령령 제1429호로 설치되었다(1년제 석사과정). 처음에는 의과대학에 부속되어 있다가 1960년 8월 분리, 독립하였다. 보건대학원의 설립의 목적은 ‘보건학을 심오하게 연구하고 그 응용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國家保健事業에 종사할 인재의 양성’에 있었다.
설립 당시 수업년한은 1년, 재학년한은 2년이었다가 1962년부터 2년 과정으로 연장되었다. 초대원장에는 明桂完 박사가 취임하였고,
최초의 석사학위는 1960년도에 11명에게 수여되었다.
行政大學院 행정대학원은 한미합동경제위원회(OEC)와 한국정부, 미국정부 간의 협의에 의해 1955년부터 설치가 논의되었다. 행정대학원은 원래 법과대학내에 행정학과로 있던 것을 ICA의 원조를 받아 1959년 4월 1일 법과대학 부속으로 설립되었다. 행정대학원 설립의 목적은 ‘대학교육의 목적을 일층 精深하게 추구하는 동시, 장차 행정기관과 보건위생사업에 종사할 인재를 훈련·양성하기’위한 것이었다.14) 종래에 공무원들을 해외에 파견하던 것을 지양하고 실무기관의 인재수요에 충당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행정대학원의 교육대상자는 대학졸업자 중 일반행정관으로 진출하고자 하는자, 공무원·군인으로서 행정에 관한 광범위한 훈련을 받고자 하는 자, 사업체에 종사하는 자로서 그 사업체의 업무가 행정기관과 계속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정부제도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수업년한은 2년이고 재학년한은 3년을 초과할 수 없었다. 학과연구는 대개 2~3학기 동안 마치게 하고 정부 각 기관, 기업체 등에서 3~9개월간 실무실습을
한 뒤 거기서 얻은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하여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
제출하게 하였다. 최초의 행정학석사는 1961년도에 81명에게 수여되었다.
1959년도에는 대통령령 제1430호 國立學校設置令의 개정에 따라
10여 개 학과가 증설되고 1,440명의 정원이 증가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新設)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 80명
농과대학 농가정학과120
문리과대학 사회사업학과40
문리과대학 지리학과120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120
문리과대학 치의예과200
사범대학 지학과80
음악대학 국악과200
의과대학 간호학과200
(分科)
문리과대학 정치학과(240)/ 정치학과120명
외교학과120
문리과대학 생물학과(120)/ 동물학과80
식물학과80
사범대학 외국어과(140)/ 영어·불어·독어전공300 상과대학 상학과(600)/ 상학과600
무역학과80
이리하여 학부학생정원은 12,560명으로 증가하였다.
대학원은 1954년도에는 학과수 총 51개에 정원은 학부정원의 5%
이내였으며, 1955년도에는 53개 학과로 증가하고 박사과정 정원은
석사과정 정원의 50%로 하였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959년도에는 행정대학원(200명)과 보건대학원(40명)이 신설되었다.
2) 부속기관의 변화
附屬圖書館 부속도서관은 부산 피난 시절에 관장 아래에 사무과와 사서과가 있었고, 사무과에 서무회계·도서수입·제본의 3係, 사서과에 동양서목록·서양서목록·도서대출·규장각의 4係를 두었다. 환도 후 1958년도에 다시 기구개편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관장 아래에 서무회계를 맡은 서무과와 受書·目錄·閱覽·貸出의 4係를 관장하는 사서과를 두었다.
1953~1960년의 부속도서관의 사업내용은 도서정리가 주된 것이었다. 특히 1958년 8월경부터는 新로마자표기법에 의해 정리하였고,
1959년 12월경에는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 도서정리규칙을 제정하여 본격적인 도서정리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도서관장은 鄭光鉉 교수(재임기간: 1952.9~1962.5)였다.
附屬博物館 박물관의 유물은 1955년 1,093점이 수집됨으로써 그 양이 급증하게 되었다. 유물이 급증한 것은 朴在杓 씨의 서화 등 수집품이 들어온 때문이었다.
당시 박물관은 1층은 민속실, 2층은 역사실과 미술실로 진열실을 꾸며 놓고 소장품들을 전시하였다. 속실에는 조선후기의 각종 민속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역사실에는 선사시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역사고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술실에는 朴榮喆 씨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서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수집, 정리한 吳世昌 씨의 槿域書彙 및 畵彙는 1,20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로서 조선 서화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당시 박물관장은 李相佰 교수(재임기간: 1954.11~1962.11)였다.
『大學新聞』 이 시기 『대학신문』은 범대학신문이 아닌 서울대학의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대학신문』은 처음에는 타블로이드 4면으로 발행되었으나 1954년 4월 제72호로써 대판 4면으로 확대되었다. 그 이전에도 제45·51·56·65호 등은 특집 8면으로 간행되었었다. 서울대학이 환도하면서 대학신문사도 동숭동의 대학본부로 사옥을 이전하고 제56호부터 속간하였다.
1954년 8월 학생기자 채용제도를 마련한 것은 『대학신문』의 역사상 대단히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이는 학생의 신문인 『대학신문』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신문에 대한 학내의 인식을 높이고 또 과외활동의 일환으로서의 효과를 고려해서 취해진 것이었다.
1955년 4월에는 사무국의 창의를 발휘하기 위하여 전임직원을 채용하고 업무·서무·경리·광고·판매·발송 등 일체의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1958년 10월에는 편집내용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 고문제도를 폐지하고 主幹을 두었으며, 또한 종래 학생과에서 겸임하고 있던 일체의 업무를 본사에서 수행키로 하였다.
3) 대학본부의 기능강화
전쟁이 끝나감에 따라 정부는 각종 교육관계 법령을 발표하여, 교육기구의 정비를 시도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1953년 4월 20일에 발표된 맛국립학교설치령맜이었다. 이 법령은 종래의 각 단과대학별 독자적인 사무기구가 통일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고, 본교는 종합대학으로서 대학본부의 기능을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맛국립학교설치령맜에 의거하여 서울대학의 내부직제를 살펴보면 대학 본부는 사무국과 교학국으로 크게 나누어졌다. 사무국은 다시 총무과와 경리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총무과는 기밀·관인관수·인사·문서·법령예규·통계·직원의 후생과 他局課에 속하지 않는 사항을 분장하고, 경리과는 예산·결산·회계·용도·영선·재산관리에 관한 사항을 관장토록 되어 있었다.
교학국에서는 교무과·학적과·학생과를 두었다. 그 중 교무과는 대학·학부·학과 또는 강좌의 설치와 폐지, 시험·학점·성적·학위·학생정원·학술연구와 局內의 他課에 속하지 않는 사항을 분장하고, 학적과는 입학·졸업·휴학·복학·퇴학·전학·전과·등록·학적부와 제증명에 관한 사항을 분장하며, 학생과는 학생의 통계·보건·후생·장학금·간행물·학비·동원·집회·행사·상벌·훈련·병사·학생증·학도호국단·졸업생의 취직주선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학국은 국립학교 설치령에 의하여 법제상으로만 설치되었다가 1956년 9월에 가서 실제로 설치되었다(<그림 1> 참조).
이러한 대학본부의 변화는 개교 초기의 체계에 비하여 업무가 보다 통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개교 초기의 경우 1국 3처 9과의 체제 속에서 사무국에 대부분의 행정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1953년의 개편으로 업무가 효율적으로 분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각 단과대학의 행정실이 중요한 실무를 관장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교학국에 상대적으로 업무가 집중되었다.
따라서 1955년 9월 본교에서는 교학국을 교무처와 학생처로 분리할 것을 주장한 맛국립학교설치령맜의 개정안을 문교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는 보류되었다가 1959년 1월 13일에 가서야 맛국립학교설치령맜이 개정되어 서울대학은 교무처·학생처·사무국을 갖춘 기구로 새롭게 정비되었다.
교무처에는 교무과와 학적과를 두었고, 학생처에는 제1과와 제2과를 두어 제1과는 학생의 통계·보건·후생·장학금·간행물·학비·학생증·졸업생 취직 주선과 타과에 속하지 않은 사항을, 제2과는 학생의 동원·집회·행사·상벌·훈련·병사와 학도호국단에 관한 사항을 각각 분장케 하였다. 사무국에는 종전대로 총무과와 경리과를 두었다(<그림 2> 참조).
한편 총장의 경우 1953년 4월 18일 제정된 맛교육공무원법맜에 규정되었다. 총장·부총장은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 문교부장관의 제청으로 문교부장관을 경유하여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다. 총장의 임기는 6년이고, 부총장, 대학원장, 학장의 임기는 4년으로 재임이 가능하였다.
이상이 서울대학을 운영하기 위한 행정편제인데, 이 시기 본부의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사회 체제가 평의원회 체제로 개편된 점이다.
1949년 12월 31일 공포된 맛교육법맜 제117조에서는 국립대학교에 평의원회를 설치할 것이 규정되었고, 1952년 4월 23일 공포된 맛교육법시행령맜에는 평의원회에 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그 구성을 미루다가 1955년 4월 9일 정식으로 평의원회가 발족되었다.
평의원회에는 의장과 부의장 각 1명씩을 두었는데 의장에는 尹日善
부총장, 부의장에는 趙東植 동덕여대학장이 선출되었다. 평의원의 수는 관계규정에 의거하여 정하여졌고,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학원장과 단과대학장 중에서 부총장 尹日善, 대학원장 李丙燾, 치대학장 朴明鎭, 수의과대학장 吳順燮, 미대학장 張勃, 농대학장서리 池永麟, 공대학장 黃泳模, 음대학장 玄濟明, 약대학장 韓龜東 등 9명② 교수 중에서 權五翼, 金基錫, 金斗鍾, 權重煇, 朴東吉, 申泰煥, 李鍾洙, 李熙昇 교수 등 8명③ 校外의 교육에 저명한 인사 중에서 대법관 金斗一, 무임소장관 朴賢淑, 민의원 李在鶴, 의사 鄭求忠, 동덕여자대학장 趙東植 등 5명
한편 각 단과대학에는 교육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교수회가 있었다. 교수회는 이미 식민지 시기부터 대학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국립서울대학의 발족 이후에도 활동을 하였지만, 법정기구는 아니었고 활동내용도 단과대학별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1953년 4월 맛교육공무원법맜의 시행과 새로운 서울대학교 학칙에 의거해서 교수회의 설치근거가 마련되었다. 교수회에는 조교수 이상이 참석할 수 있으며 의장은 학장이 맡았다. 회의는 재적과반수 이상이 출석함으로써 성립하고 출석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이 되었다. 교수회의 심의사항은 총·학장 및 교수임명에 관한 同意權, 諸規程의 제정과 변경에 관한 사항, 입학·수료 및 졸업에 관한 사항, 고사 및 시험에 관한 사항, 학생의 상벌에 관한 사항, 장학금 급여에 관한 사항, 기타 교육상 필요한 사항 등이었다. 그 중 人事 문제가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발생시켰고, 1957년 이후는 주로 이 인사문제를 다루는 부분의 비중이 높아 갔다.
