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스터 올림피아
Mr.올림피아 래리 스콧:1965-1966 (연속 2회 우승)
초대 올림피아 우승자
출생년도 : 1938년
Mr.올림피아 서지오 올리바:1967-1969 (연속 3회 우승)
출생년도 :1941년 신장 :177.4cm 체중 :108kg 쿠바에서 태어난 그는 1961년 카스트로 정권 초기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보디빌딩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마디로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달아난 것이다. 세계적 수준의 역도선수에서 보디빌더로 전향한 경력을 갖고 있다. 분야를 바꾼 지 2년만에 주니어 미스터 아메리카,미스터 월드,미스터 유니버스 타이틀을 차지하고 1967~69년까지 연속 3회 미스터 올림피아 챔피온이 됐다. 팔둘레55.8cm,가슴둘레150cm,허리둘레71cm, 그리고,코끼리 같은 다리통까지 그의 기괴한 신체 사이즈는 지금까지도 보디빌더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젊고 혈기 왕성한 아놀드만이 1970년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그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Mr.올림피아 아놀드 슈왈츠제네거:1970-1975,1980 (총 7회 우승)
출생년도 : 1947년 신장 : 185cm 체중 : 105.7kg 당신은 보디빌더하면 가장 먼저 누구를 떠 올리는가? 최고의 보디빌딩 선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아놀드를 꼽겠다. 아놀드의 대중적 인지도가 보디빌딩 발전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오스트리아 시골 소년에서 최고의 영화배우로, 또 정치인으로...정말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아놀드의 성공은 살아있는 전설이고, 수많은 보디빌더들의 귀감이라고 생각한다.. 올림피아 챔피언 7승, 미스터 유니버스 5승.. 최고의 근매스와 근선도, 그리고 환상의 데피니션.... 100kg 남짓한 몸무게에서 저렇게 큰 가슴근육이 나오는게 너무 신기하기도 하다.. 과거에 미학이 있었다면 지금은 근육의 싸이즈가 대세인건 인정한다. 과거와 같은 수준에만 머무른다면 보디빌딩계에도 발전은 없다. 아놀드가 유명한 이유중에 하나가 신체조건에 비해 저체중을 유지하면서 근육의 사이즈가 컸다는 부분이다. 근육이 크면 체중도 따라가기 마련인데 불구하고 말이다. 아놀드의 최고 전성기의 1974년이다. 이 당시의 아놀드는 동시대의 보디빌더들보다 더 돗보였으면 돗보였지 떨어지지 않다는게 내 생각이다. 현재까지도 아놀드의 가슴과 이두박근은 모든 보디빌더들의 로망이다.. 저 당시는 보충제도 많이 발달하지 못했고, 운동방법 또한 많이 알려지기 전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몸을 만들수 있었는지........정말 엄청난 노력이 아니면 될수없는 일이다. 참고로 그는 1947년 7월 30일 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생이고 경찰서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병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스포츠로 자신의 몸을 달련하기 시작했다. 15세 때 보디빌딩을 하면서 아놀드는 마음의 결심을 한다. 바로 자신의 진로에 대한 생각을 말이다. 18세 때 병역을 담당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에 입대하여 20세 때 퇴역, 그리고 곧이어 미스터 유니버스의 타이틀을 획득. 미국으로 건너가 UCLA에서 심리학을, 비스콘신 대학에서 경영학과 국제 경영학을 이수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보디 빌딩 자리를 계속 유지, 미스터 유니버스에 5회,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7회에 걸쳐 차지해 보디 빌딩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때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렸던 80년도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에 출전하며, 은퇴생활을 끝내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사실은 아놀드가 컴백한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가 다른 선수들과 비행기에 오를 때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임원 일원으로서 쇼에 참석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아놀드가 선수 번호표를 받아서 잘 닦아둔 몸에 핀꽂을 때야 비로소 상황을 깨달았다. 그의 우승이 약간의 논란거리가 됐지만 그로써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스터 올림피아의 유산이 늘어난 것이다.
