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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동쪽임금_최동군
딸 : 아빠, 여기는 온통 놀이공원시설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곳에 무슨 숨은 역사가 있다는 거죠?
아빠 :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장면이 바로 이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담겨있어.
딸 : 삼전도요? 바로 옆에 호수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옛날에는 여기가 여의도처럼 섬이었나요?
서울 삼전도비(사적 제 101호)는 1636년 조선 인조때 발생한 병자호란 당시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항복 및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청나라의 전승비 겸 송덕비로 1639년에 세워졌는데, 비석의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로 되어있다.
여기서 삼전도(三田渡)는 지명으로 1950년대까지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던 한강상류의 나루터였는데 <삼밭나루>로도 불렸다. 배로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는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 <나루>는 <나르는 곳> 이라는 말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나루>를 한자로 쓰면 그 규모에 따라서 작은 것은 도(渡), 진(津)이라고 했고, 좀 큰 것을 포(浦), 그리고 대규모의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고 했다. 지금도 서울 한강에 지명으로 남아있는 광진(광나루), 동작진(동작나루), 송파진(송파나루), 양화진(양화나루), 노량진(노량나루), 마포, 영등포 등이 그러한 예이다. 삼전도(三田渡)와 같이 도(渡)를 사용한 유명한 나루는 외국과의 교역으로 이름난 고려 개경 인근의 벽란도(碧瀾渡)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강원도 쪽으로 가려면 <광진>을 거쳐가야 했고, 한양에서 여주, 충주를 거쳐 경상도 쪽으로 갈때는 <삼전도>로, 한양에서 호남 전라 쪽은 <동작진>으로, 그리고 한양에서 강화쪽은 <양화진>으로 각각 연결이 되었는데, 특히 <삼전도>는 한양에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영남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히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삼전도비가 우리 민족 최대의 치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유도 바로 병자호란때 인조가 농성중이던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곳이 바로 청태종의 본진이 있던 이 곳 삼전도였기 때문이다.
딸 : 도대체 병자호란때 삼전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죠?
아빠 : 그 때의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아빠가 중요한 부분을 메모해 왔으니 읽어줄께.
< 1637년 1월30일 인조실록 >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上, 임금)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上)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중략) … 상(上)이 단지 삼공 및 판서, 승지 각 5인, 한림(翰林), 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 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던 날 임금의 옷인 곤룡포도 입지 못하고 남색으로 염색한 옷을 입고 나갔다. 일체의 의전이나 의장도 없이 일국의 국왕으로서의 위엄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때 인조를 따르던 사람은 삼공 즉,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5인, 그리고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인데, <주서(注書)>는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관직으로 국왕의 하루 일과, 지시, 명령, 각 부처의 보고, 각종 국정회의 및 상소 등을 모두 기록한 <승정원 일기> 를 관장하였고, <한림(翰林)>은 예문관에서 실록의 사초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직으로 보통 <사관> 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주서>와 <한림>이 나란히 따라갔다는 것은 국가의 공식 기록담당관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을 뜻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전도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1637년 1월30일 인조실록(계속) >
… (중략) … 상(上)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上行三拜九叩頭禮)
딸 : 인조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다구요? 정말 치욕적이네요!
========= 여기서 잠깐 =============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라고도 하는데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청의 가경제 재위당시(1796∼1820) 영국 대사 윌리엄 애머스트는 삼배구고두례를 거부하여 가경제의 알현이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날로 퇴경당하여 귀국한 일화가 있다.
사실, 청나라는 항복 의식으로서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항복에 대한 교섭과정을 거치면서 그나마 삼배구고두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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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더 치욕적인 장면이 있을까? 조선이라는 일국의 국왕이, 그것도 평소에는 우리가 그들을 여진족오랑캐 라고 멸시했고, 그들은 우리를 늘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변방 오랑캐의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략하게 <상(上)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지만,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에는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일 배요!” 조선 왕이 아홉 개의 층으로 된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중략)…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청나라의 사령이 다시 소리쳤다. “이 배요!” 조선 왕이 한 계단씩 오르며 칸(汗, 청 태종)에게 절을 할 때마다 강화에서 끌려온 사대부 부인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조선 왕은 칸 앞에 꿇어앉았다.
이때 인조의 이마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려야 했으며, 예를 마친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는 기록도 있다.
< 1637년 1월30일 인조실록(계속) >
… (중략) … 상(上)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 (중략) …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삼배구고두례를 마친 후 한참을 기다리던 인조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그대로 남아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소파진 나루터에서 인조가 배를 타려는데 신하들이 단 두 척의 배에 서로 먼저 오르려고 임금의 옷까지 잡아당기는 장면은 조선이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힘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 1637년 1월30일 인조실록(계속) >
상이 건넌 뒤에, 칸(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이 대목은 1896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쿠오 바디스(Quo Vadis)>를 생각나게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사도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할 때, 로마를 떠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한 말인 라틴어 <쿠오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에서 따온 것으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뜻이다. 결국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동시에 수많은 기독교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 백성들이 울부짖으면서 인조에게 한 말인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을 우리는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과 정치권력자들 때문에 병자호란 후 죄없는 우리 백성들, 특히 여자들(예로부터 남남북녀라고 해서 청나라 군대의 침입경로에 있었던 평안도, 황해도는 미인이 많았다.) 수십만명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서 노예로 살았고, 집안이 부유한 소수의 사대부 여자들만이 몸값을 지불하고 난 이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사대부 여자들을 조선에서는 어떻게 대했는가? 대부분이 정조를 더럽힌 여자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즉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고, 이는 곧 <화냥년> 이라는 욕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 정조를 잃은 이들은 바로 귀향하지 못하고 청의 사신들이 묵어가던 객관(홍제원)이 있던 서대문 밖에 머물렀는데, 이때 국가에서 해 준 조치는 겨우 객관 개울에서 목욕을 하면 그것으로 정절을 회복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는 말뿐이었다. 그 개울의 이름은 널리 구제했다는 뜻으로 넓을 홍, 구제할 제를 써서 홍제천(弘濟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딸 : 그 정도 치욕을 당했으면 인조도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에요.