이러한 교수회의 존립이 가능했던 것은 여러 이유 중에서도 각 단과대학의 독립성 때문이었다. 즉 서울대학이 종합대학으로서 창건,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과대학의 독립성 때문에 연립대학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과대학의 독립성은 각 단과대학의 역사와 전통, 캠퍼스의 분산 등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과대학의 독립성을 극복하고 종합대학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된 기관이 1958년 11월 19일에 설치된 ‘서울대학교 綜合計劃樹立委員會’였다. 이 위원회는 校舍 배치에 관한 사항, 시설의 확충·변경 및 확보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하였고, OEC 자문관 스토닷드 박사가 제출한 종합운영안에 관한 건의서를 심의하였다. 본교
교사를 4개 중심지로 집중시키자는 그의 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① 서울대학교 中央部(동숭동): 본부, 중앙도서관, 문리과대학, 행정대학원, 메디컬센터
② 水原部: 농과대학·수의과대학
③ 孔德里: 공과대학·이과대학
④ 龍頭洞 및 乙支路: 사범대학과 그 부속학교
⑤ 淸凉里: 문리과대학 이학부는 중앙공업연구소와 상호교환
이 건의서의 특징은 문리과대학을 문과대학과 이과대학으로 분리하자는 것으로 교육법의 개정을 필요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적 효과보다도 시설면만을 고려한 것이었다. 또한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의
통합문제는 두 대학이 예술대학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1953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건의서는 학내외의 많은 반발이 야기됨으로 해서 백지화되었다. 이외에 법과대학과 행정대학원을 포함한 사회과학센터를 건립하려는 구상이나 10년 또는 20년의 장기계획으로 공덕리에 서울대학교 전체를 점진적으로 이전하자는 구상도 있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60년대 이후 서울대학의 종합화계획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1) 교과과정의 개편
서울대학이 서울 캠퍼스로 복귀한 직후인 1953년말 金桂淑 교무처장을 비롯한 10명으로 구성된 敎科課程委員會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교과과정 개편작업이 추진되었다. 이 위원회는 종래의 교과과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교육방향에 부합되는 새로운 교과과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수차의 회합, 토의를 거듭하여 이후의 교과과정의 기본골격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4년 2월 우선 교양과목의 필수와 선택, 전공과목의 주전공과 부전공, 학점규정 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규정을 마련하였다.
① 교양과목 40학점을 46학점으로 하고 필수과목으로 국어 8학점, 영어 8학점, 제2외국어 4학점, 체육 2학점, 철학 4학점, 문화사 4학점, 자연과학개론 4학점과 선택과목으로 인문과학계·사회과학계 및 자연과학계에서 각각 4학점씩 이수하도록 한다.
② 전공과목에 부전공을 과할 때는 주전공을 60학점 이상, 부전공을 30학점 이상으로 한다.
③ 학점규정은 매주 1시간씩 15주 강의와 시험을 1학점의 기준으로 하되 실험·실습·실기는 매주 2시간씩 15주 이상 이수하는 것을 1학점의 기준으로 한다.
④ 교양과목은 1학년에만 한하지 않고 1,2학년에 걸쳐 과한다.
이에 따라 각 단과대학의 교과과정은 1954년부터 새로이 편성되었다. 1957년부터는 교양교육 교재가 완전히 통일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교과과정은 각 단과대학의 특수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특히 사범대학의 경우 교직과목 때문에 교양과목의 선택을 없애고 전부 필수로 하였으며, 선택과목은 교직과목으로 대체하였다.
한편 1954년 11월 문교부 주최로 열린 대학교육심의협의회에서는 학문수준의 향상을 고려하여 대학의 졸업학점을 160학점으로 낮출 것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1955년 3월에 열린 학장회의에서는 맛1955년 제2학년 이상 학생에 대한 학점임시규정맜을 통과시키고 같은 해 신학기부터 제2학년 이상 학생에게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 규정에 의하면 56년도 졸업생은 175학점 이상, 58년도 졸업생은 165학점 이상을 취득하도록 하고, 그 이후의 졸업생은 160학점 이상을 취득하도록 하였다.
곧 이어 개정된 학칙은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는 교과과정 전반에 걸친 대폭적인 개편이었다. 졸업학점이 160학점으로 줄어든 데 따라 1학기 취득학점수는 28학점에서 24학점으로 줄었고,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의 학점수도 각각 116학점 이상과 44학점 이하로 변경되었다.
필수과목의 학점취득은 전공과목을 80학점 이상, 일반교양과목을 36학점 이상 취득하도록 규정하였다. 부전공을 할 경우는 종전대로 주전공은 60학점 이상 부전공은 30학점 이상 취득하도록 하였다. 사범대학에서는 교양과목의 선택을 교직과목으로 대체하였다.
의과대학에서는 전문의사제도가 채택됨에 따라 1958년부터 인턴·레지던트 위원회를 구성하고 인턴·레지던트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제도에 의하여 의과대학 졸업생은 부속병원을 비롯한 종합병원에서 1년간의 인턴과정과 4년간의 레지던트과정을 마치면 專門醫師試驗에 응시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 중 임상계통을 전공하는 학생은 인턴·레지던트 교육과정만 밟으면 학위논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9년부터는 의과대학에서 군의관의 인턴·레지던트 교육도 담당하였다. 치과대학에서도 1958년부터 인턴·레지던트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학원의 교과과정도 개편되었다. 1955년 4월부터 시행된 대학원학칙에는 석사학위과정 수료에 필요한 학점을 30학점으로부터 24학점으로, 박사학위과정 수료에 필요한 학점을 80학점에서 60학점으로 줄였다.
이상과 같은 교육과정의 개편과 아울러 교육방법의 측면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종래의 2시간 계속 수업제는 실질적으로 수업시간의 단축사례가 많아 대학교육심의 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1955년 4월부터 1시간제를 실시하였다. 강의는 종래의 필기 위주의 교수법을 지양하기 위해 교재의 인쇄, 등사배부, 원서의 사용 등과 같은 방법이 강구되었다.
2) 교양과정부와 교직과의 설치
미군정시대에는 교양과목의 교육을 문리과대학에서 담당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각 단과대학으로 환원, 교육하게 함으로써 예산의 낭비와 교육적 효과의 저하를 초래하였다. 환도 후 敎養課程部의 설치를 계획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시설 및 예산의 부족으로 1956년에 이르러서야 문리과대학내에 교양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1956년도 제1학기부터 법대·수의대·음대·미대·문리대의 5개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교양과를 설치하고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간 공동으로 교양과목 교육을 실시케 되었다. 학장회의에서 통과된 교양과 운영안에 의하면 교양과는 20개의 교실로 편성하며 한 교실에는 대략 50~60명의 학생이 소속되어 고정교실, 고정석에 수업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개설된 과목은 국어(2학점), 영어(4학점), 제2외국어(2학점), 철학개론(2학점), 문화사(2학점), 자연과학개론(2학점), 체육(1학점)의 7개 과목 15학점이었다. 그러나 사범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 등은 자체내에서 교양과목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57년 5월 16일의 학장회의에서는 맛敎養課程部規程맜이 심의 통과되어 교양과가 교양과정부로 승격되었고, 초대 교양과정부장에는 교양과 주임이던 李崇寧 교수가 임명되었다. 강의를 담당할 19명의 전임교원도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교양과정부에 속한 5개 대학 신입생들은 교양과정부에서 필수 교양과목을 이수하고, 선택 교양과목은 교양과정부와 소속 대학에서 이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양과정부는 교수진과 법제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1958년 2월 교무과장회의에서는 강사를 전임교수로 대체하여 수업의 충실을 기하였고, 3월에는 교양과정부 설치안을 학장회의에 제출하여 법제화를 꾀하였다. 교양과정부 설치안에서는 ‘조속한 시일내에 교양부를 법규화시킴으로써 인적·물적 애로를 타개할 것’을 건의하는 동시에 교양부의 연한을 의학계는 2년, 인문사회과학계 및 이학계는 1년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과내용은 필수 교양과목 15학점과 선택 교양과목 6학점 합계 21학점 이상을 교양부에서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학장회의에서는 이 안을 심의 채택하여 문교부에 건의하는 한편 교학국에서 더욱 연구를 계속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시설 및 예산의 부족으로 교양과정부 자체의 존폐가 문제되었고, 결국 1959년초 교양과정부는 해체되어 각 단과대학에서 교양교육을 담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초지식의 습득과 인격도야를 위한 교양교육을 담당할 교양과정부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폐지되고 말았다.
한편 敎職科의 설치는 휴전 후 부족한 각급 학교교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도였다. 문교부에서는 1954년 11월 맛敎育公務員資格檢定令맜 시행세칙을 발표하여 일반대학에 교직과 설치를 제도화함으로써 교원수급의 원활을 기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서울대학에도 교직과가 설치되게 된 것이다. 시행세칙에서는 교원수급상 필요한 경우 문교부 장관이 늦어도 학년 개시 3개월 전에 공고하여 지원학교의 신청을 받아 학년 개시 40일 전까지 그 승인여부를 결정하여 통고하도록 규정되었다.
교직과 이수자로서 평균성적이 B 이상인 자는 敎務資格 無試驗 檢定을 거쳐 중등학교 2級 正敎師의 자격을 받도록 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문리과대학·미술대학·음악대학에서 교직과를 설치하여 교원을 양성하였다.
3) 입학·전입·졸업제도의 정비
입학제도는 휴전 후에도 큰 변동은 없었다. 입학시험과목은 국어(문과계는 국어 Ⅱ, 이과계는 국어 Ⅰ), 영어, 수학(문과계는 Ⅰ, 이과계는 Ⅱ)의 공통필수과목과 대학별 필수과목 1과목, 그리고 대학별 선택과목 1과목, 합계 5개 과목이었다. 1959년도에는 국사가 필수과목으로 되었고, 과학과목 중 1과목을 꼭 선택하여야 했다.
