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계 작가선 26
채정순 수필집
붉은 투구를 쓰고
판형 248쪽 15cm× 21cm 신국판 , 정가 12,000원
ISBN 979-11-85448-15-2 03810
발행일 2015년 5월 22일
발행처 / 수필세계사
출판등록 2011. 2. 16(제2011-000007호)
700-823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23길 2
TEL (053)746-4321 FAX (053)793-8182
■ 차례
제1부 호미
호미 14
양파 20
첫사랑 25
붉은 투구를 쓰고 32
갱죽 37
공 43
신발 1 49
신발 2 53
신발 3 57
토란 61
굿 66
개미허리 71
제2부 황사
황사 76
슴베와 낫놀 80
기근(氣根) 84
술병 89
쓴 박 95
고마리 99
비행기 카페 104
타래난초 109
실새삼과 딸기나무 114
청일점 119
학 124
제3부 직단
직단(織斷) 130
경면주사(鏡面朱砂) 137
석양 증후군 142
매니큐어 149
봉정암 길잡이 153
불청객 158
자박김치 163
밉쌀 168
착상 174
착각 178
복날 182
오해 187
제4부 풀밭
풀밭 192
솥뚜껑 198
성가정 퍼즐 그림 맞추기 203
비등점 209
땜질 216 삼 221
빈 택시 226
끼니 230
숭례문 235
기원 240
가래떡과 밀떡 245
갓바위의 가피 248
발문│그의 언어를 탐한다 홍억선 253
� 책 머리에 /채정순
하얀 옥스포드 천에 해바라기꽃 몇 송이가 붙어 있었다. 수예품 재료인데 꽃잎은 노란색, 이파리는 초록색, 씨 부분은 갈색으로 매우 사실적이었다. 각 부위에 맞는 색실로 아플리케 수를 놓고 아우트라인은 흰 구정불란사로 솔잎 뜨개를 해야 하는 앞치마감이었다. 이미 완성된 앙증맞은 앞치마 샘플이 교실 흑판 중간에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천성이 급하고 적극적인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수예 진도가 잘나갔다. 한데 주위의 다른 애들은 뭘 하는지 굼벵이나 진배없었다. 일의 진척을 감안한 선생님은 이 작품이 월말 고사 가정 성적에 들어가니 완성시켜 다다음 주일에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수예 시간은 일주일에 단 한 시간뿐이었다. 나는 며칠 만에 다 해 놓고 애들은 왜 꾸물대고 선생님은 또 말미를 그리 오래 두나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할 것이 없어진
그다음 수예 시간에 심심해서 자연 옆과 뒤를 보게 되었는데 그제야 애들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유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한 땀 한 땀 하는 바느질도 나보다 정성을 들이지만 솔잎 뜨개를 다박다박 꼼꼼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바느질 부분은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 정도로 실력이 비슷한데 뜨개질은 판이하게 달랐다. 일사천리로 해치운 나의 레이스는 바늘 코를 길게 빼어 엉성한 뜨개와 뜨개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 것 같은 데 비해 제자리 곰배라 생각했던 애들 것은 참빗의 살처럼 촘촘하고 짤막해 살갑기까지 했다.
그제야 ‘이게 아니구나? 내가 왜 이리 손 솜씨가 형편이 없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구나 나에게 학점 일 점은 자존심은 물론 장학금 유무와도 무관하지 않은 존재였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레이스를 풀어서 새로 뜨기 시작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코를 짧게 빼어 간격을 좁게 하려 애를 써도 도대체가 되지 않았다. “발뒤꿈치도 못따라 간다”는 성경 구절만 자꾸 떠올랐다.
