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왕
신라 제4대 왕(재위 57∼80)이고 본명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석탈해 신화]
삼국유사》에 따르면 용성국(龍城國)의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7년간 기도한 끝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이 불길한 조짐이라 하여 내다 버리게 하였는데, 왕비는 알을 비단으로 싸고 궤짝에 넣어 흐르는 물에 띄웠다. 표류하던 궤짝을 BC 19년(박혁거세 39) 신라 아진포(阿珍浦:迎日)의 한 노파가 건져 보니 옥동자가 있었으므로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날로 지용(智勇)이 뛰어났는데, 성명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鵲)의 한 쪽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라고 이름지었다. 남해왕(南解王)의 사위가 되었는데, 뒤에 선왕(先王)인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곧 석씨 왕조(昔氏王朝)의 시조이다.
신라 남해왕 때에 가락국 바다 가운데에 배가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이를 보고 들을 맞이하여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 이때 마침 포구에 어부가 배를 끌어 당겨 보니까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으며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이상자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 하나와 일곱가지 보석과 노비들이 있었다. 그들을 7일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나는 원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인데 함달파(含達婆)왕이 오래동안 왕이 없다가 7년만에 커다란 알을 하나 낳자 왕과 신하들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좋은 일이 아닐것이다"라며 상자에 나와 일곱가지 보석과 노비를 넣어서 배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까지 오게된 것이오" 라고 하였다.
남해왕 5년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伽耶)와 싸워 크게 이겼다. 능은 양정(壤井:경주 북쪽)에 있다.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지 39년(기원전 19년 경) 되는 때에 금산 가리촌의 아진개에 아진의선이라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임금에게 생선을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의선 할머니는 까치가 우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해 나가보니 아진개 앞 바다에 난데없는 까치 떼들이 모여들어 이리저리 날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작은 배를 타고 포구 앞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큰 배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의선 할머니가 큰 배 근처로 다가가자 까치들은 더욱 모여들고 더욱 큰 소리로 울며 어지럽게 날았습니다.할머니는 큰 배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고 단지 배 안에 큰 궤짝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뚜껑을 열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열리지 않자 할머니는 하늘에 정성껏 빈 후 궤짝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궤짝 안에서 건강한 사내 아기가 나왔는데 주위에는 7가지 보배와 노예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의선 할머니는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 그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로부터 7일이 지나자 남자아이는 용성국의 왕자이고 아버지 함달파왕이 적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 들였는데 아기를 낳지 못해 기도해서 임신을 하였으나 7년동안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이 알이어서 흉한 일이라 여긴 임금이 버리라고 하여 비단보자기에 보석과 노예들을 같이 보내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명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의 한쪽 변을 떼어 석으로 성을 삼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석탈해 설화가 의미하는 것]
석탈해는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여 호공이라는 사람의 집터가 좋은 땅임을 알고 꾀를 써서 그 집을 차지했다. 탈해가 호공에게서 집을 빼앗을 때 자신이 본래 야장(冶匠)이었다고 주장한 점을 근거로 하여 석씨부족이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석탈해 역시 박혁거세나 김알지와 마찬가지로적어도 토착세력이 아닌 새로이 유입된 이주민세력임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아울러 김알지의 금궤 탄생설화를 놓고 철기문명을 가진 이주민집단으로 보는 견해가있듯이 석탈해가 거느리고 왔다는 칠보나 노비를 당시의 신라에선 아직은 무언가 낯선
문물이나 다른 형상의 무리를 비유했을 것으로 내다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