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태조·태종의 불교정책
세종·세조조의 불교정책
성종의 억불책과 연산군의 폐불정책
중종에서 선조초까지의 불교
임진왜란과 불교계
남한산성 수축과 승군
현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불교
정조와 불교
순조 이후의 한국불교
불교신앙의 역사적 배경
관리서와 각황사
일본불교의 야욕과 원종
근세불교의 영향
한말 불교계의 동향
일본불교의 침투.
불교연구회의 개혁운동
원종개혁운동
임제종의 개혁운동
일제의 사찰령과 본산제
삼십본산련합과 중앙교무원
조계종의 성립
항일구국불교운동
불경간행과 그 연구
불교교육기관 및 사회단체
5·16 군사정변과 불교
불교재산관리법의 제정
다종파시대
불교행사
역경
출판·연구
세종·세조조의 불교정책
성종의 억불책과 연산군의 폐불정책
중종에서 선조초까지의 불교
임진왜란과 불교계
남한산성 수축과 승군
현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불교
정조와 불교
순조 이후의 한국불교
불교신앙의 역사적 배경
관리서와 각황사
일본불교의 야욕과 원종
근세불교의 영향
한말 불교계의 동향
일본불교의 침투.
불교연구회의 개혁운동
원종개혁운동
임제종의 개혁운동
일제의 사찰령과 본산제
삼십본산련합과 중앙교무원
조계종의 성립
항일구국불교운동
불경간행과 그 연구
불교교육기관 및 사회단체
5·16 군사정변과 불교
불교재산관리법의 제정
다종파시대
불교행사
역경
출판·연구
《태조·태종의 불교정책》
십이종파(十二宗派)가 병립하여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 불리던 고려시대의 불교는 이를 감싸주던 고려왕조가 쓰러짐에 따라 모진 서리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태조를 도와 고려를 쓰러뜨리는데 있어서의 주체세력이 여말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자학(朱子學)에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소장지식층이며 유교적 혁신사상을 혁명의 기본이념으로 내세웠던 까닭이다.
원래 정치권력이 바뀌어지면 이에 따라 모든 제도도 또 바뀌어져야 한다는 유교에서의 이른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관념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새 정권의 개혁의욕을 밝혀 그 정권의 출현을 합리화(合理化) 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이미 유교적인 통치이념을 이상으로 내세워 혁명에 성공을 거두었던 만큼 그 내심이야 어떻든 갖가지 구실을 내세워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또 거의 생리화(生理化) 되어 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500년간이 불교배척으로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장 뚜렷하였던 것을 태조 이성계의 불교옹호와 그의 불교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조는 비록 유교이념을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하는 철저한 불교배척자인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하여 조준(趙浚) 등의 이념적 뒷받침에 힘입어 고려를 쓰려뜨렸으나 그 자신은 고려시대의 숭불정책(崇佛政策)의 여풍을 이어받아 깊이 불교를 믿었던 것이며 불교의 제종파(諸宗派) 중에서도 조계종(曹溪宗)의 선풍(禪風)을 좋아하여 태고(太古) · 나옹(懶翁) · 무학(無學) 등의 뛰어난 여러 스님을 스승으로 섬겨 유교측의 배불(排佛)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보호하였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의 불교신앙은 그가 정도전 등의 강력한 권고로 마음에도 없이 왕씨의 일족을 모조리 처형한 것을 뉘우치고 권근(權近)에게 쓰게 한 '별원법화경발서(別願法華經跋書)'에서 법화경(法華經)의 공덕으로 자기의 죄과를 없애고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려는 것이라든가[註1] 역시 권근의 양촌집(陽村集)에 보이는 「대반야경발(大般若經跋)」에 양위(讓位) 후의 태조가 불력(佛力)을 빌려 국조(國祚)의 장구(長久)와 종전의 죄과의 악보(惡報)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것에서도[註2] 충분히 나타나 있다.
태조의 불교신앙은 그의 즉위초에 무학(無學) 자초(自超)를 왕사(王師)로 하고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을 인출(印出)케 하여 중추원사(中樞院事) 정총(鄭摠)으로 하여금 그 원문(願文)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든가, 태조 3년에는 천태종(天台宗)의 승 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하여 선종(禪宗)의 대표인 무학과 아울러 교종(敎宗)의 대표인 조구에 대한 예우까지 배려되었다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와 같이 궁중에는 내원당(內願堂)이 세워져 궁중에서의 불교행사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나, 태조 2년 2월부터 궁궐을 지키는 사졸에게 명하여 신중경소재(神衆經消災)의 주문을 읽도록 하여 태조 4년에는 간관(諫官) 이고(李皐) 등이 상서로서 이를 간(諫)하는 예까지 일어날 정도로 태조의 의식구조는 고려부터의 궁중숭불(宮中崇佛)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의 불교신앙이 잘 나타난 것은 흥천사(興天寺), 흥덕사(興德寺), 흥복사(興福寺)의 사찰을 서울 문안에 새로이 세운 것이라고 하겠다.
흥천사는 태조 5년에 불교의 신앙이 두터웠던 현비(顯妃) 강씨가 별세하자 태조는 슬픔에 못이겨 다음해에 서울의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매장하여 정릉(貞陵)으로 이름짓고 그 동쪽에 흥천사를 세운 것이다. 이것은 또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풍습을 따랐던 것이며 태조 7년에는 흥천사로 친히 나아가서 사북(寺北)에 삼층사리전(三層舍利殿)을 짓게 하는 등 남다른 정열을 보였던 것이며 전(田) 천결(千結)을 내려서 거기서 거두어 들이는 이익을 이 사찰의 경상비에 쓰도록 하였던 것이다.
초대 흥천사주(興天寺主)는 태고(太古)의 문도(門徒)였던 대선사(大禪師) 상총(尙聰)이 임명되었던 것이나, 그 종파(宗派)로는 태조가 좋아하던 조계종의 본사(本寺)로 하기로 되었다.
현재의 중구 정동 미국문화원(옛 경기여고 터) 자리가 바로 이 흥천사가 세워진 곳이었다.
흥천사가 선종이었는데 대하여 다시 교종으로는 동부(東部) 연희방(燕喜坊)에 흥덕사가 세워졌다. 후일 세종이 종파를 정리하여 선과 교의 2종으로 하였을 때에도 흥천사가 선종 종무원(宗務院)이 되고, 흥덕사는 교종 종무원이 되어 그 사격(寺格)은 이어져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흥덕사는 태조가 재위 7년에 왕위를 정종에 물려주고 정종이 또 재위 2년에 태종의 강박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자 국조(國祚)의 장래를 걱정하여 태종 원년 여름 태조가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살던 이 곳의 옛집 동쪽에 따로이 새 전각을 지어 이를 덕안전(德安殿)이라고 이름짓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그 사제(私第)를 광명(廣明) · 봉선(奉先)의 2사(寺)로 하여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 하였던 옛 일에 따라 사찰로 희사(喜捨)하였던 것이다.
한편 태조가 지은 또 하나의 사찰인 흥복사는 조계종 본사로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 즉 지금의 파고다공원에 세웠던 것이니, 세종 6년에 없앴다가 세조 10년에 대원각사(大圓覺寺)로 다시 일으킨 것이다. 세조 10년에 칙명을 받들어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대원각사비명(大圓覺寺碑銘)[註3]에는 태조가 이를 조계종 본사로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흥천사가 조계종 본사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흥복사도 선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조계종 본사는 아닌 것 같다. 태조는 이 밖에도 조종(祖宗)의 추복(追福)과 모든 백성의 행복을 빌기 위하여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마련하여 그 곳까지 나가서 낙성식에 참석하였으며, 또 개성(開城)의 연복사(演福寺)와 해인사탑(海印寺塔)을 중수케 하였는데 해인사탑의 중수 낙성식에 즈음하여 친히 원문(願文)을 지어 나라와 겨레의 복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고려조에 있어서의 승려들의 폐단을 충분히 알고, 이를 바로 잡는 방안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점진적으로 태조는 즉위년에 조준(趙浚) 등이 올린 상소 22조 중에 양반 자제는 5승포(升布) 100필(疋), 서인(庶人)은 150필, 천구(賤口)는 200필을 바치고 도첩(度牒)을 받는 자에게만 승려가 될 수 있게 하는 도첩제(度牒制)의 엄행(嚴行)과 승려들이 제멋대로 기부를 걷는 것을 금하려는 건의를 받아 실행케 하였던 것이다.[註4]
여기의 포(布)는 정포(正布)인 마포(麻布)인 것 같으며 5승포는 극히 조포(粗布)이나 그래도 100필이면 상당한 액수이며 이것이 신분이 낮을수록 더 많이 내도록 한 것은 그 지망자가 낮은 계층일수록 많아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의지가 굳은 자에게만 승려가 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것은 서민이 다투어 삭발하여 조세의 대상이 줄어져 국가재정에 미치는 영향과 국가의 생산력 저하 및 병력 대상의 감소를 방지하는 의미에서도 태조로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정종은 겨우 2년 미만으로 왕위를 물러 났기 때문에 그 개인적인 호불(好佛)의 자취는 보이나 정책면에서는 나타난 것이 없다. 조선왕조에 있어서의 불교수난은 정종의 뒤를 이은 태종에서 뚜렷이 눈에 띄게 되었다.
한학(漢學)의 소양이 깊어 고려 우왕시에 문과에 급제한 바 있었던 태종으로서는 불교는 비위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통치이념에서 보아도 곧 불교를 억압하여야 하였을 것이나 초년에는 호불의 태상왕(太上王) 이성계(李成桂)의 입김이 두려워 겨우 궁중에서 주문(呪文)을 읽는 승려를 없애고 내시(內侍)들이 지불(持佛)로 하고 있던 인왕불(仁王佛)을 궁내에서 내원당(內願堂)에 옮기는데 그치고 대사헌 류관(柳觀) 등의 승려정리의 건의를 비롯한 예조에서의 승니환속(僧尼還俗) 요청 같은 것은 일체 묵살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 5년 11월에 있었던 의정부의 사사전구함혁(寺社田口減革)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음해까지 사액(寺額)을 크게 줄여 12종파를 합하여 7종으로 하고 전국에 246사(寺)만 남겨 이에 들지 않은 사찰은 폐지하여 승려를 속인(俗人)으로 되돌리고 서울의 흥천사, 삼각산(三角山)의 진관사(津寬寺), 양주(楊州)의 회암사(檜巖寺),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등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찰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선종 · 교종의 대표적인 사찰과 국조비보사(國祚裨補寺)로서 이름있는 몇 곳을 제외하고는 그 전토(田土)를 국유로 거두어 들이고 사찰에서 사역하던 노예의 수를 줄여 군정(軍丁)에 충당하였다.
이와 같은 태종의 개혁은 당시의 사찰측으로 보아 승려의 감소와 재정면의 큰 타격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기에 조계종의 성민(省敏) 등이 이 개혁의 중지를 직소하였으나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태종은 태조의 도첩제 실시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 제도의 실행을 엄하게 하여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방지하였을 뿐 아니라 태종 5년 가을 왕사(王師)인 무학(無學)이 입적(入寂)한 다음에는 다시 왕사나 국사(國師)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승려에 대한 대우를 내려 그 자존심을 꺾어 능력있는 양반과 부민(富民)의 자제가 승려가 되는 것에 매력을 갖지 못하게 함이었다. 태종은 12년에는 태조의 추복사(追福寺)로 문경사(聞慶寺)를 세우고 해인사(海印寺)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찍어 기진(寄進)하는 등의 이례적인 행위도 없지 않았으나 그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난 2년 후인 세종 2년에 왕비 민씨가 돌아가 헌릉(獻陵)에 모실 때 여러 신하들이 옛 습속에 따라 능사(陵寺)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이 이를 물리쳐 고려조 이래 지켜오던 옛 습속을 깨뜨렸던 것만 보아도 그의 통치 19년간은 철저한 불교억압으로 일관 되었던 것이 엿보인다.
원래 정치권력이 바뀌어지면 이에 따라 모든 제도도 또 바뀌어져야 한다는 유교에서의 이른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관념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새 정권의 개혁의욕을 밝혀 그 정권의 출현을 합리화(合理化) 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이미 유교적인 통치이념을 이상으로 내세워 혁명에 성공을 거두었던 만큼 그 내심이야 어떻든 갖가지 구실을 내세워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또 거의 생리화(生理化) 되어 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500년간이 불교배척으로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장 뚜렷하였던 것을 태조 이성계의 불교옹호와 그의 불교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조는 비록 유교이념을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하는 철저한 불교배척자인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하여 조준(趙浚) 등의 이념적 뒷받침에 힘입어 고려를 쓰려뜨렸으나 그 자신은 고려시대의 숭불정책(崇佛政策)의 여풍을 이어받아 깊이 불교를 믿었던 것이며 불교의 제종파(諸宗派) 중에서도 조계종(曹溪宗)의 선풍(禪風)을 좋아하여 태고(太古) · 나옹(懶翁) · 무학(無學) 등의 뛰어난 여러 스님을 스승으로 섬겨 유교측의 배불(排佛)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보호하였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의 불교신앙은 그가 정도전 등의 강력한 권고로 마음에도 없이 왕씨의 일족을 모조리 처형한 것을 뉘우치고 권근(權近)에게 쓰게 한 '별원법화경발서(別願法華經跋書)'에서 법화경(法華經)의 공덕으로 자기의 죄과를 없애고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려는 것이라든가[註1] 역시 권근의 양촌집(陽村集)에 보이는 「대반야경발(大般若經跋)」에 양위(讓位) 후의 태조가 불력(佛力)을 빌려 국조(國祚)의 장구(長久)와 종전의 죄과의 악보(惡報)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것에서도[註2] 충분히 나타나 있다.
태조의 불교신앙은 그의 즉위초에 무학(無學) 자초(自超)를 왕사(王師)로 하고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을 인출(印出)케 하여 중추원사(中樞院事) 정총(鄭摠)으로 하여금 그 원문(願文)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든가, 태조 3년에는 천태종(天台宗)의 승 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하여 선종(禪宗)의 대표인 무학과 아울러 교종(敎宗)의 대표인 조구에 대한 예우까지 배려되었다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와 같이 궁중에는 내원당(內願堂)이 세워져 궁중에서의 불교행사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나, 태조 2년 2월부터 궁궐을 지키는 사졸에게 명하여 신중경소재(神衆經消災)의 주문을 읽도록 하여 태조 4년에는 간관(諫官) 이고(李皐) 등이 상서로서 이를 간(諫)하는 예까지 일어날 정도로 태조의 의식구조는 고려부터의 궁중숭불(宮中崇佛)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의 불교신앙이 잘 나타난 것은 흥천사(興天寺), 흥덕사(興德寺), 흥복사(興福寺)의 사찰을 서울 문안에 새로이 세운 것이라고 하겠다.
흥천사는 태조 5년에 불교의 신앙이 두터웠던 현비(顯妃) 강씨가 별세하자 태조는 슬픔에 못이겨 다음해에 서울의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매장하여 정릉(貞陵)으로 이름짓고 그 동쪽에 흥천사를 세운 것이다. 이것은 또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풍습을 따랐던 것이며 태조 7년에는 흥천사로 친히 나아가서 사북(寺北)에 삼층사리전(三層舍利殿)을 짓게 하는 등 남다른 정열을 보였던 것이며 전(田) 천결(千結)을 내려서 거기서 거두어 들이는 이익을 이 사찰의 경상비에 쓰도록 하였던 것이다.
초대 흥천사주(興天寺主)는 태고(太古)의 문도(門徒)였던 대선사(大禪師) 상총(尙聰)이 임명되었던 것이나, 그 종파(宗派)로는 태조가 좋아하던 조계종의 본사(本寺)로 하기로 되었다.
현재의 중구 정동 미국문화원(옛 경기여고 터) 자리가 바로 이 흥천사가 세워진 곳이었다.
흥천사가 선종이었는데 대하여 다시 교종으로는 동부(東部) 연희방(燕喜坊)에 흥덕사가 세워졌다. 후일 세종이 종파를 정리하여 선과 교의 2종으로 하였을 때에도 흥천사가 선종 종무원(宗務院)이 되고, 흥덕사는 교종 종무원이 되어 그 사격(寺格)은 이어져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흥덕사는 태조가 재위 7년에 왕위를 정종에 물려주고 정종이 또 재위 2년에 태종의 강박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자 국조(國祚)의 장래를 걱정하여 태종 원년 여름 태조가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살던 이 곳의 옛집 동쪽에 따로이 새 전각을 지어 이를 덕안전(德安殿)이라고 이름짓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그 사제(私第)를 광명(廣明) · 봉선(奉先)의 2사(寺)로 하여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 하였던 옛 일에 따라 사찰로 희사(喜捨)하였던 것이다.
한편 태조가 지은 또 하나의 사찰인 흥복사는 조계종 본사로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 즉 지금의 파고다공원에 세웠던 것이니, 세종 6년에 없앴다가 세조 10년에 대원각사(大圓覺寺)로 다시 일으킨 것이다. 세조 10년에 칙명을 받들어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대원각사비명(大圓覺寺碑銘)[註3]에는 태조가 이를 조계종 본사로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흥천사가 조계종 본사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흥복사도 선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조계종 본사는 아닌 것 같다. 태조는 이 밖에도 조종(祖宗)의 추복(追福)과 모든 백성의 행복을 빌기 위하여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마련하여 그 곳까지 나가서 낙성식에 참석하였으며, 또 개성(開城)의 연복사(演福寺)와 해인사탑(海印寺塔)을 중수케 하였는데 해인사탑의 중수 낙성식에 즈음하여 친히 원문(願文)을 지어 나라와 겨레의 복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고려조에 있어서의 승려들의 폐단을 충분히 알고, 이를 바로 잡는 방안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점진적으로 태조는 즉위년에 조준(趙浚) 등이 올린 상소 22조 중에 양반 자제는 5승포(升布) 100필(疋), 서인(庶人)은 150필, 천구(賤口)는 200필을 바치고 도첩(度牒)을 받는 자에게만 승려가 될 수 있게 하는 도첩제(度牒制)의 엄행(嚴行)과 승려들이 제멋대로 기부를 걷는 것을 금하려는 건의를 받아 실행케 하였던 것이다.[註4]
여기의 포(布)는 정포(正布)인 마포(麻布)인 것 같으며 5승포는 극히 조포(粗布)이나 그래도 100필이면 상당한 액수이며 이것이 신분이 낮을수록 더 많이 내도록 한 것은 그 지망자가 낮은 계층일수록 많아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의지가 굳은 자에게만 승려가 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것은 서민이 다투어 삭발하여 조세의 대상이 줄어져 국가재정에 미치는 영향과 국가의 생산력 저하 및 병력 대상의 감소를 방지하는 의미에서도 태조로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정종은 겨우 2년 미만으로 왕위를 물러 났기 때문에 그 개인적인 호불(好佛)의 자취는 보이나 정책면에서는 나타난 것이 없다. 조선왕조에 있어서의 불교수난은 정종의 뒤를 이은 태종에서 뚜렷이 눈에 띄게 되었다.
한학(漢學)의 소양이 깊어 고려 우왕시에 문과에 급제한 바 있었던 태종으로서는 불교는 비위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통치이념에서 보아도 곧 불교를 억압하여야 하였을 것이나 초년에는 호불의 태상왕(太上王) 이성계(李成桂)의 입김이 두려워 겨우 궁중에서 주문(呪文)을 읽는 승려를 없애고 내시(內侍)들이 지불(持佛)로 하고 있던 인왕불(仁王佛)을 궁내에서 내원당(內願堂)에 옮기는데 그치고 대사헌 류관(柳觀) 등의 승려정리의 건의를 비롯한 예조에서의 승니환속(僧尼還俗) 요청 같은 것은 일체 묵살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 5년 11월에 있었던 의정부의 사사전구함혁(寺社田口減革)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음해까지 사액(寺額)을 크게 줄여 12종파를 합하여 7종으로 하고 전국에 246사(寺)만 남겨 이에 들지 않은 사찰은 폐지하여 승려를 속인(俗人)으로 되돌리고 서울의 흥천사, 삼각산(三角山)의 진관사(津寬寺), 양주(楊州)의 회암사(檜巖寺),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등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찰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선종 · 교종의 대표적인 사찰과 국조비보사(國祚裨補寺)로서 이름있는 몇 곳을 제외하고는 그 전토(田土)를 국유로 거두어 들이고 사찰에서 사역하던 노예의 수를 줄여 군정(軍丁)에 충당하였다.
이와 같은 태종의 개혁은 당시의 사찰측으로 보아 승려의 감소와 재정면의 큰 타격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기에 조계종의 성민(省敏) 등이 이 개혁의 중지를 직소하였으나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태종은 태조의 도첩제 실시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 제도의 실행을 엄하게 하여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방지하였을 뿐 아니라 태종 5년 가을 왕사(王師)인 무학(無學)이 입적(入寂)한 다음에는 다시 왕사나 국사(國師)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승려에 대한 대우를 내려 그 자존심을 꺾어 능력있는 양반과 부민(富民)의 자제가 승려가 되는 것에 매력을 갖지 못하게 함이었다. 태종은 12년에는 태조의 추복사(追福寺)로 문경사(聞慶寺)를 세우고 해인사(海印寺)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찍어 기진(寄進)하는 등의 이례적인 행위도 없지 않았으나 그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난 2년 후인 세종 2년에 왕비 민씨가 돌아가 헌릉(獻陵)에 모실 때 여러 신하들이 옛 습속에 따라 능사(陵寺)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이 이를 물리쳐 고려조 이래 지켜오던 옛 습속을 깨뜨렸던 것만 보아도 그의 통치 19년간은 철저한 불교억압으로 일관 되었던 것이 엿보인다.
《세종·세조조의 불교정책》
태조는 건국초부터 유교를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내세우고 태종이 그 실행을 강력히 밀고 나갔던 것이나 아직 철저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았다. 태종의 뒤를 이어 정교면(政敎面)에서 이 주의를 철저히 표현하고 애민(愛民)의 치도(治道)를 고루 미치게 하여 조선왕조의 요순(堯舜)으로까지 불리워지는 세종의 초년은 불교에 있어서는 수난의 시대였다.
그 초년에 있어서의 불교업압책을 정극인(丁克仁)[註5]과 세종실록에 보이는 사헌부의 상소(上疏)[註6]를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초년에 있어서의 불교업압책을 정극인(丁克仁)[註5]과 세종실록에 보이는 사헌부의 상소(上疏)[註6]를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내불당(內佛堂)을 폐지하고 태종의 종파(宗派) 정리에 이어 다시 사액(寺額)을 줄여 7종파, 5교(五敎) 양종(兩宗)을 합하여 선종(禪宗) · 교종(敎宗)의 양종파로 정리하였다.
2) 사찰 및 승려들이 그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아 내려오던 노비를 정리하여 공유(公有)로 하였다.
3) 서울 도성안에는 흥천사(興天寺), 흥덕사(興德寺)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없애게 하여 이를 관청시설로 쓰게 하였다.
4) 없애버린 사찰의 불상과 종경(鐘磬)은 모두 부셔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5) 불사(佛事)에 쓰여지는 비용을 절약케 하였다.
6) 서울안으로 승려들이 제멋대로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도승제(度僧制)도 엄하게 하였다.」
2) 사찰 및 승려들이 그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아 내려오던 노비를 정리하여 공유(公有)로 하였다.
3) 서울 도성안에는 흥천사(興天寺), 흥덕사(興德寺)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없애게 하여 이를 관청시설로 쓰게 하였다.
4) 없애버린 사찰의 불상과 종경(鐘磬)은 모두 부셔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5) 불사(佛事)에 쓰여지는 비용을 절약케 하였다.
6) 서울안으로 승려들이 제멋대로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도승제(度僧制)도 엄하게 하였다.」
태종의 철저한 불교 억압책을 이어받아 세종이 그 초년에 강행한 불교 억압책은 태종의 그것보다 더 치밀하고 철저한 것이어서 이대로 밀고 나가면 이 땅에는 사찰과 승려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것이었다. 세종의 불교억압책 중에서 그 후의 한국불교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종파를 통합하여 선종 · 교종의 2종으로 하고 사찰의 수를 크게 줄였던 것이다.
종파통합의 문제는 세종 2년부터 논의된 바 있었으나 결정짓지 못하였던 것은 호불주(好佛主)이었던 명태조(明太祖)의 간섭과 불교측에서 일어날 맹렬한 반대운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이 억압책이 구체화 하게 된 것은 세종 6년초 대사헌 하연(河演)의 상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극렬한 상서를 육조(六曹)에 내려 토의케 하니 허조(許稠)만이 홀로 급격한 정리를 삼가고 점차적인 방법으로 단행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받아들여 동왕 6년 4월에 이르러 사사(寺社)의 사무를 맡아보던 예조의 발의에 따라 단행되었다. 당시 예조의 상계(上啓)에는 조계(曹溪), 천태(天台), 총남(總南)의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하고, 화엄(華嚴), 자은(慈恩), 중신(中神), 시흥(始興)의 4종을 합쳐 교종으로 하여 전국에서 36사만 사격(寺格)을 인정하고 그 토지 노비의 수 및 거승(居僧)의 수도 정하여졌으며 승녹사(僧錄司)도 또 폐하고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하자는 요지였다.
사격이 인정되어 남게 된 것이 36사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본산격(本山格)의 사찰 수이며 이에서 제외된 사찰은 말사(末寺)로서 이들 36사에 나누어져 지배를 받아 존속할 수 있게 되는 까닭에 결코 전국의 사찰이 36개소라는 것은 아니나 태종 6년 정월에 사찰을 정리하여 사격이 인정되어 남게 한 232개의 사찰에서 겨우 36사만이 사격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이 조처가 얼마나 가혹하였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종파정리로 7종이 2종으로 되어 줄어진 5종의 교리 연구와 수도방식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승려로서 출세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관문이었던 승시(僧試) 과목에 선종은 전등(傳燈) 염송(拈頌), 교종은 화엄십지(華嚴十地)로 고정됨에 따라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이어 내려오던 천태(天台), 진언(眞言), 법상(法相), 법성(法性)의 각 종파에서 연구되던 경전의 학술을 돌보지 않게 되어 한국 불교의 내용을 빈약하게 하였다.
세종 6년 이후의 불교정책은 그 억압책으로 일관되었던 것이나 세종 1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수도(首都)의 경영을 비롯하여 한성부(漢城府) 내에 큰 토목공사를 벌이게 되어 많은 인부가 필요하게 되자 전례에 따라 승려를 이에 종사케 하고 그 공로자에게는 대선사(大禪師)의 승직(僧職)을, 그리고 일반의 노역(勞役) 승려에게는 도첩(度牒)을 주고 정전(丁錢)을 면제하였던 것이다. 불교를 억압하던 당시에 있어서도 국가가 필요할 때는 위계질서가 서 있는 집단생활을 하는 승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였던 것이나 이것이 또 잇따른 유신(儒臣)들의 과장된 상서로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라는 불교로서는 되돌릴 수 없는 불명예와 교세의 위축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취업하던 승려의 극히 일부가 음란한 행동을 한 것이 세종 13년부터 문제가 되어 그 도성 출입이 제한되더니 동 17년에는 다시 거듭 강화되고 동 20년에는 양종의 정원승려(定員僧侶) 및 공사에 종사하던 승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초년에 불교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단행하였던 세종이었으나 왕실의 원찰로서 태조가 창건한 흥천사(興天寺)의 중수와 그 형이며 종실의 원로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비롯하여 선왕의 비빈들의 지극한 불교신앙의 감화 등으로 점차 호불(好佛)의 군주로 바뀌어진 것은 불교계가 다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 11년(1429)에 흥천사는 태조가 창건한 왕실의 원찰이니 무너진 것을 고쳐야 하겠다는 이조(吏曹)를 거쳐 올라온 선종의 청원서를 받아들이고 천태종의 행호(行乎)를 스승으로 섬기며, 세종 15년에는 한강에서 성대한 수륙재(水陸齋)를 치루었다. 특히 세종은 사헌부와 유신들의 많은 비난을 부릅쓰고 흥천사를 고치는 대공사를 선공감(繕工監) 및 조성도감(造成都監)까지 동원하여 동왕 18년에는 국가의 직영으로 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에 동원되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고 또 그들에게는 정전을 받지 않고 도첩이 주어졌으며 각계에서의 '반승(飯僧)'과 위로행사가 잇따라 있었던 것이니 신앙은 정책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엿보여 주는 일이었다.
10여년에 걸친 대공사로 거의 새로 건조하다시피 된 흥천사에서 해인사(海印寺)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 열게 된 대경찬회(大慶讚會)를 반대하는 각사(各司)의 간소(諫疏)를 물리치고 세종은 스스로 불교를 신앙하는 것을 밝히고 24년(1442)의 대경찬회에서 그 계소문(啓疏文)에 '보살계제자조선국왕(菩薩戒弟子朝鮮國王)'이라고 서명날인 한 것에서[註7] 세종의 호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세종의 귀의는 궁중에도 영향을 미쳐 태종의 빈(嬪)이며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생모 권씨가 삭발하여 불문(佛門)으로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비롯하여 강희안(姜希顔) · 병조판서(兵曹判書) 민신(閔伸) 등 고관들의 불교신자들도 불교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세종은 스스로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호의를 보였으며 말년에 있어서의 그의 신앙생활의 자취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사례를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한국의 경제사 뿐 아니라 서울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진관사(津寬寺) 및 세종 31년(1449) 5월부터 착수한 수륙사(水陸寺)의 수축과 그 경비조달 방법이었다.
고려 이래 이름난 사찰인 진관사에 태조 6년부터 왕씨(王氏)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수륙사의 개수비용은 세종 30년에 신하들의 치열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 문소전(文昭殿) 곁에 내탕금(內帑金)과 정부자재로 내원당(內願堂)을 재건하였기에 세종도 다시 정부재정을 이에 충당하기는 어려워 승려들의 자담형식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공사의 간사승(幹事僧)으로는 각돈(覺頓)이 맡게 되었으나 그 비용은 전농시(典農寺)의 쌀 400석, 면포(綿布) 200필의 지급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전라 · 황해 양도의 공물(貢物)에서 부가세였던 전세지(田稅紙)와 초둔(草芚)의 청부상납(請負上納)의 권리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부에 바칠 공납을 먼저 대신하여 바치고 혹독한 경우는 그 몇배를 거두는 이권이며 폐단도 적지 않았다. 각돈(覺頓)의 이 대납(代納)에 협조하지 않았던 전라도에서 나주 등 30여의 지방관이 일제히 견책 파직되었던 진관사의 공납청부는 다음 왕인 세조에 이르러 관권과 결탁하여 더 횡포를 부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었다.[註8]
세종이 32년 정월에 돌아가자 고려시대 같이 그 장의도 불교식이었으며 그 후궁으로 삭발하여 여승이 된 것이 무릇 10여인이었다. 이는 궁중 불교의 성황을 엿보는데 충분한 일이었다.
세종을 이은 문종은 2년도 못되어 돌아가고 단종도 왕위는 3년밖에 누리지 못하였기에 불교정책에 대하여는 별로 뚜렷하지 않으나 세종 말년의 영향과 당시 궁중의 불교신앙으로 보아도 억압책을 쓰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유교적 윤리관과 단종을 동정하는 국민의 감정으로 일부에서는 평이 좋지 않으나 불교측에서 보면 조선불교대호왕(朝鮮佛敎大護王)으로 존경을 받는 호불의 군주였다.
세조가 그 9년(1463)에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의 중수사실을 듣고 왕비와 더불어 미(米) · 포(布) · 전(錢)을 기진(寄進)하였던 바 친히 쓴 수기에는 혜각존자(慧覺尊者)를 존경하여 그 이름마다 행을 바꾸어 쓰고 끝에 '불제자(佛弟子) 승천체도열문영무조선국왕이유(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李王柔)'라고 적은 일과[註9]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성임(成任)에게 석가의 진리가 공자(孔子)의 가르침 보다 훨씬 좋다고 공언하였던 일 등으로 보아 그의 호불정신이 변함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재위 14년간은 불교옹호와 이에 따르는 여러 사업으로 일관되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크게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승려가 되는 자격시험의 법을 정하고 이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밝혀 자손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2) 여러 가지 불교도서를 발행하여 널리 불교를 알리게 한 것이다.
3) 사찰과 탑 등의 중수 또는 건립에 정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건국초부터 예조나 사헌부에서 불교공격에 설득력 있는 구실로 되풀이 주장하였던 것은 부녀의 사원출입이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것이었는데 세조 3년에도 예조에서 같은 의견이 나왔었다.
불교의 신앙에서 그 신앙이 두터운 부녀의 사원 출입금지가 실행되면 자연 사찰은 쇠퇴되고 불교도 또 대부분의 지지자를 잃게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이 예조의 의견에 대하여 세조는 도리어 교지(敎旨)를 내려 관료들이 사찰에 제멋대로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고 또 범죄의 혐의가 있는 승려를 신문하려면 먼저 왕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을 명하고 이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밝혀 법제화 하며 사찰과 승려신분을 보장하였을 뿐 아니라 부녀의 사찰 출입의 문제와 관련시켜 당시의 관헌들이 도첩(度牒)을 엄격히 조사하여 그것이 없는 자를 무조건 처분한다든가 정전(丁錢)을 내고 승려가 되려는 자를 일부러 지연시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그해 10월 이전에 삭발하여 승려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모두 도첩제도(度牒制度)에서 면제되고, 사찰은 정당하게 부가되는 공세(貢稅) 외에 다른 여러 가지 납물(納物)과 복역에서 면제되도록 하였던 것이며, 세조 7년에 이르러는 공사천(公私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넓혔다. 태조 때에는 승려가 되려면 정포(正布) 200필을 바쳐야 했던 것을 30필로 낮추고 금강경(金剛經) · 심경(心經) · 능엄주(楞嚴呪)를 읽을 수 있고 사천(私賤)의 경우는 그 원주인의 청원이 있고 공천(公賤)은 그 소속관청의 노비문서에서 이름을 말소할 수 있는 수속만으로 승려가 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세종 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별세하자 그 추복(追福)을 위하여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에게 승우(僧祐) · 도선(道宣)의 이율사(二律師)의 석가보(釋迦譜) · 석가씨보(釋迦氏譜) 및 다른 불경 등을 합쳐 윤색하여 한글로 엮게 한 것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며 세조 즉위 후 다시 이를 수정하여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합쳐 동왕 4년에 간행한 것이 월인석보(月印釋譜)이며 이는 한글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어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조는 그 8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동왕 10년까지 법화경(法華經) · 원각경(圓覺經) · 영가집(永嘉集) · 금강경 · 심경 등을 세종 28년에 만들어진 한글로 번역케 하여 한글을 처음 만들 때의 목적인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루 끝없는 불교의 자비심을 누리게 하였을 뿐 아니라 관념면에서는 한자 중심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벗어나 우리 국문학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념탑을 세웠다.
이와 같이 세조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만큼 각 사찰에 대한 중수 및 전토기진(田土寄進)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경기도 백운산(白雲山) 내원사(內院寺)에 노비 및 전토기진을 비롯하여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강원도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의 중수, 해인사(海印寺)의 판각(板閣)의 중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및 청학사(靑鶴寺)의 전토기진, 금강산(金剛山) 건봉사(乾鳳寺) · 표훈사(表訓寺) · 유점사(楡岾寺)와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 · 영암(靈巖) 도갑사(道岬寺)의 증축 및 중수, 세자의 경릉(敬陵, 고양시)에 정인사(正因寺)의 창건을 그 중 몇가지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세조의 사찰 후원의 여러 업적에서 서울시와 관계있는 것은 흥천사에 대종을 만들어 기진한 것과 대원각사(大圓覺寺)의 중흥(中興)이었다. 세조 7년(1462)에 만들어진 이 흥천사의 대종은 지금도 덕수궁에 보존되어 세조의 호불을 전하여 주고 있다. 흥천사의 종보다 더 큰 공사는 원래 태조가 세운 흥덕사가 그 후 없어져 세조 9년까지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쓰여지고 있던 지금의 파고다공원 자리에 대원각사를 다시 세운 일이었다. 당시 세조의 둘째 아저씨이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의 동쪽 언덕에 석종을 세우고 법회를 열어 원각경을 강(講)하였더니 여러 가지의 뜻하지 않았던 서상(瑞象)이 나타났기에 원각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이 서상과 그 경의 번역이 끝난 것을 아울러 축하하기 위하여 흥복사 자리에 대원각사를 세우게 되었다 한다.
이 절의 건립은 '중수'로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의 국법이 새로 사찰을 세우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까닭이며 사실은 새로 세운 것과 다름 없는 것이었다. 대원각사의 경내를 넓히기 위하여 민가를 헐어버리는데 지급된 정부의 보상금으로 정포(正布) 4,004필이 들었다고 한다.
세조 9년(1463) 6월에 착공하여 그 해 10월 공사가 끝난 대원각사에 다시 10층의 한수석대탑(寒水石大塔)이 세워져 500여 년의 비바람에 견디어 대원각사는 없어졌어도 그 탑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시의 명물로서 우리가 우러러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종파통합의 문제는 세종 2년부터 논의된 바 있었으나 결정짓지 못하였던 것은 호불주(好佛主)이었던 명태조(明太祖)의 간섭과 불교측에서 일어날 맹렬한 반대운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이 억압책이 구체화 하게 된 것은 세종 6년초 대사헌 하연(河演)의 상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극렬한 상서를 육조(六曹)에 내려 토의케 하니 허조(許稠)만이 홀로 급격한 정리를 삼가고 점차적인 방법으로 단행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받아들여 동왕 6년 4월에 이르러 사사(寺社)의 사무를 맡아보던 예조의 발의에 따라 단행되었다. 당시 예조의 상계(上啓)에는 조계(曹溪), 천태(天台), 총남(總南)의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하고, 화엄(華嚴), 자은(慈恩), 중신(中神), 시흥(始興)의 4종을 합쳐 교종으로 하여 전국에서 36사만 사격(寺格)을 인정하고 그 토지 노비의 수 및 거승(居僧)의 수도 정하여졌으며 승녹사(僧錄司)도 또 폐하고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하자는 요지였다.
사격이 인정되어 남게 된 것이 36사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본산격(本山格)의 사찰 수이며 이에서 제외된 사찰은 말사(末寺)로서 이들 36사에 나누어져 지배를 받아 존속할 수 있게 되는 까닭에 결코 전국의 사찰이 36개소라는 것은 아니나 태종 6년 정월에 사찰을 정리하여 사격이 인정되어 남게 한 232개의 사찰에서 겨우 36사만이 사격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이 조처가 얼마나 가혹하였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종파정리로 7종이 2종으로 되어 줄어진 5종의 교리 연구와 수도방식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승려로서 출세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관문이었던 승시(僧試) 과목에 선종은 전등(傳燈) 염송(拈頌), 교종은 화엄십지(華嚴十地)로 고정됨에 따라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이어 내려오던 천태(天台), 진언(眞言), 법상(法相), 법성(法性)의 각 종파에서 연구되던 경전의 학술을 돌보지 않게 되어 한국 불교의 내용을 빈약하게 하였다.
세종 6년 이후의 불교정책은 그 억압책으로 일관되었던 것이나 세종 1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수도(首都)의 경영을 비롯하여 한성부(漢城府) 내에 큰 토목공사를 벌이게 되어 많은 인부가 필요하게 되자 전례에 따라 승려를 이에 종사케 하고 그 공로자에게는 대선사(大禪師)의 승직(僧職)을, 그리고 일반의 노역(勞役) 승려에게는 도첩(度牒)을 주고 정전(丁錢)을 면제하였던 것이다. 불교를 억압하던 당시에 있어서도 국가가 필요할 때는 위계질서가 서 있는 집단생활을 하는 승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였던 것이나 이것이 또 잇따른 유신(儒臣)들의 과장된 상서로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라는 불교로서는 되돌릴 수 없는 불명예와 교세의 위축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취업하던 승려의 극히 일부가 음란한 행동을 한 것이 세종 13년부터 문제가 되어 그 도성 출입이 제한되더니 동 17년에는 다시 거듭 강화되고 동 20년에는 양종의 정원승려(定員僧侶) 및 공사에 종사하던 승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초년에 불교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단행하였던 세종이었으나 왕실의 원찰로서 태조가 창건한 흥천사(興天寺)의 중수와 그 형이며 종실의 원로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비롯하여 선왕의 비빈들의 지극한 불교신앙의 감화 등으로 점차 호불(好佛)의 군주로 바뀌어진 것은 불교계가 다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 11년(1429)에 흥천사는 태조가 창건한 왕실의 원찰이니 무너진 것을 고쳐야 하겠다는 이조(吏曹)를 거쳐 올라온 선종의 청원서를 받아들이고 천태종의 행호(行乎)를 스승으로 섬기며, 세종 15년에는 한강에서 성대한 수륙재(水陸齋)를 치루었다. 특히 세종은 사헌부와 유신들의 많은 비난을 부릅쓰고 흥천사를 고치는 대공사를 선공감(繕工監) 및 조성도감(造成都監)까지 동원하여 동왕 18년에는 국가의 직영으로 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에 동원되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고 또 그들에게는 정전을 받지 않고 도첩이 주어졌으며 각계에서의 '반승(飯僧)'과 위로행사가 잇따라 있었던 것이니 신앙은 정책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엿보여 주는 일이었다.