입학시험을 공정히 하기 위해 입시과목위원회, 입시준비위윈회 등을 구성하였다. 1957년도에는 입학시험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1958년도 입학사정은 총점을 700점으로 하되 500점은 필답고사성적으로, 200점은 출신학교 성적으로 평가하였다. 출신학교 성적평가의 기준은 최종 2년간의 성적 석차로 하고 학교 차이는 두지 않았다. 이 제도는 많은 반론에 부딪쳐 1959년도에는 종전대로 환원되었다.
입학시험에 있어서의 특혜조치는 傷痍學生과 교수 직계자녀에게만 주어졌다. 대학에 따라서는 교수 직계자녀의 합격점을 일반학생보다 50점이나 낮추어 준 경우도 있었다.
입시경쟁은 매우 치열하였다. 이 시기의 입시경쟁률은 대체로 5:1 정도였는데 1959년도 공대 원자력공학과는 15:1까지 올라갔으며, 상과대학의 경쟁률이 타대학에 비하여 높은 편이었다.
한편 편입·전학·전과는 정원의 범위내에서 인정되었다. 북한출신자의 편입은 1956년까지 허용되어 56년도에 의과대학에 3명, 공과대학에 2명, 음악대학에 1명이 편입되었다. 군인은 1956년까지는 위탁생 및 대학원 연구생으로 허가되었다가 1957년도부터는 학사편입이 허용되었다. 1957년도에 학사편입한 군인은 17명, 1958년도에는 28명이었다. 편입생에게는 48학점의 기득학점이 인정되었고, 학사편입의 경우는 이미 이수한 학과는 재이수할 필요가 없었다. 1957년도부터는 교통부의 위탁생이 수학하기도 하였고, 1954년 10월에는 在日本韓僑學徒義勇軍 11명이 본교에 취학할 것을 희망하여 이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이듬해 신학기부터 정식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전과와 전학은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정상적으로 전입하는 경우와 2학년을 수료한 후 다시 2학년으로 1년 낮추어 전입하는 경우의 두 가지 방법이 그대로 존속하였는데, 전자는 기득학점을 전부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학과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게 하고, 후자는 48학점만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과·전학의 문은 매우 좁았고 대학에 따라서는 타대학으로부터의 전학을 허용하지 않는 경향도 있었다.
한편 졸업 사정기준은 졸업학점의 감소에 따라 많은 변동이 있었다. 1956년도 졸업생부터 졸업학점이 5학점씩 감소되어 1959년 졸업생부터 160학점 이상 취득하면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체과목 평균성적과 전공과목 평균성적이 C 이상이어야 졸업이 인정되었다. 이는 학사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많은 학생들이 C학점에 미달되어 한때 성적평가기준을 완화하여 0.5~1.4를 C학점으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 조치는 1960년도부터 시정되어 1.0 이하는 C학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졸업논문은 대학에 따라 필수로 부과하기도 하였으나 졸업학점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학부 졸업생에게 주어진 학위는 가정학사·행정학사·간호학사·체육학사가 신설되어 총 18개 종류의 학위로 되었다.
1955년도에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및 명예박사학위 수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대학원 학위수여 규정이 마련되었다. 석사학위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자로서 그 제출한 논문의 심사와 구술고사에 합격한 자에게 수여하되 그 종류는 문학석사·정치학석사·법학석사·상학석사·경제학석사·이학석사·공학석사·농학석사·의학석사·수의학석사·약학석사·미학석사·음학석사의 14종이었다. 박사학위의 수여는 전시하에 제정된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회규정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박사학위의 종류는 공학박사·농학박사·문학박사·철학박사·이학박사·법학박사·경제학박사·의학박사·약학박사·수의학박사의 10종이었다.
해방 이후 식민주의적 학문세계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새로운 학문전통을 세워야 하는 과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5년간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교수의 연구활동이 크게 제약받았으며, 그나마의 업적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연속성을 가질 수 없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재건과 복구의 시기가 다가오자 학문연구 역시 해방 직후의 과제의 해결과 함께 외국 선진학문의 수입을 통한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인문과학 분야의 정신세계는 크게 두 가지 연구성향을 형성해 내었다. 그 하나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그 근본적인 차원에서 묻고 나선 점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성향은 철학 쪽에서 生哲學에 대한 관심을 부채질했다. 그리하여 파스칼과 니체,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하여 후기 실존주의자들의 생각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문화전통 속에서 우리의 몫을 찾아야겠다는 일종의 뿌리 찾기의 기운이 양성되었다. 한국전쟁의 처절한 비극 속에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향이 해방 직후 해결하지 못했던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측면과 함께 상승곡선을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 후 나타난 인문과학 분야의 변화양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대교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전 인문과학 연구와 교육은 대체로 식민지하에서 각급 학교를 이수한 분들에 의해서 담당되었다. 이들을 제1세대라고 명명할 때 한국전쟁 이후 제2세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개 8·15 이후 대학을 나온 분들이었다. 그리하여 새로 호흡하게 된 자유주의, 개성신장의 기풍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그와 동시에 각 분야에서 양성된 전공인력의 숫자들 역시 일제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증가되었다.
인문과학 계열내의 어문학 계열에서는 주로 영·미문학의 선진적인 이론이 도입되었다. 미국의 기술언어학과 구조주의, 변형생성문법의 이론 등이 수용되었고, 뉴크리티시즘·행동철학 내지 작품이론과 해석학적 문예과학이론이 수입, 검토되었다. 역사학분야에서는 제2세대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역사학회가 발족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와 더불어 이전까지 미분화 상태에 있었던 국사, 동양사, 서양사 등의 분야가 독립되었고, 각 시대나 지역, 민족사에 대해서 철저한 전공주의가 택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으로 실증주의 사학의 성찰과 그 지양방식으로 민족주의 사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이후 우리 주변에 몰아닥친 주체성, 민족적 자아추구의 기틀이 되었다.
사회과학계열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과학자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절연케 되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 사회주의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건한 사회주의에 호의적 태도를 취한 사람들도 거의 모두가 휴전 직후의 사회분위기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과학 계열에는 1950년대를 통해 구미유학, 연수를 통해 새로운 경향의 이론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치학에서는 역사적 연구방법론이 쇠퇴한 반면 행태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경제학에서는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면서 선진국가들의 경제이론을 흡수, 소화하는 한편 계량적으로 경제현상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우리 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접근 속에서 후진국경제론, 경제발전론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고조되었다. 사회학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인 사회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퍼슨즈나 머톤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새로운 이론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고, 사회조사방법론이 필수과목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 정치학의 연구를 통해서 한국의 정치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 주체적 계기를 지니지 못하고 피동적으로 외국학설을 소개하는 단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연구업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학문계보 상으로 본다면 전통적 연구에 속하는 것으로서 독일에서 일본을 통하여 수입된 법학적, 정치학적인 잔재가 많았고, 영국·미국의 정치학 교과서의 구독, 『정치학』, 『국제정치학』, 『행정학』 등의 교과서가 출판되는 정도였다.
법학 분야에서도 사회과학 분야가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제약을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입법기관이 법학교수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하는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었고, 韓泰淵 교수의 저서에 대한 당국의 출판중지처분에 대하여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학계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1950년대 이후 비교적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자연과학 계열은 미네소타 계획 중 의대의 예과를 담당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의예과 실험실습보강을 위한 실험기기의 구입에 얼마간의 지원(20만 달러 내외)을 받게 되면서 실험교육의 개선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학 계열은 한국전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우선 환도 직후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의 교사를 빌어 쓸 수밖에 없었고, 공릉동 교사로 정착한 것이 1954년 8월이었다. 또한 실험실습 교재 역시 거의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54년부터 시작된 미네소타 계획은 상당한 양의 실험실습 기자재의 도입과 교수인력의 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5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공학계열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는데, 특히 1952년 이후 UN 기술원조계획, 1954년의 국비유학, 동년의 미네소타 계획 등에 의해 많은 교수들이 해외에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서구의 선진 공학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농학계열 역시 미네소타 계획에 의해 1950년대를 통해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발전을 바탕으로 잠사학과(1956), 농가정학과(1961), 농업교육과(1962) 등이 연이어 설치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일제의 식량기지적 농업에서 독립국가의 자립적 농업으로의 탈피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수의학부 역시 미네소타 계획에 의해 10만 달러 상당의 실험기자재가 도입되었고, 12명의 교원이 유학하게 됨으로써 발전의 동기를 이룩하였다.
1950년대 의학계의 가장 큰 변화는 1959년 보건대학원이 창설됨에 따라 예방의학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쌓았다는 것이었다. 종전 직후 교수진은 기초의학 분야가 18명에서 1960년에는 33명, 임상의학 분야가 43명에서 57명으로, 치의학분야가 12명에서 23명으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특히 미네소타 계획의 도움으로 임상의학 분야에서의 발전은 상당한 것이었다. 1955년 소아마비 예방성공, 심장수술 가능, 1956년 어려운 외과수술로 알려진 門脈下空靜吻 수술이 金子勳 교수의 집도로 성공한 것 등이 그것이다. 또한 원자력 이용, 동위원소 이용 등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기초의학 교수의 수는 상대적으로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1955년까지는 전체 의대 교수 중 기초의학 교수의 수가 약 45%를 차지하였지만, 1955년에서 1965년 사이에는 약 33%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는 임상의학 분야에 비해 기초의학이 답보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미네소타 계획이 응용과학 부분에 치중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1950년대를 통하여 각 학문분야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지만 아직은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상태였다.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나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민족의 분열과 이념의 제약 등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를 형성하지 못하고 상당히 위축되면서 아카데미즘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공계 계통의 연구는 외국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국가차원의 합리적이고 철저한 시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민족분열의 역사적 상황, 시설부족,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국민의 사회의식의 성장과 함께 현실에 토대를 둔 연구활동이 점차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 이후 학문의 질적인 발전을 위한 기초 토대가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학문발전과 국가긴급책에 응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연구위윈회’를 1953년 11월 설치하였다. 이미 1952년 10월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 교무과장회의에서도 연구비 예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면한 중요연구사업에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것을 논의·의결한 바 있었다.
실제 당시 교수들의 생활여건은 정상적인 연구활동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연구비의 지급은 교수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한 교원정원 1,165명을 확보하는 일과 교직원의 처우개선은 당시 서울대학이 안고 있던 큰 과제였다. 당시의 교원수는 60%나 부족하여 후원회비에서 지출하여 시간강사를 채용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의 문리대 교원 실태를 살펴보면 문리대의 법정교원수는 216명이고, 그들이 담당해야 할 강의 시간수는 연 9만여 시간이었다. 1959년 현재 국고 예산의 정원은 81명이며 이들이 담당하는 시간수는 26,244시간이었고 국고가 부담하는 임시강사의 시간은 약 7,500시간이었다. 따라서 부족한 시간은 약 6만여 시간으로 이에 소요되는 강사비는 총 5,400만 환이었다.