운동을 해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몇개월의 공백기간도 아닌 하물며 5년이란 공백기를 그가 다시 컴백해서 우승을 한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단 6주의 짧은 기간이었다는 건.... 6연속 우승후 은퇴, 은퇴후 영화배우 부동산 사업가,그외 사업으로 왕성한 활동,사실 은퇴의 목적(?)중에 한가지가 절친한 친구이자 훈련 파트너의 프랑코 콜롬부에게 우승 트로피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그 때문인지 아놀드 은퇴후(각각 75년,80년 두번의 은퇴) 프랑코 콜롬부가 76년 우승,81년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혹시 그가 꾸준히 보디빌더로서의 길만 걸었으면 과연 얼마만큼의 우승 트로피와 육체개조를 했을지, 거기에 오늘날과 같은 좋은 여건과 보충제가 많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도 함께 해본다.
전성기 시절 아놀드 슈워제네거
Mr.올림피아 프랑코 콜롬부:1976,1981 (총 2회 우승)
출생년도 : 1941년 신장 : 165cm 체중 : 83.2kg 아놀드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최고의 훈련 파트너였던 프랑코 콜롬부 아놀드는 프랑코를 '사르디니아의 헤라클래스' 라고 불렀다 1976년,1981년등 올림피아에서 2회 우승하였다. 근매스, 근력 그리고 정렬로 돌돌뭉친 그는 성공한 보디빌더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모두 갖고 있었다. 파워리프팅 과 다수의 근력 대회에서 활동하던중 1977년 무릅 부상을 당했지만 올림피아 무대에 컴백해 2위를 차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Mr.올림피아 프랭크 제인:1977-1979 (총 3회 연속 우승)
출생년도 : 1942년 신장 : 175.2cm 체중 : 83.2kg 많은 사람들은 제인을 균형미와 데피니션의 화신이라 부른다. 근매스를 강조하는 보디빌딩의 전통적 개념을 깨고 섬세한 근선도의 신화를 일으킨 개척자다. 숀 레이와 대럼 찰스의 몸매에 대해서도 희망의 길을 터주었다. 다른 보디빌더들은 끊임없이 벌크만 키우길 바라던 때, 프랭크는 200파운드 이하로 체중조절하는 데 만족하면서 여전히 근사한 몸매를 자랑하며 인기를 모았다. 올림피아 무대에서는 양보다는 질이 우선이라는 문구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된다.
프랭크 제인(1942년 6월 28일, 펜실베이니아 주 킹스턴 출생)는 전직 프로 보디빌더이자 교사이다.
Mr.올림피아 크리스 딕커슨:1982
출생년도 : 1939년 신장 : 168cm 체중 : 81kg 1982년 43세의 나이로 올림피아 타이틀을 차지하여 최고령 Mr Olympia로 기록된 크리스 딕커슨 원래는 오페라 가수 지망생이었으나 23살때 우연히 보디빌딩을 시작하게 된후 바로 거기에 매료되어 보디빌더의 길을 걷기 시작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참고로 그의 스승은 "빌 펄"이라는 클래식 보디빌더이다.)
Mr.올림피아 사미에르 바노트:1983
출생년도 : 1955년 일명 레바논의 사자, 사미르 밴노트가 좌우대칭미, 사이즈 및 섬세함으로 두루 조화를 이룬 완벽한 종합상품으로 포장되어 최초이자 유일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83년도 그의 우승은 억제할 수 없는 끼와 유머감각으로 최고의 챔피언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굳혔으며, 사미르는 또한 리 핸니가 기록적인 8연승행진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대회에서도 리 하니 선수를 제쳤다.
Mr.올림피아 리 핸니:1984-1991 (연속 8회 우승)
출생년도 : 1959년 신장 : 180cm 체중 : 112kg 그는 역사상 최고의 보디빌더중 한명이다. 그는 25년간 운동을 해왔으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이룩한 7번의 올림피아상 우승을 깨고 8회 연속으로 수상했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미스터 올림피아 7회 우승을 제치며 선례가 없는 8회 연속을 하면서 리 하니는 보디빌딩계의 신화이다. 그의 화려한 보디빌딩 경력으로부터 물러난 지금 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바꿨다.스포츠와 체육계에서 리는 그의 포괄적인 개인 훈련 기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통합 훈련에 대한 기여로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존경받고 있다. 프로 선수와 코치들은 비시즌이나 재활훈련 기간 동안 목표지향 운동 훈련과 영양 프로그램을 위해서 리를 찾고있다.
