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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위산(高位山:495M, 일명 남산)을 가다.
글 쓴 이 고 학 영
2월25일, 일어나니 주위는 어둑 어둑한데... 하늘은 잔뜩 찌푸린 날씨다.
조바심이 나서 일기예보를 들어보니 남부지방에 약간의 비가 온뒤, 낮에는 개일 것이라고 한다.
안도(安堵)의 숨을 내쉬면서... 서둘러 차에 오르니 한달여 만에 뵙는 님들이라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모처럼만에 나오신분도 계시고, 처음오신분도 몇분 보이신다.(33명)
이제 신정, 구정(설날)을 다 쇠고 나니... 올 한해도 3월이 눈앞에 와 있다. 오늘은 시산제(始山祭)를 겸한 산행이라 정회원님들의 참여가 많을 것으로 여겼는데... 전월(前月)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왕복 거리가 짧으니 차내 진행을 서두른다. 이해수 회장님은 감기로 목이 잠겨있어 박재용 부회장님이 인사를 대신하고, 시산제(始山祭)의 모든 비용을 금민자 회원님께서 부담 하셨다 하시니, 그 정성이 고맙고 지고(至高) 합니다.
하늘은 거짓이 없어... 우리들이 정성(精誠)을 다하는 만큼 감응(感應) 하신다고 하시니... 지극한 님의 정성을 하늘은 다 알 것이라 믿습니다.
차창 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진행은 순조로와, 평사(平沙) 휴게소에서 조반(朝飯)을 드신후 생강차를 마시며 여담(餘談)을 즐기시니... 정신이 쇄락(灑落)하다.
보슬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하니 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경주 톨게이트를 들어서니 우측으로 공룡의 등뼈처럼 앙상하게 돌들이 드러나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남산(금오산+고위산)이 한눈에 들어와 볼수 록 아름답다.
바로 저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이며... 그 옛날 신라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시작(始作)과 종말(終末)의 역사를 품은 산이더란 말인가?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35번 지방도(地方道) 언양길 방향으로 접어드니... 좌측으로 나정(蘿井), 포석계곡(鮑石溪谷)으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보이고, 그 다음 냉골로 입산하는 삼릉(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입간판(立看板)이 보이며 그 옆에 경애왕(景哀王)의 능(陵)으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신라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전에 나정(蘿井)이라는 곳에서, 알에서 탄생한 한 아기가 13살 되던 해에 진한의 육부의 촌장들이 모여 여섯촌을 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아이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시니...
BC 57년부터 935년 까지 993년간 약 일천여 년동안 이어져 온 역사가 바로 남산의 나정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다.
나정으로 부터 1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신라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궁지(離宮址)였던 포석정(鮑石亭:사적제1호)이 있어, 그 옛날 화려했던 신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으며... 포석정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신하들과 무희(舞姬)들의 노래와 춤을 즐겼던 곳이 남아있어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렇게도 아름답고 멋진 풍류를 즐기던 그 곳에서 55대 경애왕(景哀王924~927)이 왕4년(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나라의 재물을 약탈하고 불지르니... 찬란했던 신라의 천년 사직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나정(蘿井)에서 출발된 신라의 역사가
포석(鮑石)에서 종말(終末)을 예고 하시니
산천(山川)은 고금(古今)에 여여(如如) 한데
오고 간 인걸(人傑)들은 그 자취가 없으니...
천년사직(千年社稷)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요!
인생(人生)도 역사(歷史)도 한바탕 꿈이로다!
허허(虛虛)로운 마음으로 출발기점인 틈수골(闖水谷) 입구에 도착하니 시계는 9시를 조금지나 있고, 내리던 보슬비도 멎어있어 기분도 상쾌하다.
용장리(茸長里) 마을을 들어서니 마을 분위기는 조용하고 예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현대화 물결이 아직은 미치지 못한 곳으로 느껴지며, 70년대 중반의 농촌풍경이 물씬 풍긴다.
집집마다 잡귀(雜鬼)를 쫒는다는 엄나무가 심어져 있어 색다른 풍경으로 와 닿으며, 어떤 집들은 가시오가피 나무들도 심어져 있는것이 보인다.
용장3리(茸長三里) 마을을 지나 틈수골로 접어드니 길 우측에는 조그마한 저수지(貯水池)가 계곡을 가로막아 있다. 말이 저수지(貯水池)지, 크기로 봐서는 연못이나 진배 없다. 10여 분을 더 오르니 와룡사(臥龍寺)가 보이고 저만큼 벼랑위에는 팔각정자(八角亭子)가 대(臺)위에 날렵하다.
계곡사이에 진좌(鎭坐)한 도량(道場)이라 규모도 왜소(矮小)하고 년륜(年輪)도 없어 보인다. 절 입구에는 천왕문(天王門)을 대신해서 석조물(石造物) 비석(碑石)을 세워 사방에 경구(經句)로 새겨져 있다.
