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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총부 홈페이지에서 퍼온글
경상 남서부 동학혁명
( 교사교리연구 제 6호 - 포덕 141년 5월)
1894년 10월 14일(양 11월 11일)에 경상도 남서부지역 동학군 3천명은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기포하여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승당산에서 일본군 200명과 결전을 벌였다. 무기의 열세로 동학군은 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1994년 3월 21일 교인의 뜻을 모아 이곳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세웠다. (표 영 삼 )
머 리 말
경남 남서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1894년 4월(음)에 진주 덕산(德山, 현 山淸郡 矢川面 絲里)에서 접주 백도홍(白道弘)에 의해 처음으로 깃발을 올렸다. 전라도 백산기포 소식을 접하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일어나 진주목 병방 박희방(朴熙房)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당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4월 26일경에 손은석(孫殷錫)이 이끄는 동학도 수천명이 진주읍에 들어가자 박희방 등은 도주하고 민준호 경상우병사와 타협하여 좋은 관계를 맺었다.
두 번째로 깃발을 올린 것은 9월이었으며 이 때는 여장협(余章協)이 이끄는 하동지역 동학군과 손은석이 이끄는 진주지역 동학군의 항일전을 위한 것이었다. 전라도 순천에 있는 영호(嶺湖) 대접주 김인배의 지원을 받아 하동부를 점령하고 사천, 남해, 고성, 곤양, 곤명을 휩쓸었으며 손은석이 이끄는 동학군들도 삼가, 산청, 진주 일대를 와전히 장악하면서 경상도 남서부 일대를 석권하였다.
10월에는 진주지역 동학군과 하동지역 동학군이 합류하여 남원포, 구례포의 지원을 받아 진주지역에 진출한 일본군을 맞아 싸웠다. 10월 14일 (양 11월 11일)에 고승당산에서 결전이 벌어져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나 무기체계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일단 물러선 동학군은 각지에 분산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저항했으나 계속 밀리게 되었다.
덕산 쪽으로 후퇴했던 동학군은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고 서쪽으로 물러선 하동지역 동학군들은 고하와 갈록치(渴鹿峙)에서 일본군을 맞아 저항했으나 다시 밀려 섬진강을 건너 광양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군은 전후 몇 차례의 전투와 소탕전에서 1천명 전도가 희생되었다.
경남 서남부지역 동학혁명의 경위를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덕산서 기포하자 탄압
경상 남서부 지역에 동학이 처음 전파된 것은 1862년이다. 고성(固城)에 사는 성한서(成漢瑞)가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 이하 대신사로 약칭함)를 찾아와 입도하면서 경상도 남서부지역에 동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포덕을 많이 하여 1862년 12월에 접주로 임명되었다. 접주가 되려면 적어도 50호(戶) 내외의 도인을 거느려야 하므로 고성지역에는 당시 50호 이상의 도인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고성은 북쪽에 진주와 함안(咸安)이, 서쪽에는 사천군(泗川郡)이, 동쪽에는 창원군(昌原郡)이, 남쪽에는 통영군(統營郡)이 인접해 있다. 고성에 자리잡은 동학은 점차 인근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함안과 칠원(柒原)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나 1년 후인 1863년 12월에 대신사가 관에 체포되어 1864년에 순도하자 도세는 급격히 미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 동학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 후반기라고 여겨진다. {천도교창건록(天道敎創建錄)}과 1940년에 만들어진 신용구(申鏞九) 관내 연원록(淵源錄)을 보면 1889년부터 새로운 입도자가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들은 연로한 도인들이 세상을 뜬 다음에 만들어진 명부이므로 그 이전 입도자는 알 길이 없다. 1880년 후반부터 진주 인근지역에 동학이 들어왔다고 추측할 뿐이다.
{천도교창건록}에 함안(咸安) 이원식(李元植)은 1889년에 입도하였고 육임직(六任職)인 교장(敎長)을 지냈다. 이 외에 1892년에는 사천(泗川 西浦面 自惠里) 김억준(金億俊), 이지우(李志祐, 接司, 敎長), 곤양(昆陽 還德里) 김학두(金學斗, 執綱 都執 敎授 敎長), 진주 평거리(平居里) 윤치수(尹致洙, 接司, 接主), 곤양 김용수(金瑢洙, 敎授), 곤양 중항리 최기현(崔璣鉉, 大正) 등이 입도하였다.
1908년경에 진주교구에 근무했었던 신용구(천도교중앙총부 교령을 역임)는 {신인간}에서 "임진년(1892)에 백낙도(삼장면 당산리 사람)씨가 전북 장수군에 있는 유해룡(劉海龍)으로부터 도를 받고 돌아와 포덕에 종사, 진주를 중심으로 점차 퍼져갔던 것이다"고 증언하였다.
{백곡지(栢谷誌)} 당저갑오(當 甲午)에서도 "진주인 백낙도(白樂道)는 본시 무뢰자로서 제우(濟愚)에게 학(學)하여 하루 아침에 선사(善士)가 되어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그 가르친 것을 지키는 것처럼 하였다. … 진주에는 낙도로부터 학(學)한 자가 무려 수천이었고, 손웅구(孫雄狗, 수캐, 孫殷錫)가 가장 알려졌다. 웅구의 무리로는 고만준(高萬俊)·임정룡(林正龍)·임말룡(林末龍)이 으뜸이었고 그 나머지는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1893년에 공주와 삼례에서 동학도인 수만 명이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키자 도인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창원 김치엽(金致燁, 敎授), 함안 칠서면 회산리 이재홍(李在弘, 中正), 창원 대산면 구술리 이재상(李在詳, 大正), 함안 칠서면 회산리 이재형(李在馨, 接主), 사천 김재현(金在賢, 中正), 고성 최상관(崔祥寬, 接主, 首接主), 진주 신안리 김용옥(金龍玉, 中正), 곤양 김경성(金敬聖, 大正), 곤양 환덕 신금룡(申今龍, 中正), 사천 이무현(李武鉉, 中正), 곤양 환덕 신금순(申今順, 中正), 사천 박재원(朴載遠, 都執), 곤양 목촌리 황태식(黃泰植, 大正), 진주 평거리 전희순(全熙淳, 都執 接司 接主 首接主 大接主), 곤양 배동엽(裵東燁, 執綱), 진주 허봉석(許鳳碩, 中正), 곤양 정재용(鄭載鎔), 진주 서봉 박규일(朴奎一, 接主), 진주 최윤호(崔允鎬, 執綱), 진주 누동 황수현(黃水現), 진주 김상정(金相鼎, 接主 大接主), 진주 강필만(姜泌晩, 接主), 진주 일반성면 창촌리 주석률(朱錫律, 大正), 사천 삼천포 서리 진환수(陳煥秀, 接司 執綱), 진주 정용안(鄭龍安, 집강), 진주 박운기(朴雲基, 接主, 首接主, 大接主) 등이 모두 1893년에 입도한 분들이다.
1893년에 이르면 더욱 도인수가 늘어나게 되며 지식인들도 많이 들어왔다 한다. 즉 3월에 보은과 금구 원평에서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이 벌어져 세인의 이목을 모았었다. {취어(聚語)}에 보면 하동접에서 50명, 진주접에서 60명이 참가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들이 다녀와서 동학의 위세는 더욱 치열해졌다고 본다.
