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비단과 향료를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단과 향료를 구해서 어마어마하게 부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당시에 아주 높은 아주 영특한 현자가 그가 사는 곳에 나타났습니다.
그 장사꾼은 현자에게 물으면 더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좋은 비단과 더 좋은 향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현자가 더 좋은 비단과 향료를 마련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현자가 그 장사꾼에게 이 앞에 동쪽에 있는 산위에 올라가서 하루밤만 지내면 최고의 비단과 향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비단과 향료를 구하는 사람은 산위에 올라가서 삼일씩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비단과 향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사는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현자를 찾아왔습니다.
장사꾼이 현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내가 현자님의 말을 듣고 3일씩이나 기다렸는데 비단과 향료를 하나도 발견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왜 안보이냐. 보석으로 쫙 깔리지 않았느냐?" "비단과 향료는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요?"
"아 너는 비단과 향료만 찾았느냐?" "나는 비단과 향료보다 더 좋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그가 올라갔던 산은 다이아몬드가 널려 있던 산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단과 향료만 구했기 때문에 다이아몬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단과 향료만 구했기 때문에 비단과 향료보다 나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집착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지나면서 많은 것을 보지만 아무런 기억도 없이 아무것도 보고 들은 것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2-30분 산책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본다.)
사람이 병이들면 이것만 치료되면 나는 나을 것이다에 집착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죽지 않을 것으로 알고 삽니다. 깨어 났다는 것은 나는 죽는 다는 것입니다. 생각만이 아니고 실제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한 일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면 다 할 수 있습니다. 한시간이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내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 마음만 돌리면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두고 두려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고 하면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하나님은 묻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다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물음에만 바로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집착해 있다보니 이러한 하나님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은총을 못느끼고 삽니다.
지금 우리게 예수를 믿는 것은 깨달은 자로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4: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근심걱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죽음 다음까지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왔냐고 하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를 걱정합니다. 내 건강은? 나의 장래는? 내 자녀는? 내 남편은? 내 아내는? 걱정대학교 두려움대학 근심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차원에 있으면 걱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본성은 걱정입니다. 근심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조각조각난 생각입니다. 관이 없습니다. 통일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맥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구름떠가듯이 다닙니다. 하루에도 맑은 하늘이었다가 흐리다가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담을 했습니다. 혹지 제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모르겠어요? 저는 아내와 아주 사이좋게 사랑하면서 잘지내는데, 글쎄 말한마디에 마음이 싹 싸늘에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정신병자 아니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차원에 사는 한 마음의 본성은 근심과 걱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차원에서 살것이 아니라 믿음차원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차원에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생각세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느낌세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근심세계에 걱정세계를 넘어 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름밑에서는 비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구름위 항상 빛이 있는 곳으로 올라 가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나를 믿으라" 참 좋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다는 말이나 나를 믿는 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이 나가 아니다. 이것은 가슴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실상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인간은 다 바라고 있습니다. 실상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바램이 본성입니다. 사실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을 보면 "아 그렇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속에 있는 것은 내가 사실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세계, 있음속에 머무르지 않고 생각과 느낌세계속에 머물기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속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 사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전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아엠에프를 왜 당했습니까? 실상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350억 달라가 있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보니 실상은 50억달라밖에 없었습니다. 350억달라는 숫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엠에프의 환란을 당한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치료가 됩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죽는다." 사실은 다 압니다. 하지만 사실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만 받아 들이기 때문에 전혀 악죽을 사람처럼 삽니다. 우리는 죽게 됩니다.
죽음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죽음을 연습한다고 하는 것은 영생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연습하다보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내가 어떻게 깨어 살았는가?가 탄로가 납니다.
죽음앞에서 유치해져서는 안됩니다. 조금만 아프면 두려워서 벌벌떠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 죽음을 명상해야 합니다. 어떤 죽음이 될 것인지 죽음연습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합니다.
내 안에 연결되어 있는 사슬, 연들을 끊는 연습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음이 없다는 나를 확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땅위에서 어떻게 살것인가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실상인 실제인 하나님을 진짜 나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상이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의 있음세계를 믿어합니다. 그리고 나를 믿어야 합니다.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 가짜 내가 아닌 진짜 변하지 않는 영원한 나를 믿어야 합니다.
마음차원에서 믿음차원으로 가야 합니다. 마음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가야 합니다. 구름아래서 구름위로 가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서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가야 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영입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그 만남을 우리가 어떤 차원에서 가질 것입니까? 내 아버지 집은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 집은 단칸 방이 아니고 100평도 훨씬 넘는 맨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을 만한 집이 없습니다. 단칸방입니다.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한 방에만 있어야 합니다. 방이 많은 사람은 자유합니다. 아버지 집은 차원이 많습니다. 2차원에 있는 사람은 2차원으로 생각차원에 있는 사람은 생각차원으로 느낌채널에 있는 사람은 느낌차원으로 있습니다. 진리차원의 사람은 진리 차원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이나 보통 말하는 종교의 세계에는 못들어 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규범과 율법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정치세계에서도 도덕성을 따집니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는 그런것과 상관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흉악범에서 성자까지 창녀에서 수녀까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집이다. 이것이 영성의 세계입니다.