문밖에서 예배(禮拜)를 드리고 천룡사지(天龍寺址)로 오르니... 산행길이 잘 다듬어져 진행이 순조롭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누어 진 제물(祭物)들이 배낭의 무게를 더해서인가? 연신 땀을 닦으며 윗도리를 벗어 가방에 챙겨 오르니 한결 수월하다.
열지어 함께 오르시는 회원님들이 맞들어 주시겠다고 청해 오시니 인정이 따사롭기 그지 없다. 오르며 쉬고 오르며 쉬고를 반복하여, 350여 미터 고지에 오르니... 저만큼 산기슭에는 인천(麟川)이 좌에서 우로 휘감아 흐르고, 내남면의 평야를 지나 안산(案山)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산은 오를수록 시야가 넓어져 보는 눈이 다 시원하고, 주위의 풍광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등산의 즐거움이 배가(倍加)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폐사지(廢寺址)의 석재(石材)들과 초석(礎石)들이 보인다. 그 옛날에 절터였던것 으로 짐작되며, 양지바른 곳 곳에는 어김없이 묘(墓)가 들어서 있어 황량(荒凉)한 폐사지가 주는 여백(餘白)의 미(美)를 느낄 수 없슴이 아쉽구나!
이래 저래 우리 인간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요란스럽기는 마찬가지라! 그래서 열반(涅槃) 고승(高僧)님들은 오고 간 흔적(痕迹)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던가?
한걸음 한걸음 다시 20여 분을 더 오르니 광활(廣闊)한 대지(大地)가 펼쳐지는데... 이 깊은 산중에, 이 높은 산에 이렇게도 넓은 터가 있었다니... 과연 하늘이 정한 길지(吉地)로다. 북으로는 고위산(高位山:495M)의 정상이 눈앞에 보이고, 그 아래로 천룡암(天龍岩)이 막 승천(昇天) 하려는 듯... 꿈틀 꿈틀 비룡승천(飛龍昇天)의 모습이다.
넓은 대지의 중간쯤에는 옛 금당터(金堂址)에 초석만 남아 있고, 그 앞에는 새로 복원된 3층석탑(보물제1188호)이 홀로 날렵하다. 어찌나 세련된 석탑인지... 불국사의 석가탑(국보제21호)이나, 남원 실상사의 3층석탑(보물제37호)과 비견(比肩) 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안내판에 허물어진 석탑을 불심도문(佛心道文)스님의 노력으로 1991년에 동국대 박물관조사단에서 발굴 복원 하였다고 하며, 통일신라 8세기 중엽의 양식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불심도문(佛心道文)스님은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의 한사람인 백용성(白龍城)스님의 문중 제자이며, 폐사된 천룡사(天龍寺)를 복원하기 위하여 이곳에 5만여 평이 넘는 대지를 확보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다 한다.
아울러 백용성스님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건립하여 스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불법포교에 여념이 없으시다 하며, 나아가서 남북통일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정진(祈禱精進)중이라 하시니... 머지않은 장래에 옛 천룡사의 모습을 다시 보게될것 이라 믿으며, 스님의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석탑과 마주하는 지근(至近)한 거리에 석조(石槽:돌로만든 물통)가 방치되어 있고, 조금더 떨어진 언덕 아래에는 돌거북의 귀부(龜趺)만 있고 귀두(龜頭)는 훼손되어 보이지 않으며, 등부분에는 비석을 세웠던 흔적이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1300여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버티어 온 유물이 아니던가? 하루 빨리 예산을 확보하여 옛 유물보존에 각별한 노력이 있을것 을 경주 관계당국에 당부(當付)드리오며, 흩어진 초석들이며 황량하고 고즈넉한 폐사지를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납니다.
천룡암(天龍岩)이 바라다 뵈는 적당한 자리에서 시산제(始山祭)를 모실 요량으로 장소를 물색해 보지만 마땅치 않아 다시 20여분을 더 오르니, 평평하고 아늑한 자리가 있어 가져온 제물들을 진설(陳設)하니... 님들의 정성이 모두가 지극(至極)합니다.
유세차(維歲次)... ... ... 대구남산산악회의 무궁한 발전과 시방세계(十方世界) 산행에 무사안녕과 회원님들의 일신건강, 소원성취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이하생략)
밤, 대추를 골 고루 나눠드리고, 팟시루떡이며 술과 돼지고기를 음복(飮福)하시니... 시끌벅적 잔치마당이 따로 없고 인정이 철철 넘쳐 납니다.
오늘의 제물을 준비하신 금민자 회원님과 운반에 수고하신 모든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리오며, 모든님들에게 하늘의 축복이 계시기를 앙망(仰望) 하옵니다.
사시공양(巳時供養)이라고, 때맞춰 제(祭)를 모시니 기분도 좋을세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상(고위산)을 향해 20여 분을 더 올라 천룡바위에서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드리고 잠시 주위를 조망하니,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가슴이 다 후련하다.
