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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공수증파, 74분 늦게 정웅소장에 통보
선발대 19일 오후4시46분 서울 출발 정호용 전교사 맴돌며 "현지 진두지휘"
전두환보안사령관·주영복국방장관등 대책회의서 공수부대 추가 파병지시
19일 제11공수여단의 광주투입은 공수부대 투입 이상의 의미와 엄청난 의문점을 제기한다.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와 함께 광주에 투입된 제7공수여단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18일에는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주요대학에 공수부대가 동시에 투입되고, 반면 19일을 기해 광주에 또 한편의 11공수여단이 투입된 것이다. 유독광주에만 [공수부대]가 추가투입된 것이 바로 그 의문점의 [핵]을 이룬다.
조선대에 군장풀어
이와 관련 군은 [계엄군이 배치된 전국 31개대학과 1백36개 보안목표 가운데 유일하게 전남대에서 시위가 계속된데다 18일 시위확대로 공수부대 증파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개최 이후 계속된 논란에도 불구, 가해자들은 이같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시위 초동진압을 위해 공수부대 추가투입이 이루어졌을뿐 사전 각본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수부대를 추가투입, 강력한 진압을 펼칠 경우 시위가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민들이 맞대응, 공수부대원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피해자측의 입장은 가해자측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과잉진압 시민대응 공수부대 증파 무차별 살상이라는 흐름이 그 어떤 의도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대응을 미리 예견한 광이진압이 아니었느냐]는 주장이다.
이날 투입된 11공수여단, 이날밤 증파된 제3공수여단의 투입배경에도 의문을 던지고 있다.
현지 기관장 및 지휘관들의 판단으로는 공수여단을 추가파견 할만큼 우려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증파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8일 정호용특전사령관은 전교사에서 윤흥정 전남·북계엄분소장 (전교사 사령관겸임) 김기석부사령관과 회의를 가진뒤 상경, 국방부에서 주영복국방부장관 이희성계엄사령관 전두환보안사령관 등과 대책을 논의하고 공수부대 증파 지시를 받는다.
이날 밤 동국대에 머물고 있던 11공수여단장 최용준장은 정호용특전사령관의 방문을 받는다.
최준장은 서울 출신으로 육사(12기)를 나왔으며 그뒤 사단장 특전사령관 등을 거쳐가 광주에 도착한 것은 이보다 앞선 오후 5시50분. [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에 따르면 C-123기 5대에 분승한 장교 45명, 사병력이 오후 5시50분 광주공항에 도착해 오후6시30분 조선대에 군장을 푼것으로 기록돼 있다.
31사단장 정웅소장 11공수 3개대대 추가파병을 통보받는 시간은 오후6시. 오후7시에는 잔여병력이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한다.
장교 1백2명, 사병 6백96명이 열차객차 13량과 화차 2량에 나눠타고 서울을 출발해 19일 새벽 0시50분 광주역에 도착한다.
공수부대원을 실은 열차는 대전에서 잠깐 쉬고 광주를 향해 질주해왔다. 이들이 조선대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50분, 상황종료시간은 2시10분를 받았다]고 술회한다.
11공수여단은 61, 62, 63대대 등 3개 대대로 구성돼있었으며 안부응 이재원 *창구중령이 당시 대대장이었다. 1개 대대는 4개 지역대 (지역대장 소령)로, 1개 지역대는 4개 지대 (지대장 대위)로 나눈다.
활동중심은 지역대. 11공수여단은 [작지 80 - 3]에 의거, 31사단장의 작전지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정웅사단장이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관련자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정식 지휘체계는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남·북계엄분소장 겸 전교사령관→정웅 31사단장→최웅 11공수여단장. 당시 진사령관은 실제작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20일까지는 이같은 지휘체계가 정확히 유지됐다는게 최웅등의 주장이다.
정호용특전사령관은 정식 지휘계통에 들어있지 않았으며 월권을 한적도 없고 따라서 지휘상 책임이 없다는 설명이다.
최웅은 88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호용의 중심역할론을 부정한다. [19, 20일 11여단은 31사단장 정웅소장의 작전통제하에 받았다. 정특전사령관은 당시·전교사에 내려와 있었으나 지휘권이 없었다. 21일에는 31사단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전교사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식으로 지휘체계가 바뀌었다.]
정호용도 내무부장관 시절 국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지휘선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정호용은 11공주여단이 추가투입된 19일 비행기 편으로 전교사에 도착, 25일을 제외하고 줄곧 전교사에 머물렀다.
진압작전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최웅등은 특전사령관의 역할이 작전에 대한 조언을 하는 데 그쳤다고 주장한다.
본인도 기회있을때마다 중심역할론을 부정해왔다. 당시 31사단장 정웅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11공수여단이 31사단장에 배속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특전사령관의 직접명령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21일 지휘체계가 바뀌기 이전에도 이미 지휘 및 명령계통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사실상 지휘계통 이원화가 예고돼 있었다]는게 정웅의 주장. 일례로 19일 유혈진압조차 정확한 상황을 제대로 보고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웅은 [실세에 의한 지휘체계]가 존재했었다고 말한다.
19일 공수부대 추가투입 배경과 실질적인 명령계통은 5·18의 정확한 이해와 평가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다. 그러나 관련당사자들이 일을 다물거나 거짓말을 되풀이할 경우 공전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상태다.
이날 11공수여단은 7공수여단과 임무를 교대하는 한편 7공수여단 35대대를 배속받아 작전을 개시한다.
대대별작전지역은 61대대 공용터미널, 62대대 장동지역, 63대대 계림동지역, 7여단 35대대 고속터미널 등이다.
압축식 진압적전 펴
11여단이 본격적인 진압작전을 시작한 것은 오전 10시. 아침 61대대는 시내 주요파출소와 시위예상지역을 점령하고 62,63대대는 30여 대의 트럭에 분승, 시내로 [위력시위]를 나선다. 시위군중의 기를 꺾어 놓겠다는 계산에서였다.
[작전명령 - 화려한 휴가] (윤재걸편)에서 당사 하사관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한 공수부대원은 수기를 통해 [그토록 오랜기간 동안 영내 대기와 극심한 충정훈련, 며칠씩 취침도 제대로하지 못한 상태로 학생이나 시민들에 대한 증오심, 특히 10·26이전 부마사태가 특전사 병력의 강력한 대응조치로 진압되었다는 자부심 등으로 충만되어 있는 이 병력이 광주시 전역을 무력시위한다는 것은 지휘관의 판단착오였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무차별 유혈진압, 과잉진급이 예고돼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전사 작전일지]에 따르면 대열이 충장로에 이르렀을 때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만나게 되고 충돌한 것으로 돼있다. 시위군중은 돌과 화염병으로 대항했으며 공수부대원들은 [하차]명령과 함께 압축식 진압을 개시한다.]
공수부대의 진압은 18일보다 훨씬 강도 높은 것이었다.
이들이 주둔지인 조선대로 복귀한 시간은 밤11시. 작전에 투입된 오전 10시부터 13시간동안의 활동상은 다음회부터 과잉진압 및 시민들의 저항을 연재하면서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