10여년에 걸친 대공사로 거의 새로 건조하다시피 된 흥천사에서 해인사(海印寺)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 열게 된 대경찬회(大慶讚會)를 반대하는 각사(各司)의 간소(諫疏)를 물리치고 세종은 스스로 불교를 신앙하는 것을 밝히고 24년(1442)의 대경찬회에서 그 계소문(啓疏文)에 '보살계제자조선국왕(菩薩戒弟子朝鮮國王)'이라고 서명날인 한 것에서[註7] 세종의 호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세종의 귀의는 궁중에도 영향을 미쳐 태종의 빈(嬪)이며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생모 권씨가 삭발하여 불문(佛門)으로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비롯하여 강희안(姜希顔) · 병조판서(兵曹判書) 민신(閔伸) 등 고관들의 불교신자들도 불교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세종은 스스로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호의를 보였으며 말년에 있어서의 그의 신앙생활의 자취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사례를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한국의 경제사 뿐 아니라 서울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진관사(津寬寺) 및 세종 31년(1449) 5월부터 착수한 수륙사(水陸寺)의 수축과 그 경비조달 방법이었다.
고려 이래 이름난 사찰인 진관사에 태조 6년부터 왕씨(王氏)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수륙사의 개수비용은 세종 30년에 신하들의 치열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 문소전(文昭殿) 곁에 내탕금(內帑金)과 정부자재로 내원당(內願堂)을 재건하였기에 세종도 다시 정부재정을 이에 충당하기는 어려워 승려들의 자담형식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공사의 간사승(幹事僧)으로는 각돈(覺頓)이 맡게 되었으나 그 비용은 전농시(典農寺)의 쌀 400석, 면포(綿布) 200필의 지급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전라 · 황해 양도의 공물(貢物)에서 부가세였던 전세지(田稅紙)와 초둔(草芚)의 청부상납(請負上納)의 권리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부에 바칠 공납을 먼저 대신하여 바치고 혹독한 경우는 그 몇배를 거두는 이권이며 폐단도 적지 않았다. 각돈(覺頓)의 이 대납(代納)에 협조하지 않았던 전라도에서 나주 등 30여의 지방관이 일제히 견책 파직되었던 진관사의 공납청부는 다음 왕인 세조에 이르러 관권과 결탁하여 더 횡포를 부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었다.[註8]
세종이 32년 정월에 돌아가자 고려시대 같이 그 장의도 불교식이었으며 그 후궁으로 삭발하여 여승이 된 것이 무릇 10여인이었다. 이는 궁중 불교의 성황을 엿보는데 충분한 일이었다.
세종을 이은 문종은 2년도 못되어 돌아가고 단종도 왕위는 3년밖에 누리지 못하였기에 불교정책에 대하여는 별로 뚜렷하지 않으나 세종 말년의 영향과 당시 궁중의 불교신앙으로 보아도 억압책을 쓰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유교적 윤리관과 단종을 동정하는 국민의 감정으로 일부에서는 평이 좋지 않으나 불교측에서 보면 조선불교대호왕(朝鮮佛敎大護王)으로 존경을 받는 호불의 군주였다.
세조가 그 9년(1463)에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의 중수사실을 듣고 왕비와 더불어 미(米) · 포(布) · 전(錢)을 기진(寄進)하였던 바 친히 쓴 수기에는 혜각존자(慧覺尊者)를 존경하여 그 이름마다 행을 바꾸어 쓰고 끝에 '불제자(佛弟子) 승천체도열문영무조선국왕이유(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李王柔)'라고 적은 일과[註9]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성임(成任)에게 석가의 진리가 공자(孔子)의 가르침 보다 훨씬 좋다고 공언하였던 일 등으로 보아 그의 호불정신이 변함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재위 14년간은 불교옹호와 이에 따르는 여러 사업으로 일관되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크게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승려가 되는 자격시험의 법을 정하고 이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밝혀 자손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2) 여러 가지 불교도서를 발행하여 널리 불교를 알리게 한 것이다.
3) 사찰과 탑 등의 중수 또는 건립에 정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건국초부터 예조나 사헌부에서 불교공격에 설득력 있는 구실로 되풀이 주장하였던 것은 부녀의 사원출입이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것이었는데 세조 3년에도 예조에서 같은 의견이 나왔었다.
불교의 신앙에서 그 신앙이 두터운 부녀의 사원 출입금지가 실행되면 자연 사찰은 쇠퇴되고 불교도 또 대부분의 지지자를 잃게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이 예조의 의견에 대하여 세조는 도리어 교지(敎旨)를 내려 관료들이 사찰에 제멋대로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고 또 범죄의 혐의가 있는 승려를 신문하려면 먼저 왕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을 명하고 이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밝혀 법제화 하며 사찰과 승려신분을 보장하였을 뿐 아니라 부녀의 사찰 출입의 문제와 관련시켜 당시의 관헌들이 도첩(度牒)을 엄격히 조사하여 그것이 없는 자를 무조건 처분한다든가 정전(丁錢)을 내고 승려가 되려는 자를 일부러 지연시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그해 10월 이전에 삭발하여 승려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모두 도첩제도(度牒制度)에서 면제되고, 사찰은 정당하게 부가되는 공세(貢稅) 외에 다른 여러 가지 납물(納物)과 복역에서 면제되도록 하였던 것이며, 세조 7년에 이르러는 공사천(公私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넓혔다. 태조 때에는 승려가 되려면 정포(正布) 200필을 바쳐야 했던 것을 30필로 낮추고 금강경(金剛經) · 심경(心經) · 능엄주(楞嚴呪)를 읽을 수 있고 사천(私賤)의 경우는 그 원주인의 청원이 있고 공천(公賤)은 그 소속관청의 노비문서에서 이름을 말소할 수 있는 수속만으로 승려가 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세종 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별세하자 그 추복(追福)을 위하여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에게 승우(僧祐) · 도선(道宣)의 이율사(二律師)의 석가보(釋迦譜) · 석가씨보(釋迦氏譜) 및 다른 불경 등을 합쳐 윤색하여 한글로 엮게 한 것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며 세조 즉위 후 다시 이를 수정하여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합쳐 동왕 4년에 간행한 것이 월인석보(月印釋譜)이며 이는 한글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어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조는 그 8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동왕 10년까지 법화경(法華經) · 원각경(圓覺經) · 영가집(永嘉集) · 금강경 · 심경 등을 세종 28년에 만들어진 한글로 번역케 하여 한글을 처음 만들 때의 목적인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루 끝없는 불교의 자비심을 누리게 하였을 뿐 아니라 관념면에서는 한자 중심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벗어나 우리 국문학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념탑을 세웠다.
이와 같이 세조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만큼 각 사찰에 대한 중수 및 전토기진(田土寄進)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경기도 백운산(白雲山) 내원사(內院寺)에 노비 및 전토기진을 비롯하여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강원도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의 중수, 해인사(海印寺)의 판각(板閣)의 중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및 청학사(靑鶴寺)의 전토기진, 금강산(金剛山) 건봉사(乾鳳寺) · 표훈사(表訓寺) · 유점사(楡岾寺)와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 · 영암(靈巖) 도갑사(道岬寺)의 증축 및 중수, 세자의 경릉(敬陵, 고양시)에 정인사(正因寺)의 창건을 그 중 몇가지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세조의 사찰 후원의 여러 업적에서 서울시와 관계있는 것은 흥천사에 대종을 만들어 기진한 것과 대원각사(大圓覺寺)의 중흥(中興)이었다. 세조 7년(1462)에 만들어진 이 흥천사의 대종은 지금도 덕수궁에 보존되어 세조의 호불을 전하여 주고 있다. 흥천사의 종보다 더 큰 공사는 원래 태조가 세운 흥덕사가 그 후 없어져 세조 9년까지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쓰여지고 있던 지금의 파고다공원 자리에 대원각사를 다시 세운 일이었다. 당시 세조의 둘째 아저씨이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의 동쪽 언덕에 석종을 세우고 법회를 열어 원각경을 강(講)하였더니 여러 가지의 뜻하지 않았던 서상(瑞象)이 나타났기에 원각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이 서상과 그 경의 번역이 끝난 것을 아울러 축하하기 위하여 흥복사 자리에 대원각사를 세우게 되었다 한다.
이 절의 건립은 '중수'로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의 국법이 새로 사찰을 세우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까닭이며 사실은 새로 세운 것과 다름 없는 것이었다. 대원각사의 경내를 넓히기 위하여 민가를 헐어버리는데 지급된 정부의 보상금으로 정포(正布) 4,004필이 들었다고 한다.
세조 9년(1463) 6월에 착공하여 그 해 10월 공사가 끝난 대원각사에 다시 10층의 한수석대탑(寒水石大塔)이 세워져 500여 년의 비바람에 견디어 대원각사는 없어졌어도 그 탑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시의 명물로서 우리가 우러러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성종의 억불책과 연산군의 폐불정책(廢佛政策)》
세조의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책으로 조선왕조의 불교는 한 때 마치 고려시대의 옛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조차 감돌았으나 왕이 세상을 떠나자 곧 그 반동으로서 도첩제(度牒制)의 전폐 등 불교의 억압책이 강행되었다.
이와 같은 반동책은 예종 원년(1469)에 영의정 한명회(韓明澮)가 서울 및 제도(諸道)에서 기존의 사찰 외에 새로 절을 짓는 일을 못하도록 할 것과 도첩(度牒)이 없는 사람의 삭발금지에 관한 것 등 4개 사항에 걸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을 고쳐야 할 것을 내세웠으나 재위 1년으로 예종이 세상을 버리게 되어 다음 왕인 성종이 손을 써야 하는 문제로 넘겨졌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교를 숭상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성종에 이르러 승려의 난폭한 행위와 그 특권을 빙자한 횡포에 관료가 무릎을 꿇고 태학생(太學生)이 불교에 아부하여 출세를 꾀하던 세조시대까지의 풍조는 '성종부터 도승(度僧)의 금을 엄격히 지켜 도첩을 주지 않아 이로부터 문안의 승려는 줄어지고 내외의 사찰은 모두 비워져 사족(士族)이 재(齋)를 모시고 반승(飯僧)하는 일이 없어졌다'[註10]는 성현의 『용재총화(窘齋叢話)』나 또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의 허봉(許鷄)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이는 기사는[註11] 억불책에 있어서의 성종의 과단성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실상 성종의 즉위초에 있어서는 대사헌 한치형(韓致亨)을 비롯하여 당시의 명신(名臣) 양성지(梁誠之) 등의 극렬한 억불책의 건의가 있어도 오히려 미온적인 정책으로 임하였던 느낌이 보이고 있는 것은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제쳐놓고 13세인 성종을 옹립하여 그 뒤를 돌보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열렬한 불교신자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도 또한 열렬한 불교신자이어서 성종으로서는 감히 이들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성종 6년(1475)에 정희왕대비가 맡아보던 정치의 실권을 성종에게 넘겨주게 되자 대사헌 윤계겸(尹繼謙) 등이 도승과 새로이 사찰을 짓는 것은 금지하여야 할 것을 상소하고 또 주심원(朱深源) · 김맹성(金孟性) 등이 궁중에 있어서의 불교행사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어도 성종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정희왕대비가 생존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비의 뜻을 받들어 성종 11년(1480)에 열렸던 대원각사(大圓覺寺)의 대법회에 격분한 태학생(太學生)이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고 이러한 상서만도 5회나 있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따라서 성종 10년 11월에 올린 구치곤(丘致山昆)의 상계(上啓)에서는 승려가 늘어나 병정(兵丁)의 심한 부족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을 알리고 '정해년(丁亥年,세조 12년)의 호패법(號牌法) 실시 때 승려 30여만이었으나 이 추세로 보아 지금은 아마도 40여만일 것이다'라 하고[註12] 성종 12년 5월에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 이적(李績)의 상서내용도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승려수가 엄청나게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註13]
이와 같은 승려수의 엄청난 증가로 보아 성종의 불교억압책은 아직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유신(儒臣)들의 상서가 잦았던 당시에 있어서도 성종 14년(1483)에는 오히려 왕실과 관계 깊은 내불당(內佛堂)과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한성(漢城) 성외(城外)의 장의(藏義) · 진관사(津寬寺) 및 봉선(奉先)과 복세암(福世菴), 용문(龍門)의 만덕사(萬德寺)에 대한 보호를 예조에 명한 것으로 보아도 성종의 억불정책은 미온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그의 23년(1492)에 이르러 도첩을 주어 승려가 되는 제도를 폐하여 이를 『대전속록(大典續錄)』에 못박고 위법으로 승려가 된 자들의 환속(還俗)에 힘쓰게 되어 승려의 수는 급격히 줄게 되었다. 이것이 성종으로 하여금 유교적(儒敎的) 군주(君主)로 극찬을 받게 하였던 것이나 이와 같은 영단에는 종교적인 이유 뿐 아니라 당시 말썽이 되고 있었던 병원(兵員) 보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도승이 폐지되어도 승시(僧試)는 그대로 존속케 하였던 것이며 승시가 존속되는 한 승려의 지위는 그리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학의 소양이 관료층이 되는 필수교양으로 되어 있던 당시에 있어서 아직 사찰을 찾는 사족(士族)도 적지 않았고 민중들의 불교신앙도 두터워 성종말까지는 결코 불교의 쇠퇴기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는 형세였다.
조선왕조의 불교가 고된 서리를 맞게 된 것은 연산군의 폐불정책(廢佛政策)에 의해서였다. 연산군은 원년(1495) 11월에 김일손(金馹孫)이 승려의 범죄행위는 왕의 윤허를 얻어 다스리게 되어 있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자 예조에게 승려의 범죄 조사 및 사찰의 수색은 금후 평민과 같이 하라는 명령을 내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뚜렷이 적혀있는 영지(靈地)로서의 사찰과 부처를 섬기는 성도(聖徒)로서의 승려의 위치를 낮추고 성종 때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여승의 도첩발급 폐지도 함께 예조에 명하였다. 여승은 궁중에 출입하는 일이 많아 궁중과 사찰의 중계역할을 하고 궁정을 움직이는데 그 힘이 컸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2년 4월에는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는 유교를 일으키고 불교를 없애야 하겠다고 공언까지 하였던 것이나 그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년에는 성종을 위하여 진관사(津寬寺), 봉선사(奉先寺), 정인사(正因寺)에서 성대한 수륙재(水陸齋)를 가졌고 원각사(圓覺寺)에서 많은 불전(佛典)을 찍어 냈으며 성종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하여 새로이 봉은사(奉恩寺)를 세우고 2년 9월에는 장의사(藏義寺)의 요청에 따라 정부에서 역부(役夫)를 보내어 가람(伽藍)을 수리케 하는 등의 그 본심과는 모순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조모 소혜대비(昭惠大妃)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불교에 대한 억압책을 늦추었던 것이었다. 연산군 3년 7월에는 정희량(鄭希良)이 승려 자격시험의 폐지에 관한 상소가 있었고 이어 동년 8월에는 손중돈(孫仲暾)이, 그리고 6년 11월에는 이암림(李岩霖), 9년 정월에는 신자건(愼自建)이 같은 문제를 거듭 되풀이 하였으나 연산군이 이를 단행하지 못하였던 것도 또 소혜대비가 생존하고 있었던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10년(1504) 4월에 소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0월에는 성균관 담을 헐어 궁성에 합치고 공자위패(孔子位牌) 등을 원각사에서 고산암(高山菴)으로, 다시 태평관(太平館)에 옮겼다가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기는 등 거리낌 없이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가 하면 교종(敎宗)의 본사(本寺)인 흥덕사(興德寺)를 헐어 그 불상을 원각사에 옮기고, 이에 양종(兩宗)에 명하여 삼각산 장의사의 불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나머지 삼각산의 여러 사찰의 승려는 모두 몰아냈다. 삼각산도 왕의 놀이터로 하려는 까닭이었다.
이어 원각사의 불상을 다른 곳으로 옮겨 승려를 몰아내고 이곳을 기생을 다스리는 기관으로 하고 다시 선종(禪宗)의 본토인 흥천사(興天寺)의 불상을 회암사(檜岩寺)로 옮기게 되어 태조가 세운 서울 장안의 양종 본사인 흥천 · 흥덕의 두 사찰은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선종과 교종의 종무원(宗務院)은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로 옮겨 겨우 명맥만을 끌어 오게 되었는데 연산군 10년은 바로 승려자격시험인 승시(僧試)가 시행될 해였다. 그러나 양종의 종무원이 이미 서울에서 몰려나 있었기에 승과(僧科)를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려의 광종 이후 500여년동안 이어오던 승과 제도는 폐지되어 오랫동안 유신(儒臣)들이 바라던 희망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연산군의 이와 같은 억불책이 어떤 소신에 따라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문묘(文廟)나 학교, 능묘, 민가 할 것 없이 그의 유흥황음의 장소를 넓히기 위한 무차별적인 몰수와 철거의 일환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며 문무백관(文武百官), 유생(儒生)이 그의 가마를 메는 일꾼으로 끌려갔던 당시에 있어서 승려의 대부분이 굳게 지켜오던 계율의 파기를 강요 당하고 또는 왕의 관노(官奴) 같은 일을 하였던 것은 특별히 승려들만이 겪어야 하는 천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연산군의 향락만을 위한 여러 행동과 승과의 폐지 위에 사찰의 토전(土田) 폐지로 조선왕조의 불교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절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반동책은 예종 원년(1469)에 영의정 한명회(韓明澮)가 서울 및 제도(諸道)에서 기존의 사찰 외에 새로 절을 짓는 일을 못하도록 할 것과 도첩(度牒)이 없는 사람의 삭발금지에 관한 것 등 4개 사항에 걸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을 고쳐야 할 것을 내세웠으나 재위 1년으로 예종이 세상을 버리게 되어 다음 왕인 성종이 손을 써야 하는 문제로 넘겨졌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교를 숭상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성종에 이르러 승려의 난폭한 행위와 그 특권을 빙자한 횡포에 관료가 무릎을 꿇고 태학생(太學生)이 불교에 아부하여 출세를 꾀하던 세조시대까지의 풍조는 '성종부터 도승(度僧)의 금을 엄격히 지켜 도첩을 주지 않아 이로부터 문안의 승려는 줄어지고 내외의 사찰은 모두 비워져 사족(士族)이 재(齋)를 모시고 반승(飯僧)하는 일이 없어졌다'[註10]는 성현의 『용재총화(窘齋叢話)』나 또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의 허봉(許鷄)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이는 기사는[註11] 억불책에 있어서의 성종의 과단성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실상 성종의 즉위초에 있어서는 대사헌 한치형(韓致亨)을 비롯하여 당시의 명신(名臣) 양성지(梁誠之) 등의 극렬한 억불책의 건의가 있어도 오히려 미온적인 정책으로 임하였던 느낌이 보이고 있는 것은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제쳐놓고 13세인 성종을 옹립하여 그 뒤를 돌보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열렬한 불교신자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도 또한 열렬한 불교신자이어서 성종으로서는 감히 이들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성종 6년(1475)에 정희왕대비가 맡아보던 정치의 실권을 성종에게 넘겨주게 되자 대사헌 윤계겸(尹繼謙) 등이 도승과 새로이 사찰을 짓는 것은 금지하여야 할 것을 상소하고 또 주심원(朱深源) · 김맹성(金孟性) 등이 궁중에 있어서의 불교행사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어도 성종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정희왕대비가 생존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비의 뜻을 받들어 성종 11년(1480)에 열렸던 대원각사(大圓覺寺)의 대법회에 격분한 태학생(太學生)이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고 이러한 상서만도 5회나 있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따라서 성종 10년 11월에 올린 구치곤(丘致山昆)의 상계(上啓)에서는 승려가 늘어나 병정(兵丁)의 심한 부족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을 알리고 '정해년(丁亥年,세조 12년)의 호패법(號牌法) 실시 때 승려 30여만이었으나 이 추세로 보아 지금은 아마도 40여만일 것이다'라 하고[註12] 성종 12년 5월에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 이적(李績)의 상서내용도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승려수가 엄청나게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註13]
이와 같은 승려수의 엄청난 증가로 보아 성종의 불교억압책은 아직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유신(儒臣)들의 상서가 잦았던 당시에 있어서도 성종 14년(1483)에는 오히려 왕실과 관계 깊은 내불당(內佛堂)과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한성(漢城) 성외(城外)의 장의(藏義) · 진관사(津寬寺) 및 봉선(奉先)과 복세암(福世菴), 용문(龍門)의 만덕사(萬德寺)에 대한 보호를 예조에 명한 것으로 보아도 성종의 억불정책은 미온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그의 23년(1492)에 이르러 도첩을 주어 승려가 되는 제도를 폐하여 이를 『대전속록(大典續錄)』에 못박고 위법으로 승려가 된 자들의 환속(還俗)에 힘쓰게 되어 승려의 수는 급격히 줄게 되었다. 이것이 성종으로 하여금 유교적(儒敎的) 군주(君主)로 극찬을 받게 하였던 것이나 이와 같은 영단에는 종교적인 이유 뿐 아니라 당시 말썽이 되고 있었던 병원(兵員) 보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도승이 폐지되어도 승시(僧試)는 그대로 존속케 하였던 것이며 승시가 존속되는 한 승려의 지위는 그리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학의 소양이 관료층이 되는 필수교양으로 되어 있던 당시에 있어서 아직 사찰을 찾는 사족(士族)도 적지 않았고 민중들의 불교신앙도 두터워 성종말까지는 결코 불교의 쇠퇴기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는 형세였다.
조선왕조의 불교가 고된 서리를 맞게 된 것은 연산군의 폐불정책(廢佛政策)에 의해서였다. 연산군은 원년(1495) 11월에 김일손(金馹孫)이 승려의 범죄행위는 왕의 윤허를 얻어 다스리게 되어 있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자 예조에게 승려의 범죄 조사 및 사찰의 수색은 금후 평민과 같이 하라는 명령을 내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뚜렷이 적혀있는 영지(靈地)로서의 사찰과 부처를 섬기는 성도(聖徒)로서의 승려의 위치를 낮추고 성종 때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여승의 도첩발급 폐지도 함께 예조에 명하였다. 여승은 궁중에 출입하는 일이 많아 궁중과 사찰의 중계역할을 하고 궁정을 움직이는데 그 힘이 컸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2년 4월에는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는 유교를 일으키고 불교를 없애야 하겠다고 공언까지 하였던 것이나 그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년에는 성종을 위하여 진관사(津寬寺), 봉선사(奉先寺), 정인사(正因寺)에서 성대한 수륙재(水陸齋)를 가졌고 원각사(圓覺寺)에서 많은 불전(佛典)을 찍어 냈으며 성종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하여 새로이 봉은사(奉恩寺)를 세우고 2년 9월에는 장의사(藏義寺)의 요청에 따라 정부에서 역부(役夫)를 보내어 가람(伽藍)을 수리케 하는 등의 그 본심과는 모순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조모 소혜대비(昭惠大妃)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불교에 대한 억압책을 늦추었던 것이었다. 연산군 3년 7월에는 정희량(鄭希良)이 승려 자격시험의 폐지에 관한 상소가 있었고 이어 동년 8월에는 손중돈(孫仲暾)이, 그리고 6년 11월에는 이암림(李岩霖), 9년 정월에는 신자건(愼自建)이 같은 문제를 거듭 되풀이 하였으나 연산군이 이를 단행하지 못하였던 것도 또 소혜대비가 생존하고 있었던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10년(1504) 4월에 소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0월에는 성균관 담을 헐어 궁성에 합치고 공자위패(孔子位牌) 등을 원각사에서 고산암(高山菴)으로, 다시 태평관(太平館)에 옮겼다가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기는 등 거리낌 없이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가 하면 교종(敎宗)의 본사(本寺)인 흥덕사(興德寺)를 헐어 그 불상을 원각사에 옮기고, 이에 양종(兩宗)에 명하여 삼각산 장의사의 불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나머지 삼각산의 여러 사찰의 승려는 모두 몰아냈다. 삼각산도 왕의 놀이터로 하려는 까닭이었다.
이어 원각사의 불상을 다른 곳으로 옮겨 승려를 몰아내고 이곳을 기생을 다스리는 기관으로 하고 다시 선종(禪宗)의 본토인 흥천사(興天寺)의 불상을 회암사(檜岩寺)로 옮기게 되어 태조가 세운 서울 장안의 양종 본사인 흥천 · 흥덕의 두 사찰은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선종과 교종의 종무원(宗務院)은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로 옮겨 겨우 명맥만을 끌어 오게 되었는데 연산군 10년은 바로 승려자격시험인 승시(僧試)가 시행될 해였다. 그러나 양종의 종무원이 이미 서울에서 몰려나 있었기에 승과(僧科)를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려의 광종 이후 500여년동안 이어오던 승과 제도는 폐지되어 오랫동안 유신(儒臣)들이 바라던 희망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연산군의 이와 같은 억불책이 어떤 소신에 따라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문묘(文廟)나 학교, 능묘, 민가 할 것 없이 그의 유흥황음의 장소를 넓히기 위한 무차별적인 몰수와 철거의 일환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며 문무백관(文武百官), 유생(儒生)이 그의 가마를 메는 일꾼으로 끌려갔던 당시에 있어서 승려의 대부분이 굳게 지켜오던 계율의 파기를 강요 당하고 또는 왕의 관노(官奴) 같은 일을 하였던 것은 특별히 승려들만이 겪어야 하는 천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연산군의 향락만을 위한 여러 행동과 승과의 폐지 위에 사찰의 토전(土田) 폐지로 조선왕조의 불교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절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중종에서 선조초까지의 불교》
연산군이 그 12년 9월에 몰려나고 배다른 동생인 중종이 그 뒤를 이었다. 중종 2년은 승시(僧試)를 시행할 해였으나 연산군 10년의 경우같이 양종본사(兩宗本寺)의 철거로 하는 수 없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 승과(僧科)를 의식적으로 폐하였던 것에서도 불교억압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던 군주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중종의 초년은 생모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가 또 역대의 왕후에 못지않은 불교 독신자였기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산군의 기재(忌齋)를 지내고 또 연산군이 빼았었던 수륙재(水陸齋) 및 능침사(陵寢寺)의 토지 절반을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중종이 결코 불교를 두둔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궁중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연산군의 철저하였던 폐불책을 극히 부분적으로 고쳤을 뿐이었다.
중종이 철저한 억불책의 소신을 가졌던 것은 왕 7년에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서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圓覺寺)를 헐어서 그 목재를 연산시대에 해를 입은 민가를 짓는데 나누어 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종이 20년경부터 불교에 대하여 다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성종이 도첩(度牒)의 법을 폐지하여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불교에 몸담는 길을 막았고 다시 연산군의 승과 폐지로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몹시 떨어짐에 따라 그 질이 극히 나빠져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해독을 미치고 있었을 뿐아니라 옛과 같이 국가의 토목공사에 승려를 동원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었다.
이에 중종 20년 7월에 이르러 김근은(金謹恩), 김안로(金安老) 등이 승려가 심한 경우는 도적집단까지 조직하는 것은 그 원인이 승정(僧政)의 실패에 있었던 것을 들고 국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이들을 동원하기 위하여서라도 승려에게 호패(號牌)를 주어 이를 가진 자는 신분과 신앙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유리하며 새로 지은 사찰은 허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중종은 새로 지은 사찰의 철거는 관대히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실행키로 하며 31년(1536)에는 한강의 상류인 대항(大項)에 벌린 대규모의 제방공사와 32년에는 충청남도 의항(蟻項)의 굴착대공사에 승려가 동원되어 호패를 받는 자가 많이 나왔다. 중종이 새로 지은 사찰의 철거를 관대히 하라고 하였던 것은 당시 능묘(陵墓)에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재궁(齋宮)이 그 이름과는 달리 내용은 사찰이었던 때문이었다.
이러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것이 당시의 유신(儒臣)들에게는 못마땅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김안로가 인격적으로 비난을 받다가 마침 중종 32년에 죽게 되자 호패법을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33년 9월에는 승려들이 떼를 지어 거리낌 없이 가는 곳마다 폭행을 하고 다닌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도자를 처형하고 먼저 봉선사(奉先寺)와 봉은사(奉恩寺)를 헐어 없애고 재궁까지도 없애자는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 박문수(朴文秀)들의 상소사태가 일어났으나 중종은 이미 많은 호패가 나간 것을 갑자기 거두어 들이는 것이 실제로는 어려웠을 뿐 아니라 헛되이 민심만 어지럽게 하는 것이 두려워 이 의견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로 중종 34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모든 사찰은 철거되고 승려는 병역(兵役) · 조세(租稅)의 부담을 면제받는 대가로 국가의 토목공사와 이미 완공된 공사가 훼손될 때마다 소집되어 일을 하여야 하며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호패를 회수한다는 것이 중종에 의하여 윤허된 것은 유교측의 성공이었다. 따라서 철거될 사찰의 표준이 구체화 되고 또 호패는 승려의 신분보증이 되는 반면에 공임을 지불하지 않은 국가의 상역(常役) 인부증이 되어 국가는 일반국민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도 큰 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호패의 문제는 마무리가 지어졌던 것이나 다시 34년 5월말에는 우연히 궁중과 사찰과의 내밀적인 교섭이 상상 이상으로 짙었던 것이 노출된 사건이 일어나 유신과 성균관생들의 격분을 사게 되었다.
유신과 성균관생들은 궁중과 사찰의 비밀교통을 뿌리채 뽑기 위하여는 승폐(僧弊)의 근원지인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의 철거와 승려와 궁중교통의 원흉인 보담(寶曇) · 행은(行恩)의 처형을 되풀이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종은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은 성종과 세조의 능을 지키는 중요한 사찰이며 또 중종 25년까지 생존하였던 모후 정현대비가 불교 독신자였다는 깊은 인연 때문에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회수가 거듭될수록 극렬한 구절로 엮어지는 성균관유생들의 상소가 6회나 있었음에도 중종은 점진적인 불교개혁을 되풀이 주장하여 좀처럼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되자 성균관유생들은 최후수단인 동맹휴학으로 왕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관생(館生)들의 공관퇴거(空館退去)는 군주가 성교(聖敎)를 돌보지 않은 것을 그 당대 뿐 아니라 후세에까지도 남기게 되어 유교국의 왕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이며 또 고통이었기에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는 이외의 사찰은 모두 철거할 것을 다짐하고 다만 농번기이기에 단번에 집행하지 않고 때를 보아서 점차로 실행할 것을 밝혔다.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기에 철거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이 그대로 남게 된 이상 성균관유생들로서는 이와 같은 중종의 결정에 따를 수 없었던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중종은 이들을 무조건 귀관(歸館)시키는 묘안으로서 임시로 과거를 실시하여 그 주모자 몇사람을 급제시키는 길밖에 없는 것을 깨닫고 이 뜻을 비치자 그다지도 강경하였던 관생들도 모두 슬금슬금 되돌아와 과거준비를 서둘러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수습되었다.
그러나 도적의 떼로 타락한 승려집단의 소굴로 사헌부(司憲府)에서 민폐가 극심한 것으로 지탄받던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의 내장사(內藏寺)와 영은사(靈隱寺) 같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이는 유서 깊은 거찰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이지 않으나 거찰이었던 전라 임파현(臨陂縣)의 수심사(修心寺)는 철거되었다. 수심사가 철거된 것은 그 사찰 승려들이 유력한 양반집안과 사소한 일로 다투어 문제가 되었던 바 있었던 까닭이다.
이렇듯이 중종의 40년 가까운 치세는 조광조(趙光祖) 같은 이름난 유학자가 당파싸움에 휘말려 희생되는 등 인격과 학식 있는 청류(淸流)와 그렇지 못하던 탁류(濁流)간의 끊임없는 반목으로 얼룩져 일국의 정책도 앞뒤의 통일성이 없었던 것이나 불교정책도 그 싸움의 구실꺼리로 이용되어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통일성이 없었다. 그러나 크게 보아서 중종의 승정은 불교에 대한 억압과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점차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세자로 있을 때 중종으로부터 불교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받았던 인종이 왕위에 올라 겨우 8개월로 세상을 떠나자 불교 독신자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소생의 명종이 겨우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는 이미 중종의 재위시부터 내수사(內需司)를 통하여 여러 사찰에 기도를 드리는 밀사를 보내는 일이 잦았던 것이나 이제 어린 명종의 즉위로 국가의 모든 정교(政敎)가 왕후를 거쳐 처리하게 되자 연산군에서부터 중종에 걸친 불교탄압정책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종이 즉위하자 곧 불교진흥책이 강구되어 건국초에 있어서의 서울 장안의 여승방이었던 정업원(淨業院) 옛터에 인수사(仁壽寺)를 짓고 또 태종의 어용(御容)을 모신 장단(長湍) 화장사(華藏寺)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내원당(內願堂)은 능궁(陵宮)에 준하여 붉은 문을 세우는 것을 허용하여 유림(儒林)의 신경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처는 극히 말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불교진흥책은 당시의 고승으로서 승려와 신자간에 '생불(生佛)'이라고까지 존경을 받던 봉은사의 주지 보우(普雨)를 후원하여 그의 지혜를 빌려 강력히 추진시킨 몇 가지의 중요한 교세부흥책이었다.
불교 독신자이며 나라의 정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문정왕후가 정치권력을 빌려 명종 5년부터 강력히 추진한 보우의 불교부흥책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1) 연산군 이전으로 되돌아가 선(禪) · 교(敎)의 양종을 봉은(선) · 봉선사(교)에 두고 (2) 중종 2년에 의식적으로 폐지하였던 정기적인 승시를 부활하고 (3) 다시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주어 그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진흥책이 국가의 방침으로 추진되는 것이 밝혀지자 유신과 태학생들의 반대는 거의 순교자적인 모습으로까지 보여 비장한 것이었으나 문정왕후의 결의도 또한 꺾을 수 없을만치 단호한 것이었다.
10여차에 걸친 상소로서 문정왕후의 번의를 촉구하였으나 무효로 돌아간 것을 알게 된 성균관 유생들은 명종 5년말에는 다시 그들의 최후수단인 공관퇴거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생(館生)들의 시위도 다음해인 6년 3월에 이르러 중종의 옛 수법에 따라 명종으로 하여금 문묘(文廟)에 행차케 하여 임시과시(臨時科試)로 문(文) · 무(武) 양과(兩科) 20명을 뽑자 관생들은 모두 되돌아와 이 최후수단도 무위로 돌아갔다.
문정왕후는 보우에 대한 빗발같은 탄핵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예조와 이조에 명하여 승직임명의 직첩(職帖)을 주게 하고 옛날과 같이 보우를 판선종사도대선사봉은사주지(判禪宗事都大禪師奉恩寺住持)로 하고 수진(守眞)을 판교종사도대사봉선사주지(判敎宗事都大師奉先寺住持)로 하여 종교면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도 그 불가침성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조처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가 높았었으나 그에 전연 아랑곳 없이 불교의 교세만회를 위하여는 승려의 수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믿었던 보우의 소신에 따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정하여진 승시과목의 이수 같은 것조차 무시하고 도첩을 남발하여 이조 · 예조 등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보우측으로 보면 50여년이나 폐지되어 있던 도첩법(度牒法)이 부활을 보았던만치 어떤 방법이라도 승복삭발이 허용되는 사람을 단시일내에 많이 획득하는 것이 유리하였던 까닭에 일시에 800명 이상을 합격시키는 사태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예조에서는 명종 7년 4월의 정기적으로 시행된 승시에서 이에 입회한 관리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법령준수를 굳게 지키게 한 결과 겨우 선종 21인, 교종 11인만이 급제하자 그 수가 너무도 적은데 불만을 품었던 문정왕후는 금후의 승시에는 예조 관리의 입회를 없애고 오로지 양원(兩院)에게 맡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승과 급제자에 대한 자격기준을 문 · 무 양과 또는 잡과(雜科)와 나란히 하기 위하여 1등, 2등으로 나누려는 경국대전에서도 보이지 않은 보우의 주장은 이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되고 문과의 예를 본따 급제는 못하여도 그 학력이 승시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이 인정되는 하급 승려에게 참학(參學)의 칭호를 주게 되어 유신들의 격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금지되었던 승려의 서울 문안 출입도 명종초부터 공용을 빙자하여 거의 해제된 것과 다름없게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호적이 분명치 못한 자에게도 도첩이 발급되고 다시 법률상 상납하기로 되어 있던 정전(丁錢) 30필도 한 번 도첩만 손에 넣으면 이조의 독촉을 무시하여도 좋았던 만큼 전국의 승시 지망자는 급격히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문정왕후도 보우와 상의하여 전국 승시의 합격자 수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평안, 함경 같이 국방상 장정이 많이 필요로 하는 도는 각각 100명씩, 전라도 · 경상도는 각각 500명씩, 황해 · 충청의 양도는 각각 400명씩, 경기 · 강원도는 각각 300명씩 합계 2,600명을 매기의 승시에서 뽑게 되었다. 이러한 정수대로 승시를 치루어 나간다면 몇차례의 승시만으로도 많은 인력이 사찰에 흡수되는 것은 명확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정치권력을 지닌 문정왕후가 궁정내 뿐 아니라 보우의 협력을 얻어 그 진흥책으로 불교의 교세가 다시 되살아나자 왕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각도의 관찰사(觀察使) · 군수(郡守) 등이 다투어 왕후의 불공을 위한 진상(進上)이 잇따랐고 유교교양에 철저하였던 사족도 삭발하여 승려를 지망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고려시대와 같은 불교 전성기가 되돌아 오는 느낌조차 감돌던 명종시대의 이 불교 부흥의 기세가 급전락한 것은 20년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였다.
명종이 친히 정무를 처리하게 되자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재빨리 양종(兩宗)을 폐하고 승과를 없애며 보우를 몰아내라는 의견을 잇따라 내놓았으며 간관(諫官)과 태학생들의 보우의 처단을 청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아 왕명으로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보우는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있을 때 그를 통하여 승진운동을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제주목사(濟州牧使) 변협(邊協)에 의하여 타살되고 말았다. 이어 보우와 표리가 되어 당당한 권세를 가지고 불교 부흥책에 앞장섰던 문정왕후의 동모제(同母弟) 윤원형(尹元衡)도 또 권좌에서 몰려났다가 독약을 마셔야 하는 운명에 빠져 명종 중기 이후의 불교는 다시 험악한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불교를 억압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모후(母后)의 유언이었으나 유신들의 빗발같은 독촉과 다시 벌어진 성균관유생들의 공관퇴거로 명종은 21년 4월에 양종의 제도와 승과제도를 없애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의 불교가 그 중기 이후에 이르러 선종 · 교종이 겸하는 단일종파의 길을 밟게 된 것은 그 씨앗이 명종 21년의 양종폐지에서 뿌려졌다고도 할 수 있으며 또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떨어져 가는 경향을 밟게 된 것도 이 때 단행한 승과의 폐지가 그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종 5년부터 20년까지의 사이에 시행된 5회의 승시로 서산(西山) · 사명(泗溟) · 부휴(浮休)의 삼대 고승(高僧)을 낳게 하여 그 애국적인 행동과 학덕으로 우리나라에서 법등을 이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명종시대에 있어서 승정과 보우의 활동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고 본다. 명종 말년의 불교억압책은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의 거유(巨儒)가 활약하던 선조 초년에도 계승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선조는 그 모후 및 사랑하던 귀인(貴人) 김씨(金氏)가 불교 독신자였다는 그 주위의 환경에도 영향받아 불교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없었다. 이것은 동왕 7년 3월에 의영고(義盈庫)에 두었던 황렵(黃臘) 500근을 왕명으로 내궁(內宮)에 옮긴 것이 유신들에게 알려져 용도가 불상을 만드는데 쓰이는 것으로 단정되고 왕이 불교 독신자로 추단되어 잇따른 상소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아 사간(司諫) 이율곡(李栗谷) 등이 사표를 내기에 이르기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던 이른바 황렵사건(黃臘事件)과 동년 5월에 일어난 여승방 정업원의 여승들이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었다고 칭하며 금강산 유점사(楡帖寺)에서 불공을 올리고 떼를 지어 날뛰다가 대사헌에 의하여 회양(淮陽)에 구금된 사건을 통하여도 불교에 대하여는 선조는 비교적 너그러웠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선조 자신의 소신보다 유신과 태학생들의 가혹한 불교억압책에 눌려 승려는 날로 박대를 받는 몸으로 되어 갔던 것이나 선조 25년의 임진왜란은 승려의 존재를 그 종교행사와는 다른 면에서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의 초년은 생모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가 또 역대의 왕후에 못지않은 불교 독신자였기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산군의 기재(忌齋)를 지내고 또 연산군이 빼았었던 수륙재(水陸齋) 및 능침사(陵寢寺)의 토지 절반을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중종이 결코 불교를 두둔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궁중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연산군의 철저하였던 폐불책을 극히 부분적으로 고쳤을 뿐이었다.