뜨고 풀고 뜨고 풀고를 반복하다 보니 흰 실은 때가 묻어 꾀죄죄해지고 수조차 잦은 손자국으로 후줄근해져 스스로에게 실망해 비감에 젖었다. 드디어 검사 받는 날, 수예 시간은 마지막 시간표에 들어 있었다. 용의주도하게 완성시킨 애들은 점수를 잘 받고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집으로 갔다. 나는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엉성하나마 그대로 있었으면 기본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수예 점수를 온전히 놓치면 큰일이라 눈앞이 노랬다. 반 애들도 내가 저러고 있다고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이미 교정엔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나는 나닥나닥 때 묻은 실로 처음 일사천리로 나가던 가당찮은 실력을 내고 있었다. 그때 내 앞자리 친구가 제 것을 주며 선생님이 퇴근을 한다며 빨리 가 보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제가 검사를 받으러 가니 원래는 작품에 도장을 찍어 주고 선생님 노트에 점수를 기록하는데 선생님이 짐을 다 싸 버려서 제 작품에는 도장도 찍지 않고 노트에만 적더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 고맙다 할 겨를도 없이 교문을 향해 냅다 뛰었다. 앞치마를 찬찬히 살펴보던 선생님이 눈을 한껏 흘겼다. “너는 요렇게 손끝이 야무진데 좀 열심히 해 진작 검사를 맡지.” 귀찮은 표까지 냈다. 그래도 당신 백에서 노트를 찾아내어 A점수를 주고 가셨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제 물건을 받을 생각도 않고 하교한 그 친구 덕분에 나는 부모님께 여전히 효도하고 내 위상도 지켰다.
인생 가을에 접어들어 수필에 몸을 담았지만 내 글쓰기가 영락없는 그 수예품 꼴이었다. 글의 문맥은 되나 몰라도 엉성한 게 내가 봐도 참 한심했다. 수필은 누가 대신 써 줄 계제도 아니고 또 써 줄 사람도 없었다. 안되는 게 있다는 걸 몸소 체득한 나는 그때가 환기되어 수필을 미련 없이 접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내 안이 문제였다. 특별한 사건이 있거나 어떤 감정에 부딪힐 때마다 끄적거리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사실 뒤늦게 글방에 몸담게 한 주범도 기실 이 꿈틀거리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고개를 드는 욕망을 달래며 수족관 바닥 밑에 엎드려 있는 가오리처럼 꿈적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지도하는 교수님께서 어떻게 된 것이냐며 송수화기로 흔들어 깨웠다. 소원해서 용기를 주는 차원이겠지만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으니 자꾸 써 보라는 말에 슬며시 일어났다.
울고 싶은데 때리는 격이 되어 일단 한번 부딪혀 보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리하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다. 살면서 쌓인 이야기를 하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고 문우들의 글을 접하면서 마음을 숙성시키고 성숙되는 계기가 되었다. 밀도와 깊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워도 질은 높아지지 않고 더 너절해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글을 문우들은 혼자 말을 한다고 그리고 어렵다고 고개를 흔든다. 얼마를 가야 가을 들판의 황금빛 나락처럼 탱탱하게 영글는지 모르겠다.
먹은 나이 덕에 이야기는 될지 몰라도 세상에 내어 놓기가 두렵지만 용기를 낸다. 약간의 재미와 공감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2015년 만춘에 채 정 순
발문/홍억선(수필가)
그의 언어를 탐한다
수필가 채정순의 출현은 미상불 수필 문단의 흥밋거리가 될 것이다. 그의 연금술만큼 수필의 언어를 공깃돌 굴리듯 어르고 달래는 이가 작금에 드문게 사실이다. 체험의 우물에서 깊숙이 두레박을 감아올리는 그의 품새는 유연하기 그지없고, 한 바가지씩 쏟아 내는 그의 자연수는 역시 맛깔스럽다.
우선 그의 문학적 은유가 얼마나 과감한지는 작품집의 제목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는 ‘붉은 투구를 쓰고’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무척 만족한 표정이다. 세상살이에서 덤벼드는 날파리 떼들을 물리치기 위해 투구를 쓰고 들로 산으로 시장으로 쫓아다닌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투구’라니. 투구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이겨 내려고 머리에 덮어쓰는 철모자가 아니던가. 사실 그에게서 투구는 ‘붉은 양파 자루’의 다른 이름이다. 한 줌 채소거리를 얻고자 텃밭을 궁싯거리고 있노라면 달려드는 날파리들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양파 자루를 덮어쓰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텃밭은 세상이요, 날파리는 앞길을 가로막는 시련과 고난의 은유가 아니겠는가.