진정한 종교의 세계 영성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것은 내안에 흠이없고. 약점하나 없고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만 사귀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사귄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귀는 사람이 정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만 사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렇지 않했습니다. 누구까지 다 사귑니까?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 같은 세리, 창녀도 사귀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도도한 도덕적인 사람같이 말쑥한 신사같다가, 어떤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보여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의 세계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우리 가슴속에서입니다. 누구는 좋은놈, 누구는 나쁜 놈, 누구는 빼고 누구는 안되고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다 사귀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 친해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의 세계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다가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바뀌고 들리는 귀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느끼는 가슴이 달라지고 인생을 보는 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1-2절 참 좋은 말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죄인도 있을 곳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말했을 것입니다. 3-4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다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단칸방입니다. 이것은 되고 저것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술먹는 사람은 안되고 술 안먹는 사람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은 다 모든 분들을 다 받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을 염려하지 말고 영생의 삶을 지금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매여 두려워 하고 염려하고 괴로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육신의 것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사는 자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료 진리요 생명이다.
5절 도마가 묻습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누가진리입니까? 무엇이 생명입니까? 무엇이 길입니까? 내가 진리이고 내가 생명이다. 내가 길입니다. 나 있음 이것보다 진리이고 이것보다 확연한 길이 있습니까? 우리가 남의 길을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남의 길(예수, 바울, 선생이나 목사)을 보면서 내가 가는 길의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지 그들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걸음을 배울 때 부모들이 나처럼 걸으라고 말합니까? 나처럼 꼭같이 걸으라고 합니까? 안그렇습니다. 그저 부모 걸음 걷는 것을 보면서 자기의 걸음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기 아버지처럼 똑같이 걷는다고 말합니다. 결국은 하나님도 걸음을 걸으면 우리처럼 걸으실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걷는 걸음을 보고서 배웠을 테니까?
내가 나인 것을 확인하는 것은 개성입니다. 개성이 무엇입니까? 나의 본성이다. 소질과 재능이다. 그 속에서 나의 나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나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은 몸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본성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내가신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자유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합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알 수 있는 비결은 나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나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눅15장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먹을 것이 많은 터인데"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7절 나를 알면 아버지도 압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르 알게 되는 것입니다. 3차원과 4차원이 대립되고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대립됩니다.
8절 9절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몇 년동안 함께 있으되?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다. "네가 너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는데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를 보니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신인합일입니다. 달걀을 보면 닭이 있고 닭을 보면 달걀을 볼수 있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나를 보아놓고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정신없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나님 보아야지 내가 하나님 만나야지 기도하는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볼 수 없습니다 보았다면 그것은 환상입니다.
나를 보아야 합니다. 죽음이 없고 나 있음으로 있는 나, 상처받은 적이 없고 태어나 본 적이 없고 아파본 적도 없고 나이를 먹어 본적도 없어서 죽음이 없는 그런 나 있음을 보아야합니다. 그래야 아하 이것이 생명이고 삶이고 이것이 부활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 부활이고 생명이구나 내가 무엇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본성이 부활이고 생명이로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잘못가고 있는 것 중에 80-90%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에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신비가들의 삶은 자기 탐구로 갔지 하나님 탐구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면서 하나님 찾으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왜 저 사람을 어떻게 미워하는지,왜 미워하는지 왜 저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탐구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어떤다는 것은 말입니다. 말로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일하신다.
10절 이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는 아버지 밖을 떠나본적이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본적이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본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우리 안에 몸안에 물이 들어가고 공기가 들어간다. 우리안에 불이 있습니다. 그래서 36,5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물과 불을 만나면 상극인데 우리 몸안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만나서 생명의 피가 된다. 몸이 차도 안되고 너무 뜨거워도 안됩니다.
물이 너무 빠져 나가면 탈수현상이 일어나 죽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신기한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12절 자기를 일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의 일을 합니다. 자기일을 하는 사람은 쉽습니다. 남의 일을 하는 사람은 어렵습니다. 내일 하러 가는 사람은 출퇴근이 없고, 투쟁이 없습니다. 남의 일을 하는 사람은 투쟁을 한다. 교회일이라고 하면 힘이 듭니다. 하지만 내 일이라고 하면 쉽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 깨달은 사람은 자기를 믿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 그 내 이름이나 예수의 이름이 같습니다. 이미 구하기 전에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하는 것은 마음차원에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삽니다. 실제로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어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슬퍼하라 쉬지말고 걱정해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렇게 행하는 마음이 내가 아닙니다. 마음 넘어에 사실 있음이 나입니다.
마음 곧 생각이나 느낌은 이 지구를 방문하는 동안에 그 나를 실현하라고 있는 수단과 도구입니다. 수단과 도구는 잘 부려먹어야 합니다. 그것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노예가 되니까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잘 부려 먹을 때 내가 나인 것이 좋고 내가 나 인 것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질과 기능을 잘 살려야 합니다. 그 안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원한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