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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훈요십조에서 불교를 장려 (훈요1조 :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교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개경에 법왕사, 왕륜사, 흥국사 등 10개의 사찰 건립 |
광종 |
승과제도 실시(승려의 지위를 보장) 국사와 왕사제도 실시(국가와 왕실의 고문 역할)→승려의 정치관여 -혜거(제1대 국사), 탄문(왕사) 논산 은진에 관촉사 석불 완성 교 ∙ 선 대립 통합시도(정치세력의 분열을 해결, 국가적 안정을 도모) |
현종 |
연등회, 팔관회의 부활 대장경의 조판을 시작 |
문종 |
흥왕사 건립, 승려에게 별사전을 지급 사원에 면세, 면역의 특권을 부여 |
이런 정책들은 백성들이 다투어 출가해 승려의 수가 증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사원은 왕실과 귀족들을 위시하여 신도들의 토지까지 기증을 받아 많은 농장을 소유하게 되자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로부터 받아들인 조(세금)를 모아 다시 서민들에게 저리로 대부하는 장생고를 설치 운영하게 된다.
장생고 설치의 명분은 자본을 대여해주고 그 이자수입으로 불전공양과 가람의 보수, 그리고 병자와 빈민의 구제 사업으로 쓰도록 한다는 것이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오직 이윤추구만을 위한 고리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듯 사원이 경제적·물질적으로 세속화되자 불교계의 타락과 승려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다.
이렇게 막대한 부와 재산을 모으게 된 사원은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한 자위수단으로 무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승병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들 승병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군사력으로 사용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귀족들 간의 정권쟁탈전에도 관여하는 등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도 많이 나타났다.
종파의 정리
신라 말기의 5교 9산이 계승되었으나 나중에 5교 양종으로 발전하였다. 교종은 경전을 중시하고 교리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종파로 화엄종을 중심으로 균여가 정리하였고, 선종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좌선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로 혜거가 법안종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5교9산-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실상산문, 가지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 사굴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성주산문, 수미산문]
고려는 교종과 선종을 동등하게 병립시키면서도 교종 우위의 정책을 썼다. 광종때 국가적 안정을 위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지양하기 위한 교선합일의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천태종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또한 무신란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기운이 나타나게 되는데 선종인 조계종의 발전이었다.
처음 무신정권이 성립하자 불교계에서는 격렬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왕실·귀족의 비호를 받고 문신과 결탁된 교종중심의 사원세력이 무신란으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종사원의 반란은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쇠퇴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신해 선종세력이 흥하게 되며 그 중심이 조계종이다.
천태종 |
조계종 |
고려중기 숙종 |
고려후기 신종 |
화엄종으로 교선을 통합, 교종중심 |
조계종으로 교선을 통합, 선종중심 |
대각국사 의천(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 |
보조국사 지눌 |
교관겸수, 지관-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 |
정혜쌍수, 돈오점수-참선의 강조 |
왕실,귀족의 비호 |
무신정권의 정책적 비호 |
중심사찰: 국청사(개경) |
중심사찰: 송광사(수선사) |
정화운동: 요세의 백련결사(강진 만덕사) |
지눌,혜심의 수선사결사(수선사) |
조직만을 통합한 불완전한 통합으로 의천 사후 쇠퇴 |
선교일치의 완성된 철학체계 완성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토대 마련 |
귀족 중심의 불교 |
민중을 저변으로 한 종교 기반 확대 |
몽골 간섭기에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들어오면서 폐해가 많아져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으로 재정의 낭비가 컸다. 또한 승려들의 토지겸병과 고리대금업·상업행위·군역도피의 소굴 등으로 그 부패가 심하여져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고려 불교의 키워드
대장경 : 외적 퇴치의 호국불교, 불교의 교리에 대한 정리와 불서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초조대장경, 속장경, 재조대장경을 조판했다. 이는 인쇄 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고려불상 : 고려의 불상은 신라의 불상에 비해 투박하고 크다. 그 이유는 불교가 왕실과 수도의 중심에서 벗어나 지방호족이나 백성중심의 전국적 확산과 토속신앙과 결합된 다양하고 거대한 불상을 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다수의 수요가 조각의 우수성의 감소로 이어졌다.