에반더 홀리필드(전세계챔피언)는 헤비급 타이틀 방어전 전에 자신의 훈련 프로그램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리를 찾았다. 그는 또한 필라델피아 76(미 프로농구팀)의 숀 브레들리를 부상 이후에 더욱 더 강한 농구선수 단련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 그는 또한 플로리다 마리너스(미 프로야구팀)의 게리 셰필드(현재 LA다저스)를 유격수에서 파워풀한 우익수로 포괄적인 운용능력을 향상과 변신시키는데 함께 일했다. "어째서 선수들이 하니를 선택하는가?" 하니의 신봉자 가운데 한 사람인 셰필드는 "하니를 잡지등에서 읽었고 나에게는 하니와 함께 일한다는 것이 환상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일반인과 전문 선수들을 위해서 리는 애틀란타에 2개의 건강센터를 가지고서 철저한 감독하의 웨이트 트레이닝,에어로빅, 강도 조절기구에 더하여 집중적인 영양관리 상담까지 제공한다. 그의 첫번째 시설인 리 하니 월드클라스 센터는 아틀란타시의 공식적인 건강센터라는 점에서 유일하다.
"Total Lee Awesome and Ultimate Bodybuilding"라는 2개의 운동서적을 저술했다. 그의 분야에서 인기와 존경받는 위치는 육체건강과 스포츠 위원회 회장, 미 스포츠 아카데미와 보디 국제 빌딩 연맹의 의장을 포함하는 화려하고 긴 수상과 인정에서 줘어진것이다. 38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니의 헤라클레스같은 체격은 외모는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리에게 있어서 성공은 트로피나 수상보다 더욱 만족스러운것 이어서 1994년에 그와 아내는 그들의 집 근처에 40에이커의 농장을 구매했고 모든 민족,종교,국가의 어린이들을 위해 하니 하베스트 하우스(이곳은 12에서 15세의 유소년들에게 8주간의 여름 캠프, 동물과 친해지기등 자연 순례를 특징으로 한다. ) 라는 비영리 수련장 시설을 만들었다.
" 무엇인가를 되돌려 주기를 원한다! 난 내일생에 좋은일들 취할 정도로 운이있었고 그러한 모든것들은 내가 자라오면서 배운 가치있는것들에서 나온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세대에게 그러한 것들을 돌려줄 시간이 없다면, 그 이후 우리가 언제서야 돌려줄 것인가?" 라고 그는 말한다.
보디빌딩 팬들에게 리는 8년 동안 연속으로 대회를 석권하는 신기록을 세운 대단한 선수라는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첫 올림피아 우승은 모하메드 엘 마카위를 제치면서 시작되었다. 경쟁선수들 가운데는 리 라브라다와 리치 가스파리와 같은 선수들이 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리 하니는 정말 무시무시한 강적이었죠. 리는 제가 꺾을 수 없었던 유일한 선수였어요.”라고 말하는 리 라브라다는 1989년과 1990년에 각각 리 하니의 뒤를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2위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던 저로선 목표가 늘 리 하니를 이기는 거였죠.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라이벌이었어요.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선천적으로도 우세한 리 하니를 꺾는다는 건 어려웠어요.”라고 리치 가스파리는 술회한다.
리 하니가 우승할때부터 올림피아 샌도우 트로피의 주인은 등에서 판가름 나는듯 하다. 하니 이후 등장한 도리안이나 현재의 로니 역시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등근육을 가지고 있다. 아놀드가 이두와 가슴 그리고 어깨를 강조한 이미지가 많듯이 리 하니는 등을 강조한 사진이 많다. 일례로 당시 르넬 장비에르는 리 핸니를 이기기 위해서 등훈련만 무려 30세트라는 경이적인 훈련을 했다고 한다.
리 하니를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보디빌더로 만든 배경에는 유리한 유전적 요인이 가세했다. 그의 부모님이 처음으로 훈련도구를 사주셨을 때 그는 이미 등 상부와 견갑부가 넓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광배근은 포즈를 잡을 때마다 범선이 돛을 활짝 펴듯 드넓게 펼쳐졌다. 선천적으로 좋은 체격을 타고났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고도의 훈련과 강인한 정신력에 의해다져진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8연승을 이루던 날 리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아놀드 대형이 세웠던 올림피아 7승이라는 기록을 갱신하면서 보디빌딩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긋는 쾌거를 이룩했다.
