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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보리향(菩提香)
[이송희 시인의 호남의 시와 시인] [19] 정영주 서해의 절절한 삶의 빛깔을 만나다
서해, 저 독한 상사
정 영 주
정영주(鄭映周·1952년생, 본명 정복임) 시인이 성장한 곳은 강원도 묵호다. 강원도에서 전라도 광주까지 꼭 두 시간이 걸린다는 남편의 말에 속아 결혼을 했다는 시인. 광주에 둥지를 튼 지도 어느덧 삼십 사년째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 고래 뱃속 같은 동해의 소금기와 빈 운동장에서 받아먹던 '햇빛 밥상'의 슬픔이 촉촉하게 번진다.
한동안 그의 마음은 묵호를 떠나지 못했다. '온통 욕지기질로 헐떡이는 생선들'을 경매했던 '어달리' 선창가의 새벽과 '바람만 무성한 문짝도 없는/아버지 집'('아버지의 도시1'), 삶을 위해 '밤도 내다 팔아야 했'던 묵호의 허기진 골목들은 상처와 그리움으로 시인의 발목을 잡았다.묵호에는 한평생 '석탄 가루로 분칠해 대는 재앙의 바람'으로 떠돌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있다.
'아버지가 오셨다 바람으로 나가면/어머니의 배는 동해의 달처럼'('아버지의 도시3') 부풀어 오르고, '그때마다 어머니 젖무덤에선…탱탱 불어난 검은 젖이/꿀처럼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래도 시인에게는 '아무리 소금을 뿌려도/펄펄 살아나는 가난'('아버지의 도시5')한 도시 묵호가 '아무도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도시이자, 생의 뿌리인 것이다. 이렇게 동해만 고집하는 시인에게 다른 얼굴의 절절한 삶과 애정이 있음을 일깨워 준 계기는 전북 부안 변산반도 바닷가에서의 찰진 사랑이다.
시집《말향고래》(실천문학사, 2007)에 들어 있는 '서해, 저 독한 상사'는 동해와 비슷한 바다를 찾아 늘 떠돌았던 시인에게 호남을 정인(情人)으로 각인시켜 준 변산 모래바다를 무대로 하고 있다. 시인의 차바퀴가 모래바다에 빠졌다.
이빨도 없는 물렁한 모래가 질기게 바퀴를 잡고 놓아주질 않는 것을 시인은 그동안 서해에 맘 주지 못한 죄라고 생각한다. 그 죗값으로 그는 독한 뻘 모래가 가슴까지 치고 올라와 심장에 불을 지피며, '내 몸에 두지 않는 길 하나'를 여는 순간을 감내해야 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 나온 서해에서 시인은 자신을 끌어안기 위해 제 속이 타들어간 줄도 모르는 모래의 여린 속살과 슬픔을 본다.
밀어 낼수록 지독하게 달라붙는 서해의 모래알과 검은 뻘로 누운 독한 상사의 흔적은 그렇게 시인의 몸을 붙든다.어린 시절 동해가 독한 세상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서해는 현재의 절절한 삶 속에서 만나는 벌거벗은 슬픔을 보여준다. 시인의 기억은 호남 구석구석을 돌아 마침내 어머니의 조상인 기대승에게 닿는다.
제 핏줄이 호남과 깊은 연이 닿아 있음을 생각하며 그는 심포항과 모항을 거쳐 수만리, 지실마을, 소쇄원, 무등산을 잇는 호남의 풍경들을 다시금 둘러본다.'가는 햇빛 손가락에 돌돌 말아서/국수처럼 후루룩'('다락방1') 마셨던 유년의 중심에는 늘 '입도 귀도 눈도 틀 속에 박아 넣고 평생/자식들 생계를 꿰맨'('소리의 유산') 어머니가 있다.
'어미가 남긴 조각보를' 기우며 시인은 세상이 주는 모든 고통을 바늘로 이겨낸다. '모래 폭풍 뒤의 고요'('무등산')를 만나 여기저기 다친 산을 오르며, 그는 오늘도 촘촘하게 누군가의 상처를 꿰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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