1960년 당시 교원의 월급은 교수가 6,520원, 부교수 5,948원, 조교수 5,457원, 전임강사 5,150원이었다. 1961년도에 이르러서야 2배 가까운 인상이 이루어진다.
서울대학교는 연구위원회가 구성되자 먼저 서울특별시 예산에서
900만 환의 재정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 연구위원회의 첫 모임은
1953년 11월 21일 崔奎南 총장 주재로 尹日善 외 8명의 연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출판비는 120만 환을 計上하고 연 2회 연구보고지를 인문계와 자연계 각 1권씩 발간하기로 한다. 동지 편집책임자는 高亨坤(인문계), 田豊鎭(자연계) 양교수로 한다.
② 종합연구계획에 있어 연구비지출단위를 40만 환 표준으로 한다.
③ 연구위원은 교내 각 대학장이 대학별로 결정된 수의 배수단위로 추천하여 동 위원회에서 심사 결정하도록 한다.
④ 연구비 지출대상에 있어 그 범위는 ㈀ 국가적 긴급을 요하는 연구 ㈁ 학문발전상 중요한 연구 ㈂ 연구에 관한 장소·시설·기구 등을 구비하여 1954년 4월까지 연구결과 보고가 가능한 연구 등으로 한다. 단 장기연구를 요할 때에는 4월말까지 총장에게 중간보고를 제출토록 한다.
⑤ 서울대학교 연구위원회 임원구성은 위원장에 윤일선 박사를, 동위원에 權寧大, 田豊鎭, 劉基天, 韓悌泳, 權重輝, 張勃, 趙伯顯, 高承濟 제교수로 한다.
⑥ 각 대학별 연구비지출단위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공대(2), 문리대(2), 사대(2), 농대(2), 상대(1), 법대(1), 약대(1), 음대(1), 미대(1), 수의대(1), 치대(1), 의대(2)
서울대학교 연구위원회의 임원구성, 연구비 지급계획 및 그 지급대상비율 등이 구체적으로 결정됨에 따라 1954년부터 연구위원회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로 1954년도의 연구과제와 담당교수를 선정하고, 모두 17연구단위에 단위당 28만 환씩 총 4,765만 환을 연구비로 지급하였다. 연구비는 그해 3월말 이전에 지급하기로 하고 연구성과의 보고는 다음해 3월말까지로 정하였다.
1954년에도 연구단위 설정이 대학별에서 인문계와 자연계로 구분되어 전년도와 동일한 액수로 연구비가 책정되었다. 즉 연구위원회는 李丙燾 박사 외 8명의 연구위원으로 구성되어 7월 27일 인문계 6단위, 자연계 11단위로 연구주제를 선정하고, 연구비의 지급은 인문계를 단위당 30만 환, 자연계를 27만 환으로 하여 총 477만 환으로 책정하였다.
1954년 7월에는 서울대학교 연구위원회의 규정이 다음의 9개 조항으로 확정되어 연구위원회는 대학원내에 두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서울대학교 연구위원회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본회는 서울대학교 연구위원회라 칭한다.
제2조 본위원회는 서울대학교 교원의 학술연구를 조장하고 또 그 편의를 도모키로 목적한다.
제3조 본위원회는 서울대학교 대학원내에 둔다.
제4조 본위원회는 총장이 임명한 위원 약간 명으로서 구성하고 위원장은 대학원장으로서 한다.
제5조 위원의 임기는 1년으로 한다.
제6조 본위원회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각 대학에서 제출된 연구 테마의 심사결정 및 그 연구비의 배정에 관한 사항 2. 논문집 기타 학술보고서의 간행에 관한 사항
제7조 본위원회는 전조 제2항의 사업을 위하여 좌의 두 분과위원회를 둔다.
1. 제1분과위원회(인문·사회과학)
2. 제2분과위원회(자연과학)
제8조 각 분과위원회에는 분과위원장을 둔다.
제9조 본규정은 단기 4287년(1954년) 7월 1일부터 시행한다.
연구위원회는 1955년 8월 자연과학에 11단위, 인문·사회과학에 4단위를 책정하여 교수의 연구과제를 선정했고, 연구비 지급배율은 자연계와 인문계를 1.5:1로 책정하여 단위당 각각 276,750환, 191,900환으로 하였다. 연구비 총액수는 전년도부다 85만여 환 감소되었으며,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에 보다 중점이 두어졌다.
연구위원회에서 지급되던 연구조성비는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1956년도에는 그 지급을 중단하였다. 따라서 연구위원회의 기능도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1957년 2월 서울대학교 연구위원회는 학술서적의 출판을 관장해 오던 서울대학교 출판위원회를 통합하여 연구위원회의 기능을 확충하고 규정도 개정하였다. 연구위원회의 목적을 ‘학술연구의 원조와 도서출판의 편의 제공’으로 정하고, ① 학내에서 제출된 연구과제의 심사 및 연구비 배정 ② 논문집 기타 학술보고서 출판 ③ 번역도서 및 역자의 선정 ④ 번역도서출판 등의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조직을 살펴보면 위원장에는 대학원장을 임명하며 위원장에 산하에 연구부와 출판부를 두고 각 부에 위원 약간 명을 두었다. 위원은 위원장의 추천으로 총장이 임명하고, 각 부장은 각부 위원의 호선에 의하여 위원장이 임명하고 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였다. 그리고 연구부에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별로 편집위원 약간 명을 두어 연구와 학술도서출판의 운영을 모색하였다.
이와 같이 출판위원회를 통합한 연구위원회는 교수의 연구와 학술도서 출판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연구성과를 서울대학교 출판부를 통하여 학술서적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일시 중단되었던 연구비 지원도 다시 확보하였다. 연구과제는 자연계와 인문·사회계로 각각 10개 단위와 4개 단위로 배정하고, 매단위당 자연계에는 167,780환, 인문·사회계에는 112,100환을 배당하여 연구비 총액은 2,126,200환에 달하였다. 1954년 이래 연구비 액수는 매년 감소되어 1957년도의 연구비 총액은 54년도에 비하여 거의 반액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1958년, 1959년도에도 연구비 지원이 있었지만 극히 작은 액수에 불과했다. 이들 연구성과의 일부는 인문사회과학편과 자연과학편으로 나뉘어 1년 1회 발간되는 『서울대학교 논문집』에 게재되었다.
연구위원회가 발족한 이래 연구단위의 총수는 인문계 28단위, 자연계 63단위 모두 91단위에 이르렀다. 이들 연구에는 액수는 불충분한
것이었지만 일정액의 연구보조비가 지급되었다. 그러나 단위당 연구비 액수뿐 아니라 연구과제에 비교하여 연구단위의 책정 역시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대학시설과 교수진의 문제였다. ICA원조계획에 의하여 시설과 교사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고, 교수의 해외유학을 통하여 교육의 질적 향상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혜택이 몇 개 단과대학에 한정되었다.
교수 해외연구의 발단은 1952년 미국정보 및 교육교환법(Smith-Mundt Act)에 의한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52년에서 1954년에 걸쳐 다음의 교수들이 미국에 유학하였다.
붣1952년: 金善琪(언어학), 劉基天(형법학), 高光萬(교육학)붣1953년: 申泰煥(경제학), 李熙昇(언어학), 李鍾洙(교육학), 金曾漢(법제사)붣1954년: 皮千得(영문학), 金容甲(재정학), 姜永善(생물학)
이 밖에도 1952년 문교부의 선발에 의하여 李記寧, 玉仁讚, 李彙榮 등 교수가 프랑스에 유학하고, 1954년도에도 정부의 파견으로 元泰常, 趙淳卓, 李鍾完, 徐同運, 尹甲炳, 金泰鳳 등의 교수가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당시 교수의 해외유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전술한 미네소타 계획에 의한 교수파견이었다.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해 1954년 농대·공대·의대학장이 3개월간 시찰·협의차 미네소타 대학교를 방문하였고, 1955년부터 본격적인 교수 파견이 이루어졌다.
1955년 10월 현재 교수의 유학과 해외연구실태를 살펴보면 외국에서 연구하고 귀국한 교수가 63명, 외국에서 연구중인 교수가 63명으로 합계 126명이었다. 외국에서 연구중인 교수들 중 80% 이상이 미국으로 집중되었다. 전공분야 역시 공학, 농학, 의학, 물리학, 화학 등 자연과학 계통이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유학의 계기를 보면 우리 정부에서 파견한 것은 전체의 4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미국정부의 지원, 외국대학의 초청, 한미재단의 장학금 등이었다.
이러한 통계를 보면 첫째로 교수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드러난다. 이는 수준 높은 미국 학문을 수입함으로써 뒤떨어진 학문 수준을 짧은 시간 동안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이외의 지역의 학문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축소됨으로써 미국 일변도의 학문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자연과학계열의 교수가 인문, 사회과학 계열의 교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미국의 대한원조가 대한민국의 산업시설 복구와 식량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여 정권의 안정성을 추구했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이미 미군정 시기부터 계속된 것이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셋째로 FOA(이후 ICA)를 비롯한 미국의 원조가 유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학문의 미국 의존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객관적인 조건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교수 교환 및 해외유학 이외에 교수들의 국제학술대회 및 세미나 참석도 활발하였다. 이는 학술상의 국제적 관심과 방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각각 대표들과의 의견교환으로 국제학술계의 새로운 지식과 그들과의 유대를 공고히 해주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시기 처음으로 국제학술교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휴전 이후 본격적으로 국제학술교류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문리대의 李揚河 교수는 미국 학술원의 재정원조를 얻어 韓美語辭典 편찬을 위해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갔으며, 1954년 농대의 玄信圭 교수가 파리의 국제식물학회에 참가하였다. 1956년에는 異河潤 교수가 국제펜클럽 주최로 영국에서 열린 세계문학가대회에 참가하였고, 문리대의 李用熙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 하기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玄濟明 교수와 金世炯 교수는 미국음악교육자 연합회 초청으로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된 연합회 50주년 기념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57년에는 明桂完 교수와 沈相煌 교수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WHO 동남아 연차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맛의학교육에 있어서 과거·현재·미래의 예방의학과 사회의학맜이란 주제로 2주일간에 걸친 토의가 있었다. 그리고 문리대의 李鍾珍 교수, 權世元 교수, 의대의 奇龍肅 교수, 농대의 李春寧 교수가 9월 파리에서 개최된 방사성동위원소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陸芝修·金相昊·崔福鉉 교수가 국제지리학회의 일본 지방회의에 참석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법대의 金箕斗 교수가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맛아세아 및 극동의 범죄방지와 범죄인의 처우에 관한 세미나맜에 참석했다.