중종이 철저한 억불책의 소신을 가졌던 것은 왕 7년에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서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圓覺寺)를 헐어서 그 목재를 연산시대에 해를 입은 민가를 짓는데 나누어 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종이 20년경부터 불교에 대하여 다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성종이 도첩(度牒)의 법을 폐지하여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불교에 몸담는 길을 막았고 다시 연산군의 승과 폐지로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몹시 떨어짐에 따라 그 질이 극히 나빠져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해독을 미치고 있었을 뿐아니라 옛과 같이 국가의 토목공사에 승려를 동원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었다.
이에 중종 20년 7월에 이르러 김근은(金謹恩), 김안로(金安老) 등이 승려가 심한 경우는 도적집단까지 조직하는 것은 그 원인이 승정(僧政)의 실패에 있었던 것을 들고 국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이들을 동원하기 위하여서라도 승려에게 호패(號牌)를 주어 이를 가진 자는 신분과 신앙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유리하며 새로 지은 사찰은 허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중종은 새로 지은 사찰의 철거는 관대히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실행키로 하며 31년(1536)에는 한강의 상류인 대항(大項)에 벌린 대규모의 제방공사와 32년에는 충청남도 의항(蟻項)의 굴착대공사에 승려가 동원되어 호패를 받는 자가 많이 나왔다. 중종이 새로 지은 사찰의 철거를 관대히 하라고 하였던 것은 당시 능묘(陵墓)에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워진 재궁(齋宮)이 그 이름과는 달리 내용은 사찰이었던 때문이었다.
이러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것이 당시의 유신(儒臣)들에게는 못마땅하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김안로가 인격적으로 비난을 받다가 마침 중종 32년에 죽게 되자 호패법을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33년 9월에는 승려들이 떼를 지어 거리낌 없이 가는 곳마다 폭행을 하고 다닌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도자를 처형하고 먼저 봉선사(奉先寺)와 봉은사(奉恩寺)를 헐어 없애고 재궁까지도 없애자는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 박문수(朴文秀)들의 상소사태가 일어났으나 중종은 이미 많은 호패가 나간 것을 갑자기 거두어 들이는 것이 실제로는 어려웠을 뿐 아니라 헛되이 민심만 어지럽게 하는 것이 두려워 이 의견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로 중종 34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모든 사찰은 철거되고 승려는 병역(兵役) · 조세(租稅)의 부담을 면제받는 대가로 국가의 토목공사와 이미 완공된 공사가 훼손될 때마다 소집되어 일을 하여야 하며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호패를 회수한다는 것이 중종에 의하여 윤허된 것은 유교측의 성공이었다. 따라서 철거될 사찰의 표준이 구체화 되고 또 호패는 승려의 신분보증이 되는 반면에 공임을 지불하지 않은 국가의 상역(常役) 인부증이 되어 국가는 일반국민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도 큰 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호패의 문제는 마무리가 지어졌던 것이나 다시 34년 5월말에는 우연히 궁중과 사찰과의 내밀적인 교섭이 상상 이상으로 짙었던 것이 노출된 사건이 일어나 유신과 성균관생들의 격분을 사게 되었다.
유신과 성균관생들은 궁중과 사찰의 비밀교통을 뿌리채 뽑기 위하여는 승폐(僧弊)의 근원지인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의 철거와 승려와 궁중교통의 원흉인 보담(寶曇) · 행은(行恩)의 처형을 되풀이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종은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은 성종과 세조의 능을 지키는 중요한 사찰이며 또 중종 25년까지 생존하였던 모후 정현대비가 불교 독신자였다는 깊은 인연 때문에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회수가 거듭될수록 극렬한 구절로 엮어지는 성균관유생들의 상소가 6회나 있었음에도 중종은 점진적인 불교개혁을 되풀이 주장하여 좀처럼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되자 성균관유생들은 최후수단인 동맹휴학으로 왕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관생(館生)들의 공관퇴거(空館退去)는 군주가 성교(聖敎)를 돌보지 않은 것을 그 당대 뿐 아니라 후세에까지도 남기게 되어 유교국의 왕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이며 또 고통이었기에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는 이외의 사찰은 모두 철거할 것을 다짐하고 다만 농번기이기에 단번에 집행하지 않고 때를 보아서 점차로 실행할 것을 밝혔다.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기에 철거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봉은 · 봉선사 두 사찰이 그대로 남게 된 이상 성균관유생들로서는 이와 같은 중종의 결정에 따를 수 없었던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중종은 이들을 무조건 귀관(歸館)시키는 묘안으로서 임시로 과거를 실시하여 그 주모자 몇사람을 급제시키는 길밖에 없는 것을 깨닫고 이 뜻을 비치자 그다지도 강경하였던 관생들도 모두 슬금슬금 되돌아와 과거준비를 서둘러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수습되었다.
그러나 도적의 떼로 타락한 승려집단의 소굴로 사헌부(司憲府)에서 민폐가 극심한 것으로 지탄받던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의 내장사(內藏寺)와 영은사(靈隱寺) 같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이는 유서 깊은 거찰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이지 않으나 거찰이었던 전라 임파현(臨陂縣)의 수심사(修心寺)는 철거되었다. 수심사가 철거된 것은 그 사찰 승려들이 유력한 양반집안과 사소한 일로 다투어 문제가 되었던 바 있었던 까닭이다.
이렇듯이 중종의 40년 가까운 치세는 조광조(趙光祖) 같은 이름난 유학자가 당파싸움에 휘말려 희생되는 등 인격과 학식 있는 청류(淸流)와 그렇지 못하던 탁류(濁流)간의 끊임없는 반목으로 얼룩져 일국의 정책도 앞뒤의 통일성이 없었던 것이나 불교정책도 그 싸움의 구실꺼리로 이용되어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통일성이 없었다. 그러나 크게 보아서 중종의 승정은 불교에 대한 억압과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점차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세자로 있을 때 중종으로부터 불교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받았던 인종이 왕위에 올라 겨우 8개월로 세상을 떠나자 불교 독신자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소생의 명종이 겨우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는 이미 중종의 재위시부터 내수사(內需司)를 통하여 여러 사찰에 기도를 드리는 밀사를 보내는 일이 잦았던 것이나 이제 어린 명종의 즉위로 국가의 모든 정교(政敎)가 왕후를 거쳐 처리하게 되자 연산군에서부터 중종에 걸친 불교탄압정책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종이 즉위하자 곧 불교진흥책이 강구되어 건국초에 있어서의 서울 장안의 여승방이었던 정업원(淨業院) 옛터에 인수사(仁壽寺)를 짓고 또 태종의 어용(御容)을 모신 장단(長湍) 화장사(華藏寺)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내원당(內願堂)은 능궁(陵宮)에 준하여 붉은 문을 세우는 것을 허용하여 유림(儒林)의 신경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처는 극히 말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불교진흥책은 당시의 고승으로서 승려와 신자간에 '생불(生佛)'이라고까지 존경을 받던 봉은사의 주지 보우(普雨)를 후원하여 그의 지혜를 빌려 강력히 추진시킨 몇 가지의 중요한 교세부흥책이었다.
불교 독신자이며 나라의 정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문정왕후가 정치권력을 빌려 명종 5년부터 강력히 추진한 보우의 불교부흥책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1) 연산군 이전으로 되돌아가 선(禪) · 교(敎)의 양종을 봉은(선) · 봉선사(교)에 두고 (2) 중종 2년에 의식적으로 폐지하였던 정기적인 승시를 부활하고 (3) 다시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주어 그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진흥책이 국가의 방침으로 추진되는 것이 밝혀지자 유신과 태학생들의 반대는 거의 순교자적인 모습으로까지 보여 비장한 것이었으나 문정왕후의 결의도 또한 꺾을 수 없을만치 단호한 것이었다.
10여차에 걸친 상소로서 문정왕후의 번의를 촉구하였으나 무효로 돌아간 것을 알게 된 성균관 유생들은 명종 5년말에는 다시 그들의 최후수단인 공관퇴거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생(館生)들의 시위도 다음해인 6년 3월에 이르러 중종의 옛 수법에 따라 명종으로 하여금 문묘(文廟)에 행차케 하여 임시과시(臨時科試)로 문(文) · 무(武) 양과(兩科) 20명을 뽑자 관생들은 모두 되돌아와 이 최후수단도 무위로 돌아갔다.
문정왕후는 보우에 대한 빗발같은 탄핵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예조와 이조에 명하여 승직임명의 직첩(職帖)을 주게 하고 옛날과 같이 보우를 판선종사도대선사봉은사주지(判禪宗事都大禪師奉恩寺住持)로 하고 수진(守眞)을 판교종사도대사봉선사주지(判敎宗事都大師奉先寺住持)로 하여 종교면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도 그 불가침성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조처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가 높았었으나 그에 전연 아랑곳 없이 불교의 교세만회를 위하여는 승려의 수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믿었던 보우의 소신에 따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정하여진 승시과목의 이수 같은 것조차 무시하고 도첩을 남발하여 이조 · 예조 등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보우측으로 보면 50여년이나 폐지되어 있던 도첩법(度牒法)이 부활을 보았던만치 어떤 방법이라도 승복삭발이 허용되는 사람을 단시일내에 많이 획득하는 것이 유리하였던 까닭에 일시에 800명 이상을 합격시키는 사태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예조에서는 명종 7년 4월의 정기적으로 시행된 승시에서 이에 입회한 관리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법령준수를 굳게 지키게 한 결과 겨우 선종 21인, 교종 11인만이 급제하자 그 수가 너무도 적은데 불만을 품었던 문정왕후는 금후의 승시에는 예조 관리의 입회를 없애고 오로지 양원(兩院)에게 맡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승과 급제자에 대한 자격기준을 문 · 무 양과 또는 잡과(雜科)와 나란히 하기 위하여 1등, 2등으로 나누려는 경국대전에서도 보이지 않은 보우의 주장은 이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되고 문과의 예를 본따 급제는 못하여도 그 학력이 승시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이 인정되는 하급 승려에게 참학(參學)의 칭호를 주게 되어 유신들의 격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금지되었던 승려의 서울 문안 출입도 명종초부터 공용을 빙자하여 거의 해제된 것과 다름없게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호적이 분명치 못한 자에게도 도첩이 발급되고 다시 법률상 상납하기로 되어 있던 정전(丁錢) 30필도 한 번 도첩만 손에 넣으면 이조의 독촉을 무시하여도 좋았던 만큼 전국의 승시 지망자는 급격히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문정왕후도 보우와 상의하여 전국 승시의 합격자 수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평안, 함경 같이 국방상 장정이 많이 필요로 하는 도는 각각 100명씩, 전라도 · 경상도는 각각 500명씩, 황해 · 충청의 양도는 각각 400명씩, 경기 · 강원도는 각각 300명씩 합계 2,600명을 매기의 승시에서 뽑게 되었다. 이러한 정수대로 승시를 치루어 나간다면 몇차례의 승시만으로도 많은 인력이 사찰에 흡수되는 것은 명확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정치권력을 지닌 문정왕후가 궁정내 뿐 아니라 보우의 협력을 얻어 그 진흥책으로 불교의 교세가 다시 되살아나자 왕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각도의 관찰사(觀察使) · 군수(郡守) 등이 다투어 왕후의 불공을 위한 진상(進上)이 잇따랐고 유교교양에 철저하였던 사족도 삭발하여 승려를 지망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고려시대와 같은 불교 전성기가 되돌아 오는 느낌조차 감돌던 명종시대의 이 불교 부흥의 기세가 급전락한 것은 20년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였다.
명종이 친히 정무를 처리하게 되자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재빨리 양종(兩宗)을 폐하고 승과를 없애며 보우를 몰아내라는 의견을 잇따라 내놓았으며 간관(諫官)과 태학생들의 보우의 처단을 청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아 왕명으로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보우는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있을 때 그를 통하여 승진운동을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제주목사(濟州牧使) 변협(邊協)에 의하여 타살되고 말았다. 이어 보우와 표리가 되어 당당한 권세를 가지고 불교 부흥책에 앞장섰던 문정왕후의 동모제(同母弟) 윤원형(尹元衡)도 또 권좌에서 몰려났다가 독약을 마셔야 하는 운명에 빠져 명종 중기 이후의 불교는 다시 험악한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불교를 억압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모후(母后)의 유언이었으나 유신들의 빗발같은 독촉과 다시 벌어진 성균관유생들의 공관퇴거로 명종은 21년 4월에 양종의 제도와 승과제도를 없애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의 불교가 그 중기 이후에 이르러 선종 · 교종이 겸하는 단일종파의 길을 밟게 된 것은 그 씨앗이 명종 21년의 양종폐지에서 뿌려졌다고도 할 수 있으며 또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떨어져 가는 경향을 밟게 된 것도 이 때 단행한 승과의 폐지가 그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종 5년부터 20년까지의 사이에 시행된 5회의 승시로 서산(西山) · 사명(泗溟) · 부휴(浮休)의 삼대 고승(高僧)을 낳게 하여 그 애국적인 행동과 학덕으로 우리나라에서 법등을 이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명종시대에 있어서 승정과 보우의 활동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고 본다. 명종 말년의 불교억압책은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의 거유(巨儒)가 활약하던 선조 초년에도 계승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선조는 그 모후 및 사랑하던 귀인(貴人) 김씨(金氏)가 불교 독신자였다는 그 주위의 환경에도 영향받아 불교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없었다. 이것은 동왕 7년 3월에 의영고(義盈庫)에 두었던 황렵(黃臘) 500근을 왕명으로 내궁(內宮)에 옮긴 것이 유신들에게 알려져 용도가 불상을 만드는데 쓰이는 것으로 단정되고 왕이 불교 독신자로 추단되어 잇따른 상소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아 사간(司諫) 이율곡(李栗谷) 등이 사표를 내기에 이르기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던 이른바 황렵사건(黃臘事件)과 동년 5월에 일어난 여승방 정업원의 여승들이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었다고 칭하며 금강산 유점사(楡帖寺)에서 불공을 올리고 떼를 지어 날뛰다가 대사헌에 의하여 회양(淮陽)에 구금된 사건을 통하여도 불교에 대하여는 선조는 비교적 너그러웠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선조 자신의 소신보다 유신과 태학생들의 가혹한 불교억압책에 눌려 승려는 날로 박대를 받는 몸으로 되어 갔던 것이나 선조 25년의 임진왜란은 승려의 존재를 그 종교행사와는 다른 면에서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불교계(佛敎界) 》
보우(普雨)의 불교진흥책을 뒷받침하여 짓밟힐대로 밟혀왔던 한국불교에 한 때나마 활기를 불어넣게 하였던 문정왕후가 명종 20년 4월에 세상을 떠나자 그 다음해인 21년 4월에는 그 반동 정책으로 다시 선(禪) · 교(敎) 양종, 승과(僧科), 도승(度僧)의 제도가 폐지되어 극심한 수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불교계가 다시 그 뛰어난 국가관이 인정 받아 숨을 돌리게 된 것은 선조 25년초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였다.
즉 선조 25년(1592) 4월에 이르러 일본의 집권자였던 풍신수길이 까닭없는 전쟁을 일으켜 부산포에 상륙하여 삼남지방을 유린하고 7년간이나 한반도를 제멋대로 짓밟았던 이 왜란에서 무(武)를 멸시하던 유교적 정치이념과 그 배타성에서의 이념빈곤이 초래한 국론의 분열은 남김없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장기간의 전란에서 직업적 무사로 잘 훈련되어 있었고 화란상인을 통하여 조총(鳥銃)이라는 신예무기를 갖추었던 왜군은 문약(文弱)과 국론분열에 허덕이던 한반도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5월에는 서울이, 그리고 6월에는 평양까지 그들의 말굽에 짓밟히는 형편이었다.
이 난을 평안도로 피하여 의주 용만(龍灣)에 이르러서 선조는 각도에 영(令)을 내려 거국적인 항전을 하도록 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도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73세였던 늙은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충(忠)과 의(義)를 다짐하며 왜적과 싸울 것을 결심한 서산대사는 전국사찰에 성스러운 이 항전에 기꺼이 참가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전하였던 바 서산대사 스스로가 이끄는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모인 의승(義僧) 1,500명과 간성(杆城) 건봉사(乾鳳寺)에서 일어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이끄는 의승(義僧) 700명, 전라도 뇌묵대사(雷默大師)의 1,000명, 공주 갑사에서 일어난 기허대사(騎虛大師)가 이끄는 의승 700명, 그리고 해안(海眼) · 의엄(義嚴) 등이 이끄는 의승(義僧) 등 전국 의승군 5,000에 달하는 병력이 모여졌다. 사명대사 등은 모두 서산대사의 고제(高弟)들이었다.
『선가귀감(禪家龜鑑)』뿐 아니라 『유교귀감(儒敎龜鑑)』 · 『도가귀감(道家龜鑑)』까지 저술하고 불(佛) · 도(道) · 유(儒)의 삼교(三敎) 그 궁극적인 진리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던 서산대사의 포용력에서 다시 사찰에서의 공동생활을 통하여 맺어진 승려 상호간의 굳은 인간관계와 명령계통의 확립,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목숨을 던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던 의승들의 전적은 이 대왜(對倭)항쟁에서 가장 눈부신 바 있었다.
부하의 승군 700명과 더불어 금산에서 전멸당한 기허대사나 해남에서 전몰한 뇌묵대사같은 분들은 모두 이 왜란에서 불교계가 민족을 위하여 치루었던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러나 이 전란에서의 의승들의 분전은 박대만 받던 당시의 승려신분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되어 고루하기 짝없던 유신(儒臣)조차 승도(僧徒)가 국가를 위하여 유익한 기관인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어 드디어 남 · 북한산성 도총섭(都摠攝)의 제도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총섭(總攝)은 서산대사가 출진(出陣)을 쾌락하자 선조께서는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팔도십육종도총섭당상격(八道十六宗都摠攝堂上格)으로 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예우케 하였던 바 있다. 처음에는 팔도에 선종 · 교종의 판사(判事)를 두려 하였던 것이나 사헌부에서 그 명칭에 이의를 내놓아 총섭으로 하여 각도에 선 · 교 양종에서 각 1인을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며 서산대사는 이 총섭의 총지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승려는 무엇보다도 승과급제(僧科及第)의 길을 터 줄 것을 열망하였던 것이며 조정에서도 사태가 위급하였던 시기였던만큼 그들의 희망을 거절할 수도 없게 되어 선조 26년 9월에는 비변사에서 선과(禪科)의 회복을 정식으로 제의하기에 이르렀다.[註1]
이에 전지(戰地)에서 공를 세운 승려는 그 군공(軍功)의 보수로서 선과급제의 자격을 주고 한편 그 지휘자에는 총섭의 칭호를 주었던 것이다.
서산대사를 정점으로 한 이 의승(義僧)의 활약이 눈부시게 나타나자 서산대사와 의엄 등에 대한 유신(儒臣) 또는 성균관생들의 상투적인 모함도 있었으나[註2] 선조가 이를 듣지 않았던 것은 선조가 깊이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고 심각한 국난을 극복하는데 있어 승단(僧團)이 지닌 여러 가지 장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환도의 서광이 짙어져 선조 29년 9월에 개성에 이르는 것을 이곳에서 맞이한 서산대사는 늙은 몸이 더 이상 군사권을 잡기 어려움을 선조에게 사뢰어 승군(僧軍)의 지휘권을 사명대사에게 넘기고 묘향산으로 되돌아 갈 것을 윤허받아 의정부(議政府) 영의부(領議府)를 배(拜)하고 사자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賜紫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를 받게 되니 유교국가의 군주를 자처하던 선조로서는 최고의 우대를 베풀었던 것이다.
서산대사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자 그 부총섭(副摠攝)이 되어 스승인 서산대사를 보좌하여 전공을 세웠던 사명대사는 승군의 군격을 이어받아 선조의 환도에도 그 군공이 뚜렷하였을 뿐 아니라 영남지방의 의령에서의 전공이 눈부신 바 있어 조정으로부터 당상경(堂上卿)으로 우대받게 된 것은 서산대사에 이어 또 유교국가의 승려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왜란에 있어서의 사명대사의 활약은 그것이 무력항쟁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명군(明軍)의 총병(總兵) 유정(劉綎)의 요청에 따라 울산의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영을 출입하여 그 동정을 살펴 이를 선조에게도 알려 전략을 유리하게 이끌었을 뿐 아니라 유성룡(柳成龍) 등의 의견에 따라 금오(金烏) · 팔공(八公) · 용기(龍起)의 산성을 축조하여 국토방위에 만전을 꾀하였고 다시 전후에 벌인 일본과의 외교교섭의 성과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왜란을 통하여 사명이 비축한 군량이 4,000여석, 무기조달이 10,000여명분이었던 것이나 그의 대왜(對倭)교섭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비롯하여 그곳 불교계 및 여러 장군의 존경을 받아 전쟁에 사로잡혀 갔던 민구(民口) 3,000여명을 되찾아 돌아왔던 것은 민족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 문하의 여러 의승(義僧)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대왜(對倭)항전이 국민에게 잘 알려지고 있으나 이밖에 부휴(浮休)와 그 고제(高弟)인 벽암(碧巖)같이 일반에게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국가와 문화를 지키는 데 앞장 서 승려를 멸시하던 당시의 조정과 유신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은 불교지도자도 적지 않았다.
서산 · 사명의 양대사 뿐 아니라 임진왜란에서 국토방위에 생명을 걸고 앞장섰던 의승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행사가 개인의 영달 또는 명성을 얻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불교에서 원효 이후 연면히 이어내려오는 주체적인 국가관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는 데 있었던 까닭이었다.
의승들의 공통된 희망은 고작 승과(僧科)의 회복으로, 지시인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국민으로서 정당한 요구 뿐이었던 것이며 이 왜란이 수습되자 대부분의 승려는 모두 조용히 산사(山寺)로 되돌아가고 일부의 승려는 남아 서울의 복구공사와 산성(山城)의 구축에 종사하게 되었다.
왜군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거의 잿더미같이 되어 궁궐 · 관아가 남은 것이라고는 없었던 서울의 복구공사는 광해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공사에서 심한 민폐를 끼쳐 이루어진 인경(仁慶) · 경덕(慶德) · 자수(慈壽)의 삼궁(三宮)이 풍수설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궁궐과 사대부의 집을 자주 출입하던 성지(性智)라는 승려의 권고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도 임진란 후의 승려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註3] 이 거창한 공사로 '승려들이 문안에 가득 차 있었다'[註4]는 일사기문(逸史奇聞)의 표현에서도 승려의 서울출입 제한과 같은 것은 이미 무시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광해군의 폐비(廢妃) 유(柳)씨도 또 불교독신자로서 내원당(內願堂) 뿐 아니라 많은 사찰에 불상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註5]
선조 40년 5월의 사헌부의 계(啓)에 이 10년 이래 모든 계층에 불교가 너무도 성행하였다는 그 상황의 설명에 이어 '사대부도 간혹 정성을 다하며 불을 섬긴다'[註6]는 임진왜란후의 불교의 성황은 광해군말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즉 선조 25년(1592) 4월에 이르러 일본의 집권자였던 풍신수길이 까닭없는 전쟁을 일으켜 부산포에 상륙하여 삼남지방을 유린하고 7년간이나 한반도를 제멋대로 짓밟았던 이 왜란에서 무(武)를 멸시하던 유교적 정치이념과 그 배타성에서의 이념빈곤이 초래한 국론의 분열은 남김없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장기간의 전란에서 직업적 무사로 잘 훈련되어 있었고 화란상인을 통하여 조총(鳥銃)이라는 신예무기를 갖추었던 왜군은 문약(文弱)과 국론분열에 허덕이던 한반도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5월에는 서울이, 그리고 6월에는 평양까지 그들의 말굽에 짓밟히는 형편이었다.
이 난을 평안도로 피하여 의주 용만(龍灣)에 이르러서 선조는 각도에 영(令)을 내려 거국적인 항전을 하도록 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도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73세였던 늙은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충(忠)과 의(義)를 다짐하며 왜적과 싸울 것을 결심한 서산대사는 전국사찰에 성스러운 이 항전에 기꺼이 참가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전하였던 바 서산대사 스스로가 이끄는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모인 의승(義僧) 1,500명과 간성(杆城) 건봉사(乾鳳寺)에서 일어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이끄는 의승(義僧) 700명, 전라도 뇌묵대사(雷默大師)의 1,000명, 공주 갑사에서 일어난 기허대사(騎虛大師)가 이끄는 의승 700명, 그리고 해안(海眼) · 의엄(義嚴) 등이 이끄는 의승(義僧) 등 전국 의승군 5,000에 달하는 병력이 모여졌다. 사명대사 등은 모두 서산대사의 고제(高弟)들이었다.
『선가귀감(禪家龜鑑)』뿐 아니라 『유교귀감(儒敎龜鑑)』 · 『도가귀감(道家龜鑑)』까지 저술하고 불(佛) · 도(道) · 유(儒)의 삼교(三敎) 그 궁극적인 진리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던 서산대사의 포용력에서 다시 사찰에서의 공동생활을 통하여 맺어진 승려 상호간의 굳은 인간관계와 명령계통의 확립,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목숨을 던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던 의승들의 전적은 이 대왜(對倭)항쟁에서 가장 눈부신 바 있었다.
부하의 승군 700명과 더불어 금산에서 전멸당한 기허대사나 해남에서 전몰한 뇌묵대사같은 분들은 모두 이 왜란에서 불교계가 민족을 위하여 치루었던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러나 이 전란에서의 의승들의 분전은 박대만 받던 당시의 승려신분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되어 고루하기 짝없던 유신(儒臣)조차 승도(僧徒)가 국가를 위하여 유익한 기관인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어 드디어 남 · 북한산성 도총섭(都摠攝)의 제도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총섭(總攝)은 서산대사가 출진(出陣)을 쾌락하자 선조께서는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팔도십육종도총섭당상격(八道十六宗都摠攝堂上格)으로 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예우케 하였던 바 있다. 처음에는 팔도에 선종 · 교종의 판사(判事)를 두려 하였던 것이나 사헌부에서 그 명칭에 이의를 내놓아 총섭으로 하여 각도에 선 · 교 양종에서 각 1인을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며 서산대사는 이 총섭의 총지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승려는 무엇보다도 승과급제(僧科及第)의 길을 터 줄 것을 열망하였던 것이며 조정에서도 사태가 위급하였던 시기였던만큼 그들의 희망을 거절할 수도 없게 되어 선조 26년 9월에는 비변사에서 선과(禪科)의 회복을 정식으로 제의하기에 이르렀다.[註1]
이에 전지(戰地)에서 공를 세운 승려는 그 군공(軍功)의 보수로서 선과급제의 자격을 주고 한편 그 지휘자에는 총섭의 칭호를 주었던 것이다.
서산대사를 정점으로 한 이 의승(義僧)의 활약이 눈부시게 나타나자 서산대사와 의엄 등에 대한 유신(儒臣) 또는 성균관생들의 상투적인 모함도 있었으나[註2] 선조가 이를 듣지 않았던 것은 선조가 깊이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고 심각한 국난을 극복하는데 있어 승단(僧團)이 지닌 여러 가지 장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환도의 서광이 짙어져 선조 29년 9월에 개성에 이르는 것을 이곳에서 맞이한 서산대사는 늙은 몸이 더 이상 군사권을 잡기 어려움을 선조에게 사뢰어 승군(僧軍)의 지휘권을 사명대사에게 넘기고 묘향산으로 되돌아 갈 것을 윤허받아 의정부(議政府) 영의부(領議府)를 배(拜)하고 사자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賜紫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를 받게 되니 유교국가의 군주를 자처하던 선조로서는 최고의 우대를 베풀었던 것이다.
서산대사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자 그 부총섭(副摠攝)이 되어 스승인 서산대사를 보좌하여 전공을 세웠던 사명대사는 승군의 군격을 이어받아 선조의 환도에도 그 군공이 뚜렷하였을 뿐 아니라 영남지방의 의령에서의 전공이 눈부신 바 있어 조정으로부터 당상경(堂上卿)으로 우대받게 된 것은 서산대사에 이어 또 유교국가의 승려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왜란에 있어서의 사명대사의 활약은 그것이 무력항쟁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명군(明軍)의 총병(總兵) 유정(劉綎)의 요청에 따라 울산의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영을 출입하여 그 동정을 살펴 이를 선조에게도 알려 전략을 유리하게 이끌었을 뿐 아니라 유성룡(柳成龍) 등의 의견에 따라 금오(金烏) · 팔공(八公) · 용기(龍起)의 산성을 축조하여 국토방위에 만전을 꾀하였고 다시 전후에 벌인 일본과의 외교교섭의 성과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왜란을 통하여 사명이 비축한 군량이 4,000여석, 무기조달이 10,000여명분이었던 것이나 그의 대왜(對倭)교섭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비롯하여 그곳 불교계 및 여러 장군의 존경을 받아 전쟁에 사로잡혀 갔던 민구(民口) 3,000여명을 되찾아 돌아왔던 것은 민족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 문하의 여러 의승(義僧)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대왜(對倭)항전이 국민에게 잘 알려지고 있으나 이밖에 부휴(浮休)와 그 고제(高弟)인 벽암(碧巖)같이 일반에게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국가와 문화를 지키는 데 앞장 서 승려를 멸시하던 당시의 조정과 유신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은 불교지도자도 적지 않았다.
서산 · 사명의 양대사 뿐 아니라 임진왜란에서 국토방위에 생명을 걸고 앞장섰던 의승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행사가 개인의 영달 또는 명성을 얻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불교에서 원효 이후 연면히 이어내려오는 주체적인 국가관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는 데 있었던 까닭이었다.
의승들의 공통된 희망은 고작 승과(僧科)의 회복으로, 지시인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국민으로서 정당한 요구 뿐이었던 것이며 이 왜란이 수습되자 대부분의 승려는 모두 조용히 산사(山寺)로 되돌아가고 일부의 승려는 남아 서울의 복구공사와 산성(山城)의 구축에 종사하게 되었다.
왜군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거의 잿더미같이 되어 궁궐 · 관아가 남은 것이라고는 없었던 서울의 복구공사는 광해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공사에서 심한 민폐를 끼쳐 이루어진 인경(仁慶) · 경덕(慶德) · 자수(慈壽)의 삼궁(三宮)이 풍수설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궁궐과 사대부의 집을 자주 출입하던 성지(性智)라는 승려의 권고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도 임진란 후의 승려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註3] 이 거창한 공사로 '승려들이 문안에 가득 차 있었다'[註4]는 일사기문(逸史奇聞)의 표현에서도 승려의 서울출입 제한과 같은 것은 이미 무시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광해군의 폐비(廢妃) 유(柳)씨도 또 불교독신자로서 내원당(內願堂) 뿐 아니라 많은 사찰에 불상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註5]
선조 40년 5월의 사헌부의 계(啓)에 이 10년 이래 모든 계층에 불교가 너무도 성행하였다는 그 상황의 설명에 이어 '사대부도 간혹 정성을 다하며 불을 섬긴다'[註6]는 임진왜란후의 불교의 성황은 광해군말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수축(修築)과 승군(僧軍) 》
광해군으로 하여금 민폐를 돌보지 않고 승군을 동원하여 임진왜란 후의 폐허화한 서울복구공사를 서두르게 하였던 성지(性智)는 인조의 반정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으나 국가적인 큰 공사에는 역시 승군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뚜렷한 예가 인조초에 축성한 남한산성이라든가 또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축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의 축조가 서울의 방어에 필요한 것은 이미 사명대사에 의하여 역설된 바 있었고 선조 28년에는 비변사에서도 사명대사로 하여금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을 지키도록 하려는 의견을 올린 바 있었다.
마침 인조 2년 정월 부원수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인조가 서울에서 피하여 남행하는 불행한 사태에 자극받아 동년(1624) 9월에 사명대사의 고제(高弟) 송월대사(松月大師)와 부휴대사(浮休大師)의 고제(高弟) 벽암(碧巖)으로 하여금 승려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조케 하여 동왕 4년 7월에 준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도첩(度牒)의 법이 폐지된 지 오래 되었으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사에 승려를 사역할 때는 도첩발급을 미끼로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신분을 공인하는 예는 이 남한산성의 축조 때에도 지켜졌을 뿐 아니라 성내(城內)에는 개원사(開元寺) · 한흥사(漢興寺) · 국청사(國淸寺) · 장경사(長慶寺) · 천주사(天柱寺) · 옥정사(玉井寺) · 동림사(東林寺)의 7사(寺)와 망월(望月) · 영원(靈源)의 2사(寺)가 있어 승대장(僧大將)은 개원사에서 마치 무반(武班)의 장군같은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축조 후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송월대사를 두 번에 걸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았던 것에서도 당시의 승려 기풍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후 승려의 국가에 대한 활동은 결코 전후의 복구사업이나 산성의 축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인조 4년 춘주(春州)에 만주족의 후금(後金)이 침입하자 강원도 감사의 추천으로 의병대장에 임명된 허백당 명조(明照)는 승군 4,000명을 이끌고 안주에서 진을 치고 인조 5년인 정묘년 정월말에는 후금군 36,000여기(餘騎)와 싸웠으며 3년간이나 압록강의 진장(陣將)으로서 불도(佛道)에만 정진하려던 스스로의 뜻과 어긋나는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후금과의 싸움에 승군이 활약하였던 것은 허백당 뿐 아니라 인조 14년의 병자호란에는 그의 스승 부휴대사를 따라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던 벽암(碧巖)이 다시 의승 3,000명으로서 항마군(降魔軍)을 편성하여 호남의 관군과 서로 도우며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회은(晦隱)도 또한 호남에서 의승을 모아 그 장(將)으로서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을 도와 적지 않은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인조 25년에는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지킨 바도 있었으며 불교의 억압책이 눈에 보이게 되는 현종 2년에 정이품 이상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한 것에서도 회은의 국가수호에 대한 공로는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불교지도자에 대한 인조시대의 파격적인 우대는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재인식같은 것이었다고 하기보다 전란과 그 복구공사에 있어서 승단이(僧團) 지닌 단체로서의 세력을 충분히 인식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나 이같은 승단이 지닌 단체로서의 저력은 남한산성의 수축 후 다시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축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인조 25년 5월에 전라감사 목성선(睦性善)이 적상산성을 수축하여 많은 사찰을 세워 승려를 모아 지키도록 하자는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산성의 수축이 승려의 손으로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이 산성을 지키기 위하여 주둔하는 승려들의 병영(兵營)의 성격을 띈 사찰들이 많이 세워진 것은 도첩제도의 폐지에도 승려와 사찰의 증가를 가져오는 일로서 유교국가임을 자처하던 당시로서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으나 심각한 현실에 대한 대안이 없는 한 유신(儒臣)들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규장각도서에 들어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적상산본도 또 산성내의 사고(史庫)를 지키던 승려들의 힘으로 지켜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의 통치 10년간은 병자호란의 불명예스러웠던 삼전도의 항복을 보복하기 위한 일념으로 불교에 대하여 자극을 줄만한 언론이나 사건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나 서산대사 이후부터 일어난 불교자체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서산대사 당시까지는 크게 선 · 교 양종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마는 화엄(華嚴) · 자은(慈恩) · 중신(中神) · 시흥(始興)의 사교(四敎)와 조계(曹溪) · 천태(天台) · 총남(總南)의 삼종(三宗)의 종맥(宗脈)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나 서산대사 이후는 교종(敎宗)의 이른바 사교(四敎)와 선종의 천태(天台) · 총남(總南)은 거의 그 종맥이 끊어지고 조계종의 일파인 태고종파(太古宗派)만이 부용영관선사문하(芙蓉靈觀禪師門下)의 서산 · 부휴의 양대사에 의하여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승려가 되면 그를 처음에 양성한 스승인 득도사(得度師)가 속하는 사찰에 적을 두어 그 법맥을 이어받는 사찰의 일반규칙이 도승법(度僧法)의 폐지로 무너지고 득도사를 떠나서 다시 사법사(嗣法師)를 찾아 수도하는 등 승적법이 없어지게 된 것이 큰 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나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격심한 변화는 서산대사의 사상에도 충분히 반영되어 있었다.
서산대사는 과거에 있어서 선종이 화엄 · 법화 등 교종에서 중요시하던 불경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좌선의 방법만으로 불교의 진리를 꿰뚫겠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좌선에 앞서 충분한 불경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열심히 염불하여 심(心)과 구(口)가 일체가 되면 그것이 곧 극락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는 염불의 공덕도 높이 찬양하였던 것이다.[註7]
서산대사의 이와 같은 선(禪)에 대한 견해는 서산 · 부휴의 양대사를 낳게 한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주장을 넓힌 것이며 부용대사 이후 태고파가 한국불교의 주류가 됨에 이르러 종래 선 · 교 양종에 속하던 전국의 사찰은 부휴 문하의 벽암대사계와 서산 문하의 사명(泗溟) · 편양(鞭羊) · 소요(逍遙) · 정관(靜觀) 4파 승려계통에 귀속하게 되었다. 즉 전남의 송광사 · 화엄사, 전북의 금산사, 충북의 법주사와 경남의 해인사 등이 모두 벽암대사계이며 나머지 전국의 3분의 2는 서산문하의 사명 등 4파 승려계통에 의하여 종풍(宗風)이 이어지게 되었다.[註8]
벽암과 사명 등 4대사 당시까지도 태고파에서는 아직 선종적 색채를 내세워, 상대되던 교종과 수도방법을 달리하려는 여풍이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편양(鞭羊)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법손(法孫) 월담(月潭) · 월저(月渚)와 벽암의 법손되는 백암(栢庵)에 이르러는 이미 교종은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선종승려로서 교종의 기본불전인 화엄 · 법화경을 사찰에서 강설(講說)하는 것이 성행하였다. 인조에서 효종시대에 걸쳐 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월저(月渚)대사의 1,000명(名) 대회(大會)라는 것도 화엄경을 강설한 대회였던 것이며 항상 화엄경을 강(講)하여 세상사람들이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월저대사와 전후하여 한국불교계에서 크게 활약한 월담(月潭) · 상봉(霜峯) · 침굉(枕肱) · 백곡(白谷) · 모운(慕雲) 등의 여러 승려들도 화엄 · 법화경을 강설하는 강경업(講經業)으로 이름이 높았던 종장(宗長)들이다. 한국 불교에서 최근까지 승려가 되려면 꼭 배워야 하는 이른바 이력(履歷) 과정에 치문(緇門) · 선요(禪要) 등 종래의 선종 10종(種) 학과(學科)에 다시 해동종(海東宗) · 화엄종(華嚴宗)에서 숭상하던 발심(發心) · 화엄경(華嚴經), 원각경(圓覺經)과 천태종의 기본경전인 법화경이 들어가게 된 것도 월저가 활약하던 인조에서 효종의 무렵부터였다.
한편 염불의 성행은 국가의 불교억압책으로 지식층의 신도를 잃게 된 불교가 일반서민층에 깊이 파고 들어가 가냘픈 법등(法燈)이나마 이어나가 한국의 불교를 지키는 활력소가 되었다. 근래까지도 큰 사찰에는 반드시 좌선당(坐禪堂) · 강학당(講學堂)과 염불의 모임을 지도하는 염불당(念佛堂)의 3법당이 있어 염불당에는 따로 화주(化主)라는 역승(役僧)을 두어 10,000일을 수업기간으로 하였다. 염불회(念佛會)를 10,000일회라고도 불렀던 것은 그 수업일수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유지에는 별도로 10,000일회 전답을 가지고 본사(本寺)와 독립된 경영을 하였던 것이며 화주(化主)의 직은 그의 제자들에 계승되어 세습적으로 되는 수가 많았다. 주지의 임기가 3년이었던데 비하면 화주는 10,000일 즉 30년이나 활동할 수 있는 까닭에 그 사찰내의 여러 가지 사정에 밝아 사찰내의 실권은 자연 화주의 손에 장악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축조가 서울의 방어에 필요한 것은 이미 사명대사에 의하여 역설된 바 있었고 선조 28년에는 비변사에서도 사명대사로 하여금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을 지키도록 하려는 의견을 올린 바 있었다.
