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를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미대입시를 준비하고 학부에서 그림공부를 할 때만 해도 도저히 서양화기법은 기질에도, 감수성에도 맞지 않다 느꼈고 독하디 독한 유화재료 냄새도 질색이었는데,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연스레 감수성의 변화 또한 동반하는 모양인듯, 언젠가부터 '유화를 그리고 싶다' 는 생각이 문득 문득 일어났던 것.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반경 안에선, 어느 회화 재료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유화만의 물질감과 밀도. 그 선명함과 압도적인 물질감에 대한 허기는, 점점 나이들고 희미해져가는 내 존재감에 대한 보상욕구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배울 복'과 '선생운'을 남달리 타고 난 나답게, 중단없이 간절하게 생각하다보니 우연처럼, 영광종합병원직원을 중심으로 한 아마추어 유화 동아리에 연이 닿게 되었다.
격주로 화요일 저녁 2시간 남짓. 몰입의 마중물을 붓자마자 일어서야 할 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교장선생님의 특별 허락 아래, 잠시 기숙사 밖으로 나오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게는 황금을 캐는 때이다. 아이들로부터 받는 모욕과 상처, 절대 화를 내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노라 다짐한 이후로 내 안에 쌓이는 소화되지 못한 앙금들......화폭에 색점을 하나씩 올리면서 내 안의 앙금을 밖으로 꺼내놓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주말에 만난 배ㅇㅇ교무님은, 우리 학교에 6년을 근무하시다가 현재는 퇴임하시고 위암 투중이시다. "암인데 너무 늦게 오셨네요....." 국립암센터 의사로부터 저렇게 말을 들었을때, 배교무님은 "제가 암인가요? 감사, 감사합니다!"라고 응하셨단다. 평생 그런 응대는 처음이라는 의사에게, "나이가 들면 암 아니면 치매인데, 내가 암이란 사실은 적어도 치매에 걸리진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라고 대답하셨다는 배교무님. 요즘도 서울에 있는 국립 암센터를 오가며 투병중이시고, 독한 항암제로 인한 어지럼증이 생겨 운전대도 놓았다고 하셨다.
"나도 평교사 10년, 원불교 총부에서 10년, 교장으로 6년.....평생 다른 사람들한테 지시하고 잔소리하면서 깃발 날리고 살았는데, 내가 아파 보니까, 안 아팠다면 평생 몰랐을 것을 알게 되어요. 지금은 움직이는 것, 일하는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려서 해야 하니까 늘 아쉬운 소리를 하고 굽신거리게 되어요. 이렇게 해서 전에 못한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과정을 거쳐 죽음으로, 다음생으로 건너간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돈도 명예도 욕심이 없다면, 그저 아이들 보고 보람얻으며 살아요. 우리 학교 아이들한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화를 내면 안돼요."
여러 가지 귀한 조언을 행여 토씨 하나라도 흘릴까 귀기울여 들으면서도, '화를 참는다'와 '암'의 상관성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고, 동시에 발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치매와 암의 관계에 대해서도 거듭 곱씹게 되었다. k선생이, '에고이즘'과 '나르시시즘'을 각각 '암'과 '치매'에 이어 설명했던 것도 선명히 떠오르고, 새로 부임한 영산성지사무소장 정교무님께서, "치매에 걸리는 순간, 고혈압, 당뇨가 낫는다"고 하신 말씀도 떠올랐다. 수렴과 발산, 집착과 방기의 대조적인 이미지가 따라 붙는 암과 치매. '절대 화를 내지 않으려 애쓰시다가 이렇게 몸이 상하신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공부가 얕아 '화가 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면, 일어난 화가 장차 화근이 되지는 않도록 다스릴 줄은 알아야 하겠다. 내 안에서 일어난 화는 물론이고, 좀더 현명한 이라면 장차 원수가 되어 돌아올 상대의 화까지도 현명하게 다독거릴 줄 알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젬병이인 내가 오늘날 이런 저런 병리적 자각증상을 앓는 것은 당연한 이치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찻집의 육타원님을 잠깐 도우러 갔던 주말, 배교무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팽팽한 전선에 서 계시면서도 그처럼 평화롭고 안정된 기운을 지닌 분을 전에도 뵌 적이 있었던가. 무디고 육중한 몸을 '끄-을-고' 가야할 길이 여전히 멀고 막막하지만, 그 방향만은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 같았다. '내 안의 화근에 의해, 내 온 존재가 통째로 삼켜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 내 불안의 근원에 있는 두려움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생에서 어떤 삶으로 옮겨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