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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개관-사회경제구조
고려는 엄격한 신분제사회였다.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다. 양인에는 관직을 가진 양반관료와 향리 서리 기술관 군인 등의 하급관리, 그리고 일반민이 속하였고, 천인에는 노비와 화척 등이 속하였다. 양반관료의 일부는 고위의 관직을 대대로 차지하여 문벌귀족화하였으며, 이들이 실제로 고려의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문벌귀족은 그들의 현실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음서제도(蔭敍制度), 공음전시(功蔭田柴) 같은 장치를 마련하였다. 하급관리와 서리 향리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지배층의 일부를 이루었다. 양인의 대부분은 농업을 위주로 한 생산활동에 종사하였으며, 국가에 대하여 조세 공물 력역(力役)의 납부 의무를 졌다. 백전(白丁)이라 불린 농민 이외에 상인과 수공업자도 양인에 속하였고, 군현민과 차별을 받은 향소부곡(鄕所部曲) 등의 특수행정구역 민(民)이 양인의 최하층을 이루었다. 천인의 주류는 노비였다. 이들은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는 비인격적 존재였으며, 전 인구의 상당 비율이 노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비는 소유처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거주형태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되었다.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특히 양인과 천인의 구분은 엄격하여 천인이 양인이 되는 것은 철저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향리의 자제가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것처럼 양인 내부에서 개인적인 지위 상승은 법제적으로 보장되었고, 실제로도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무인정권(武人政權) 이후에는 천인 출신의 고위 관료가 생겨나는가 하면 궁핍해진 국가재정의 보충책으로 시행된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를 통한 신분 상승이 일어나고, 농장의 발달로 양인이 천인화하는 현상도 광범위하게 발생하여 고려전기의 신분제는 상당히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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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월대
만월대(滿月台)는 고려의 거의 전기간 왕국이 자리잡고 있던 유적이다. 원래 이 궁궐안에 망월대라고 불리우던 궁전이 있었는데 후세 그 어느 때인가 이 궁궐 전체를 만월대(滿月台)라고 부르게 되었다. 송악산(松嶽山)을 배경으로 그 남쪽기슭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려 왕궁은 궁성과 황성을 합하여 125만 평방미터, 궁성은 약 39만 평방미터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만월대(滿月台)의 특징은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 경사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러 개의 건물들이 하나의 건축군으로 묶어지고 건물들의 지붕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왕궁에는 황성의 정문인 동쪽의 광화문과 궁성의 정문인 남쪽의 승평문, 그 뒤에 연이어 세운 신봉문, 창합문 등 많은 문이 있었다. 정면 7간 약 27미터, 측면은 4간 약 11미터으로 된 신봉문터에는 지금도 3개의 문길을 가진 2층 문루의 장엄하고 화려하였던 옛모습을 상상케 하는 커다란 주춧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만월대(滿月台)의 중심 축대 위에는 회경전(會慶殿), 장화전(長和殿), 원덕전(元德殿)과 그 밖의 건물들이 규모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맨 앞 회경전(會慶殿)의 축대 정면에는 높이 7.8미터 되는 커다란 돌계단이 놓여있다. 만월대(滿月台)의 기본정전인 회경전터는 동서 약 60미터, 남북 약 100m의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막혀 있다. 만월대(滿月台) 중심축대 동쪽에는 동궁터, 서쪽에는 건덕전터, 침전터 등 수많은 건물터들이 있다. 만월대(滿月台)의 뒤 언덕에는 정자터들이 남아 있다. 황성의 성벽은 후삼국때 태봉국(泰封國)이 쌓았던 발어참성(勃禦塹城) 성벽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 안을 따로 가로막아 궁성 성벽으로 삼았다. 고려시기 천문 기상을 관측하던 유적으로 유명한 개성 첨성대(開城瞻星臺)는 여기 황성 서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만월대(滿月台)에서는 기와와 벽돌, 치미, 괴면, 기둥밑 장식 등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다. 유물들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것을 계승한 점들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고려의 괴면과 기둥밑 장식은 발해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고려 왕궁터 만월대(滿月台)는 고려시기 궁성제도와 건축기술의 발전된 높이와 함께 왕궁의 규모와 배치, 건물들의 평면구조와 건축 부재 등을 통하여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고려 백성들의 지향과 감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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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충렬왕과 충선왕 부자의 왕위 갈등