{백곡지}에서도 "계사 3월에 동학도들이 호서 보은에서 크게 모였는데 무리는 수십 만이었다. 복술(福述, 大神師)의 억울함을 신원하려고 임금에게 글을 올리자 조정에서는 난리로 이어질까 두려워 어윤중(魚允中)으로 하여금 안무사로 삼아 동학을 효유하게 하여 흩어지게 하였다. 이로부터 동학은 조정도 어찌하지 못함을 알게 되자 기세가 더욱 올라 성해져서 관장을 욕보이며 마을을 횡행하였다"고 하였다.
1893년 척왜양창의운동 이후에 동학의 기세가 더욱 치성해졌다 한다. {경상도고성부총쇄록(慶尙道固城府叢鎖錄)}에도 "듣건대 작년(1893년) 보은에서 소란이 있은 후 비류들은 점점 치열해져서 혹은 호남에 취당하였다 하고 혹은 지례(知禮, 現 金陵郡) 삼도봉(三道峰) 아래 둔결하였다고 하며 혹은 진주 덕산의 소굴에 있다는 설이 낭자하다"고 하였다.
경상도 남서부지역 중 하동지역에도 적지 않은 동학도들이 있었다. 앞서 {취어}에서 보았듯이 보은 척왜양창의운동 때 하동접에서 50명이 참가했으므로 적은 수가 아니다. 진주 덕산을 중심으로 한 동학조직은 보은의 충경(忠慶) 대접주 임규호(任奎鎬) 계통이었고, 하동을 중심으로 한 동학조직은 순천·광양의 영호(嶺湖) 대접주 김인배(金仁培) 계통이다. 기록이 없어 확실치는 않으나 하동에는 아마도 진교와 고전 그리고 양보 지역에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 최초로 기포한 것은 진주 덕산(現 山淸郡 矢川面 絲里)에서 4월 초순이다. {천도교창건사}에는 "백낙도(白樂道, 道弘), 신사의 명교를 받아 각 군 대접주 수십 명으로 더불어 기포하였다가 관군에 피살된 뒤..."라 했으며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손은석은 제 도인으로 교남 각 군에서 기포하도록 하니 진주영장 박희방(朴熙房)이 민포 3백 명을 모집하여 30여 도인을 참살하고..."라 하였다. 신용구(申鏞九)는 신인간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갑오동학운동 당시 경남에서의 활동상황을 3월 기포와 9월 기포로 나누어 말하겠소. 3월 기포는 전라도 고부기포의 소식을 듣고 백낙도씨가 동학도인을 규합하여 기포를 준비 중 4월에 산에 숨었다가 진주영장 박희방에게 체포되어 장날 장군들 앞에서 형을 받고 죽었소."
이 증언에 의하면 기포하여 며칠간 활동했으나 백도홍이 진주 영장에 의해 잡혀 죽자 아무런 활동도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도 "지난 달 진주지방에서 인근 각지 동학당이 봉기하여 불온한 상태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진정되어 거괴인 백도홍을 비롯한 30여 명의 난도가 포박되어 그 후 무사하게 되었다. 이곳 영장은 민병 천여 명을 모아 소란에 대비하고 동학도인 백도홍을 덕유에서 붙잡아 즉시 효수하고 나머지 도당 수십 명은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에 잠시 진정되었다" 고 하였다.
{경상도고성부총쇄록(慶尙道固城府叢鎖錄)} 갑오 4월 7일조에도 "진주 덕산이 소굴이라고 여러 곳에서 어지럽게 나돈다"고 했으며 4월 21일조에는 "영장 박희방(朴喜邦)이 병졸을 끌고 덕산면으로 가서 동학괴수 백도홍과 종괴 2명을 잡아 처형하고 나머지 당류 수천 명은 효유하여 해산시켰다"고 하였다. {동비토록(東匪討錄)} 4월 26일자 경상우병사 서목에도 "협잡죄인 백도홍을 이 달(4월) 15일에 효수경중사"라 하였다.
{백곡지}에도 "호남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자 … 이 때에 백낙도(백도홍)는 덕산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그 도당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 영장 박희방이 3백 명을 이끌고 가서 포착하니 한낮 범인이었다. 그 도당 중 극성스러운 5∼6명도 잡아 같이 처단하였다. 그 집에서 문적을 발견하니 제자록(弟子錄)이었다.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관작인 모씨와 관직에 있는 모씨가 드러났다. 벼슬아치 중에는 낙도와 이판 손웅구 이하 모두 방백 수령들이었다. 희방은 이를 불태워 버리고 나머지 도당들은 모두 귀화시켰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미루어 백도홍이 주도하여 4월 초에 기포한 것이 틀림이 없다. 아마도 4월 초순에 기포하여 13일경에 체포되었고 15일에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무기를 갖추지 못하여 진주 연장 박희방이 공격을 받고 어이없이 희생되고 만 것이다. 대접주 격인 백도홍과 지도자 몇 사람도 희생되었으나 손은석(孫殷錫)을 비롯한 고만준·임정룡·임말룡 등 쟁쟁한 접주들은 재빨리 몸을 피해 살아남았다.
경상감사의 4월 27일(양 5월 31일)자 전보에는 "앞서 동학괴수 백홍석(白弘錫, 白道弘)을 죽였는데, 동학도 수만 명이 진주에 들어와 큰 소란을 일으켰다고 하니 민망스럽다"고 하였다. 백도홍이 처형되자 대접주 손은석 등이 천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진주로 쳐들어가 항의소동을 벌였던 것 같다. 이 소동은 4월 24∼25일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신변의 위험을 느낀 영장 박희방은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천여 명 동학도가 쳐들어오자 우병사 민준호(閔俊鎬)는 동학도와 타협하여 사태를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우병사 민준호는 이후에도 계속 동학도를 도와준 것으로 보아 동학에 호의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당시 덕산지역 동학도 중에는 앞서 {백곡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관리로 있었거나 사족의 신분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우병영 관리들은 호의적이거나 적극 후원하였다고 여겨진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외촌의 동비들을 제압하려면 먼저 관인과 가까운 동비를 제거하고, 상인과 천인의 동비들을 제거하려면 먼저 반족의 동비들을 제거해야 하며, 각읍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비를 제거해야 한다. 진주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덕산의 동비와 삼장(三壯), 시천(矢川, 청암(靑巖), 사월(沙月) 등 4∼5리에서 반상(班常)이 같이 사는 동학도의 마을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덕산과 삼장, 시천, 청암, 사월에서는 양반 사족들이 동학에 적극 협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반일 감정에서 동학도를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던 것 같다.
진주지역 동학도들은 4월 25일경의 항의시위로 경상 우병사와 타협을 이끌어 내면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경상 남서부 지역 여러 지역에서도 매우 고무되어 동학활동이 크게 일어났다.
1894년 현재 이 지역을 이끌었던 인물은 대접주급이 2∼3명 정도이고, 접주급 인물이 40명 정도라고 보여진다. {천도교서}나 {천도교창건사}와 여러 기록들에 나타난 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천도교서}에는 진주의 손은석·박재화·김창규(金昌奎), 곤양에 김성룡(金成龍), 하동에 여장협(余章協), 남해에 정용태(鄭龍泰) 등이 접주로 활동했다 한다.