장생표 : 장생표는 사찰이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수조권을 행사하던 토지와 여타의 토지를 구별하기 위해 그 경계지역에 세웠던 경계 표지이다. 통도사의 경우 이 장생표가 12개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 불교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과 사원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알 수 있다. 또한 절이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연등회 : 본래 석가탄신일에 연등을 켜는 행사로 신라에서부터 이미 행하여지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이를 국가적인 행사로 확대하여 매년 정월 대보름에 시행하다 이후 2월 보름에 각 지역 단위로 거행하였다. 개경에서는 왕실의 주도 아래 태조 왕건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고, 지방에서는 지역 대표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발전과 지역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개최되었다. 연등회는 지금도 우리나라의 멋진 전통으로 이어져 불교에서 가장 큰 행사로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팔관회 : 신라 시대에 전몰 병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거행되었으나 고려에 와서는 매년 11월 보름에 중앙과 지방의 대표자들이 왕궁에 모여 단합을 확인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다.
불교는 민간신앙과도 결합하여 승려들은 무복, 풍수, 도참을 통해서 불교와 아울러 이것으로 민심을 좌우했다. 교화사업과 구호사업에도 나서서 병자에게 약을 주고 치료하였을 뿐 아니라 곤경에 있는 자들을 많이 구호하였다. 승장이라 하여 건축·조각·단청·기와를 만드는 데 솜씨를 보이거나 유명한 고려자기에도 공헌이 있은 듯하다. 불경을 간행함으로써 각자(刻字)로 인쇄문화에 공헌하였고, 삼국시대에 이어 승병의 활약도 컸다.
이와 같이 좋은 면이 있는 반면에 좋지 못한 일면도 있었으니, 많은 토지와 종들을 거느리고 대지주의 행세를 하였고, 땅에서 나는 소득 외에 양조(술)·축산·고리대금으로 축재하는 경향도 있었다. 또 많은 경비를 들여 걸핏하면 절을 짓고, 불교행사를 마련한 것은 고려가 기울어지게 된 원인의 하나였고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억불숭유”정책의 발단이 된다.
불교의 흐름
시기 |
내용 | |
고려초기 |
태조: 훈요10조, 연등회,팔관회 |
5교9산의 대립이 계속되는가운데 광종때 5교양종으로 정리 |
광종: 승과제도 | ||
의통,제관: 중국에 건너가 천태종 부흥시킴 | ||
의천: 교종중심의 각 종파 통합 | ||
고려중기 |
화엄종과 법상종 중심의 귀족불교가 번성 |
선종은 제3종단으로밀림 |
무신정변 |
지눌: 조계종의 성립, 교종을 억압하려는 무신정권의 후원과 신앙결사운동의 결과 돈오점수, 정혜쌍수 |
조계종이 정책적으로 지원 교종은 탄압 |
혜심: 조계종 계승, 유불일치설 주장 | ||
원간섭기 |
신진사대부의 척불론 제기 |
라마불교, 인도불교 등이 유행 |
조선 |
억불숭유 정책 |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억불책이 강화되었으나 왕실이나 부녀자 층을 통하여 근근히 신봉되었다. |
도첩제 실시(태조) | ||
척불론(정도정의 불씨잡변) | ||
사원의 토지와 노비 몰수(태종) | ||
세종: 선,교 양종으로 통합 정리 | ||
궁중과 민간의 불교신앙으로 명맥 유지 | ||
개화기 |
억불정책에서 벗어남 | |
을사늑약 이후 |
일본 불교에 예속 | |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불교의 자주성회복과 근대화 운동추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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