변발의 고려 태자, 원의 공주와 혼인하다
1274년, 원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과 혼인한 충렬왕은 25번째로 고려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처음으로 치러진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고 역대 권신들에 억눌려 오던 왕실의 지위는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결국 이를 기점으로 고려는 원의 종속국이나 다름 없는 처지가 되어 이후 많은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본 정절에 힘을 보태라' 원나라의 제안
충렬왕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 첫번째는 원나라가 일본 정벌의 뜻을 밝히며 고려에게 함께 군사를 보낼 것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일본은 원나라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사신과 서신을 보내어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원 황제는 마침내 군사를 동원하여 일본을 평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에 고려가 정벌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선박의 조선과 함께 충분한 군사를 협조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 아닌 제의를 한 것이다. 달리 방도가 없는 고려는 원의 요구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1차 원정, 하카다 항의 전투와 철군 결정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을 실은 9백여 척의 배가 일본의 하카다 항에 도착했고 배가 해안에 닿기가 무섭게 그 안에서는 성난 기세를 띤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군의 격렬한 전투는 어둠이 내리는 사각까지 이어졌고, 처음에는 양 쪽의 기세가 비등한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반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일본군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밤이 되자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남은 군대의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은 하카다 항을 점열하고 많은 포로를 획득하며 전투를 승리로 끝냈다.
일본을 보호한 바람, 신풍
날이 밝아오자 흘돈은 병사들에게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라고 일렀고 어제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병사들은 다소 의아해 하긴 했지만 이내 지휘관의 명령에 따랐다. 바로 그 때 엄청난 파도와 함께 거대한 바람이 험악한 기세로 연합군의 배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모든 함대가 태풍으로 인해 침몰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미쳐 조치를 취하지 못한 배들은 자기들끼리 부딪혀 뒤집어지고 파도에 묻히는 등 그 손실이 결코 적지 않았다. 태풍과 폭우가 지나간 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급히 배를 돌려 본토로 돌아갔고, 다시 벌어질 전투에 두려워하고 있던 일본군은 '적군이 돌아가고 있다' 는 전령의 보고를 받은 뒤 해안가로 나와 정말로 배가 저 멀리 떠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크게 안도했다. 예상치 않게 신풍을 만나 본토로 돌아간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5년 뒤 다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나, 이 때도 역시 5년 전과 비슷한 태풍을 만나 온갖 고초를 겪고 배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원나라가 품었던 일본 정벌의 꿈은 두 번의 시도가 끝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이루지 못한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또한 원다라를 도왔던 고려도 별 다른 성과 없이 국력을 소진하는 것으로만 끝나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기도 했다.