대학에서 청소년 교화를 전공한 그는 요즘 ‘토탈리 핏(TotaLEe Fit)’이라는 운동 브랜드를 확장시키는 일과 많은 자선사업에 앞장 서고 있다고 한다.
Mr.올림피아 도리안 예이츠:1992-1997 (연속 6회 우승)
출생년도 : 1962년 신장 : 178cm 체중 : 117kg 그랜드 캐년보다 많은 계곡과 능선을 가진 산맥과 같이 탈세속적인 보디빌더로 진정한 챔피언이 갖추어야할 조용하고 꾸밈 없는 태도와 강하고 충실하며 끈질긴 승부근성을 갖고있는 많은 보디빌더들의 우상인 도리안 예이츠 Dorian Yates는 Mr.Olympia를 5회 우승한 보디빌딩계의 지배자였다. 도리안은 프로 보디빌더로써 투철한 사명감과 작업관을 바탕으로 1992년부터 1997년까지 6년 이라는 시간 동안 미스터 올림피아의 상징 인 산트로 트로피를 놓치지 않았다. 도리안이 출전한 대회는 누구가 우승자인가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 2위가 될 것인가에 사람들의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것은 도리안의 우승이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도리안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도에는 시합을 바로 앞두고 이두근의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러 프로 보디빌더들은 이때가 바로 자신들이 산트로 트로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훈련의 강도를 한 층 높였지만 도리안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여 산트로 트로피를 다시금 거머줬다. 1998년도에는 수술 휴유증으로 출전을 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벌크 시대가 열린~도리안도 무적 등근육을 자랑하며 로니 콜먼보다 등근육에서 더 압선다고 본다.전체적으로 도리안이 로니 콜먼보다 근육도 멋지고 강해보이고 멋져 보인다고 생각함)
Mr.올림피아 로니 콜먼:1998-2005 (연속 8회 우승)
출생년도 : 1964년 신장 : 180cm 체중 : 129kg 도리안 예이츠 이후 프로보디빌더로써 확고한 입지를 강화한 로니 콜먼 그는 1998~2005년 까지 8회 연속에 걸쳐서 보디빌더들의 꿈인 미스터 올림피아의 우승자가 되어 샨도우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특히 다른 보디빌더를 압도하는 그 광활한 등 근육을 보면 로니 콜먼의 훈련량을 짐작가게 한다.
로니 콜먼은 미국 루이지에나의 몬로이에서 1964년 5월 13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루이지에나의 Grambling State College를 졸업했습니다. 1989년부터 경찰로써 텍사스 알링턴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그의 별명은 텍사스 병사라고 합니다.
1990년 경찰서 내의 시설에서 훈련을 해오다 로니는 친구와 함께 알링턴에 있는 메트로 플렉스 짐으로 가보았다. 그곳에서 브라이언 도브슨을 만나게 된다. 브라이언은 로니에게 보디빌더로써 정작 본격적인 훈련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 이라도 대회에 나간다면 여러선수를 이길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며 발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팔과 다리 및 삼각근이 나머지 부분 보다 유독 커보이게 될 꺼나까 주의 하라고...
1990년 그 해 로니는 NPC 내셔날 대회에 헤비급 경기에 참가하여 3윌르 차지했다. 로니는 완전 범위의 동작을 함으로써 두툼한 근육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이후로는 참가한 여러 대회에서 결승전까지 진출 하기도 했다. 95년도부터는 미스터 올림피아에서도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95년도 캐나다 프로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해에도 캐나다컵에서 로니는 우승을 하게된다.
이제부터 그의 목표는 미스터 올림피아, 그에게 넘어야할 산이 있었다. 도리안 예이츠라는 산 1996년도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그는 6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다음해인 1997년도에는 9위라는 안타까운 성적을 낸다. 그에게 있어서 샨도우 트로피는 너무나도 멀고 험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로니 콜먼은 마침내 1998년도 미스터 올림피아의 왕좌에 등극하게 된다. 1년 사이 그의 근육의 매스는 깊이를 더하였고 심판들은 로니의 손을 들어 줄수 밖에 없었다.