② {하동군사(河東郡史)}에는 사천의 윤치수(尹致洙), 단성에 임말룡(林末龍), 마동에 우정진(禹鼎鎭, 후에 靑巖으로 이주함)·박재화·김창규·백주헌 등이 수뇌로 활동했다 한다.
③ {명치편년사}에는 진주의 동학당 수령을 김상경(金尙慶)이라 했으며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백도홍(白道弘)이라 했다.
④ 최현식(崔玄植)의 {갑오동학혁명사}에서 진주의 김용기(金用基)·김상정(金相鼎)을, 거창의 이익우(李翼宇), 함안의 이재형(李在馨)을 추가했다.
⑤ 이밖에 진주의
박운기(朴雲基)·박규일·전희순·김상규(金商奎, 金相鼎인 것 같다), 사천의 박치모(朴致模), 고성의 최상관(崔祥寬), 곤양의 김학두(金學斗)·이광(李光) 등이 접주로 활동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주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여전히 동학을 탄압하고 있었으며 7월 이후에는 지도자격인 인물을 골라 10여 명씩 체포 구금하고 있었다. 아마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으로 침입하여 고종과 대신들을 한편으로 몰아 세우고 친일정권인 김홍집 내각을 발족시키자 동학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관아에서는 경상도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못하게끔 사전에 막기 위해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했던 것이다.
7월에 이르러 하동부에서 동학도를 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동 동학도들은 전라도와 진주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방도를 숙의한 끝에 성부역(星浮驛) 접주 박정주(朴正周)를 찾아가 1백 명의 장정을 선발하여 하동에 건너와 지원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같은 영원에 속해 있던 영호포에서는 하동 동학군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7월 7일(양 8월 8일)에 1백 명의 젊은이들은 하동읍내 광평(廣坪)으로 건너와 접주 여장협(余章協)과 협력하여 영남의소(嶺南義所)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7월 초에 부임한 하동부사 이채연(李彩淵, 漆谷人)은 이런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우선 좋은 말로 동학도들을 설득했으나 듣지 않자 몰래 화개면(花開面)에 있는 민포대장 김진옥(金振玉)을 불러다 동학군을 섬멸할 방도를 논의하게 되었다.
하동지역에는 일찍부터 민포군이 조직되어 있었다. 1892년에 부임한 하동 부사 이남희(李南熙)가 도적을 막기 위해 각 면단위로 조직되어 있던 민보군을 통합하여 김진옥을 대장으로 삼았다. 1894년 3월에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 전라도 일대가 혁명운동에 휩싸이자 민보군을 증모하여 대비책을 강화하였다.
하동은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위치해 있고 강과 바다가 가로놓인 이점을 가진 남쪽의 한 도회지이므로 간사한 백성과 교활한 도적들이 들끓고 있었다. 특히 지리산은 경계의 기점이며 한 읍을 감싸고 있으며, 화개 마을은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10여 년 전부터 화적들의 소굴이 되었다. 호남에서 쫓아내면 영남으로 넘어오고, 영남에서 쫓아내면 호남으로 넘어오니 각 영의 포졸들은 이 때문에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명령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마을마다 (자위책을 강구하자고) 부르짖고 일어났다.
(그래서 이들을) 단단히 묶어 대오를 이루어 화포군을 만드니 이를 민포(民砲)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화적과 포졸들이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호남지방에 큰 난리가 일어나자 광양의 적은 장사꾼들을 유인하고 협박하여 하동부내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때 마침 새로 부임한 부사 이채연이 이들을 좋은 말로 달래는 한편 몰래 화개 민포를 불러 쫓아내려 하였다. 민포들은 적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였으나 채연은 굳이 말리면서 다만 강 건너로 쫓아내었다. 이로부터 화개 민포를 본받자는 논의가 일어나 온 고을에 두루 퍼져 나가게 되었다. 적을 따르던 장사꾼들이 살던 집은 모두 불태워 버렸고 그 처자들은 모두 도강하여 광양에 있다 . 민포대장 김진옥(金鎭玉)은 수백 명의 민포를 이끌고 하동으로 들어와 동학군 전원을 체포하였다. 그는 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으나 이채연 부사가 만류하여 광양으로 쫓아버리게 되었다. 가족들과 같이 광양으로 쫓겨난 하동 동학도들은 광양지역 동학도들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살아가게 되었다. 연원(포조직)조직이 같았기 때문에 이들을 형제처럼 대해주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상 남서부지역에는 두 개의 연원조직이 있었다. 하동지역은 김인배(金仁培)연원이고 진주지역은 임규호(任奎鎬) 연원이었다. 김인배는 금구에서 순천으로 내려와 영호도회소를 설치하였으며 임규호는 보은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덕산에다 손은석이 주도하여 충경대도소를 설치하였던 것 같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의하면 "작년 6월 이후 금구의 적괴(賊魁) 김인배의 무리가 각처의 비도 10만의 무리를 모아 이끌고 성중(順天)을 점거한 다음 곧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라 하였다. 김인배 대접주는 순천에 들어올 때 금구에서 인솔하여 온 동학군 외에 광양 수접주 유하덕(劉夏德)과 같이 인근지역 동학도 수만을 동원하여 동학의 엄청난 위세를 보여주며 들어왔다.
당시 순천부사 이수홍(李秀弘)은 동학군에 매우 협조적이었고 광양현감은 공석 중이었으므로 동학군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전라병사 장계에 의하면 순천 부사 이수홍(李秀弘)은 "10월 16일 저녁 9시경에 사사롭게 삿도를 모시고 전주참으로 올라가다 신원참(新院站)에 당도하였을 때 마침 남원 대접주(金開南)가 도착하게 되어 붙잡혔다. … 대접주는 군수전 10만 냥과 백목 1백 동을 마련하여 5일 내에 실어 오라고 하였다. … 순천읍 중은 그를 살려내기 위해 서둘러 전목(錢木)을 마련하여 밤을 새워 20일에 실어다 바치고 살아났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는 동학군을 실지로 지원하였으나 후일 책임 추궁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협박과 강제에 못 이겨 군수물자를 바친 것처럼 꾸민 것은 아닌가 싶다
2. 김인배 하동부 점령
8월이 되자 전국의 동학군들은 항일투쟁 준비를 위해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오하기문}에는 "25일 김개남은 임실에서 남원으로 들어왔다. … 좌도 여러 적들이 남원 부중(府中)으로 모이니 무려 7만여 인이었다"고 하였다.
남쪽에 있는 순창, 담양, 곡성, 구례, 창평, 옥과, 낙안, 흥양, 그리고 순천, 광양 동학군들도 올라갔다. 8월 25일, 26일의 남원대회는 항일전을 위한 결의를 다지는 모임이었다. 이로부터 각지 동학군들은 항일전에 나서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남원대회에서 급히 내려온 김인배 대접주는 각 접에 통문을 보내 8월 28일에 섬거역에 모이도록 동원령을 내렸다. 1만여 명 동학군이 모여들자 편제를 마치고 8월 30일에 하동읍 건너편인 광양군 다압면(多鴨面 道士里)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동학군은 항일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선 경상도 지역도 장악하여 군수물자 확보와 동학군을 보강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천, 상주, 선산, 김산, 칠곡, 군위지역 동학도들은 그 곳 읍성을 점거하며 위세를 떨쳤다.