이곳 고위산(高位山:495M)은 낙동정맥상의 백운산(892M) 부근에서 동쪽으로 천마산(621M), 치술령(603M), 토함산(745M)을 거쳐 포항 호미곶 등대 부근에서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호미지맥(虎尾支脈)이라 하며...
호미지맥상의 치술령(603M) 부근에서 다시 북쪽방향으로 마석산(531M), 고위산, 금오산(金鰲山:471M)으로 이어져 그 맥을 떨구고 있다.
동쪽으로는 호미지맥이 넘실 넘실 이어져 달리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고즈넉이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745M)이 지척에서 손에 닿을 듯 하며...
서쪽으로는 단석산(827M), 백운산(892M), 가지산(1241M)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이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되어 내달으시니, 남산(고위산+금오산)은 백운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좌청룡(낙동정맥) 우백호(호미지맥)로 싸여 있어 길지중에 길지(吉地)임을 알겠습니다.
경주 남산은 불국사, 석굴암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구촌의 보물답게 나무중에 군자이신 소나무(松=木+公)가 온산을 덮고 있어 그 이름에 걸맞게 더욱 가치를 높여주고 있으며...
40여 골짜기에는 옛 신라인들이 그들의 이상세계인 불국토(佛國土)의 세계를 구현(具現)하고자 이름난 바위마다 마애불이며, 불상, 불탑을 조각하여 상상의 수미산(須彌山)으로 섬겼슴을 짐작케 합니다.
능선으로 걷노라면 곳 곳마다 무덤(墓)이 있슴은 수미산(須彌山)위에 도리천(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세계에 조상을 모신다는 염원의 뜻이 담긴것은 아닐런지요?
아울러 남산은 형산강의 발원지이기도 하여 경주시민은 물론이요, 포항시민의 일부까지도 생명수가 돼고 있으며, 이고장 인걸(人傑)들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아쉬운 마음으로 고위산 정상으로 향한다. 10여 분을 더 올라 정상에 이르니 정상은 이외로 평평하여 많은 회원님들이 동시에 서서 촬영이 가능하다.
디카맨 황재덕 부회장님과 필자는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서둘러 이형재로 향하니, 날씨도 쾌청하고 능선에 드러난 암봉(岩峰)들이 한낮의 햇볕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다.
30여 분을 더 내려와 380여 고지에 거대한 바위가 있어 여러 회원님들이 잠시 앉아 담소(談笑)를 하며, 가져온 과일들을 나누어 드시니 입안에 향기가 감돌고 쌓인 피로도 한결 가십니다.
산행길이 미심쩍어 최대장과 등산 개념도를 펼쳐 이모저모 살피니, 계획된 산행보다 많이 축소되어 내려오고 있슴을 뒤늦게 알게됐다. 현 위치는 이형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용장계곡으로 바로 하산하는 지점이라...
멀리서 짐작만 될뿐 용장사지(茸長寺址)의 3층석탑(보물제186호)이나, 삼륜대좌불(三輪臺坐佛:보물제187호)을 답사할 수 없슴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훗날을 기약하며 용장골로 내려와 적당한 장소에서 중식을 드시고, 오후 일정에 경주국립박물관을 관람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서둘러 하산길로 접어든다.
계곡을 따라 30여분을 더 내려오니 계곡의 돌들은 천연 그대로의 수석(水石)이요, 돌틈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대자연의 교향악이로다.
은적골(隱寂谷)로 짐작되는 골짜기에서는 산사(관음사)의 목탁 소리가 들려오니 고요한 계곡의 적막을 깨뜨리며... 소리로만 짐작될뿐 솔숲에 가려 산사는 보이지 않는다.
은적골의 은적암(隱寂菴)은 조선 세조때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선생이 머리깎고 들어와 우리나라 한문소설의 효시(嚆矢)라 일컬어지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한곳 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는 31세부터 37세까지 금오산에서 칩거 하였는데 만년에 충청도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病死) 하였다고 전하며...
21세에 수양대군(후에 세조임금)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을 모두 태워버린뒤 스스로 머리깎고 전국을 유랑하다 이곳에 들었다고 한다.
멀리서 보는 남산은 그저 평범하고 아름다운 산일뿐... 다가 가면 우뚝솟아 장엄하고 향기로와서, 그향기는 천천만세(千千萬世)에 찬란히 빛나도다!
반월성(半月城)의 남쪽에 남산(南山)이여
신라인의 불국정토 수미산(須彌山)이라!
골골이 새겨진 님들의 정성과 소망이
천년을 지나 다시 만년으로 이어지니...
사바세계에 연화봉(蓮花峰)으로 빛나도다!
단기4340년(서기2007년) 2월 25일
경주 고위산(高位山:495M,일명 남산)을 가다.
첫댓글 찬란한 신라 천년의 역사가 숨쉬는 경주 남산에서의 시산제를 올렸으니 남산산악회의 한해 무사 안녕할것입니다.
예림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큼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