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동 목사 불교비하 발언 사태를 보며
유용선
절대자와 온전한 관계를 이루어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함, 다시 말해 '구원'은 고등종교의 발생원리요 그것을 유지하는 중요한 힘이다. 그러나 구원이 종교에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종교인은 종교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절대자의 섭리에 대항하는 적의 입장에 선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절대자의 적이 되었으면서도 절대자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믿는다. 더욱이 구원이 오직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선전하는 교단이라면 마약을 파는 마피아와 다를 바 없다.
구원이 자기가 믿는 종교에만 있다고 믿어버린, 심성은 착하지만 지혜는 부족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에겐 다른 사람을 자기 종교에 입교시키는 것이 그의 삶 최대의 선행일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타종교인은 얼마나 불쌍해 보일 것이며 타종교의 지도자는 얼마나 사악해 보일 것인가. 최근 물의를 일으킨 장경동 목사가 바로 그 '심성은 착하지만 지혜는 부족한 종교인'의 전형이다.
"내가 장경동 교단을 만들면 안 되듯이 석가모니도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장 목사가 8월 11일 미국의 뉴욕 순복음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한 내용의 일부이다. 사실 장 목사가 했다는 이 말은 불교에 대한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불교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만들려 한 것이 아니라 힌두교를 개혁하려 한 것이다.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카스트를 인정하는 힌두교를 바꿀 수 없었고, 저절로 그를 중심으로 종단이 형성되었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또한 기독교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단지 절대자인 하느님을 민족의 신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형식 또한 겉치레에 치우쳐 버린 유대교를 개혁하려 했을 뿐이다. 모든 민족이 하느님에겐 다 자녀와 같은 존재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룩한 문화공동체가 바로 본래의 기독교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기쁘고 복된 소식, 즉 복음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장 목사는 이어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스님들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가 말한 '쓸데없는 짓'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불교 정통교단에서 스님의 역할은 다양하다. 부처의 가르침을 해설하는 일은 바꾸어 말하면 착하고 바르게 살려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부처가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가르친 내용은 공교롭게도 예수의 첫번째 공식설교인 산상수훈 즉 참된 행복 여덟가지와 일치한다. 또한 불교는 석가모니를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종교가 아니다. 화엄경에 기록된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따르면, 불교도의 부처님 예배란 석가모니 하나만이 아닌 모든 부처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다. 불교는 귀신을 섬기는 종교는 더더욱 아니다. 불교 사찰 안에 토속신앙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신당이 있는 까닭은 불교의 포용력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악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듯이 불교인들은 부처가 악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처의 영혼이 그러한 힘을 지녔다고 믿는 게 뭐가 문제인가. 영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는 예수처럼 육신의 부활을 이룬 분만 할 수 있는 거라서? 장 목사의 '쓸데없는 짓'이란 말은 불교와 기독교가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그럴까. 정말 불교와 기독교는 한 하늘을 지붕으로 삼을 수 없는 종교들일까. 다음 발언에 이르러선 점입가경이요 설상가상이요 어불성설이요 유치찬란이다.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
그가 공석에서 저런 말을 한 저의가 뭘까. 혹시 그는 기독교를 믿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좁은 문('바늘귀'라 하는)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예수는 개인의 부를 공공의 부로 환원시키라 가르쳤다. 초대교회는 그 가르침에 따라 공산사회를 이루었다. 맑스의 공산주의가 신이 없는 이데올로기였다면 예수의 공산주의는 사랑으로 실천한 신앙이었다. 2,000년 전의 기독교인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지도자들이 재분배하게 함으로써 신도들 간에 빈부격차를 없애버렸다. 장 목사 설교의 숨은 의도대로 기독교가 들어가 나라가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란 게 도대체 뭘까. 한국교회 신도들이 교회에 바치는 소득의 십분지 일이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선 거의 쓰이지 않고 예배당 건축물을 높이는 데 주로 쓰이고 있음은 눈 감은 장님도 안다.
이 쯤에서 예수의 기쁜 소식이 그만 무시무시한 종교 지상주의로 변질되어 버린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다음 문장은 신약성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 있는 예수의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일부(?) 개신교단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유일구원론을 내세울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내가 기독교라 표현하지 않고 '개신교'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쓰는 까닭은 천주교는 1960년대 수년에 걸쳐 있었던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그 오래된 낡고 그릇된 생각을 공식적으로 버렸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일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원은 예수에게 달린 것이므로 예수를 믿는 종교에 속한 자만 구원된다고 믿는다. 바로 이 대목에 논리적 비약에 따른 오독이 있다. 눈을 깨끗이 씻고 다시 읽어 보자.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이 어떻게 기독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과 같을 수 있는가. 기독교가 예수와 동등하단 말인가. 기독교 유일구원론은 예수와 기독교를 등가로 놓음으로써 모순에 빠져 버린 비논리이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말을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말로 확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이다. 기독교 유일구원론의 위험은 종교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절대자보다 가치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수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수가 처형 당할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므로 구원이 예수에게 달린 것'이라 믿는 것까지는 신앙의 자유이다.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예수를 믿는 종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므로 구원이 그 종교에만 달렸다'라고 믿는 것은 매우 과격한 미친 생각에 불과하다. 그 미친 생각이 2,000년 가까운 인류 역사에 얼마나 피비린내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 보라. 전쟁 가운데 종교 전쟁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살상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 목사의 경고망동이 한국 개신교에 총체적 반성을 가져 와 기독교 유일구원론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루 종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인생을 허비하는 저 '심성은 착하나 지혜는 부족한' 이들을 길거리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이제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