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홀로 재기에 도전
MBC <특종 TV 연예>의 송창의 PD와 SBS <독점연예정보>의 정상일PD는
내가 데뷔했을 때부터 워낙 많이 사랑해 주셨던 터라 출연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귀국한지 한 달만에 나는 운 좋게 TV를 통해 팬들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컴백무대가 아니었기에 특별한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 가슴은 방송중 남모르게 무척 두근거렸다.
TV에 출연하고 나는 모든 잡지사 기자들 앞에서 컴백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때가 2월 중순쯤 이었다.
기자회견때는 쉽게 넘어가는 질문도 있었지만 다소 당혹케 하는 소리도 들렸다.
"팬을 버리고 미국에 간 심정은 어땠는가" "예전의 인기를 다시 찾는다는 것이 가능한가"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많았지만 나는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나의 자신 있는 행동 때문인지 나에 대한 기사들이 생각보다 훨씬 좋게 나와 기분이 좋았다.
3월 들어 한국음반과 계약 얘기가 오고갔다.
물론 그때까지도 나의 컴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얘기들이 연예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리 예상했던 일이라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한국음반과의 계약이 거의 체결될 때쯤인 3월 하순부터 나는 컴백의 기초 작전인 노래수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장르의 노래를 불러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나이도 있고 해서 예전에 했던 음악에서 벗어나지 않은 젊은층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장르를 결정하지 못한 나는 우선 곡을 모아보고 그 곡들 중에 좋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이때부터 5월말까지 나는 작곡가들과 만나면서 곡을 부탁하러 다녔다.
컴백 앨범이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성숙해야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는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났다.
그래서 이럭저럭 모은 곡이 60여 곡이나 되었다.
앨범준비를 위해 무던히 애쓰던 나에게 작곡가 박강영씨와 작사가 박주연씨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선곡은 물론이고 음악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거의 매일 박강영씨와 박주연씨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 가요계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내가 활동할 당시보다 훨씬 음악적 수준이 높아졌고 또 실력있는 벌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등등.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각오를 하면서도 "후배들과 순위경쟁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다.
박강영씨와 박주연씨의 음악적 조언을 받은 나는 60여곡의 노래가운데 9곡을 골랐다.
60여곡 모두가 작곡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은 알지만 1장의 앨범에 수록할 노래를 선별해야함은 당연했다.
작곡자들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내 이미지에 맞는 곡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가 고른 곡들이 예전의 내 노래스타일을 그리 많이 벗어나지 않은 것들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6월 24일 나는 드디어 녹음작업을 시작했다.
사실 가수는 녹음할 때만큼 황홀한 시간이 없는 것 같다.
항시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 부르다 녹음 때는 전혀 새로운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쾌감 같은 것이 있었다.
르네상스 호텔옆 한국음반 스튜디오에 처음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너무 가슴이 설레었다.
역시 나는 가수로서 살아가야 하나보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데뷔때 느꼈던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음반 스튜디오는 48채널의 최신설비를 갖추고 있어 좀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녹음을 시작해 9월초 믹스다운을 마칠 때까지 모든 작업에 다 참여했다.
1분 1초도 아까웠다.
그만큼 내가 이번 음반에 신경을 썼던 것이다.
만약 음악적으로 퇴보한 냄새가 난다면 쏟아질 비난소리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는 작업에 나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스튜디오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생활이 2달 이상 계속되었으니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편안하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국진씨와 함께 앨범자켓 촬영과 디자인을 위해 7월초 제주도로 갔다.
녹음에 신경을 썼기 때문인지 3박4일간의 제주도여행이 그리 달콤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연애시절 남몰래 한 밀월여행이 생각나는 것이 아닌가.
제주도로 간 나는 재킷사진을 찍는 틈틈이 국진씨와 함께 다시 한번 구경을 다녔다.
귀국해 지금까지 하루도 편한 마음으로 살지 못했던 나의 감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사진 찍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려고 애를 썼다.
90년 둘이서 떠난 밀월여행을 생각하며 명승지를 돌기도 했고 바닷가에 나가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마음속 한구석에는 이번 컴백앨범이 잘되어야 떳떳할 텐데 하는 우려를 씻을 수는 없었지만 제주도에서의 4일간만이라도 잊고 싶었다.
재킷사진을 모두 찍고 서울에 다시 올라온 나는 그전보다 더욱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는 모든 일은 매니저가 처리하고 나는 단지 노래만 부르면 만사 OK였으나 이번 앨범은 하나에서 열가지 모두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했다.
곡 섭외하고 녹음실 잡고 재킷디자인하고 노래부르고...
앨범 한 장이 나오기까지 정말 이렇게 어렵고 잡다한 일이 많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전까지만 해도 앨범 한 장에 4천~5천원을 비싸게 느끼기도 했던 나는 그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비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9월초 녹음을 다 끝낸 나는 마치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듯 기운이 다 빠졌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약간 통통하던 얼굴이 앨범작업을 끝내고는 홀쭉해졌다.
녹음을 마친 나는 홀가분한 마음에 박강영씨 부부, 박주연씨 그리고 국진씨와 함께 태국여행을 떠났다.
4박5일의 시간은 비록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즐거움 그자체였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쫑파티 형식을 띤 여행인 만큼 모두가 조용한 휴식을 원했다. 하루를 방콕시내에서 보낸 나는 3일간 파타야 해변으로 가 수영, 선탠, 그리고 잠자는 일을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88년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로 데뷔한 이래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일없이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나는 10월7일 나의 노력과 땀이 스며있는 4집앨범 <삶은 한번 뿐인 걸요>를 손에 쥐게 되었다.
아무 도움 없이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마음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