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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원자력은 국가의 미래를 걸 수 있는 국가전략산업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원자력을 둘러싼 개별 사업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대형 원전은 중대사고와 손해배상, 사용후핵연료의 책임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수명연장과 신규 건설로 나아가고 있다. 원전수출은 거대한 수주액을 내세우지만, 건설비 초과와 공기 지연, 금융보증과 현지화, 기술료와 장기 서비스 계약까지 고려하면 그 이익이 실제로 한국에 얼마나 남는지 불확실하다.
소형모듈원자로(SMR)는 아직 안전성과 경제성, 반복제작 가능성을 입증하지 못했는데도 미래 수출산업으로 제시되고 있다. 핵융합은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한 과학기술이지만, 상용 발전의 시점과 비용을 예측하기에는 해결되지 않은 공학적 장벽이 너무 많다. 핵추진잠수함과 농축·재처리는 민수 원자력산업의 확장 문제가 아니라 군사전략과 핵비확산, 한미관계와 국제통제체계의 문제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은 원전 가동으로 이미 발생하고 있지만, 이를 안전하게 격리할 영구처분장은 부지조차 정하지 못했다.
이처럼 원전, SMR, 핵융합,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 사용후핵연료 처분은 ‘원자력’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돼 있지만 사업의 목적도, 기술적 성숙도도, 시장도, 책임구조도 전혀 다르다. 그런데 정부 정책에서는 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원자력 생태계로 묶인다. 대형 원전의 수출을 위해 SMR을 개발하고,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를 위해 농축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핵추진잠수함을 계기로 농축·재처리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어진다. 핵융합까지 원자력 인력과 산업생태계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같은 전략 안에 포함된다.
그 결과 개별 사업에 대한 냉정한 검증보다 ‘원자력산업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앞서게 된다. 경제성이 부족하면 에너지안보를,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면 탄소중립을, 수출 가능성이 불확실하면 기술주권을 내세운다. 한 사업의 근거가 약해져도 다른 명분으로 바꾸어 지원을 계속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전략산업은 국가가 중요하다고 선언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한된 재정과 인력, 산업기반과 외교역량을 집중할 만큼 장기적인 편익이 있어야 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하며, 실패했을 때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업으로 발생하는 수익과 권한뿐 아니라 실패와 사고, 폐기물과 재정손실의 책임도 분명해야 한다.
원자력산업의 전략적 가치를 판단하려면 발전량이나 수주액, 연구개발 실적만 볼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비용과 위험을 함께 보아야 한다. 정부 연구개발비뿐 아니라 공기업 투자, 정책금융, 수출보증, 사고위험에 대한 사실상의 국가보증, 해체와 폐기물 관리, 핵연료 공급망과 군사시설까지 포함한 총부담을 계산해야 한다. 그 돈과 인력이 원자력에 투입되면서 전력망, 에너지효율, 저장장치, 기후적응과 첨단 재래식 안보역량이 얼마나 밀려나는지도 따져야 한다.
이 장에서는 앞선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첫째, 서로 다른 원자력 사업을 하나의 국가전략산업으로 묶는 것이 타당한가.
둘째, 원자력은 이 책의 서론에서 제시한 국가전략산업의 여덟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가.
셋째, 미국의 원자력 확대전략을 한국이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는가.
넷째, 원자력정책의 의사결정과 이익, 실패의 책임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다섯째, 원자력 전 분야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국가는 무엇을 포기하게 되는가.
여섯째,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원자력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문제는 원자력이 국가에 전혀 필요하냐는 것이 아니다. 일부 기존 원전의 운영과 안전관리, 방사선 이용, 원전 해체와 폐기물 관리, 장기 기초연구는 앞으로도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것과 국가의 미래를 걸 국가전략산업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판단이다. 이 장은 원자력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이라는 이름 아래 추진되는 모든 사업에 국가의 재정과 산업, 외교와 안보역량을 장기간 묶어두는 것이 과연 전략적인 선택인지를 묻는다.
1절. ‘원자력’이라는 이름만 같을 뿐 하나의 산업이 아니다
1. 목적과 시장이 전혀 다른 사업들이 묶여 있다
정부가 원자력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설명할 때는 대형 원전 건설, 원전수출, 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연료,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와 폐기물 관리가 하나의 연속된 산업처럼 제시된다. 모두 원자핵과 관련된 기술이고 일부 인력과 연구시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산업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하나의 산업이라고 보기 어렵다.
| 분야 | 주된 목적 | 핵심 고객·결정자 | 주요 위험 |
| 대형 원전 | 대규모 전력생산 | 정부·전력공기업 | 건설비, 공기 지연, 중대사고 |
| SMR | 분산형·산업용 전력 및 열 공급 | 전력회사·산업체 | 실증, 대량제작, 경제성 |
| 비경수형 원자로 | 고온열·연료이용·특수목적 | 정부·연구기관·특수산업 | 연료·재료·안전성 검증 |
| 핵융합 | 장기적인 에너지원 연구 | 정부·연구기관 | 공학적 실현 가능성, 상용화 시점 |
| 핵추진잠수함 | 군사작전과 해양억제 | 국방부·해군 | 전 생애주기 비용, 연료와 비확산 |
| 농축·재처리 | 핵연료 공급 및 사용후핵연료 처리 | 정부·원자력사업자 | 경제성, 핵확산, 폐기물 |
| 방사성폐기물 관리 | 이미 발생한 폐기물의 격리 | 정부·발생자·관리사업자 | 초장기안전성과 책임 |
대형 원전은 현재의 전력시장에서 다른 발전원과 경쟁해야 한다. SMR은 먼저 실증로를 통해 제작비와 운전성, 정비성과 안전성을 입증해야 한다. 핵융합은 아직 과학적 성과를 반복 가능한 발전설비로 전환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핵추진잠수함은 전력을 판매하지 않으며 경제성보다 군사적 필요성과 대체수단, 작전효과로 평가해야 한다. 농축·재처리는 국제비확산체계와 미국의 동의 없이는 한국이 독자적인 산업정책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목적과 고객, 시장과 성공조건이 이처럼 다른데도 이들을 모두 ‘원자력산업’으로 묶으면 개별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이 흐려진다. 대형 원전의 수출 실적이 SMR의 경제성을 증명하지 않으며, 핵융합 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가까운 시기의 전력생산 가능성을 뜻하지 않는다. 핵추진잠수함의 군사적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민수용 농축·재처리 산업의 경제성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2. 산업생태계 유지가 개별 사업의 추진 근거가 된다
여러 사업을 하나의 원자력산업으로 묶으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논리가 ‘생태계 유지’다. 대형 원전의 신규 발주가 없으면 설계·제작 인력이 사라질 수 있으므로 원전을 건설해야 하고, 대형 원전 시장이 불확실하므로 SMR을 개발해야 하며, SMR 이후의 시장을 준비하기 위해 비경수형 원자로와 핵융합에 투자해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산업생태계의 유지 자체가 국가사업의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산업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경쟁력 있는 비용으로 공급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장과 공공적 필요가 불분명한데도 기존 조직과 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낸다면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다.
특히 원자력은 연구개발과 실증, 인허가와 건설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나의 사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그동안 양성한 인력과 투자한 시설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후속사업의 근거가 된다. 초기투자는 매몰비용이 되고, 그 매몰비용을 지키기 위해 더 큰 예산이 투입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국가가 산업생태계를 지원할 수는 있지만,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요와 경제성이 불확실한 사업을 계속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조직의 존속이 아니라 국가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이다.
따라서 원자로 설계와 제작, 원전 안전, 방사선 방호, 해체와 폐기물 관리처럼 실제로 필요한 핵심역량과,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입증되지 않은 개별 사업을 구분해야 한다. 인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원자력 기술을 동시에 개발하는 것은 산업전략이라기보다 사업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정책에 가까워질 수 있다.
3. 성공 기준을 서로 바꿔 사용한다
서로 다른 사업을 하나로 묶을 때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성공 기준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전수출에서는 수주액과 건설 규모가 성과로 제시되지만, 금융지원과 기술료, 현지화, 장기 운영·정비 계약에서 실제로 국내에 남는 이익은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 SMR에서는 상용 발전소의 건설비와 발전단가가 아니라 설계 진척, 표준설계인가 신청, 업무협약과 정부 간 협력이 성과로 제시된다. 핵융합에서는 안정적인 전력생산과 발전단가가 아니라 순간적인 플라스마 성능이나 연구시설의 건설이 산업적 진전으로 홍보된다.
연구성과와 산업성과는 구분돼야 한다. 설계가 완료됐다는 것은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원자로를 제작했다는 것은 인허가와 장기운전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실증로가 운전됐다는 것도 같은 품질과 가격으로 반복제작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출협약 역시 수익성 있는 계약이나 실제 건설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연구부터 모든 사업이 하나의 생태계로 묶이면 어느 한 분야의 제한적인 성과가 원자력 전체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처럼 사용될 수 있다. 반대로 한 사업의 실패는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지원 부족이나 규제 지연, 시장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연구의 성공, 기술의 성공, 실증의 성공, 산업의 성공과 국가전략의 성공은 서로 다르다. 이 단계를 구분하지 않으면 연구과제의 완료가 산업경쟁력으로, 업무협약이 수출성과로, 국가의 재정지원이 시장의 선택으로 둔갑할 수 있다.
4. 위험과 책임도 사업별로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
원자력사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묶어 지원하면서도 책임은 개별 제도와 미래의 사업자에게 나누어 넘기는 모순도 나타난다.
원전 건설의 편익은 현재의 전력공급과 매출로 계산하지만, 해체와 고준위폐기물 처분은 수십 년 이후의 별도 사업으로 미룬다. SMR의 경제성은 공장에서 반복제작한다는 미래의 가정으로 설명하면서, 초도호기의 개발비와 실증비용은 정부가 부담한다. 핵추진잠수함은 군사적 편익을 강조하지만, 핵연료 시설과 사용후핵연료, 해체시설까지 포함한 전 생애주기 비용은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재처리는 사용후핵연료의 부피를 줄이는 기술로 제시되지만, 분리된 고준위폐기물과 2차폐기물의 장기관리 책임은 별도의 문제로 남는다.