1958년에는 치대의 李永玉 교수가 제2회 아세아치과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는 20여 개국의 대표들이 모여 연구발표·강연·임상치료법연구 등의 토론과 사회적 활동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6월에는 음대의 李惠求 교수가 서독 쾰른에서 열린 국제음악대회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 음악교육대회에 참석하였고, 이어 미국의 하버드대학, 캘리포니아대학, 하와이대학에서 국악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12월에는 사대의 徐明源 교수가 맛대학과 아세아의 문화협조맜라는 주제로 개최된 고등교육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59년 6월에는 법대의 劉基天 교수가 하와이에서 열린 제3회 세계 동아철학자회의에 참석하였다. 9월에는 문리대의 李敏載 교수와 농대의 玄信圭 교수가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9회 식물학회에 참석하였고, 농대의 金浩植 교수는 FOA지역사회 연구회 주최로 인도의 타이조레에서 열린 연구회의 강사로 초빙되어 참석하였다.
이러한 각종 국제학술대회에 서울대학의 교수들이 참가, 활동한 것은 한국학계의 정체와 고립에서 탈피하여 세계학계와 학술교류를 전개하고 높은 수준의 학문을 도입,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공헌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학문수준에 비추어 1950년대의 국제학술교류는 서구의 학문을 일방적으로 섭취·수입하였다는 측면이
컸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을 토대로 한 보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학문의 정립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1) 교수회 활동
한국전쟁 직후의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 사사오입 개헌 이후 독재정치의 심화 등으로 인해 사회의 폭압적 구조가 강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1950년대를 통하여 대학자치의 신장을 위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51년 9월 3일부터 1956년 6월 8일까지 재임한
崔奎南 총장은 이러한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1953년의 入學式訓辭를 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학문의 독립이라 함은 학문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문의 연구는 진리탐구를 말하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이 당해과제의 정체를 파악하여 참된 진리를 해득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는 학문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崔총장은 또한 대학의 민주적 운영을 위하여 學長會의 의결을 존중하였다. 당시 맛敎育法施行令맜의 공포로 총장의 자문기구인 서울대학교 평의원회가 이때 성립되었지만 그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學長會가 대학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총장도 학장회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대학자치의 신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부분은 교수회에 의한 총장임명 동의투표였다. 총장임명 동의투표는 1953년 4월 제정된 맛敎育公務員法맜에 총·학장의 임명을 위해서는 敎授會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규정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 규정에는 조교수 이상의 교직원의 임용 승진에도 교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되어 있었고, 이는 교수회의 권한이 매우 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육공무원법에서는 이외에도 총학장 및 교수 임명에 대한 동의권 이외에 학칙에서 규정한 교수회의 심의사항으로 ① 제규정의 제정과 변경에 관한 사항 ② 입학, 수료 및 졸업에 관한 사항 ③ 고사 및 시험에 관한 사항 ④ 학생의 상벌에 관한 사항 ⑤ 장학금 급여에 관한 사항 ⑥ 기타 교육상 필요한 사항 등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이 각 대학 교수회에서 논의되었는데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항은 人事權이었다. 조교수 이상 교직원의 임용과 승진을 위해 비밀투표가 실시되었다. 의대의 경우에는 전임강사 이하 무급조교를 임용할 때에도 교수회의 동의를 구하곤 하였다. 인사문제는 대체로 안대로 통과되지만 간혹 부결되는 경우도 있었다. 문리대에서는 1956년 12월 학장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어 총장이 다른 교수로 교체하였지만 역시 부결되었던 일이 있었다.
1954년 7월 신임 李瑄根 문교부장관은 전국 총학장회의에서 교직원 임명에 대한 敎授會議 同意制度를 폐지하도록 법률을 개정할 방침을 밝힌 일도 있었지만, 올바른 운용을 위해 노력해 보자는 많은 의견에 밀려 이 규정은 당초대로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교수 임명시 교수회의 동의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학장 임명시에도 총장이 제청하여 당해 대학 교수회의 동의를 구하였다.
최초의 투표는 1954년 3월에 실시되었다. 부총장 임명을 위하여 대학교의 전체교수가 동의투표를 실시하였다. 당시 투표자격이 있는 조교수 이상은 223명이었고, 그 중 158명이 단과대학별로 투표하였다. 투표결과 총장이 제청한 尹日善 박사가 다수의 동의의 표를 얻어 부총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6월에는 崔奎南 총장이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함에 따라 총장 임명을 위해 전체 교수들의 동의투표가 있었다. 문교부장관이 후보를 지명하여 교수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인데, 후보로는 부총장 尹日善 박사가 지명되었다. 6월 22일 실시된 투표에서 조교수 이상 교직원 270명 중 200명이 참가한 가운데 181표의 동의를 얻어 제6대 총장으로 尹日善 박사가 취임하게 되었다. 교수회의 동의에 의해 총장이 취임하게 된 것은 대학자치의 성장에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한편에서는 총장이 교수회의 동의를 받는다는 점에서 권한이 제약된다는 주장도 없지 않았으나 정부에 의하여 임명되는 총장이 교수회의 투표에 의하여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대학자치의 성장을 의미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후 독재정권은 대학의 자치와 학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하여 더 이상 투표제도를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1991년 제19대 총장을 선출하기 위한 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근 35년간 전체교수의 투표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대학의 주요 기관장의 임명권을 정부가 장악하였다. 1957년 이후의 교수회는 인사문제만을 다루는 데 그치고 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창기부터 서울대학교의 각 단과대학 교수회는 각기 특성을 지니고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대학의 규모, 성격에 따라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교수회의 기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서울대학교의 교수회라 하여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다만 그 공통성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단과대학이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대학자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합대학으로서의 자치능력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문리대·의대·사대처럼 규모가 큰 대학은 교수회의 정원이 너무
많아 교수회가 제기능을 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대학평의원회의 구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문리대 교수회에서는 1956년 5월 평의원회 규약을 통과시켰고, 의대에서는 1956년 8월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의대에서는 이보다 앞서 1953년 11월 학장의 자문기관으로 정교수회를 구성, 운영한 적도 있었다. 사대에서도
1954년 평의원회를 결성하고 평의원을 선출하였다. 평의원회는 교수회에서 선임된 소수의 영향력 있는 교수들로 구성되는데, 학사·인사·예산 등의 일과 교수회에서 위임한 사항을 심의하였다.
2) ‘교수협회’ 제안
해방 후 초창기에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평의원회가 구성된 바 있었다. 평의원회에서는 교수회의 방향을 유도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 점에서 대학자치는 일층 신장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1957년 1월 총장이 각 단과대학의 평의원회를 폐지하도록 지시한 것은 이 기구가 학교당국과 마찰이 없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원로급 교수들이 모인 평의원회와 소장교수들 사이에도 마찰이 없을 수 없었고, 이 점이 평의원회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교수회는 대개 月例로 개최되었다.
일부 교수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학의 자치 신장을 위하여 새로운 조직의 창설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56년 4월 申泰煥 교수는 학원과 교수의 권익을 지키기 위하여 교수들은 공동전선을 펼 필요가 있다고 하여 교수협회를 결성하자는 제언을 하였다. “대학교수는 생활을 위한 직업으로서 가치는 다른 직업과 다를 것이 없다”는 서두로 시작되는 이 제언서에서는 우선 교수라는 직업이 대학이라는 기관에 고용된 기술자직에 불과하며 따라서 超世的인 생활태도가 교수직의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오늘날 신성한 직업으로서 대학교수를 부르는 사람들의 심정에는 그들을 존경하느니보다는 오히려 경원하고 대학교수를 사회적 변경으로 몰아버리려는 아이러니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풍조에 밀려 교수 자신들은 淸貧 사상이라는 무기력이 도덕화된 낭만적 정신에 사로잡혀 정신병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불평과 음모가 횡행하고 그리하여 대학의 권위를 저하시키고 한국의 지성을 유린하는 것을 묵과할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불합리한 것을 청산하는 길은 교수들 자신이 대학교수라는 구래의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직업인들과 같이 직업적 의식을 견지하고 전체 교수가 조직되는 것이라고 본다. … 그 방법으로 우리는 교수노동조합과 같은 내용을 갖는 교수협회를 만들 것을 제창한다.2)
이것은 초보적인 형태나마 ‘교수협회’를 조직하여 교수들 자신의 문제와 자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인 1당 독재가 1956년의 3대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보다 강화돠어가는 시기에 이러한 견해가 나왔다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국의 교수가 실질적인 조직체를 만들 아무런 계기도 주어지지 않았다. 1957년 5월 韓國敎授協議會가 교수의 친목도모와 신분보장 및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결성되고 서울대학교 교수도 일부
참여하였지만 이는 어용적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교수의 생활보장과
대학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이러한 교수협회 결성론의 대두는 대학의
자치를 성장시키기 위한 교수들의 주체적인 노력의 태동이었으며, 4·19 혁명 이후 교수협의회 건설에 모태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자치는 1954년의 3대총선, 1956년의 3대대선을 거치면서 새로운 시련에 부닥치게 된다. 자유당이 의회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장악하면서 나타난 사회적 불합리·부패구조는 대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56년 5월 28일자 『대학신문』이 배포중지된 사태를 들 수 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54년 四捨五入 개헌으로 3선의 길을 터놓은 자유당 정권은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고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정치적 관심도 상당히 높아지고, 또한 학생의 선거운동 참여가 문제화되는 가운데 문교부는 前例와 교육적 견지에 의거하여 학생의 선거운동 관여를 금지하고 있었다.