양파 자루를 쓰니 금방은 눈앞이 어른어른했지만 조금 있으니 보일 것은 다 보였다. 그날을 시작으로 양파 자루는 나의 일 동반자가 되었다. 양파 자루를 쓰고 있으면 좀 불편하지만 눈앞이 실제보다 붉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양파 자루를 착용하고부터 긍정적인 사고가 내 뇌리에 자리 잡았다. 힘든 일이 닥쳐도 시야를 넓혀 살펴보면 어느 한 곳에 수습할 방편이 존재할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채정순의 수필이 가지는 장점은 가독성 높은 해학성에 있다고 하겠다. 「갱죽」은 불이 난 집에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불을 끈다는 간단한 화소다. 불길을 잡고 한숨을 돌린 후에 잡동사니를 넣고 끓인 갱죽을 맛나게들 나누어 먹었는데 알고 보니 경황없이 들고 나온 뒷간 똥통으로 길어 온 물로 죽을 끓였다는 에피소드다. 이 해학의 화소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나눈다는 끈끈한 집단의 정을 바탕에 깔고 있다.
「영광의 신발」역시 코믹터치의 성장 수필이다. 그 어렵던 시절 에나멜 장화를 얻어 신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글은 시작한다. 날은 쨍쨍한데 기어이 장화를 신고 학교에 갔더니 운동장 조회를 하는 날이다. 더구나 학기말고사 시상식을 한다지 않는가. 전교생이 보는 앞에 마른 날 장화를 신고 단상에 올랐으니 그런 웃음거리가 없었으나 전교 수석의 행복감으로 가득했으니 그 또한 역설이 교접된 ‘영광의 신발’이 아니겠는가.
해학 수필이 부러운 것은 해학은 훈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타고나는 성품의 반영이 크기 때문이다. 해학은 촉급한 성품에서 발현되지 않는다. 앞뒤 좌우의 넓은 시야로 긴장과 이완을 조절해 가는 여유가 있어야 생산되는 것이기에 좀 더 다르게 분류되는 것이다.
채정순의 수필은 아무래도 뛰어난 수사력이 그 격을 높인다 하겠다. 수필이 개성의 문학이라고 하는 까닭도 제각각의 차별화된 언어의 직조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채정순은 그만이 체득한 풍성한 언어를 바탕으로 감히 쫓아올 수 없는 특유의 문장 세계를 구축해 놓았다. 아래 문장도 굳이 뽑아 본 것이 아니라 대충 주섬주섬 주워 본 것들이다.
-따비밭 사이로 난 길은 슬쩍 밟힌 뱀처럼 구불텅하다. 산봉우리는 뽀얀 안개 너울을 쓰고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한 발 한 발 가풀막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에 잠자던 나무들이 부스스 일어난다. 코끝에 닿은 공기가 삽상하다. ―「기근」
-창밖은 하루를 걸어온 해가 지려고 서산마루에 농익은 홍시처럼 앉았다. 마지막 불씨를 피워 올리는지 저 하늘 끄트머리의 구름밭은 상처 부위처럼 불그레하다. 산 그림자 따라 냇물에 빠져 있는 은빛 별이 내게 꾸어 놓은 부대 자루 같다고 속삭인다. ―「석양증후군」
-병은 날아와서 기어간다는 말이 요즘 실감이 난다. 시숙이 무시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을 들락거린다. 하루에도 수차례 깜빡거리며 한기가 들어 죽는 시늉을 한다. ―「굿」
수필은 만학(晩學)의 문학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이순을 넘어 나온 채정순의 수필은 저렇게 당당하다. 앞에서는 그의 언어적 수사력을 중심으로 몇 자 부연했으나 사실 채정순의 글은 진중한 사색적 체험이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 역사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경면주사」나 유미적 수필인 「직단」 그리고 「석양증후군」과 같은 사회적 수필들의 일군은 우리 독자들께서 책을 통해 꼼꼼히 되새김질해 볼만한 작품들이다.
수필집 『붉은 투구를 쓰고』를 계기로 그동안 숨겨 두었던 그의 언어들이 수필계를 힘차게 휘두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홍억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