이처럼 편익은 여러 사업을 연결해 크게 설명하면서 비용과 책임은 각각의 제도와 미래 시점으로 분산하면 국가 전체가 부담할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국가전략산업으로 평가하려면 사업마다 최소한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산하며 누가 구매하는가.
정부지원 없이 반복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가.
기술적·상업적 성공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은 무엇인가.
실패할 경우 중단할 수 있는가.
사고와 건설비 초과, 해체와 폐기물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같은 재원과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더 나은 대안은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원자력산업 전체의 중요성만 강조하면, 경쟁력이 입증된 사업과 그렇지 않은 사업을 구분할 수 없다. 기존 원전의 안전관리처럼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방사선 이용처럼 독자적인 시장을 가진 분야, 장기적인 기초연구,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판단해야 할 사업과 상업적 발전산업이 모두 뒤섞이게 된다.
5. 필요한 기술을 남기는 것과 모든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다르다
원자력을 하나의 산업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관련 기술과 인력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업을 분리해야 국가가 실제로 보유해야 할 역량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다.
기존 원전이 운전되는 동안에는 독립적인 안전규제와 검사, 중대사고 대응, 설비 노화관리 능력이 필요하다. 이미 발생한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을 관리하기 위해 장기저장, 운반, 처분과 환경감시 기술도 확보해야 한다. 의료·산업·연구 분야의 방사선 이용은 발전용 원자로와 다른 기준으로 그 가치와 시장을 평가할 수 있다. 핵융합과 새로운 원자로 개념도 장기적인 과학기술 연구로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이 신규 대형 원전, 모든 종류의 SMR, 핵융합 상용화,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를 한꺼번에 국가전략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각각의 사업은 독립적인 필요성과 성공 가능성, 비용과 책임을 입증해야 한다.
국가에 필요한 원자력 역량을 유지하는 것과 원자력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업을 국가가 보증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책임 있는 선택이지만, 후자는 선택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포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원자력의 국가전략산업 여부를 판단하는 첫 단계는 ‘원자력산업을 살릴 것인가’라는 포괄적인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어느 단계까지 국가가 지원해야 하는지, 시장과 민간이 부담해야 할 위험은 무엇인지, 실패할 경우 어디서 중단할지를 사업별로 구분해야 한다.
원자력을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묶어야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개별 사업의 자립성과 경쟁력이 약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원자력의 각 사업이 국가전략산업에 요구되는 여덟 가지 조건을 실제로 얼마나 충족하는지 평가하고자 한다.
2절. 본문 내용으로 볼 때 국가전략산업의 조건을 충족하는가
서론에서는 국가전략산업을 판단하기 위한 여덟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시장이 있는가, 경제성이 있는가,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가, 지속가능한가, 국가가 감당해야 할 위험은 어느 정도인가, 국제정치와 외교적 자율성이 있는가, 다른 산업으로 확장되는가, 그리고 더 나은 대안이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기준은 어떤 산업이 중요하거나 첨단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전략산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검증 장치다. 시장이 있어도 수익이 남지 않을 수 있고, 기술이 있어도 외국의 허가 없이는 수출할 수 없으며, 전력을 생산해도 사고와 폐기물 비용을 국가가 떠안아야 할 수 있다. 다른 산업에 파급효과가 있더라도 같은 재원을 더 시급하고 효과적인 분야에 투자할 수 있다면 국가적 우선순위는 달라진다.
앞선 1~5장의 검증 결과를 이 여덟 가지 기준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판단 기준 | 1~5장의 주요 검증 결과 | 종합판정 |
| ① 시장이 있는가 | 기존 대형 원전의 제한적 시장은 존재하지만 국가 발주와 금융지원에 의존한다. SMR·비경수형 원자로·핵융합은 상업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핵잠수함·재처리는 일반적인 시장산업이 아니다. | 분야별로 제한적 |
| ② 경제성이 있는가 | 건설비 초과, 공기 지연, 금융비용, 현지화, 기술료, 사고·해체·폐기물 비용을 포함하면 원전의 경제성은 불확실하다. SMR과 핵융합은 실증 이전 단계다. | 충족하지 못함 |
| ③ 경쟁력 있는가 | 원전 건설·제작·운영 능력은 보유하지만 핵심 원천기술, 수출 권한, 핵연료 공급망과 금융역량에서 독자성이 제한된다. | 일부 충족 |
| ④ 지속가능 한가 | 우라늄과 농축서비스의 해외 의존, 경직적인 발전 특성, 장기 건설기간, 미해결된 사용후핵연료와 처분 문제가 지속가능성을 제약한다. | 충족하기 어려움 |
| ⑤ 국가가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가 | 중대사고, 다수호기·지진·기후위험, 제한된 손해배상, 건설비 초과와 수출보증, 초장기 폐기물 책임이 국가와 미래세대에 귀속된다. | 충족하지 못함 |
| ⑥ 국제정치· 외교적 자율성 있는가 | 한미 원자력협정, 미국 수출통제와 웨스팅하우스 기술, 핵비확산체계의 제약 때문에 농축·재처리·핵잠수함과 원전수출의 독자성이 낮다. | 충족하지 못함 |
| ⑦다른 산업으로 확장되는가 | 소재·제작·계측·품질관리 등의 파급효과는 있으나 원자력 특유의 규격과 폐쇄적 공급망 때문에 확장성이 제한되고, 상당 부분은 다른 산업에서도 확보할 수 있다. | 부분 충족 |
| ⑧ 더 나은 대안이 있는가 | 전력 분야에는 재생에너지·저장장치·전력망·효율·수요관리, 안보 분야에는 첨단 재래식 전력과 동맹 억제력이 존재한다. | 대안과 비교해야 함 |
1. 원전수출의 불확실성
세계에 원전 건설계획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원자력이 유망한 국가전략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형 원전은 발주자가 대부분 정부나 국영 전력회사이고, 사업 추진에는 장기 전력구매계약, 차액계약, 국가대출, 수출금융과 정부보증이 결합된다. 따라서 원전시장은 일반적인 상품시장이라기보다 국가가 수요와 금융위험을 함께 만들어주는 정책시장에 가깝다.
한국이 원전을 수주하더라도 계약금액 전체가 국내 산업의 부가가치로 남는 것은 아니다. 현지화 비율이 높아질수록 현지기업의 몫이 커지고, 미국 원천기술에 대한 승인과 기술료, 해외 기자재와 금융비용도 발생한다. 공기가 지연되면 지체상금과 추가 건설비를 부담할 수 있고, 발주국이 요구하는 저리금융과 보증까지 제공하면 수출 규모는 커져도 국가의 실제 수익은 줄어들 수 있다.
SMR의 시장은 더욱 불확실하다. 현재 제시되는 수요의 상당 부분은 실제 구매계약이 아니라 개발계획, 양해각서, 부지 검토와 정책목표다. 공장 반복제작을 통해 경제성을 확보하려면 먼저 다수의 주문이 있어야 하지만, 구매자는 가격과 성능이 입증되기 전에는 대량 주문을 주저한다. 주문이 있어야 가격이 내려가고 가격이 내려가야 주문이 생기는 모순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핵융합은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지만 현재 판매 가능한 발전설비나 전력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핵추진잠수함은 군사장비이고, 농축·재처리는 시장성만으로 추진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안보·비확산 사업이다. 이들을 모두 미래 원자력시장으로 합산하는 것은 성격이 다른 국가사업과 연구개발을 상업시장처럼 포장하는 일이 될 수 있다.
2. 건설능력이 독자성과 수익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한국은 원전의 설계·제작·건설·운영 경험과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다. 일정한 품질의 대형 원전을 건설하고 장기간 운영해온 능력은 분명한 산업적 자산이다. 그러나 국가전략산업의 경쟁력은 원전을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핵심기술을 독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수출할 때 충분한 이익이 국내에 남는지, 외국의 승인과 공급망 중단에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한국형 원전의 수출은 미국 기술과 수출통제체계에서 완전히 독립돼 있지 않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약은 해외사업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원전수출이 미국의 동의와 기술적 권리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자로를 건설하는 능력과 세계시장에서 독자적인 사업을 결정하고 수익을 확보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는 아직 경쟁력을 판정할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설계 개념, 연구논문, 표준설계인가 신청은 기술개발의 과정이지 산업경쟁력의 증거가 아니다. 실제 원자로를 건설하여 안전성과 성능을 입증하고, 장기간 운전·정비한 뒤, 같은 품질과 비용으로 반복제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쟁력을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원자력산업은 기존 대형 원전의 건설과 운영에서 부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원자력 전 분야의 독자적 경쟁력으로 확대해석하기는 어렵다.
3. 폐기물과 사고 책임을 해결하지 못한 산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원전은 운전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적고 안정적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은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하는 기간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핵연료 조달부터 건설, 운전, 중대사고, 해체,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운반·처분까지 전 생애주기를 포함해야 한다.
앞선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은 사용후핵연료를 계속 발생시키고 있지만 영구처분장의 부지를 정하지 못했다. 발전소 부지 내 건식저장을 확대하더라도 이는 처분이 아니라 책임의 연기다. 장기저장용기와 운반용기, 처분용기의 연계요건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장시설을 먼저 건설하면 장래의 재포장과 중복투자, 작업자 피폭과 사고위험까지 증가할 수 있다.
중대사고의 위험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발생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원전이 한 부지에 집중돼 있고 지진·침수·산불·폭염과 같은 외부사건이 여러 호기에 동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피해는 발전사업자의 책임범위를 넘어선다. 그런데도 원자력손해배상 한도는 실제 중대사고의 경제·사회적 피해와 비교해 현저히 낮고, 초과손해는 사실상 국가와 국민에게 귀속된다.