마침 인조 2년 정월 부원수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인조가 서울에서 피하여 남행하는 불행한 사태에 자극받아 동년(1624) 9월에 사명대사의 고제(高弟) 송월대사(松月大師)와 부휴대사(浮休大師)의 고제(高弟) 벽암(碧巖)으로 하여금 승려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조케 하여 동왕 4년 7월에 준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도첩(度牒)의 법이 폐지된 지 오래 되었으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사에 승려를 사역할 때는 도첩발급을 미끼로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신분을 공인하는 예는 이 남한산성의 축조 때에도 지켜졌을 뿐 아니라 성내(城內)에는 개원사(開元寺) · 한흥사(漢興寺) · 국청사(國淸寺) · 장경사(長慶寺) · 천주사(天柱寺) · 옥정사(玉井寺) · 동림사(東林寺)의 7사(寺)와 망월(望月) · 영원(靈源)의 2사(寺)가 있어 승대장(僧大將)은 개원사에서 마치 무반(武班)의 장군같은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축조 후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송월대사를 두 번에 걸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았던 것에서도 당시의 승려 기풍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후 승려의 국가에 대한 활동은 결코 전후의 복구사업이나 산성의 축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인조 4년 춘주(春州)에 만주족의 후금(後金)이 침입하자 강원도 감사의 추천으로 의병대장에 임명된 허백당 명조(明照)는 승군 4,000명을 이끌고 안주에서 진을 치고 인조 5년인 정묘년 정월말에는 후금군 36,000여기(餘騎)와 싸웠으며 3년간이나 압록강의 진장(陣將)으로서 불도(佛道)에만 정진하려던 스스로의 뜻과 어긋나는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후금과의 싸움에 승군이 활약하였던 것은 허백당 뿐 아니라 인조 14년의 병자호란에는 그의 스승 부휴대사를 따라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던 벽암(碧巖)이 다시 의승 3,000명으로서 항마군(降魔軍)을 편성하여 호남의 관군과 서로 도우며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회은(晦隱)도 또한 호남에서 의승을 모아 그 장(將)으로서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을 도와 적지 않은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인조 25년에는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지킨 바도 있었으며 불교의 억압책이 눈에 보이게 되는 현종 2년에 정이품 이상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한 것에서도 회은의 국가수호에 대한 공로는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불교지도자에 대한 인조시대의 파격적인 우대는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재인식같은 것이었다고 하기보다 전란과 그 복구공사에 있어서 승단이(僧團) 지닌 단체로서의 세력을 충분히 인식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나 이같은 승단이 지닌 단체로서의 저력은 남한산성의 수축 후 다시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축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인조 25년 5월에 전라감사 목성선(睦性善)이 적상산성을 수축하여 많은 사찰을 세워 승려를 모아 지키도록 하자는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산성의 수축이 승려의 손으로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이 산성을 지키기 위하여 주둔하는 승려들의 병영(兵營)의 성격을 띈 사찰들이 많이 세워진 것은 도첩제도의 폐지에도 승려와 사찰의 증가를 가져오는 일로서 유교국가임을 자처하던 당시로서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으나 심각한 현실에 대한 대안이 없는 한 유신(儒臣)들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규장각도서에 들어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적상산본도 또 산성내의 사고(史庫)를 지키던 승려들의 힘으로 지켜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의 통치 10년간은 병자호란의 불명예스러웠던 삼전도의 항복을 보복하기 위한 일념으로 불교에 대하여 자극을 줄만한 언론이나 사건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나 서산대사 이후부터 일어난 불교자체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서산대사 당시까지는 크게 선 · 교 양종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마는 화엄(華嚴) · 자은(慈恩) · 중신(中神) · 시흥(始興)의 사교(四敎)와 조계(曹溪) · 천태(天台) · 총남(總南)의 삼종(三宗)의 종맥(宗脈)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나 서산대사 이후는 교종(敎宗)의 이른바 사교(四敎)와 선종의 천태(天台) · 총남(總南)은 거의 그 종맥이 끊어지고 조계종의 일파인 태고종파(太古宗派)만이 부용영관선사문하(芙蓉靈觀禪師門下)의 서산 · 부휴의 양대사에 의하여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승려가 되면 그를 처음에 양성한 스승인 득도사(得度師)가 속하는 사찰에 적을 두어 그 법맥을 이어받는 사찰의 일반규칙이 도승법(度僧法)의 폐지로 무너지고 득도사를 떠나서 다시 사법사(嗣法師)를 찾아 수도하는 등 승적법이 없어지게 된 것이 큰 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나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격심한 변화는 서산대사의 사상에도 충분히 반영되어 있었다.
서산대사는 과거에 있어서 선종이 화엄 · 법화 등 교종에서 중요시하던 불경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좌선의 방법만으로 불교의 진리를 꿰뚫겠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좌선에 앞서 충분한 불경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열심히 염불하여 심(心)과 구(口)가 일체가 되면 그것이 곧 극락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는 염불의 공덕도 높이 찬양하였던 것이다.[註7]
서산대사의 이와 같은 선(禪)에 대한 견해는 서산 · 부휴의 양대사를 낳게 한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주장을 넓힌 것이며 부용대사 이후 태고파가 한국불교의 주류가 됨에 이르러 종래 선 · 교 양종에 속하던 전국의 사찰은 부휴 문하의 벽암대사계와 서산 문하의 사명(泗溟) · 편양(鞭羊) · 소요(逍遙) · 정관(靜觀) 4파 승려계통에 귀속하게 되었다. 즉 전남의 송광사 · 화엄사, 전북의 금산사, 충북의 법주사와 경남의 해인사 등이 모두 벽암대사계이며 나머지 전국의 3분의 2는 서산문하의 사명 등 4파 승려계통에 의하여 종풍(宗風)이 이어지게 되었다.[註8]
벽암과 사명 등 4대사 당시까지도 태고파에서는 아직 선종적 색채를 내세워, 상대되던 교종과 수도방법을 달리하려는 여풍이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편양(鞭羊)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법손(法孫) 월담(月潭) · 월저(月渚)와 벽암의 법손되는 백암(栢庵)에 이르러는 이미 교종은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선종승려로서 교종의 기본불전인 화엄 · 법화경을 사찰에서 강설(講說)하는 것이 성행하였다. 인조에서 효종시대에 걸쳐 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월저(月渚)대사의 1,000명(名) 대회(大會)라는 것도 화엄경을 강설한 대회였던 것이며 항상 화엄경을 강(講)하여 세상사람들이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월저대사와 전후하여 한국불교계에서 크게 활약한 월담(月潭) · 상봉(霜峯) · 침굉(枕肱) · 백곡(白谷) · 모운(慕雲) 등의 여러 승려들도 화엄 · 법화경을 강설하는 강경업(講經業)으로 이름이 높았던 종장(宗長)들이다. 한국 불교에서 최근까지 승려가 되려면 꼭 배워야 하는 이른바 이력(履歷) 과정에 치문(緇門) · 선요(禪要) 등 종래의 선종 10종(種) 학과(學科)에 다시 해동종(海東宗) · 화엄종(華嚴宗)에서 숭상하던 발심(發心) · 화엄경(華嚴經), 원각경(圓覺經)과 천태종의 기본경전인 법화경이 들어가게 된 것도 월저가 활약하던 인조에서 효종의 무렵부터였다.
한편 염불의 성행은 국가의 불교억압책으로 지식층의 신도를 잃게 된 불교가 일반서민층에 깊이 파고 들어가 가냘픈 법등(法燈)이나마 이어나가 한국의 불교를 지키는 활력소가 되었다. 근래까지도 큰 사찰에는 반드시 좌선당(坐禪堂) · 강학당(講學堂)과 염불의 모임을 지도하는 염불당(念佛堂)의 3법당이 있어 염불당에는 따로 화주(化主)라는 역승(役僧)을 두어 10,000일을 수업기간으로 하였다. 염불회(念佛會)를 10,000일회라고도 불렀던 것은 그 수업일수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유지에는 별도로 10,000일회 전답을 가지고 본사(本寺)와 독립된 경영을 하였던 것이며 화주(化主)의 직은 그의 제자들에 계승되어 세습적으로 되는 수가 많았다. 주지의 임기가 3년이었던데 비하면 화주는 10,000일 즉 30년이나 활동할 수 있는 까닭에 그 사찰내의 여러 가지 사정에 밝아 사찰내의 실권은 자연 화주의 손에 장악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현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불교 》
효종에 이어 즉위한 현종은 원년 12월에 사비(寺婢)의 삭발에 대한 철저한 금지방침을 밝혀 불교배척을 강행할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 이유는 불교가 허무맹랑한 것이며 민정(民丁)은 줄어지고 승려만 늘어나는 것은 한심한 일이기에 전국의 양민으로 삭발하고 승니(僧尼)가 된 자는 모두 환속(還俗)케 하겠다는 것이었다.[註10]
이에 앞서 3월에는 이조(吏曹)에서 각 지방에 있는 왕실과 관청의 내원당(內願堂)을 없앨 것을 청하여 현종이 옛 문서에 그 전래를 조사케 하였던 바 있으나[註11] 이와 같이 현종이 즉위하자 유신(儒臣)들이 다시 불교억압책을 독촉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없어지고 국내의 부흥공사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게 되자 승병의 필요성이 종전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현종이 원년 12월에 내린 전국사찰의 환속령은 노재상(老宰相) 정태화(鄭太和)의 완화 의견도 있어 현종도 그것이 민심에 미치는 영향과 실행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2년 정월에 이르러 서울문안에서 가장 컸던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의 두 여승방(女僧房)을 헐어 40이하는 모두 환속시키고 늙은 여승은 도성 밖의 여승방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여승방에 모셨던 열왕(列王)의 위판(位版)은 모두 깨끗한 곳에 파묻었다.
국내에서 가장 컸었던 여승방인 자수원은 조선왕조초 북학(北學)의 옛터에 세워졌던 것이나 송준길(宋浚吉)의 의견에 따라 주자가 사찰을 부셔 서당을 세운 예를 좇아 그곳에 다시 북학을 세우고 현종 4년에는 그 목재 · 기와를 가지고 성균관의 비천당(丕闡堂)과 또 일량재(一兩齋) · 벽입재(闢入齋)를 세우기도 하였던 것이다.[註13] 각 사찰에서 축적한 재산과 위전(位田)을 모두 본사(本司)에 되돌리도록 하였던 것도 현종 4년인 것으로 정지익(鄭之益)이 찬(撰)한 강서사사적비(江西寺事蹟碑)에 적혀 있으나 그 실시의 내용과 성과는 상세치 않다.
이와 같이 그 초기에 있어서 극단적인 불교억압책을 썼던 현종이었으나 10년 무렵부터 불교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즉 10년 정월에 송준길이 전일(前日) 서울문안의 여승방을 없앴는데 다시 지방의 여승방도 없앨 것을 주장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6월에는 오히려 병자호란에서 보수를 바라지 않는 승군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민정(民丁)이 3일 걸리는 일을 역승군(役僧軍)이 1일에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사력(死力)을 다하는 까닭이라 하여 승려의 보호를 역설하였다.[註14]
현종 15년 4월에는 왕실의 재무와 일상용품을 맡아보는 내수사(內需司)에서 인조대비를 위하여 수륙재(水陸齋)를 개성 화장사(華藏寺)에서 벌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신들의 강력한 간언에 부딪쳐 곧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註15] 보아도 극성스러운 유신(儒臣)들의 불교억압책은 군주의 힘만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유신들의 불교억압책을 누르지 못하였던 현종과는 달리 다음 대인 숙종에 이르러는 불교가 깊이 궁중에 뿌리박아 특히 그 치세의 말기에는 궁중과 사찰의 내왕이 자못 잦았다.
즉 숙종 17년 4월에는 광주(廣州) 봉국사(奉國寺)에 있는 명선(明善) · 명혜(明惠) 양공주(兩公主)의 원당(願堂)과 봉선(奉先) · 봉은(奉恩) 양사(兩寺)에 모셔둔 역대의 왕들의 위판(位版)까지도 유신들의 상소로 없앴던 것이나 23년 정월에는 금강산 유첨사(楡帖寺)에 선조 · 인조 · 현종의 초상을 모셔 춘추에 재(齋)를 올리게 되어 유신들의 여러차례의 반대에도 그대로 유지하였던 것이다.
숙종 33년에는 조선왕조초에 왕실의 수륙사(水陸社)로서 매우 중요시되던 진관사(津寬寺)가 그 후의 불교억압책으로 오래동안 쇠퇴되어 거의 폐사가 된 것을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한 소녕원(昭寧園)을 두어 재건하여 다시 범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게 하였으며 35년에는 사간원에서 여승방이 서울근교에 있어 승려들의 서울출입이 빈번하기에 이러한 것을 모두 헐어버리고 여승들의 서울출입을 엄금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은 선조 7년에 태학생(太學生)들이 문안의 정업원(淨業院)을 헐어버릴 것을 상소하였어도 허락치 않았던 전례를 들어 사간원의 상소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유신들이 끈덕지게 여승방을 없애려고 주장하는 것은 왕궁과 사찰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항상 여승들이 매개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숙종시대에 있어서 승려들이 지닌 질서있는 단체력이 다시 인식된 것은 북한산성의 축조와 그 경영이었다. 37년 2월에 이 산성의 축조가 결정되어 동년 4월에 착수하여 9월에 완공되었다. 성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 · 용암사(龍巖寺) · 보국사(輔國寺) · 보광사(普光寺) · 부왕사(扶旺寺) · 원각사(元覺寺) · 국영사(國寧寺) · 상운사(祥雲寺) · 서암사(西巖寺) · 태고사(太古寺) · 진국사(鎭國寺)의 11개 사찰을 진호(鎭護)의 영험있는 사찰로 간주하여 이곳을 승병(僧兵)의 병영(兵營)으로 하고 각도의 사찰에 명하여 1년에 6차에 걸쳐 번갈아 인원을 뽑아 올려 이곳 11개 사찰에 주둔케 하였던 것이다. 이들 승병을 의승(義僧)이라고 하며 360명이 정원으로 되어 있었으며 각사에는 수승(首僧) 1명과 승장(僧將) 1명을 두고 이들을 총지휘하는 승영(僧營) 승대장(僧大將) 1명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이 의승들은 제모를 쓰고 매일 불경을 읽으며 무술을 닦는 생활로서 왕성의 북쪽요지를 지켜 남의 남한산성과 더불어 서울방위의 요충으로 국가의 유용한 기관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병주둔은 그것이 비록 직접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순수한 종교활동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승려의 사회적 지위향상 또는 유지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남 · 북한 양영(兩營)의 교대수비를 맡게 된 승단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승려들이 이 양산성(兩山城)까지 올라오는데는 지니고 있던 기구나 재산을 처분하여 여비와 복장을 마련하는 고통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영조에 이르러는 한사람이 40량을 납부하여 수비병으로 양산성(兩山城)에 가는 것을 면제하고 양승영(兩僧營)에서는 이 돈으로 다른 승려를 고용하여 대신으로 복역케 하는 제번징전(除番徵錢)을 허용케 하기로 하여 그 고통을 부분적으로 덜어주기도 하였다. 양성의 수비승려들이 대부분 상비병의 경향을 보이게 된 것은 제번징전(除番徵錢)이 허용되면서부터였다.
숙종의 다음 왕인 경종은 그 재위가 4년에 지나지 않아 불교에 대하여 특기할만한 사건은 없었다. 다만 4년 7월에 사간원의 계에 따라 여승을 없애도록 하였던 것이나 뒤에 다시 지은지 오래되었고 먼 곳의 사찰을 없애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대로 존치시키도록 하였던 것에서 여승방과 왕실의 관계가 유신들의 힘만으로는 끊어지기 어려웠던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불교억압이 뚜렷이 눈에 띄게 된 것은 청을 통하여 중국에서 소화된 천주교문물을 받아 들여 조선왕조시대의 문화부흥기로 불리고 있는 영조시대에서였다. 즉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정무를 맡아보게 한 영조 25년 2월에 사헌부의 청에 따라 승니(僧尼)의 서울출입을 금하여[註16] 숙종 때부터 유신들이 문제삼았던 현안의 결말을 보게 되었으며 다시 29년에는 왕세손의 강학부(講學簿)에 능엄경(楞嚴經)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강독을 금지하였던 사건까지 있었다.
특히 39년 5월에는 사헌부의 계에 따라 서울성안에 있는 승니를 모두 문밖으로 몰아내게 하였으며[註17] 44년 8월에 이르러는 전국 사찰에서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축원패(祝願牌)를 모두 없애게 하고 44년에는 전국사찰에 마련된 내원당(內願堂)을 정리하는 등 철저한 불교억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으로 황폐된 서울을 복구하는 공사에 많은 피땀을 흘렸고 또 남한 · 북한산성에서 신체적인 고통과 재산상의 손실을 강요당하며 왕성을 지키는 승려들이 그 출입금지 뿐 아니라 서울에서 물러나와야 한다는 것은 불교계로서는 굴욕적이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더 큰 고통은 현종무렵부터 눈에 띄어 영조말에 극도에까지 도달한 왕실과 관청에서의 각 사찰에 대한 수탈행위였다.
승과(僧科)가 없어지고 도첩제도가 폐지되어 원칙상 승려라고는 역승(役僧)에게 베풀어지는 특수한 경우 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 당시에 있어서 사찰을 유지할 수 있는 승려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관리들의 묵인이 있어야 하였던 것이며 이와 같은 묵인의 대가가 사찰에 대한 지역(紙役) · 공진(貢進) 등의 이름으로 부과되는 수탈이었다. 그 심한 예가 통도사(通度寺)의 지역(紙役) 및 관에서 필요로 하는 목화(木靴) · 마화(麻靴) · 짚신을 뜻하는 삼색화공진(三色靴貢進)과 묘향산의 지역(紙役)같은 것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삼남지방의 각 사찰이 지역과 잡물공진(雜物貢進)으로 승려는 그 고통에 견디지 못하여 흩어지고 사찰은 보수조차 할 수가 없어 황폐되어 가기만 하였던 것이다.[註18]
되풀이되었던 억불책과 임진 · 병자 등의 참화로 막대하였던 사찰의 피해는 그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 현종 4년에는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몇 사찰의 수륙위전(水陸位田) 및 재궁전(齋宮田)을 제외한 모든 사유전(寺有田)을 몰수당한 사찰이 이와 같은 수탈을 견디며 법등(法燈)을 이어나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승려의 수가 많은 큰 사찰같으면 사명대사의 무렵부터 나타나게 된 생년(生年)이 같은 승려들이 일정한 금전을 모아 저리(低利)로 대출하며 그 원금과 이자를 그 사찰에 기부하여 복구 또는 신축공사에 쓰게 하는 이른바 갑계(甲契)라든가[註19] 또는 염불을 주로 하는 역승(役僧)인 화주(化主)에 의하여 조직되는 만일회(萬日會)나 그 불회(佛會)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한 기금으로 승려와 신도들이 조직한 염불계(念佛契)의 토지 같은 것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통도사 · 범어사의 갑계나 경상남도의 오어사(吾魚寺)를 비롯한 경상도 · 전라도에서 특히 성행한 염불계는 그 이식(利息)으로 사찰의 유지와 사찰토지 구입에 성공한 예이다.
그러나 위전(位田) · 제전(祭田) 등이 없고 승려의 수나 신도가 적은 사찰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사찰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ㄱ) 탁발에서 얻는 곡식과 금전 (ㄴ) 신도들이 사찰에 와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올리는 기제(忌祭) 또는 기도(祈禱)를 올려서 얻는 사례금품 (ㄷ) 사찰부근의 황지(荒地)개간에서 거두어지는 곡식과 품팔이에서 얻어지는 보수 등이었다. 물론 억불책이 강행되어도 궁중에는 대비 · 왕비를 비롯한 궁녀들의 신앙은 변함이 없고 각 사찰에 남아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통하여도 적지 않은 금품이 사찰로 흘러 갔을 것이나 이와 같은 것은 옛부터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몇몇 사찰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찰은 승려와 신도의 힘만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왕실거족 및 지방관의 수탈에 사찰이 능히 견디며 법등(法燈)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승려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기와 환경을 살려 생계를 세우고 그 효과적인 운영으로 저축이 생겼던 것이며 승려 각자의 활동에 따라 승려사유의 재산까지 생겨서 그가 죽은 후는 토지 및 재산의 일부를 소속 사찰에 기증하게 되어 관급의 토지가 없어져도 사찰의 토지가 늘어났던 까닭이다.
이에 앞서 3월에는 이조(吏曹)에서 각 지방에 있는 왕실과 관청의 내원당(內願堂)을 없앨 것을 청하여 현종이 옛 문서에 그 전래를 조사케 하였던 바 있으나[註11] 이와 같이 현종이 즉위하자 유신(儒臣)들이 다시 불교억압책을 독촉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없어지고 국내의 부흥공사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게 되자 승병의 필요성이 종전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현종이 원년 12월에 내린 전국사찰의 환속령은 노재상(老宰相) 정태화(鄭太和)의 완화 의견도 있어 현종도 그것이 민심에 미치는 영향과 실행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2년 정월에 이르러 서울문안에서 가장 컸던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의 두 여승방(女僧房)을 헐어 40이하는 모두 환속시키고 늙은 여승은 도성 밖의 여승방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여승방에 모셨던 열왕(列王)의 위판(位版)은 모두 깨끗한 곳에 파묻었다.
국내에서 가장 컸었던 여승방인 자수원은 조선왕조초 북학(北學)의 옛터에 세워졌던 것이나 송준길(宋浚吉)의 의견에 따라 주자가 사찰을 부셔 서당을 세운 예를 좇아 그곳에 다시 북학을 세우고 현종 4년에는 그 목재 · 기와를 가지고 성균관의 비천당(丕闡堂)과 또 일량재(一兩齋) · 벽입재(闢入齋)를 세우기도 하였던 것이다.[註13] 각 사찰에서 축적한 재산과 위전(位田)을 모두 본사(本司)에 되돌리도록 하였던 것도 현종 4년인 것으로 정지익(鄭之益)이 찬(撰)한 강서사사적비(江西寺事蹟碑)에 적혀 있으나 그 실시의 내용과 성과는 상세치 않다.
이와 같이 그 초기에 있어서 극단적인 불교억압책을 썼던 현종이었으나 10년 무렵부터 불교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즉 10년 정월에 송준길이 전일(前日) 서울문안의 여승방을 없앴는데 다시 지방의 여승방도 없앨 것을 주장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6월에는 오히려 병자호란에서 보수를 바라지 않는 승군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민정(民丁)이 3일 걸리는 일을 역승군(役僧軍)이 1일에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사력(死力)을 다하는 까닭이라 하여 승려의 보호를 역설하였다.[註14]
현종 15년 4월에는 왕실의 재무와 일상용품을 맡아보는 내수사(內需司)에서 인조대비를 위하여 수륙재(水陸齋)를 개성 화장사(華藏寺)에서 벌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신들의 강력한 간언에 부딪쳐 곧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註15] 보아도 극성스러운 유신(儒臣)들의 불교억압책은 군주의 힘만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유신들의 불교억압책을 누르지 못하였던 현종과는 달리 다음 대인 숙종에 이르러는 불교가 깊이 궁중에 뿌리박아 특히 그 치세의 말기에는 궁중과 사찰의 내왕이 자못 잦았다.
즉 숙종 17년 4월에는 광주(廣州) 봉국사(奉國寺)에 있는 명선(明善) · 명혜(明惠) 양공주(兩公主)의 원당(願堂)과 봉선(奉先) · 봉은(奉恩) 양사(兩寺)에 모셔둔 역대의 왕들의 위판(位版)까지도 유신들의 상소로 없앴던 것이나 23년 정월에는 금강산 유첨사(楡帖寺)에 선조 · 인조 · 현종의 초상을 모셔 춘추에 재(齋)를 올리게 되어 유신들의 여러차례의 반대에도 그대로 유지하였던 것이다.
숙종 33년에는 조선왕조초에 왕실의 수륙사(水陸社)로서 매우 중요시되던 진관사(津寬寺)가 그 후의 불교억압책으로 오래동안 쇠퇴되어 거의 폐사가 된 것을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한 소녕원(昭寧園)을 두어 재건하여 다시 범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게 하였으며 35년에는 사간원에서 여승방이 서울근교에 있어 승려들의 서울출입이 빈번하기에 이러한 것을 모두 헐어버리고 여승들의 서울출입을 엄금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은 선조 7년에 태학생(太學生)들이 문안의 정업원(淨業院)을 헐어버릴 것을 상소하였어도 허락치 않았던 전례를 들어 사간원의 상소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유신들이 끈덕지게 여승방을 없애려고 주장하는 것은 왕궁과 사찰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항상 여승들이 매개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숙종시대에 있어서 승려들이 지닌 질서있는 단체력이 다시 인식된 것은 북한산성의 축조와 그 경영이었다. 37년 2월에 이 산성의 축조가 결정되어 동년 4월에 착수하여 9월에 완공되었다. 성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 · 용암사(龍巖寺) · 보국사(輔國寺) · 보광사(普光寺) · 부왕사(扶旺寺) · 원각사(元覺寺) · 국영사(國寧寺) · 상운사(祥雲寺) · 서암사(西巖寺) · 태고사(太古寺) · 진국사(鎭國寺)의 11개 사찰을 진호(鎭護)의 영험있는 사찰로 간주하여 이곳을 승병(僧兵)의 병영(兵營)으로 하고 각도의 사찰에 명하여 1년에 6차에 걸쳐 번갈아 인원을 뽑아 올려 이곳 11개 사찰에 주둔케 하였던 것이다. 이들 승병을 의승(義僧)이라고 하며 360명이 정원으로 되어 있었으며 각사에는 수승(首僧) 1명과 승장(僧將) 1명을 두고 이들을 총지휘하는 승영(僧營) 승대장(僧大將) 1명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이 의승들은 제모를 쓰고 매일 불경을 읽으며 무술을 닦는 생활로서 왕성의 북쪽요지를 지켜 남의 남한산성과 더불어 서울방위의 요충으로 국가의 유용한 기관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병주둔은 그것이 비록 직접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순수한 종교활동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승려의 사회적 지위향상 또는 유지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남 · 북한 양영(兩營)의 교대수비를 맡게 된 승단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승려들이 이 양산성(兩山城)까지 올라오는데는 지니고 있던 기구나 재산을 처분하여 여비와 복장을 마련하는 고통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영조에 이르러는 한사람이 40량을 납부하여 수비병으로 양산성(兩山城)에 가는 것을 면제하고 양승영(兩僧營)에서는 이 돈으로 다른 승려를 고용하여 대신으로 복역케 하는 제번징전(除番徵錢)을 허용케 하기로 하여 그 고통을 부분적으로 덜어주기도 하였다. 양성의 수비승려들이 대부분 상비병의 경향을 보이게 된 것은 제번징전(除番徵錢)이 허용되면서부터였다.
숙종의 다음 왕인 경종은 그 재위가 4년에 지나지 않아 불교에 대하여 특기할만한 사건은 없었다. 다만 4년 7월에 사간원의 계에 따라 여승을 없애도록 하였던 것이나 뒤에 다시 지은지 오래되었고 먼 곳의 사찰을 없애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대로 존치시키도록 하였던 것에서 여승방과 왕실의 관계가 유신들의 힘만으로는 끊어지기 어려웠던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불교억압이 뚜렷이 눈에 띄게 된 것은 청을 통하여 중국에서 소화된 천주교문물을 받아 들여 조선왕조시대의 문화부흥기로 불리고 있는 영조시대에서였다. 즉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정무를 맡아보게 한 영조 25년 2월에 사헌부의 청에 따라 승니(僧尼)의 서울출입을 금하여[註16] 숙종 때부터 유신들이 문제삼았던 현안의 결말을 보게 되었으며 다시 29년에는 왕세손의 강학부(講學簿)에 능엄경(楞嚴經)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강독을 금지하였던 사건까지 있었다.
특히 39년 5월에는 사헌부의 계에 따라 서울성안에 있는 승니를 모두 문밖으로 몰아내게 하였으며[註17] 44년 8월에 이르러는 전국 사찰에서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축원패(祝願牌)를 모두 없애게 하고 44년에는 전국사찰에 마련된 내원당(內願堂)을 정리하는 등 철저한 불교억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으로 황폐된 서울을 복구하는 공사에 많은 피땀을 흘렸고 또 남한 · 북한산성에서 신체적인 고통과 재산상의 손실을 강요당하며 왕성을 지키는 승려들이 그 출입금지 뿐 아니라 서울에서 물러나와야 한다는 것은 불교계로서는 굴욕적이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더 큰 고통은 현종무렵부터 눈에 띄어 영조말에 극도에까지 도달한 왕실과 관청에서의 각 사찰에 대한 수탈행위였다.
승과(僧科)가 없어지고 도첩제도가 폐지되어 원칙상 승려라고는 역승(役僧)에게 베풀어지는 특수한 경우 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 당시에 있어서 사찰을 유지할 수 있는 승려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관리들의 묵인이 있어야 하였던 것이며 이와 같은 묵인의 대가가 사찰에 대한 지역(紙役) · 공진(貢進) 등의 이름으로 부과되는 수탈이었다. 그 심한 예가 통도사(通度寺)의 지역(紙役) 및 관에서 필요로 하는 목화(木靴) · 마화(麻靴) · 짚신을 뜻하는 삼색화공진(三色靴貢進)과 묘향산의 지역(紙役)같은 것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삼남지방의 각 사찰이 지역과 잡물공진(雜物貢進)으로 승려는 그 고통에 견디지 못하여 흩어지고 사찰은 보수조차 할 수가 없어 황폐되어 가기만 하였던 것이다.[註18]
되풀이되었던 억불책과 임진 · 병자 등의 참화로 막대하였던 사찰의 피해는 그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 현종 4년에는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몇 사찰의 수륙위전(水陸位田) 및 재궁전(齋宮田)을 제외한 모든 사유전(寺有田)을 몰수당한 사찰이 이와 같은 수탈을 견디며 법등(法燈)을 이어나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승려의 수가 많은 큰 사찰같으면 사명대사의 무렵부터 나타나게 된 생년(生年)이 같은 승려들이 일정한 금전을 모아 저리(低利)로 대출하며 그 원금과 이자를 그 사찰에 기부하여 복구 또는 신축공사에 쓰게 하는 이른바 갑계(甲契)라든가[註19] 또는 염불을 주로 하는 역승(役僧)인 화주(化主)에 의하여 조직되는 만일회(萬日會)나 그 불회(佛會)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한 기금으로 승려와 신도들이 조직한 염불계(念佛契)의 토지 같은 것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통도사 · 범어사의 갑계나 경상남도의 오어사(吾魚寺)를 비롯한 경상도 · 전라도에서 특히 성행한 염불계는 그 이식(利息)으로 사찰의 유지와 사찰토지 구입에 성공한 예이다.
그러나 위전(位田) · 제전(祭田) 등이 없고 승려의 수나 신도가 적은 사찰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사찰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ㄱ) 탁발에서 얻는 곡식과 금전 (ㄴ) 신도들이 사찰에 와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올리는 기제(忌祭) 또는 기도(祈禱)를 올려서 얻는 사례금품 (ㄷ) 사찰부근의 황지(荒地)개간에서 거두어지는 곡식과 품팔이에서 얻어지는 보수 등이었다. 물론 억불책이 강행되어도 궁중에는 대비 · 왕비를 비롯한 궁녀들의 신앙은 변함이 없고 각 사찰에 남아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통하여도 적지 않은 금품이 사찰로 흘러 갔을 것이나 이와 같은 것은 옛부터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몇몇 사찰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찰은 승려와 신도의 힘만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왕실거족 및 지방관의 수탈에 사찰이 능히 견디며 법등(法燈)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승려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기와 환경을 살려 생계를 세우고 그 효과적인 운영으로 저축이 생겼던 것이며 승려 각자의 활동에 따라 승려사유의 재산까지 생겨서 그가 죽은 후는 토지 및 재산의 일부를 소속 사찰에 기증하게 되어 관급의 토지가 없어져도 사찰의 토지가 늘어났던 까닭이다.
《정조와 불교 》
불교의 억압책을 강행하였던 영조에 이어 즉위한 정조도 그의 즉위년 6월에 대사간의 계(啓)에 따라 각 도 사찰의 내원당을 모두 없애게 하고 다시 세우지 못하도록 교(敎)를 내렸던 것이다.[註20] 짓밟힐대로 밟혀 거의 빈사상태에 놓였던 불교가 다시 숨을 돌려 소생의 길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그 후부터 보여 준 정조의 호불적인 경향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 정조는 보종당(寶鐘堂) 사일대사(獅馹大師)를 스승으로 섬겨 유교전성시대의 군주로서는 파격적인 은전을 베출어 자주 왕궁에 불러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9년 5월에는 남한 · 북한의 양산성의 제번징전(除番徵錢)을 종래의 40량에서 20량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이것은 사찰에 대한 관청의 수탈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지고 승려 수도 매년 줄어들어 당초 목표삼던 금액을 거두어 들이기 어렵게 되었던 까닭이며 승려 및 사찰로 보아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정조의 호불(好佛)은 왕이 오랫동안 왕자가 없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한 석왕사(釋王寺)에 이태조가 기증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이 영험이 있다는 것을 듣고 왕비와 더불어 만 3년이나 득남할 것을 기원하여 14년 6월에 그 소원이 이루어지자 이것은 곧 그 영험이라고 믿어 토지를 기증하고 그곳에 세운 감사비에 새겨진 정조의 감사문에 불타의 공덕을 구절마다 극구 찬양하고 있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자의 탄생을 영험있는 불력(佛力)에 기대를 걸어 기도를 올린 것은 비단 석왕사(釋王寺)에서 뿐 아니라 12년에는 중사(中使)를 순천 선암사(仙巖寺)에 보내어 100일의 큰 기도를 올렸던 것이며 세자의 탄생을 보게 되자 20년에는 그 사찰을 이끌던 눌암(訥菴)에게 국일도대선사대각등계홍제존자(國一都大禪寺大覺登階弘濟尊者)의 법호와 자수가사(紫綬袈娑) · 금병풍(金屛風) 및 세자가 쓴 '대복전(大福田)'이라는 글을 내린 바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호불이 가장 잘 나타나 그 영향이 현재의 우리나라 불교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용주사(龍珠寺)의 창건이라고 하겠다. 용주사는 불행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정조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묘지인 현륭원(顯隆園)을 옮겨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년에 창건한 경기도에서도 굴지의 사찰이다.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밟아오던 조선왕조에서도 왕릉(王陵)의 수복사(修福寺)로 세조 · 성종의 봉선(奉先) · 봉은(奉恩)같은 큰 사찰이 세워졌던 것이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각 사찰에 있는 내원당까지도 유신들이 되풀이하여 그 철거를 강력히 주장하여 정조도 즉위년에는 전국적으로 내원당의 철거를 감행하였던 바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럼에도 정조의 용주사 창건에는 전국의 지방관이 이 역사(役事)를 위하여 바친 금액이 80,000량이며 기타 각 사찰에서도 많은 금품들이 거두어져서 이루어졌던 것이다.[註21] 이상과 같이 정조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느모로 보나 호불의 군주였던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당시의 지도층의 주류를 이루어 나라살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던 유신들의 극단적인 억불책 고집은 왕권만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사찰에 대한 수탈도 그대로 성행하였던 것이며 이에 따라 사찰유지의 형태도 적지 않은 변질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변화가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이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의 분리라고 하겠다. 서산대사 이후 한국의 불교는 조계종 계통만을 이어받았으나 참선 · 간경(看經) · 염불의 어느 하나 또는 두 가지를 전문으로 하는 승려로 나누어져 있어 참선과 염불을 일과로 삼고 있는 승려를 수좌(首座)라 하고, 불경의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승려를 강사(講師)라고 하였던 것이다. 수좌나 강사들은 모두 수양과정을 제대로 밟아 자기의 전문분야에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승려들이었으나 속세의 영달이나 도시생활의 번잡을 피하고 깊은 산중에 있는 암자에 들어가 조용히 수양하는 것을 이상적인 생활로 믿었던 것이며 사찰의 관리직이나 대외접촉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따라서 사찰의 주지같은 잡무를 맡아보는 승려들은 거의가 참선 · 간경에는 뜻이 없는 무식하고 제대로 수양을 쌓지 않은 승려들이었다. 민중과의 접촉조차 꺼리고 깊숙한 산속의 암자에서 교리의 연구나 참선을 일과로 삼는 강사와 수좌를 이판승이라 하였고, 주지 등 사찰의 관리직과 외교직을 맡아 세속적인 생활에 젖어있던 승려를 사판승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찰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아 그 운영 및 신도와의 접촉, 외부 특히 관청과의 여러 가지 절충을 맡아보는 이른바 사판승은 대부분이 학식과 수양이 없었던 까닭에 주지같은 것도 일반의 신뢰뿐 아니라 그 지위마저 날로 떨어져 가는 것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나 여기에 겹쳐 직명과 직무의 혼란까지 일어나 그 지위의 타락을 더 촉진시켰다. 즉 서산대사 때까지도 무릇 사찰의 대표자를 주지라 하고 1도(道)의 승정(僧政)을 맡아 지휘감독하는 승려를 승통(僧統)이라 하고 전국의 승정을 모두 맡아보는 승려를 총섭(摠攝)이라고 하여 그 위계질서가 뚜렷하였으며 또 1도의 승정을 처리하는 곳을 도내규정소(道內糾正所)라 하였고 전국의 승정을 다스리는 곳을 국내규정소(國內糾正所)라고 하여 사찰자격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정조 이후는 이와 같은 직무의 위계와 사찰자격의 질서가 무너져 일반사찰에서도 다투어 자기사찰도 도내규정소 또는 국내규정소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주지의 직명에 만족하지 않고 승통을 두었다가 곧 총섭을 두는 등 함부로 그 위의 직명을 쓰는 풍조가 일어나 원래의 주지 또는 승통이 지녔던 직책상의 권위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승정을 맡아보던 총섭도 고작 1사찰의 주지와 같은 것으로 그 권위가 떨어졌다. 이에 1사찰의 대표가 되는 승려의 직명은 도내도승통(道內都僧統) ·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같은 훌륭한 것이 되었으나 그 반면에 사찰의 대표된 승려들이 모두 사판승이었기에 학문과 수행이 높은 이판승을 자주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일반민중의 승려에 대한 존경심이 엷어지는 경향을 낳게 하였다.[註22] 그러나 극심한 불교억압책이 강행되던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있어서도 능히 한국의 불교가 법등(法燈)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초기에 있어서 유식자층을 상대로 하였던 시대와 달리 불교가 왕실과 고관의 부녀 및 일반대중을 상대로 종교의 명맥을 이어야 하였던 시대에 있어서 이판승보다 오히려 사판승의 능숙한 속무(俗務)처리와 대외활동에 힘입었던 것이 컸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로는 정조 20년 7월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중수(重修)하는데 있어서 국가가 공명첩을 발급하여 그 비용에 충당케 하는 등 유교가 국가의 정신기반인 것을 강력히 내세웠던 조선왕조로서는 있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게 하기까지는 그 이면에 사판승의 능숙한 대외활동도 적지않게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공명첩(空名帖)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을 적어넣지 않은 일종의 사령장(使令帳)이며 벼슬이름은 하급의 무직(武職)이나 돈많은 평민이 이를 사면 거기에 자기이름을 적어넣고 평민이 쓸 수 없는 탕건을 쓰게 되는 형식적인 매관(賣官)이었다. 그것이 비록 형식적인 매관이었고 또 표훈사와 신륵사가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었다 하더라도 예조판서의 계에 따라 250장의 공명첩이 이 사찰수축을 위하여 발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코 보통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을 일이었다.
