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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성령의 열매 맺는 달☜
모든 생명의 양식(복음)을 등한히하면,사탄의 표적되어 영생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시64:1-10절) 눈에 보이지 않는 적(웬수)
이 世上에서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平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로 완전한 평화(平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詐誕)이 있고,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詐誕)과 죄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지식과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할지라도 완전한 평화(平和)는 있을 수 없습니다.
8월 17일 대통령 100일 맞이 윤석열 성도의 기자회견 때. 카톡을 통하여 선의적(善意的)댓글도 있지만. 소름끼치는 악의적(惡意的)댓글 폭탄을 보면서 매일 새벽 4-5시 기도를 하지만 정치인들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계속 새로운 약(藥)이 개발되고, 의학기술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병이 더 많이 생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詐誕)이 하는 가장 중요한 거짓말이 무엇일까?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이란 존재는 없다*고 믿게 하는 이것입니다. 즉 사탄(詐誕)은 *이 세상에 하나님도 없고, 사탄도 없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詐誕)의 이 거짓말에 속으면 ‘인간들끼리 서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새빨간 거짓입니다.
다윗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탄(詐誕)은 두 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완전한 악(惡)의 나라를 통하여 공격을 합니다. 즉 전쟁(戰爭)입니다. 전쟁을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전쟁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같은 나라 안에서 신하(臣下)나 상관(上官)이나 친구(親舊)들을 충동질(衝動質)해서 공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공격이 과거의‘재래식 전쟁’에 속한다면, 요즘의 ‘테러 전쟁’과 같습니다. 즉 적(敵)이 누군 인지? 보이지도 않고, 어디서 어떻게 공격할지 알 수 없는 것이 테러입니다. 어느 한 순간 방심하고 있을 그때 갑자기 공격을 해서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곧 테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사탄(詐誕)의 두 가지 공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악(惡)한 자들의 ‘물리적인 공격’입니다. 즉 깡패라든지, 나쁜 사람들이 폭력으로 우리를 공격해서 상처를 입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惡)한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주의만 잘 하면, 접촉(接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사탄(詐誕)의 또 다른 공격입니다. 즉 이것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언어(말) 공격’입니다. 사탄(詐誕)은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의 혈기(血氣)를 충동질(衝動質)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욕설과 공개적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靈魂)이 심한 상처를 입고,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영적(靈的)인 전쟁(戰爭)’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믿음의 방탄조끼를 입어야 하고, 결코 방심하면 안 됩니다.
또 늘 기도함으로 사탄(詐誕)에게 공격할 만한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4:7절)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아마 다윗은 눈에 보이는 적(敵)들과는 잘 싸울 수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적(敵)과의 싸움에서 굉장히 상처를 많이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詐誕)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도록 교훈하기 위하여 이것을 시(詩)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즉 이 시(詩)는 자신의 체험적 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위한 마스길, 즉 교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눈에 보이지 않는 적(웬수)을 두려워함
월남전 때, 미군이 베드콩과 싸우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적(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적(敵)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박격 포탄이 떨어져서 막사가 박살이 나고, 군인들이 죽어갔습니다.
또 갑자기 민간인들이 베트콩으로 변해서 총을 쏘아대고, 숲속으로 달아나는데, 뒤를 따라가 보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의 심리는 공포감에 빠지게 되어 있고, 결국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됩니다. 즉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생기는 심정이 곧 이런 것 같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도둑이 들어올 것만 같고, 집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도둑처럼 보이니까 작은 일에도 놀라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 그런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64:1-2절)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 하소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주소서"
다윗이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시(詩)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적(敵)은 숨어서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펴보면서 다윗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상대방은 완전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아주 여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도무지 적(敵)이 누군 인지를 알 수 없는 형편 속에서 공격의 펀치를 얻어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영적 전투에서 처음 겪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마치 대낮에 벌거벗고 있는 것처럼,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무지 적(敵)이 누군 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이런 어려움을 겪느냐 하면, 모르는 곳에 처음으로 갔을 그때입니다.
카페 회원 중 베트남과 중국 선교를 하시는 분이 계셔서 잘 알겠지만, 어떤 분이 선교사(宣敎師)로 처음으로 부임(赴任)하게 되었을 그때, 이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즉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많은데,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실수를 해도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견딜 수 없는 굴욕감(屈辱感)을 줍니다.
게다가 그곳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있던 터줏대감들은 한 번씩 와서 욕을 있는 대로 퍼붓고 갑니다. 또 누군가가 돌을 던져서 창문을 깨뜨리고, 벽에 붉은 페인트로‘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글을 써놓고 위협합니다.
