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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에 한국청동기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동북아시아에서의 한국 청동기시대 문화)가 주인장이 일하는 연구소 강당에서 개최됐다. 마침 그 주에 동생 결혼식이 있어서 금요일날 미리 연차를 써놨지만, 오전 첫 발표가 강인욱 선생님인지라 오전에 잠깐 발표만 듣고 서울로 고고. (본래 강인욱 선생님 발표가 10시 40분부터 11시 10분까지였는데, 박양진 선생님이 11시 다 되서까지 기조강연을 하는 바람에 일정에 약간의 차질이 있었다. T.T)
강인욱 선생님의 발표 주제는「한반도 청동기 사용의 기원과 계통-중부지역 청동기시대 조기 및 전기 출토품을 중심으로-」이다(안내판과 발표문 안의 제목이 다르다). 최근에 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과 중도 유적(전공하는 후배가 사회적 이슈 때문에 쉬쉬했다가 이제서야 비로소 자료화되어 공개된 것이라고 귀뜸해줬다) 등에서 나온 자료들이 최초로 공개되는지라 전공 분야는 아니었지만, 관심을 갖고 들어봤다.
논문의 주된 골자는 다음 몇가지로 함축될 수 있다. 기존의 한국 청동기 유입 시기를 보다 상한해서 올려볼 수 있는 자료들이 나왔다는 것과 요서 지역으로부터 서북한 지역을 통한 청동기 유입 루트 이외에 연해주를 따라 두만강 유역-강원도 일대로 이어지는 루트를 하나 더 상정한다는 것이 발표의 주요 내용이었다. (특히 후자는 강인욱 선생님의 기존 견해를 수정하는 것으로서 자료가 추가됨에 따라 이번 발표에서 기존 주장을 공식적으로 수정한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청동기 없는 청동기시대라는 비판이 있어왔다. 그래서 무문토기(청동기시대때 토기)시대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는데(신석기시대는 즐문토기 혹은 빗살무늬토기시대 등으로), 이번 발표에서 이른 시기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청동기들을 기반으로 청동기시대 조기에서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의 비파형동검 개시기를 대략 B.C. 9~8세기로 봤었는데, 청동기시대 조기는 B.C. 13세기까지 올라갔으니 거의 4~500년 이상을 청동기 없는 청동기시대로 분류해왔던 게 사실이다. (비파형동검 이전에도 청동기가 간간히 나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유입으로 보고 큰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기존에는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맞춰 일본의 야요이시대 연대가 편년됐었는데, 일본 내에서 AMS 측정치를 기준으로 새로운 연대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종래에는 한국을 건너뛰고 요서 지역이나 하가점상층문화를 기원으로 바로 일본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대관까지 제시되었다. 물론 그러한 일본의 AMS 연대관에 대해서는 국내 청동기시대 전공자들 대부분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만, 문제는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짐에 따라 기존의 연대관도 수정이 불가피한 시점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발표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먼저 청동기시대 유적 내에서 출토된 청동기에 대해 하나씩 살펴봤다. 크게 주거지와 분묘로 나눠서 살펴봤으며, 주거지로는 정선 아우라지유적 17호 주거지, 청주 학평리 219-5번지 유적, 중도 레고랜드 부지 37호 및 40호 주거지, 양구 고대리 57호 주거지, 춘천 우두동 33호 주거지 등이 소개되었다.
1. 정선 아우라지유적 17호 주거지
해당 주거지는 전형적인 각목돌대문 단계(청동기시대 조기를 대표하는 토기)의 주거지로 삼각만입석촉, 장방형석도, 석제 어망추, 토제 어망추, 옥 장식품(관옥)를 비롯해 청동장신구 등이 함께 확인되었다. 총 4점의 장신구들은 모두 단조로 주조해서 휘게 만들었으며, 2점은 조금 두꺼운 청동판을 구부려 반지처럼 만들고, 2점은 얇게 관형으로 휘게 만들었다. 발표자는 해당 장신구들을 위의 사진처럼 관옥형 장신구의 사이사이에 들어가 목걸이를 이루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2. 청주 학평리 219-5번지
장방형의 가락동식 주거지(가락동식 토기 참고)에서 비파형동검 1점이 출토되었다. 총 3개의 노지 중 2번 노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지점에서 수습되었으며, 북벽 부근에서는 혈구홈이 잘 살아있는 유엽형 마제석검 봉부편도 공반 출토되었다. 유적 내에서 출토된 이중구연토기와 가락동유형의 절대연대를 통해 봤을때 돌대문토기보다 한단계 늦은 B.C. 11~10세기 내외로 편년 가능하다.