수도자와 같은 로니의 보디빌딩 세계는 이제부터라고 생각든다. 8년 연속에 걸쳐 올림피아를 차지하고 내년에도 그는 다시 도전 할 것이다. 그의 별명(텍사스 병사)이 말해 주듯이 끝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는 승리하라고 본다. 그는 지금 이시간에도 알링턴의 MetroFlex Gym에서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을 것입니다.
43세의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세계 최정상에서 8년째 군림하고 있다. 올림피아 8연패를 기록중인 로니콜먼. 케빈 레브로니나 플렉스 휠러, 숀레이 혹은 최근의 덱스터 잭슨등 수많은 빌더들이 그의 자리를 위협했으나 단한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2년전 뉴올리언즈쇼에서 군터에게 밀린것이 96년이후 유일한 패배로 기록되고 있다.
2002년 제이 커틀러에게 맹추격을 받았으나 이듬해 엄청난 매스로 돌아와 그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거대한 근매스로 '로니 사우르스'라는 별명이 있는 그다. 로니하면 드넓은 등근육과 엄청난 대퇴가 최대 장점이다. 또한 빗살무늬가 쫙쫙 갈라지는 둔근 역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
다만, 엄청난 복부의 벌크는 아름다운 몸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휠러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편이라, 무척 좋아라하는 선수는 아니다.
한국에도 방문한적이 있는데 휴레스트 명동에 잠깐 들렀었다. 115파운드짜리 덤벨을 들더니 가볍게 숄더 프레스를 하시더군. 파워리프터 출신답게 들어올리는 중량은 엄청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얇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운동 하는 내내 혼잣말을 하는데 거의 랩에 가깝다. "옙~~! 베이비..에브리 바디 캔 두 잇~~" 머..이런말을 리듬감있게 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가 드는 중량판들은 로니가 아니면 들 수 없는 무게들이다.
리하니의 올림피아 8연패와 타이를 이루었다.
(2006년 제이 커틀러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무려 8연속 우승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로니 콜먼...도리안의 바통을 이어받아 꾸준히 샨도우 트로피를 지키며 승승장구 하며 완전한 벌크시대를 연 주역이라 할만큼 꾸준한 육체개조로 인해 우람한 몸을 만들지만 저 갠적으론 붕어처럼 뽈록한 배와 아주 멋없는 복근형태와 흑인의 단점이 종아리라고는 하지만 그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는 종아리 근육(유전적이라 발전이 상당히 안됨)때문에 별로 안 좋아 합니다. 단 하나 공룡을 연상시킬 정도의 벌크는 인정합니다.
Mr.올림피아 제이 커틀러:2006
출생년도 : 1973년 신장 : 175cm 체중 : 120kg 역대 최고 보디빌더에 선정된 톱 보디빌더 20명 중에서 최연소 보디빌더다. 매사추세츠주 출생인 그는 1996년 내셔널 전체 우승으로 프로 자격을 얻었고, 2000년 나이트 오브 챔피언 첫 프로 쇼에서 우승해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다. 다음해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연승 가도를 달리고 있던 로니 콜먼과 막상막하한 경기를 펼쳤지만, 안타깝게도 2위에 그쳐 보디빌딩계를 들썩이게 했다. 그때 이후로 아놀드 클래식에서 3차례 챔피언을 차지했고, 샌프란시스코 프로, 영국 그랑프리,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휩쓸었다.
로니콜먼을 비롯 90년대에서 2000년대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대부분 40을 넘겼으며, 은퇴한선수도 많다. 하지만 2001년 미스터 올림피아. 혜성처럼 나타나 로니콜먼을 위협한 선수. 만년 2인자. 역대 최고 보디빌더 20인에 선정된 보디빌더가 바로 제이 커틀러이다. 그가 드디어 만년 2인자의 설움을 벗어버리고 2006년 미스터 올림피아 왕좌의 자리를 탈환했다.