선거가 끝나자 1956년 5월 28일자 제149호 신문은 5·15 정·부통령선거를 비판하는 특집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문제되어 崔奎南 총장이 신문의 배부를 중지하였던 것이다. 특집의 내용은 맛大學에서 본 5·15선거맜라는 제목 아래 韓泰淵 교수의 맛5·15는 민권의 승리맜, 黃山德 교수의 맛국민을 적대시하지 말라맜 등을 비롯하여 맛5·15 선거의 정치적 의의맜(閔丙台), 맛5·15와 선거법개정문제맜(金道昶), 맛5·15선거의 사회학적 고찰맜(邊時敏), 맛한국경제의 전망맜(高承濟) 등의 교수논문이 게재되었고, 또한 학생논단으로 맛反政府者란 評에맜(梁延), 맛선거와 교수와 대학생맜(尹影)이 실렸으며, 본사 취재부의 맛대학의 자유-상아탑 속에 자유는 있는가?맜라는 취재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5·15선거는 자유당 정권과 국민과의 싸움이었으며 그 결과는 민주국민의 압도적 승리였다”라고 분석한 韓泰淵, 黃山德 교수의 글이 문제되어 5월 29일 배포금지조치를 당하고 결국 두 교수의 원고를 수정한 뒤 새로 찍어 발간하는 필화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대학내외에서 의견이 분분하였다. 『대학신문』은 社說·社告를 통해 그 경위를 해명하여 발행자(총장)의 압력이나 관권의 압력이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내용의 변질 없이 字句를 수정한 데 불과하고 편집위원회의 결의로 집필자의 동의를 얻어 수정되었다 하더라도 교수가 집필한 글이 수정되어야 하였고, 그것이 학내평화를 위해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대학자유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동신문은 대학의 권위에 관한 맛대학의 권위를 위하여맜란 제하의 특집도 아울러 다루고 있었다.
문교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교수의 학위 수여를 승인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타났다. 즉 법대의 黃山德 교수는 1956년 12월 대학원에 논문을 제출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청구하였고, 1957년 12월 學位審査委員會에서 통과되었으며, 대학원위원회에서도 학위수여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교부장관의 승인이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독재정권의 몰락으로 黃교수에게 박사학위가 수여되었지만 이는 독재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선 黃교수에 대한 당국의 보복으로 여겨졌다.
또 교직원의 인사에 대한 자유당 정부의 간섭도 심해져 갔다. 교육공무원법에는 교직원의 승진은 당해 대학의 교수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그 절차를 거쳐 총장이 상신하면 그대로 발령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때는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 총장이 행한 인사행정이 정부에 의해 부당하게 처리되는 일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모든 공무원에 대하여 신원조사를 실시하고 그 정치적 성향, 종교관계를 조사했으며 특히 집권당에 대한 지지도를 참착하여 인사에 반영하였다.
이와 같이 1950년대 후반기로 가면서 학문의 자유, 학원의 자치 영역은 크게 축소·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외적 압력에 의해 학원이 죽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힘이 축적되어 가고 있었고, 이 힘이 4·19 혁명으로 표출된 것이다. 교수들은 1960년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임으로써 독재정권의 몰락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 학도호국단의 활동과 폐지론의 대두
1952년 전국 총학장회의는 학도호국단을 학생자치기구로 개편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으며, 1953년부터는 학생운영위원장을 학생들이 직접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총운영위원장은 단과대학 운영위원장이 순번제로 맡도록 되었다. 1955년에는 서울대 학도호국단에 대의원회가 조직되어 자치적인 운영이 더욱 강화되었다. 총대위원회는 각 대학에서 500명 단위로 1명씩 선출되어 모두 38명으로 구성되었다. 의장 1명, 부의장 2명을 두었으며 임기는 6개월로 하였다. 총대의원회가 조직됨으로써 총운영위원장 및 부위원장은 총대의원에서 선출하게 되어 총대의원회의 활동이 기대되었으나 학생의 자치활동이 대학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그 기능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서울대 학도호국단은 서울대를 대표하여 대외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학내활동으로는 종합예술제.長技大會, 교내웅변대회, 종합체육대회를 개최하였다. 서울대 종합예술제로는 제1회 예술발표회(1954.7.13~14), 제1회 문화제(1957.6.23~7.3), 제2회 문화제(1958.6.25~30), 제3회 문화제(1959.6.9~13)가 개최되었고, 長技大會는 1957년부터 매년 열렸다. 1955년 6월에는 제1회 교내웅변대회, 1956년 11월에는 제1회 영어웅변대회가 열렸으며, 이후 매년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종합체육대회는 1953년부터 다시 개최되었다.
학생활동은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보다는 각 단과대학 학도호국단에 의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각 대학의 학도호국단은 매년 신입생환영회, 졸업생환송회, 체육대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신문과 학보를 발간하였다.
학도호국단의 운영위원장 선거도 중요한 학내행사 중의 하나였다. 선거 때마다 열기는 대단하였다. 선거열기는 한편 학생들의 민주적인 의사표현이란 점에서 바람직한 면도 있었으나 과열된 선거전에서 금전수수와 폭력행사 등의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의원회가 부활되고 각 대학마다 달랐던 운영위원장의 임기가 1년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 활동은 여전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학도호국단은 이미 그 출발에서부터 학생들의 자치활동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학생들의 자치와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학도호국단은 하부는 학생기구로 조직되어 있었지만 상부는 행정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문교부장관이 중앙의 단장이어서 이 조직으로는 학생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 수 없었다. 학생들은 관료적인 호국단에 의하여 원치 않는 행사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50년대를 통해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동원된 행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학생출정 계몽선전운동 및 전시학도 궐기대회(1953.2.)
② 북진통일 학도총궐기대회(부산; 1953.4.22)
③ 휴전회담 반대 데모(1953.6.12)
④ 미군철수 반대 국민총궐기대회(1954.9.26)
⑤ 英·加 타협안 반대 국민총궐기대회(1954.11.8)
⑥ 대한민국주권옹호 학도총궐기대회(1954.11.18.)
⑦ 적성휴전감위 축출 국민대회(학생동원 4개월; 1955.8.6)⑧ 이박사 대통령 재출마 요청데모(1956.3.10)
⑨ 대한 학도 반공궐기대회(1956.10.20)
⑩ 신의주학생의거사건 기념대회(1956.11.23.)
⑪ 감군 반대 데모(1957.9.24)
⑫ 인도네시아 반공혁명군 지원 궐기대회(1958.5.24)
⑬ 재일교포 북송 반대 데모(학생동원 6개월; 1959.2.13)⑭ 아시아 반공민족대표 환영 및 반공총궐기대회 학도참가 시가행진(1959.6.)
특히 위의 ⑤와 ⑧의 경우 4~6개월간 학생동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정상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학도호국단 폐지론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1953년 10월 개최된 전국 학도호국단 중앙상임 집행위원회에서 일부 간부들이 학도호국단의 해체론을 들고 나왔고, 1954, 1955년에도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해체론이 대두되었으나 부결되고 말았다. 이때 해체론의 이유는 半官製的 통일체는 학생들이 자치적 정신함양에 암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1950년대 중반 이후 학도호국단의 학생위원장 선거 때면 학도호국단 폐지라는 공약이 자주 등장하였다. 즉 학도호국단내에서도 학도호국단이 이미 시효를 잃은 불합리한 기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3)1956년 5월 28일의 『대학신문』은 맛대학의 권위를 위하여맜라는 제하에 대학의 자유, 대학의 자치, 대학의 제도 문제를 기자들의 취재형식으로 게재하였는데, 맛대학의 자치맜라는 기사에서는 맛학도호국단은 존속할 것인가?맜라는 제목으로 학도호국단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폐지론의 근거는 ‘① 호국단은 이제 그 사명을 다했다 ② 호국단은 학생의 자치활동이 암이 되는 것이다 ③ 대학 캠퍼스내에 학생활동은 점차로 호국단과 관계없어져 가고 있다’ 등의 세 가지였다.
당시의 사회여론 역시 학도호국단의 폐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문교부장관은 학도호국단의 개편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호국단의 중앙기구를 간이화하는 등의 개편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문교부는 1956년 5월 8일을 기해 공식적으로 대학생의 교복착용을 지시하여 등하교시 기율부에 의한 강압적인 복장단속 활동이
이루어지는 등 오히려 학생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더욱 억압하였다.
호국단의 폐지론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대학이 자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당위성 위에서 대학인의 주체적인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결국 1959년말부터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학생궐기를 호소하며 계도했던 학도호국단 간부들도 나타났으며, 1960년 2월 9일에는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위원회’가 발족되기도 하였다.
1) 학생운동의 태동
1950년대 중반 학도호국단 폐지론이 대두하고, 호국단에 대치되는 보다 더 자치적인 학생운동이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발전될 것이 기대되고 있었다. 실제로 캠퍼스내의 학생활동은 학회중심의 그룹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경향이었다. 학회는 학문적 탐구에 불타는 학생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가 중심이 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제도상으로는 호국단 학예부가 상위기관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국단 학예부는 학회 위에 군림하려 하였지만 학예부는 이미 공허한 것이 되고 학회 중심의 자치운동이 활성화되어 간 것이다.
또한 1960년대 이후 학생운동의 핵심이 되었던 ‘비공개 이념 서클’ 활동도 1950년대 중·후반 이후 태동하였다. 고등학생 중심의 ‘암장’과 청년단체인 ‘성민학회’, ‘통일청년회’ 등이 학외에서 구성되었고, 서울대에서는 정치학과의 ‘신진회’, 법학과의 ‘신조회’, 사회학과의 ‘후진사회연구회’, 경제학과의 ‘경우회’와 ‘사경회’ 등이 조직되었다.
신진회는 1956년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閔丙泰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여 조직된 서클로서 초기에 김지주, 하대돈, 유한열, 김형열, 서정균 등이 중심이 되었다. 회인 5인의 추천을 통하여 가입할 수 있었으며, 정기적인 토론회 외에 이동화 등 진보적 인사를 초빙,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4) 신진회는 후술할 ‘유근일 필화사건’으로 해체되었지만, 1958년 1월 이후 지하서클로 맥을 이어간다. 1958년 10월경 신진회 재건을 위한 모임을 개최하여 여기서 가칭 ‘후진사회연구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민주사회주의를 연구한다는 회칙을 분명히 하였다. 이때 윤식, 이수정, 유세희, 박종열 등 새로운 성원들을 충원하였다. 이들은 이후 4·19 시기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신조회는 서울대 법대 중심의 조직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존재하였고, 남재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7년 12월의 ‘유근일 필화사건’ 이후 거의 활동을 중지했다가 ‘사회법학회’라는 명칭으로 다시 발족하였다. 1958년 4월 21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의에서 金箕斗 교수, 金致善 교수, 우기도 교수의 격려사가 있은 후 회칙을 심의 통과시켰다. 임원선출 결과, 회장에는 법과 4학년인 최상징이 피선되었고, 그외 간부와 평의원 6명이 피선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학회의 목적을 “노동법, 경제법, 사회정책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며 학회활동을 통한 교양증진”이라고 밝혔고, 김치선 교수가 지도교수를 맡았다.5)사회법학회는 창립 이후 활발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다. 1958년 5월 3일 제1회 발표회에서 최상징의 맛독일에 있어서의 경영 참가제도맜에 관한 연구 발표 이래 2주일에 1번꼴로 학생과 초빙 강사의 발표와 공동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발표된 내용은 맛경제적 기본권에 관한 제문제맜, 맛농지개혁문제맜, 맛수정자본주의맜, 맛노동조합의 조직과 활동맜 등과 그 외 한국의 노동운동문제나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것이었다.6)이러한 연구발표회 외에 노동자 실태조사 등 외부활동을 진행시켰다. 1958년 9월 10·11일 양일간 인천부두 자유노련의 심장제도 실태에 관한 현지조사를 하였으며,7) 10월 29, 30일에는 회원 4명이 11차 노총대회 초청으로 동대회를 참관하고 부산 부두노동자 실태를 조사하였다. 또한 1959년에는 영월탄광을 답사했으며, 1960년에는 대구 제일모직과 미8군 노무자들을 방문하였다. 사회법학회 회원으로는 초대회장 최상징 외에 김동익, 이채주, 백재봉, 박양식, 조준희, 황건, 신홍, 안동일, 심재택, 이무신, 백상재, 이태일, 임기택, 이재후, 박철우 등이 있었다.