3. 중고 레고랜드부지 37호 주거지
장방형의 역삼동식 주거지에서 선형동부 1점이 출토되었다. 동부는 공부에 5조의 돌대가 돌아가고, 공부는 약간 벌어지게 마무리되었다. 날 부분은 부챗날처럼 펼쳐지는데, 이러한 형태는 길림 송화강 일대에서 흔히 발견된다. (동부의 날 부분에 대해 민감하게 연대를 반영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부언 설명을 하셨다) 한편, 타원형의 검파두식과 공반되었으며, 공반 출토된 유경식 석검은 서천 오석리의 비파형동검과 유사해 비파형동검의 현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 중도 레고랜드부지 40호 주거지
37호와 달리 정방형의 소형 주거지인 40호 주거지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으며, 주거지의 한쪽 벽면 노지 근처의 바닥에서 약간 뜬 채로 수습되었다. 해당 주거지는 장방형의 천전리식 주거지와 중복되기 때문에 동검의 소속이 불분명한 면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천전리식 주거지가 아닌 중복된 역삼동식 주거지와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해당 주거지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은 동검 상반부만 봤을때 십이대영자식의 전형적인 동검의 영향을 받은 서포동식과 비슷하며, 봉부는 평창 하리 240-4번지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덧붙여, 평창 하리의 비파형동검은 40호 주거지 출토품보다 더 세장하고 돌대의 발달이 미약해 한단계 늦은 시기로 보인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해당 동검은 완제품을 받아서 석검처럼 날 부분을 갈아서 사용한 흔적의 결과로 사용하다가 버려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당시 동검이 도입되던 초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5. 양구 고대리 57호 주거지
주거지의 남쪽 점토 바닥면에서 잔존상태가 불량한 비파형동검 1점이 출토되었다. 해당 주거지는 중간에 노지 부분을 제외하고 주변에 모두 점토 다짐이 있는 주거지로서 역삼동시에서 천전리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고대리식' 주거지이다. AMS 분석 결과 대체로 B.C. 8세기대가 나왔으며, 출토유물을 통한 분석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중기 전반대인 B.C. 10~9세기로 편년 가능하다. 해당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재사용되는 동검의 연대, 주거지 내부에서의 출토양상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6. 춘천 우두동 33호 주거지
해당 주거지는 노지가 2개 이상인 세장방형의 천전리식 주거지로서 주거지 남쪽의 점토다짐 구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석촉, 석도와 함께 동촉 1점이 출토되었다. 그중에 석침형 석촉(찌르개살)은 소영자를 비롯한 두만강 일대의 초기 청동기시대 석관묘에서 널리 사용된 것과 유사하며(위 사진의 왼쪽), 동촉은 촉 끝 부분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날의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형태인데 날의 각도와 형태를 봤을때 서주 시기 중원에서 주로 보인다. 즉, 주거지 내부에서 중원과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가 같이 나온 셈이다. 주거지의 연대는 고대리와 비슷한 B.C. 10~9세기 정도로 보인다.
그밖에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들도 소개하였다. 중고 레고랜드 구역 A1-29호묘, 광주 역동 화장석곽묘, 춘천 우두동 석관묘가 그 대상이다.