충렬왕의 외교, 원나라의 압박
충렬왕은 영토 보존에 대단히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탐라를 비롯해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다른 영토들도 적지 않게 돌려 받았고, 이는 원나라에 대한 그의 외교 수완이 녹녹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는 충렬왕의 요구를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점령하고 있던 일부 영토들을 고려에 반환해 주는 대신, 원 세조는 고려의 관제에 대해 간섭을 하며 고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충선왕의 개혁 시도와 좌절
충렬왕이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난 후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여 저마다 힘을 다하여 300개에 걸친 수 많은 크고 작은 개혁인들을 내 놓았고 충선왕 역시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려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허나 연이은 원의 간섭과 폐위, 복위로 인해 충선왕이 고려 내에서 일으켜 보려던 개혁들은 비록 그 시도는 좋았으나 중간에 여러 차례의 난관에 부닥친 뒤 결국에는 본래 지니고 있던 힘을 잃고 스스로 좌초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고, 고려는 여전히 원나라의 부미국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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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공민왕의 반원자주화 정책과 신돈의 개혁
부원세력 기철과 권겸
원나라 황제의 둘째 황후이며 태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누이동생 덕에 지금껏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고려안에서 권세를 누려온 기철을 점차 원나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음에 심기가 불폈했다. 그와 같은 처지인 권겸 역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반원정책을 펼치며 개혁을 외치는 왕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실패로 끝난 역모
왕이 베푸는 연회장에서 기철과 권겸, 노책은 왕을 살해할 계획을 꾸민다 마침내 왕이 방심하고 있다 생각하여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던 병사들에 의해 이들의 계획은 탄로나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오랫동안 고려 내 부패의 온상이던 부원세력의 중심은 기철 일파를 제거한 뒤, 공민왕은 다소 마음 편하게 지지부진하던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원의 연호를 중지하고 원나라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를 다시 되돌리는 등 공민왕의 반원자주화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
내부의 분란을 꽃피기 전에 알아 채고 잠재웠나 했더니 이번에는 외세의 침입이 공민왕의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다. 원나라 군대에게 쫓긴 홍건적이 퇴로를 한반도로 삼아 고려를 침범한 것이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대 승을 거두었으나 2년 뒤 다시 쳐들어온 홍건적이 끼친 피해는 예상 외로 막대해서 마냥 외침을 물리쳤다는 것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난은 평정했으나 고려 역시 쉽게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국력에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민왕의 개혁에도 부득이하게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또 한번의 역모, 흥왕사의 변
홍건적이 물러 가고 나라가 잠잠해지자 마치 순환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또 다시 내부 분란이 일어났다. 역모를 꾸미는 주범은 다름 아닌 김용으로, 그는 공민왕이 태자 시절에 원나라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을 때 곁에 시종을 들던 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처음에는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그였으나 그 마음이 간사하여 시기심이 많고 심약하여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을 바꾸는 성품이 끝내 화를 부르고 말았다. 권력에 눈이 멀어 왕을 시해하기로 결심한 그의 계획은 환관 안도치에 의해 탄로나게 되어 안도치가 공민왕의 복장을 하고 대신 칼을 맞아 왕을 구하였다.
신돈의 개혁
가까운 신하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공민왕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것은 왕후인 노국공주와 한 명의 승려였는데, 이 승려의 이름은 신돈이라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왕후의 내조와 맞먹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공민왕은 항상 그의 존재를 든든히 여겼다. 두 사람의 정성 어린 격려로 다시 새롭게 마음을 먹은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봉하고 본격적으로 긴밀한 의견 교환을 통해 많은 난관들에 부딪쳐 흔들리던 개혁 정책에 다시금 박차를 가했다.
꿈을 잃은 공민왕, 신돈을 내치다
하지만 이처럼 뜻을 같이하며 견고하게 유지되던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왕후인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변화를 가장 먼저 실감한 사람은 신돈이었다. 이전까지 자기와 함께 밤을 새며 고려의 앞날에 대해 토론하던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릴없이 손수 그린 왕후의 그림만을 붙들고 낮이나 밤이나 술에 취해 있는 주정뱅이만이 남은 것이었다. 그런 공민왕에게 작언을 하는 신돈은 왕의 신임을 잃어 갔고, 그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반대 세력들은 바로 이 때다 하는 생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공민왕을 찾아가 아무래도 역모를 꾀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며 신돈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았다. 이미 판단력을 잃은 공민왕은 결국 신돈을 내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왕사는 쓸쓸히 유배지로 보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자신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꿈꾸던 두 사람을 모두 잃은 공민왕은 더 이상 지탱할 곳이 없어진 탓에 계속 휘청거리다 결국은 신하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신돈의 죽음으로 인해 고려는 다시 오지 않을 개혁의 꿈을 묻은 채 조용히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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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몽강화와 무신정권의 멸망