수익은 현재의 발전사업자가 얻고 폐기물과 중대사고의 장기책임은 국가와 미래세대가 부담하는 산업을 지속가능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4. 외교적 제약과 산업 파급효과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원자력은 다른 에너지산업보다 국제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우라늄 공급, 농축, 핵연료 제작, 원전수출, 재처리와 핵추진잠수함은 핵비확산체계와 공급국의 통제를 받는다. 특히 한국의 농축·재처리와 핵추진잠수함은 기술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가의 문제보다 미국의 동의와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가깝다.
이처럼 핵심 사업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면 ‘원자력 주권’이나 ‘기술주권’을 원자력 전 분야 확대의 근거로 삼기 어렵다. 해외 규제와 원천기술에 의존하면서 국내적으로만 자주성을 강조하면 실제 외교협상에서는 더 많은 비용과 양보를 요구받을 수 있다.
원자력 투자가 소재, 용접, 주단조, 계측제어, 품질보증과 같은 산업에 파급효과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기술의 상당 부분은 조선, 방산, 반도체, 우주항공, 재생에너지와 전력기기 산업에서도 활용된다. 원자력의 파급효과를 평가하려면 원자력에 투자해야만 확보할 수 있는 기술과 다른 산업에서도 더 넓은 시장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기술을 구분해야 한다.
원자력산업 내부의 고유 규격과 장기간의 인허가, 제한된 발주처는 오히려 공급기업을 좁은 원자력시장에 묶어둘 수도 있다. 기술이 다른 산업으로 확장되는 것과 다른 산업의 범용기술을 원자력이 사용하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5. 최종 판단은 대안과 기회비용까지 포함해야 한다
국가전략산업은 다른 대안보다 국가의 미래에 더 큰 편익을 제공할 때 선택할 수 있다. 원자력에 일정한 장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재정과 인력, 정책금융과 공기업의 투자능력을 다른 분야에 투입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성과와 비교해야 한다.
전력 분야에서는 재생에너지, 에너지저장장치, 전력망 확충, 에너지효율과 수요관리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한계가 있지만 공사기간이 짧고 단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으며, 실패하더라도 국가 전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단일 위험으로 집중될 가능성이 작다. 변동성 문제도 저장장치와 양수발전, 유연성 자원, 지역 간 계통연계와 수요조정을 결합해 대응할 수 있다.
안보 분야에서도 핵추진잠수함과 핵잠재력만이 선택지는 아니다. 감시·정찰, 정밀타격, 무인체계, 사이버·우주전력, 재래식 잠수함과 한미 확장억제의 실효성을 먼저 비교해야 한다. 핵잠수함과 농축·재처리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과 외교적 부담이 실제 억제력 향상에 비례하는지도 검증해야 한다.
여덟 가지 기준을 종합하면 기존 원전의 안전한 운영과 필요한 기술역량의 유지에는 국가적 필요성이 인정된다. 원전 건설·운영 분야에도 부분적인 산업경쟁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형 원전의 지속적 확대, 원전수출, 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상용화,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를 하나로 묶어 국가전략산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1~5장의 검증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원자력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사실이 아니다. 원자력의 일부 기능과 기술은 국가에 필요하지만, 원자력 전 분야를 하나의 성장산업으로 묶어 국가의 미래를 걸 만큼 시장성·경제성·독자성·지속가능성·위험 감당능력과 외교적 자율성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자력은 포괄적인 국가전략산업으로 판정하기보다 사업별로 분리해 판단해야 한다. 기존 원전의 안전관리, 해체와 폐기물 관리처럼 국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분야는 강화하고, 상업성이 불확실한 기술은 연구·실증·산업화 단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신규 건설과 수출, SMR과 핵융합, 핵잠수함과 농축·재처리는 각각 독립적인 필요성과 비용, 대안과 중단조건을 입증해야 한다.
국가전략산업의 판단은 해당 산업에 장점이 있느냐가 아니라, 제한된 국가자원을 장기간 우선 배분할 만큼 다른 선택보다 우월하냐는 판정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원자력 전 분야의 동시 확대는 아직 국가전략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 절에서는 미국이 원자력을 에너지산업을 넘어 기술·군사·외교 패권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한국의 산업전략과 같은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3절. 미국의 원자력 확대전략을 한국이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는가
미국은 원자력을 다시 국가 핵심산업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5월 원자력 관련 행정명령 네 건을 발표하고, 약 100GW인 원전 설비용량을 2050년까지 400GW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존 원전의 출력증강, 폐쇄 원전의 재가동, 중단된 원전의 완공, 대형 원전과 첨단원자로 건설, 핵연료 공급망 복원과 해외수출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국도 미국의 정책을 따라 대형 원전과 SMR을 확대하고, 농축·재처리와 핵추진잠수함까지 추진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원자력을 국가안보와 첨단산업의 기반으로 규정한다면 한국도 원자력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의 원자력 전략은 단순한 발전산업 육성정책이 아니다. 미국은 원자력발전과 핵연료, 핵무기, 핵추진함, 국립연구소, 군사시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외교협정과 수출통제를 하나의 국가 패권체계 안에서 결합할 수 있는 나라다. 원전 한 기의 수익성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이 군사·외교·기술표준과 공급망 지배에 기여한다면 국가 전체로는 투자할 이유가 생긴다.
한국은 이러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전략을 그대로 모방하면 미국이 얻는 전략적 권한은 얻지 못한 채, 건설비와 연구개발비, 사고와 폐기물, 외교적 양보와 시장실패의 위험만 부담할 수 있다.
1. 미국은 원자력이 아니라 ‘원자력체계’를 지배하려 한다
미국의 원자력 확대전략을 발전량 증가만으로 해석하면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 2025년 행정명령은 원전을 인공지능 경쟁, 에너지안보, 군사시설의 전력회복력, 핵연료 공급망, 원전수출과 동맹관계에 직접 연결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책 분야 | 미국의 주요 조치 | 전략적 목적 |
| 발전설비 | 2050년 원전 400GW 목표 | 전력공급과 산업기반 확대 |
| 대형 원전 | 2030년까지 완성된 설계의 대형 원전 10기 착공 목표 | 대형 원전 공급망 복원 |
| 기존 원전 | 5GW 출력증강, 폐쇄 원전 재가동과 중단 원전 완공 지원 | 단기간 내 원전 발전량 확대 |
| 첨단원자로 | 국립연구소·연방부지에서 시험과 실증 촉진 | 민간개발의 초기위험 국가 부담 |
| 핵연료 | 전환·농축·고순도 저농축우라늄(HALEU) 공급망 구축 | 러시아 등 외국 공급망 의존 축소 |
| 군사시설 | 2028년까지 미군기지 원자로 가동 추진 | 군사기지 전력회복력 확보 |
| AI 인프라 | 원자로와 AI 데이터센터를 핵심 국방시설로 연계 | AI 패권과 전력공급 결합 |
| 해외수출 | 원전 금융, 기술지원, 원자력협정 협상 강화 | 기술표준·연료·외교관계 선점 |
미국 정부는 2030년까지 대형 AP1000 원전 10기를 착공하고 기존 원전의 출력증강과 재가동을 지원하도록 에너지부 금융역량을 우선 배분하겠다고 명시했다. 또한 국방부에는 2028년 9월까지 군사기지에서 원자로를 가동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원전을 단순히 전력시장에서 재생에너지나 가스발전과 경쟁시키겠다는 정책이 아니다. 민간시장에서 경제성이 입증되기 전에 연방정부가 연구개발, 연료, 부지, 초기 구매자, 금융과 해외시장을 동시에 제공하겠다는 정책이다.
미국의 전략은 원전을 많이 짓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원자로 설계부터 핵연료, 군사적 이용, 금융, 수출승인과 국제표준까지 원자력의 전 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복원하려는 전략이다.
2. 미국은 민수와 군사 원자력을 하나의 국가역량으로 결합할 수 있다
미국은 핵무기 보유국이며 핵추진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자체적으로 설계·건조·운영한다. 고농축우라늄과 삼중수소, 핵무기용 물질, 해군 원자로 연료와 민수용 핵연료를 서로 다른 시설과 통제체계 아래 관리하면서도 국가 차원에서는 하나의 원자력 기반으로 연결할 수 있다.
2025년 미국의 원자력산업기반 행정명령은 저농축우라늄(LEU), 고순도 저농축우라늄(HALEU)뿐 아니라 고농축우라늄(HEU)에 대해서도 민수·국방 수요를 함께 고려한 농축능력 확대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핵연료 공급망을 삼중수소 생산, 해군 추진, 핵무기 유지와 직접 연결한 것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국내 농축능력을 복원하기 위해 향후 10년간 27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으며, 첨단원자로용 HALEU를 정부 보유 물질에서 민간기업에 배분하고 있다. 미국도 아직 상업 규모의 HALEU 공급망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가 직접 초기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비핵무기국이고, 농축·재처리와 핵물질 이동은 한미 원자력협정과 미국의 수출통제, 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조치 아래 놓여 있다. 한국이 핵추진잠수함이나 비경수형 원자로를 추진한다고 해서 미국과 같은 민군 통합 원자력체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핵연료와 핵물질 이용권한은 기술개발만으로 확보되지 않으며 정치·외교적 동의가 필요하다.
미국은 원자력 기술을 다른 국가에 공급하면서 동시에 그 국가의 핵연료 이용과 재이전, 재처리를 통제할 수 있다. 한국은 원전을 수출하더라도 일부 기술과 핵연료, 수출승인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는다. 두 나라가 같은 원자로를 건설하더라도 그 사업에서 얻는 전략적 권한은 전혀 다르다.
3. 미국은 정부가 실증시장과 금융시장을 만들 수 있다
첨단원자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첫 번째 원자로의 비용과 위험을 누가 부담하느냐는 것이다. 실증하지 않으면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고, 구매자가 없으면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절감도 불가능하다.