《순조 이후의 한국불교 》
조선왕조의 황금시대였다고 할 수 있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순조가 겨우 11세로 즉위하자 영조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후견하여 정무를 처리하게 되면서부터 왕조의 운명은 기울어져 가는 현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순조의 비가 안동김씨였던 까닭에 그 일족을 중심으로 나라의 정치가 처리되는 이른바 세도정치시대가 나타났으며 밖으로는 정조초부터 민간에 퍼지게 된 천주교가 사대부간에도 번져 당시에 있어서 정교(政敎)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주자학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순조 6년 9월에는 교서판교(校書判校)가 서북지방 즉 평안 · 황해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폐단을 열거하는 가운데 '승려들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들어 있는[註23] 것을 보면 혹독한 탄압과 수탈을 겪으면서도 일부의 사찰이 계(契) 또는 개간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넓혔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왕실의 호불(好佛)과 이에 대한 유신(儒臣)들의 경계라는 조선왕조를 통하여 여러차례 되풀이하여 나타났던 현상은 이 시기에도 없지 않았다. 즉 순조 8년 4월에 예조판서의 말에 신륵사에서 왕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많은 승려들이 먼곳에서 모여들고 있으며 그 비용도 왕실에서 내리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한 데 대하여 순조는 그것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변명하여 금지시켰던[註24] 것이 그 예이다. 또 순조 15년 정월의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의 계(啓)에 선조(先朝)부터 무격(巫覡)과 여승의 서울성안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최근에 와서 다시 거리낌없이 문안으로 출입하며 거의 모든 사찰에는 기도와 재를 올리는 사람이 넘쳐 있으니 벌로서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註25]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종교의 힘은 정치권력으로서도 근절하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을 일관하여 불교탄압을 주장하여 그 방법도 무자비하였던 유신들이 순조말부터 헌종 · 철종대에 걸쳐 불교의 움직임에 대하여 침묵을 지킨 것은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좌도(左道)'에 대한 너그러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천주교(天主敎)의 교세가 날로 퍼지고 철종에 이르러는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민족종교가 기세를 올리게 되어 이것을 막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였던 것이며 짓밟을 대로 밟아 유신들의 눈으로는 거의 거세당한 인간같이 만들어 놓은 불교는 그 정체를 파악못하고 있던 천주교나 동학보다 안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것은 중국의 명말(明末)에 천주교가 전하여져 이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엇갈렸을 때 주자학파인 왕계원(王啓元)이 '불씨(佛氏)는 그것이 우리와 다르지마는 정체를 충분히 알고 있으니'[註26] 천주교와 같이 놓고 말할 수는 없다는 논법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헌종 이후에 있어서의 사찰을 보호하려는 왕실의 열의를 보여 주는 몇 예로서 헌종 12년 4월 11일에 건봉사(乾鳳寺)가 화재를 입게 되자 형식적 매관(賣官)인 공명첩(空名帖) 300장을 발급하여 이를 중수(重修)케 하였고 또 철종 2년의 법주사 중수에 있어서도 대왕대비의 희망에 따라 700∼800장의 공명첩이 발급되었을 뿐 아니라 각 사찰에 잡역면제의 제령(制令) 또는 그 불법적 수탈을 금하는 예조에서의 완문(完文)이 자주 내려졌다. 이 때도 종전과 같은 유신들의 반대의견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비록 불교가 그들의 이른바 '좌도(左道)'인 것이나 그래도 새로 들어온 천주교나 당시 아직도 그 종교의 진리를 파악 못하고 있었던 동학에 비하면 안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였던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헌종 15년 5월에 양주의 여승 창선(昌善)이 불교행사를 한다고 승려들을 모았던 바 이들 승려들이 불상을 메고 향교(鄕校)로 밀어닥쳤던[註27] 하나의 작은 사건을 통하여도 조선왕조 500년간 눌려 오던 승려들의 감정이 잘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선조 25년의 임진왜란 이후부터 철종말까지의 우리나라 불교가 걸어온 자취는 조선왕조의 전반기보다 더 혹독한 억압책에 가시밭같은 험한 길을 밟으며 겨우 법등(法燈)을 이어 내려왔다. 이 시기에 불교계가 겪었던 고된 시련은 승려가 종교가라는 성직자로서의 존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조차 유린되고 사찰이 수양의 도량(道場)이 아니라 관료들의 부당한 가지가지의 명목이 붙은 수탈의 대상 또는 유흥지가 되었던 것은 왕실과 특별한 인연을 가져 다른 사찰에 비하면 조건이 좋았다고 하는 법주사에 예조에서 내린 철종 2년의 완문(完文)을 통하여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즉 승려에 대한 여러 가지 잡역과 군아(郡衙)에서 쓰는 메주를 비롯하여 군(郡) 관리나 향교 서원에서 즐겨 먹는 산과(山果) · 산채(山菜)는 으레 법주사에서 바쳐왔던 것이며 군내 여러 곳의 사대부, 한량(閑良) 과객(過客)들이 들리게 되면 으레 송용(松茸) · 지팡이 · 노끈 · 신 · 산과 · 산채 등을 요구하고 군수나 중앙관청의 관리들이 지나다가 들리면 그 일행의 수가 얼마이던 간에 사찰에서 식사를 베풀어야 하였기에 법주사는 항상 분주하였다는 것이다.[註28]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양주의 여승 창선 등에 의한 향교의 습격사건같은 것도 이 법주사의 완문을 읽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사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반면에 지식층을 대표하는 유신으로부터 소외된 조선왕조 후기의 한국불교가 그 활로를 일반대중의 접촉과 교화로 돌려 대중을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사찰운영과 문화활동에 정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은 오늘날의 우리나라 불교 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전반을 통하여 보아 그 수난기에 놓였던 일시적인 곤궁이 결코 한국불교의 영원한 부진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일부의 견해같이 비관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그 예가 극심한 사찰억압책에 따르는 경제곤궁을 극복하기 위한 사찰의 황무지 개간과 갑계(甲契) · 만일회(萬日會)를 비롯한 조선왕조시대부터 그 활동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 어산계(魚山契) · 미타계(彌陀契) · 사종계(私宗契) · 서청계(書廳契) 등 사찰을 중심으로 승려와 신도간에 이루어진 각종의 계(契)는 그것이 비단 사찰의 유지를 위한 활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식(利息)이 일년에 3∼5부라는 저렴한 이율로 대여되었기에 서민층의 자금순환을 순조롭게 하여 우리의 서민생활에도 이바지한 바 적지 않았다. 사실에 있어서 해방 후의 토지개혁까지는 우리나라의 지주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사찰이었던 것은 역경속에서도 대중을 배경으로 한 승단(僧團)의 이와 같은 자활책(自活策)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과의 접촉에서 일반에게 미친 사상적인 영향력이 가장 잘 나타난 것으로는 조선왕조후기에 나타난 평민을 상대로 한 각종의 한글로 된 대중소설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선왕조의 소설에서 불교사상이 뚜렷이 나타나 유교 · 불교 · 도교의 삼교 중에서 불교의 진리가 으뜸가는 것으로 단언하고 앞에서 좋은 일을 하면 뒤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불교사상으로 엮어나간 숙종대의 진보적인 문인 김만중(金萬重)이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엮은 『구운몽』이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구운몽은 일반 평민이 읽을 수 없는 한자로 되어 있어 한글을 만들 때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는 좀체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나 한글로 된 평민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는 김춘택(金春澤)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현재는 한자본)를 비롯하여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옥루몽(玉樓夢)』 · 『심청전(沈淸傳)』 · 『장풍운전(張風雲傳)』 · 『소대성전(蘇大成傳)』 ·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한자본만 남아 있음)같은 작품에는 모두 불타의 공덕을 중대 요소로 엮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도 민중속에 깊이 파고 들어간 불교의 영향력은 관료들의 행정적인 억압만으로 불교를 이땅에서 뿌리채 뽑을 수는 없었다. 이밖에 조선왕조 후반기에 들어 사찰생활에서 발달을 보게 된 범패(梵唄)와 승무(僧舞) 같은 것도 그 시대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두어야 할 분야이다. 우리나라의 범패(梵唄)는 일찍이 쌍계사(雙溪寺)에서 신라의 진감대사(眞鑑大師)가 그 일파를 개척하여 신라 ·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에 이르러 더 신비한 경지에까지 발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높고 낮은 그리고 때로는 구슬픈 음성으로 시의 귀절을 읊어 민중의 신앙심을 일으키게 하는, 즉 청각을 통한 포교가 신라 · 고려 · 조선왕조 초반기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던 것은 당시의 승려가 대부분 사류(士流) 명문출신이며 포교의 대상도 또 지식계급을 주로 하여 대중에도 미치고 있었던 까닭에 승려가 주로 하는 수양은 불경연구와 선을 배우는데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시대의 후반기에 들어와 지식계급에 대한 포교가 금지되고 그 대상을 극락과 지옥같은 설을 믿는 평민 또는 부녀들을 상대로 하여 종교로서의 명맥을 이어나가야 하는 승단으로서는 그 포교방법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이와 같은 불교측의 노력이 염불의 성행과 더불어 범패도 승려가 배워야하는 분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범패의 성행에 뒤따라 왕조후반기에 들어서 성행을 보게 된 것은 사찰에 있어서의 선풍무(旋風舞)라고 하는 승려의 춤이었다. 이것도 이 때에 비롯한 것이 아니고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나 불경의 연구와 선으로 수양하는 견식있는 승려들은 그것을 꺼렸던 것이어서 그리 성행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찰에 있어서의 승려생활에 무용을 배우는, 즉 불교본래의 정신과는 일치되지 않은 이 승속(僧俗)이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특히 서울부근의 승려간에 성행을 보게 되어 도제(徒弟)들로 하여금 그 학습에 열을 띠게 한 것은 그 사찰의 유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력한 신도가 궁녀나 부유층의 과부등이 많았던 까닭에 이와 같은 신도들의 시각을 통하여 싫증이 나지 않는 방법으로 포교를 하려는 것이었다. 사찰에 있어서의 범패와 승무는 한일합방 후 곧 발포(發布)한 이른바 조선사찰령에 이어 1912년말에 일체 금지되어 이어져 내려오던 범패의 명맥은 끊기고 승무는 겨우 우리나라 고전무용의 일부로서 전하여지고 있다. 그것이 비록 불교본연의 정신과는 어긋나는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민족의 예능면의 창조력이 충분히 발휘된 고귀한 문화적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 주었다는 점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신앙(佛敎信仰)의 역사적 배경》
중국(中國)대륙을 거쳐 4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에 걸쳐 우리 민족의 성장에 활력소가 되어 왔었고 삶의 지혜와 차원 높은 문화를 이 땅에 꽃피워 열매를 맺게하는 원천이 되어 왔다는 것은 종교적 파벌을 초월하고 누구나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즉 생성(生成)과 파멸(破滅)이 수레바퀴 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 우주의 냉엄(冷嚴)한 법칙(法則)을 우리 인류도 또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여 체계화(體系化)한 불교의「무아관(無我觀)」의 깊은 철학이론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 속에 깊이 뿌리 박아 향가(鄕歌)를 비롯한 문학과 그 찬란한 미술을 통하여 남김없이 발휘되고 있다. 또 「무아관(無我觀)」의 불교철학을 바탕으로 전개된「끝없는 자비의 힘」의 윤리덕목에서 역설된「인류의 일체평등」의 도덕관은 미성숙단계에 있었던 고대의 우리 민족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자주독립의 정신을 일으켜 우리의 역사를 높은 도덕을 바탕으로 전개시켜 왔었다. 특히 불교에서의 자주 독립정신은 우리 선조들의 국가관를 종교의식으로까지 승화시켜 잦았던 외침(外侵)에도 국토수호의 원동력을 배양하여 왔던 것은 우리 역사의 어느 구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불교 중심의 역사적 전통이 무너지게 된 것은 조선왕조가 강행한 이른바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 이후부터 였다. 우리나라의 문화면에서 본다면 고려말기에 들어와 조선왕조에서 정교(政敎)의 중심과제로 받들게 된 주자학(朱子學)의 저변 확대는 오히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주자학(朱子學)만을 내세워 인류만이 누릴 수 있는 종교가, 그것도 1000여년이나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은 전 국민의 정신생활의 원천이었던 불교를 정치적으로 말살시키려는 시도는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강행한 500년간의 불교 억압책은 인류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물게 끈덕지고 잔학한 종교탄압이었던 것은 널리 알려지고 있다. 물론 조선왕조에 있어서도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하여 세종, 세조, 명종 같이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도 없지 않았고 또 신미(信眉).보우(普雨) 같은 뛰어난 승려들이 나타나 교세(敎勢)의 확장에 힘썼던 바 있었으나 주자학(朱子學)의 소양을 가진 사대부(士大夫)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그 관료 지배층에 의하여 배불정책이 강행되었던 만큼 불교는 다시 찬란하였던 옛날의 교세(敎勢)를 되찾을 수 없는 형세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컨대 성종에 이르러 취한 도승법(度僧法)의 폐지는 종래 시험에 합격만 하면 누구나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길이 막히게 되었고 다시 연산군 때에 이르러서는 고려 광종 이래 거행되어 내려왔던 승과(僧科)의 제(制)가 정지되어 출가(出家)하는 것은 국법을 범하는 것과 같이 되어버렸다. 연산군을 이은 중종의 배불정책은 더 철저하여 이와 같은 정책이 그대로 지켜 졌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승려와 사찰은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측에서 보아 다행스럽게도 중종에 이어 즉위한 명종은 불교 독신자인 문정왕후(文正王后)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관대하였고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고 있던 보우(普雨)의 불교중흥책으로 조선왕조의 불교는 일시나마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된듯 하였다. 특히 선조대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있어 서산(西山).사명대사(四溟大師)와 같은 승려를 구심력으로 뭉쳐 조직된 승병의 활약에서 왕을 비롯한 일부에 있어서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하여 승단.사원의 조직을「총섭(總攝)」「도총섭(都總攝)」과 같은 군사단위로 하여 산성(山城) 수비, 군사도로의 공역에 활용하게 된 것은 그것이 불교 본연의 자세는 아니지마는 고된 탄압 속에서 가냘프게나마 법등을 이어 나갈수 있는 숨통이 터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위정자들이 결코 승려와 사원의 포교활동을 무제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인조 때에는 승니(僧尼)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하였던 것이며, 동왕(同王) 14년에 있었던 청병(淸兵)의 침입에 있어서 호남(湖南)의 벽암대사(碧岩大師) 각성(覺性)에 통솔된 승병의 눈부신 활동같은 것도 무시되고 현종 원년에는 양민(良民)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고 동(同) 2년에는 서울 안의 여승방과 사찰을 부숴 그 재목으로 서당을 세웠던 것이다. 전국의 사찰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뒤엎었던 것도 이 현종시대의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교 탄압에서도 궁중(宮中) 및 각 지방의 관청이 사찰에게 징납케하는 여러가지 물자는 또 가혹한 것이 있었다. 전국의 사찰에서 차례로 남북한양영(南北漢兩營)을 수비케 하여 승려로서는 고통스러운 이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치는 이른바 음번징전(陰番徵錢) 뿐 아니라 종이(紙役) 백면(白綿), 곡식에서 장방관의 산채(山菜).꿀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 주구(誅求)는 사찰로서는 큰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은 정조 이후 다소 누그러졌으나 그래도 국가의 근본방침이 바뀌어진 것은 아니었다. 순조 이후의 조선말기에 이르러 야소교(耶蘇敎)의 전래, 동학당(東學黨)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위정자들은 사교(邪敎)로 단정하여 탄압하던 이와 같은 종교들에 비하면 불교는 해롭지 않은 종교로서 적극적인 탄압의 강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탄압을 무릅쓰고 한국의 불교가 그 명맥을 이어 나가는데 있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유린되어도 대범하게 견디는 종교적 정열과 인내심이 있어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으나 이밖에도 그 존속을 위하여 자체에서 어떤 적절한 방안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였다. 이제 정조 이후부터 대원군(大院君)이 집권하는 고종 초까지 불교계에서 그 법등을 이어 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의 노력을 살펴보면 (1) 궁중 내의 불교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는데 힘쓰는 것이다. 즉 조선왕조는 공적(公的)으로는 배불정책을 강행하였지마는 궁중에서는 건국 초부터 대비, 왕비를 비롯하여 궁녀는 모두 불교의 독실한 신자이며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성장한 왕들도 뚜렷한 신념이 없는 한 내심으로는 불교를 멀리하지 않고 궁중에서의 신앙을 묵인하는 일이 많았던 형편이었다. 예로서는 북한산(北漢山) 기슭의 진관사(津寬寺) 같은 것은 조선초기에 있어서는 왕궁의 수륙사(水陸社)로 전국에서도 유명하였던 것이나 그 후 거의 폐사로 되어 있었다. 숙종 33년에 이르러 영조의 생모(生母)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녕원(昭寧園)을 여기에 두게 되어 다시 재건되었던 것이다. 특히 금강산(金剛山)의 표훈사(表訓寺), 여주(驪州)의 신륵사(神勒寺) 같이 옛부터 궁중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찰은 왕실에서 적지 않은 보조가 있었던 것이며 헌종 12년에 있었던 건봉사(乾鳳寺)의 재건을 위하여 300장의 공명첩(空名帖)까지 발급하였던 것이다. 공명첩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을 적어넣지 않은 하급관리의 사령장이며 형식적인 매관(賣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찰의 재건, 수축을 위한 공명첩의 발행은 철종 2년에 법주사(法住寺) 중수를 위하여도 700∼800장이나 발행되었던 것이며 이 발행이[註1]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의견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에서도 왕실과 사찰과의 특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석왕사(釋王寺) 같은 것은 태조가 바친 오백나한(五百羅漢)이 영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정조가 왕비와 함께 3년이나 기도를 올리고 토전(土田)을 기부하였던 예도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용주사(龍珠寺) 같이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찰은 그 보호를 받았던 것이나 이와 같은 예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찰은 승려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찰과 불교를 지켜나가야 하였던 것이다. (2) 특수생산물의 개발을 통한 수익이다. 예로는 전라도지방의 일부 사찰이 자기그릇을 만드는 기술을 익혀 전국에 판매하기도 하였으며 통도사(通度寺) 부근의 숭려들이 누룩을 만들어 그 판매망을 넓혔던 것이 그 예이다. (3) 기도, 개간으로 승려들이 사재(私財)를 늘려 그것으로 토지에 투자하고 상좌(上座)를 양성하는 것이다. 승려의 사재(私財)는 그가 죽으면 일부를 상좌(上座)에게 상속시키고 일부는 그 사찰에 기부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사재(私財)의 3분의 2를 사찰에 기부하는 관습이 지켜내려 왔기에 사찰의 토지는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불공전(佛供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밖에 승려가 그 사찰에 바치는 제위전(祭位田)이라고 하는 것은 사후(死後)에 있어서 명복을 빌어줄 것을 바라 바치는 전토(田土)인 것이며 다시 계전(契田)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계전(契田)은 같은 사찰의 승려 중에서 그 생년(生年)의 간지(干支)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갑계(甲契)을 조직하고 매년 일체의 계금(契金)을 모아서 계장(**長)이 금융자금으로 운영하여 이식(利殖)을 늘려 일정한 기간이 되면 원금과 이자를 합한 금액을 사찰에 바치거나 또는 유리한 토지가 있으면 사서 사유재산(寺有財産)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범어사(梵魚寺)가 전국에서 부유한 사찰로 손꼽히게 된 것은 이 갑계(甲契)의 발전에 따라 계전(契田)이 많았던 까닭이다. 범어사(梵魚寺) 뿐 아니라 통도사(通度寺)에도 매년 추수가 2,000석이 넘어 이 양사찰(兩寺刹)의 움직임에 따라 도내(道內)의 쌀값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밖에 염불계(念佛契)라는 것이 있어 그 사찰의 신도 또는 신도와 승려가 힘을 합쳐 계(契)을 조직하여 계전(契田)을 사서 염불당(念佛堂)의 유지비에 충당하는 것이다. 사찰 안에서의 생활비가 거의 필요치 않을 정도의 검소한 생활에 다시 이와 같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늘어가는 승려의 사유재산과 그 사유재산의 사원귀속(寺院歸屬)으로 어떤 탄압이 있더라도 사원(寺院)만은 살쪄 나갔던 것이다. 정부의 보호 아래 여러 곳에 세워진 서원(書院).향교(鄕校)가 비생산적인 모임이며 그 경제적 뒷받침이 극히 미약했는데 비하면, 현종 때에 전국 사원의 토지가 거의 몰수되어 경제면에 있어서도 큰 시련을 겪게된 사찰의 이와 같은 부흥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고종 초에 있어서의 전국 900여 사찰이 지닌 토지의 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25년의 통계에는 수전(水田) 1,996만 2,461평, 한전(旱田), 1,435만 5,999평, 기타의 소유토지 (택지 포함) 3,545만 6,496평으로 과세가격(課稅價格)이 약 607만 3,500원(圓)이었다. 이 밖에 산림(山林)이 약 40만정보나 되었다. 일본의 한국병합 이후 15년이 지난 통계이나 일본의 한국통치 15년간에 있어서도[註2] 사찰의 재산관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극심한 불교탄압에도 사찰의 부유화가 지속되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기의 아시아 여러나라의 정세는 급속도로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유럽국가들은 기계의 힘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품의 판매로를 생업의 대부분을 농업과 농촌의 문아적(文雅的)인 수공업(手工業)의 생산단계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아시아로 눈을 돌려 밀려 닥치고 있었다. 이른바 아편전쟁의 비극적인 패전으로 1842년에 청(淸)이 굴욕적인 조건으로 영국과 맺게된 남경조약(南京條約) 이후의 중국은 구미(歐美) 여러나라에 정치, 외교, 군사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까지 침식되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국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전통문물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서구(西歐)의 기계문명을 모델로 하는 이른바 근대화를 위하여 몸부림치게 되었다. 한편 무사지배(武士支配)형태의 지방분권제도를 지켜오던 일본도 미국의 폐리제독이 이끄는 군함에서 발사한 몇발의 대포소리에 무릎을 꿇어 1854년부터 굳게 닫고 있던 문호(門戶)를 열어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근대화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19세기 후반기부터 아시아국가들이 겪게된 고된 시련은 우리 한반도도 모면할 수는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조선왕조가 겪었던 두드러진 변화를 내적으로 본다면 유교일존(儒敎一尊)에서 벗어나 천주교(天主敎)같은 외래종교의 신앙과 민중의 자각을 들 수 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중국에서 선교하던 신부들이 한자로 번역한 천주교의 윤리, 과학서적은 선조, 광해군시대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이것이 일부 학자와 사상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쳐왔었다. 예컨대 김석문(金錫文)이 처음으로 공전(公轉)이 없는 자전(自轉)만의 지동론(地動論)을 내세워 100년 후의 홍대용(洪大容)의 설로 일반에게 믿어지게 된 것도 이 천주교를 통한 서양의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었다. 또 이익(李瀷)의 중국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당시 천주교를 통하여 받아들인 서구(西歐) 천문학과 지리의 지식에서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은 구형(球形)이기에 어느 나라나 자기가 있는 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에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천주교의 지식은 학문적인 호기심과 지식욕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신앙과는 결부되지 않았다. 천주교가 한국에서 종교로서 믿어지게 된 것은 정조 7년(1783)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서양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많은 서적을 얻어 돌아와 주로 남인(南人) 신진파에게 영향을 미친 후부터이다. 이 천주교의 전래(傳來)와 그 무자비한 신유사옥(辛酉邪獄)(1801),기해사옥(己亥邪獄)(1839) 같은 대탄압은 국사(國史)에서 널리 알려져 있어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조선왕조 500년간 정교(政敎)의 중심과제였던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지켜 그 진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 사회에 천주교가 전래되자 순식간에 그 교세(敎勢)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유학의 가르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시대로 진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보다도 옛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을 도덕시하는 상고주의(尙古主義),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엄격한 신분계층의 고수, 물질에 대한 지나친 소외, 중국 중심의 세계관 등 유학이 지닌 특징은 이미 낡은 사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 특히 사회생활의 실천윤리이며 내세(來世)에 대한 설명이 없는 유학은 종교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한편 오랜 당쟁과 정치 사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참아오던 민중의 자각은 마침내 순조 11년(1811)에는 홍경래(洪景來)의 난, 그리고 철종 13년(1862)에는 진주(晋州)를 비롯한 영남.호남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민란의 기세를 뭉쳐 종교로 승화시켜 체계를 세운 동학(東學)의 민중운동은 눈부신 바 있었다. 즉 이 동학운동(東學運動)을 종교로 승화시킨 최제우(崔濟愚)가 한국 고유의 천신사상(天神思想), 기도의식에 유(儒).불(佛).선(仙) 삼교(三敎)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항할 수 있는 종교체계를 발상한 것은 또 유교만으로는 서학(西學)과 겨룰 수 없기에 불교(佛敎)도 유교(儒敎)와 같은 위치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어 억눌려만 오던 불교계로서는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이제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이와 같은 경향에서 보아 범어(梵魚), 통도사(通度寺)같은 대사찰(大寺刹)을 비롯하여 승려수가 항상 150에서 200명을 넘는 대사찰이 적지않으며 넓은 토지를 가지고 그 지역에서 특수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불교에 대하여 이제 정부의 힘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명말(明末)의 중국에서 이마두(李麻竇)(Matteo Ricci)를 비롯한 천주교신부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그 수용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철저한 주자학파(朱子學派)인 왕계원(王啓元)이 생리적으로는 불교가 싫었지마는 그래도 천주교와 비교하여 「불교는 이해할 수 있으나 천주(天主)의 설은 무엇을 하려는 속셈인지 알 수 없다」고 천주교를 미워한 나머지 불교의[註3] 앙을 두둔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기의 우리 조정이나 사대부층(士大夫層)에서는 서학(西學)이나 동학(東學)에 비하면 전래된지 1,500여년이나 되어 민중깊이 뿌리박고 있는 불교는 비록 생리적으로 못마땅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의 안전을 꾀하기 위하여 불교 교세(敎勢)의 확대와 같은 것은 덮어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관리서(管理署)와 각황사(覺皇寺)》
19세기의 후반기부터 조선왕조는 불교에 대하여 종래와 같이 탄압적인 방법만으로 임할 수 없었던 내면적인 사정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나 이외에 외국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 자극받아 불교 탄압책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의 근대화작업은 아시아제국(諸國)에서도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어 그 팽창의 돌파구로서 한반도에 눈을 돌렸으며 이후의 우리나라는 일찌기 청국과 일본이 영(英). 미(美)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문호을 열어 국교를 맺게 되었던 때와 같이 나라안의 각 분야에 많은 혼란을 겪어야 하였던 것이다. 강화도에서 일본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고종12) 결과 고종 13년에는 부득이 일본과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맺게 되어 굳게 지켜 오던 쇄국정책은 무너지고 외환(外患)은 끊일새 없게 되었다. 고종 16년(1879)에는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천연정(天然亭))에 처음으로 일본의 가공사(假公使)가 두어지고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가 차례로 굳게 닫았던 문을 열게 되었다. 특히 고종 18년(1881)에는 박정양(朴定陽), 어윤중(魚允中) 등 10여명이 일본을 방문하여 그 문물제도를 시찰하는 이른 바 신사유람단이 파견되었고 또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삼아 69명의 청년학도들이 청국 천진(天津)에 가서 모든 새 기계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등 일본과 중국을 통한 외국의 신문화 수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개화운동의 싹이 트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을 모방하여 개화하느냐 또는 청을 모방하여 나가느냐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 고종 19년에서 22년 사이에 미(美) · 영(英) · 덕(德) · 노(露) · 이(伊) · 법(法)의 여러 나라와도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무렵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화를 주장하던 개화당의 활동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모방하려는 일파와 불교와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것이 있었다. 개화운동의 선각자로 알려진 한의출신(漢醫出身) 유대치(劉大致)가 선학(禪學)을 즐겼을 뿐 아니라 그의 영향을 받아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주동역할을 하였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이종원(李淙遠), 역관(譯官)인 오경석(吳慶錫) 등이 모두 거사(居士)로 자처하여 선풍(禪風)이 서울에서 성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註4] 불교탄압이 극심하였던 현종시대의 명신(名臣) 정두경(鄭斗卿), 숙종시대의 김만중(金萬重)을 비롯하여 불교를 숭배하던 지식층은 그 후도 김정희(金正喜) 이충후(李忠**)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나 호되고 끈질긴 탄압에 못이겨 산간으로 밀려 나가 겨우 법등을 이어 오던 조선왕조의 불교가 개화파의 개혁이념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주목되며 장래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특히 개화파와 뜻을 같이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활동에 적지않은 활동을 하였던 이동인(李東仁)과 강원도 백담사(百潭寺) 출신의 탁정직(卓挺埴)(법명 무불(無不)), 그리고 차홍식(車弘植) 같은 승려가 있었다는 것은 자칫하면 보수적으로만[註5]보기 쉬운 불교가 어떤 시대를 맞이하여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체계를 가진 교리의 깊이가 있었던 까닭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개화운동의 진전 과정에서 승려 또는 불교를 깊이 이해하는 지도층의 활동 때문에도 당시의 위정자로서는 불교를 절대로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불교정책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은 고종 32년 4월에 이르러 승려의 도성 출입의 금지를 해제하는 조처였다. 인조 원년에 승니(僧尼)의 서울출입 및 기마(騎馬)의 금지가 있었던 후부터 270년간에 걸친 이 문제는 다시 정조에 이르러도 되풀이 강행되었던 것이 이제 해제되어 승니(僧尼)도 이제는 자유로이 서울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처는 당시의 위정자가 자발적으로 취하려는 노력의 자취도 없지 않았으나 그 보다도 일본의 일련종(日蓮宗) 승려 좌야전려(佐野前勵)가 김윤식(金允植)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권고한 것이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과의 통상수교와 공사관의 설치 후부터 일본거류민의 포교를 빙자하여 그 교세(敎勢)를 한반도에 확장시켜 식민지정책을 원활히 하려고 일본에서 파견된 각 종파의 승려들이 자유롭게 서울을 출입하며 서로 암약을 하고 있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자기 나라의 승니(僧尼)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가 일본승려의 권고로서 겨우 그 금령(禁令)을 해제하였다는 것은 딱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이 승니(僧尼)의 도성출입 해금(解禁)은 그로부터 3년 후인 광무 2년(1898)에는 다시 경무사(警務使)의 영(令)으로 백지화되었던 것이니 국가의 정책이 경무사(警務使)의 일시적인 발령으로 뒤집어졌다는 것에서도 조선말기의 행정상의 헛점이 엿보인다. 이 경무사령(警務使令)은 곧 해제되었으나 정부에서는 불교정책에 대한 어떤 뚜렷한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광무 3년(1899)에 이르러 전국의 승려와 사찰에 관한 통제를 체계적으로 집행하기 위하여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초등학교가 세워진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한국불교의 대법산(大法山)으로 하며 여기에 도섭리(都攝理) 1인과 내산섭리(內山攝理) 1인을 두었다. 도섭리(都攝理)는 종교의 행정을 총괄하는 경무원장(京務院長)과 같은 것이며 내산섭리(內山攝理)는 서울 부근의 사찰을 통할하여 감독하는 총책임자이다. 도섭리(都攝理) 외에 다시 내산섭리(內山攝理)를 두었던 것은 서울 부근의 사찰이 궁녀 또는 양반의 내실과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특별히 다루어져야 하였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국 각도에서는 각각 1개소의 수사찰(首寺刹)을 두어 도내(道內) 사찰의 사무를 총괄케 하였다. 이어 광무 6년 4월 11일에 이르러서는 고종의 칙령으로서 궁내부(宮內府) 소속의 사사관리서(社寺管理署)를 두어 권중석(權重奭)을 관리(管理)로 임명하고 전국의 사찰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고 동년 7월에는 36개조로 된 사찰령을 공포하였다. 이 사찰령의 내용은 광무 3년에 있었던 서울의 대법산(大法山)과 각도(各道)에 두게된 중법산(中法山)을 두어 승정(僧政)을 통할한 대전환의 취지를 칙령으로 밝혀 사찰과 승려를 국가의 관리에 두려는데 있었다. 이 사찰령에서 대법산(大法山)과 각도(各道)에 두게된 중법산(中法山)을 적어 보면 대법산:원흥사(元興寺)(서울 동대문 밖) 중법산(中法山):봉은사(奉恩寺)(경기좌도(京畿左道) 광주(廣州)) 봉선사(奉先寺)(경기우도(京畿右道) 양주(楊州)) 용주사(龍珠寺) (경기남도(京畿南道) 수원(水原) 마곡사(麻谷寺)(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公州)) 법주사(法住寺)(충청북도(忠淸北道) 보은(報恩)) 송광사(松廣寺)(전라남도(全羅南道) 순천(順天)) 금산사(金山寺)(전라북도(全羅北道) 금구(金溝)) 해인사(海印寺)(경상우도(慶尙右道) 합천(陜川)) 동화사(桐華寺)(경상좌도(慶尙左道) 대구(大邱)) 통도사(通度寺)(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梁山))) 월정사(月精寺)(강원남도(江原南道) 강릉(江陵)) 유첨사(楡岾寺)(강원북도(江原北道) 고성(高城)) 석왕사(釋王寺)(함경남도(咸鏡南道) 안변(安邊)) 귀주사(歸州寺)(함경남도(咸鏡南道) 함흥(咸興)) 보현사(普賢寺)(평안도(平安道) 영변(寧邊)) 신광사(神光寺)(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등 대법산(大法山) 1, 중법산(中法山) 16개소의 사찰이었다. 대법산에는 좌교정(左敎正), 우교정(右敎正), 대선의(大禪儀), 상강의(上講儀), 리무(理務), 도섭리(都攝理) 등의 직(職)을 두어 국내 승정(僧政)을 맡아 보고 중법산에는 도교정(道敎正), 부교정(副敎正), 선의(禪儀), 강의(講儀), 섭리(攝理) 등의 직을 두어 도내(道內)의 승정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이밖의 여러사찰은 이것을 해사(該寺)(말사(末寺)라고 칭하여 주지(住持)를 보내어 그 사찰을 운영케 하였다.[註6] 불교의 탄압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대변화는 이 사찰령 제13조에 보이는 사찰의 신축(新築), 중수(重修), 폐합(廢合)에 관한 조항, 제19조의 좌교정(左敎正) 이하 각 해사(該寺)의 승직에 대한 사령서의 발행자에 관한 조항, 제23조의 승려의 도첩발행에 관한 조항, 제27조의 사찰토지에 대한 규정, 제29조 사찰 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기관으로서의 학교 설립에 관한 조항과 제30조의 관원들의 사찰에 대한 토색주구(討索誅求)를 엄금한 조항을 들 수 있다. 즉 사찰령(寺刹令) 제13조에서 금지되어 내려왔던 사찰의 신축이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좌교정(左敎正) 이하의 각 승직에 대한 사령서는 사사관리서(社寺管理署)에서 발급한다는 제19조는 명종 20년에 승과(僧科) 및 양종(兩宗) 폐지 이후 통제 없는 상태로 방임되어 있던 승려의 신분을 국가행정의 테두리 안에 끌어넣어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23조의 승려의 도첩 발행에 관한 조항은 성종이 도첩법을 폐지한 이후 조선왕조때 굳게 지켜 내려오던 방침이 무너져 누구에게도 합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며, 제27조와 제30조는 사찰과 승려사유의 재산의 구분을 밝혀 사찰의 재산은 공유물(共有物)로서 정부의 감독과 보호를 받게 하였고 종래와 같이 중앙 또는 지방관리들이 제멋대로 토색(討索).주구(誅求)하는 행위를 금하여 그러한 행위가 있을 때는 관에 고소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특히 학교의 설립에 관한 제29조의 조항은 당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설립에 많은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사사관리서(社寺管理署)의 설치와 사찰령의 발포(發布)는 조선왕조가 지켜오던 불교탄압책을 버리고 사찰보호책으로의 대전회(大轉回)였던 것이나 기대할 만한 성과가 곧 있을 수는 없었다. 이에 광무 8년 1월에는 관리서(管理署)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내부관방(內部官房)으로 옮겨 동년 2월에는 칙령 제15호로서 사찰에 관한 사무는 내부 지방국(地方局)에서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법산인 원흥사(元興寺)만은 그대로 두어 대법산으로서의 승정(僧政)을 하고 있었으나 융희 2년(1908)에 전국 사찰의 승려 대표자 52명이 원흥사(元興寺)에 모여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세워 승무(僧務)를 통할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국가의 행정력을 통하여 불교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설치된 사사관리서(社寺管理署)의 폐지는 이 기구의 설치와 더불어 발포된 사찰령(寺刹令) 36조의 충실한 시행에도 많은 차질이 있었던 것은 말 할것도 없었다. 때마침 청말(淸末)의 중국에서는 서구를 모델로 하는 근대화작업의 진전과정에서 유(儒).불(佛).도교(道敎) 등의 전통문화에 대한 저주감을 보이는 풍조가 성행하여 사찰(寺刹).도관(道觀) 등의 시설을 신식교육을 위한 설비로 전용(轉用)하는 이른바 「묘산흥학(廟産興學)」이 주장되고 또 강행되고 있었다. 이 경향은 이 무렵의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지방관리들에 의한 사찰토지의 침탈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광무 10년(1906)에 있었던 사례만 보더라도 음성군수(陰城郡守) 박준설(朴準卨)의 성주사소유지(聖住寺所有地) 침탈(3월), 강화군(江華郡) 보창학교장(普昌學校長) 이동휘(李東暉)의 진해사토지(鎭海寺土地) 및 적석사(積石寺) 소유의 전답(田畓) 침탈(5월), 황주군수(黃州郡守) 박원교(朴元敎) 및 강서군수(江西郡守)의 봉유토지(奉有土地)의 학교병속(學校倂屬)(4월)을 비롯하여 양주(楊州) 수락사(水落寺), 고원군(高原郡)의 대승사(大乘寺), 김화군(金化郡)의 수태사(水泰寺)가 소유하던 토지가 침탈되어 홍월초(洪月初), 나승호(羅勝湖)가 내부(內部)에 사찰재산의 보호를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었다.[註7] 그러나 이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던 광무 10년에 원흥사(元興寺)에 근대학문을 아울러 학습하는 유능한 승려의 교육을 위하여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세워져 전국 사찰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승려를 선발하여 근대식 교육활동을 하게된 것은 광무 6년의 사찰령(寺刹令) 제29조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융희 4년(1910)에는 서울시내 북부 박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새로이 지어서 한국불교중앙포교소(韓國佛敎中央布敎所)로 하였다. 연산군시대에 서울에 있던, 흥천(興天).흥덕(興德)의 양대찰(兩大刹)을 헐어버린 이후 400여년만에 다시 서울의 중심부에 새로이 사찰이 세워진 것도 광무 6년의 사찰령에서 사찰의 신축도 허용되는 조문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아 광무 6년의 사사관리서(社寺管理署)의 설치와 또 이와 더불어 발포된 36조의 사찰령은 그것이 비록 지속성과 충실한 시행에 대한 의문은 있다 할지라도 한국 불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융희 2년에 전국 사찰의 승려 대표자회의의 결의로 세워진 원종(圓宗) 종무원(宗務院)은 당시의 한국불교가 선종(禪宗)이나 교종(敎宗)의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 불교가 아니고 참선(參禪).간경(看經).염불(念佛)을 모두 '원수(圓修)'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름붙인 종명(宗名)이며, 초대 종정(宗正)으로 전 해인사주지(海印寺住持) 이회광(李晦光)을 추대하였던 것이다.