남원 동학군은 운봉을 거쳐 함양을 통해 경상도에 진격하려고 시도하였다. 경상 남서부 지역에서는 전라도 동학군과 진주 동학군이 합세하여 이 지역 일대를 장악하려 하였다. 김인배 대접주의 이번 출전은 진주 남서쪽 일대를 장악하려는 전라좌도 동학군의 전략에 의한 것이다.
첫 번째 과제는 하동부를 점거하는 일이었다. 하동부사 이채연은 전라도 동학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당황하였다. 원병을 청하려 경상감사를 찾아간다며 달아나 버렸다. 일설에는 고향 칠곡으로 가 있었다 한다. 민포대장 김진옥도 다급해지자 통영으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대완포(大碗砲) 12문만 얻어오는 데 그쳤다.
김진옥은 악양(岳陽), 화개, 적량(赤良), 하동읍 등에서 수천 명의 민병을 동원하여 대항하기로 하였다. {하동군사}에는 "영장 여건상(余建相)이 향병 7백 명을 모집하였고, 민포장 진사 김형수(金灐秀), 김진현(金鎭鉉), 좌수 정재선(鄭在瑄), 수리 정찬두(鄭燦枓), 전 좌수 강윤수(姜崙秀), 전 사과 김태룡(金泰龍) 등이 수천 명의 향병을 모아들였다"고 하였다. 당시 하동읍에는 읍성이 없으므로 병력과 대포는 강변과 뒷산 안장봉에 배치하였고 일부 병력은 해량(解良)포구 일대에 포진시켰다.
8월 29일 오후에 섬진강 서쪽 강가에 동학군 대부대가 나타나자 민포군들은 북과 징을 울리고 총포를 쏘아댔다. 민포군의 배치를 살펴 본 동학군은 9월 1일 아침에 도강작전을 벌였다. 주력부대는 하동읍 북서쪽 상류에 있는 섬진관(蟾津館) 나루터를 건너 만지등(晩池嶝)으로 건너갔다. 물살은 세었으나 여울목은 수심이 얕아 도강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곧 화심리(花心里)와 두곡리(豆谷里) 일대를 장악하였다.
일부 병력은 하동읍 바로 뒤(북쪽)에 있는 해량(解良) 포구를 공격하기 위해 모래사장을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 {하동군사(河東郡史)}에 의하면 "섬진관에서 큰 짚동을 밀고 그 뒤에 숨어 강 모래사장으로 하여 해량 건너편까지 내려와" 도강작전을 벌였다고 하였다. 해량 쪽에 배치되었던 민포들은 얼마간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철수해 버렸다.
한편 광양 진월면(津月面) 망덕진(望德津)에서 출발한 천여 동학군 선단(船團)은 조수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하동읍 남쪽에 상륙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하동의 여장협(余章協) 동학군과 합류하여 읍의 남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오하기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섬진강의 얕은 여울 중 물살이 세찬 곳을 건너 부의 북쪽에 진을 쳤고, 또 한 갈래는 망덕 나루터에서부터 배다리를 이어놓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부 남쪽에 진을 쳤다. 하동부는 원래 성곽이 없어 산을 등지고 앞으로 강을 향하여 있는 지형을 지리적 이점으로 삼았으며, 지방 병력과 민포들은 부 뒤쪽 안봉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화심리와 두곡리에 주둔해 있던 동학군은 점심 후 안장봉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예상 외로 산이 가파라 중턱까지 올라가자 날이 어두워 일단 철수하였다. 이 때 민포들은 대포를 겨우 발사하였으나 포탄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잽싸게 피하는 동학군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첫 날의 전투에서 동학군은 삼면에서 포위하여 민포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9월 2일 새벽부터 동학군은 총공격에 나섰다가 저녁 무렵에 주봉을 점령하고 읍으로 들어왔다. 날이 어두워 관군과 민포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하동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월 2일 동도 두목 박정주(朴正周)가 동학군 1만여 명을 이끌고 본격적인 도강작전을 시작했다. 이 때 안봉(鞍峯, 하동군청 뒷산)에는 김진옥 등 수천 명의 민병이 대완구 등 무기를 갖춘 관군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 전라도 동학군은 섬진관에서 주력이 강을 건너 만지등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부는 섬진관에서 큰 짚동을 밀고 그 뒤에 숨어 강 모래사장으로 하여 해량 건너편까지 내려왔다. 만지등 일대의 동학군은 하동 동학 여장협이 인솔하는 1천여 명의 동도와 합세하여 안봉으로 차츰차츰 다가왔다. 그런데 이 때 안봉의 관군 측에서는 대완구를 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관군들이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한 청년 민병이 나와 자기가 대완구를 쏠 수 있다고 하며 막대기 끝에다 기름을 묻혀 대완구 구멍에 넣고 불을 붙이자 대포알이 섬진강 강물에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동학군은 대완구의 위력이 없음을 짐작하고 4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 날 상호간 치열한 싸움 끝에 민포군 대장 김진옥, 진사 김영수, 수리 정찬두 이하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했고 다음날 백의 강륜수 등도 남은 병사들과 같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리하여 안봉에 있던 민포군 및 관군이 거의 전멸되자 5일 오후 6시경에 읍내는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 읍내로 들어온 동학군은 관가와 민가에 방화하여 700호 이상이 불타 전 읍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오하기문}에는 "이튿날 읍에 들어간 동학군은 민가 10여 채를 소각하고 나서 부중에 도소를 설치한 후 ... 화개동에 올라가 민포의 수창자의 집에 불을 지르니 5백여 채나 됐으며 … 전후 10여 인을 살해했다"고 하였다.
{하동군사}에는 "민포의 발상지인 화개에 침입하여 탑리(塔里)로부터 법하리(法下里) 일대의 가옥을 모조리 불사르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이어서 악양과 적량에 들어가 민포군의 집을 낱낱이 찾아내어 불질러 버렸다"고 하였다.
다른 지역은 물론 진주 인근 군현의 동학도들은 하동 전투에서 동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기가 충천하였다.
{오하기문}에서는 "진주, 사천, 곤양 등지에서 오래 전부터 동학에 물들었던 사람들과 간사한 백성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나 그 기세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고무된 진주지역 동학군들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를 더욱 서둘렀다.
경상우병사 민준호의 묵인 아래 진주지역 동학군은 각 지의 이임(里任)에게 항일전을 위한 동원령을 내리게 되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9월 2일(음)에 73개의 이임(里任)에게 통문을 보내 지식인과 장정 13명씩을 동원하여 동학도소가 있는 평거(平居) 광탄진(廣灘津)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마치 관에서 동원령을 내리듯 통문(榜)을 내 걸고 동원한 것이다.
국가의 안위는 백성의 생사를 좌우하며 백성의 생사는 국가의 안위에 달렸으니 어찌 보국안민할 방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앞서 이런 뜻을 적어 73개 면리수(面里首)에게 통문을 돌려보게 했으나 없어지기도 하고 전해지기도 하여 이 점이 걱정된다. 우리 진주민들은 거개가 흩어져 있어 별로 진휼(鎭恤)해 나아갈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지보(支保)할 대책을 세울 것인가. 이 달 초팔일 오전에 각 리에서는 13명씩 모두들 평거 광탄진두로 와서 회합을 갖고 의논 처결토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다. 갑오 9월 초2일
1, 이장은 이별로 사리에 밝은 사람 2명과 과유군(果遊軍) 10명씩을 대동하고 죽립을 쓰고와 대기할 것
1, 만일 불참한 면이 있으면 마땅히 조치한다.