7. 중도 레고랜드 구역 A1-29호묘
해당 분묘는 묘역식 지석묘로서 상석은 있지만 교란이 심하게 진행되어 매장주체부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입지나 규모로 보아 중도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한듯 했다. 동검은 경부와 하반부만 남았으며, 남한 비파형동검의 전형적인 특징인 홈이 경부 양쪽에 파여져 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경부에 홈이 파인 비파형동검 중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사진을 통해 봤을때 동검은 매장주체부의 바깥, 개석이 놓였던 가장자리의 舊 지표면에 얕게 묻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두고 김천 송죽리 및 오림동 지석묘의 사례처럼 고인돌 앞에 동검을 거꾸로 꽂은 풍습과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자는 해석했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서술하겠다)
8. 광주 역동 화장석곽묘
석곽 내에서 날이 거의 닳아 없어진 동검과 이형청동기, 삼각만입식 화살촉,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그중 이형청동기는 김해 연지리 및 대련의 강상 7호묘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한다. 석관묘 내부의 탄화목재와 인골의 AMS 분석 결과 B.C. 12세기 내외의 연대가 나와 현재까지 무덤에서 발견된 동검 중 가장 이른 것으로 주목된다. 단, 해당 유적과 유사한 강상무덤은 시기가 B.C. 8~7세기로 시기 차이가 크며, 청동 장식의 형태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다. 발표자는 이와 비슷한 청동 장식이 나진 초도에서 나왔으며, 해당 동검은 춘천 우두동 출토품과 비슷하지만 공반 유물과 AMS 연대결과에 따라 우두동보다는 약간 이른 것으로 분석했다.
9. 춘천 우두동 석관묘
석관 중앙부의 바닥면 중앙에서 20cm 정도 뜬 채로 동검 1점, 동촉 2점, 석촉 9점, 곡옥 1점 등이 출토되었다. 동검은 마연되고 결실되어 일반적인 비파형동검의 특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동촉 2점 중 유경식동촉은 우두동 33호 주거지 출토품과 형태는 다르지만 촉날의 각도와 경부의 가공 방법 등이 유사하다. 무경식동촉은 밑부분에 목질이 뒤덮혀 있어 삼각형만입촉처럼 화살대에 끼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기 청동기시대 만입형 석촉을 청동기로 모방한 것으로서 청동기가 석기를 모방하는 한반도만의 청동기시대 특징을 반증하는 또 다른 자료로 평가하였다.
이상 9개의 유적을 살펴본 뒤 발표자는 이를 3단계로 분류하였다. Ⅰ기는 돌대문단계로 청동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며, 정선 아우라지 40호 주거지가 이에 해당한다. 시기는 B.C. 13세기 전후라 할 수 있다. Ⅱ기는 청동기시대 전기를 중심으로 전기~중기의 과도기를 포함한다. 가락동유형, 삼각만입석촉이 발견되고 유엽형 동검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주거지뿐만 아니라 무덤에서도 사용되며 청주 학평리, 광주 역동, 춘천 우두동 석관묘, 우두동 주거지, 고대리 57호 주거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기는 B.C. 11~9세기로 상정 가능하다. 마지막 Ⅲ기는 석관묘뿐 아니라 고인돌에서도 쓰이며 홈이 파인 남한의 전형적인 동검이 등장하는 토착화 단계이다. 중도 지석묘, 중도 37호 및 40호 주거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거지에서도 여전히 청동기가 출토되며,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이 등장하고, 중도 지석묘와 같이 동검이 고인돌 거석기념물에서 상징화된 유물로 쓰이는 시점이다. 연대는 청동기시대 중기 전반부로서 B.C. 9세기대에 해당한다.