《일본불교(日本佛敎)의 야욕과 원종(圓宗)》
조선왕조의 개항(開港)에 이어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에 일본의 가공사관(假公使**)이 세워진 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본상인과 관리들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일본 각 종파(宗派)의 승려들이 재빨리 건너와 배불정책(排佛政策)을 지키고 있었던 당시의 조선왕국에서 포교에 혈안이 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세워진 국수주의적 색채가 짙은 일련종(日蓮宗) 같은 것은 이미 고종 18년(1881)에 도변월운(渡邊月運)이 부산에 와서 일련종회관(日蓮宗會館)을 세우고 이어 원산, 인천, 서울, 진남포, 군산, 함흥 등에도 사원을 세워 한국학생 150여명을 모아 교육하고 한국인 회원 180여명을 신자로 하였다. 또 대곡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의 오촌원심(奧村圓心)도 부산에 건너와 서울, 목포, 군산, 진남포, 개성, 신의주에 포교소를 세워 포교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개화운동의 지도자인 유대치(劉大致), 개화파 승려 이동인(李東仁) 등과도 접촉을 가졌었다. 이밖에도 조동종(曹洞宗), 정토종(淨土宗), 진종(眞宗)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등 일본의 각 파 승려들이 제각기 그 종파의 교세확장에 분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 승려들의 포교활동이 그들이 내세우던 바와 같이 순수한 일본거류민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었다면 그리 문제 삼을 바 없는 것이다. 광무 9년 11월에 일본의 강압적 수단으로 맺어진 이른바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굴욕적인 조약에 따라 조선왕조는 이름만의 정부이고 정치 외교의 실권이 일본인의 통감부(統監部)에 넘어가자 통감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의 사찰을 모두 빼앗으려는 흉계가 각 파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즉 광무 10년 11월의 통감부령(統監部令) 제45호 제4조에서 일본의 각 종파(宗派)의 관리자 포교사 또는 기타의 일본국민으로서 「한국사원의 관리의 위촉(委囑)에 응(應)하려 할 때」는 이미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통감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라고 되어 있는 것은 통감부에서 일본인의[註8] 한국사찰병합(韓國寺刹倂合)을 종용한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일본의 각 종파 중에서도 정토종개교원(淨土宗開敎院)과 진종별원(眞宗別院)의 한국사찰에 대한 병합 흉계는 가장 노골적이었던 것이며 한국에서 가장 거찰(巨刹)인 통도사(通度寺)에도 동사(同寺) 학림(學林)에 초빙받은 정토종(淨土宗) 승려가 정치세력을 배경삼아 실권을 쥐게 되자 이 거찰(巨刹)을 정토종(淨土宗)의 말사(末寺)로 하려고 음모하다가 추방된 사건까지 있었다. 당시 불교지도자 중에서 봉원사주지(奉元寺住持) 김우운(金優雲), 화계사주지(華溪寺住持) 김월해(金越海) 등과 같은 승려가 종래와 같은 각 사찰별의 포교방식을 고집하여 불교의 근대적인 체제개편을 반대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일본불교의 동태에 깊은 의혹을 가지고서의 반동적인 태도였다. 이 시기에 전개된 일본승려에 의한 한국사찰의 병합 또는 말살의 음모에서 가장 음험하며 거의 성공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은 무전범지(武田範之)에 의하여 추진된 조동종(曹洞宗)의 암약이었다. 무전범지(武田範之)는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한반도와 중국대륙 침략을 획책하는 침략주의자들의 민간단체인 현양사(玄洋社)의 무리들과 천우협단(天佑俠團)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각지에서 선동을 일삼다가 송환되어 투옥되었다가 다시 다음 해에는 공사(公使) 삼포오루(三浦梧樓)에 발탁되어 한국에 들어와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을 꾸며내어 일본 광도(廣島)감옥에 투옥되었던 철저한 침략주의 앞잡이로서 악명높은 승려였다. 그가 다시 한국에 들어와 일진회(一進會)의 간부들과 접촉이 잦았던 것이나 한국불교의 말살에 깊이 파고 들어오게 된것은 일진회(一進會) 이용구(李容九)의 추천으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고문(顧問)이 되면서 부터이다. 무전범지는 경쟁상대인 일본의 진종(眞宗)이나 정토종(淨土宗)같은 종파의 종지(宗旨)가 선종(禪宗) 중의 단일파만 남아있게 된 당시의 한국불교의 종지(宗旨)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쉽사리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일본의 다른 종파에 비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원종 종무원 초대 종정 이회광(李晦光)을 배후에서 회유하여 왔던 것이다. 이 무전범지의 감언에 말려든 이회광(李晦光)은 조선왕조가 겨우 지니고 있던 명목마저 끊긴 이른바 일제강점의 다음 달인 1910년 9월에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대표자격으로서 72사찰의 위임장을 얻어 조동종(曹洞宗)과의 합종(合宗)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의 일본 조동종관장(曹洞宗管長)은 석천소동(石川素童)이었던 것이나 조동종(曹洞宗)과의 「연합(連合)」을 주장하는 이회광과 한국불교가 아직은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할 만큼 되어있지 않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조동종에 종속(從屬)할 것을 고집하는 석천소동(石川素童)과의 의견이 맞섰으나 「연합」으로 결정하고 10월 6일에 이회광(李晦光)과 조동종 종무(宗務)대표자 홍진열삼(弘津悅三)이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조약 7조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회광과 홍진열삼이 체결한 원종(圓宗) 조동종(曹洞宗)의 이른바 연합7조는 조동종(曹洞宗)의 정치적인 세력을 빌려 원종(圓宗)의 법적인 인가를 총독부로부터 얻자는 것과 조동종이 원종에 고문(顧問)과 교사(敎師)를 파견하고 또 한국의 사찰을 자유로이 조동종의 포교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계약이 성립을 보게 되자 이회광은 귀국하여 일본 조동종과의 계약내용을 밝히지 않고 마치 대등의 관계에서 연합이 성립된 것처럼 꾸며 전국의 대표적인 대사찰을 찾아다니며 이 계약에 대한 찬성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회광이 체결한 일본 조동종과의 계약서 전문(全文)이 알려지게 되자 다음 해인 1911년 봄부터 이 계약이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曹洞宗)에 팔아 넘기는 개종이조(改宗易祖)임을 규탄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즉 전라남도 백양사(白羊寺)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華嚴寺)의 진진응(陳震應), 범어사(梵魚寺)의 한용운(韓龍雲), 오성월(吳星月) 등이 주동이 되어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각 사찰은 모두 이에 호응하여 그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반대파의 논지(論旨)는 한국의 선종(禪宗)이 태고선사(太古禪師)부터 임제종(臨濟宗) 계통의 법맥(法脈)을 이어 내려왔기에 이를 조동종(曹洞宗)으로 개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이회광이 영도하는 원종(圓宗)과는 따로이 임제종(臨濟宗)을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註9] 이 임제종(臨濟宗)의 임시종무원(臨時宗務院)은 처음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두어져 임시관장(臨時管長)으로 전남 선암사(仙巖寺)의 김경운사(金擎雲師)가 선출되었다가 1911년 가을에는 임시종무원의 기구를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로 옮기고 임시관장도 김경운사(金擎雲寺)가 늙어 그 직에 취임하지 않기에 한용운(韓龍雲)이 맡아 보는 등의 변동도 있었으나 원종(圓宗)에 대한 반대의 기세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조동종(曹洞宗)에서는 한반도에까지도 그 교세확장의 기반이 이 원종(圓宗)과의 계약의 충실한 이행으로 굳어질 것이라고 축하하고 있었으나 조선총독부측에서 본다면 조동종(曹洞宗)이 알선하고 있는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인가를 주저치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본의 불교는 한국과 같이 하나의 종파로서 결합할 수 없는 여러 종파의 병립이며 각 종파가 종지(宗旨)을 달리하여 그 교세 확대를 위하여 겨루고 있던 까닭에 새로 영토로 삼킨 한반도에서 조동종(曹洞宗)에만 특혜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한국불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아울러 수업(修業)하는 종지(宗旨)인 것이기에 그 독자적인 형태로 두어야 한다고 내세워 일본의 어느 한 종파에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아 1901년 6월에는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반포하고 다음 달인 7월 초에는 「사찰령시행규칙(寺刹令施行規則)」을 반포하였던 것이다. 총독부에서 내린 이 사찰령은 전국에서 30개 사찰(뒤에는 구례(求禮)의 화엄사(華嚴寺)가 승격되어 31본산(本山)이 됨)을 골라서 이를 본사(本寺)라고 정하고 전국의 900여개 사찰을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며 본사(本寺)가 아닌 이들 사찰을 말사(末寺)라고 한다. 30본사(本寺)는 (경기도) 광주(廣州)의 봉은사(奉恩寺), 양주의 봉선사(奉先寺), 수원의 용주사(龍珠寺), 강화의 전등사(傳燈寺) (충북) 보은(報恩)의 법주사(法住寺) (충남)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 (전북) 전주(全州)의 위봉사(威鳳寺), 금산(錦山)의 보석사(寶石寺) (전남) 해남(海南)의 대흥사(大興寺), 장성(長城)의 백양사(白羊寺) (경북) 대구(大邱)의 동화사(桐華寺), 영천(永川)의 은해사(銀海寺), 의성(義城)의 고운사(孤雲寺), 문경(聞慶)의 금용사(金龍寺), 장계(長**)의 기림사(祈林寺) (경남) 합천(陜川)의 해인사(海印寺),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 동래(東萊)의 범어사(梵魚寺) (황해도) 신천(信川)의 견엽사(見葉寺), 황주(黃州)의 성불사(成佛寺) (평남) 평양(平壤)의 영명사(永明寺),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 (평북) 영변(寧邊)의 보현사(普賢寺) (강원도) 간성(杆城)의 건봉사(乾鳳寺), 고성(高城)의 유첨사(楡岾寺), 평창(平昌)의 월정사(月精寺) (함남)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함흥(咸興)의 귀주사(歸州寺) 등이었다. 광무 6년에 정한바 있었던 각도(各道)의 16수사(首寺)의 약 2배가 된다. 한국불교같이 단일종(單一宗)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본사(本寺)의 관계는 법맥상(法脈上)의 관계가 아니고 사찰행정상의 지배관계이며 행정상 본사(本寺)에 지배받는 말사(末寺)에 있어서는 불평을 가질 수 있었던 조처였다. 그리고 본사(本寺)나 말사(末寺)의 주지(住持)는 그 형식에 있어서는 모두 그 사찰 승려들의 투표로서 선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사(本寺)의 주지는 총독(總督), 그리고 말사(末寺)의 주지는 그 지방의 장관(長官)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사찰에 속한 토지, 삼림, 건물, 귀중품 등의 재산도 총독의 허가없이는 주지가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총독부가 일제강점 직후에 발포한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이라는 것이 얼핏 보아서는 투표로서 선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사(本寺)의 지주는 총독이, 그리고 말사의 지주는 그 지방의 장(長)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게 규정되어 있다. 한국의 사찰에서 주지를 선임하는 방법은 스승이 그 제자 중에서 적임자로 인정되는 사람을 선발하여 후보자라 하는 「사자상전(師資相傳)」 또는 그 사찰의 본사(本寺) 또는 말사(末寺)의 종교상의 결연을 가진 승려들이 서로 협의 하에 가장 덕망있는 사람을 후보자로 하는 「법류상속(法類相續)」과 학덕(學德)이 높은 승려를 종교상의 결연이 없는 다른 사찰에서 모셔오는 「초대계석(招待繼席)」등의 방법이 있었으나 선출된 주지가 관(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일은 없었다. 총독부나 일본인의 지방관에까지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학덕으로 인망을 얻어 지주에 추대되어도 취임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사찰에 속한 토지,삼림, 건물, 귀중품 등의 재산도 총독의 허가없이 지주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른바 한일합병 직후에 발포된 조선사찰령의 주안점(主眼點)은 한국불교를 총독부의 식민지정책이 바라는 노선에 따라 활동하도록 하는데 있었으며 한국불교측에서 보아서는 자주성이 남김없이 짓밟힌 법령이었다. 이밖에도 이 사찰령에 있었서 정한 법식(法式)에 불탄(佛誕), 성도(成道), 열반일(涅槃日)을 기념하는 보본법식일(報本法式日)」,역대 조사(祖師)의 기일(忌日)을 추도하는 조존법식일(祖尊法式日) 같은 불교에서는 마땅히 치루어야 하는 법식일(法式日) 뿐 아니라 일본의 기원절(紀元節), 그 황제의 생신일(生辰日)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같은 축일(祝日)을 축하하는 이른바 축리법식일(祝釐法式日)과 또 춘(春).추(秋)에 있는 황영제(皇靈祭),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같은 그들의 제일(祭日)인 이른바 보은법식일(報恩法式日)을 치뤄야 하였을 뿐 아니라 사찰의 주불(主佛) 앞에는「천황폐하하성수만세(天皇陛下下聖壽萬歲)」라는 패(牌)를 세워 매일 축원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가 관련되어 있는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외국의 전도기관과 관련을 가진 종교기관에는 당시의 일본의 국제적 지위로서는 감히 요구할 수 없는 법식일(法式日)을 한국불교에 강요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문교정책에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획기적인 조처로 자찬(自讚)하던 이른바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은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자주성 뿐 아니라 이미 나라잃은 민족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악법이며 결코 한국의 사찰이나 승려들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이 조선사찰령의 발포로 북의 원종(圓宗)과 남의 임제종(臨濟宗)의 대립은 자연 사라지고 한국불교는 30구(區)(뒤에 31구)로 나뉘어져 30교단(敎團)이 이루어지고 30본사(本寺)의 주지는 동사찰령(同寺刹令) 제3조에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법(社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거쳐 각각 그 본말사(本末寺)를 운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근세불교(近世佛敎)의 영향》
조선왕조에 이르러 불교가 국책(國策)으로 탄압되었고 특히 태종에 이어 세종에 이르러 대사헌(大司憲) 하선(河渲)의 상서(上書)에 의하여 조계(曹溪), 천태(天台), 총남(摠南) 등 3종을 합쳐 선종(禪宗)으로 하고 화엄(華嚴), 자은(慈恩), 신신(申神), 시흥(始興)의 4종을 합쳐 교종(敎宗)으로 하는 강제조처 이후의 한국불교는 교리면의 진전이나 일반에게 미치게 된 사상면의 영향을 크게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모진 탄압 속에서 산간으로 몰려가 겨우 법통을 이어 나가는 것이 고작이며 불교의 생명인 민중과의 접촉을 통한 교화 같은 것도 신라나 고구려시대에 비하여 침체상태로 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조선말기인 고종시대부터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는 순종말까지의 국력이 극히 부진하면서 나라 밖에서 작용하는 힘에 의하여 모든 것이 급속도로 바뀌어져 혼란에 빠진 약 50년간에는 한국의 불교도 그 사상면이나 또는 일반 대중에게 미친 뚜렷한 영향력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이 시기의 한국불교에서 장래에 대하여 한가닥의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생산적인 경제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각 사찰의 토지재산과 유교문화에만 젖어 있었던 당시로서는 교리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치게 되는 장래에 있었서의 영향에 극히 불안감을 느끼게 한 서학(西學)의 전래(傳來)에 자극되어 정부 뿐 아니라 사대부도 점차 불교에 대한 증오감이 사라져 탄압이 누그러졌다는 점이다. 특히 외세의 침입에서 유교만을 받드는 사회의 무능력과 이에 대응할 아무런 조처도 없었던 유교에 대한 일반의 비판은 새삼 불교을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시들어져가는 불꽃같이 보였던 한국불교에도 한가닥 광명(光明)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외침과 내환(內患)에 시달려 전국민이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사상면에서도 전통문화의 권위가 떨어진 뒤에 근대화를 위한 몸부림을 하던 청말(淸末)의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이와같은 정치, 외교, 정신면의 혼란을 극복하여 활약하던 지사(志士)에 담사동(譚嗣同), 장병린(章炳麟), 양계초(梁啓超)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던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혁명운동에서 마음의 불안을 갈아앉히기 위하여도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또 불교윤리에서의 여러 덕목의 원천인 「끝없는 자비의 힘」에서 설명되는 일체의 계급차이의 철폐와 인종의 차별 폐지 같은 주장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하는데는 중국의 전통문화에서의 유교의 윤리관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는 점에서 느끼는 매력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도 불교에서 깊은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던 유대치(劉大致)를 존경하며 그 가르침을 받았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당시에 있어서 신분계층에서 뿐 아니라 그 식견도 높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사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재검토 되어야 하겠다. 이와 같은 조선말기의 우리나라 사상계에서 일어난 가치관의 변화를 살펴보면 고종 32년의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 때에 있었던 승려의 도성출입의 해금(解禁)같은 것도 일반 뿐 아니라 심지어 불교계에서조차 일련종(日蓮宗) 승려 좌야전려(佐野前勵)의 배후작용이 결정적인 이유로 보고있으나[註10] 우리나라에서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졌다는 것을 주인(主因)으로 보는 것이 온당한 해석일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정부측의 불교 인식이 가장 명백히 나타났던 것은 광무 6년에 발포된 사찰령(寺刹令)이었던 것이며 이 사찰령이 우리나라 불교계 뿐 아니라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었다. 즉 이 사찰령에서 인정된 사찰 창신(**新)은 불교탄압에 못이겨 산간에 쫓겨 겨우 명맥만 이어져 내려왔던 우리나라 불교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다시 서울 안에 원흥사(元興寺), 각황사(覺皇寺)가 창건되었을 뿐 아니라 인사동에는 범어사(梵魚寺)에서 3층의 포교당이 세워지게 되었고 다시 경복궁(景福宮) 동쪽인 간동(諫洞)에 석왕사(釋王寺)에서 능인교당(能仁敎堂)을 새로 세우는 등 산간불교는 다시 신라, 고려시대의 옛으로 되돌아가 도성에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자유로이 포교를 하게 되었다.[註11] 당시 원흥사(元興寺)의 창건에 대하여 고(故) 이종욱(李鐘郁)씨의 회고담(回顧談)에 「......지금 내 기억으로는 원흥사(元興寺)는 수백간(數百間) 이상에 달하였다고 생각되며 원흥사(元興寺)에는 사사관리소(서)(社寺管理所(署))가 설치되어 대법산(大法山)으로서의 사무를 보았으며 그 동쪽에 대법당(大法堂)을 짓고 법당의 동쪽에는 노전(爐殿)을, 노전(爐殿)의 동쪽에는 십왕전(十王殿)을, 그리고 법당의 북쪽 그러니까 십왕전의 서쪽에는 영산전(靈山殿)을 각각 지었다. 그때의 토목공사는 조정에서 전국사원(全國寺院)에 영(令)을 내려 아람드리 재목과 많은 승려들을 소집하여 대대적인 규모로 추진하여 완성하였다. 이곳 원흥사에는 전국 사찰에서 선발된 유능한 승려들이 모여 흥학(興學)과 포교(布敎)의 근대화를 위하여 눈부신 활약을 한 바 있다......[註12]」 라고 한 것에서도 억눌려 왔던 불교계에 중흥(中興)의 생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 엿보이고 있다. 특히 이 사찰령에서 한국불교에 허용된 도첩제(度牒制)의 부활과 신식교육(新式敎育)을 위한 학교설립에 관한 조항은 그 후의 우리나라 불교 뿐 아니라 국민교육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첩제도(度牒制度)의 부활로 뜻있는 우수한 청소년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많이 승려신분을 얻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승려에 대한 신분적인 인식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사찰에 흡수된 많은 인재들은 이 사찰령에 의거하여 세워진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前身)인 명진학교(明進學校)에 선발되어 신식교육을 받게 되었다. 광무 10년(1906)에 개교(開校)된 명진학교(明進學校)는 그 초창기에 홍월초(洪月初).이보담(李寶潭) 등의 진보적인 고승(高僧)과 서양수학(西洋數學)의 소화와 교육에 있어 우리나라 수학사(數學史)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명칠(李命七)을 전임교원으로 하고 윤치호(尹致昊), 서광범(徐光範), 어윤중(魚允中), 일본인 정상현진(井上玄眞) 등이 강사로서 교육을 맡아 불교가 가지고 있던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에 관한 지식을 깨우쳐 주었다. 물론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명진학교의 진보적인 교육방침에 불만을 품는 보수파의 세력도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11년에 공포 시행된 조선총독부의 한국불교에 대한 자주성 말살과 민족에 대한 모욕적인 조항에 항의조차 못하는 무기력한 기성세대를 규탄하는 명진학교 학생들의 대립으로 모처럼 세워졌던 이 학교도 운영면에 있어서 결코 만족할만 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폐교(廢校)와 개교(開校)의 악순환과 그때마다 교명(校名)이 바뀌어지고 교육내용도 바뀌어 졌으나 그래도 한국의 불교계가 근대적인 의식을 가지고 불교와 민족의 장래문제까지도 비판하게된 것은 광무 6년에 공포된 사찰령에 따라 명진학교같은 교육기관이 세워진데 힘입었던 바 컸다. 이는 3.1민족운동에 불교측에서 활약하다가 망명 또는 옥고를 치뤘던 신상완(申尙玩), 백성욱(白性郁), 김법린(金法麟), 김대용(金大鎔), 이종욱(李鍾郁) 등이 한국불교의 보수파가 아니고 명진학교 또는 그 후신(後身)인 중앙학림(中央學林)에서 신학문의 교육과정을 밟은 진보파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계동(桂洞)에 거주하던 한용운을 자주 찾아가 그 영향을 받아 불교유신회(佛敎維新會)라는 계몽단체를 조직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사찰령과 총독의 불교정책에 반기를 들고 신성한 종교활동이 관(官)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정교분리론(政敎分離論)을 내걸어 전국승려대회를 소집하여 조선불교총무원(朝鮮佛敎總務院)을 각황사(覺皇寺) 내에 두었던 1921년의 쾌거(快擧)도 중앙학림(中央學林)을 비롯한 학교교육을 통한 승려들이 그 주체세력이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보아도 비록 짧았고 또 그 실행에 있어서도 불만스러운 점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원군집권에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1910년까지의 약 50년간에 조선왕조가 취한 불교보호책이 그 후에 미쳤던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는 없다.
《한말(韓末) 불교계의 동향》
한말 선진열강의 문물이 급속히 전래되자 종교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천주교(天主敎)는 오랜 박해에서 포교의 자유를 얻고, 외국의 선교사 [註1]와 일본 각종의 승려들이 대량으로 들어와서 각기 전교(傳敎)에 힘을 써서 교세확장에 노력하게 되었다. [註2]
그러나 정부는 당시 외세에 의존, 정권유지(政權維持)에 급급하여 민족의 오랜 기반을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배척적인 정책을 취했으며, 심지어는 인조(仁祖) 원년(1623) 이래의「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을 지켜 우리나라 승려들의 서울 출입을 금지하면서 일본승려들에게는 성내출입의 자유와 서울 안에 포교소(布敎所) 설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註3]
이에 서울에 들어와 일본공사관의 보호하에 양덕방(陽德坊)(현 계동(桂洞))에 일련종교무소(日蓮宗敎務所)를 개설하여 한국불교를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으로 개종시킬 것을 목적으로 활약하던 일련승(日蓮僧) 좌야전려(佐野前勵)가 그 한 방책으로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게 우리나라 승려도 입성을 허락해 줄 것을 건의하자 정부는 고종32년(1895)에 이를 허락 [註4]하므로써 기형적이나마 한국불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불교의 세력은 우리나라에 급진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우리 정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하여 불교배척책(佛敎排斥策)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게 되었으며, 교계(敎界)에서도 전국사사(全國寺社)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광무(光武) 3년(1899)에 한국 불교계는 전국사사통일안(全國寺社統一案)을 발의하여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이를 한국의 수사찰(首寺刹)로 해서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를 두고 13동에 각각 하나씩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사찰의 사무를 총할하였다. 그리고 승직(僧職)으로서 도섭리(都攝理) 1인과 내산섭리(內山攝理) 1인을 두었는데, 도섭리는 종무원장(宗務院長)과 같은 것으로서 전국승려의 총 대표자이며, 내산섭리는 서울 부근 사찰의 통독자(統督者)이었다. 또 각 도의 수사에도 1인의 섭리를 두어 도내 사찰의 사무를 맡게 하였다.[註5]
이러한 불교계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광무(光武) 6년(1902)에 사찰의 국가영리를 위하여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고, 36조로 된 사사관리현행총칙(寺社管理現行總則)을 칙령으로 반포하도록하여 전국사찰을 통괄케 하였다. 이로써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中法山) 제도가 실시되게 되었는데 대법산은 국내수사찰(國內首寺刹)로서 원흥사(元興寺)로 삼고, 중법산은 각 도 수사찰(首寺刹) 16개소로 하였다.[註6]
국내 수사찰에는 좌교정(左敎正) 1인 우교정(右敎正) 1인 대선의(大禪議) 1인 상강의(上講議) 1인 이무(理務) 5인 도섭리(都攝理) 1인 감원(監院) 1인 서기(書記) 2인 지빈(知賓) 1인 등의 임원을 두고, 각 도 수사찰(首寺刹)에는 도교정 부교정(副敎正) 강의 섭리 감원 서기 지빈의 역원(役員)을 두었으며, 각 사찰에는 주직(住職) 감원 서기 지빈의 역원을 두었다.[註7]
이로서 오랜동안 전혀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국내의 사찰 및 승려는 국가 행정의 범위 안에서 보호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서와 대법산 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광무 8년(1904) 1월에 폐지되고, 관리서의 소관사무는 내부관방에 옮겼다가 동년 2월에 칙령 제 15호로서 사사(寺社)에 관한 사무는 내부지방국의 주관으로 하게 되었다.[註8]
그후 한국불교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통감부의 간섭을 받고, 이어 1910년 합병조약으로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일제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강행된 사찰령(寺刹令)[註9]등으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당시 외세에 의존, 정권유지(政權維持)에 급급하여 민족의 오랜 기반을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배척적인 정책을 취했으며, 심지어는 인조(仁祖) 원년(1623) 이래의「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을 지켜 우리나라 승려들의 서울 출입을 금지하면서 일본승려들에게는 성내출입의 자유와 서울 안에 포교소(布敎所) 설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註3]
이에 서울에 들어와 일본공사관의 보호하에 양덕방(陽德坊)(현 계동(桂洞))에 일련종교무소(日蓮宗敎務所)를 개설하여 한국불교를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으로 개종시킬 것을 목적으로 활약하던 일련승(日蓮僧) 좌야전려(佐野前勵)가 그 한 방책으로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게 우리나라 승려도 입성을 허락해 줄 것을 건의하자 정부는 고종32년(1895)에 이를 허락 [註4]하므로써 기형적이나마 한국불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불교의 세력은 우리나라에 급진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우리 정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하여 불교배척책(佛敎排斥策)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게 되었으며, 교계(敎界)에서도 전국사사(全國寺社)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광무(光武) 3년(1899)에 한국 불교계는 전국사사통일안(全國寺社統一案)을 발의하여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이를 한국의 수사찰(首寺刹)로 해서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를 두고 13동에 각각 하나씩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사찰의 사무를 총할하였다. 그리고 승직(僧職)으로서 도섭리(都攝理) 1인과 내산섭리(內山攝理) 1인을 두었는데, 도섭리는 종무원장(宗務院長)과 같은 것으로서 전국승려의 총 대표자이며, 내산섭리는 서울 부근 사찰의 통독자(統督者)이었다. 또 각 도의 수사에도 1인의 섭리를 두어 도내 사찰의 사무를 맡게 하였다.[註5]
이러한 불교계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광무(光武) 6년(1902)에 사찰의 국가영리를 위하여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고, 36조로 된 사사관리현행총칙(寺社管理現行總則)을 칙령으로 반포하도록하여 전국사찰을 통괄케 하였다. 이로써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中法山) 제도가 실시되게 되었는데 대법산은 국내수사찰(國內首寺刹)로서 원흥사(元興寺)로 삼고, 중법산은 각 도 수사찰(首寺刹) 16개소로 하였다.[註6]
국내 수사찰에는 좌교정(左敎正) 1인 우교정(右敎正) 1인 대선의(大禪議) 1인 상강의(上講議) 1인 이무(理務) 5인 도섭리(都攝理) 1인 감원(監院) 1인 서기(書記) 2인 지빈(知賓) 1인 등의 임원을 두고, 각 도 수사찰(首寺刹)에는 도교정 부교정(副敎正) 강의 섭리 감원 서기 지빈의 역원(役員)을 두었으며, 각 사찰에는 주직(住職) 감원 서기 지빈의 역원을 두었다.[註7]
이로서 오랜동안 전혀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국내의 사찰 및 승려는 국가 행정의 범위 안에서 보호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서와 대법산 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광무 8년(1904) 1월에 폐지되고, 관리서의 소관사무는 내부관방에 옮겼다가 동년 2월에 칙령 제 15호로서 사사(寺社)에 관한 사무는 내부지방국의 주관으로 하게 되었다.[註8]
그후 한국불교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통감부의 간섭을 받고, 이어 1910년 합병조약으로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일제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강행된 사찰령(寺刹令)[註9]등으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일본불교의 침투(浸透)》
일본불교의 한국침투는 그들이 1875년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으키어 강압적으로 불평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맺은(1876) 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침투에 가장 철저하였던 일본이 그 침략의 방법을 정치 · 경제면에서 뿐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강구하였던 것은 일본불교를 한국에 침투시켜 한국민족을 정신적으로 일본에 예속화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76년 이후 일본의 각 종파 곧 진종(眞宗) · 일연종(日蓮宗) · 정토종(淨土宗) · 진언종(眞言宗) · 조동종(曹洞宗) · 임제종(臨濟宗) 등의 승려들이 대량으로 와서 일본사원을 세워 한국인 신도를 포섭하여 갔던 것이다.[註10]
한국에 최초로 침투한 일본불교는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본원사(本願寺)였다. 1877년에 오촌원심(奧村圓心)이 내한하여 부산에 별원(別院)을 설립한 후 1880년에 장곡득정(長谷得靜)이 원산별원(元山別院), 1884년 중영원룡(重永元龍)이 인천별원, 1890년 정파잠창(井波潛彰)이 경성별원, 1897년 목포에 별원을 설치하고 그 후 군산, 진남포, 개성, 신의주 등에 포교소를 세우고 일본인 거류민자제를 교육하여 자선교사로 빈민을 구제하며, 여인강회(부산)도 설립하였다. 또한 설교소(원산) 행려병인구호소(서울)를 설립하였으며 감옥교회에 착수하여 교세를 신장하였다. 그리하여 1893년에는 오촌원심이 포교의 목적 및 방법에 대하여
한국침투에 가장 철저하였던 일본이 그 침략의 방법을 정치 · 경제면에서 뿐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강구하였던 것은 일본불교를 한국에 침투시켜 한국민족을 정신적으로 일본에 예속화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76년 이후 일본의 각 종파 곧 진종(眞宗) · 일연종(日蓮宗) · 정토종(淨土宗) · 진언종(眞言宗) · 조동종(曹洞宗) · 임제종(臨濟宗) 등의 승려들이 대량으로 와서 일본사원을 세워 한국인 신도를 포섭하여 갔던 것이다.[註10]
한국에 최초로 침투한 일본불교는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본원사(本願寺)였다. 1877년에 오촌원심(奧村圓心)이 내한하여 부산에 별원(別院)을 설립한 후 1880년에 장곡득정(長谷得靜)이 원산별원(元山別院), 1884년 중영원룡(重永元龍)이 인천별원, 1890년 정파잠창(井波潛彰)이 경성별원, 1897년 목포에 별원을 설치하고 그 후 군산, 진남포, 개성, 신의주 등에 포교소를 세우고 일본인 거류민자제를 교육하여 자선교사로 빈민을 구제하며, 여인강회(부산)도 설립하였다. 또한 설교소(원산) 행려병인구호소(서울)를 설립하였으며 감옥교회에 착수하여 교세를 신장하였다. 그리하여 1893년에는 오촌원심이 포교의 목적 및 방법에 대하여
「①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장려하여 가능한 한 물질적 개발에 힘쓸 것.
②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지방저명인사에게 일본을 시찰케 함으로써 일반개발보급을 도모할 것
③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청년을 계발할 것」
②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지방저명인사에게 일본을 시찰케 함으로써 일반개발보급을 도모할 것
③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청년을 계발할 것」
등을 경도본산에 제출하였다. 이 결과로 오촌원심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보조금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1910년에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대거 전도계획을 결정, 실천하였던 것이다.[註11]
일연종은 1881년 도변일운(渡邊日運)이 부산에 일종회당(日宗會黨))입정산묘각사)을 창립함으로써 포교의 문이 열려, 1882년 욱일묘(旭日苗)가 원산에 정각사(頂覺寺)를, 인천에는 묘각사(妙覺寺)를 지어 일연종 포교의 기반을 닦았으며 서울에 호국사 · 경왕사, 진남포에 최승사, 군산에 안국사, 함흥에 일연사를 건립하는 등의 급진적인 포교로 많은 한국인을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1894년에 일연종의 좌야전려(佐野前勵)는 입경하여 한국불교를 일연종으로 개종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승려의 입성해금운동을 실현 시키기도 하였다.[註12] 진종본파(眞宗本派) 본원사는 개항 전부터 관계를 맺어오다가 1877년에는 일본내부경 대구보이통(大久保利通)과 외무경 사도종측(寺島宗側)이 대한개교정책(對韓開敎政策)을 수립하여 본원사관장에게 한국개교를 종용 의뢰한 후부터 크게 전파되었다. 그 후 1905년에는 대곡존보(大谷尊寶)를 조선개교총감으로 하여 대내혜명(大內惠明) 의광준희(依光俊熙) · 대소선륭(大沼善隆) 등이 내한하여 서울에 불교고등학원을 창립하고 서울 · 충무 · 평양 등에 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이 방면의 활동을 개시하였다.[註13]
한편 진언종은 김무순도(金武順導)가 서울에 광운사(光雲寺)를 창립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은 1893년 야상운해(野上運海)가 별개교사(別開敎師)와 함께 서울에 종무소를 세우고 포교했다. 그리고 1910년 일본 임제종파(臨濟宗派)는 묘심사파(妙心寺派)의 포교감리소를 서울 임제사(臨濟寺)에 두고, 보현사(普賢寺)에 교회소를 설치하여 고천대반(古川大盤)이 승려양성을 목적으로 학교를 경영하고 평양의 영명사에 교회소를 설치하였다.[註14]
그리하여 1911년 진종본파 본원사는 20개 포교 및 출장소와 부속사업으로 10개의 교육기관 및 청년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조동종(曹洞宗)은 5개 사찰과 3개의 포교소, 진언종은 1개의 사찰과 2개의 포교소, 정토종은 21개 사찰 및 출장소와 한국인포교를 위해 4개의 출장설교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전국적으로 침투한 일본불교는 그들의 식민지정책과 상당한 관련을 가지면서 확장되었던 것이다.[註15]
이상과 같이 일본불교의 급격한 침투는 한국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다음 세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는 일본불교의 포교대상이 일본거류민만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한국인도 대상으로 한 점이다. 사실에 있어 그들은 한국인을 신자로 하기 위해 갖가지 포교방식을 다 동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인 신도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런 사실은 한 예로 1916년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까지의 4년간 한국내일본불교포교소의 일본인 신도는 104,104명에서 126,689명으로 약 22%로 증가한데 비해 한국인 신도는 6,470명에서 17,869명으로 178%가 증가되고 있다. 또한『조선총독부 시정30년사』에 나타난 사실에 의하면 1930년에는 한국인 신도수가 19,876명인데 비하여 일본인신도수는 306,746명으로 일본인신도가 약50%나 더 증가되어 이 때의 일본불교가 한국불교보다 현저하게 확장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둘째는 한국사찰과 그 소유의 토지가 침탈당하는 것이었으며,[註16]
셋째는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그들의 종지로서 한국불교를 병합하려고 한 점이다.[註17] 이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후(1905) 더욱 심하였다. 1906년 통감부령 제45호 제4조에서는
일연종은 1881년 도변일운(渡邊日運)이 부산에 일종회당(日宗會黨))입정산묘각사)을 창립함으로써 포교의 문이 열려, 1882년 욱일묘(旭日苗)가 원산에 정각사(頂覺寺)를, 인천에는 묘각사(妙覺寺)를 지어 일연종 포교의 기반을 닦았으며 서울에 호국사 · 경왕사, 진남포에 최승사, 군산에 안국사, 함흥에 일연사를 건립하는 등의 급진적인 포교로 많은 한국인을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1894년에 일연종의 좌야전려(佐野前勵)는 입경하여 한국불교를 일연종으로 개종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승려의 입성해금운동을 실현 시키기도 하였다.[註12] 진종본파(眞宗本派) 본원사는 개항 전부터 관계를 맺어오다가 1877년에는 일본내부경 대구보이통(大久保利通)과 외무경 사도종측(寺島宗側)이 대한개교정책(對韓開敎政策)을 수립하여 본원사관장에게 한국개교를 종용 의뢰한 후부터 크게 전파되었다. 그 후 1905년에는 대곡존보(大谷尊寶)를 조선개교총감으로 하여 대내혜명(大內惠明) 의광준희(依光俊熙) · 대소선륭(大沼善隆) 등이 내한하여 서울에 불교고등학원을 창립하고 서울 · 충무 · 평양 등에 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이 방면의 활동을 개시하였다.[註13]
한편 진언종은 김무순도(金武順導)가 서울에 광운사(光雲寺)를 창립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은 1893년 야상운해(野上運海)가 별개교사(別開敎師)와 함께 서울에 종무소를 세우고 포교했다. 그리고 1910년 일본 임제종파(臨濟宗派)는 묘심사파(妙心寺派)의 포교감리소를 서울 임제사(臨濟寺)에 두고, 보현사(普賢寺)에 교회소를 설치하여 고천대반(古川大盤)이 승려양성을 목적으로 학교를 경영하고 평양의 영명사에 교회소를 설치하였다.[註14]
그리하여 1911년 진종본파 본원사는 20개 포교 및 출장소와 부속사업으로 10개의 교육기관 및 청년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조동종(曹洞宗)은 5개 사찰과 3개의 포교소, 진언종은 1개의 사찰과 2개의 포교소, 정토종은 21개 사찰 및 출장소와 한국인포교를 위해 4개의 출장설교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전국적으로 침투한 일본불교는 그들의 식민지정책과 상당한 관련을 가지면서 확장되었던 것이다.[註15]
이상과 같이 일본불교의 급격한 침투는 한국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다음 세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는 일본불교의 포교대상이 일본거류민만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한국인도 대상으로 한 점이다. 사실에 있어 그들은 한국인을 신자로 하기 위해 갖가지 포교방식을 다 동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인 신도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런 사실은 한 예로 1916년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까지의 4년간 한국내일본불교포교소의 일본인 신도는 104,104명에서 126,689명으로 약 22%로 증가한데 비해 한국인 신도는 6,470명에서 17,869명으로 178%가 증가되고 있다. 또한『조선총독부 시정30년사』에 나타난 사실에 의하면 1930년에는 한국인 신도수가 19,876명인데 비하여 일본인신도수는 306,746명으로 일본인신도가 약50%나 더 증가되어 이 때의 일본불교가 한국불교보다 현저하게 확장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둘째는 한국사찰과 그 소유의 토지가 침탈당하는 것이었으며,[註16]
셋째는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그들의 종지로서 한국불교를 병합하려고 한 점이다.[註17] 이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후(1905) 더욱 심하였다. 1906년 통감부령 제45호 제4조에서는
「일본 각 종파 관리자 또는 포교사와 기타의 일본국민으로서 한국사원관리의 위촉에 응하려 할 때는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인가 받도록 한다.」
고 하였다. 이는 실질적으로 통감부에서 일본인의 한국사찰병합을 종용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일본 각 종파 중에서 정토종개원(淨土宗開院)과 진종별원(眞宗別院), 그리고 일연종의 한국사찰에 대한 흉계가 가장 노골적이었다.[註18] 이러한 음모는 한국불교계의 반발로 실패하였으며 이로써 일본불교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일어나게 되었다.
《불교연구회의 개혁운동(改革運動)》
관리서(管理署)가 폐지된 뒤 광무 10년(1906)에 봉원사승 이보담(李寶潭)과 화계사승 홍월초(洪月初) 등이 중심이 되어 낙후된 한국불교의 재건은 흥학(興學)과 포교의 근대화를 기하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여 원흥사에「불교연구회」를 설립하였다.[註20] 그들은 1906년에 내부에「학교를 설치하여 신학문을 연구하는 교육방침을 꾀하겠다」[註21]는 설립청원서를 내어 허가를 받은 뒤 지방 각 사찰에 지부를 두고 신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승려양성을 위하여 원흥사에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세우는 등 전국 사찰에 흥학을 권장하였다. 그들은 일본불교의 발달된 포교조직을 본따 한국불교를 근대화하려고 당시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개교사로 와 있던 정상현진(井上玄眞)으로부터 조언을 받아 불교연구회의 종지를 정토종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불교연구회의 초대회장은 홍월초였으며 이보담이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불교학교인 명진학교교장을 겸직하였다. 그후 1907년에 각 도의 사찰대표자 50여명이 총회를 열었을 때 이보담이 사임하였으므로 이회광(李晦光)이 후임으로 피선되었다.[註22] 그런데 당시 불교연구회는 일본의 각 종파 특히 정토종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일본정토종과 상호 교섭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 관계가 깊어지자 일본정토종의 정상현진이 한국불교를 정토종에 합병시킬 계획을 추진하자 전국 각처에서 반대가 일어나 불교연구회는 약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형세에 밀려 불교연구회는 흐지부지 되고 새로이 원종운동(圓宗運動)이 일어나게 되었다.
