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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
20250430
한성백제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2025 한성백제박물관 국제교류전 '히타이트,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을 관람했다. '히타이트'라는 단어가 희귀한 골동품처럼 눈 앞에서 반짝거린다.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철의 나라 히타이트'가 아득한 시간의 울림으로 귓가에 맴돈다.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 히타이트' 전시회는 네 개의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네 주제를 따라 '히타이트,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 전시회를 관람한다. 호사가의 호기심과 전시회 관람의 욕심으로 관람방향 지시표를 따라 움직였다.
1.전시를 열며
2.최강의 군대를 가진 나라
3.두 개의 문자를 사용한 나라
4.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운나라
5.천신(千神)의 나라
6.전시를 마치며
이집트, 아시리아와 함께 ‘오리엔트 3대 강국’으로 꼽혔던 고대 제국인 ‘히타이트’의 유물이 서울에 온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한국사무소는 “3월 8일부터 6월 8일까지 ‘히타이트 : 오리엔트의 최강제국’ 전을 연다”고 7일 전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2세기에 걸쳐 현 튀르키예의 ‘떠오르는 태양을 향한 땅’ 아나톨리아와 북부 시리아의 대부분을 통치했던 대제국이다. 철기 제련 기술을 최초로 발달시켰으며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조를 멸망시킨 강국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덜 알려져 있다. 1834년 프랑스 발굴대가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동북쪽으로 200㎞ 떨어진 보아즈칼레에서 처음 자취를 발견한 뒤 현재까지 제국의 수도였던 하투샤 등지에서 발굴이 지속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쐐기문자 기록판, 철기 유물 등이 다수 출토되면서 숨은 역사가 드러났다. 이번 전시는 ‘히타이트 제국’의 문화유산을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선보인다. 모두 212점의 유물을 통해 히타이트 제국의 군사력과 히타이트인들이 사용했던 고대문자, 일상생활, 종교 등을 만날 수 있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는 특히 주목할 유물로 “청동기 후기 히타이트 문화를 대표하는 ‘청동무기’와 백제에서도 발견되는 ‘청동 비늘 갑옷’, 그리고 히타이트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정교한 ‘쐐기문자’와 ‘상형문자 점토판’ 등”을 꼽았다. 이번 전시는 부산 김해 국립김해박물관의 첫 전시에 이은 것이다. 인류 최초 철기문명을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 김해 ‘히타이트’ 전시회는 4개월간 3만 7340명의 관람객을 기록하면서 마무리됐다. - 서울신문 2025.3.7.
한성백제박물관은 2025년 봄, 백제문화 특별전으로 <히타이트 :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튀르키예 초룸시와 한국의 국립김해박물관, 김해시의 협력을 통해 히타이트 유적에서 발견된 212점의 대표 유물이 서울에 소개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히타이트는 발달된 금속 기술을 바탕으로 청동기 후기 시대 오리엔트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아나톨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강대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또한, 히타이트와 강력한 이집트의 대결을 다룬 카데시 전투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전쟁 기록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전시는 히타이트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면모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문자, 삶과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측면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3,700년 전 아나톨리아 고원에 존재했던 히타이트 제국을 통해 서양 고대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문화를 재조명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 한성백제박물관
히타이트는 기원전 17세기에서 기원전 13세기까지 아나톨리아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근동의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튀르키예, 시리아, 이라크, 이란 지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금속기 사용과 군사력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성백제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 히타이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의 왕궁 남서쪽 성문 '사자의 문' 조형물 앞을 통과하여 전시실로 입장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튀르키예 공화국 문화관광부·초룸시·국립 김해박물관·김해시와 함께 2025년 국제교류전 <히타이트 :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을 준비하였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 문화관광부와의 협력으로 한국에서 1만 ㎞ 떨어진 히타이트 유적에서 발견된 212점의 대표 유물이 서울에 올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아나톨리아반도에 위치하였던, 튀르키예의 고대 문명인 히타이트 제국은 오랫동안 그 존재조차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쐐기문자와 상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의 해독과 수도 하투샤 유적의 발굴을 통해 19세기에 이르러 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카데시에서 당시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와 대등한 전력으로 맞서 싸운 끝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사실을 기록한 점토판은 히타이트 제국의 강력함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앙카라 오른쪽에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현 보아즈쾨이)가 표시되어 있다.