이렇게 되면,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와서 죽일 것만 같은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만일 그것이 두려워서 보따리는 싼다면, 그는 다시는 선교사역(宣敎使役)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왔다면, 다른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멱살이 잡히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해도 거기에 있어야 하고,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부르심에 확신이 없으면, 보따리를 싸게 되고, 결국 *비겁자*라는 딱지가 한평생 붙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기만 하면, 굉장한 두려움에 빠지곤 했습니다. 왜냐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아브라함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선(善)한 사람입니까? 또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그러나 그를 사귀기 전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모든 사람이 적(敵)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에 이사를 하기만 하면, 자기 부인(婦人)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회에서 떠돌이 부부들이 원주민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가 언제 공격을 해서 죽일지 모르니까 차라리 서로 독신(獨身)이라고 해서 따로 따로 살아남자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성공했던 적은 별로 없었고, 거의 다 비참하게 실패로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다윗도 이런 위협을 몇 번 겪었습니다. 아마 그 첫 번째 경험은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 왕의 신하로 발탁 되었을 그때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모든 백성들은 다윗을 환영하고 반겼지만, 사울 왕과 그의 신하들은 그를 결코 좋아하지 앓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하나의 경쟁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다른 군인들이 다윗을 엄청나게 미워하고 있었고, 한 번씩 오고 가는 말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군인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도 없었고, 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이때 다윗은 매우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결국은 사울 왕의 미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즉 사울 왕에게 철저한 견제(牽制)를 당하여 ‘왕따’신세가 되었고, 결국 몇 번씩 목숨이 걸린 위기를 겪은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으로 치면 자퇴(自退)를 한 것이며, 시집간 며느리로 치면, 야밤에 집을 나와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64:2절을 보면‘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즉 다윗이 사울의 왕궁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다윗을 미워하고 의심한 사람이 사울 왕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부하들도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나쁘게 해석해서 사울 왕에게 밀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더욱더 다윗을 밉게 보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즉 그래서 계속 다윗이 거기에 있었더라면, 다윗은 정신병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거기서 빠져나와 들판에서 하나님과 영적교제하면서 정신적으로 회복한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Ⅱ.물과 기름의 관계
우리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데, 왜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미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당을 지어서 비난할 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역시‘거듭남’의 문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는 경험이 있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쪽만 다른 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저 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사울 왕은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가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사울 왕과 같은 부류들이었습니다. 사울 왕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기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에는 비슷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법입니다.
사울 왕은 모든 문제를‘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처리했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의 욕구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하나님의 뜻대로 정확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중요한 것이, 신앙적인 눈으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반대로 신앙적인 눈으로는 중요한 것이, 인간적인 눈으로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신앙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싼 가구를 사고 차를 새 것으로 바꾼 것으로 굉장히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자식이 무슨 상(賞)을 받은 일을 아주 자랑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보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라도 더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고난 중에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돈을 그렇게 쓸데없는데 쓰기보다는 구제나 선교에 쓰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 두 형제가 만나도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는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사울 왕이 그런 사람들을 긁어모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나를 대적(對敵)하는 사람들이 적(敵)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적(敵)은 웬수 마귀(魔鬼)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단지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하수인(下手人)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을 자꾸만 머릿속에 입력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그 사람을 향하여 우리의 분노가 폭발되어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손해를 보게 될까?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이 미워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은 이 점에 있어서 대단히 탁월했습니다. 지금은 사울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고, 그는 아직 이스라엘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절대로 사울을 대적(對敵)하지 않고, 피해 다니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 점에서 실패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을 하셨으면, 지금 당장은 쌍동이 형 에서가 축복을 받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에서가 축복을 받고 장자권(長子權)을 받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언젠가는 에서가 그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여 야곱에게 다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을 속이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원군(大院君)은 현명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안동 김 씨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왕족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보이면,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갓집 개도 되고, 양반의 다리 사이에 기어들어 가면서도 끝까지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대원군처럼 이럴 때는 절대로 트집잡힐 짓은 말고, 고개를 푹 숙여서 자기가 일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 무명의 시절에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때 요령이나 피우고, 잠이나 잔 사람은 막상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그때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즉 의욕은 있지만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무명의 시절에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즉 기다리던 때가 왔을 때. 우리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과감하게 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철저한‘소명의식’입니다. 중요한 일에는 거센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심한 반대의 물결이 밀어닥치면, 하나님의 일을 아주 낭만적으로 쉽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코를 싸매고 도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온갖 모욕을 다 당하면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으려면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고 나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라는 소명(召命)감으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면,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누군가가 머리털을 잡고, 흔들어도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시기 전에는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군인(軍人)이 자기 마음대로 도망을 치면, 이것은 군법회의감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청년 마가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마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출발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마 중간에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여행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어 결국 팀이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소명(召命)이 없으면, 끝까지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회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적(敵)이 어디서 자살폭탄 테러를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무슨 재주로 살아남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중에 사탄의 공격이 힘을 잃고 줄어듭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Ⅲ.사탄이 공격하는 방법
그러면 사탄(詐誕)이 어떤 방식으로 주의 종들을 공격할까? 이것을 잘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선, 말과(악성 댓글)로 아주 날카롭게 공격을 합니다.