각 단계별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기는 청동기시대 조기로서 정선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4점의 단조 청동 장식은 한반도의 청동기 유입시기를 파격적으로 소급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돌대문토기의 등장은 B.C. 20~15세기에 시작되었고, B.C. 15세기를 기점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정선 아우라지 출토품은 해당 시점의 유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정선 아우라지 17호 주거지에서는 절상돌대문토기 1점과 두만강 유역의 전형적인 흥성식토기 1점이 출토되었는데(얼마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 '한강과 마을의 흔적-한강유역 신규 발굴 유물 특별전시회'에서 소개된 바 있다. 주인장도 다녀왔지만 그때는 이 토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인지하지 못 했다), 이 흥성식토기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흥성식토기는 구연부 끝에 돌대를 두르고 손으로 눌러서 문양을 마무리하며, 토기의 하반부는 급격하게 좁아지는 형태이다. (위 사진의 가운데) 두만강유역의 후기 신석기시대에서 전기 청동기시대에 걸쳐 널리 유행하며 발표자는 저장용으로 해석했다. 특히 17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흥성식토기는 B.C. 15~11세기로 편년되는 두만강유역 전기 청동기시대 유물로서 하한 연대는 B.C. 13~12세기가 적당할 듯싶다.
토기의 형태로 볼때 정선 아우라지 17호 주거지의 연대는 B.C. 11세기 이후로 내려올 수 없으며, 상한은 B.C. 15세기까지 올라간다. 이를 좀더 거시적으로 보면 B.C. 13세기를 기점으로 카라숙 계통의 청동기가 동아시아 각지로 확산되는 현상, 마성자문화로 대표되는 요령 지역의 석관묘 문화가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되는 현상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소영자로 대표되는 두만강유역의 문화권에서 확인되는 골침(찌르개)가 강원도 지역의 전기 청동기유적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B.C. 13~12세기경에 전면적인 문화의 확산과 변동의 여파가 강원도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겠다. 더불어 흥성 주거지 82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곡병식 석검도 연해주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며 B.C. 13~11세기에 중국 북방지역에서 발견되는 카라숙식 동검을 모방한 것으로서 당시 동아시아 전체적인 청동기문화의 양상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만주 일대의 청동기는 크게 중원 계통과 카라숙 계통으로 양분되는데, 그중 유라시아 초원의 청동기문화를 살펴보면 세이마-투르비노 문화(B.C. 20~15세기)의 뒤를 이은 카라숙 청동기(B.C. 13~9세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스키토-시베리아 청동기(B.C. 9~3세기)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넓은 판을 구부려서 석제 장신구 사이에 끼워 사용하는 전통)의 경우,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서부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의 크로토보문화(B.C. 18~15세기) 에서 널리 보이는 것으로 해당 장인 집단이 유라시아 초원을 거점으로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나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는 몽골 서부와 자바이칼 일대의 드보르쪼이문화(B.C. 13~11세기)에서도 확인되는데 북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 루트는 연해주 지역 청동기에 대한 성분 분석을 통해서도 입증되며, 정선 아우라지 유적의 청동기가 카라숙 청동기 계통과 연결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자바이칼지역은 중원 지역과 다른 초원계 청동기의 제작 전통이 확인되는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점으로서 그 동쪽의 강원도에까지 문화 교류의 흔적이 확인된 셈이다.
이상 Ⅰ기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이마-투르비노에서 기원한 청동기문화가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확산되고 카라숙 계통으로 지역화된다. 그리고 중국 북방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 청동기의 전통은 한반도 서북지방(평북 신암리)까지만 파급된다. 반면에 자바이칼-연해주로 이어진 청동기의 전통은 거대한 무기, 마구 등은 없이 청동장신구 위주로만 계승된다. (단조로 만든 청동판을 휘어서 석기 장신구로 사용하는 전통) 그리고 연해주~한반도 일대에서는 곡옥을 모방한 곡옥형 청동기가 자체 제작되기도 한다. 카라숙 청동기의 전통은 확산력이 빠른 청동기 장인집단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전파력이 매우 커서 연해주는 물론 일본 열도까지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 카라숙계 청동기는 동아시아 일대에 기후가 한랭건조화되어 토착 문화가 사라지고 인구가 급감하는 시기에 등장하는데, 하가점하층-상층의 교체기, 무문토기의 등장, 백금보문화의 등장 등과 궤를 같이 한다. 이때 남한에서는 돌대문토기로 대표되는 조기 청동기문화가 확산되는 시점으로 정선 아우라지 청동기는 돌대문토기의 확산과 함께 청동기의 제작 전통이 자바이칼에서 연해주 일대를 거쳐 강원도 일대로까지 파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실질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Ⅱ기가 되면 동검, 동촉, 장신구, 검파두식 등 청동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그 계통도 다변화된다. 동검을 먼저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전기 동검의 경우(광주 역동, 우두동 출토품 등) 비파형동검의 특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B.C. 9세기라는 기존의 연대관을 인정할 경우, 비파형동검은 요서지역의 전형적인 비파형동검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석검을 모방해서 만든 다른 계통의 동검 2가지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청동기에서 동검과 석검의 형성 과정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데(동검이 먼저냐, 석검이 먼저냐) 발표자는 석검 문화가 강한 한반도의 경우, 석검을 모방하는 동검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었다.