미국은 이 문제를 연방정부의 구매력과 자산을 이용해 해결하려 한다. 국립연구소와 에너지부 부지, 군사기지, 연방 인공지능 시설을 첨단원자로의 시험·실증·초기 수요처로 제공한다. 국방부의 이동형 마이크로원자로인 ‘프로젝트 펠레’도 군사시설의 전력회복력이라는 공공목적을 통해 민간시장보다 먼저 실물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대형 원전에 대해서도 정부금융이 동원된다. 미국 에너지부는 폐쇄된 팰리세이즈 원전 재가동에 최대 15억2천만 달러의 대출을 제공했다. 수출입은행은 SMR 수출사업에 대해 미국 수출계약 금액의 최대 85%, 일정한 경우 현지비용의 최대 50%를 지원하고, 원전 가동 전까지의 이자비용을 금융에 포함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전력시장과 자본시장, 연방정부의 조달시장, 거대 정보기술기업과 데이터센터 수요도 있다. 특정 원자로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여러 개발사와 전력회사, 금융기관과 지역시장에 위험을 분산할 수 있다.
한국은 시장 규모와 위험분산 능력이 다르다.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같은 공기업이 초기 구매자와 투자자, 건설사업자, 수출보증의 중심을 동시에 맡게 되면 실패위험이 결국 공기업 부채와 전기요금, 정부재정에 집중된다. 국내 실증시장이 작기 때문에 실증이 끝난 뒤에도 충분한 반복주문을 확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미국이 정부수요로 초기시장을 조성한다고 해서 한국도 공기업에 원자로를 발주하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정부조달은 거대한 국내시장과 세계 수출통제력으로 연결되지만, 한국의 정부발주는 시장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국내 전력소비자가 떠안는 결과가 될 수 있다.
4. 미국의 원전수출은 이익뿐 아니라 영향력을 수출하는 사업이다
미국이 해외 원전수출을 지원하는 이유는 건설공사에서 얻는 이익만이 아니다. 원전은 수십 년 동안 핵연료 공급, 부품과 정비, 안전규제, 인력교육과 핵물질 관리가 이어지는 장기사업이다. 원자로를 공급하면 수입국의 에너지정책과 기술표준, 핵연료 공급망에 장기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은 원자력법 제123조에 따른 협정을 통해 협력국의 핵물질 이용조건을 설정하고, 미국 기술이 포함된 원자로와 기자재의 수출·재수출을 통제한다. 금융과 외교협정, 핵연료 공급과 안보협력을 결합하면 원전수출은 동맹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이 된다.
2025년 행정명령도 국무부가 원전수출을 위한 원자력협정 협상을 주도하고, 미국 기업의 해외진출을 위해 금융·기술지원을 확대하도록 했다. 백악관은 해외 신규 원자로의 상당 부분이 경쟁국 설계로 건설되고 있다는 점을 원전수출 강화의 근거로 들었다. 이는 미국이 세계 원전시장을 단순한 건설시장이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경쟁하는 전략공간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반면 한국 원전수출의 성공은 수주액이 아니라 국내에 남는 부가가치와 수익으로 평가해야 한다. 현지화 비율이 높고 미국의 기술승인과 협력이 필요하며, 한국이 저리금융과 공기지연 위험까지 부담한다면 원전을 수출해도 미국과 같은 외교적·산업적 이익을 얻기 어렵다.
더욱이 한국의 수출이 미국 원자로 공급망의 일부로 편입된다면 한국 기업에는 제작과 시공 물량이 돌아올 수 있지만, 설계권과 수출승인, 핵연료와 세계시장 지배력은 미국에 귀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 원전수출은 기술표준과 핵연료 공급망, 외교적 영향력을 장기간 묶어두는 사업이다. 한국이 건설위험을 부담하고 미국이 기술권한과 시장통제력을 갖는 구조라면 같은 원전수출이라도 국가에 남는 전략적 가치는 다르다.
5. 미국의 목표도 실현 가능성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
미국이 원자력 확대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했다는 사실과 그 전략이 경제적·기술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미국이 2050년까지 원전 설비용량을 100GW에서 400GW로 늘리려면 기존 원전의 폐쇄를 대체하면서 약 300GW 이상의 신규설비를 추가해야 한다. 이를 1.1GW급 대형 원전으로만 충당하면 270기 이상이 필요하다. 25년 동안 매년 10기 이상을 새로 가동해야 하는 규모다. 현재 미국의 건설인력, 대형 단조품과 기자재 공급망, 인허가와 송전망, 공사비와 금융비용을 고려하면 이는 확정된 전망이라기보다 매우 공격적인 정책목표다.
미국 정부가 규제를 단축하고 금융을 제공해도 원전의 높은 건설비와 장기간의 공사, 비용초과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도 연방부지에서 실증할 수는 있지만, 상업적인 가격으로 반복제작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입증해야 한다. HALEU 역시 아직 충분한 국내 상업공급망이 없어 정부 보유 물질과 지원사업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원자력 확대는 한국이 따라야 할 성공모델이라기보다 향후 성패를 지켜봐야 할 대규모 국가실험에 가깝다. 미국이 막대한 국가자원을 투입한다고 해서 원전의 경제성이 이미 입증됐다는 뜻은 아니다.
6. 한국은 미국의 전략을 따라가기보다 그 안에서의 위치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에 필요한 질문은 “미국도 원전을 확대하는데 왜 우리는 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미국의 원자력 확대 속에서 한국은 무엇을 얻고 어떤 위험을 부담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한국에는 원전 설계·제작·건설과 운영 경험이 있다. 미국이 대형 원전과 SMR 건설을 실제로 확대한다면 국내 기자재·시공·정비기업에 사업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국내에 신규 원전을 계속 건설하거나, 경제성이 검증되지 않은 모든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를 자체 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부품과 제작·검사·정비 능력을 선별해 공급하는 전략과 국내 전력체계를 원전 확대에 묶는 전략은 구분돼야 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 돌아오는 구체적인 사업범위와 수익은 얼마인가.
핵심 설계권과 수출승인 권한은 누가 갖는가.
기술료와 현지화, 금융지원 이후 국내에 남는 부가가치는 얼마인가.
초도호기의 비용초과와 공기지연은 누가 부담하는가.
미국 시장이 열리지 않거나 원자로 개발이 실패할 경우 중단할 수 있는가.
한국이 미국 공급망에 참여하기 위해 국내외 정책에서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가.
미국과 한국은 원자력 기술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지만 원자력을 통해 얻는 국가적 이익과 권한은 같지 않다. 미국은 핵연료·핵무기·군사시설·금융·외교·수출통제를 결합해 세계 원자력 질서의 지배력을 회복하려 한다. 한국은 그 질서의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아니라 상당 부분 적용받는 국가다.
미국의 원자력 전략은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다. 한국이 미국과 같은 권한과 시장, 금융과 군사적 지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외형만 따라가면, 미국은 원자력 패권을 강화하고 한국은 그 공급망의 비용과 위험을 부담하는 하위 사업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원자력 확대는 한국 원자력산업 전체를 확대해야 할 근거가 아니라 선별적인 협력과 냉정한 국익계산의 대상이다. 미국 시장에서 실질적인 수익이 기대되는 제작·부품·운영 분야에는 참여할 수 있지만, 이를 국내 신규 원전 확대나 SMR 조기 배치, 농축·재처리와 핵추진잠수함 추진의 명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국가전략은 강대국의 전략을 축소해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자국이 통제할 수 있는 기술과 시장, 감당할 수 있는 위험과 대안을 기준으로 선택하는 일이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선택을 실제로 내리는 원자력정책의 의사결정 구조를 살펴보고, 사업의 이익과 실패의 책임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4절. 이익은 집중되고 책임은 사라지는 원자력 거버넌스
원자력사업은 국가가 주도하는 대표적인 장기 공공사업이다. 발전소 한 기를 계획하고 건설해 운영한 뒤 해체하고 폐기물을 처분하기까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걸린다. 사업에 투입되는 자금도 연구개발비, 공기업 투자, 정책금융, 정부보증, 전기요금과 세금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조달된다.
이처럼 사업기간이 길고 국가의 역할이 크다면, 사업의 필요성을 누가 제안하고 누가 검증했는지, 성공의 이익과 실패의 손실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사고와 폐기물의 최종책임은 누가 부담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원자력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사업을 제안하는 기관과 필요성을 검증하는 전문가, 예산을 집행하는 공기업과 안전성을 심사하는 규제체계가 충분히 분리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원자력 연구개발과 신규사업은 추진기관 내부에서는 성과가 되지만, 사업이 실패했을 때는 책임질 주체를 찾기 어렵다. 건설비 초과와 사업 지연은 공기업의 부채로 남고, 연구개발 실패는 국가 연구비의 손실이 되며, 중대사고와 방사성폐기물의 장기위험은 국민과 미래세대에게 넘어간다.
원자력산업의 문제는 특정 개인이나 기관이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는 차원에만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업을 계속 확대하는 것이 참여기관 모두에게 유리하고, 중단하거나 축소하는 결정은 누구에게도 성과가 되지 않는 구조에 있다.
1. 사업을 제안한 집단이 그 필요성도 검증한다
한국의 주요 원자력사업은 대체로 정부가 정책방향을 정하고, 공기업과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사업계획을 구체화하며, 대학과 연구기관이 기술적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관련 기업은 설계·제작·건설에 참여하고, 학회와 전문가위원회는 정책과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정부, 공기업, 연구기관, 대학, 기업과 규제기관은 서로 독립된 조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구과제와 용역, 공동연구, 자문위원회, 학회 활동, 인력교류와 퇴직 후 재취업 등을 통해 하나의 좁은 정책공동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원자로 개발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연구기관과 대학은 기술개발 가능성과 미래시장을 조사한다. 정부는 이 연구결과를 근거로 예산을 편성하고, 연구비를 받은 전문가들은 정부 위원회와 공청회에서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이후 연구개발 성과는 실증사업의 근거가 되고, 실증시설이 건설되면 투자비 회수와 공급망 유지를 이유로 상용화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 대안, 더 저렴하거나 성숙한 경쟁기술, 실패했을 때의 비용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기 쉽다. 사업의 필요성을 검토하는 연구 자체가 사업 추진기관의 예산으로 수행된다면 연구자는 사업의 근본적 중단보다 설계 개선이나 추가연구를 결론으로 제시할 가능성이 커진다.