최씨 정구너의 종말, 최의의 죽음
최의는 60여년 동안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최씨 집안의 네 번째 집권자였다. 갈수록 뇌물로 관직을 사려는 소인배들이 최의 주위에 들끓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몇몇 대신들이 모여 대책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생일 축하 자리를 마련하여 최의를 불러내 암살하였다. 이렇게 김준과 임연 등 최씨 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대신들이 세운 최의 암살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수십여년에 걸쳐 지속되던 최씨 무신 정권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권력을 탐낸 임연, 김준을 암살하다
최의가 죽은 후, 김준은 원종을 도와 고려 왕실 복원에 힘을 쏟았다. 허나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임염은 최의를 죽이고 나면 그 권력을 손에 넣게 될 줄 알았는데, 김준이 자신과 전혀 다른 뜻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거슬리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임연과 아들 임유무는 김준을 암살하고 김준의 빈 자리를 꿰어 차고서 원종을 폐위시킨 뒤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원종은 자신을 도와주던 신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다시 그 힘을 잃고 쫓기듯 몽고로 피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종의 복권, 임연의 죽음
고려 조정에서 원종을 축출시키고 다시 강화도에서 항전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몽고에서 강하게 임연을 압박해 왔다. 몽고 사신의 협박에 결국 임연은 원종을 복귀 시키고 개경으로의 환도를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모든 기회를 놓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된 임연은 억울한 마음에 화병을 얻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혹시나 몽고가 자신이 원종을 폐위시킨 일로 책임을 물어 추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는 걱정까지 병이 되어 겹치자,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엄마 있지 않아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임유무의 죽음, 마침내 무신 정권의 막이 내리다
몽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한 원종은, 임연이 죽자 다시 본격적으로 개경 환도를 추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그 아들인 임유무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원종과 조정 대신들은 고심 끝에 임유무의 목에 현상금을 내 건 밀지를 그의 진영 안에 은밀히 보내었고, 뜻을 모른 몇몇 무관들은 임유무의 목을 베어 입궁했다. 임유무의 죽음으로 백 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고려를 좌지우지하던 무신 정권은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고, 원종은 드디어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는 데 성공한다.
배중손의 삼별초, 저항을 계속하다
임금을 비롯한 주요 대신들이 강화도에서 빠져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자, 몽고도 이에 크게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사태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지휘관이던 임유무를 잃고 잠시 혼란에 빠져 있던 삼별초가 새로운 지휘관의 지도 아래 계속해서 몽고에 대항하여 항전할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저항을 계속하며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 거처를 옮기며 저항을 계속 하였다.
배중손의 죽음
삼별초에게 날아븐 비통한 소식은 바로 고려 조정에서 삼별초 토벌을 위한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고려의 조정에서 파견한 군대라니 삼별초의 심정은 참담하였다. 진도에서의 전투에서 그들이 새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이 몽고 장수 홍다구의 손에 죽고, 삼별초의 사령관 역시 홍다구의 칼에 숨을 거두면서 진도는 함락되었다.
김통정의 마지막 저항, 끝내 진압된 삼별초
살아남은 삼별초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결국 고려 몽고 연합군이 다시 결성되고 이들이 탐라로 총공격을 펴니 제 아무리 죽을 각오를 하고 항전하던 김통정과 삼별초라 하더라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전투 중 김통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은 이들은 모두 포로가 되면서, 탐라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이던 삼별초는 끝내 고려 몽고 연합군에 의해 3년 간에 걸친 투쟁의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길고 긴 대몽 항전은 그 끝을 맺었고 고려와 몽고위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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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최무선의 진포대첩
최무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무관이자 무기발명가이다. 당시 화약은 전세계에서 중국만이 생산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제조법은 함부로 외부에 유출할 수 없었다. 최무선이 발명한 무기들을 이용하여 왜구를 섬멸한 진포대첩은 세계최초의 함포대전이었다. 진포는 현재 군산으로 추측된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156&mode=content&query=%C8%AB%B0%C7%C0%FB%B0%FA+%BF%D6%B1%B8&dircode=0
7.고려후기 복식
고려후기 몽고의 침입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걸쳐서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고, 29년간의 항전 끝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로 왕실이하 귀족, 양반계급에서는 몽고풍을 쫓는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복식에 몽고풍의 영향을 받게된다. 몽고풍의 영향을 받은 복식을 살펴보면, 개체호복(開剃胡服)과 원이 고려에 내려준 사복(賜服), 질손(質孫) 등이 있었다.