발표자는 기존에 주목되지 않았던 대평리 옥방 5지구 D구역에서 출토된 곡옥형 청동장식에 주목했다. 곡옥을 모방한듯한 단조 청동장식은 청동기시대 중기나 후기의 다른 유적에서 출토 사례가 없고,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연해주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이를 청동기시대 초기 작품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연해주 일대의 시니가이 유적에서는 진주 옥방과 정선 아우라지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모두 출토되었으며, 역동 지석묘의 이형 청동기는 나진 초도 유적에서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서북한 지역에서 초기 청동기로 간주되는 신암리 청동도자, 금탄리 청동단추 등은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신암리 청동도자의 경우, 카라숙계 청동기 중에서도 요동과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중국의 북방 지역에서 출토되는데, 이를 보면 압록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의 관련성은 청동기만 놓고 봤을때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두동에서 출토된 양익동촉은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적이 없지만, 중원지역에서는 B.C. 15세기(상대)부터 춘추시기까지 거의 형식적 변이가 없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원에서 한반도 일대까지 가장 널리 퍼진 청동기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동촉의 형태를 충실히 따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른 단계의 비파형동검 유적(이도하자, 십이대영자 등)에서는 이러한 중원식 양익동촉이 발견되지 않으며, 요동반도의 대취자나 타두 적석묘에서 출토된 동촉과도 형태가 다르다. 그렇기에 해당 동촉이 비록 중원식이지만 요령 지역을 거쳐서 점진적으로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단정짓기는 곤란할 것이다. (아마 해당 동촉은 우발적으로 유입된 것으로서 유입 경로는 서쪽 루트가 아닌 동북 루트일 가능성을 내포하는 듯했다) 그와 달리 무경식동촉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삼각만입식석촉을 모방한 것이 틀림없다. 특히 거푸집의 흔적이 없어 단조 청동기를 이어붙여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중원식 동촉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빠르게 현지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 Ⅱ기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Ⅱ기가 되면 청동기의 계통이 다변화되고 동검류가 등장한다. 현재까지 출토품인 역동과 우두동의 경우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의 특징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석검 전통이 강한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석검 모방 동검으로 판단된다. 동촉 역시 중원 지역에서 유행하는 것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토착화의 양상을 보인다.