원자력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해당 기술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정책결정 과정에서 원자력 전문가를 배제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기술개발의 당사자가 기술적 가능성뿐 아니라 국가적 필요성, 경제성, 안전성, 시장성, 외교적 타당성까지 사실상 모두 판단하는 데 있다.
원자력정책에서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사람, 정부예산을 심의하는 사람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사람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독립적인 검증보다 사업의 지속이 참여기관의 공동이익이 되기 쉽다.
2. 성공의 성과는 나누어 갖지만 실패의 책임자는 없다
원자력 국책사업이 성공하면 성과의 귀속은 비교적 분명하다. 연구기관은 기술개발 실적을 얻고, 대학은 연구비와 논문·특허·인력양성 성과를 확보한다. 기업은 설계·제작·건설 물량을 수주하고, 공기업은 발전설비와 해외사업 실적을 보유한다. 정부는 국가전략기술 육성과 수출, 일자리 창출을 정책성과로 제시한다.
그러나 사업이 실패하면 책임의 구조가 달라진다. 원자로 개발에 성공하지 못하거나 상용화되지 않아도 연구기관은 연구과제를 수행했다는 실적을 남긴다. 건설비가 증가하거나 공기가 지연되면 공기업의 재무부담으로 처리되고, 수출사업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계약상 비밀이나 국가 간 외교관계를 이유로 정확한 책임이 공개되지 않을 수 있다.
사업 실패의 원인은 흔히 시장환경의 변화, 규제 지연, 주민수용성 부족, 국제정세, 공급망 문제 또는 후속 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요인들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사업 초기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위험까지 모두 외부요인으로 돌린다면, 당초 사업을 제안하고 승인한 주체의 판단은 평가 대상에서 사라진다.
원자력사업에서 성공과 실패가 처리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대비된다.
| 참여 주체 | 성공할 경우 얻는 성과 | 실패할 경우 남는 부담 |
| 연구기관 | 연구비, 조직 확대, 기술개발 실적 | 후속 연구 필요성으로 전환 |
| 대학·전문가 | 연구과제, 논문, 특허, 인력양성 | 시장·정책환경 변화로 설명 |
| 기업 | 설계·제작·건설 매출 | 계약범위를 넘는 위험은 공기업·정부로 이전 |
| 공기업 | 설비자산, 수출실적, 사업규모 확대 | 부채 증가, 전기요금과 재무부담 |
| 정부 | 산업육성, 일자리, 수출의 정책성과 | 담당자 교체 후 장기과제로 이관 |
| 국민·미래세대 | 전력공급과 일부 산업편익 | 사업손실, 사고위험, 해체·폐기물 비용 |
이러한 구조에서는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대하는 결정에는 많은 참여자와 기관이 존재하지만, 사업을 중단해야 할 시점과 최종책임자는 불분명하다. 이미 투입한 연구비와 조직, 인력과 설비는 다시 ‘원전 생태계 유지’를 위한 추가사업의 근거가 된다.
실패한 사업에서 얻은 교훈을 공개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수출시장으로 정책목표를 옮기면, 앞선 실패는 정리되지 않은 채 다음 사업의 출발점이 된다. 매몰비용이 후속투자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바뀌는 것이다.
성과는 기관별로 나누어 소유하지만 실패는 ‘국가사업의 불가피한 위험’으로 처리된다. 이익의 귀속은 분명한데 책임의 귀속은 불분명한 것이 원자력 거버넌스의 구조적 특징이다.
3. 규제가 산업과 같은 생태계에 들어가면 견제는 약해진다
원자력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규제기관이 원전의 설계와 운전, 재료, 계통, 중대사고와 방사선 영향을 심사하려면 원자력산업에서 축적된 지식과 인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사업자와 규제기관이 같은 기술적 언어를 사용해야 심사가 가능하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지식의 공유와 이해관계의 공유는 구분해야 한다. 규제기관이 필요로 하는 인력과 연구자료, 해석코드와 시험설비, 전문위원까지 같은 원자력 생태계에서 공급되면 산업계가 설정한 기술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규제기관의 질문도 “이 사업이 충분히 안전한가”에서 “이미 추진하기로 한 사업을 어떤 조건으로 허용할 것인가”로 좁아질 위험이 있다. 정부가 원전 건설물량과 가동목표를 먼저 확정하고 공기업이 예산과 일정을 정한 뒤 안전심사가 시작되면, 규제기관이 승인하지 않는 결정은 단순한 기술판단을 넘어 정부정책과 전력계획 전체를 흔드는 결정이 된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이 사업비와 일정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안전문제가 주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최신 기술기준의 전면 적용
설계기준을 초과하는 지진·침수·화재 평가
여러 원전이 동시에 영향을 받는 다수호기 사고
중대사고와 격납건물 우회경로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온도 상승과 냉각수 위험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과 원전의 복합위험
광범위한 주민피난과 장기 환경오염
사업자의 사고배상과 폐기물 최종책임
규제 포획은 반드시 금품이나 불법적인 청탁이 있어야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전공과 경력, 유사한 조직문화와 기술적 전제, 반복되는 인적 교류만으로도 집단적 동조가 형성될 수 있다. 규제기관이 산업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합리적인 협력으로 여기고, 근본적인 반대의견을 비전문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취급할 때 규제의 독립성은 형식만 남게 된다.
특히 원자력 안전규제가 원전산업 육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기 시작하면, 안전성의 입증보다 사업의 예측 가능성과 신속한 인허가가 더 중요한 가치로 올라설 수 있다. 그러나 규제기관의 역할은 산업정책을 원활하게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정책이 정한 일정과 비용을 바꾸더라도 국민의 안전을 우선하는 데 있다.
원자력 카르텔의 위험은 누군가 비밀리에 결탁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서로 다른 기관이 같은 전제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면서 반대의견을 비전문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배제하는 폐쇄성에 있다.
4. ‘국가전략산업’이라는 지위는 검증보다 지원을 앞세운다
원자력이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되면 개별 사업은 통상적인 비용·편익 평가를 넘어서는 지위를 얻게 된다. 원전은 전력공급 수단이면서 에너지안보, 탄소중립, 수출산업, 기술주권, 일자리와 공급망을 지키는 사업으로 설명된다. 핵추진잠수함과 농축·재처리까지 포함하면 외교·안보와 군사적 자주성도 사업의 근거로 추가된다.
이처럼 하나의 사업에 여러 정책목표가 결합하면 어느 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다른 명분으로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 경제성이 부족하면 기술주권을 강조하고,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미래 수출 가능성을 제시한다. 안전성 논란이 생기면 탄소중립을, 전력수요가 부족하면 산업생태계와 공급망 유지를 내세울 수 있다.
대형 원전, 원전수출, 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는 기술성숙도와 목적, 위험과 시장이 서로 다른 사업이다. 그런데 이 사업들을 하나의 원자력 생태계로 묶으면 개별 사업의 실패를 인정하기 어려워진다. 한 사업을 중단하는 결정이 원자력산업 전체와 국가 기술주권을 포기하는 행위처럼 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존 원전의 안전운전과 해체,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위해 필요한 기술과 인력을 유지하는 일은 국가의 책임이다. 하지만 이 필요성이 신규 원전과 SMR, 비경수형 원자로, 원전수출을 계속 확대해야 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산업생태계를 유지하려면 사업을 발주해야 하고, 사업을 발주하려면 산업생태계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목적과 수단을 뒤바꾼다. 산업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가 계속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자력산업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
| 분야 | 국가의 책임과 판단 기준 |
| 기존 원전 안전·사고대응 | 경제성과 무관하게 필수역량 유지 |
| 해체·폐기물·환경복원 | 장기적인 국가책임으로 독립 육성 |
| 기존 원전 운영·정비 | 실제 운영수요와 안전성을 기준으로 유지 |
| 신규 대형 원전 | 전력계통과 대안보다 우월한지 별도 검증 |
| 원전수출 | 수주액이 아닌 국가 순편익과 위험으로 평가 |
| SMR·비경수형 원자로 | 연구·실증·상용화를 분리하고 중단조건 적용 |
| 핵융합 | 과학연구와 발전산업 계획을 엄격히 구분 |
| 핵잠수함·농축·재처리 | 산업정책이 아닌 외교·안보 관문을 별도 적용 |
‘국가전략산업’이라는 명칭은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시장성과 안전성, 외교적 타당성을 충분히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면책의 언어가 된다.
5. 독립적인 반대 검증자가 정책구조 안에 있어야 한다
이 문제의 해법은 원자력 연구자와 기술자를 정책결정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원자로를 설계하고 운전해 본 전문가, 핵연료와 재료, 안전해석을 연구한 전문가의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사업을 개발하고 연구비를 받는 전문가가 그 사업의 국가적 필요성과 경제성, 안전성, 시장전망까지 모두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업 추진자와 검증자를 제도적으로 분리하고, 원자력사업으로 직접적인 연구비나 매출을 얻지 않는 제3의 전문가가 기술적 전제와 국가적 비용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다음 장치가 필요하다.
연구비·용역·자문·주식보유와 취업관계를 포함한 이해충돌을 공개한다.
사업 제안기관과 예비타당성·안전성·시장성 검증기관을 분리한다.
정책위원회에 독립적인 안전·전력시스템·재정·외교·비확산 전문가를 참여시킨다.
원자력 예산을 심사할 때 대안기술과 기회비용을 동일한 조건에서 비교한다.
사업별 비용·일정·성능목표와 단계별 중단조건을 착수 전에 공개한다.
실패사업은 종료 이유와 의사결정 과정, 추가비용과 책임주체를 사후평가한다.
공기업 투자와 정책금융, 정부보증을 포함한 국가 총위험노출액을 공개한다.
중대사고·해체·폐기물·사업손실의 최종 부담주체를 사전에 명시한다.
정부가 독립적 평가와 다른 결정을 내리면 그 이유와 최종 결정권자를 기록한다.
시민사회 참여도 형식적으로 한두 명을 위원회에 포함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검토자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거나 의견을 낼 조사인력과 예산이 없다면, 시민위원은 이미 결정된 정책에 절차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할에 머물 수 있다.