개체 변발 ( 그림 22 ) 은 몽고 특유의 풍속으로 머리 변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 땋아느린 것을 의미한다.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을 다녀올 때 변발호복(辯髮胡服)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令)을 내려 모두 몽고의 의복과 개체변발(開剃辯髮)을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원하는 일부 지식층만이 호응하였을뿐 일반 국민 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05030&mode=content&query=%B0%ED%B7%C1%C8%C4%B1%E2+%B9%AE%C8%AD&dircode=0
8.의천의 천태종 개창
1) 문벌귀족과의 결탁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에 대한 자각과 귀족에 대한 왕권 강화의 입장으로 경전 수집을 통한 속장경 간행과 천태종(天台宗) 개창으로 나타났다. 안으로는 원효(元曉) 계승, 밖으로는 송 불교의 다양함을 흡수하여 이념적 기반 마련과 노력으로 불교 통합을 시도하였다.
2) 천태종(天台宗)의 고려 불교적 정의
천태종(天台宗)이 교종인가 선종(禪宗)인가에 대하여는 양론이 있다. 김영수(金映遂)는 선종(禪宗)으로, 이능화(李能和)는 교종으로 보았으나 천태종(天台宗)에는 법안종계통 승려들이 대거 참여하여 중국 천태종(天台宗)과는 달리 선종(禪宗)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천태종(天台宗) 합류 거부하고 조계혜능(曹溪慧能) 이래의 전통을 고수한 선승들은 조계종(曹溪宗)을 자칭하였다.
3) 화엄종(華嚴宗) 의천(義天)
의천(義天)은 화엄종(華嚴宗)의 승려로서 경덕국사(景德國師) 란원(爛圓) 아래서 수업[화엄종(華嚴宗) 영통사(靈通寺)]하였다. 흥왕사(興旺寺)의 주석이었고 송에 가서는 화엄종(華嚴宗) 진수정원(晉水淨源)에게 배웠다.
4) 의천(義天)의 사상.
①당시의 화엄에 대한 비판
균여(均如) 등은 후생(後生)을 미혹한다고 비판하였다. 성교(聖敎)를 밝은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남의 보화(寶貨)만 세고 있다. 관(觀) 즉 실천 수행과는 유리됨으로써 경론(經論)에만 집착하여 관념적인 성격이 강해진 것을 비판하였다.
②이 비판 위에서 신라 화엄 재인식하여 의상과 원효(元曉)를 높이 평가하여 분황사에 가서 원효(元曉)에게 다과(茶菓)의 제전(祭奠)을 올리고 해동교주(海東敎主) 원효(元曉)보살 성사(聖師)로 극찬하였다.
③화엄(華嚴)사상 가운데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을 가장 중시하였다. 법계(法界)의 법문(法門)이 영원한 불법(佛法)인데 중인(衆人)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함. 정견(情見)이 부서지고 법계(法界)가 뚜렷이 나타나면 누구나 성불(成佛) 그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삼관오교(三觀五敎)였다.
삼관(三觀) : 법계삼관(法界三觀)의 약어(略語). 화엄에서 법계의 진리를 얻기 위해 닦는 3중(重)의 관계(觀界)
진공관(眞空觀) : 모든 법은 실성(實性)이 없어 유(有)와 공(空)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眞空)인 줄을 관(觀)함
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 : 차별 있는 사법(事法)과 평등한 리법(理法)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통(融通)하는 것임을 관(觀)함
주편함용관(周遍含容觀) : 우주 사이의 온갖 물건이 서로 일체를 함용(含容)함을 관(觀)함
오교(五敎) : 화엄의 불교 교판론(敎判論)으로서 소승교[小乘敎, 아함경(阿含經)] 대승시교[大乘始敎, 해심밀경(解深密經)] 종교[終敎, 능 가경(伽經), 승만경(勝蔓經)] 돈교[頓敎, 유마경(維摩經)] 원교(圓敎, 화엄경)
그러나 개혁 방안은 본질적으로 문벌귀족체제와 동일한 기반 위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전반적인 개혁을 추구하지 못하였고, 기층사회의 신앙면에 대하여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사후 각 종파의 분립과 대립이 더욱 극심해졌다.