그린스톤은 히타이트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는 신성한 돌이라고 한다. 녹색은 고대 근동에서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는 색으로, 히타이트 제국에서 신성한 의미를 지닌 녹색 돌은 왕권의 신성함과 신과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한다.
그린스톤 앞에서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 유적에 대한 멀티미디어 영상물을 관람한다.
그린스톤 앞 스크린을 통하여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 유적 영상을 관람한다. 하투샤 왕궁의 남서쪽 성문을 사자가 지키고 있다.
영상은 '제국의 수도, 하투샤' 제목으로 시작된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 유적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방의 상형문자를 보여준다. 중앙의 상형문자는 대왕을 뜻한다.
왕의 문은 전쟁의 신을 새긴 남동쪽 성문이라고 한다.
사자의 문은 하투샤 왕궁의 남서쪽 성문이라고 한다.
피라미드 모양의 남쪽 성벽은 길이 250m, 너비 80m, 높이 30m라고 한다.
스핑크스의 문은 예르카피의 남쪽 성문이라고 한다.
예르카피 요새의 지하통로 땅속의 문은 높이 3~3.3m, 길이 71m라고 한다.
유적은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곳이다. - 존 러스킨(John Ruskin, 예술·건축 평론가)
영상물 관람을 마치고 전시 공가의 전시안내판을 살핀다.
하투샤(Hattuşa, 현 보아즈쾨이)는 히타이트의 수도로,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거친 산악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에 용이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낮은 지형에 자리 잡은 북쪽의 하부 도시가 먼저 건설되고, 높은 지대의 남쪽 상부 도시로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웅장한 성벽과 문, 대형의 정치·종교 시설 등이 세워졌으며, 경제적 기반과 지배력을 보여주는 지하 곡물 창고와 인공 저수지도 발견되었습니다. 북쪽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뷔윅칼레Büyükkale에는 왕궁 시설이 건설되었고, 다량의 점토판이 출토되었습니다.
기원전 15~13세기의 히타이트의 영향권 지도 영상물을 살핀다.
'전시를 열며' 공간에서 히타이트 유적, 히타이트의 영향권 지도와 연표를 살피고 본격적으로 히타이트 주제 전시 공간을 관람한다.
1.최강의 군대를 가진 나라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의 무르실리 1세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던 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슈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히타이트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습니다. 근동 지역의 주목할 만한 제국이 된 히타이트는 또 다른 강대국 이집트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1274년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카데시에서 전투를 벌임으로써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 습니다. 대립하던 두 나라는 기원전 1259년 카데시에서 세계 최초로 공식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히타이트는 때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때로는 뛰어난 외교 전략으로 넓은 지역을 지배하며 기원전 14~1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히타이트 화살촉 대부분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화살촉의 형태는 중앙 능선과 길게 뻗은 날개를 가진 것이 가장 많은데, 이를 '히타이트식 화살촉'이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화살촉은 날개가 없는 월계수 잎 모양으로, '시리아식 화살촉'이라고도 한다.
히타이트 왕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주요 원정을 떠났습니다. 원정은 매년 봄부터 늦가을까지 이어졌고, 왕은 오랜 기간 고국을 떠나 있었습니다. 히타이트 군대는 보병과 전차로 구성되었습니다. 보병이 주력이지만, 전차부대 또한 유명했습니다. 병사들은 주로 청동으로 만든 단검과 창, 도끼로 무장했습니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창을 사용했지만, 원거리 공격용 활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투구와 갑옷도 착용하여 실제로 수도 하투샤 유적에서는 비늘 갑옷이 많이 확인됩니다.