문리대 사회학과를 중심으로 한 ‘농촌사회연구회’가 1958년 이후 비공개적으로 존재했는데, 이 서클은 4·19 이후 후진사회문제연구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서울대 상대의 경우회는 1950년대 중반에 결성된 서클로 이후 1968년 통혁당 사건 이후에 ‘이론경제학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상대생들의 의식화의 본산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두 가지 사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나는 한국전쟁 이전의 상황이다. 해방 직후에는 공산당이나 노동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분량의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 시중에 나와 있었으며, 여기에 동조하는 지식인들 역시 적지 않았다. 이들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는 없었지만 비합법적으로 사회주의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관련 서적들을 청계천 헌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둘째로 이승만정권의 부패와 독재성이 심화되면서 학생들 사이에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로의 개혁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이론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이제 소위 ‘이념서클’이라는 형태의 비밀학생조직들이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혁신정당 운동’과 맞물려 진행되기도 하였다. 1956년 10월에 창당된 진보당은 당내 학생 비밀조직으로 ‘여명회’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에는 김주태를 중심으로 학생조직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1958년 1월 세칭 ‘진보당 사건’이 터지면서 이 조직이 어느 정도 조직되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학내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비공개 이념 서클활동과 맞물리면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근일 필화사건’이 발생하였다. 1957년 12월 9일자 맛우리의 구상맜이라는 문리대내에 있는 맛신문연구회맜에서 낸 논문집에 정치학과 학생 유근일의 맛摸索맜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 글이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맛무산대중의 체제로의 지향맜이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이 길은 민주사회주의의 체제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글 속에는 “무산대중은 단결하자”,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구한다” 등의 좌익적 문구가 있었고, 이로 말미암마 이 글은 비평이나 연구논문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단정되었다. 문리대에서는 이 신문을 회수하고 편집학생들을 정학처분하였다. 집필자는 대학본부의 지시에 따라 퇴학 처분되었고 경찰에 구속되었다. 문교부에서는 대학내의 좌익계 교수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고 시사했다. 사건발생 후 문리대에서 적색 문구를 나열한 삐라가 나붙기도 하여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그 후 집필자는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문리대의 집필자에 대한 퇴학처분이 문리대의 본의가 아닌 점도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상과 학문의 문제를 제기한 실례로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한 1957년에는 李康石 법대 편입학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국회의장의 아들이자 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의 세도는 당시 하늘을 찌를 듯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을 서울 법대에 편입학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법과대학의 남재희, 이강혁, 김종호를 중심으로 한 1, 2학년생 약 200여 명은 4월 9일 11시 학생총회를 개최하였고, 그날 밤 서울대의 각 단과대학 학생운영위원장들이 회합하였다. 회의에서는 학원의 권위를 위하여 학교당국에 입학을 취소하도록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동대학교 법대학장은 학생들에게 이날 모인 집회가 불법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교무행정에 대한 학생들의 간섭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학생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0일부터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학교측은 이날 오전 8시 대학교수회를 소집하여 기정 방침은 변경하지 않을 것이며, 등교 권유로써 사태를 수습하자는 막연한 결론을 내렸다. 문교부장관은 "애국지사의 양자를 ‘스페셜 케이스’로 입학시켰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인가"라고까지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교수, 학생간의 회합을 가지던 중 13일 하오 본부 대강당에서 열린 학생총회에서 최종적으로 원만히 해결을 보았다. 이강석은 자진하여 물러났으며 15일부터는 전교생이 일제히 등교하여 정상적인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법대생들의 요구는 특권적 지위의 남용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대학에서 횡행해 오던 부정입학에 대한 항거였다.
또한 1959년 9월, 법대생은 법대 구내의 ‘중앙공업연구소’에서
공장을 설립하려 하자 “학원은 침해당하고 있다”라며 공사중지를
요청하였다. 이후 동창회가 분규 해결에 나섰고, 학도호국단 학생위원회에서는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4월 혁명기에 학생들의 학원민주화 요구 속에서 다시 표출되었다.
2) 학생활동
전란으로 중단되었던 학내 간행물이 다시 속간되었다. 1952년 2월 연합대학신문으로서 창간된 『대학신문』은 휴전 후에도 계속 주간으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각 대학 학도호국단에서는 신문과 학보를 발간하였다.
학내신문으로는 공대의 『無愁塔』(1959년 창간), 사대의 『敎友』(1957년), 상대의 『商大月報』(1958년), 약대의 『藥大月報』(1958년), 의대의 『含春月報』(1956년), 및 News on Medicine (1952년) 등이 있었다. 학보나 잡지로는 공대의 『佛岩山』(1952년 13호로 속간), 농대의 『常綠』(1954년 창간), 『獸醫大學報』(1956년), 문리대의 『文理大學報』(1952년), 법대의 『法大學報』(1954년)가 발간되었으며, 그외에 사대 여학생회의 『淸燈』(1957년), 상대의 『商大評論』(1951년), 약대의 『藥苑』(1954년), 의대의 『醫大』(1950년), 치대의 『儲慶趾』(1957년 6호로 속간)와 『儲壁趾』(1959년 창간)도 나왔다. 학과별 활동이 활발하였던 문리대에서는 대부분의 학과에서 연구지가 발간되었고, 이를 통하여 학생 및 교수의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
각 분야별로 학생활동의 상황을 학술활동·문예활동·체육활동·종교활동·계몽활동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학술활동은 각 단과대학에 조직된 학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공대건축학회는 건축전의 개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1956년부터 매년 건축전을 열었다. 문리대 정치학회는 1955년부터 매년 2차례에 걸쳐 정경학술강연회를 열었으며, 1957년부터 전국정치학도 정책토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문리대에는 국어국문학회, 한국우주학회, 물리학연구회, 화학연구회, 영문학회, 통계학회, 영어외교연구회, 사학회, 사회과학회 등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법대에는 형사법학회를 비롯하여 행정학회, 정법회, 민사법학회, 국제법학회, 공법학회, 사회법학회, 범죄문제연구회 등이 있었다. 사대에는 교육학회, 사학회, 영문학회, 수학회, 생물학회, 가정학회 등의 활동이 있었다. 상대에는 학생연구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론경제연구회, 상학연구회, 경영경제학회, 무역학회, 원서연구회, 통계학연구회, 재정학연구회, 농업경제연구회, 경제정책연구회, 회계학연구회 등의 연구단체가 연합한 조직이었다. 학생연구회는 각 학회의 종합적 계획을 세우고 각 학회에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상대평론을 발간하고 전국경상대학 경제정책토론대회를 개최하였다. 치대 硏友會는 1958년부터 학회지 『硏友』를 발간하였다.
다음 문예활동을 주로 하는 학회로는 문리대문학회, 사대문학회, 서울대연극회, 의대음악부, 음대오페라단, 사대합창단 등을 들 수 있다.
體育活動은 각 대학의 운동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배구부, 정구부, 유도부, 레슬링부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의 산악회가 조직되어 모범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각 산악회를 연합한 서울대산악회의 조직은 몇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종교활동은 기독학생회, 가톨릭학생회, 불교학생회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하여 단과대학과 서울대학 전체에 조직되어 있었다.
계몽활동으로는 의대 무의촌진료반, 농대 4H클럽, 사대 농촌사회연구회, 약대 소모임 등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조직은 주로 농촌계몽에 그 활동의 초점이 있었고, 당시 가장 뚜렷한 학생의 문화적
운동으로 대학과 사회의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농촌계몽운동은 그 내용상에서는 변화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줄곧 지속되는
학생활동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1) 장학제도
1952년 10월 장학회의는 그해 2학기부터 장학제도를 부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상자수는 각 대학 등록생수의 1할 이내로서 특히 학력과 인물이 우수하나 경제적 곤란으로 수업료 납부가 어려운 자에 한정하였다.
1953년 10월 장학회의는 종전의 규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장학금 급여규정을 제정하는 한편 장학위원회와 장학생심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 규정에 의하면 장학금 급여대상자는 ① 품행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량한 자 ② 가정이 극빈하여 학업 계속이 곤란한 자 ③ 명예제대자(상이군인)로서 가족이 빈곤한 자 ④ 순국선열·전몰군경의 유가족으로서 가정이 빈곤한 자 ⑤ 교육자의 직계자녀로서 성적이 양호한 자 등이었다. 이리하여 장학제도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1955년 2학기부터였다. 그해 2학기부터 성적이 우수하고 학자금 조달이 곤란한 학생 260명을 선정하여 매학기 1인당 1만 환씩 보조하기로 하였다. 이는 100명 미만이 혜택을 받던 종전에 비해 수혜자의 수가 크게 확대된 것이며, 액수 또한 증가된 것이었다.
1956년에는 250명의 학생이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 지급 대상자수는 약간 줄었으나 지급액수는 2만 환으로 2배 증가되었다.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의 혜택은 이후 계속 확대되어 1957년 1학기에는 수업료 면제 혜택을 받은 학생만 1,580명에 달하였다. 당시 등록학생수의 20%에 해당하였다.
이 밖에 교내외의 많은 독지가 및 단체로부터 장학금이 지급되어 학생들의 학구의욕을 높여 주었다.
2) 학생보건진료
본교에서는 학생 개인의 건강상담과 질병의 실비치료를 목적으로 1953년 4월 서울대학교 보건회를 발족시켰다. 이 보건회는 당시 의과대학 부속병원장이던 秦柄鎬 교수에 의하여 발기되었다.