천태종(天台宗) 개창 과정에서 선종(禪宗)은 거의 와해되었다. 가지산문에서 학일(學一)과 사굴산문에서 탄연(坦然)이 출현하여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 성장해갔으나 보수적인 추세에 함몰하였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465&mode=content&query=%C5%BA%BF%AC&dircode=0
9.수모목간의 한반도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송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제건(作帝建)의 아들로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世祖) 용건(龍建)이 송악의 남쪽에 새집을 창건하려고 하였을 때, 도선이 세조에게 영접되어 곡령에 올라 산수의 맥을 두루 살피고 위로 천문을, 아래로 시수(時數)를 살피면서 “이곳의 지맥은 임방(壬方)인 백두산으로부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하여 내락마두(來落魔頭)의 명당을 일으킨 곳이니 당신은 수명(水命)을 따라 수(數)의 대수(代數)인 육(六)의 제곱수 삼십육구(三十六區)의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代數)를 부응(符應)받아 명년에는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을 것이니 마땅히 왕건이라 지으라.”고 하였다(<<고려사>>, <世系條>)
여기서 “수모목간”이란 오관산, 송악 등 개경을 내맥(來脈)이 북방에서 발원하여 동쪽에 척량(脊梁)을 두고 이어진 맥세(脈勢)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점은 그 뒤 공민왕 6년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비기(秘記)를 인용하여 우리 나라의 방위적 토성(土性)을 “우리 나라의 지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그 형세는 수근목간(水根木幹)의 땅”이라고 설명한 대목과도 부합된다.
북쪽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을 등마루로 하고 있다는 것을 수모목간으로 표현한 것은 북고남저(北高南低),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한반도 지체구조를 지모상(地貌上)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형은 경동지괴(傾動地塊)로, 대체로 원산 - 서울을 연결하는 추가령지구대를 경계로 하여 남북 한반도는 그 지질과 지체구조 및 지형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형만을 고려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북한은 고도가 높고 험준한데 비해 남한은 고도가 낮고 산세도 비교적 낮고 평탄한 편이다.
결국 수모목간이란 말은 개경 내룡(來龍)의 맥세에 대한 설명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걸치는 지체구조를 이해한 말로 보아도 될 듯하다.
이와 같은 한반도 지체구조에 대한 파악은 신라말, 고려초기에 이미 국토를 조직적으로 보고자 하는 합리성이 깊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합리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국토공간의 중심적 위치를 한반도 동남단에 치우쳐 있는 경주로부터 중부지방으로 옮기고자 생각했던 신라말 선승들의 생각에서 잘 나타난다. 신라말의 선승들은 풍수논리를 당시의 시대상황과 접목시키고 보강하여 정치, 사회적 풍토를 새롭게 재편하고자 노력하였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2003&mode=title&query=%B8%F1%B0%A3&dircode=0
10.몽골5차침입
몽골의 5차 침략의 전개
1251년(고종38) 7월에 개최된 코릴타(Khurilta)에서는 바토(바투,Batu)의 지지를 받은 톨로이(톨루이, Tolui)의 아들 멍케(몽가, 蒙哥, Mongke)가 황제에 선임된다. 몽골의 헌종 멍케는 즉위 즉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 고종의 친조(親朝)와 개경에의 환도(還都)를 촉구했다.