히타이트 병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거푸집이다. 술이 달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발끝이 위로 향한 신발을 신고 방패와 창을 들고 있다. 창과 발 사이에 '좋은' 또는 '선량함'을 뜻하는 삼각형 모양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에 묘사된 카데시 전투 장면 속 히타이트 방패는 8자 모양이지만, 거푸집에 묘사된 것은 사각형이다. 하투샤에서 출토된 비늘갑옷은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주조나 단조가 아닌 청동판을 잘라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비늘마다 한 쌍의 직사각형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있으며, 가죽옷에 꿰매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은 히타이트인들이 사용하는 가장 흔한 무기의 하나로, 보병이 주로 사용하였다. 하투샤에서 발견된 투드할리야 4세 부조와 상형문자가 새겨진 방(제2실)의 슈필룰리우마 2세 부조에도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Q.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차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A. 두 나라는 다른 방식으로 전차를 사용하였어요. 이집트는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마부와 궁수 두 명만 탔어요. 반면 히타이트는 마부와 방패병 그리고 창병 세 명이 타서 속도는 느리지만 파괴력이 강했어요.
히타이트 연표를 다시 확인하며 당시 상황을 파악한다.
기원전 1274년, 지금의 시리아와 튀르키에 국경 인근에 있는 카데시에서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을 두고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충돌했습니다. 전투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카데시와 그 주변 지역은 계속 히타이트의 영향권 내에 남게 되었습니다. 15년 후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역사상 최초의 성문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현재 조약을 새긴 은판은 남아 있지 않고, 히타이트 점토판과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의 기록만 전합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상호 불가침의 원칙, 범죄자 인도, 제3국의 침략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 등이었습니다. 이는 두 제국의 영구적인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평화 조약 점토판 사본이 미국 뉴욕 UN 본부 외벽을 장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이고 나는 그의 형제이다. 그리고 그와 영원히 평화를 유지할 것이다. 형제처럼 지낼 것이며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이전보다 나은 형제로 지낼 것이며, 더욱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 히타이트본
무와탈리 2세의 히타이트와 람세스 2세의 이집트 당시의 군사 상황 안내도
히타이트 하투실리 3세 "그는 나의 형제이고 나는 그의 형제이다. 그리고 그와 영원히 평화를 유지할 것이다. 형제처럼 지낼 것이며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이전보다 나은 형제로 지낼 것이며 보다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 히타이트 점토판 중
히타이트와 이집트,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다 : 케메트의 백성이 하티로 도망치거나 하티의 백성이 케메트로 도망친다면 그들을 돌려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엄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고 그 보복으로 도망친 자의 아내와 아이들을 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집트 람세스 2세 "이는 하티(히타이트)의 대군주인 하투실리스 3세와 이집트의 대왕 우세르마아트레-세테펜레 간의 협정을 은판에 새긴 것이다. 이는 완벽한 평화와 형제애를 이룩하는 완벽한 평화와 형제애에의 협정이다." - 이집트 카르나크 석주 비문 중
2.두 개의 문자를 가진 나라
히타이트는 쐐기문자와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쐐기문자는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새겨 기록했습니다. 점토판에 물기가 있을 때 모양을 잡고, 끝이 뾰족한 새기개로 점토를 눌러 문자를 새겼습니다. 새기게의 한쪽 끝은 점토판을 매끄럽게 하고 수정하기 위해 납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점토판의 크기는 작은 것은 3~4cm 정도이고, 큰 것은 27~31cm에 달합니다."
19세기 초 흐로즈니B.Hrozny 의해 히타이트어 쐐기문자가 해독되면서 잊힌 고대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점토판 해독 결과,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대등한 제국이었습니다. 히타이트어는 현재까지 알려진 인도 유럽어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히타이트는 쐐기문자로 자신의 언어 외에도 8개 이상의 다양한 언어를 기록했습니다. 왕실 내 업무와 관련된 기록은 주로 쐐기문자를 사용했지만, 도장이나 공공장소의 기념물에는 주로 상형문자가 새겨졌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상형문자와는 전혀 다른 체계를 지닌 루위아어 상형문자로,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쐐기문자가 사라진 뒤에도 몇백 년 동안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Q. 쐐기문자는 어떻게 새겼을까요?
A. 쐐기문자는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새겨 기록하였어요. 점토판 외에도 가죽, 나무, 밀랍에 적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모두 부패되고 없어져 지금은 점토판만 남았어요. 점토판에 물기가 있을 때 모양을 잡고, 끝이 뾰족한 새기개로 점토를 눌러 문자를 새겼습니다. 점토판의 크기는 다양한데, 작은 것은 3~4cm 정도이고 큰 것은 27~31cm에 달한다고 해요.