1, 각리는 아래에 게재한 바와 같이 3일분의 식량은 제각기 갖고 와서 기다릴 것.
1, 시각을 어기지 말고 와서 대기할 것
9월 8일에 열린 광탄진대회에서 보국안민을 위해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나서자고 결의한 것은 틀림이 없다. 9월 10일에는 다시 방을 내 거는 한편 동학도들에게 통문을 보냈다.
"왜적을 섬멸하고 그들의 잔당을 초토할 뜻으로 진주에서 대회를 가졌으니"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동리의 크고 작음에 따라 50명 이내 10명 이상의 인원을 배정하여 11일에 부흥 대우치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충경대도소의 명의로 된 <영남우도민에게 항일전에 나서기를 호소하는 방> 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국운이 비색하고 인도가 퇴폐하므로 간신들이 화를 불러들여 왜적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북쪽 삼도는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남쪽 오도는 왜적들이 가득하여 그들 마음대로 궁중에서 병기를 휘두르며 창검은 시골과 경성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아! 우리 동토의 의사들이여! 어찌 피를 뿌리며 분개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 후생으로 태어난 우리 도류들 중에는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분개한 마음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하고 그들의 잔당을 초토할 뜻으로 진주에서 대회를 가졌도다. … 진주는 33읍 중에서 대절도사의 영문이며 삼도의 인후가 되는 곳이다. 지금 우리 병사인 민공을 보면 … 공은 온화하고 순량하고 청백 정직하여 전 병사와 비교할 수가 없다. … 그러나 부임한지 1년도 채 못되었는데 … 왜놈과의 약조에 따라 선출된 새 병사가 부임한다 하니, … 그러므로 옛 병사는 그 임기 동안 유임해 주기를 바라고 새 병사는 우리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이와 같이 통문을 발송하여 진주에서 대회를 갖고자 하니 소민들은 경동하지 말고 옛날과 같이 평안한 마음갖는 것이 올바른 일일 것이다. … 만일 의분과 기모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특별히 상을 내릴 것이므로 이런 사실을 잘 알아서 모두 유념하고 이런 호의를 어기어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갑오 9월 초10일 충경대도소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경상우병사 민준호의 유임을 주장한 반면에 새 병사는 왜놈의 앞잡이이므로 진주지역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점이다.
지난 4월 이후 민준호와 동학군과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그리고 6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자 이에 항거하는 뜻에서 더욱 동학군에 대해 지원해 주었다. 일본군은 민준호가 동학군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로운 병사를 임명하게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무리들은 관에서 체포하려고 하면 도주하고 체포하지 않으면 모여서 도적질을 하였다. 그러나 전 진주병사(경상우병사)민준호는 그들이 무리를 취합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기세를 도와 오늘의 화근을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살인과 방화를 하여 각 읍이 소란하고 분묘를 도굴하고 금전을 토색하는 등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 참변을 다 기록할 수 없다.
{일성록}에는 "전 진주병사 민준호는 다만 어리석게 겁을 먹고 비류를 후히 대하였으며 하동부가 위급할 때 병졸 하나 보내지 않았으니 잡아다 엄히 심문하여 처리하라"고 했다. 민준호가 언제 해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인배가 진주로 왔을 때 그를 맞아 성중으로 안내하였다 하였으므로 9월 25일 이후가 아닌가 싶다.
3. 동학군, 일본군과 항전
하동을 점령한 영호 대접주 김인배는 9월 10일 경부터 전라도의 흥양, 순천, 광양지역 일부 병력과 하동지역 동학군을 진주 쪽으로 이동시키면서 각 군현 동학군들이 일어나도록 지원하기로 하였다. 즉 병력을 몇 개로 나누어 사천·남해·고성 등지로 파견하여 관아들 점거하고 지방 동학군을 일으켜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김인배 휘하의 주력 병력은 곤양을 거쳐 진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전라도 동학군과 지방 동학군이 합세하여 군현을 장악한데 대해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는 장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남해현령 이규풍(李圭豊)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달(9월) 11일에 호남 동도 19명이 본 현(南海)에 쳐들어와 이청에 자리를 잡고 관리를 협박하여 감옥에 가두었던 비류 16명을 임의로 석방하였고, 읍내의 폐단(邑幣)을 바로잡는다며 난류들을 모아 마을에 출몰하며 작폐가 대단했다. 16일에 그들 2백여 명은 진주에서 도로써 창의한다며 곤양쪽으로 떠나갔다. 사천현 삼공형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달 13일에 동학도 수십 명이 조사할 일이 있다며 호장과 이방을 잡아갔으며 그들 수백 명은 방포를 신호로 남문에서 곧바로 동헌으로 들어오니 본관은 두려워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했다. 본관이 여러가지로 타이르자 무기는 반납했으나 함부로 전재를 뒤져내고 억지로 전표(錢標)를 받아갔다. 17일에 그들 접소로부터 사천 원님은 영호(嶺湖)에서 알아주는 선량한 관리라며 전지표(錢紙標)를 돌려주었다. 18일에는 호남 동학도 백여 명이 다시 쳐들어와 작청(作廳)에서 유숙하고 19일에 남해쪽으로 모두 떠나갔다. 20일에는 각처 동학도 8백여 명이 각기 총칼을 갖고 진주 고을로 난입하여 관속만 보면 칼을 뽑아들고 공갈 협박했다. 공해(公 )에서 유숙한 후 하리인 황종우(黃鍾羽)·황태연(黃台淵)의 집에 불을 지르고 엔간한 집물(什物)은 모두 가져갔으며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마와 의복 산물들도 마음대로 탈취해 갔다. 22일에는 고성쪽으로 가기 위해 모두 퇴거했다. 곤양군수 송휘로(宋徽老)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달 15일에 하동의 동학도 수천 명이 본군 다솔사(昆明面 龍山里)에 모였다 하며, 광양·순천 동학도 수천 명도 깃발을 들고 각을 불고 총을 쏘고 함성을 지르며 성내로 들어와 혹은 유숙하고 혹은 점심을 먹고 가면서 말하기를 진주로 가던 길에 들렸다고 했다. 이들은 방금 진주접경인 완사(浣沙) 등지에서 합류하여 본군을 지나갈 때 읍의 장정들이 연습하던 조총 20자루도 협박하여 탈취해 갔다. 고성부사 신경균(申慶均)의 보고에 의하면 관장이 영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읍의 관리가 와서 고하는 것을 들으니 동학도 6백여 명이 각자 칼을 휘두르며 관장이 비어 있는 본읍에 들어와 창고를 부수고 심영(沁營)에 보낼 쌀 수십 석을 마음대로 가져다 근처 마을에서 밥을 지어먹고 밤낮으로 총을 쏘며 불량잡배를 유인하여 그 도에 끌어들였고 부유층을 잡아다 토색질이 심했으며 방금 읍저에 머물고 있다. 진주목사 유석(柳 )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달 14일에 본주 대여촌(代如村) 민인들이 교폐(矯 )하자는 통문을 발송하여 각 면에 무리를 모아 읍으로 들어왔으므로 효유했으나 듣지 않고 장터에다 큰 장막을 치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동헌에 난입하여 갖은 말로 위협 핍박하면서 옥문을 부수고 죄수를 멋대로 방면했다. 천백의 무리들은 옥천사(玉泉寺, 固城郡 介川面 禮城里)로 가서 불당과 승사를 모두 불지르니 그들의 행동은 헤아리기 어렵다. 17일에는 하동으로부터 수천 명 동학도가 본주에 도착하자 병사와 목사는 같이 성곽에 나가서 일변 방어하며 일변 많은 도당들은 승세를 몰아 난입하여 각 공해에다 도소를 설치했다.