서울대학교 보건회는 1956년 3월 서울대학교 보건진료소로 개칭되고 1957년 5월 문교부의 설치인가를 정식으로 받아 학생진료에 노력하였다. 개설 당시의 구성을 보면 서무과·내과진료실·치과진료실·검사실·방사선과·약국·접수·공대진료분실이 있었다. 진료소는 질병의 조기발견과 진료 및 진료알선·보건상담·교내 환경위생·보건통계·신체검사·기타 학생보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각종 사업을 주로 하였다.
진료소가 설립 초년도의 사업계획으로 수립한 것은 첫째 폐결핵 조기발견과 진료, 둘째 기생충검사, 셋째 치아관리, 넷째 기타 신체검사·보건진료, 각 건물의 위생향상계획, 건강상담 등이었다. 이 사업계획에 따라 보건진료소는 개설 이래 1년간의 본교생의 건강실태를 파악, 발표하였다. 1년간 진료소의 진료인원은 모두 7,773명이었고 그 중 내과질환이 6,236이었다. 특히 폐결핵환자수는 3,732명으로 전체 진료자수의 48%에 달하였다.
한편 의과대학부속병원은 학생들에게 연 1~2회씩 정기적으로 집단검진과 보건지도감독등 개별적 건강상담에 응하고 질병의 치료를 요하는 학생에게는 일반치료비 규정액의 70%의 금액으로 치료하여 학생들의 보건에 이바지하였다. 보건진료소가 개설되면서는 의과대학부속병원이 담당하던 학생에 대한 집단검진업무는 진료소로 이관되었다.
보건진료소의 활동이 일정한 성과를 올리면서 진료소의 직원도 증가하게 되었고, 1958년에는 운영위원회를 두어 운영을 더욱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는 농과대학에도 진료분실을 두어 학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3) 학생병사제도
휴전 후 새로운 학생병사제도의 수립이 모색되었다. 그리하여 1954년 6월 8일 국방부장관, 문교부장관 및 육군참모총장 등이 연석회의에서는 유사시에 동원될 兵員, 특히 유능한 장교를 확보하기 위하여 대학과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단기입영훈련을 실시할 것을 합의했다. 그리고 6월 28일에는 이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문교부·국방부의 관계자 및 각 대학 학생과장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만 30세까지에 한하여 졸업예정자를 입대시키되 10주간의 군사훈련기간은 軍在營期間에 통산하며, 육군군적에 편입되어 있을지라도 재적학교 졸업시 각자의 지원에 따라 海·空軍에도 전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새로운 병사제도를 마련하면서 종전 대학에서 실시하던 학생군사훈련은 입영훈련을 실시하는 한 중지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대학졸업예정자는 그해 7월 12일부터 20여회에 걸쳐 매회 약 250명씩 입대하여 10주의 훈련을 받았다. 서울대학교에서는 7월 24일 문리대생 196명이 광주보병학교에 입대한 것을 시초로 하여 각 단과대학별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그 후 1956년에 이르러 ‘學籍保有 現役兵制‘(이하 ‘학보병제’로 약칭)가 논의되었다. 종전 재학생들에게 베풀던 징집보류 혜택을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국방부 당국이 막대한 예산으로 5천여 명의 대학졸업반 학생을 집단훈련한 것은 시급을 요하는 현역장교의 충원을 목적으로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졸업생들의 입대율이 20% 내외에 불과한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1956년 2월 문교부에서 열린 중앙교육위원회와 병무국 책임자의 연석회의는 국민개병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일체의 징집연기제도를 폐지하기로 하였는데, 재학중인 학생의 복무기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즉 재학시에는 2년간 복무케 하자는 국방부안과 재학시에 1년간 복무하고 졸업 후에 나머지 1년을 복무하도록 하자는 문교부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그해 9월에 이르러 재학중 복무년한을 1년 6개월로 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학보병제의 실시가 확정되었으며 문교부로부터 학보병제의 실시와 이에 따른 입영 및 복무년한에 관한 구체안이 시달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열린 각 대학 책임자회의에서는 문교부 시달에 대한 구체안과 보강안 및 학보병요원의 징집요령이 논의 발표되었다.
학보병요원 징집요령에 의하면 입영순차는 병역법 제50조에 의하여 징집년도가 1950년도에 해당하는 자로부터 순차적으로 1956년도 해당자까지 징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인 1957년 5월 30일 제1차 학보병입대식이 거행되어 첫 학보병들이 입대하였고, 이어 6월 24일에는 제2차, 7월 24일에는 제3차 학보병입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학보병제의 실시에 따라 재학중인 학생들이 대부분 학업을 중지하고 입대해야 하는 등 몇 가지 모순이 나타나게 되어 이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1957년 6월의 전국고등교육 기관장회에서 이 학보병제의 수정을 건의한 바도 있고 하여 1959년 4월 약간의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문교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합의 하에 결정된 수정안의 주요내용은 ① 학생 본인의 희망에 따라서 입영하거나 또는 재학중 입영연기조치를 취함을 원칙으로 함. ② 재학중 입영하는 자의 복무기간은 1년 6개월이고 졸업 후의 응소자는 그 기간을 일반병과 같이 3개년으로 함 등이었다.
이러한 학보병제에 의하여 1957년 5월 30일부터 1961년 이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학보병으로 입대한 서울대학생 수효는 총 4,021명에
이르렀다.
대학문화가 형성된 것은 환도 이후 4·19혁명까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의 정치적 격동기와 한국전쟁 시기에 정상적인 대학문화가 형성되기 어려웠다.
당시의 대학에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름대로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던 것은 외국문화의 무비판적 수용이었다. 특히 사르트르, 까뮈 등의 철학사조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적합한 것이어서 대학생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사조와 사회학·정치학 등 새로운 서구 근대학문도 정착되어 나갔고, 이 과정에서 『文理大學報』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외국문화의 수용은 문학·미술·음악·연극 등 예술분야에서도 활발하였다. 당시의 시낭독회에서는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의 외국시가 낭송되었고, 기리코 뭉크풍의 회화가 대학에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르네상스·돌체·엠프레스·무아 등의 음악감상실은 대학생들의 전초기지로서 차이코프스키로부터 멘델스존·바흐·브람스 등을 S.P판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외국문화의 수용은 기성문화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는 실험정신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러한 실험정신은 대중을 무시한 영웅적 천재성을 과시해 보려고 했던 일종의 낭만적 만용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그러한 실험정신 속에는 독선적 개인주의, 퇴폐적 낭만주의의 부정적 경향이 없지 않았고, 집단의식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혐오와 무시는 서구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이끌어 냈다. 대학문화는 개인적 차원에서 낭만적 정열을 가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 비판의식이 결여된 무기력한 대학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학인의 이러한 모습을 1957년 5월 20일 『대학신문』에서 黃山德 교수는 맛교수가 본 現下 대학생의 지성맜이란 글을 통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현실에 순응, 맹종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이리하여 나는 오늘의 대학생의 지성의 방향은 사회적이 아니라 개인적이며 건설적이 아니라 후퇴적이며 건국적이라기보다는 보다 더 망국적이라는 것을 슬퍼하게 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의대생 李尙馥 군도 맛학생이 본 현하 대학생의 지성맜이란 글에서 “우리의 대부분은 그러나 현실을 비판하기에 앞서 유행에의 모방과 뇌동에 기운다”고 고백하면서 그 원인을 “전쟁과 禍亂의 세기에서 죽음 앞에 전율하고 불안 속에 生을 응시하고 砲煙과 더불어 사라지는 문명의 灰塵을 바라보고 커 나온 우리는 자유와 독재, 戰禍와 번영, 實存과 機械가 팽팽한 긴장 속에 대결하고 횡포와 불의와 패륜이 난무하는 사회적 현실 앞에 모든 감각이 마비됐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체의 추악에 대한 불감증으로 이미 주어진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에 체념한 자세인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생의 무기력, 체념의 경향은 거리에 다방, 당구장, 기원이 생기고 관권의 횡포가 심해져 가는 사회로부터 무관한 존재로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오락에 탐닉함으로써 현실적인 고민을 해소해 버리곤 하였다. 1958년 당구가 갑자기 유행하여 이때부터 당구는 대학생들의 대표적인 오락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오락, 그리고 연애에의 탐닉은 일면 주체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고민과 불안을 해소해 주는 처방이 되기는 하였지만 보다 더 건전하고 창조적인 사회의식의 형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950년대를 통해 새로운 경향의 학생운동이 태동해 나가고 있었다. 이에는 1950년대 후반기 자유당 정권의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서도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다른 한편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학도호국단 폐지론의 대두와 병역문제를 중심으로 한 논란, 그리고 1956년의 선거를 둘러싼 필화사건 등을 통해 일면 탄압을 받았지만 일면 강인하게 버티면서 대학의 자유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한편 대학생의 생활과 관련하여 1955년부터 정식으로 착용하였던 교복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군작업복을 검게 물들이고 워커를 신던 것이 피난시절 및 환도 후의 대학생 복장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윗주머니엔 손수건까지 꽂은 정장차림이 빈번해진 것이다. 그래서 대학당국에서는 교복착용을 장려함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고쳐 보려 하였다. 교복은 전부터 있었지만 앞으로 신입생만은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하고 이대로 3년만 지나면 전교생에게 교복을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학당국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도 이에 반발하여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냄새가 나는 교복의 일률적 착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8년 ‘진보당사건’이 일어나고 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으며, 1959년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가톨릭계의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보안법 반대 데모를 벌이고 이를 통해 대학생의 정치·사회의식은 전반적인 침체 분위기 속에서 성장되어 갔다. 적극적인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선거운동에도 가담하였다.
1950년대 전반에 형성되었던 천재적·영웅적 낭만성의 대중문화는 차차 쇠퇴하고 사회적·정치적 대중화의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4·19 전의 현상으로서 구체적으로는 문학에서는 해외사조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반성하고 전후문학, 혹은 민족의 울분과 감정을 그린 민족문학의 싹이 대두되었고, 사상계 등의 잡지가 간행되어 대학에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음악부문에서도 낭만주의의 마지막 꼬리인 S.P판의 전성시대가 사라지고 L.P판이 등장하여 60년대 재즈음악 유행의 시초가 되었다.
대학문화의 창조자로서의 기치는 대학생의 대중화.보편화 현상 속에서 서서히 내려졌고, 그에 따라 대학생의 엘리트의식은 민중의식으로 변화되어 갔다. 즉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낭만적인 대학문화는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인 관점으로 이행되기 시작하였으며, 대학문화의 이러한 이행의 중간에 4·19 혁명이라는 전환점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