"타바르나Tabarna 대왕의 말씀은 철과 같아서 무시하거나 깨뜨릴 수 없다."
히타이트인들은 보통 단추 모양 도장과 도장 반지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에는 소유자의 이름과 직위가 새겨져 있으며 때로는 인간이나 신의 형상도 새겨져 있습니다. 도장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직위는 '서기관'으로 이들의 직무와 관련됩니다. 상형문자만 새긴 관료나 일반 사람의 도장과 달리, 왕실 도장에는 상형문자와 함께 둘레에 쐐기문자를 새겼습니다. 쐐기문자의 사용은 왕, 왕비, 왕족 일부에게만 부여된 특권이었습니다. 도장에 새겨진 쐐기문자에는 'oo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어, 왕실 계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사각도장 : 4개의 면에 신과 동물 그리고 상형문자가 조합되어 있으며, 줄을 꿸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발 모양 도장 : 발바닥의 도장면에는 상형문자로 도장 소유자의 이름과 직위가 새겨져 있으며, 발등 부분에는 줄을 꿸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서기관 타투와(또는 타투위)의 것이다./ 도장 반지 : 도장 중앙에는 소유자의 이름과 '여성을 위한 선량함'이라는 뜻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쪽에는 석류-꽃-나비 모양이 새겨져 있다. 도장에 새겨진 상형문자와 출토 배경을 고려했을 때 왕실 여성의 도장일 가능성이 높다./ 단추 모양 도장 : 히타이트 도장의 가장 일반적인 도장이다. 앞면을 따라 홈이 있고, 홈에는 줄을 꿸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히타이트 고왕국 시기, 1500-1475 Β.C.E. 하투샤Hattuşa(현 보아즈쾨이Boğazköy), 튀르키에 보아즈쾨이 박물관
토지 기부 문서는 왕이 개인에게 토지를 기증한 특별한 유형의 쐐기문자 점토판이며, 일종의 법적 강제력을 부여하는 토지 대장으로 볼 수 있다. 앞면 중앙에는 상형문자와 쐐기문자가 결합된 왕의 인장이 찍혀 있다. 제작연대는 고왕국 시기의 마지막 왕인 텔리피누 대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이나르(Inar)'라는 사람의 토지에 대한 법적 권리를 확인하며, 동시에 그를 '사리사(Sarissa)'라는 중요한 행정 관청의 직위에 임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토지 기부 문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토판도 왕의 결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법적 공식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소송도 없어야 한다. 타바르나 대왕의 말은 (철과) 같으며, 버릴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다. 이를 변경하는 자는 처형될 것이다." - 뒷면, 15-18행
고왕국 시기의 후지야 1세가 고위 관리 하피(Happi)에게 여러 영지를 기부한 것에 관한 내용이다. 후지야 1세의 도장으로 봉인된 점토판에는 그에게 기부된 땅과 사람들의 자세한 목록이 쓰여 있다. 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토지 기부 문서와 같이 증명이 필요한 문서의 경우, 두 개의 동일한 크기의 점토판을 만들어 한 개의 점토판 위에 문서를 증명할 사람의 수만큼 끈을 놓고, 다른 한 개의 점토판을 실이 있는 점토판 위에 겹쳐서, 끈이 점토판 안쪽에 고정되고 실이 바깥 구멍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문서를 모두 작성한 후 끈에 도장을 찍은 점토 덩어리를 부착하여 고정했다.