이 장계에 의하면 하동을 점령했던 전라도 동학군은 11일에는 남해를, 13일에는 사천을, 15일에는 곤양을 , 20일에는 진주를 점거하였다.
한편 진주 동학도들도 대여촌에 집결하여 있다가 때맞추어 진주로 들어가 장터에 장막을 치고 부중을 장악하였다. 그 일부는 22일에 고성의 옥천사까지 진출하여 절을 불사르고 관아를 점거하였다. 결국 손은석이 이끄는 진주지역 동학군들은 진주 북쪽 지역을 휩쓸었고 김인배 전라도 동학군과 여장협의 하동지역 동학도들도 진주 서남쪽을 휩쓸어 경남 남서부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9월 17일에는 하동접 동학군 수천 명이 진주성으로 들어왔다. 병사와 목사는 같이 성곽 밖으로 나가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타이르는데 힘썼다. 그러나 많은 도당들은 승세를 타서 밀고 들어와 각 관아에 집무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른바 하동 동학군의 도통령(都統領)은 정운승(鄭運昇)이라 하며 수백 명을 거느렸고 중군장은 4∼5백 명을 거느렸다. 그리고 하동포(河東包)는 7∼8백 명을, 우선봉은 5∼6백 명을, 후군장은 4∼5백 명을, 도통찰(都統察)은 백여 명을 거느렸다 한다. 이밖에 단성접, 남원접, 섭천접(涉川, 진양 余洞面 川前藥洞 지역), 상평접(上平接, 진주시 上坪, ), 오산접(吾山接, 진양 鳴石面 佳洞五美 지역), 구례접(求禮接)에서 온 동학도들도 읍의 각처에 산재하여 주둔하였다.
9월 18일(양 10월 16일)에는 영호 대접주 김인배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하였다. 진주성 안에 있던 동학군들은 성의 둘레에 오색깃발을 휘날렸고 그 중 성루의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 걸었다. 한편 동라라는 타악기를 두드리고 북을 치고, 이윽고 우레처럼 산천을 진동시키는 대포를 연발하였다. 그리고 창검으로 무장한 동학군이 즐비하게 도열하여 번득이니 이를 바라보는 읍민들은 새 세상 온 것 같이 신바람이 났다.
{오하기문}에는 김인배가 들어올 때 "진주 병마절도사는 영장을 보내어 인배를 맞아들여 도인을 죽인 것을 사죄하고 적을 인도하여 진주로 들어오게 하였다. … 민준호는 적을 영접하여 자신을 낮추어 소접(小接)이라 하면서 인배와 더불어 귀엣말을 오랫동안 속삭이었다"고 한다. {백곡지}에는 "호남 동학 김인배와 옹방규(邕方奎) 등이 하동과 진주를 함락시키자 진주병사 민준호는 크게 놀라 성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여 소를 잡고 주연을 마련하여 영접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의 위세에 눌린 이 지역의 관속들은 일찍부터 도망쳐 공해는 텅텅 비어 관아들은 모두 마비상태에 빠졌다. 사법과 행정기능은 정지되었고 누구 하나 동학군에 항거하려는 반항도 없었다. 19일부터 동학군은 연고지별로 분산하여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중군장은 수백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왔으며 21일에는 소촌역(召村驛, 文山面)에 당도하였고 22일에는 대여촌(代如村, 晋陽郡 琴山面 龍牙里 일대) 용심동(龍 洞)으로 가서 양곡을 확보하는 동시에 악질 향반과 관리배들을 찾아내어 응징하였다. 전라도 동학군들은 9월 24일에 완전히 떠나 각기 본고장으로 돌아가 항일전 준비에 들어갔다.
4. 일본군과 관군 출동
9월 2일 하동이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부산 동래에 있는 일본군은 9월 5일(양 10월 3일)에 정찰대를 보내 실상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청찰대로는 동래 감리서(監理署) 주사 이모(李某)와 순사 4명을 차출하였고 일본헌병순사 4명도 같이 파견하였다. 탐지한 결과는 15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보고를 받았는데 의외로 경상 남서부 일대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진주와 통영 쪽으로 진격해 온다는 첩보를 받자 출병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9월 22일(양 10월 20일) 일본 재부산 영사관은 일본군 출병에 따르는 한국 지방관의 편의를 제공하여 주도록 하는 조치를 요청하였다. 그런 다음 9월 23일과 24일(양 10월 21일, 22일)에 일본군 남부병참감(南部兵站監)은 엔다(遠田) 중위와 스즈기(鈴木) 대위에게 2개 소대와 1개 중대(약 200명)을 이끌고 선편으로 출동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편 정부에서도 9월 25일자로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浦使)로 차하(差下)하여 현지로 파견했다.
지석영은 9월 26일(양 10월 24일)에 대구를 출발, 28일에 부산에 도착, 감리서(監理署)와 일본 영사관을 만난 후 29일에 배편으로 통영에 상륙하였다. 여기서 포군(砲軍) 100명과 군관 4명 즉 104명을 인계받은 다음 10월 2일에 고성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10월 5일(양 11월 2일)에 고성에 도착, 대기중인 토포사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하였다. 진주 구해창(舊海倉)을 거쳐 10월 7일에 곤양군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 곳에 정착한 것은 성곽도 있고 하동·진주 그리고 사천과 덕산 등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창에서 포착해 온 동학군 접주인 임석준(林石俊)을 8일 정오에 성내 북쪽 장터에서 군중을 모아 총살 효수했으며, 나머지 17명도 학살하였다.
동학군과의 첫 번째 전투는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安心里) 뒷산인 금오산(金鰲山) 줄기의 봉우리 시루봉에서 시작하였다.
9일에 동학군이 이 곳에 집결해 있음을 탐문한 일본군은 곤양에서 10일(양 11월 6일) 새벽에 출동하여 공격하였다. 하동접주 여장협(余章協)이 이끄는 동학군은 일본군의 하동 진출을 맊기 위해 진다리(辰橋)에서 서쪽 4km 떨어져 있는 안심리와 고하리(古下里) 일대에 수백 명의 동학군을 배치하여 놓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안심리 전투에서 동학군 5명을 사살하고 28명을 생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획물 중에는 나팔 1쌍, 총 3자루, 큰징 1좌, 북 1좌, 도끼 1자루, 굉이 1자루, 백미 5두가 있었다 한다.