73년생으로 프로보디빌딩계에선 어린(?)나이인 제이는 실제로 96년이던 한국나이 24세에 프로자격을 획득한 최연소 프로선수였다. 첫전국대회였던 96년 NPC USA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프로가 됩니다. 그 이후 2년가까이 시합출전을 자제하며 비시즌 몸무게 136키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 프로무대였던 1998 나이트 오브챔피언에서 11위라는 실망스런 기록을 남긴다. 그러자 또다시 준비기간으로 들어가고, 시합참가하며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기보다는 제대로 완벽히 준비하여 출전한다는 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1999년 아이언맨에서 3위를 하고 아놀드 클래식에서 4위를 하는등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올림피아에선 14위라는 하위권에 그친다. 하지만 정말 승부는 그때부터였다. 2000년 나이트 오브 챔피언 우승. 올림피아 8위.
그리고 2001년 미스터 올림피아. 당시 1, 2라운드 규정포즈와 균형미심사에서는 제이커틀러가 로니콜먼을 6점차로 따돌리고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원래 포징을 재미없게 하는 선수라서 3, 4라운드에서 역전당하고 만다. 그때당시 평론가들이나 팬들은 제이커틀러의 우승을 예상했으며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2002년 약물의혹과 컨디션의 문제로 올림피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2003년 올림피아에서 2위를 하고 아놀드 클래식대회는 2003년 2004년 모두 우승을 했다. 가장 장점은 큰체구에도 불구하고 등가죽에 달라붙는 복근과 정말 쫙쫙갈라진 대퇴사두근,그리고 흉근과 승모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특별한 약점이 없는 선수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백인이라는 플러스 알파도 무시못한다.
제이커틀러의 성공요인은 바로 영양에 있다고 본인이 말하고 있다. 정말 유별나게 관리한다고 하는데,소 한마리를 통째로 사서 비닐팩에 부위별로 조금씩 넣어서 대형냉장고에 보관한다고 한다. 하루에 단백질 600그램을 먹는다고 하니, 인간이 먹을수있는 분량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루에 물을 15리터를 마신다고 한다. 단백질을 많이 섭취할수록 신장에서 과도한 쓰임을 방지하기 위해 그만큼 물도 마니 마신다는 것인데 15리터의 물을 마시려면 하루종일 마니마니 마셔야지만 가능한 양이다.(킹카말리도 12리터이상 마신다고 함). 또 비타민과 미네랄 글루타민 크레아틴 등 20여가지의 보충제를 복용하고 최고 12끼의 식사를 한다. 심지어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먹고 잠들기도 한다고 한다.^^ 제이의 예전 식단표를 보면 새벽 2시 반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훈련루틴은 자주 변하기는 하지만, 시합에 임박할 경우 일주일에 5일 운동을 하고 40시간 운동을 한다고 하니 하루 7~8시간까지 하는셈이다. 아주 고강도로도 하지만, 내배엽체형이라 유산소를 많이 한다. 머슬테크를 비롯하여 9개의 후원업체가 있어서 돈은 아쉬움이 없을듯 하다. 비시즌은 거의 140정도 이고, 시즌은 116~120키로를 유지한다. 키는 172에서 175사이.(미국은 인치로 표기하니 언제나 오차는 있게 마련이다.)
p.s 다만 최근엔 로니의 벌크를 따라잡는데 너무 주력한결과 본인의 장점이 많이 사라졌다고 보여지는게 아쉽다. 또한, 미국 성인물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같은 저 머리스타일은 개인적으로 비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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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郎天 원문보기 글쓴이: 郎天
첫댓글 래리스콧 프랭크콜롬보 프랭크제인 아놀드슈왈제너 정말 추억에 MR미스터올림피아 출신들이죠 특히 아놀드 슈왈제너거는 mr오림피아를 7년패한 전무후무한 인물이죠 보디빌더로 영화스타로 지금은 정치인으로 천하를얻엇다해도 과언이아니죠
래리스콧 1938년생고령인데두 아주건강하게 살고 있군요 정말좋은 자료 즐감했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즈음의 미스터 올림피아들 몸도 멋지지만 과거에 미스터 올림피아들의 몸이 더욱 멋진것 같습니다. 뭔가 더 자연스럽고 느낌이 이질적이지 않은 느낌이 난다고 해야 될까요..? 여하튼 그런 느낌 때문에 저는 추억의 미스터 올림피아들 몸이 더욱 멋진것 같습니다..ㅎㅎ 아놀드 슈월제네거는 정말 모든 분야에서 활약을....정말 멋진 사람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