"앞으로 아무도 하피와 그의 자녀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대왕 타바르나의 말씀은 (철과 같이) 버려질 수 없고, 깨질 수 없다. 그것을 바꾸는 사람은 누구나 참수될 것이다." -뒷면, 49-51행
1.무르실리 2세 도장이 찍힌 점토 : 점토에 찍힌 도장의 주인공은 무르실리 2세로, 중앙에는 왕의 존칭과 이름, 칭호가 상형문자로 쓰여 있다. 날개 달린 원반형의 태양은 왕을 상징하고, 삼각형 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상형 문자는 위대한 왕을 뜻한다. 점토의 측면에도 동일한 도장이 찍혀 있으며, 도장 아래 뾰족한 부분에 줄을 꿸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어 어딘가 매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무르실리 3세 도장이 찍힌 점토 : 무르실리 3세의 도장이 찍힌 점토로 상형문자를 둘러싼 바깥 쪽 테두리에는 왕의 이름과 왕실의 가계가 아카드어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영웅 하티 땅의 왕 슈필루리우마의 증손자, 영웅 하티 땅의 왕 무르실리의 손자, 위대한 왕 무와탈리의 아들인 영웅 하티의 왕, 풍우신과 태양 여신인 아린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하티 영웅국의 왕이자 대왕 타바르나 무르실리의 도장"
하투실리 3세와 왕비 푸두헤파의 공동 도장이 찍힌 점토 : 이집트와 최초의 국제 평화조약을 체결한 하투실리 3세와 그의 아내 푸두헤파의 공동 도장이 적힌 점토이다. 중앙에는 대왕을 의미하는 상형문자(날개 달린 원반형 태양)가, 왼쪽에는 하투실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여왕을 의미하는 상형문자(머리 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여성)와 푸두헤파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깥쪽에는 쐐기문자로 하투실리 대왕의 도장이라고 쓰여 있다.
투드할리야 4세 도장이 찍힌 점토 : 왕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원반형 태양 아래 상형문자로 '투드할리야 타바르나 위대한 왕'이라고 적혀 있다. 상형문자를 둘러싼 바깥쪽 테두리에는 왕의 이름과 칭호가 함께 새겨져 있다. "영웅 하투실리 대왕의 아들 영웅 대왕 타바르나 투드할리야의 도장, 하티 땅의 왕 대왕 타바르나 투드할리야의 도장"
쐐기문자는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로, 기원전 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메르어, 아카드어, 고대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히타이트어, 우가리트어, 에블라어, 루위아어, 후르리어 등 10여 개의 언어가 쐐기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하투샤 유적 문서고에서 확인된 점토판에는 히타이트어, 아카드어, 수메르어, 후르리어, 루위아어 등 8개 이상의 언어가 확인됩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기록된 언어는 히타이트어이고, 다음으로 아카드어였습니다. 아카드어는 당시 이 지역의 공용어였으며, 국제 서신과 외교에 사용되었습니다. 쐐기문자는 서기관, 성직자, 귀족, 왕족 등 상위 계급이 사용하는 문자였습니다. 점토판의 내용은 계약, 조약 및 정부 서신, 법령, 종교 의례, 왕들의 계보 등 특정 분야로 한정되고 있습니다.
히타이트어 번역이 포함된 후르리어로 작성된 6개의 이야기가 적힌 점토판입니다. 짧은 이야기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올바른 행동을 가르칩니다. 주요 내용은 신들이 범죄,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을 어떻게 처벌했는지입니다. 후르리어와 히타이트어가 함께 적혀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 쫓겨난 산사슴 한 마리가 다른 산으로 가서 살이 쪘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슴은 싸움을 벌이고 산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풀을 뜯던 이 산이 불에 타버리길, 풍우신이 그를 내리치길, 불이 그를 태우길.' 그러나 산은 이를 듣자마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산이 산사슴을 저주했습니다. '내가 살찌게 한 사슴이 이제 나를 저주하고 있다. 사냥꾼들이 그 사슴을 잡을 것이고, 기름과 가죽은 사냥꾼들에게 빼앗길 것이다.' ···(후략)···
정화 의식을 기록한 점토판 : 후르리어로 '이트칼지Ittkalzi', 히타이트어로 '구강 세척'으로 번역되는 정화의식 절차와 낭송 문구가 적힌 점토판 중 열 번째입니다. 입을 청결히 하는 것은 몸의 정화뿐만 아니라 영적 정화의 의미도 가집니다. 히타이트 종교에서 후르리의 영향이 컸던 사실과, 정화의식이 히타이트인의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투샤의 왕이 하르삼나의 왕에게 보내는 편지 : 하투샤의 왕 위우시티가 '하르삼나'라는 도시의 왕에게 동맹을 요청하는 편지입니다. 하르삼나는 카네시(현 큘테페)와 하투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곳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외교 협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권위 있는 자원은 고대 아시리아어로 '아시움asium'이라 불렸던 운철隕鐵 이었는데, 이 편지에서도 왕의 선물로 제시된 '아시움(철)'의 수락 여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3.다채로운 문화를 꽃피운 나라