인조가 최소한 청나라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나중에 소현세자가 청나라 볼모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건강한 상태의 세자가 2달만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서 죽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에서의 볼모생활 당시 국제정세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소현세자가 인조앞에서 청나라와 서양문물에 호의적으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소현세자 주변에서 발생했던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인조가 장남인 소현세자를 독살시켰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인조는 청나라에 굴복한 사실을 가리킬 때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下城)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딸 : 그런 치욕적인 역사를 기록한 삼전도비를 없애버리면 안돼나요?
아빠 : 아무리 치욕의 역사라 해도 우리의 역사인 만큼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반성하고 배워야 해. 그것을 한자성어로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하지.
삼전도비에 대한 우리의 트라우마는 대단했다. 그래서 고종임금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없어지자 삼전도비를 한강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건져내어 세워놓았고, 해방후 1955년에 문교부는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다시 땅에 매몰시켰다. 그러나 1963년에 대홍수로 인해 다시 비석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송파구 석촌동 석촌공원에 옮겨졌다.
2007년 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비를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범인 백모씨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삼전도비 몸체 앞쪽에 ‘철’ , '370' 뒤쪽에 ‘거’ , ‘병자’ 라는 글자를 써 놓았다가 경찰의 수사끝에 붙잡혔다. 당시 경찰은 사건현장에서 `병자 370` 이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뒤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의 유사 사건을 검색한 끝에 사건에 동일차량이 사용된 사실을 확인하고 CCTV 등의 단서를 토대로 백씨를 추적, 검거했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백씨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치욕의 상징인 삼전도비를 철거하거나, 위정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청와대로 이전해야 한다` 고 줄곧 주장해 왔으며, 1차 범행후 추가로 삼전도비에 '청와대로' 를 표기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경찰수사가 시작된 것을 알고 포기했고, 그 대신 경기도 파주의 인조왕릉(장릉) 앞에 설립된 사당을 훼손할 계획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검거되었다.
이런 갖은 수모를 겪은 삼전도비는 이후 문화재청의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약 30여m 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한편,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후, 조선 조정은 청으로부터 자신들의 전승기념비를 세우라는 청천벽력같은 명령을 받았다. 그것도 비문을 직접 조선이 만들고 청의 승인까지 받으라는 조건이었다. 그 수모와 치욕을 당한 것도 천추의 한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비석에까지 새겨 후손에게 길이길이 남기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던 인조는 조정에서 글을 잘 쓴다는 몇몇 신하들에게 비문을 지어 올리라는 어명을 내렸다.
어명을 받은 신하들 중 일부는 일부러 글을 치졸하게 쓰는 등의 방법으로 빠져 나갔지만 당시 학문의 최고권위 기관인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 벼슬을 하고 있던 이경석의 글이 1차로 채택되었다. 이경석의 초안 역시 사실에 대한 서술위주로 간략하게 되어 있었지만 청나라에서는 그것을 보완해서 다시 지어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경석은 처음에는 보완하기를 거부했지만 인조가 조선의 운명이 이경석의 글에 달려 있으니 제발 제대로 보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이경석은 하는 수 없이 초안을 보완하여 비문을 완성했다.
이경석은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글을 배운 것을 크게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경석은 나라를 위해서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그 수치스런 일을 감당한 것이다. 나라를 위하는 이경석의 사람됨은 훗날 또다른 사례에서도 드러났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이 북벌을 계획했지만,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의 밀고로 북벌이 청나라에 알려졌을 때,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임금과 문무백관을 겁박하는 그 앞에서도 `북벌은 효종임금과는 전혀 상관없고 모두 영의정인 자신의 책임` 이라고 주장해서 스스로 죄를 뒤집어 쓰고 `영불서용(永不敍用: 죄를 지어 파면된 관원을 다시는 임용하지 아니하던 일) 이라는 처분과 함께 백마산성에 감금되기도 했다.
딸 :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비석에 쓰인 글자는 한자도 아닌 이상한 글자에요. 아랍 글자인가?
삼전도 비는 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3개의 문자로 표기했다. 비의 앞면에 왼쪽에는 몽고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로 새겼고, 비의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겼다. 이처럼 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문자로 표기한 유명한 예는 로제타석(Rosetta Stone) 을 들 수 있다. 로제타석은 BC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돌인데 같은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알려진 고대 그리스어를 기초로하여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던 돌이다.
딸 : 아빠, 병자호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 좀 더 이야기 해 주세요. 네?
아빠 : 병자호란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곳 보다는 남한산성으로 가서 하는 것이 제격이지. 자, 그럼 이제 남한산성으로 가 볼까?
웹진에 실린 원고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