64:3-4절)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도다”
사탄(詐誕)의 가장 대표적인 공격 방식은 사소한 트집거리를 잡아서 자꾸만 말로 걸고넘어지는 것입니다. 즉 혀를 가지고 칼 같이 날을 세워서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같은 일을 놓고 어쩌면 이리도 나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정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서 공격을 퍼붓는데, 결국 무심코 한 말들을 모두 다 화살로 만들어서 역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숨어서 쏘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즉 모든 것을 익명(휴면가명)으로 합니다. 왜냐면 떳떳하게 말 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쏘려고 하다가 갑자기 쏘고’라는 말은,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결국 자기 악(惡)한 마음을 표현하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악(惡)한 일인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말 속에는 독(毒)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일단 들으면 마음속에 독이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의 독을 상대방에게 쏘아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을 얻어먹은 상대방은 마치 독사에게 물린 것처럼 점점 붓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마음이 썩어 들어가게 됩니다. 그냥 두면 나중에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의 말이 악(惡)하고 독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악(惡)한 말들을 듣고, 너무나 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즉 아,이런 악한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도 있구나. 조심해야 겠되다.’또는‘어느 집 똥개가 짓나보다’정도로 생각해야지, 한마디 한마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결국 영혼이 병들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領域)(非行)(無顔)(相談)(否定)
그런데 말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되겠지만 실제로는 잘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내 공력?’이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毒)을 빨아내서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이런 일들을 함께 나누고 상담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그럴 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곧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몸에 들어간 독사의 독을 빨아내 준 사람입니다. 만약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면, 일기장에 낙서를 하든지, 혼자서 중얼중얼하든지, 아니면 운동이라도 해서 악(惡)한 말의 독(毒)을 빼내어야 견딜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탄(詐誕)은 패거리를 만들어서 공격을 합니다.
64:5-6절)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비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
원래 진리(眞理)를 대적(對敵)하는 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당을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종들을 욕하고 입으로 씹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실 그들 안에 피해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의인(義人)들을 보면 무엇인가 자신들의 영역(領域)을 빼앗긴 느낌이 들고,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함께 말로 욕을 하면서 분을 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공개적인 자리가 있을 때, 집중적으로 공격을 해서 무안(無顔)을 주거나 신뢰성을 깨뜨리자고 서로 약속을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이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만큼 많고 이 사람은 너무나 독선적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이미지를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꾸미는 가장 중요한 모략(謀略)입니다.
그들의‘묘책(妙策)’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각 사람의 속 뜻이 깊도다’라고 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 깊은 생각은 결국 주님의 백성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왕 따’를 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 같은 경우는 이런 것을 굳이 부정(否定)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나는 그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하면, 그들이 하는 말에 약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괜히 그런 것을 해명해고, 쫓아다니다가 올무에 걸리는 것입니다.
Ⅳ.하나님의 복수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을 시기하여 악(惡)하게 공격하는 자들을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화살로 그들을 쏘아서 치명상을 입힐 것입니다.
64:7-8절)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을 쏘신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화살은 무엇일까?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惡)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말로 그들을 쏘시지는 않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를 느끼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의인들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악(惡)한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의인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망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오히려 모든 것이 더 잘되고 형통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악한 자들의 말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惡)한 자들이 의인(義人)을 욕하면 할수록 악(惡)한 자들에게는 손해입니다. 왜냐면 욕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의인(義人)들을 더욱 잘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惡人)들이 의인(惡人)들을 잘못되기를 바란다면, 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악(惡)한 자들의 말을 듣고 다 믿게 됩니다. 왜냐면, 그런 사람들이 남을 설득하는 데는 재능이 있고, 또 사람들은 좋지 않은 말을 더욱 잘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짓말은 1-2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자신들의 비행(非行)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돈을 떼먹고 갚지 않았다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저지른 비행(非行)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결국 자기 혀에 자기 자신이 다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결국은 그들에게 속았음을 알고, 모두 머리를 흔들게 됩니다.
64:9-10절)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악인(惡人)이 하는 짓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악인(惡人)이 이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믿음대로 순종한 사람이 형통(亨通)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되며, 정직한 자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리를 붙들려면, 이런 싸움을 한번쯤 해보아야 합니다. 그 후부터는 절대로 진리를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보다 진리를 더욱 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오늘의 묵상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 시편 묵상과 성경적 성숙한 기도로 응답받고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 교갱원카페. 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필수.상식.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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