《원종개혁운동(圓宗改革運動)》
1908년 3월 6일 전국승려대표 52인이 원흥사(元興寺)에 모여 총회를 열고 종명을 결의하여 원종이라 선포하고 원종종무원을 발족시켰다.[註23] 원종(圓宗)의 성립은 불교연구회가 지나치게 일본정토종(日本淨土宗)의 색채를 탈피하지 못한데 대한, 거국적인 교단을 형성코자 하는 요망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더욱 나아가 조선시대 불교의 종파가 축소되어 7종에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된 이래 연산군 중종 명종을 거치는 동안 종명마저 없어진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제 일본불교의 각종의 활동과 새로운 시대적 자각에 의해서 우리 불교계에서도 종명을 밝힐 필요를 느낀데서 종명을 원종이라 한 것이다. 원종이란 원융무애(圓融無碍)를 뜻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교(敎) · 선(禪)을 원수(圓修)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으로 추대하여 종무를 집행한 원종은 당시 한국불교에 있어서 일종의 통일기관이었다.[註24]
원종종무원 조직은 8개여 부서로 이회광 대종정 밑에 총무에 김현암(金玄庵), 교무부장에 진진응(陳震應), 학무부장에 김보륜(金寶輪) · 김지순(金之淳), 서무부장에 김석옹(金石翁) · 강대연(姜大蓮), 인사부장에 이해명(李海明) · 김구하(金九河), 감사부장에 박보봉(朴普峰) · 라청호(羅晴湖), 재무부장에 서학암(徐鶴庵) · 김용곡(金龍谷), 고등강사 박한영(朴漢永) 등 간부를 선정하였으며, 또한 당시 친일파인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의 추천으로 일본조동종승려 무전범지(武田範之)를 원종고문으로 추대하였다.[註25]
1910년 원종 종무원은 전국사찰로부터 금품을 기부받아 수송동(壽松洞)에 각황사(覺皇寺)를 건립하여 이를 조선불교중앙회회소겸 중앙포교소로 운영하고 기관지「원광(圓光)」을 발간하고 명진학교(明進學校)를 개편하여 불교사범학교로서 흥학에 힘썼다.[註26]
그러나 동년 8월에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그 여파는 한국불교계에도 미쳐 병합책이 도모되게 되었다. 그러한 음모는 일승 무전범지(武田範之)에 의해 원종 이회광과의 사이에서 은밀히 진행되었다.[註27]
그리하여 동년 10월에 이회광은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병합하기 위해 도일했다. 동경에 도착한 이회광은 조동종 관장 석천소동(石川素童)과 협의하여 원종과 조동종과의 연합체맹(聯合締盟)에 합의하고 조동종대표 홍진열삼(弘津說三)과 연합조약 7개조를 체결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註28]
-. 조선전체의 원종사원중(圓宗寺院衆)은 조동종과 완전차(完全且) 영구히 연합동맹하여 불교를 학장할 사.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顧問)를 의속(依屬)할 사.
-.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득(得)함에 간선(間選)의 세를 취(取)할 사.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圖)할 사.
-. 조선원종 원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원(若干員)을 초빙(招聘)하여 각수사에 배치하여 일반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는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할 시(時)는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종무원의 지정하는 곳의 수사(首寺)나 혹 사원에 숙사(宿舍)를 정하여 일반포교와 청년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사.
-. 본 체맹(締盟)은 쌍력(雙力)의 의(意)가 불합하면 폐지 변경 혹 개정을 위할 사.
-. 본 체맹은 기관할처(其管轄處)의 승인을 득(得)하는 일로부터 효력을 발생함.
이상의 불평등한 체약(締約)을 국내의 교계(敎界)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체결하고 귀국한 이회광은 귀국 하자마자 일본정부로부터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얻기에 노력하는 한편 원종산하의 모든 사찰이 단결하고 조동종과의 체맹을 지지하도록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을 역방(歷訪)하면서 조동종과의 조약문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일본 조동종과 대등관계에서 제휴를 협약했다고 선전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이를 찬성했으며 종무원에서도 찬성하는 날인을 받았다.
그러나 조약전문이 원종 종무원서기에 의하여 통도사(通度寺)에 알려지게 되자 전국의 승려들로부터 분연한 반대가 일어났다. 합병의 정치적 대세에 편승하여 한국불교를 일본에 연합시킨 것은 한일합병(韓日合倂) 이상의 매종행위(賣宗行爲)라고 규탄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원종과 조동종과의 맹약(盟約)은 수포로 돌아가고 모처럼의 원종에 의한 불교개혁운동은 약화 좌절되고 말았다.[註29]
원종종무원 조직은 8개여 부서로 이회광 대종정 밑에 총무에 김현암(金玄庵), 교무부장에 진진응(陳震應), 학무부장에 김보륜(金寶輪) · 김지순(金之淳), 서무부장에 김석옹(金石翁) · 강대연(姜大蓮), 인사부장에 이해명(李海明) · 김구하(金九河), 감사부장에 박보봉(朴普峰) · 라청호(羅晴湖), 재무부장에 서학암(徐鶴庵) · 김용곡(金龍谷), 고등강사 박한영(朴漢永) 등 간부를 선정하였으며, 또한 당시 친일파인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의 추천으로 일본조동종승려 무전범지(武田範之)를 원종고문으로 추대하였다.[註25]
1910년 원종 종무원은 전국사찰로부터 금품을 기부받아 수송동(壽松洞)에 각황사(覺皇寺)를 건립하여 이를 조선불교중앙회회소겸 중앙포교소로 운영하고 기관지「원광(圓光)」을 발간하고 명진학교(明進學校)를 개편하여 불교사범학교로서 흥학에 힘썼다.[註26]
그러나 동년 8월에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그 여파는 한국불교계에도 미쳐 병합책이 도모되게 되었다. 그러한 음모는 일승 무전범지(武田範之)에 의해 원종 이회광과의 사이에서 은밀히 진행되었다.[註27]
그리하여 동년 10월에 이회광은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병합하기 위해 도일했다. 동경에 도착한 이회광은 조동종 관장 석천소동(石川素童)과 협의하여 원종과 조동종과의 연합체맹(聯合締盟)에 합의하고 조동종대표 홍진열삼(弘津說三)과 연합조약 7개조를 체결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註28]
-. 조선전체의 원종사원중(圓宗寺院衆)은 조동종과 완전차(完全且) 영구히 연합동맹하여 불교를 학장할 사.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顧問)를 의속(依屬)할 사.
-.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득(得)함에 간선(間選)의 세를 취(取)할 사.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圖)할 사.
-. 조선원종 원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원(若干員)을 초빙(招聘)하여 각수사에 배치하여 일반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는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할 시(時)는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종무원의 지정하는 곳의 수사(首寺)나 혹 사원에 숙사(宿舍)를 정하여 일반포교와 청년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사.
-. 본 체맹(締盟)은 쌍력(雙力)의 의(意)가 불합하면 폐지 변경 혹 개정을 위할 사.
-. 본 체맹은 기관할처(其管轄處)의 승인을 득(得)하는 일로부터 효력을 발생함.
이상의 불평등한 체약(締約)을 국내의 교계(敎界)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체결하고 귀국한 이회광은 귀국 하자마자 일본정부로부터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얻기에 노력하는 한편 원종산하의 모든 사찰이 단결하고 조동종과의 체맹을 지지하도록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을 역방(歷訪)하면서 조동종과의 조약문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일본 조동종과 대등관계에서 제휴를 협약했다고 선전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이를 찬성했으며 종무원에서도 찬성하는 날인을 받았다.
그러나 조약전문이 원종 종무원서기에 의하여 통도사(通度寺)에 알려지게 되자 전국의 승려들로부터 분연한 반대가 일어났다. 합병의 정치적 대세에 편승하여 한국불교를 일본에 연합시킨 것은 한일합병(韓日合倂) 이상의 매종행위(賣宗行爲)라고 규탄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원종과 조동종과의 맹약(盟約)은 수포로 돌아가고 모처럼의 원종에 의한 불교개혁운동은 약화 좌절되고 말았다.[註29]
《임제종(臨濟宗)의 개혁운동(改革運動)》
원종(圓宗) 대종정 이회광(李晦光)의 친일 매종적 처사에 분격한 승려들 중에는 원종 자체도 부정하는 운동을 일으켰다(1910). 1911년 박한영(朴漢永) · 진진응(陳震應) · 한용운(韓龍雲) · 오성월(吳惺月) 등은 영 · 호남의 승려를 모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총회를 열고 한국불교는 원래 임제종(臨濟宗)을 선풍(禪風)이므로 조동종과의 연합은 곧 개종역조(改宗易祖)라고 비난하고 구국의식을 고취함과 함께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다.[註30]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宗務院)을 송광사(松廣寺)에 두고 김경운(金擎雲)을 대리하여 한용운을 임시관장으로 하여 종무를 맡게하였다. 1912년에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2회 총회를 열고 임시 종무원을 범어사(梵魚寺)로 옮겼으며 동래(東來) · 초량(草梁) · 대구 · 서울 등에 임제종 포교당을 세워 종교를 확장하였다.[註31]
이리하여 한국불교는 이회광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원종과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는 임제종의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흔히 이를「원당(圓黨)」 · 「임당(臨黨)」또는「북당(北黨)」「남당(南黨)」이라고도 부르는데 서로 한국불교의 정통을 내세우며 상쟁(相爭)하였다.[註32]
이러한 한국불교계의 분열 · 대립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방관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청원(請願)한 원종 · 조동종간의 체맹인가(締盟認可) 역시 무조건 연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제령 제7호로써 일본의 대한불교정책의 기본법인「사찰령」을 제정 공포하고[註33] 곧 이어 부령 제84호로써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하므로써 이들의 싸움은 흐지부지 되었으며 원종과 임제종의 간판은 철거되고, 결국 한국의 사찰은 자치력을 상실한 채 총독부 지배밑에 예속되게 되었던 것이다.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宗務院)을 송광사(松廣寺)에 두고 김경운(金擎雲)을 대리하여 한용운을 임시관장으로 하여 종무를 맡게하였다. 1912년에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2회 총회를 열고 임시 종무원을 범어사(梵魚寺)로 옮겼으며 동래(東來) · 초량(草梁) · 대구 · 서울 등에 임제종 포교당을 세워 종교를 확장하였다.[註31]
이리하여 한국불교는 이회광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원종과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는 임제종의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흔히 이를「원당(圓黨)」 · 「임당(臨黨)」또는「북당(北黨)」「남당(南黨)」이라고도 부르는데 서로 한국불교의 정통을 내세우며 상쟁(相爭)하였다.[註32]
이러한 한국불교계의 분열 · 대립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방관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청원(請願)한 원종 · 조동종간의 체맹인가(締盟認可) 역시 무조건 연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제령 제7호로써 일본의 대한불교정책의 기본법인「사찰령」을 제정 공포하고[註33] 곧 이어 부령 제84호로써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하므로써 이들의 싸움은 흐지부지 되었으며 원종과 임제종의 간판은 철거되고, 결국 한국의 사찰은 자치력을 상실한 채 총독부 지배밑에 예속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사찰령(寺刹令)과 본산제(本山制)》
1911년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는 일본인 불교학자 도변영(渡邊影)으로 하여금 사원령(寺院令)과 사찰령시행규칙(寺刹令施行規則)을 초안하게 하여, 동년 6월 3일에 제령 제7호로 사찰령(寺刹令), 동년 9월 1일에는 부령 제84호로서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하였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註34]
「첫째, 30개의 본사를 정하여 전국의 1,000여 사찰을 분활 관리케 하고, 본사나 말사(末寺)를 불문하고 독립 사찰이면 반드시 주지(住持)를 두어 사찰을 관리케 하되, 본사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얻어야 하고, 말사의 주지는 각도 도지사의 인가를 얻어 취임케 함으로써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케 하였던 것
둘째, 사찰에 속한 토지, 삼림, 건물, 기타 귀중품 등의 재산을 총독의 허가가 아니면 주지가 임의로 처분치 못하게 한것
셋째, 30개의 본사를 다음과 같이 지정하였다.
봉은사(奉恩寺)(광주) 봉선사(奉先寺)(양주) 용주사(龍珠寺)(수
원) 전등사(傳燈寺)(강화) 법주사(法住寺)(보은) 마곡사(麻谷
寺)(공주) 위봉사(威鳳寺)(전주) 보석사(寶石寺)(금산) 백양사
(白洋寺)(장성) 송광사(松廣寺)(순천) 선암사(仙巖寺)(순천) 대
흥사(大興寺)(해남) 금룡사(金龍寺)(문경) 고운사(孤雲寺)(의성)
은해사(銀海寺)(영천) 동화사(桐華寺)(달성) 기림사(祇林寺)(경
주) 해인사(海印寺)(협천) 통도사(通度寺)(양산) 범어사(梵魚
寺)(동래) 건봉사(乾鳳寺)(간성) 유점사(楡岾寺)(간성) 월정사
(月精寺)(평창) 석왕사(釋王寺)(안변) 귀주사(歸州寺)(함흥) 패
엽사(貝葉寺)(신천) 성불사(成佛寺)(황주) 영명사(永明寺)(평양)
보현사(普賢寺)(영변) 법흥사(法興寺)(순안)」
둘째, 사찰에 속한 토지, 삼림, 건물, 기타 귀중품 등의 재산을 총독의 허가가 아니면 주지가 임의로 처분치 못하게 한것
셋째, 30개의 본사를 다음과 같이 지정하였다.
봉은사(奉恩寺)(광주) 봉선사(奉先寺)(양주) 용주사(龍珠寺)(수
원) 전등사(傳燈寺)(강화) 법주사(法住寺)(보은) 마곡사(麻谷
寺)(공주) 위봉사(威鳳寺)(전주) 보석사(寶石寺)(금산) 백양사
(白洋寺)(장성) 송광사(松廣寺)(순천) 선암사(仙巖寺)(순천) 대
흥사(大興寺)(해남) 금룡사(金龍寺)(문경) 고운사(孤雲寺)(의성)
은해사(銀海寺)(영천) 동화사(桐華寺)(달성) 기림사(祇林寺)(경
주) 해인사(海印寺)(협천) 통도사(通度寺)(양산) 범어사(梵魚
寺)(동래) 건봉사(乾鳳寺)(간성) 유점사(楡岾寺)(간성) 월정사
(月精寺)(평창) 석왕사(釋王寺)(안변) 귀주사(歸州寺)(함흥) 패
엽사(貝葉寺)(신천) 성불사(成佛寺)(황주) 영명사(永明寺)(평양)
보현사(普賢寺)(영변) 법흥사(法興寺)(순안)」
등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사찰의 재산을 임의로 처분치 못하게 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사찰재산의 보호였던 것이나 실제는 사찰의 재산이 비밀리에 항일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그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규제에 따라 한국불교계는 30교구(敎區)로 나누어 30본산제를 규정하고 30본산의 주지는 총독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 본말사를 통활하게 되었다.
일제는 30본산제를 통하여 1,300여 한국사찰을 지배하였으며, 1912년 3월에는 조선승려법계품승례(朝鮮僧侶法階稟承例)를 공포하여 사찰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 반대 여론이 일어났으나 1912년 초에는 서울 각황사(覺皇寺)에서 전국 30본산주지회의가 소집되어 사찰령에 따른 사법(寺法)의 골자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동년 7월 이회광(李晦光)이 주지로 되어 있는 해인사(海印寺)의 사법이 최초로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 사법은 일본승정의 예에 따라 식민통치에 맞도록 총독부가 초안하여 형식상 각 본산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것처럼 한 것이다. 사법은 총칙 · 사격(寺格) · 주지(主旨) · 직사(職司) · 회계(會計) · 재정(財政) · 법식(法式) · 승규(僧規) · 포교(布敎) · 포상(褒賞) · 징계(懲戒) · 섭중(攝衆) · 잡칙(雜則) 등의 13장 100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후 각 본산의 사법은 차례로 제정되었다.[註35]
그리고 동년 6월에는 본산주지회의에서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 각 본산 주지회의원을 구성하였으며,[註36] 이로써 종래 원종(圓宗)과 임제종(臨濟宗)은 통합되어 조선선교양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사찰령은 더욱 철저하게 적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규제에 따라 한국불교계는 30교구(敎區)로 나누어 30본산제를 규정하고 30본산의 주지는 총독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 본말사를 통활하게 되었다.
일제는 30본산제를 통하여 1,300여 한국사찰을 지배하였으며, 1912년 3월에는 조선승려법계품승례(朝鮮僧侶法階稟承例)를 공포하여 사찰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 반대 여론이 일어났으나 1912년 초에는 서울 각황사(覺皇寺)에서 전국 30본산주지회의가 소집되어 사찰령에 따른 사법(寺法)의 골자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동년 7월 이회광(李晦光)이 주지로 되어 있는 해인사(海印寺)의 사법이 최초로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 사법은 일본승정의 예에 따라 식민통치에 맞도록 총독부가 초안하여 형식상 각 본산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것처럼 한 것이다. 사법은 총칙 · 사격(寺格) · 주지(主旨) · 직사(職司) · 회계(會計) · 재정(財政) · 법식(法式) · 승규(僧規) · 포교(布敎) · 포상(褒賞) · 징계(懲戒) · 섭중(攝衆) · 잡칙(雜則) 등의 13장 100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후 각 본산의 사법은 차례로 제정되었다.[註35]
그리고 동년 6월에는 본산주지회의에서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 각 본산 주지회의원을 구성하였으며,[註36] 이로써 종래 원종(圓宗)과 임제종(臨濟宗)은 통합되어 조선선교양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사찰령은 더욱 철저하게 적용되게 되었다.
《삼십본산련합(三十本山聯合)과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
사찰령(寺刹令) 실시 4년만인 1914년부터는 한국불교계에 재건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는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가 조직되고[註37], 본사주지들은 회합하여 30본산(本山)간의 유기적연관을 강화하고, 포교와 교육사업을 공동 일원적으로 행하기 위하여 조선선교양종연합회규(朝鮮禪敎兩宗聯合會規)(24개조)를 제정하였다. 이를 1915년에 총독부가 인가하자 조선선교양종삼십본산연합소를 각황사(覺皇寺)에 설치하고 그 위원장에는 용주사(龍珠寺)의 강대연(姜大蓮)을 선출하였다.[註38] 강대연 등은 각황교당을 연합포교소로 삼아 설법 강연에 힘쓰며, 근대식 교육기관 설치운동을 전개하여 동년 7월에는 지방학림(중학과정)과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이어서 30본산 및 기타 2사(화엄사, 천은사)에 출자금(기부) 4,092원으로서 중앙학림을 설립, 근대적인 포교전도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불교근대화에 기초를 마련하였다.[註39]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에 이른바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포교의 자유를 빼앗고[註40] 1919년 3 · 1독립운동 후에는 중앙학림을 강제 폐쇄하므로서 불교재건사업은 빈번히 좌절되었다.[註41]
1920년대에 신사조(新思潮)의 영향을 받은 청년승려와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승려들은 30본산제와 그 연합제규(聯合制規)의 불합리를 들고 일어나 좀더 강력한 중앙통제체의 재편성을 촉구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불교청년회(뒤에 불교유신회)를 중심한 신진소장의 승려들이 주동이 되어 정교의 분립과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였다.[註42]
이러한 움직임들에 의하여 1920년의 년말 주지총회에서 삼십본산연합사무소를 종무원(宗務院)으로 체제를 바꾸기로 합의하여, 1921년 초에 총독부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사찰령에 위배된다하여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신진승려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교단 자체내의 자각 등으로서 전국사찰을 총괄할 중앙통제기구로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중앙총무원이 각황사에 설치되었다.(1922년 1월). 그러나 30본사 주지들 가운데는 총무원(總務院)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나서, 많은 본사가 총무원에 가담하지 않고 다른 기구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을 별도로 설립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1922년 12월). 이 두 기구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다툼이 계속되었으나 1925년 양원은 하나로 뭉쳐져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되었다. 그리고 1929년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종헌(12장 31조), 교무원규(7장 19조), 종회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조선불교 교정 7명(김환응(金幻應), 서해운(徐海雲), 박한영(朴漢永), 이용허(李龍虛), 김동선(金東宣), 김경운(金擎雲), 방한암(方漢岩))을 선출하여 종내최고원로기관으로 하고, 의결기관으로 종회를 두었고, 종회는 각 본말사평의 원회에서 뽑은 종회의원(宗會議員)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사무기관으로서 중앙교무원에는 서무부, 재무부, 교학부를 두었다. 또 1930년에는 종헌(宗憲)에 따라 교육법, 승려법, 포교법 등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리하여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은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註43]
1914년에는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가 조직되고[註37], 본사주지들은 회합하여 30본산(本山)간의 유기적연관을 강화하고, 포교와 교육사업을 공동 일원적으로 행하기 위하여 조선선교양종연합회규(朝鮮禪敎兩宗聯合會規)(24개조)를 제정하였다. 이를 1915년에 총독부가 인가하자 조선선교양종삼십본산연합소를 각황사(覺皇寺)에 설치하고 그 위원장에는 용주사(龍珠寺)의 강대연(姜大蓮)을 선출하였다.[註38] 강대연 등은 각황교당을 연합포교소로 삼아 설법 강연에 힘쓰며, 근대식 교육기관 설치운동을 전개하여 동년 7월에는 지방학림(중학과정)과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이어서 30본산 및 기타 2사(화엄사, 천은사)에 출자금(기부) 4,092원으로서 중앙학림을 설립, 근대적인 포교전도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불교근대화에 기초를 마련하였다.[註39]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에 이른바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포교의 자유를 빼앗고[註40] 1919년 3 · 1독립운동 후에는 중앙학림을 강제 폐쇄하므로서 불교재건사업은 빈번히 좌절되었다.[註41]
1920년대에 신사조(新思潮)의 영향을 받은 청년승려와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승려들은 30본산제와 그 연합제규(聯合制規)의 불합리를 들고 일어나 좀더 강력한 중앙통제체의 재편성을 촉구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불교청년회(뒤에 불교유신회)를 중심한 신진소장의 승려들이 주동이 되어 정교의 분립과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였다.[註42]
이러한 움직임들에 의하여 1920년의 년말 주지총회에서 삼십본산연합사무소를 종무원(宗務院)으로 체제를 바꾸기로 합의하여, 1921년 초에 총독부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사찰령에 위배된다하여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신진승려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교단 자체내의 자각 등으로서 전국사찰을 총괄할 중앙통제기구로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중앙총무원이 각황사에 설치되었다.(1922년 1월). 그러나 30본사 주지들 가운데는 총무원(總務院)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나서, 많은 본사가 총무원에 가담하지 않고 다른 기구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을 별도로 설립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1922년 12월). 이 두 기구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다툼이 계속되었으나 1925년 양원은 하나로 뭉쳐져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되었다. 그리고 1929년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종헌(12장 31조), 교무원규(7장 19조), 종회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조선불교 교정 7명(김환응(金幻應), 서해운(徐海雲), 박한영(朴漢永), 이용허(李龍虛), 김동선(金東宣), 김경운(金擎雲), 방한암(方漢岩))을 선출하여 종내최고원로기관으로 하고, 의결기관으로 종회를 두었고, 종회는 각 본말사평의 원회에서 뽑은 종회의원(宗會議員)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사무기관으로서 중앙교무원에는 서무부, 재무부, 교학부를 두었다. 또 1930년에는 종헌(宗憲)에 따라 교육법, 승려법, 포교법 등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리하여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은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註43]
《조계종(曹溪宗)의 성립(成立)》
전국 30본산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은 그 교단사무를 중앙교무원에서 총괄하였지만, 선명한 종명(宗名)과 특징있는 종지(宗指) 그리고 좀더 강력하고 유기적인 중앙통제적인 체제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헌(宗憲)을 비롯한 제법규를 제정하고 종내최고의 원로기관인 교정(敎正)과 의결기관인 종회(宗會)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서 그들은 근본적인 어떤 개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총본산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4년 봄에는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을 조계종(曹溪宗)이라고 결정하였다. 일제의 사찰령(寺刹令) 이후 지금까지 조선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명을 조계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계종이란 한국재래선종의 전통적인 명칭이었으며 특히 신라말부터 전래된 선법(禪法)이 고려에와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한 이래 그 총칭적인 종명으로 고려일대를 걸쳐 조선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1941년 4월「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의 인가를 얻었는데, 태고사 사법(寺法)은 전16장 130조로서 총칙, 사격(寺格), 주지(住持), 종정, 종무(宗務), 종회, 감사(監査), 재무(財務), 법식(法式), 승규(僧規), 포교(布敎), 교육, 단도(檀徒) 및 신도(信徒), 상벌(賞罰), 잡칙(雜則), 부칙(附則)으로 되어 있다. 제1세 종정(宗正)에 한암(漢岩) 중원(重遠)이 취임하고 종무고문 6인과 종무총장에 이종욱(李鍾郁)의 명단을 발표하고, 종무원에는 종무총장 밑에 서무부, 교무부, 재무부의 부서를 두었다. 또 종회법(宗會法), 승규법(僧規法) 등을 제정 발표함으로써 조계종의 이름아래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의 사찰과 승려가 총결속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내려오던 조선불교조계종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 조계종으로 자세를 재정비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되었던 것이다. 1945년 10월에는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일제의 사찰령과 지금까지의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 결의함으로써 한국불교는 식민지적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발전을 약속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註44]
《항일구국불교운동(抗日救國佛敎運動)》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민족문화를 유린하면서 식민정책 가운데 가장 악랄한 사찰령을 공포하여 한국불교를 탄압 말살하려 하였다.
이에 한국불교 지도자들은 굴하지 않고 일어나 민족 고유의 전통불교를 수호 발전시키기 위해 항일구국의 불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註45]
첫째는 선학(禪學)에 기반을 두어 전통불교를 수호하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경허대사(鏡虛大師)를[註46] 비롯 신혜월(申慧月), 방한암(方漢岩), 송만공(宋滿空) 등이 전개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간교한 탄압 속에서도 고사찰(古寺刹)을 중건 수호하며, 그 산간을 떠나지 아니하고 수행정진과 오도능행(悟道能行)으로 부당한 침입을 방어하려고 노력했으며 신방(新房)을 중심으로 인재양성과 중생교화, 그리고 신풍(新風)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활약하였다. 오늘의 불교문화재 그리고 불교정신은 이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둘째는 교학(敎學)의 전통을 기반으로 민족 고유의 불교문화를 근대화,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이는 박한영(朴漢永),[註47] 이능화(李能和),[註48] 권상노(權相老),[註49] 김영수(金映遂)[註50] 등이 전개하였다. 그들은 구국의 길은 한국불교문화를 근대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저서를 통해 국학개발을 서두르며 강학(講學)과 교육에 전념하여 신진학도를 배양 항일구국에 앞장서게 하였으며, 박한영은 『해동불교』(海東佛敎)(1913년 창간)와 『불일지』(佛日誌)(1924년 창간), 그리고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계』(1916년 창간)화 『조선불교최서』(1917∼1920년), 권상노(權相老)는 『조선불교월보』(1912∼1913년) 및 『불교지』(1924∼1933년) 등의 불교대중지를 간행하여 대중교화와 민족정신 함양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註51]
세째는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을 들 수가 있다. 한용운(韓龍雲), 박한영, 백용성(白龍城)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들은 일제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해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사회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불교개혁운동을 일으키어 조국의 수호와 불교발전을 기하려 하였다.
사회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한용운(1879∼1944)[註52]은 합병과 동시에 만주로 건너가 환인현(桓仁縣)의 동창학교와 흥경현(興京縣)의 흥경학교 등의 의병학교를 성원하면서 독립운동의 뜻을 세웠다. 그는 1919년에 3 · 1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손병희(孫秉熙)(천도교), 이승훈(李承薰)(기독교), 백용성(白龍城)(불교) 등의 지지를 받고 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채택케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이때 조선독립이유서(朝鮮獨立理由書)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이에 한국불교 지도자들은 굴하지 않고 일어나 민족 고유의 전통불교를 수호 발전시키기 위해 항일구국의 불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註45]
첫째는 선학(禪學)에 기반을 두어 전통불교를 수호하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경허대사(鏡虛大師)를[註46] 비롯 신혜월(申慧月), 방한암(方漢岩), 송만공(宋滿空) 등이 전개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간교한 탄압 속에서도 고사찰(古寺刹)을 중건 수호하며, 그 산간을 떠나지 아니하고 수행정진과 오도능행(悟道能行)으로 부당한 침입을 방어하려고 노력했으며 신방(新房)을 중심으로 인재양성과 중생교화, 그리고 신풍(新風)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활약하였다. 오늘의 불교문화재 그리고 불교정신은 이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둘째는 교학(敎學)의 전통을 기반으로 민족 고유의 불교문화를 근대화,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이는 박한영(朴漢永),[註47] 이능화(李能和),[註48] 권상노(權相老),[註49] 김영수(金映遂)[註50] 등이 전개하였다. 그들은 구국의 길은 한국불교문화를 근대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저서를 통해 국학개발을 서두르며 강학(講學)과 교육에 전념하여 신진학도를 배양 항일구국에 앞장서게 하였으며, 박한영은 『해동불교』(海東佛敎)(1913년 창간)와 『불일지』(佛日誌)(1924년 창간), 그리고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계』(1916년 창간)화 『조선불교최서』(1917∼1920년), 권상노(權相老)는 『조선불교월보』(1912∼1913년) 및 『불교지』(1924∼1933년) 등의 불교대중지를 간행하여 대중교화와 민족정신 함양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註51]
세째는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을 들 수가 있다. 한용운(韓龍雲), 박한영, 백용성(白龍城)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들은 일제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해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사회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불교개혁운동을 일으키어 조국의 수호와 불교발전을 기하려 하였다.
사회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한용운(1879∼1944)[註52]은 합병과 동시에 만주로 건너가 환인현(桓仁縣)의 동창학교와 흥경현(興京縣)의 흥경학교 등의 의병학교를 성원하면서 독립운동의 뜻을 세웠다. 그는 1919년에 3 · 1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손병희(孫秉熙)(천도교), 이승훈(李承薰)(기독교), 백용성(白龍城)(불교) 등의 지지를 받고 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채택케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이때 조선독립이유서(朝鮮獨立理由書)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오호(嗚呼)라 국(國)을 실(失)한지 십개(十個) 성상(星霜)을 경(經)하고 독립을 선언한 민족이 독립선언(獨立宣言)의 이유(理由)를 지(至)하려는 실(實)로 심통(沈通)과 자괴(自愧)를 금(禁)치 못하리로다. 독립의 이유(理由)는 차(此)를 회종(回種)에 분(分)하리라」
이것은 첫째 민족의 자존성, 둘째 조국사상, 세재 자유주의, 네째 대세계(對世界)의 의무 등[註53]을 들고 한민족의 독립이 역사와 세계대세로 보아 불가피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는 한용운의 불교이념에 입각한 초종단적(超宗團的)인 독립정신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일제는 민족적 투지를 꺾기 위해 투옥중 참회서와 굴복서를 요구하였으나 끝내 불복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한용운은 불교의 혁신을 꾀하여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1909년에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神論)을 발표하여 승려교육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보통학교, 사범학교, 외국유학 순으로 시키고, 진리를 현상세계에서 발견케 하며, 심중의 선(禪)은 사선(死禪)이니 생활 속에서 활선(活禪)을 찾자고 하였다. 그리고 사원은 도시에 건설하여 사회 속에 포교를 함과 동시에 승려는 공양물에 의존하지 말고 경제적 자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 등을 역설하다.
1910년 그는 승려가취(僧侶嫁娶)의 자유를 공식화 해 줄 것을 건의하여 대처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문제로 견해를 달리하는 박한영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1913년 일제의 한국불교 예속화의 앞잡이가 된 이회광(李晦光) 일파를 종문난적(宗門亂賊)이라 하여 성토했으며 임제종(臨濟宗) 운동도 전개하였다. 1924년 이후에는 조선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어 정교분립(政敎分立)과 사찰령폐지 등의 투쟁을 하였고 1930년에는 최범술(崔凡述), 김법린(金法麟) 등의 청년승려들이 조직한「만자당(卍字黨)」의 비밀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1년에는『불교』지의 편집을 인계받아 일제의 불교정책을 비판하고 많은 저서를 발표하는 등 수 많은 사회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註54]
박한영(1890∼1945)[註55]은 강원(講院)에서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항일불교근대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정교(政敎)분립운동으로 총독부의 간섭을 배제시키고, 친일승 이회광이 원종(圓宗)을 일본조동종과 체맹(締盟)하자 분연히 일어나 이를 매종행위(賣宗行爲)이라고 규탄, 저지시켰다. 그리고 불교유신을 내세워 승려에게 재래의 참선위주의 산간불교에서 탈피해서 현실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생활불교를 하도록 역설했으며, 1913년에는『해동불교』2집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하였다.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한용운은 불교의 혁신을 꾀하여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1909년에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神論)을 발표하여 승려교육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보통학교, 사범학교, 외국유학 순으로 시키고, 진리를 현상세계에서 발견케 하며, 심중의 선(禪)은 사선(死禪)이니 생활 속에서 활선(活禪)을 찾자고 하였다. 그리고 사원은 도시에 건설하여 사회 속에 포교를 함과 동시에 승려는 공양물에 의존하지 말고 경제적 자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 등을 역설하다.
1910년 그는 승려가취(僧侶嫁娶)의 자유를 공식화 해 줄 것을 건의하여 대처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문제로 견해를 달리하는 박한영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1913년 일제의 한국불교 예속화의 앞잡이가 된 이회광(李晦光) 일파를 종문난적(宗門亂賊)이라 하여 성토했으며 임제종(臨濟宗) 운동도 전개하였다. 1924년 이후에는 조선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어 정교분립(政敎分立)과 사찰령폐지 등의 투쟁을 하였고 1930년에는 최범술(崔凡述), 김법린(金法麟) 등의 청년승려들이 조직한「만자당(卍字黨)」의 비밀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1년에는『불교』지의 편집을 인계받아 일제의 불교정책을 비판하고 많은 저서를 발표하는 등 수 많은 사회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註54]
박한영(1890∼1945)[註55]은 강원(講院)에서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항일불교근대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정교(政敎)분립운동으로 총독부의 간섭을 배제시키고, 친일승 이회광이 원종(圓宗)을 일본조동종과 체맹(締盟)하자 분연히 일어나 이를 매종행위(賣宗行爲)이라고 규탄, 저지시켰다. 그리고 불교유신을 내세워 승려에게 재래의 참선위주의 산간불교에서 탈피해서 현실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생활불교를 하도록 역설했으며, 1913년에는『해동불교』2집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하였다.
「① 가짜 계정혜(戒定慧)를 제거하고 진짜 계정혜를 수증(修證)할 것
② 자리사덕(自利私德)만 좇지 말고 이타공덕(利他公德)을 함양 육성할 것
③ 고루한 사문적(沙門的) 훈화(訓話)에 힘쓰지 말고 학교를 일으켜 지식보급, 영재양성에 힘쓸 것
④ 이름뿐인 포교를 지양하고 성심으로 포도(布道)하여 법력을 선양할 것
⑤ 산업을 일으켜 일신과 가람의 유지책(維持策)을 강구할 것
⑥ 자선사업(병원, 고아, 교육, 빈민구제)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실천할 것」
② 자리사덕(自利私德)만 좇지 말고 이타공덕(利他公德)을 함양 육성할 것
③ 고루한 사문적(沙門的) 훈화(訓話)에 힘쓰지 말고 학교를 일으켜 지식보급, 영재양성에 힘쓸 것
④ 이름뿐인 포교를 지양하고 성심으로 포도(布道)하여 법력을 선양할 것
⑤ 산업을 일으켜 일신과 가람의 유지책(維持策)을 강구할 것
⑥ 자선사업(병원, 고아, 교육, 빈민구제)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실천할 것」
박한영은 1914년에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 그리고 1926년에 개운사(開運寺)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하여 강사로 있으면서 영재 지도양성에 힘썼으며,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교장으로 취임, 불교이념에 입각한 근대민족교육에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한편 그는 1920년에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1928년 10월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교정으로 선출되고, 해방 후 1945년에 한국불교조계종 초대 교정에 추대되어 불교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註56]
끝으로 전술한 두사람 못지 않게 불교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백용성(1864∼1940)이었다.[註57] 그는 3 · 1운동 때는 한용운과 동조한 33인중의 한사람이 되어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옥고를 치렀으나 한용운과는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용운의 승려취처건의(僧侶娶妻建議)에 대하여는 앞장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위한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종사하였다. 또 더 나아가 승려의 생산노동참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몸소 광산업에 손을 대기도 하였으며, 선농일치(禪農一致)를 부르짖으며 함양의 자운산에서 감과 밤 10,000여주를 재배하기도 하고, 간도(間島)의 연길(延吉)에서 15년 동안 경작에 종사하여 반농반선사상(半農半禪思想)을 실제 체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註58]
사회참여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사업과 외국유학을 크게 일으키어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이다.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이용하여 전국 1,300여사찰과 73개 이상의 선원(禪院)과 50개의 강원(講院) 그리고 근대식 학제인 전문학교 1, 중학교(보성고등학교 등) 5, 보통학교 20이상, 지방학림 10, 전문강원 47개와 이밖에 유치원, 일요학교, 야간강습소 등을 경영, 근대민족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여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또한 중국, 일본, 독일, 불란서 등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註59]
한편 그는 1920년에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1928년 10월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교정으로 선출되고, 해방 후 1945년에 한국불교조계종 초대 교정에 추대되어 불교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註56]
끝으로 전술한 두사람 못지 않게 불교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백용성(1864∼1940)이었다.[註57] 그는 3 · 1운동 때는 한용운과 동조한 33인중의 한사람이 되어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옥고를 치렀으나 한용운과는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용운의 승려취처건의(僧侶娶妻建議)에 대하여는 앞장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위한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종사하였다. 또 더 나아가 승려의 생산노동참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몸소 광산업에 손을 대기도 하였으며, 선농일치(禪農一致)를 부르짖으며 함양의 자운산에서 감과 밤 10,000여주를 재배하기도 하고, 간도(間島)의 연길(延吉)에서 15년 동안 경작에 종사하여 반농반선사상(半農半禪思想)을 실제 체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註58]
사회참여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사업과 외국유학을 크게 일으키어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이다.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이용하여 전국 1,300여사찰과 73개 이상의 선원(禪院)과 50개의 강원(講院) 그리고 근대식 학제인 전문학교 1, 중학교(보성고등학교 등) 5, 보통학교 20이상, 지방학림 10, 전문강원 47개와 이밖에 유치원, 일요학교, 야간강습소 등을 경영, 근대민족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여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또한 중국, 일본, 독일, 불란서 등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註59]
불경간행과 그 연구
광복 후 한국 불교학계의 업적을 요약하여 정리해 본다면 우선 기초적인 문헌자료의 출판, 불교교리의 연구, 불교사(佛敎史)의 연구, 불교미술에 대한 연구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문헌자료의 출판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으로는 동국대학교에서 영인간행(影印刊行)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들 수 있다. 고려대장경의 영인간행사업은 장경(藏經)의 보존과 보급을 목적으로 1957년 9월부터 그 첫권이 발간되어 그 후 1961년 3월까지 총 16권 62,469판을 영인간행하였다. 한편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는 1958년에서 1960년에 걸쳐 동국대학교 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등 귀중한 불교의 경전을 영인 축소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종교와 철학에 관한 교양서적도 출판한 동국대학교 출판부는 1959년 8월부터 1961년 4월까지 7권의 교수들의 전문적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중 불교와 관계된 것으로는 1959년 8월에 이동림(李東林)의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필두로 하여 1960년 3월에는 조명기(趙明基)의『불교문화사』,김잉석(金芿石)의『화엄학개론(華嚴學槪論)』등이 출판되었다. 이보다 앞서 1949년에 동국대학교 불교사학연구실(佛敎史學硏究室)에서는『원효대사전집(元曉大師全集)』을 10책으로 펴내 불교학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밖에도 주요 경전의 출판으로는『선생경(善生經)』『유마힐경(維摩詰經)』『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반야심경(般若心經)』『미륵성전(彌勒聖典)』『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범망경(梵網經)』『수능엄경(首**嚴經)』『천수경(千手經)』『관음경(觀音經)』『목연경(目蓮經)』『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등의 경전이 출판되었고 강원(講院)의 교재용으로『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치문(緇門)』등이 출판되었으며 운허 용하스님의『불교사전』이 1961년 법보원(法寶院)에서 출판되기도 하였다. 둘째, 불교의 교리연구에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는 동국대학교에 대학원이 설립되고 1956년 3월에 석사학위 제1호를 수여받은 안계현(安啓賢)의「팔관회고(八關會攷)」를 필두로 하여 1956년 9월에는 우정상(禹貞相)의「원각사탑파(圓覺寺塔婆)의 사상적 연구」가 나오고 다음 1957년에는 황성기(黃晟起) · 이재창(李載昌)이 각기「화엄교학(華嚴敎學)의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고려대장경을 중심으로 한 이조초기(李朝初期) 대일관계(對日關係)」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후 1958년에는 최성봉(崔成鳳)의「회암사지(檜巖寺址) 조사연구」의 논문이 나왔다. 한편 당시 교수직에 있던 김동화(金東華)는 『서울대학교 논문집』 제1호에「연기설(緣起說)에 대한 관견(管見)」을 1954년에 발표하였고 이어서 1956년에는「인도철학에 대하여」「불교의 호국사상(護國思想)」을, 그리고 1958년에는「원시불교(元始佛敎)와 철학사상」, 1959년에「미타사상(彌陀思想)의 제문제」「신라불교의 특성」, 1960년에『현대불교』에「불교신앙의 본질」을 3회에 걸쳐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불교교리의 전반적인 연구를 담은『불교학개론』이 김동화에 의해 저술되어 1958년에 백영사(白暎社)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또 이 해에 권상로(權相老) · 김동화 공저『불교독본(佛敎讀本)』이 1952년에 출판된 상권(上卷)에 이어 하권(下卷)이 출판되었다. 1958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의 연구논문집인『동국사상(東國思想)』제1집이 간행되어 9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된 것은 불교연구의 의욕을 더 한층 북돋아 주고 지금까지 별로 발표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불교계에 하나의 기폭제(起爆劑)가 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당시 동국대학교 총장『백성욱(白性郁)박사 송수(頌壽) 기념 불교학문논집』이 출간되어 여기에는 불교학계는 물론 국문학 · 사학(史學) 등에 관계하는 교수, 학자들의 연구논문이 무려 41편이나 발표되어 당시 학계의 연구열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 중에서 불교학에 관계되는 주요 논문들만 몇 편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화엄사상(華巖思想)의 연구」「고구려 승랑(僧朗)과 삼론학(三論學)」「추사(秋史)의 선학변(禪學辨)」「한국선종약사(韓國禪宗略史)」「신라장소록장편(新羅章疏錄長編)」「고려대장경판의 연구」「연등회고(燃燈會攷)」「이조불교의 호국사상」「대각국사(大覺國師)의 천태(天台)의 사상과 속장(續藏)의 업적」등 주옥같은 글들이 가득하다. 또 1960년에 나온『황의돈(黃義敦) 선생 고희(古稀) 기념사학논총』에도 23편의 논문들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불교 관계의 것으로 7편이 있으니「위인허응보우대사(偉人虛應普雨大師)」「여원관계(麗元關系)에서 본 고려불교」「개경사고(開慶寺考)」「당법장기신라의상서(唐法藏寄新羅義湘書)에 대하여」「금(金) 대정년간(大定年間)의 불교정책과 여진인사회(女眞人社會)」「사원노비고(寺院奴婢考)」「사명대사(泗溟大師)의 사시(私諡)」등이 그것이다. 셋째, 불교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지금까지의 교리연구보다는 그 폭이 넓어 여기에 관계하는 학자들도 동국대 교수 위주에서 벗어나 일반 사학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즉 원로사학자 이상백(李相佰) · 민영규(閔泳珪) · 이홍직(李弘稙) · 김상기(金庠基) 그리고 이기백(李基白) 등이 그 대표격이다. 이상백은 1947년에「유불양교교대(儒佛兩敎交代)의 기연(機緣)에 대한 일연구(一硏究)」를『조선문화총서(2)』로 발표했고 이어 1948년에는「원각사시말고(圓覺寺始末考)」를『향토서울』제2호에 발표하였다. 또 민영규는「선묘(善妙)와 의상대사(義湘大師)」「원효론(元曉論)」을『사상계』1권 3호와 5호에 발표하였으며 이홍직은「나말(羅末)의 전란(戰亂)과 치군(緇軍)」을 1958년에 발표하였고 김상기는「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대하여」「묘청(妙淸)의 천도운동(遷都運動)과 칭제건원(稱帝建元)」을 1959, 1960년에 발표하였으며 이기백은「삼국시대의 불교전래와 그 사회적 성격」을『역사학보』 6집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불교학계에서는 조명기(趙明基) · 안계현이 활약했는데 조명기는 1949년에「원측(圓測)의 사상」을『진단학보(震壇學報)』 제16호에, 그리고 1960년에「원효(元曉)의 현존저서에 대하여」를『한국사상강좌』제3집에 발표하였다. 또 안계현은「신라인의 세속오계(世俗五戒)와 국가관」을 1960년에 발표하였다. 넷째, 불교미술분야에서도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이 중 황수영(黃壽永)은「서산(瑞山) 마애불상(磨崖佛像)에 대하여」외 1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고 진홍섭(秦弘燮)은「영주(榮州) 석포리(石浦里) 사면석불(四面石佛)」등을, 정영호(鄭永鎬) 역시「지리산(智異山) 천은사(泉隱寺)의 금동불감(金銅佛龕)」등 모두 10편 이상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들 외에도 고유섭(高裕燮) · 신영훈(申榮勳) · 김재원(金載元) · 이경성(李慶成) · 최순우(崔淳雨) · 홍사준(洪思俊) · 최영희(崔永禧) · 정명호(鄭明鎬) 등 불교미술계에서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각기 그 전공분야에서 활동하여 다대한 업적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불교교육기관 및 사회단체
한국불교계에서 학교설립에 눈을뜬것은 개화(開化)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불교계에서도 신학문에 대한 동경이 급증하여 이를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학교의 설립이 절실했던 것이다. 1906년에 원흥사(元興寺)에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한 것이 학교의 효시가 된다. 그 후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 · 중앙학교(中央學校) ·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등으로 교명이 바뀌어지다가 1946년에 교육개정령(敎育改正令)에 의해 동국대학(東國大學)으로 승격하였고 이어 195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여기서 배출된 학생들은 12회에 걸쳐 5,000명이 훨씬 넘는다. 이들 중 불교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불교의 지식은 습득한 후에 졸업하게 되므로 교육기관으로서 동국대학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한편 일반사회단체로서는「한국불교교도회(韓國佛敎敎徒會)」가 1947년 8월에 설립되었는데 그 설립목적은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산하 교도들에 대한 불타(佛陀)의 자비정신을 체득(體得)케 하여 인격을 완성시키고 대승불교사상(大乘佛敎思想)을 선양케 하여 불교의 현대화를 기하고 복지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또 1957년 6월에 대한불교조계종전국신도회(大韓佛敎曹溪宗全國信徒會)가 창립되었는데 이는 1955년 5월 불교정화가 시작되었을 때 이를 지지하고 앞장선 신도들에 의해 전국적 규모의 불교신도회를 결성할 것을 합의한데서 시작되었다. 본회는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행(覺行) · 원만(圓滿)의 근본교리와 복지사회의 건설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회는 현재 우리나라 불교계의 가장 큰 신도단체로서 성장하였다. 또 1957년 11월에 대한불교달마회(大韓佛敎達磨會)가 창립되었다. 달마회(達磨會)는 조계종지(曹溪宗旨)를 봉행(奉行)하여 종법(宗法)과 종령(宗令)을 준수하고 삼보(三寶)의 호지(護持)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진흥하며, 완전무구한 인격의 구현, 그리고 상구보제(上求菩提), 하화증생(下化衆生)으로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한다는 3대 강령(綱領)을 실천함을 목적으로 교화사업을 벌여 매월 정기적인 법회와 아울러 난민, 이재민의 구호운동을 적극 전개하고 중생제도(衆生濟度)와 자비사상의 선양에 힘쓰고 있다. 한편 1952년에 창립된 한국불교청년회(韓國佛敎靑年會)는 불교도(佛敎徒)로서의 인격을 도야하고 생명을 예찬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하여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한 제세구민운동(濟世救民運動)의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그리고 문서포교(文書布敎)를 위해 1960년 7월에 설립된 법시사(法施舍)는 1960년에 월간『심원(心苑)』을 창간한 후 그해 5월에『대성석가(大聖釋迦)』를 간행하여 광복 이후 우리 불교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문서포교를 적극 전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61년 5월에 불교강연회를 시작한 후 매월 이 강연회를 개최하여 불교도들은 물론이고 관심있는 일반인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심어주고 있다.