예구(야굴, 也窟, Yegu)에 의한 몽골의 제5차 고려 침입이 개시된 것은 1253년(고종40) 7월의 일이다. 예구가 4차 침략을 지휘했던 아모간(阿母侃, Amugan)과 홍복원을 5차 침략에 대동한 걸 보면, 5차 침략군의 주력은 4차 침략을 담당했던 아모간과 홍복원 휘하 병력이었던 것 같다. 이들 몽골군의 1대는 7월 15일 대동강 하마탄(下馬灘)을 건너 동북변경(東北邊境)의 고화주(古和州, 영흥)지역으로 향했다. 강도(江都)정부는 몽골군의 내침에 대비해 갑곶강(甲串江)에서 수전(水戰)을 연습함으로써 강도 방어를 강화했다.
5차 침략의 몽골군은 1253년 7월부터 고려 침공을 시작해 이듬해 1월 일단 철수했다. 당시 몽골군의 내침 경로는 압록강을 건너 서해도로 남하한 종래의 경우와 함께, 동계(東界)로부터 진입하는 양면 침략이었다.
몽골군의 선발 부대
몽골군은 남하하는 과정에서 먼저 선발 척후(斥候)부대를 빠른 속도로 내려 보냈다. 8월 7일자 금교(金郊), 흥안(興安) 지경에서 우봉별초(牛峯別抄)에게 요격(邀擊)당한 몽골군과 8월 14일자 광주(廣州)에 출현한 척후(斥候)기 3백, 8월 말 전주(全州) 반석역(班石驛)에서 고려의 별초군에게 격살당한 척후(斥候)기 3백, 그리고 9월 9일 충주(忠州) 금당협(金堂峽)에서 격파당한 몽골군 등은 모두 이 선발 부대의 동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구의 몽골군
예구의 몽골군은 서경 및 토산(土山, 평남상원)을 거쳐 남하하던 중, 8월 12일 방호별감 권세후(權世侯)가 입보(入保)민을 지휘하던 서해도 양산성(?山城)을 함락해 철저하게 유린(蹂躪)했다. 이들은 개경 방면으로 남하하는 길을 취하지 않고 서해도에서 내륙의 길로 들어서, 중부 내륙의 요충, 동주(東州, 철원) 지역에 이르렀다. 9월 몽골군은 다시 춘주(春州, 춘천)에 이르러 고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9월 20일 성을 함락했다. 당시 춘주성은 안찰사 박천기(朴天器)의 지휘로 1차 침략 때의 철주성 전투를 방불케 하는 비장한 싸움을 전개했다.
몽골군의 남진 저지
철원, 춘천, 양근성(楊根城), 천용성(天龍城)을 함락시키고 남하한 예구의 몽골군이 충주에 당도한 것은 10월 10일 경의 일이었다. 몽골군은 이후 영남지역에로의 남하를 위한 전초 단계로 충주산성을 포위, 집중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방호별감 김윤후에 의해 지휘된 충주민이 70여 일간 성을 사수함으로써 몽골군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6478&mode=content&query=%B8%F9%B0%F1&dircode=0
소감: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중 가장힘든 숙제인것 같다. 일일히 이용어를 다른사람이 햇는지안햇는지를 따져보면서 힘들게 찾으니 참 죽을맛이였다. 그래도 새로운 단어들을 알게되어 뭔가 뿌듯하지만 잘보면 시간만 낭비하는 숙제같기도 하다. 숙제를 하면서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무작정 복사만 하면 끝나는 숙제이고 하니 이런숙제는 좋지않고 시간만 가는 숙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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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한군 용감하군요. 필요없는 숙제라는 내용을 당당히 소감에 밝혔으니 말입니다. 선생님도 이 과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초에 일찍 과제를 한 학생들은 내용을 읽어 보면서 여러가지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도 강요한군의 과제를 읽으면서 충렬왕과 충선왕의 갈등에 대해 눈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요한군이 읽어 보는냐, 읽어 보지 않느냐?에 있답니다. 과제를 늦게 하였기 때문에 그 만큼 힘든 것입니다. 다음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과제를 남들 보다 빨리 해 보세요. 겹치는 내용은 신돈이나 진포 등등 여러 개가 있지만, 그냥 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