실질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자료 접근권, 독립적인 조사와 자문을 위한 예산, 반대의견 제출권과 공개권이 보장돼야 한다. 기술적 쟁점을 이해하고 사업자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전문역량도 장기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찬성과 반대의 숫자를 똑같이 맞추는 형식적 균형이 아니다. 사업을 추진하고 그 성과를 얻는 사람과 사업실패의 비용과 위험을 부담하는 사람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6. 원자력체계가 국가를 끌고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원자력산업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은 기술이나 경제성만이 아니라 국가의 의사결정 구조 안에 깊이 자리 잡은 폐쇄적인 거버넌스일 수 있다. 사업자는 사업을 제안하고, 연구기관과 대학은 필요성을 뒷받침하며, 정부와 공기업은 예산과 물량을 제공한다. 규제기관은 사업의 필요성을 처음부터 다시 묻기보다 이미 추진이 결정된 사업의 허용조건을 검토하게 된다.
사업이 성공하면 수주와 매출, 연구성과와 조직 확대는 참여기관에 돌아간다. 반면 실패하면 손실은 공기업과 국가재정에 남고, 사고와 폐기물의 책임은 국민과 미래세대에게 이전된다. 정책 담당자는 교체되고, 실패한 사업에 참여했던 기관들은 다시 기술생태계 유지와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원자력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는 것은 단순히 유망한 산업을 지원하는 결정에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사업을 제안하고, 내부 전문가를 통해 필요성을 입증하며, 실패하더라도 국가 지원으로 존속할 수 있는 강력한 이익공동체에 장기적인 국가보증을 제공하는 결정이 될 수 있다.
국가전략산업이라면 오히려 일반 산업보다 더 엄격한 검증과 책임구조를 갖춰야 한다. 사업규모가 크고 기간이 길며 실패비용을 국민이 부담하기 때문이다. 성공 가능성만 강조하는 기관이 아니라 실패 가능성과 중단조건까지 설명하는 독립적인 검증자가 정책구조 안에 있어야 한다.
이익과 성과를 얻는 주체가 사업의 위험과 실패책임도 함께 부담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예산과 더 큰 사업이 더 큰 국익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다. 책임 없는 지원체계를 그대로 둔 채 원자력을 국가전략산업으로 확대하면, 국가는 원자력산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체계가 요구하는 예산과 사업을 계속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 수 있다.
따라서 원자력정책의 핵심 과제는 산업계의 목소리를 줄이는 데만 있지 않다. 사업을 추진하는 기관과 이를 중단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검증자를 같은 정책구조 안에 두는 데 있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원자력사업의 이익은 계속 참여기관에 집중되고, 실패와 장기위험의 책임은 계속 사라질 것이다.
5절. 원자력 전 분야의 동시 추진이 빼앗아 가는 국가의 선택
― 정부예산의 과잉 투입과 기회비용
정부가 특정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는 순간, 그 산업에 투입되는 것은 연구개발비만이 아니다. 정책금융과 정부보증, 공기업 투자, 규제기관의 심사인력, 대학의 연구인력, 실증부지와 전력계통, 외교협상력과 최고위급 정치 일정까지 함께 동원된다.
따라서 원자력산업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를 판단할 때는 정부 예산서에 적힌 원자력 연구개발비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신규 원전과 계속운전, 원전수출, 소형모듈원자로(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 사용후핵연료 저장과 처분을 동시에 추진할 경우 국가가 부담하는 총비용과 다른 정책이 포기해야 하는 기회를 함께 봐야 한다.
어떤 기술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과 그 기술을 국가의 최우선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판단이다. 모든 기술이 중요하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국가의 재정과 인력, 시간과 정책역량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1. 한국은 지금 원자력의 거의 모든 분야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원자력정책은 하나의 분명한 목표에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이 아니다.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과 신규 대형 원전 건설, 해외 원전수출, 혁신형 SMR 개발과 실증, 용융염원자로·고온가스로·고속로·마이크로원자로 등 비경수형 원자로 개발, 핵융합 연구와 상용화 준비가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 핵추진잠수함,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능력 확보 주장까지 더해지고 있다. 기존 원전의 안전관리와 해체, 중저준위 및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도 피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로 남아 있다.
이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 분야 | 현재 요구되는 국가 역할 | 주요 위험 |
| 기존 원전 안전·계속운전 | 안전심사, 설비개선, 사고대응 | 노후화, 중대사고, 규제비용 |
| 신규 대형 원전 | 부지·금융·건설·계통투자 | 건설비 증가, 공기 지연, 경직성 |
| 원전수출 | 정책금융·보증·외교지원 | 수익성 저하, 지체상금, 국가보증 |
| 경수형 SMR | 연구개발·인허가·실증로 | 성능·경제성·시장 미입증 |
| 비경수형 원자로 | 연료·재료·계통 연구와 실증 | 기술성숙도 부족, 공급망 부재 |
| 핵융합 | 장기 과학연구·공학실증 | 상용화 시기와 비용 불확실 |
| 핵잠수함 | 국방·외교·연료공급 체계 | 막대한 비용, 비확산·동맹 문제 |
| 농축·재처리 | 국제협상·시설·안전조치 | 경제성, 폐기물, 확산 위험 |
| 해체·폐기물·환경복원 | 장기간의 국가책임 | 비용 증가, 부지선정, 미래세대부담 |
각각을 따로 보면 모두 나름의 추진 명분이 있다. 대형 원전은 전력안보, 원전수출은 일자리와 수출, SMR은 미래시장, 비경수형 원자로는 기술주권, 핵융합은 궁극의 에너지, 핵잠수함은 안보, 농축·재처리는 원자력 주권으로 설명된다.
문제는 각각의 명분이 서로의 비용을 없애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업별로 연구시설과 실증설비, 전문인력과 공급망, 규제기준과 국제협상이 별도로 필요하다. 원자력이라는 공통 명칭 아래 묶여 있지만 실제로는 기술적 기반과 사업목적, 시장과 규제체계가 서로 다른 거대사업들이다.
대형 원전을 잘 건설한다고 핵융합이 빨리 상용화되는 것은 아니다. 경수로 운전경험이 있다고 용융염원자로의 재료부식과 연료염 처리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핵추진잠수함에 필요한 원자로와 핵연료, 정숙성, 조선기술과 군사운용체계는 상업용 SMR과 전혀 다른 검증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이 모든 사업을 ‘원자력 생태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동시에 추진하면, 분야별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중단해야 할 사업을 가려내기 어려워진다.
2. 예산이 여러 사업으로 나뉜다고 위험이 분산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기술에 동시에 투자하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포트폴리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금융투자에서의 분산과 국가 연구개발사업의 분산은 같지 않다.
금융투자는 성과가 낮은 자산을 비교적 쉽게 처분하고 다른 자산으로 이동할 수 있다. 반면 원자력사업은 연구기관과 전담조직, 대학원 과정, 시험시설, 실증부지와 공급망이 일단 만들어지면 중단하기 어렵다. 사업을 종료하면 그동안 양성한 인력과 조직이 사라진다는 주장이 나오고, 이미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후속 실증사업과 상용사업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이어진다.
처음에는 소규모 연구비로 시작한 사업도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치며 확대될 수 있다.
개념연구→설계개발→핵심기기 시험→실험시설→실증로 건설→상용화 지원
각 단계에서는 “여기까지 투자했으니 다음 단계에서 성과를 확인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기술개발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한 연구가 어느 순간 기술을 반드시 상용화해야 하는 국가적 의무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사업을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추진하면 위험은 분산되지 않는다. 아직 상용성이 입증되지 않은 여러 기술에 대한 국가의 장기지출 약속이 동시에 누적된다. 개별 사업의 초기 예산은 작아 보이지만, 실증과 상용화를 전제로 할 경우 미래의 재정 부담은 훨씬 커진다.
더구나 각 사업은 서로 다른 기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예산을 확보할 때는 같은 산업생태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사용한다. 대형 원전이 부족하면 SMR을 추진하고, SMR의 상용화가 늦어지면 비경수형 원자로와 마이크로원자로를 제시하며, 핵분열의 한계가 지적되면 핵융합을 장기대안으로 내놓는다. 하나의 기술이 성공하지 못해도 정책의 중심이 다른 원자력기술로 옮겨갈 뿐, 전체 투자방향은 재검토되지 않는다.
기술의 종류를 늘리는 것이 반드시 국가의 선택지를 늘리는 것은 아니다. 중단조건 없이 여러 사업을 동시에 시작하면 미래 정부가 부담해야 할 재정적·정치적 약속만 늘어날 수 있다.
3. 원자력 예산은 정부 연구개발비보다 훨씬 넓게 계산해야 한다
원자력에 대한 국가 지원은 부처의 연구개발 예산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공기업이 발전소와 실증로를 건설하면 정부의 직접 지출이 아닌 기업 투자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공기업의 투자손실은 부채와 전기요금, 정부의 자본지원이나 사업조정 비용으로 국민에게 돌아올 수 있다.
원전수출에 제공되는 저리금융과 대출보증도 당장 손실로 기록되지 않는다.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대출이 회수될 수 있지만, 건설비 초과와 공기 지연, 환율변동이나 발주국의 정치·재정 상황에 따라 국가의 위험노출액은 커질 수 있다.
신규 원전과 SMR이 건설되면 발전소 자체 비용 외에도 송전망과 계통보강, 예비력, 비상대응, 규제심사와 방사성폐기물 관리비용이 발생한다. 핵추진잠수함과 농축·재처리는 시설 건설비뿐 아니라 핵연료 공급, 물리적 방호, 안전조치, 폐기물 처리, 해체와 환경복원, 외교협상 비용까지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가 부담하는 원자력의 총비용은 정부 연구개발비만이 아니다. 공기업의 투자와 부채, 원전수출 등에 제공되는 정책금융과 보증의 위험, 전력계통 보강비용, 부지 확보와 규제에 드는 비용, 해체와 방사성폐기물 관리 및 환경복원 비용, 사고와 사업실패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비용까지 모두 합산해야 한다.