Ⅲ기가 되면 비파형동검은 등날이 뚜렷해지고 돌대가 잘 살아있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비파형동검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지석묘 사회에 비파형동검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동검이 주거지 내에서 사용하는 실용품적인 성격에서 지석묘에서 석검과 함께 사용되는 상징화된 위신재로 그 역할이 바뀐다. 즉, 한반도에 유입된 청동기문화는 석검 제작의 강한 전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석검 문화에 동화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신재로 그 기능이 점차 바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거지 내에서 출토되는 청동기가 확인된다. 이렇게 일관된 한반도 초기 청동기의 큰 특징이 주거지 출토품이 많다는 점인데, 무덤보다 주거지에서 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예는 주변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카라숙 단계 청동기는 무덤이 아니라 지표에서 수습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들이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유입에 대한 이해는 집단의 상층부가 먼저 사용하다가 청동기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낙수효과를 이룬다는 것이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주거지에서 청동기가 가장 먼저 발견되고 청동기가 발견된 주거지에서 분명한 계급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즉, 한국의 경우 청동기의 유입 및 초기 사용이 계급화의 결과가 아니라 실용적인 측면에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만의 독특한 청동기 유입 과정을 발표자는 2가지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는 청동기시대 조기 단계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 현상과 관련있다. 그에 비해 주거지 내부에서 완형의 장신구와 동검 등이 양호한 상태로 폐기되어 발견되는 점을 보면, 별도의 무덤을 만들지 않고 주거지 자체를 의례 공간이자 죽을 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했다. (즉, 주변 지역과 달리 이른 시기 무덤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았으므로 주거지 내부에서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는 소리이다) 두번째는 석검의 제작 전통이 한반도 내에서 강했기 때문에 청동기의 도입 단계에서 사회 분화나 계급화가 아닌, 실용기로서 석기를 대체하는 정도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기로 전환되면서 지석묘에서 동검이 부장되는 등 의례의 상징물로 기능했는데, 이때에도 여전히 석검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청동기 사용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다가 철기시대인 세형동검 단계가 되면서 비로소 동검의 사용이 급격히 증가하고 석검 중심의 사회가 해체되었다고 보았다.
그와 더불어 Ⅲ기의 의례화, 상징화 단계에서 그 요인으로 전사(warrior) 숭배 문화 유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무기로서의 동검의 중요도가 높아졌고, 그에 따라 동검을 사용하는 전사, 전사집단, 전투와 전쟁, 전사 숭배 등의 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지석묘 앞에 동검을 거꾸로 꽂는 행위 또한 그런 전사 숭배 문화의 단면으로 이해하였다.
이상 Ⅲ기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에는 석관묘뿐 아니라 지석묘에서도 청동기가 쓰이며, 홈이 파인 남한의 전형적인 동검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토착화의 시기이다. 동검은 이 시기부터 지석묘 문화권에서 폭넓게 쓰이며, 거석기념물의 상징화된 표식이 되고 위신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 동검이 확산하게 된다.
발표자는 결론 부분에서 4가지 정도로 정리를 하고 (위 사진의 4가지 결론)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끝맺음을 하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의 사용은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한다. 한반도 초기 청동기 및 비파형동검 문화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동북아 동검문화의 발달이라는 커다란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는 세이마-투르비노에서 시작되어 카라숙 청동기로 이어지는 B.C. 13세기를 전후한 청동기 제작기술의 파급이라는 동아시아적 맥락이 한반도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전체 편년에서 무문토기시대라는 용어를 통해 한국 청동기의 후진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청동기의 이른 도입에도 불구하고 청동기는 석기 전통을 대체하지 않고 석기 전통에 편입하는 식으로 발달했다. 이러한 석기 전통의 지속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관통하는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청동기의 도입 이후 세형동검이 일반화되는 1천년여의 시간 동안 청동기는 변방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초기의 청동기가 무덤 대신에 주거지에서 일반 석기들과 함께 발견되는 현상, 그리고 비파형동검이 석검을 모방하는 현상(김해 진동리 석관묘 등)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청동기 사용의 특징이다. 세형동검 단계에 들어서 급격히 동검 사용이 확대되는 것은 철기가 도입되어서 석기의 상징성을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발표만 듣고 토론까지는 듣지 못 했기 때문에 발표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의문나는 점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별도로 질문을 드리고 답변까지 나중에 까페에 공개하도록 하겠다. 학회 발표문 전문은 용량이 너무 커서 강인욱 선생님 발표분만 따로 정리해, 용량을 낮춰서 업로드할테니 참고하길 바란다. (도면 화질이 떨어지고 글자가 약간 흐리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음)
첫댓글 감솨합니다. 근데, 이거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들여다봐도 어려울 듯...
이런 내용은 발표보다 요약이 더 어려운 것인데,, 공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서, 하가점에서 직접 일본으로 날라갔다는 부분에서는,, 그런 내용을 하도 들어서 지겹다는 생각까지...
저도 뭐 제 전공이 아니라서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 이것 말고도 요즘 학회 몇군데를 더 갔는데 그것들 후기도 같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