히타이트는 법으로 통치되는 나라였습니다. 최초의 근대적인 법으로 평가받는 '텔리피누 칙령'에서는 세계 최초로 왕위 계승 원칙을 성문화(成文化)하였습니다. 사형죄는 8가지 범죄로 한정하고, 체벌보다는 금전적 배상이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법적으로 모든 자유 시민은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사유 재산을 보호받았습니다. 한편 히타이트는 농업국가이면서 다양한 산업을 장려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점토판 기록으로 가죽 공예(구두공, 허리띠 제작자 등), 목공예(목수, 화살제작자, 삼림관리인 등), 직조 공예(재단사, 직공 등), 도자기 공예, 세탁업, 양조 등 다양한 직업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나톨리아반도는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여 금속 공예 제작이 활발했습니다. 청동은 하투샤 유적에서 출토된 금속의 99%를 차지하며,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철은 주로 작은 크기의 물건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무기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생업 활동에는 청동기뿐만 아니라 석기도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망치와 갈돌·갈판과 같은 식품 가공 도구 등은 여전히 돌로 만들었습니다.
히타이트에서는 빵과 술 등 식문화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토기가 제작되었습니다. 히타이트 유적에서는 식기뿐 아니라 식음료를 저장하고 운반하기 위한 저장·운반 용기, 의례 용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양조 기술의 발전으로 술을 담고 저장하기 위한 많은 토기가 제작되었고, 술이나 기름香油을 담은 길쭉한 형태의 항아리가 장거리 무역에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새부리 모양 입 항아리와 왕의 기호 도장이 찍힌 큰 토기 등은 히타이트만의 특징적인 고급 용기입니다.
히타이트인은 맥주를 중요시하여 거의 모든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항아리를 천장에 매달아 보리를 발효시킨 후, 항아리 바닥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다른 용기에 떨어뜨려 맥주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시된 항아리는 '맥주 항아리'와 달리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지 않다. 이렇게 만든 맥주는 넓은 입 항아리에 담았다. 당시 맥주에는 침전물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청동이나 납으로 만든 빨대를 항아리에 꽂아 맥주를 마셨다. 전시된 넓은 입 항아리는 히타이트 부조에 나와 있는 술 마시는 항아리와 형태가 유사하다.
히타이트인들은 바늘, 가락바퀴, 추 등의 도구들을 이용하여 양모나 리넨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남성은 가운같이 긴 옷Tunic과 짧은 치마를 입었습니다. 여성은 치마와 긴 망토Dolman를 입었습니다. 옷 외에도 송곳과 바늘을 이용하여 벨트, 신발 등 다양한 가죽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남성과 여성은 모두 둥근 모양의 귀걸이, 목걸이, 고리 모양 팔찌 등의 장신구를 착용했습니다.
Q. '히타이트' 하면 철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철기 유물은 왜 거의 남아있지 않을까요?
A. 점토판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히타이트인들은 철을 매우 잘 다뤘다고 합니다. 하지만 히타이트가 있었던 시대는 사실 청동기가 가장 발전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히타이트인들은 청동기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철은 매우 귀했기 때문에 일부 도구와 장신구 등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이 또한 재활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부식이 잘 되는 철의 특성 때문에 안타깝게도 철기 유물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4.천신(千神)의 나라
히타이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티 땅의 1,000명의 신을 가진 사람들'로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점령한 지역과 주변 국가의 신들도 자신들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히타이트는 점령지에 자신들의 신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다른 신들을 포용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관용성 덕분에 히타이트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거푸집 안에는 혀를 내밀고 엎드린 사자를 밟고 서 있는, 세 명의 신이 새겨져 있다. 모두 뿔이 한 개 달린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오른쪽 두 명의 신이 중앙 제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한 팔을 공중으로 치켜들고 있다.
히타이트 최고의 신은 번개와 천둥을 다루는 풍우신(날씨의 신) 타르훈나 또는 테슙이었다. 풍우신이 나라에 내린 비는 밭을 비옥하게 하여 히타이트인들이 풍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다. 그의 신성한 동물은 황소로, 신상 대신 황소의 상을 제단에 올리고 의례를 지내기도 했다.