정부 예산에 당장 나타나는 금액만 계산하면 원자력사업은 실제보다 저렴하게 보인다. 반면 장기간에 걸쳐 공기업과 전기소비자, 지역사회와 미래세대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뒤로 밀린다.
정부 예산에 당장 나타나는 금액만 계산하면 원자력사업은 실제보다 저렴하게 보인다. 반면 장기간에 걸쳐 공기업과 전기소비자, 지역사회와 미래세대가 부담할 비용은 정책결정에서 뒤로 밀린다.
사업별 예산을 각각 다른 부처와 공기업에 나눠 놓으면 국가 전체가 원자력에 얼마나 노출돼 있는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산업부는 발전과 수출, 과학기술 부처는 연구개발, 국방부는 핵잠수함, 외교부는 원자력협정, 공기업은 건설과 금융, 폐기물 관리기관은 저장과 처분을 담당한다. 각 기관은 자신의 사업 필요성만 설명할 뿐, 국가 전체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주체는 불분명해진다.
4. 가장 큰 비용은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기회비용이다
원자력에 투입된 돈이 모두 낭비라는 뜻은 아니다. 기존 원전의 안전운전과 사고대응, 해체와 폐기물 관리에는 앞으로도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원자력 확대 여부와 무관하게 국가가 부담해야 할 필수비용이다.
그러나 국가가 원자력의 모든 분야를 동시에 확대하면, 다른 분야에 사용할 수 있었던 재원과 인력, 정책적 관심이 줄어든다. 이것이 기회비용이다.
기회비용은 단순히 “원자력 예산을 줄여 재생에너지에 쓰자”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에너지체계에서 실제로 부족한 것은 발전기술 하나가 아니라 전력계통의 유연성과 수요관리, 저장능력과 지역 간 전력망, 산업효율과 에너지데이터, 기후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분산형 기반이다.
같은 재원으로 선택할 수 있는 분야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노후 산업설비와 건물의 에너지효율 개선
전력수요를 줄이는 고효율 모터·히트펌프·냉각기술
에너지저장장치와 양수발전, 장주기 저장기술
재생에너지 출력변동에 대응하는 유연한 전력계통
지역별 송·배전망과 분산전원 확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산업의 전력효율 및 폐열회수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홍수·산불·해수온 상승 대응
기존 원전의 실질적인 안전설비 개선과 독립적 규제역량
방사성폐기물 저장·운반·처분 기술과 장기 안전연구
첨단 재래식 전력과 감시·정찰·사이버방어 역량
이 가운데 일부는 이미 기술적으로 성숙해 있으며 투자 직후부터 에너지비용과 전력피크를 줄일 수 있다. 반면 실증되지 않은 원자로와 핵융합, 핵잠수함·재처리는 장기간의 개발을 거쳐야 하고 성공하더라도 편익이 나타나는 시점이 늦다.
국가전략은 먼 미래의 가능성만 보고 정할 수 없다. 향후 5년과 10년 동안 어떤 투자가 전력수급과 산업경쟁력, 안보와 국민안전을 가장 크게 개선하는지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
원자력 전 분야의 동시 추진은 예산뿐 아니라 희소한 전문인력도 소모한다. 원자로 설계자와 재료·열수력·안전해석 연구자, 규제심사 인력은 단기간에 양성할 수 없다. 새로운 개발사업이 이들을 흡수하면 기존 원전의 노후화 관리, 중대사고 연구, 폐기물 처분과 규제검증에 투입할 인력이 줄어들 수 있다.
새로운 원자로를 개발한다는 명분 아래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의 안전과 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약화된다면, 이는 미래기술에 투자하기 위해 현재의 국가책임을 소홀히 하는 결과가 된다.
5. 미래의 불확실성은 연구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배치의 근거는 아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비판하면 흔히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일정한 수준의 탐색연구와 기초연구에는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과 기술의 상용화를 국가가 약속하는 것은 다르다. 미래시장이 불확실할수록 초기 연구는 폭넓게 할 수 있지만, 실증로와 상용시설로 넘어갈수록 판단은 더 엄격해져야 한다.
특히 다음 단계로 갈수록 국가가 부담하는 비용과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이 급격히 커진다.
| 단계 | 국가가 감수할 수 있는 위험 | 반드시 확인할 사항 |
| 기초·개념연구 | 실패 가능성이 큰 소규모 연구 | 과학적 원리와 핵심현상 |
| 공학개발 | 핵심기기와 재료 개발비 | 장시간 성능과 제작 가능성 |
| 실험시설 | 통합계통 구축비 | 실제 운전자료와 안전특성 |
| 실증로 | 대규모 건설·운영비 | 건설비, 공기, 이용률, 정비성 |
| 상용화 | 반복건설과 시장지원 | 민간 주문, 가격경쟁력, 위험부담 |
| 전력계획 반영 | 국가 공급책임 | 상용성입증과 대체수단 비교 |
초기 연구단계에 있다는 사실은 해당 기술을 전력계획에 반영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적 불확실성이 크다는 뜻이다. 실증 이전에 상용배치 규모와 시기를 먼저 정하면 연구의 결론도 사실상 정해진다. 실증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전력계획과 정책공약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예산을 투입할 압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초연구에는 실패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규모 국책사업에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중단할 의무가 있어야 한다. 실패 가능성은 예산을 계속 투입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더 엄격한 관문평가를 해야 할 이유다.
6. 선택하지 않는 전략은 결국 모든 분야를 약하게 만든다
국가가 원자력 전 분야를 동시에 추진하면 겉으로는 기술주권이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정된 재원과 인력이 여러 분야로 분산되면 어느 분야에서도 충분한 실증과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와 선택적으로 추진할 사업의 우선순위가 뒤집히는 데 있다.
기존 원전의 안전, 사고대응, 해체와 방사성폐기물 관리는 수익성이 없어도 포기할 수 없는 국가의 의무다. 반면 신규 원전과 수출, 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잠수함과 농축·재처리는 대안보다 우월한지를 입증한 뒤 선택해야 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새로운 사업은 성과를 발표하기 쉽고 예산과 조직을 확대할 수 있지만, 기존 시설의 안전과 폐기물 관리는 장기간 비용만 발생하고 단기간의 정치적 성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미래기술에 대한 약속은 커지는 반면 현재의 책임은 뒤로 밀릴 수 있다.
정부는 원자력 전체를 하나의 전략산업으로 묶어 일괄 지원할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순서로 국가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기존 원전의 안전과 사고대응, 폐기물 관리에 필요한 비용을 먼저 확보한다.
신규 원전은 전력수급과 계통비용, 다른 대안을 포함해 필요성을 입증한다.
원전수출은 총수주액이 아니라 국내 순수익과 국가의 위험노출액으로 평가한다.
SMR·비경수형 원자로·핵융합은 단계별 목표와 중단조건을 적용한다.
핵잠수함·농축·재처리는 산업육성 논리가 아니라 외교·안보 관문평가를 거친다.
모든 원자력사업을 합산한 중장기 재정소요와 공기업 부채, 정부보증을 공개한다.
동일한 재원을 에너지효율·전력망·저장·기후대응에 투자했을 때의 편익과 비교한다.
국가전략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선택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성공 가능성이 낮거나 대안보다 불리한 사업을 중단해 더 중요한 선택지를 지키는 일이다.
원자력의 모든 분야에 조금씩 투자하는 정책은 미래 가능성을 넓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자원을 장기간 묶어둘 수 있다. 특히 각 사업에 조직과 시설, 공급망과 지역개발계획이 결합되면 후속 정부가 사업을 중단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한번 시작된 사업을 중단하지 못하는 국가는 기술을 많이 보유한 국가일 수는 있어도 전략적으로 강한 국가는 아니다. 진정한 기술주권은 모든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연구하고 어떤 사업을 실증하며 어떤 사업을 포기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원자력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일괄 지정해 전 분야를 동시에 확대하는 정책은 바로 그 선택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자력에 더 많은 명분을 부여하는 일이 아니라, 국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분야를 우선하고 나머지 사업에는 냉정한 우선순위와 중단조건을 적용하는 것이다.
6절. 국가전략산업화가 아니라 국가에 필요한 원자력만 남겨야 한다
― 확대의 논리에서 선택과 책임의 원칙으로
원자력산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원자력 기술과 인력을 모두 없애자는 주장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다수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고, 상당한 양의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을 발생시켰다. 원전의 안전운전과 사고대응, 해체와 폐기물 관리에는 앞으로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이상 전문적인 기술과 인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적 책임을 신규 원전과 원전수출, 소형모듈원자로(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추진잠수함, 농축·재처리까지 계속 확대해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하는 데 있다. 기존 원전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원자력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원자력 전 분야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국가는 원자력산업 전체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에게 필요하고 다른 대안보다 우월하며, 비용과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원자력 분야만 선택해야 한다. 반대로 필요성이 입증되지 않았거나 대안보다 불리한 사업, 실패책임이 국민에게 전가되는 사업은 축소하거나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1. 원자력산업의 유지 자체가 국가목표가 될 수는 없다
산업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계속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자력 분야에서는 산업생태계 유지가 신규 사업의 독립적인 추진 근거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원전 건설물량이 줄어들면 공급망과 전문인력이 사라질 수 있으므로 신규 원전을 건설해야 하고, 국내 건설이 부족하면 수출을 지원해야 하며, 대형 원전시장이 불확실하면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를 개발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어진다.
이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원자력산업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산업이 아니라,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수요를 만들어주는 산업이 된다. 기술과 인력을 유지한다는 명분이 새로운 연구개발과 실증사업, 건설사업을 계속 발주해야 한다는 요구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기존 원전의 안전운전과 정비, 해체와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위해 일정한 공급망과 전문인력은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필요한 역량의 범위는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있다. 가동원전의 수와 잔여 운영기간, 해체일정,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의 발생량을 기준으로 필요한 기술과 인력, 시설을 계산해야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반드시 유지해야 할 역량은 국가가 책임지고 보존하되, 신규 사업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산업규모를 확대해서는 안 된다.