{경상도관찰사장계}에는 "9일 밤에 동도 기백 명이 하동 안심동 뒤에 있는 금오산 줄기인 한 봉우리에 둔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밤중이라 공격하지 못하고 10일 아침에 군관 신철회·정인식이 이끄는 본군과 일본군이 같이 떠나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 8명을 포살하였고 본군이 21명을 생포하였다. 일병에게 생포된 자도 9명이고 이밖에 총에 맞고 도망치다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방민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군은 진교·양보·고전면 일대에 퍼져 있었으며 안심리 뒷산 시루봉에는 2백명 정도가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안심리의 호수는 70여 호였으며 이 곳 동학군도 참가했으나 주로 양보면 동학도가 많았다. 시루봉에는 돌로 성을 쌓았고 나팔과 징과 북을 울리며 깃발을 날리니 몇 10리 밖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무기는 화승총과 활과 돌이었으니 일본군과 상대가 안되었다. 일본군은 산을 완전히 포위하고 신안·성평리, 그리고 시루봉 동쪽 등 세 곳에서 공격해 올라갔다. 한나절만에 동학군은 무너져 고전면 배들이 쪽으로 도주했고, 여기서도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끝내 하동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두 번째 전투는 10월 10일 같은 날 진주 남강 쪽 상평(上坪)에서 벌어졌다.
전투규모와 결과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지난 7일(음 10월 10일) 상평촌 공격 때 관군 10명을 인솔했는데 아병에게 오히려 방해가 됐다"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일본군이 남강을 건너올 때 상평 쪽에 대기하고 있던 동학군이 공격했던 모양이다.
진주지역 동학군은 손은석 대접주를 위시한 여러 접주들이 일본군 출동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천, 백곡, 송촌(松村), 집현산(集賢山), 정정(頂亭), 원본정(院本亭), 수곡(水谷), 상평(上坪) 등지에 집결시켜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주력부대는 북서쪽에, 나머지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배치하였다.
세 번째 전투는 10월 14일(양 11월 11일) 하동 옥종면 고승당산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날의 전투는 동학군과 일본군의 결전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동학군이 진주 북쪽에서 출몰하자 일본군은 이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허탕 치는 일이 있었다. 11월 10일(음 10월 13일)에 스즈기(鈴木)대위와 엔다(遠田)대위는 동학도가 모여 있다는 송촌(松村)과 집현산(集賢山) 쪽으로 각각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동학군은 단성지방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진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스즈기 대위가 이마하시(今橋) 소좌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9일 오전 6시 곤양을 출발하여 수곡촌에 이르러 휴식 중에 포토사 지석영이 보낸 급사가 왔다. 진주부 동쪽 20리에 있는 초촌(招村, 召村)과 동 30리 집현산하 및 단성 북쪽 10리 정정(頂亭)과 동 5리 원본정 등 여러 곳에 동학당 4∼5백 명이 집합하여 모두가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여 동소의 무기를 탈취하려 한다는 공문이 있다고 하며 상황이 화급하니 속히 히군하기를 바라므로 곧 길을 바꾸어 진주부로 들어왔다. 이튿날 중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스즈기 대위가 인솔하여 소촌으로, 한 갈래는 엔다 중위가 인솔하여 집현산하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어제 9일에 이 곳에서 철수하여 단성지방으로 갔다고 하므로 진주부로 돌아오고 말았다. 단성 지방의 상황을 탐색하고 있었는데 이 날 오후 9시경에
단성에 집결하여 있던 동학당은 진주를 습격하려고 수곡촌으로 나왔는데 대체로 4∼5천인이라 한다. 곧 식량 등을 준비하여 11일 새벽 4시에 진주를 출발, 수곡촌과 곤양 사이로 가서 적을 맞으려 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날 새벽 진주를 출발한 일본군이 수곡에 도착한 오전 8시부터 공방전이 벌어져 11시까지 3시간에 걸쳐 전개됐다고 하였다.
{경상도관찰사장계}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경상감사장계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어제 11일(음 10월 14일) 오전 4시 진주를 출발하여 서쪽 30리 남짓한 곳에 있는 수곡촌에 모여 있는 동학당을 공격하려고 그 마을에 갔더니, 동학당이 산과 들에 가득차서 대략 1천4∼5백 명(그 지방 사람의 말로는 4∼5천명이라 함)이 있었다. 8시 5분 그들이 사격해 오므로 응전했다.
점차 공격하며 전진하여 가는데, 그들의 절반은 산 북쪽으로 퇴거했다. 그래서 먼저 산 위에 있는 적을 공격했으나, 산정의 첩루(疊壁)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방어했으며 또 북쪽으로 퇴거하였던 적도 다시 나와 우리의 우측을 공격했다. 10시 15분께 1개 소대를 가지고 산 위의 성벽으로 돌격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 때 우리측 부상자는 3명이었다. 다른 1개 소대는 계속 우측의 적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엔다(遠田) 중위로 하여금 1개 소대를 인솔, 좌측으로부터 적을 몰아내게 하고 그곳에 있는 적을 격파하여 드디어 적의 배후에 이르러 적군을 격멸 소탕했다. 오전 11시 대오를 수습하니 적은 서북쪽 덕산(智異山) 쪽을 향해 퇴각하므로 계속 이를 추적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일본군 부상자 3명, 동학군 전사자 186명, 생포 2명,
유루품은 총 136자루, 칼 18자루, 창 54자루 나팔 3개, 북 3개, 깃발 3개, 화살 2다발, 탄환 약 5관, 말 17두, 소 2두,
경상도관찰사장계
진주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동학도 기백 명이 방금 본주 시천(矢川)과 수곡(水谷)양면에 모여 있다고 한다. 고로 12일(음) 새벽에 진주로 행군했다. 파송했던 장리의 보고에 따르면 시천의 동학도는 이미 해산했고, 진주에서 50리 떨어진 수곡면에 수천 동학도가 점점 모여들어 성을 함락시키는 것도 조모(朝暮)에 달렸다 한다. 본군은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고 일병은 진주에서 출동, 접전하고 있었다. 동학도의 포살자는 186명이오 부상 당하여 도망친 수는 혜아리기 어렵다.
사실 전 동학군은 10월 13일(양 11월 10일)에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손은석 휘하의 병력을 은밀히 백곡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배곡지}에 의하면 "웅구(손은석)등은 또한 크게 두려워 난을 일으키고자 10월에 18포의 무리 10여 만을 백곡평에 모아 발동하니 돈과 식량을 탐내어 생민을 학대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손은석 대접주는 일이 있을 때 마다 백곡지역에 동학도를 집합시켜 왔다. 앞서 대우치(大牛峙) 모임도 바로 얕은 산등을 사이에 두고 있는 백곡과 같은 지역에 있다.
