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가을날, 차를 마시며 나를 본다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코로나19의 기승은 가라앉는 듯 또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자연 속 캠핑장에서 같이 보낸 여섯 가족 중 세 가족이 확진되어 여름휴가의 두려움을 주기도 했다. 언제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차 한 잔으로 가을을 맞는다.
가을볕이 따갑다.
모자 위에 흰 수건을 덮어 쓴 아주머니들이
쑥쑥 무를 뽑는다.
그 동안 아프지 않고
얼마나 싱싱하게 잘 자랐는지
목이 말라도 얼마나 잘 참고 참다운 무가 되었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쓰윽 흙을 닦고
한 입 베어 먹고는
살짝 웃으신다.
<무>를 노래한 정호승님의 시이다. 가을은 무엇이든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된다. 투명한 햇살 속에 넓디넓은 무밭에서 밭고랑 하나씩 열을 지어 아낙네들이 무를 뽑는 모습. 코스모스, 국화, 하늘, 구름, 선선함, 하늘거리는 바람. 가을을 대변하는 많은 것들 속에서 ‘무’는 얼마나 소박하고 무딘가. 가을무를 뽑아 쓱쓱 흙을 닦아 한 입 베어 물면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물기가 주르륵 넘쳐난다. 그 넘쳐나는 생동감과 싱그러움에 절로 모든 사념은 사라지고 행복한 만족감에 잠겨든다. 스치며 지나치던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아름답다.
고려의 승려들은 불교진흥책에 힘입어 차 마시는 풍습도 더욱 발전시켰다. 불가에서 차는 향ㆍ초ㆍ꽃ㆍ쌀ㆍ과일과 함께 여섯 가지 공양물로 소중히 여겨지고 있어 승려들에게 차는 의식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속에서 차시(茶詩)는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융성한 고려의 불교문화 속에 많은 승려들의 차시가 남겨졌다. 고려 사회 선승(禪僧)들의 고요한 산사의 삶은 우리의 마음을 보듬어준다.
출가의 삶 자체가 탈속이지만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속세를 끊고 자연 속에 융화되며 해탈의 경지를 찾는 구도적 삶은 시작(詩作)의 중요 소재로 부각되었다. 초야에 묻혀 사는 생활 속에 차 한 잔으로 자신의 마음을 씻고 나물 한 발우로 속을 채우는 청빈한 삶은 자연과의 동화로 오히려 더 풍성하고 고상하고 숭고한 모습을 자아낸다.
태고선사 보우(普愚, 1301~1382)는 고려말 불교개혁에 힘쓴 승려이다. 13세 때 회암사의 광지선사에게 출가하여 충숙왕 12년(1325) 승과에 급제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삼각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지었고, 충목왕 2년(1346) 원나라에 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았다. 귀국 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를 미워하여 소설사(小雪寺)로 돌아가 수행하였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국사로 청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1381년(우왕 7) 우왕이 다시 국사로 봉했다. 1382년 소설사로 돌아와 입적하였다.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선사의 선시(禪詩) <수미암에 올라>이다. 금강산 수미봉에 있는 수미암은 신라 원효가 창건한 인적이 거의 없는 수도처였다. 인근에 바위가 층층이 쌓여 석탑처럼 보이는 50미터쯤 높이의 수미탑이 있고, 왼쪽에는 영랑봉이 있다 한다. 선사는 빼어난 절경인 금강산 수미암의 정경과 스님의 모습을 통해 산속 선가의 모습을 운치 있게 묘사하였다.
小庵高竝廣寒鄰 월궁(月宮) 광한전만큼이나 높디높은 작은 암자
白髮禪僧獨坐眠 백발 선승 홀로 조름에 겨운 듯 앉아있네
醉霧酣雲迷甲乙 안개와 구름에 덮여 속세에서 벗어났으니
開花脫葉紀時年 피는 꽃 지는 잎에 세월을 가늠할 뿐
一雙鶴老茶烟外 차 달이는 연기만 한 쌍 학인 듯 피어오르고
萬疊峯回藥杵邊 첩첩 산속엔 약 찧는 소리만 들리네
聞說此中仙境在 듣자니 이런 곳을 신선세계라 말하는데
吾師無乃永郞仙 우리 스님이 바로 영랑선인이라오.
광한전은 선녀 항아(姮娥)가 산다는 달 속에 있다는 상상 속의 궁전이다. 수미암은 광한전만큼이나 높은 절벽에 자리한 깊은 산 속 자그마한 암자로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다. 선 수행 속에 스님은 속세의 일은 잊고 신선이나 먹는 산초와 차로 연명하며 자연에 묻혀 살고 있다. 그저 찻물 끓이는 연기로 거처를 짐작할 뿐이다.
중국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 779~843)는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네(尋隱者不遇)>라는 시에서 선인들의 일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松下問童子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 스승님은 약초 캐러 가셨다하네
只在此山中 다만 이 산중에 있으나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 알지 못하네
道佛家의 삶은 철저히 자연과 순응하였다. 의식주에 매달리는 속인과 달리 자연 속에 하나가 되어 오로지 참선이요 틈나면 약초를 캔다. 구름이 가득한 산속은 속세와 분리된 완벽한 신선세계이다. 은자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자연과 일체가 된 선인 같은 우리 스님. 그대로 영랑선인이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원효가 수미암에서 수도하던 어느 해 겨울 밤 늦도록 경전을 읽다가 화롯불을 꺼뜨렸다. 추위와 피곤으로 깊은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인기척에 눈을 뜨니 홍안에 수염을 드리운 사람이 화로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으니 수미동에 사는 신선 영랑으로, 덕망 높은 대사의 수행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 하였다. 둘은 서로 존경하며 깨달음의 이치를 논하고 산수도 즐겼다. 원효는 자기를 도와준 영랑신선을 잊지 않으려고 그가 사는 봉우리를 “영랑봉”이라 하고, 함께 경전을 논하던 수미암 왼쪽 봉우리를 “영랑대”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는 설화가 전한다.
험난한 바위산을 올라 수행을 해도 얻기 어려운 득도의 경지. 그 고뇌의 삶 속에서 득도의 벗으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한 차. 그들에게 차는 구도의 수단이자 귀중한 섭생의 물질이었다. 폐 속까지 서늘하리만큼 향기로운 차를 만들어 먹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꾸는 인생의 반려였다. 선승들은 자신의 처지와 산사의 외로움을 차로 다스리며 시로 표현하였다.
고려 사회 선승들의 삶의 갈등과 고뇌 속의 자기 도야와 현실 극복은 바로 탈속의 좋은 시적 제재가 되었고, 차는 이 속에서 선승의 벗으로, 수도의 중요 제재로 귀중하게 다뤄지면서 숭고한 깨달음의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이 속에서 차시는 禪의 다른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
가을의 행복은 차와 차향처럼 꾸밈없이 언제 어디에서든 슬쩍 다가든다. 언제 어디서든 차 한 잔속에서 나를 바라보게 한다. 속세를 떠나 살지는 못해도 속세를 벗어난 평안을 꿈꾸는 나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