태양의 여신 아린나 또는 헤파트는 풍우신의 아내이다. 그는 하늘과 땅의 여신으로, 다산을 가져오는 어머니 여신이었다. 태양 원반이나 날개 달린 태양 원반 등으로 묘사되는데, 꽃병 장싱 조각에 이러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신상에 부착한 머리카락 부분이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정수리 조각의 양측에 홈이 파여 있어 신상의 귀와 맞닿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카락 끝 부분은 뾰족하게 표현하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새겨진 거푸집과 신에게 안겨있는 왕의 모습이 새겨진 거푸집
야즐르카야는 하투샤에서 동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위 신전입니다. 기원전 13세기부터 축조되었으며, 바위 신전 앞에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건물터와 석벽만이 남아 있습니다. 신전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지는데, 한쪽에는 풍우신 테슘과 태양 여신 헤파트를 비롯하여 총 66명의 신들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신들과 함께 투드할리야 4세가 새겨져 있습니다. 히타이트의 고대 신앙과 그들의 예술적 표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히타이트인들은 도시를 정복하고 나면 그곳의 모든 신상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신전에 모셨습니다. 신상을 빼앗긴 사람들이 더 이상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없어서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많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칠수록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다수의 신을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 유적에서는 30곳 이상의 사원이 확인되어 '신들의 도시'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금 수레 두 대, 은 수레 두 대, 금 탁자 하나, 하후의 신들, 은으로 만든 막강한 황소, 앞면이 은으로 된 배. (이것들은) 타바르나 대왕이 하후에서 빼앗아 태양신에게 가져왔느니라." - 하투실리 1세의 전리품 기록에서
종교는 히타이트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모든 의례의 중심에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과 술,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물 모양이나 사람팔 모양 등의 토기에 술을 담아 신에게 바쳤습니다. 이외에도 도끼나 낫모양 칼과 같은 무기를 의례에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봉헌용 작은 항아리, 팔 모양 의례용기, 새부리 모양 주둥이를 가진 주전자, 신발 모양 의례용기, 봉헌용 작은 그릇 등을 전시한다.
도끼, 화살촉, 낫 모양 칼, 황소·사자·양·동물 모양의 의례용기를 전시한다.
하투샤 상부 도시에서 발견된 '상형문자가 새겨진 방(제2실)'은 발견 당시 무덤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제의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방을 만든 사람은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인 슈필룰리우마 2세로 생각됩니다. 안쪽 뒷벽에는 태양신이, 오른쪽 벽에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보존 상태는 매우 좋지만, 비문을 완벽하게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사와 동사 어미가 거의 생략되고 단순히 단어만 나열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비문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의 군사적 승리, 신들의 도움, 그리고 신전과 도시 건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투샤 상부도시 유적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방'의 상형문자를 탁본하여 슈필룰리우마 안내판 앞에 전시한다.
전시를 마치며
'전시를 마치며' 공간에 설명안내판과 히타이트 전차 조형물, 상형문자 히타이트 루위아어 게시판이 전시된다. 쐐기문자 점토판 종이에 상형문자 도장을 찍어 자신의 소원을 적어보는 체험실이 마련되어 있다.
히타이트는 작은 도시국가들을 통합하여 약 500년 동안 하나의 국가 체계로 유지하였습니다. 히타이트가 위치했던 아나톨리아반도는 다양한 문명이 번성한 지역이었습니다. 히타이트는 이러한 특성을 활용하여 개방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였습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포용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타이트인들은 제1신인 풍우신 외에도 정복한 나라의 신들까지도 함께 모셨습니다. 이러한 개방과 관용의 정신은 아시아와 유럽의 요소가 혼합된 현재의 튀르키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앞으로도 다양한 지역의 고대 역사를 시민들께 소개하여, 이천 년 역사도시 서울을 되돌아볼 수 있는 전시를 계속해서 마련하고자 합니다.
쐐기문자 점토판 종이에 히타이트 루위아어 상형문자 도장을 찍어 자신의 소원을 적어보는 공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