4∼5천에 이르는 동학군은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玉宗面) 북방리(北芳里)의 들판과 고승당산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알게된 일본군은 10월 14일(양 11월 11일) 새벽 4시에 진주에서 수곡으로 출동했다. 상오 7시경에 덕천강(德川江) 동쪽에 당도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동학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8시가 되자 일본군이 강을 건너오자 전방에 출동했던 동학군이 선제 공격의 포문을 열어 전투는 시작됐다. 대포 2문으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소리만 요란했을 뿐 솨부치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후 전방에 있던 동학군은 일본군의 신식무기로 맹렬히 반격해 오자 후퇴하기 시작, 주력부대가 있는 고승당산으로 합류했다. 해발 185m의 야산이지반 삼면이 들판이고 서쪽만 낮은 능선과 연결되어 있다. 정상에는 자연 암석이 성곽처럼 둘러쌓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이 정상을 놓고 2시간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동학군은 "산상 첩벽(疊壁)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방어했다"는 일본 기록과 같이 정상에 1백보 정도의 둘레에 돌성을 쌓아 은폐물을 만들어 놓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저지했다. 동학군은 이 고지를 내주지 않기 위해 사수했으며 그래서 많은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수백 명에 이르는데 일본기록에는 185명이라 했으나 {천도교회사초고}에는 3백여 명이라 했고, {오하기문}에는 "4백여 급을 참했다"고 하였다. 이 지방 사람들은 수백 명이라 했으며 {백곡지}에는 "죽은 자가 5∼6백인이라"하였다. 전사한 동학군의 명단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도교백년약사}에는 진주접주 전희순(全熙淳)의 체험담과 전사자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희순 체험기
전희순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차에 소년 동학군 김옥룡(金玉龍)의 구원을 받아 서홍무(徐弘武)의 집으로 갔다. 늙은 할머니 혼자만 있었는데 피묻은 옷을 바꿔 입고 3일간 치료, 겨우 생명을 보전했다.
고승당전사자
泗川 首接主 金成龍·大正
崔璣鉉·中正 姜五元·昆陽 大正
崔蒙元·金敬連·崔聖俊·韓明善·金命完·中正 姜夢生·金旦柱·趙性仁·執綱 崔鶴權·申寬俊·書司 金華俊
昆明誌戰死者名單
강재국(마곡리)· 朴小金(작팔리)·金德永(力士)
고승당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일본군의 맹추격을 받으며 덕산 쪽으로 후퇴했다. 이 때 오산접 동학군은 명석면 오산리에서 일본군과 한차례 전투를 벌였다.
최삼근(崔三根)의 증언에 의하면 "묵곡리(默谷里) 뒷산에 수백 명 동학군이 숨어 있다가 추격해 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동학군이 밀려 검무산(劒舞山, 해발 280m)으로 후퇴하자 뒤에서 총격을 가해 많은 전사자가 났다"고 한다.
일단 진주로 돌아왔던 일본군은 10월 16일(양 11월 13일)에 다시 병력을 덕산방면으로 출동시켜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 {백곡지}에 "나머지 무리들이 흩어지니 10월 10일이었으며, 2∼3일 후에 왜병 4백 명이 동학도를 추격하기 위해 잣실 장터에 와서 유숙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승당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덕산방면으로 후퇴했으나 곧 대부분이 해산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전라도와 하동쪽 동학군과 합류해 갔다고 여겨진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군을 추격하기 위해 10월 17일(양 11월 14일)에 하동 쪽으로 제각기 출동했다.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은 황토치(黃土峙)까지 갔다가 일군을 만나지 못해 진주로 되돌아왔다. 21일에 일본군이 하동 섬진나루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받고 접전 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출발, 곤양에서 하루를 자고 하동으로 출발, 22일에 50리 지점인 하동 갈록치(渴鹿峙, 河東郡史에는 湯鹿峙·갈마재)에 이르자 일본군에 밀려 후퇴하는 동학군 기백명과 만났다. 혹은 배로 섬진강을 건너가고 혹은 산곡으로 도주했다. 여기서 관군은 동학군을 추격하여 11명을 사살하고, 17명을 생포했으며 총검 등도 많이 노획했다고 한다. {오하기문}에도 지석영은 하동 두치(豆峙, 河東郡史에는 豆置를 蟾津江의 옛 이름이라 하였다) 나루에서 동학군과 싸워 격파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군은 20일(양 11월 17일)에 하동지역에 진출하여 섬진나루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다. 22일에도 갈마재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날 동학군은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나 오히려 30명의 전사자만 내고 광양 쪽으로 멀리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23일(양 11월 20일)에는 흩어진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각 동을 탐색했으나 동학군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동학군이 멀리 순천으로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24일에 곤양으로 철수했다. 하동부사 홍택후(洪澤厚, 1894, 9, 23∼1896, 3, 10)는 지석영 토포사를 따라 내려와 부임했으므로 일군과 관군이 철수하자 언제 동학도가 재침할지 모르는 형편이라 군대의 상주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우병사 휘하 군교 박두각(朴枓珏)이 거느리는 1백 명 관군을 잔류시키고 26일에 창원 마산포로 철수, 부산행 기선에 승선하여 가버렸다. 하동부사 홍택후는 동학도에게 매우 너그럽게 대하는 정책으로 별다른 충돌 없이 지냈으며 김인배로부터 칭송까지 받았다.
{오하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날씨는 춥고 옷이 얇아 순라를 돌고 보초를 서는 일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다투어 강을 건거 적을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실은 노략질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택후는 나루터를 엄중히 단속하여 단 한 명의 병졸도 함부로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광양지방의 백성들은 택후를 덕스럽게 여겨 서로 칭송하였다. 적의 무리 중 숨어있던 자들이나 인배 등도 택후를 장자로 여겼고 도인들을 죽이지 않았으므로 다시 미친 듯이 날 뛸 생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11월 28일에 영우(嶺右) 13읍 조방장으로 임명됐다. (광양지역 전투상황은 순천·광양지역 동학혁명운동에서 다룸)
결 론
경상도 남서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진주를 중심으로 싹터 올랐으나 전라도 동학군의 절대적인 지원 아래 전개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지역으로서 6월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 침범에 자극되어 동학군의 척왜창의(斥倭倡義)에 적극 호응했고 더욱이 민씨 일족인 민준호의 은밀한 지원도 크게 작용했다. 이 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진주지역은 전라도 동학도들의 봉기에 자극되어 1894년 4월부터 일어났으며, 관민을 완전히 장악했었다. 영장 박희방에 대한 항거를 계기로 승세를 잡은 동학도들은 관아 점거라는 극한 상황을 피하면서 악질 관리배와 향반을 응징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전 진주병사 민준호는 그들의 무리가 취합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기세를 도와 오늘의 화근을 초래했다"고 하여 경상 우병사 민준호가 동학군에게 직간접으로 두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자 이를 계기로 동학도들이 내세운 척왜창의는 농민대중 뿐만 아니라 양반 지식인과 관리나 병사들도 진주지역 특유한 역사적 항일배경을 그대로 반영하여 거대한 힘을 형성케 했었다. "상인과 천인의 동비들을 제거하려면 먼저 반족의 동비들을 제거해야 하며, 각읍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여 사족이나 관직 출신들도 적지 아니 동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전라도 광양·순천지역의 영호 대접주 김인배가 하동을 점령하고 진주에 진출하는 한편, 남해·고성·곤양·사천지역에도 직접 지원함으로써 경남 남서부지역의 혁명운동을 촉진하는데 직접적인 힘이 되었다. 그리고 충경대접주 임규호와 전라도 남원, 구례 등지 동학군의 지원도 이 지역 혁명운동에 이바지 했다는 점이다
넷째로, 동학혁명운동 기간은 반년간이었으나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당시 향반지배층은 변혁의 역사를 외면한 채 구질서를 유지하려고 갖은 발악을 다했다. 심지어 침략자 일본군을 마치 구세주로 받들었으며 심지어 자기 지역에 주둔하기를 간청하여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충경포를 배경으로 하는 진주의 손은석과 영호포를 배경으로 하는 하동의 여장협에 의해 주도되었고, 일본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투쟁은 우리들의 가슴에 길이 남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