원자력산업의 존속이 국가정책의 목적이 되면, 필요해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사업을 만들어내는 순환논리에 빠질 수 있다.
2. 반드시 해야 할 원자력과 선택할 수 있는 원자력을 구분해야 한다
한국이 이미 발생시킨 원자력의 위험과 폐기물은 정책을 바꾼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원자력정책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어야 한다.
국가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원자력 분야는 다음과 같다.
가동원전의 안전운전과 노후화 관리
중대사고 예방과 비상대응 능력의 강화
독립적인 안전규제와 검사역량의 유지
원전 해체와 오염시설의 환경복원
중저준위 및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안전한 관리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운반·처분에 필요한 장기 안전연구
원자력시설 종사자와 지역주민의 방사선 안전관리
사고와 오염 발생 시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배상·복구체계
이러한 분야는 시장성이 부족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원자력을 이용하면서 이미 발생시킨 책임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음 분야는 반드시 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대안과 비교하여 선택해야 하는 사업이다.
신규 대형 원전 건설
계속운전을 통한 원전 이용기간 연장
해외 원전수출
경수형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의 상용화
핵융합발전의 조기 산업화
핵추진잠수함 도입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능력 확보
이 사업들은 원자력산업에 도움이 되는지가 아니라 국가 전체에 도움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전력공급, 산업경쟁력, 외교·안보, 재정, 환경과 안전 측면에서 다른 대안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구분 | 주요 분야 | 국가의 판단 원칙 |
| 반드시 해야 할 책임 | 안전운전, 사고대응, 규제, 해체, 폐기물, 환경복원 | 수익성과 관계없이 필요한 역량과 재원을 확보 |
| 조건부로 선택할 사업 | 계속운전, 신규 원전, 원전수출 | 안전성·필요성·경제성·국가위험을 개별 검증 |
| 연구단계의 기술 | 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 연구·실증·상용화를 분리하고 단계별 중단조건 적용 |
| 외교·안보 사업 | 핵잠수함, 농축, 재처리 | 산업논리가 아니라 안보효과·외교비용·비확산 위험으로 판단 |
이 구분이 없으면 기존 원전의 안전과 폐기물 관리에 필요한 예산이 신규 기술개발과 수출지원에 밀릴 수 있다. 국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분야보다 정치적으로 성과를 발표하기 쉬운 신규 사업이 우선되는 것이다.
3. ‘국산화’와 ‘기술주권’도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모든 원자력 기술을 국내에서 보유해야 기술주권이 생긴다는 주장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술주권은 모든 기술을 직접 개발하고 모든 시설을 국내에 건설하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어떤 기술이 국가적으로 필요한지 판단하고, 외국 기술을 도입할지 공동개발할지, 국내에서 독자 개발할지, 또는 개발하지 않을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기술주권이 성립한다.
모든 기술을 국산화하려 하면 한정된 연구인력과 예산이 분산된다. 국내 수요가 없고 해외시장도 불확실한 기술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하면, 기술확보 이후에도 실증시설과 공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적인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 기술을 보유하는 비용보다 기술을 계속 유지하고 사업화하는 비용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특히 원자력 기술은 연구실에서 핵심원리를 확인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원자로와 핵연료시설을 건설하고 장기간 운전하면서 안전성, 신뢰성, 정비성, 제작성과 경제성을 검증해야 한다. 원자로 유형이 달라지면 연료와 재료, 냉각재, 안전해석, 사고대응, 폐기물 관리와 규제기준도 새로 개발해야 한다.
따라서 기술주권을 이유로 사업을 추진하려면 최소한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 기술이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가?
해외기술 도입이나 공동개발보다 독자 개발이 유리한가?
실증과 상용화까지 필요한 총비용은 얼마인가?
국내외에서 실제 구매할 고객이 존재하는가?
안전규제와 핵연료, 폐기물 관리체계를 갖출 수 있는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어느 단계에서 중단할 것인가?
같은 자원으로 더 시급한 기술을 확보할 기회를 잃지는 않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주권을 내세우면, 국산화는 국가의 선택권을 넓히는 수단이 아니라 특정 사업을 중단하지 못하게 하는 명분이 될 수 있다.
진정한 기술주권은 모든 기술을 보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기술과 불리한 사업을 포기할 수 있는 국가의 판단능력이다.
4. 원자력사업마다 시작조건과 중단조건을 함께 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원자력정책은 사업을 시작하는 이유는 자세히 설명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면 중단할 것인지는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 시장이 예상보다 작아지거나 개발비가 증가하고 일정이 지연돼도 사업목표가 조정될 뿐, 사업 자체는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구조에서는 기술개발이 실패했는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당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상용화 시기를 늦추고, 경제성이 부족하면 미래의 대량생산 효과를 제시하며, 시장이 없으면 정부가 실증사업과 초기물량을 제공한다. 실패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업으로 변하는 것이다.
국가전략사업이라면 착수 전에 다음 사항을 공개해야 한다.
기술적으로 반드시 달성해야 할 핵심 성능
단계별 예산과 전체 사업비의 상한
실증시설의 건설기간과 운전목표
예상 발전단가와 경쟁기술의 비교기준
민간기업과 공기업, 정부가 부담할 위험의 범위
해외시장과 실제 구매의향
안전성 검증과 규제기준 개발일정
핵연료 공급과 폐기물 처리방안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관문평가 기준
목표 미달 시 사업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는 조건
중단조건은 연구개발을 방해하는 장치가 아니다. 실패 가능성이 큰 기술에 도전하기 위해 오히려 필요한 제도다. 연구자가 실패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정부가 이미 투자한 비용 때문에 계속해서 더 큰 비용을 투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증하지 않은 SMR을 미래 전력계획에 먼저 반영하거나, 핵융합의 공학적 난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산업의 성장전략을 세우는 방식은 연구결과와 무관하게 상용화를 예정하는 것과 같다. 핵추진잠수함과 농축·재처리도 국내 기술개발에 앞서 한미 원자력협정, 국제 비확산체제, 연료공급 가능성, 전체 국방예산과 안보효과를 관문으로 설정해야 한다.
시작할 자유만 있고 중단할 의무가 없는 사업은 연구개발이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보증에 가깝다.
5. 원자력산업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원자력이어야 한다
원자력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일괄 지정하면 원전 건설과 수출, SMR,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잠수함과 농축·재처리가 하나의 거대한 정책목표로 묶일 수 있다. 각 사업의 필요성과 위험이 달라도 원자력 생태계와 기술주권이라는 명분 아래 상호 지원하게 된다.
이 구조에서는 개별 사업을 중단하기가 어려워진다. SMR의 경제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원자력산업 전체를 포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재처리의 비용과 폐기물 문제를 지적하면 원자력 주권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원전수출의 수익성을 따지는 것조차 국가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행위처럼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전략은 산업계가 추진하려는 모든 사업을 지원하는 계획이 아니다.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범위를 정하고, 서로 경쟁하는 정책수단 가운데 우선순위를 선택하며, 국민에게 가장 큰 편익을 주는 분야에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자력정책의 질문부터 바꿔야 한다.
“원자력산업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에 어떤 원자력 역량이 필요한가”를 물어야 한다.
“어떤 원자로를 개발할 것인가”에 앞서 “그 원자로가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가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얼마나 수주했는가”가 아니라 “비용과 위험을 제외하고 국내에 남는 순편익이 얼마인가”를 따져야 한다.
“기술을 보유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다른 선택보다 유리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사업을 계속할 명분이 있는가”가 아니라 “중단해야 할 근거가 나타났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어떤 원자력사업은 유지되고, 어떤 사업은 축소되며, 어떤 사업은 연구단계에 머물고, 어떤 사업은 중단될 수 있다. 그것은 원자력정책의 실패가 아니다.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우선순위를 선택하고 있다는 증거다.
6. 남겨야 할 것은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과 선택능력이다
앞으로 한국에 필요한 원자력 역량은 분명히 존재한다. 가동원전의 안전을 확보하고 중대사고에 대비해야 한다. 노후 원전을 해체하고 오염된 시설을 복원해야 한다.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을 장기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규제기관과 전문인력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분야는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필요한 국가적 과제다. 오히려 원자력 이용의 확대보다 그동안 미뤄온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더 시급할 수 있다.
신규 원전과 수출, SMR과 비경수형 원자로, 핵융합, 핵잠수함과 농축·재처리는 각각 별도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어느 하나가 원자력이라는 이름을 공유한다고 해서 다른 사업의 필요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사업별로 국민에게 돌아오는 편익과 국가가 부담할 비용, 실패위험과 대안을 비교해야 한다.
국가에 필요한 원자력만 남긴다는 것은 기술을 포기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원자력이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사업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말자는 것이다. 필수적인 안전·해체·폐기물 역량은 더 강화하되, 선택적인 개발과 건설사업에는 엄격한 필요성 검증과 중단조건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국가가 원자력산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이 국가와 국민에게 필요한 범위에서 존재해야 한다. 이미 발생한 위험과 폐기물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이행하되, 새로운 사업은 국가적 필요성과 대안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경우에만 선택해야 한다.
원자력산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곧 국가의 역량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안전과 폐기물의 책임을 뒤로 미룬 채 신규 원전, 수출, SMR, 핵융합, 핵잠수함과 재처리를 동시에 추진한다면 국가는 더 많은 기술을 보유하면서도 더 큰 비용과 위험에 묶일 수 있다.
반대로 반드시 필요한 역량을 분명히 하고, 불필요하거나 불리한 사업을 중단하며, 절약된 재정과 인력을 전력망·저장·에너지효율·기후대응·첨단 재래식 안보역량에 배분할 수 있다면 국가의 선택지는 더 넓어진다.
결국 국가전략산업을 판단하는 기준은 산업의 크기나 기술의 화려함이 아니다. 국민에게 필요한가, 대안보다 우월한가, 실패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책임지는 주체가 분명한가, 그리고 필요하지 않을 때 중단할 수 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원자력 전 분야를 하나의 국가전략산업으로 묶어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자력산업을 국가의 미래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에 필요한 원자력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선택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