5·16 군사정변과 불교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난 당시의 불교계는 정통교단인 조계종의 비구 · 대처승 사이에 1954년 5월 이래 이어온 분규가 심화되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분규는 일제 때 한국불교에 침투한 왜색불교(倭色佛敎)의 대표적인 산물로 지적받고 있던 대처승에게 사찰에서 퇴거하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유시(1954년 5월 21일)가 계기가 되어, 이를 지지하는 비구승측에 의해 제기되었다. 따라서 비구승측은 처음부터 정부의 힘을 얻고 있었고, 대처승측은 이를 정부로부터 가해진 법난(法難)으로 단정하였다. 나아가 비구승측은 한국불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불교의 잔재를 없앤다고 하는 명분 아래 이를 불교정화운동이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은 대처승을 일컬어 친일승(親日僧)이라 단정하고 이 친일승은 물러가라고 하는 거듭된 이승만대통령의 유시(1955년 8월 5일 7차)에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승려는 독신출가자여야 한다고 하는 한국불교 전래의 계율을 어긴 대처승은 파계승으로 낙인찍혀 비구승측이 들고 일어난 정화운동의 명분에 힘을 더해 주었으며, 대처승측은 반대로 수세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년 12월 31일 현재 사찰의 수 1,180개소, 비구승 746명, 비구니 401명, 대처승 5,038명의 교세현황(문교요람)에서 알 수 있듯이 압도적으로 비구승측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대처승측은 여전히 대부분의 사찰과 각급 종립학교, 그리고 불교재산을 출자한 기업체 및 각종 재단법인체를 장악하고 일제 때 이래 견지해 온 교단의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침내 쌍방은 사찰점유를 위한 실력행사를 하는 한편, 종권(宗權)을 비롯하여 승려의 자격과 사찰의 점유권 및 재산의 귀속을 둘러싼 소송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소송사태에 휘말려 있었다.
이러한 때에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의장은 거듭 "불교분쟁이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불교 분규의 수습을 촉구하는 강도높은 담화(1962년 1월 12일)를 발표했다. 정부(문교부)는 이 담화를 계기로 분규 수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정부의 이같은 개입은 불교 분규가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세론(世論)이 가세하고 있었고 정부로서도 이 점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와 지탄하는 여론에 밀린 비구 · 대처 양측은 분규가 발생한 지 실로 8년만에 마주 앉아 정부가 제안하는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의 합의에 의거해서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개최, 양측이 참여하는「대한불교 조계종」의 발족에 합의하였다. 이 때가 1962년 2월 12일, 박정희의장의 담화가 있은 지 불과 1개월 후이다. 이 불교재건비상종회에서는 종명(宗名)과 종지(宗旨)와 종조(宗祖)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나 정작 대처승이 종단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권인 승려의 자격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승만대통령의 최초의 유시가 있은 이듬해인 1955년 2월 4일 문교부장관실에서 양측이 합의한 승려자격에 관한 8대 원칙(①독신자 ②삭발 · 염의자(染衣者) ③비불구자(非不具者) ④백치가 아닌 자 ⑤살(殺) · 도(盜) · 음(淫) · 망(妄)의 네 가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은 자 ⑥음주 · 식육(食肉) · 흡연을 하지 않는 자 ⑦승려 3인 이상과 단체생활을 하는 자 ⑧25세 이상인 자)을 비구승측에서 고수하기 때문이었다. 이 원칙을 준용하는 한 대처승 누구도 승려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였다. 그러므로 대처승 참여의 문을 여는 궁여지책으로 동년 2월 28일의 불교재건비상종회는 종헌의 표결에 앞서 대처승이 이미 가진 승려자격의 기득권을 인정은 하되 그 기득권에 대한 해석은 문교부에 맡기기로 단서를 붙여서 종헌을 표결에 넘겼다. 이같이 불교분규의 수습에 있어서 가장 예민한 대처승의 기득권에 대한 해석을 문교부에 맡긴 결과는 협상의 상대역을 비구승측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당연히 대처승측의 반발을 샀다. 따라서 표결의 결과는 종회의원 30인(비구 · 대처 각 15인) 중 찬성 15, 반대 14, 기권 1로 나타났다. 이에 대처승측은 불교재건비상종회 이청담의장 앞으로 이 회의의 의결이 무효임을 통보하고 법정투쟁을 재개하였다.
대처승측의 법정투쟁 재개에는 비구승측이 구성한 종단의 설립이 부당하다고 하는 대법원의 두 가지 판결이 근거가 되고 있었다. 그 하나는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전, 1960년 11월 24일에 있었던 판결이다. 대법원은 이때 문교부의 중재로 1955년 7월 15일, 비구 · 대처 양측이 전국승려대회의 개최를 합의하고 동년 8월 12일 개최한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종헌과 종단의 구성은 유효하다고 한 1957년 9월 17일의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하였다. 그 주된 이유로 이 대회에 대처승측이 참가하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5 · 16군사정변 후, 10월 19일에 있었던 대법원의 판결이다. 이때의 대법원 판결은 앞의 판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1955년 8월 12일의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종헌 등은 불교정화 및 그에 따른 종헌의 개헌 등을 전국의 승려가 제안한 건의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종헌의 개정을 적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은 대법원 판결로써 이미 기득권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대처승측은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비구승측과 정부측의 소극적 태도에 만족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대처승측을 협상의 자리로 다시 나오게 하기 위하여 문교부는 30인으로 구성된 불교재건비상종회를 해체하고 비구 · 대처 양측 각 5인과 사회인사 5인 등 15인으로 구성하는 종회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대처승측은 이를 거부하고, 비구승측은 3월 25일, 불교재건비상종회를 열어 대처승측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승려자격을 출가독신승(出家獨身僧)으로 수정한 종헌을 통과시켜 공포하였다. 출가독신승에게 승려자격을 인정하는 이 수정안은 비구 · 대처 양측에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대처승측만이 아니라 비구승측에도 이에 해당하는 승려가 있었고, 또 불교정화운동의 초기인 1955년 7월, 통도사의 대처승 167명과 상주 남장사의 대처승 50여명이 집단으로 이혼한 사례에서도 그 공감대 형성의 가능성은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비구 · 대처 양측의 협상은 급진전하여 4월 1일에는 양측이 참가한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개최하고 종정에 비구승측 이효봉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4월 6일에는 총무원장에 대처승측 임석진을 선출하는 한편 총무원의 4부장을 비롯하여 총무원의 간부진을 비구 · 대처 50%의 비율로 구성하여 통합종단「대한불교조계종」을 발족, 4월 14일에는 문교부에 종단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이 종단등록은 법적인 근거에 허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불교종단 등록의 법적인 근거가 되어 왔던 일제 때의 조선총독부 법령인 사찰령(寺刹令)에 근거한 법률행위는 무효라는 대법원 특별부의 판결이 1956년 3월 20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대법원 특별부의「사찰령시행세칙」및「구해인사본말사법」에 의한「정부주지인가제 무효」판시가 그것이다.
또 정부는 1962년 1월 20일,「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제3조에 의하여 사찰령을 이미 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단체로서 종단 등록을 정부가 받을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였다. 다만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구법령을 폐지한다고 한 이유와 관련지어서 정부는 사찰령의 제5조인「사찰에 속하는 토지, 삼림, 건물, 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기타 귀중품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를 처분할 수 없다」는 조항만은 남겨두어 계속하여 적용한다고 함으로써 정부가 불교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정부는 그에 의거해서 통합종단의 등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 등장하는 불교종단의 등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견해도 없지 않았다. 때문에 대처승측에서는 불교분쟁의 수습에 있어서 정부가 편파적이라고 비난하였다. 한편 정부가 사찰령의 제5조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불교종단의 종단 등록의 근거를 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불교분쟁으로 인하여 불교재산이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1962년 1월 20일에 구법령을 철폐하면서 남겨둔 사찰령 제5조의 후속조치로 3월 14일에는 문교부가 불교재산의 임의처분을 막는 금지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5월 31일에는 불교재산관리의 근거법률로서「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 · 공포하고 8월 22일에는「불교재산관리법 시행령」을 제정 · 공포하였다.
이같이 불교에 대한 국가관리의 의지가 법의 제정으로 나타나고 있을 때, 문교부는 8월 20일 불교분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불교재건비상종회에 통합종단의 초대 중앙종회의원을 비구승측 32명, 대처승측 18명의 비율로 선출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대처승측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비구승측은 8월 23일, 대처승측이 불참한 가운데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개최하여 32 대 18의 비율로 종회의원을 선출하였다. 그 결과는 집행부인 총무원의 원장을 비롯하여 대처승측의 간부진이 모두 퇴진하는 사태로 나아가게 하였고, 퇴진하는 임석진총무원장은 9월 18일 통합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10월 4일 대처승측이 서울민사지방법원에 통합종단의 종헌 무효 및 이효봉종정이 통합종단의 종정이 아님을 확인하는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불교분규가 법정에서 재연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처승측은「한국불교조계종」을 발족하고 국성우종정은 통합종단의 중앙종회를 탈퇴하는 성명을 냈다. 한편,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은 12월 4일「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불교단체 등록을 마침과 동시에 제2대 총무원장에 독신승이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퇴진했던 대처승측 간부진이 복귀함으로써 통합종단의 면목을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비구 · 대처 사이에서 야기된 불교분규는 이제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조계종, 두 종단 사이의 다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최초의 분열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한국불교의 다종파시대(多宗派時代)를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하였다.
한국불교조계종은 정부를 향하여 불교분규를 당사자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맡겨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문교부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기울어진 편파적 행정을 시정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한국불교조계종은 이 편파적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문교부가 각 시 · 도 · 군에 사암의 등록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 증명하는 문서에 의거하도록 지시한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한국불교조계종에 소속하는 사찰의 등록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서 정부가 한국불교조계종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불교조계종의 건의를 받은 문교부는 1963년 7월 19일, 한국불교조계종에 분쟁의 수습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1963년 5월 16일선에서 미등록사찰을 대상으로 종정 국성우 명의의 등록을 받아들인다. 둘째, 1963년 5월 16일 현재, 계류 중인 모든 소송은 취소해야 한다. 셋째, 승려의 자격은 독신으로서 사찰에 상주하는 자로 한정한다. 다만 기득권은 인정한다는 항목이다. 이같은 정부의 방침은 대처승단(帶妻僧團) 한국불교조계종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한불교조계종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 3개 항의 수용은 한국불교조계종에게서도 거부되었다.
그 주된 원인은 두번째 항에 있었다. 이때까지 계류 중인 소송 중에는 비구승측이 점유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교단에 대한 대처승측의 기득권을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주장하는 소송이 제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소송까지를 일괄적으로 취소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전통교단에 대한 대처승측의 입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지금까지의 분규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교단과는 결별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창종(創宗)을 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한국불교조계종은 문교부의 제안을 일축하였다. 그러나 1970년 5월 8일에 이르러 한국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불교단체등록을 마치고 독자노선을 선언하였다. 독자노선을 선언하고 창종하였다고는 하나 종지(宗旨)와 종통(宗統)과 종조(宗祖)와 종단의 역사가 같고 소의경전(所依經典)은 물론 의식까지도 대한불교조계종과 동일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창종이기 보다는 불교분규로 인하여 파생된 분종(分宗)의 성격이 더 짙다는 평을 당시는 들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은 오늘까지도 두 종단 사이에 적지 않은 수의 사찰점유에 관한 다툼이 계속되게 하고 있다.
이 분규는 일제 때 한국불교에 침투한 왜색불교(倭色佛敎)의 대표적인 산물로 지적받고 있던 대처승에게 사찰에서 퇴거하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유시(1954년 5월 21일)가 계기가 되어, 이를 지지하는 비구승측에 의해 제기되었다. 따라서 비구승측은 처음부터 정부의 힘을 얻고 있었고, 대처승측은 이를 정부로부터 가해진 법난(法難)으로 단정하였다. 나아가 비구승측은 한국불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불교의 잔재를 없앤다고 하는 명분 아래 이를 불교정화운동이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은 대처승을 일컬어 친일승(親日僧)이라 단정하고 이 친일승은 물러가라고 하는 거듭된 이승만대통령의 유시(1955년 8월 5일 7차)에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승려는 독신출가자여야 한다고 하는 한국불교 전래의 계율을 어긴 대처승은 파계승으로 낙인찍혀 비구승측이 들고 일어난 정화운동의 명분에 힘을 더해 주었으며, 대처승측은 반대로 수세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년 12월 31일 현재 사찰의 수 1,180개소, 비구승 746명, 비구니 401명, 대처승 5,038명의 교세현황(문교요람)에서 알 수 있듯이 압도적으로 비구승측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대처승측은 여전히 대부분의 사찰과 각급 종립학교, 그리고 불교재산을 출자한 기업체 및 각종 재단법인체를 장악하고 일제 때 이래 견지해 온 교단의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침내 쌍방은 사찰점유를 위한 실력행사를 하는 한편, 종권(宗權)을 비롯하여 승려의 자격과 사찰의 점유권 및 재산의 귀속을 둘러싼 소송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소송사태에 휘말려 있었다.
이러한 때에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의장은 거듭 "불교분쟁이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불교 분규의 수습을 촉구하는 강도높은 담화(1962년 1월 12일)를 발표했다. 정부(문교부)는 이 담화를 계기로 분규 수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정부의 이같은 개입은 불교 분규가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세론(世論)이 가세하고 있었고 정부로서도 이 점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와 지탄하는 여론에 밀린 비구 · 대처 양측은 분규가 발생한 지 실로 8년만에 마주 앉아 정부가 제안하는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의 합의에 의거해서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개최, 양측이 참여하는「대한불교 조계종」의 발족에 합의하였다. 이 때가 1962년 2월 12일, 박정희의장의 담화가 있은 지 불과 1개월 후이다. 이 불교재건비상종회에서는 종명(宗名)과 종지(宗旨)와 종조(宗祖)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나 정작 대처승이 종단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권인 승려의 자격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승만대통령의 최초의 유시가 있은 이듬해인 1955년 2월 4일 문교부장관실에서 양측이 합의한 승려자격에 관한 8대 원칙(①독신자 ②삭발 · 염의자(染衣者) ③비불구자(非不具者) ④백치가 아닌 자 ⑤살(殺) · 도(盜) · 음(淫) · 망(妄)의 네 가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은 자 ⑥음주 · 식육(食肉) · 흡연을 하지 않는 자 ⑦승려 3인 이상과 단체생활을 하는 자 ⑧25세 이상인 자)을 비구승측에서 고수하기 때문이었다. 이 원칙을 준용하는 한 대처승 누구도 승려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였다. 그러므로 대처승 참여의 문을 여는 궁여지책으로 동년 2월 28일의 불교재건비상종회는 종헌의 표결에 앞서 대처승이 이미 가진 승려자격의 기득권을 인정은 하되 그 기득권에 대한 해석은 문교부에 맡기기로 단서를 붙여서 종헌을 표결에 넘겼다. 이같이 불교분규의 수습에 있어서 가장 예민한 대처승의 기득권에 대한 해석을 문교부에 맡긴 결과는 협상의 상대역을 비구승측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당연히 대처승측의 반발을 샀다. 따라서 표결의 결과는 종회의원 30인(비구 · 대처 각 15인) 중 찬성 15, 반대 14, 기권 1로 나타났다. 이에 대처승측은 불교재건비상종회 이청담의장 앞으로 이 회의의 의결이 무효임을 통보하고 법정투쟁을 재개하였다.
대처승측의 법정투쟁 재개에는 비구승측이 구성한 종단의 설립이 부당하다고 하는 대법원의 두 가지 판결이 근거가 되고 있었다. 그 하나는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전, 1960년 11월 24일에 있었던 판결이다. 대법원은 이때 문교부의 중재로 1955년 7월 15일, 비구 · 대처 양측이 전국승려대회의 개최를 합의하고 동년 8월 12일 개최한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종헌과 종단의 구성은 유효하다고 한 1957년 9월 17일의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하였다. 그 주된 이유로 이 대회에 대처승측이 참가하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5 · 16군사정변 후, 10월 19일에 있었던 대법원의 판결이다. 이때의 대법원 판결은 앞의 판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1955년 8월 12일의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종헌 등은 불교정화 및 그에 따른 종헌의 개헌 등을 전국의 승려가 제안한 건의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종헌의 개정을 적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은 대법원 판결로써 이미 기득권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대처승측은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비구승측과 정부측의 소극적 태도에 만족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대처승측을 협상의 자리로 다시 나오게 하기 위하여 문교부는 30인으로 구성된 불교재건비상종회를 해체하고 비구 · 대처 양측 각 5인과 사회인사 5인 등 15인으로 구성하는 종회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대처승측은 이를 거부하고, 비구승측은 3월 25일, 불교재건비상종회를 열어 대처승측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승려자격을 출가독신승(出家獨身僧)으로 수정한 종헌을 통과시켜 공포하였다. 출가독신승에게 승려자격을 인정하는 이 수정안은 비구 · 대처 양측에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대처승측만이 아니라 비구승측에도 이에 해당하는 승려가 있었고, 또 불교정화운동의 초기인 1955년 7월, 통도사의 대처승 167명과 상주 남장사의 대처승 50여명이 집단으로 이혼한 사례에서도 그 공감대 형성의 가능성은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비구 · 대처 양측의 협상은 급진전하여 4월 1일에는 양측이 참가한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개최하고 종정에 비구승측 이효봉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4월 6일에는 총무원장에 대처승측 임석진을 선출하는 한편 총무원의 4부장을 비롯하여 총무원의 간부진을 비구 · 대처 50%의 비율로 구성하여 통합종단「대한불교조계종」을 발족, 4월 14일에는 문교부에 종단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이 종단등록은 법적인 근거에 허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불교종단 등록의 법적인 근거가 되어 왔던 일제 때의 조선총독부 법령인 사찰령(寺刹令)에 근거한 법률행위는 무효라는 대법원 특별부의 판결이 1956년 3월 20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대법원 특별부의「사찰령시행세칙」및「구해인사본말사법」에 의한「정부주지인가제 무효」판시가 그것이다.
또 정부는 1962년 1월 20일,「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제3조에 의하여 사찰령을 이미 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단체로서 종단 등록을 정부가 받을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였다. 다만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구법령을 폐지한다고 한 이유와 관련지어서 정부는 사찰령의 제5조인「사찰에 속하는 토지, 삼림, 건물, 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기타 귀중품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를 처분할 수 없다」는 조항만은 남겨두어 계속하여 적용한다고 함으로써 정부가 불교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정부는 그에 의거해서 통합종단의 등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 등장하는 불교종단의 등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견해도 없지 않았다. 때문에 대처승측에서는 불교분쟁의 수습에 있어서 정부가 편파적이라고 비난하였다. 한편 정부가 사찰령의 제5조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불교종단의 종단 등록의 근거를 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불교분쟁으로 인하여 불교재산이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1962년 1월 20일에 구법령을 철폐하면서 남겨둔 사찰령 제5조의 후속조치로 3월 14일에는 문교부가 불교재산의 임의처분을 막는 금지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5월 31일에는 불교재산관리의 근거법률로서「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 · 공포하고 8월 22일에는「불교재산관리법 시행령」을 제정 · 공포하였다.
이같이 불교에 대한 국가관리의 의지가 법의 제정으로 나타나고 있을 때, 문교부는 8월 20일 불교분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불교재건비상종회에 통합종단의 초대 중앙종회의원을 비구승측 32명, 대처승측 18명의 비율로 선출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대처승측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비구승측은 8월 23일, 대처승측이 불참한 가운데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개최하여 32 대 18의 비율로 종회의원을 선출하였다. 그 결과는 집행부인 총무원의 원장을 비롯하여 대처승측의 간부진이 모두 퇴진하는 사태로 나아가게 하였고, 퇴진하는 임석진총무원장은 9월 18일 통합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10월 4일 대처승측이 서울민사지방법원에 통합종단의 종헌 무효 및 이효봉종정이 통합종단의 종정이 아님을 확인하는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불교분규가 법정에서 재연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처승측은「한국불교조계종」을 발족하고 국성우종정은 통합종단의 중앙종회를 탈퇴하는 성명을 냈다. 한편,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은 12월 4일「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불교단체 등록을 마침과 동시에 제2대 총무원장에 독신승이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퇴진했던 대처승측 간부진이 복귀함으로써 통합종단의 면목을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비구 · 대처 사이에서 야기된 불교분규는 이제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조계종, 두 종단 사이의 다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최초의 분열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한국불교의 다종파시대(多宗派時代)를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하였다.
한국불교조계종은 정부를 향하여 불교분규를 당사자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맡겨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문교부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기울어진 편파적 행정을 시정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한국불교조계종은 이 편파적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문교부가 각 시 · 도 · 군에 사암의 등록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 증명하는 문서에 의거하도록 지시한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한국불교조계종에 소속하는 사찰의 등록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서 정부가 한국불교조계종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불교조계종의 건의를 받은 문교부는 1963년 7월 19일, 한국불교조계종에 분쟁의 수습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1963년 5월 16일선에서 미등록사찰을 대상으로 종정 국성우 명의의 등록을 받아들인다. 둘째, 1963년 5월 16일 현재, 계류 중인 모든 소송은 취소해야 한다. 셋째, 승려의 자격은 독신으로서 사찰에 상주하는 자로 한정한다. 다만 기득권은 인정한다는 항목이다. 이같은 정부의 방침은 대처승단(帶妻僧團) 한국불교조계종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한불교조계종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 3개 항의 수용은 한국불교조계종에게서도 거부되었다.
그 주된 원인은 두번째 항에 있었다. 이때까지 계류 중인 소송 중에는 비구승측이 점유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교단에 대한 대처승측의 기득권을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주장하는 소송이 제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소송까지를 일괄적으로 취소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전통교단에 대한 대처승측의 입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지금까지의 분규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교단과는 결별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창종(創宗)을 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한국불교조계종은 문교부의 제안을 일축하였다. 그러나 1970년 5월 8일에 이르러 한국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불교단체등록을 마치고 독자노선을 선언하였다. 독자노선을 선언하고 창종하였다고는 하나 종지(宗旨)와 종통(宗統)과 종조(宗祖)와 종단의 역사가 같고 소의경전(所依經典)은 물론 의식까지도 대한불교조계종과 동일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창종이기 보다는 불교분규로 인하여 파생된 분종(分宗)의 성격이 더 짙다는 평을 당시는 들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은 오늘까지도 두 종단 사이에 적지 않은 수의 사찰점유에 관한 다툼이 계속되게 하고 있다.
불교재산관리법의 제정
이 불교재산관리법은 1962년 5월 24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제40차 상임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같은 해 5월 31일에 공포되었다. 이 법의 입법배경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나, 이 법을 심의한 상임위원회에서의 제안설명에 의하면 "법령정비는 5 · 16혁명과업의 일환으로 불교단체의 재산관리에 대한 근거법률로서 제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일제 때 이래 존속해 온 사찰령을 폐지하면서 불교재산의 관리를 규정한 사찰령의 제5조안을 남겨 둔 점에서도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간단한 제안설명만으로는 특별하게 불교만을 국가가 관리할 명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지나칠만큼 통제일변도여서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일제 때의 법령인 사찰령의 후신이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킨 이 법의 입법배경은 오히려 1987년 11월 28일, 이 법과 대체해서 제정된「전통사찰보존법」의 발의(發議)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54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야 한다'는 담화를 계기로 비구 · 대처승간의 내분이 격심하였고 이로 인하여 불교의 종통과 재산을 둘러 싼 분규가 장기화되어 전래의 불교문화와 유산이 훼손되는 등, 어려운 상황 하에서 불교분규의 해결과 불교재산의 합리적 관리를 위하여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교분규의 해결과 불교재산의 합리적 관리의 두 가지이다. 이 두 가지의 귀결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한 동기에 대하여 정부의 입장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공보부는 1972년 12월 27일에 발행한『한국의 종교』에서 "불교단체의 재산 및 시설의 관리운영을 도모하기 위해 1962년 5월 31일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註1]고 말하고 있다. 또 이어서 "불교의 전법(傳法) · 포교 · 법요집행(法要執行) · 신자의 교화 ·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승려 또는 신도의 단체나 사찰 등 불교단체들은 관할청(중앙종단 · 본사 등은 문화공보부, 지회 · 말사 등은 시 · 도)에 등록하도록 의무화하였고, 등록된 단체나 사찰은 하나의 준법인으로 종교단체의 재산을 대여 · 양도 · 매각 등 재산처분 행위를 할 경우에는 관할청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고 불교재산관리법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특별히 다른 종교와 다르게 불교단체를 이같이 국가관리 아래 두는 것은 "사찰이 가지고 있는 민족문화유산과 각종 재산의 유실을 사전에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 법이 불교계에 있어서는 위헌의 요소가 짙은 악법으로 지탄받는 구속일변도의 법이지만 법의 이름에 걸맞게도 불교재산의 유실을 막는데 공헌은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불교분규의 해결에 있어서 이 법의 효력은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 스스로가 "교권과 재산권을 둘러싸고 십수년에 걸친 시비는 이제 행정적으로는 종결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양자 간에 상호 이해와 화해로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면면히 흘러 내려온 빛나는 전통을 더욱 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조정하여 왔다" [註2]고 말함으로서 어느 정도는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재산관리법은 비구 · 대처 사이의 분규를 수습하여 면면히 흘러 내려온 한국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입법되었으나 한국불교를 전혀 다른 측면, 즉 다종파시대로 치닫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부수립 후 많은 신흥종교가 신앙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특히 사회정의와 공익을 좀먹는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소장(消長)하면서 신교의 자유를 빙자하여 사회공익을 어지럽혀 온 일도 없지 않다" [註3]고 하고 "특히 유사종교의 온상이 되고 있는 미신적 인습, 기성종교 안에 스며든 샤머니즘 현상을 없애도록 종교풍토를 건실하게 조성해 나갈 것이다" [註4]라고 하였으나 신흥불교단체가 이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해서 등록을 하면 국가가 공인하는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해방 후 기독교는 여러 분파작용으로 수십개의 교파로 갈라져 불미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기독교계의 분립(分立)이 종식되고 범기독교적인 연합운동으로 통일된 역량 속에서 기독교 본연의 사명을 다하도록 권장할 방침이다" [註5]라고 한 정책과 비교할 때, 상반되는 결과로서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계가 전개되었다.
더욱이 지나칠만큼 통제일변도여서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일제 때의 법령인 사찰령의 후신이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킨 이 법의 입법배경은 오히려 1987년 11월 28일, 이 법과 대체해서 제정된「전통사찰보존법」의 발의(發議)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54년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야 한다'는 담화를 계기로 비구 · 대처승간의 내분이 격심하였고 이로 인하여 불교의 종통과 재산을 둘러 싼 분규가 장기화되어 전래의 불교문화와 유산이 훼손되는 등, 어려운 상황 하에서 불교분규의 해결과 불교재산의 합리적 관리를 위하여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교분규의 해결과 불교재산의 합리적 관리의 두 가지이다. 이 두 가지의 귀결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한 동기에 대하여 정부의 입장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공보부는 1972년 12월 27일에 발행한『한국의 종교』에서 "불교단체의 재산 및 시설의 관리운영을 도모하기 위해 1962년 5월 31일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註1]고 말하고 있다. 또 이어서 "불교의 전법(傳法) · 포교 · 법요집행(法要執行) · 신자의 교화 ·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승려 또는 신도의 단체나 사찰 등 불교단체들은 관할청(중앙종단 · 본사 등은 문화공보부, 지회 · 말사 등은 시 · 도)에 등록하도록 의무화하였고, 등록된 단체나 사찰은 하나의 준법인으로 종교단체의 재산을 대여 · 양도 · 매각 등 재산처분 행위를 할 경우에는 관할청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고 불교재산관리법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특별히 다른 종교와 다르게 불교단체를 이같이 국가관리 아래 두는 것은 "사찰이 가지고 있는 민족문화유산과 각종 재산의 유실을 사전에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 법이 불교계에 있어서는 위헌의 요소가 짙은 악법으로 지탄받는 구속일변도의 법이지만 법의 이름에 걸맞게도 불교재산의 유실을 막는데 공헌은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불교분규의 해결에 있어서 이 법의 효력은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 스스로가 "교권과 재산권을 둘러싸고 십수년에 걸친 시비는 이제 행정적으로는 종결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양자 간에 상호 이해와 화해로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면면히 흘러 내려온 빛나는 전통을 더욱 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조정하여 왔다" [註2]고 말함으로서 어느 정도는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재산관리법은 비구 · 대처 사이의 분규를 수습하여 면면히 흘러 내려온 한국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입법되었으나 한국불교를 전혀 다른 측면, 즉 다종파시대로 치닫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부수립 후 많은 신흥종교가 신앙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특히 사회정의와 공익을 좀먹는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소장(消長)하면서 신교의 자유를 빙자하여 사회공익을 어지럽혀 온 일도 없지 않다" [註3]고 하고 "특히 유사종교의 온상이 되고 있는 미신적 인습, 기성종교 안에 스며든 샤머니즘 현상을 없애도록 종교풍토를 건실하게 조성해 나갈 것이다" [註4]라고 하였으나 신흥불교단체가 이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해서 등록을 하면 국가가 공인하는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해방 후 기독교는 여러 분파작용으로 수십개의 교파로 갈라져 불미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기독교계의 분립(分立)이 종식되고 범기독교적인 연합운동으로 통일된 역량 속에서 기독교 본연의 사명을 다하도록 권장할 방침이다" [註5]라고 한 정책과 비교할 때, 상반되는 결과로서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계가 전개되었다.
다종파시대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시대의 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에는 통일된 종단이 없었다. 여러 종파가 저마다 선명한 종지와 종풍을 드날리며 마치 백화가 난만하듯이 선종은 구산문을 열고, 교종은 열두 종파에 이르렀고, 원효는 최초로 이 백화난만의 여러 종파를 통불교(通佛敎)라는 이름으로 묶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고려에 넘어와서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을 교종에 흡수하여 여러 종파를 통일하고자 하여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뒤이어 보조국사 지눌은 의천과는 반대로 교종을 선종 속에 융합하여 교단을 통일하고자 하였고, 이를 이어 받은 원증국사 보우는 여러 종파를 선(禪) · 교(敎) 양종으로 크게 묶었고, 조선의 서산대사에 이르러 비로소 명실상부한 단일종단을 세우게 되었다. 이 단일종단을 이어 받은 종단이 비구 · 대처 사이의 분규로 양분된 조계종과 태고종이다.
사상과 제도의 통일을 보기까지,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한국불교에 크게 작용한 것은 한국불교의 숙명이라 할 수 있다.「불교재산관리법」이 그 숙명의 연장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불교사에서 볼 수 있듯이 승단(僧團) 스스로 종파의 통일을 꾀하거나 조정에 건의하고 조정이 스스로 정책으로 불교교단을 통합하고자 한 것에 반하여「불교재산관리법」은 다양한 불교종파를 파생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점이다.
정부가 한국불교태고종을 승인함으로써 면면히 이어온 전통불교교단은 양분되었고, 이때까지 불교계는 17개의 종파와 종파에 준하는 8개의 불교단체를 합하여 25개 종파로 늘어났고 1979년 10월까지는 등록된 종단이 26개로 늘어난다.
광복 이후의 신흥종교 붐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불교단체가 이같이「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등록함으로써 불교의 한 종파로 공인된 종파 중에는 이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무속의 요소가 짙고 미신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것으로 지적된 종파도 있다. 따라서 종조가 없는 종단이 있는가 하면 종조와 종지,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상호 모순되는 종파도 있다.
모순을 내포한 종파에는 다소 불교적 요소를 지닌 점에서 불교의 종파로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전혀 불교적 요소는 지니지 않은 채 편의상 불교라고 이름한 종파도 있다. 종조를 석가세존으로 하고『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종조의 가르침이나 소의경전인『화엄경』의 사상과 교리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요소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환희성모(歡喜聖母)를 본존불로 한 단체가 버젓이 불교의 한 종파로 공인되고 있는 넌센스는 법의 맹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법의 맹점은 또 "도덕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륜삼강(五倫三綱)을 주장하여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으로 선(仙) · 불(佛) · 유(儒) 통합과 후세불(後世佛)인 미륵세존……" 하는 교리를 가진 단체를 불교종파로 인정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교리를 가진 단체는 유 · 불 · 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단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의 맹점으로 인한 분별없는 종단의 승인은 한국불교를 정(正) · 사(邪)를 가릴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러한 혼돈은 교리면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막연하게 석가세존이 설한『소설경(所說經)』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용화교(龍華敎)는 비교적 오랜 활동을 해온 종파이지만, 본존인 미륵불과 종조 진표율사(眞表律師), 그리고 종지(宗旨) 사이에 교리적인 연계가 모호하여 교리의 체계가 서 있지 않은 종파이다. 또한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각 종조를 달리하고 있는 종파도 있다. 대한불교법화종과 한국불교법화종은 그 명칭이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종지와 교리를『묘법연화경』의 근본사상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한국의 대각국사를 종조로 하여 대각국사가 개창한 천태종을 계승하고자 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후자는 중국의 천태대사를 종조로 하여 그가 개창한 천태법화종을 계승하고자 한다. 이같이 종조를 달리하고 있는 것은 두 단체가 서로 다른 종단임을 표하기 위한 것일 뿐, 종조가 종파를 세울 때 주창한 종지가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대각국사가 세운 천태종이 뒤에 선종(禪宗)으로 전향한 사실을 감안하면 대한불교법화종의 종지와 종조 사이에는 거리가 현격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두 종단이 함께 구송(口誦)하면서 행하는 염불수행(念佛修行)이 일본의 어느 불교종파와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길흉을 점쳐 재앙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점찰선악경(占察善惡經)』을 소의경전으로 한 종파로 법상종이 있다. 전통적인 법상종의 본래의 소의경전은『해심밀경(解深密經)』 ·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 『성유식론(成唯識論)』등임에도 중국에서 찬술한 위경(僞經)인『점찰선악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종명(宗名)이나 교리와는 관계없이 민간에 퍼져 있는 미신과 부응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이며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정부의 종교정책과는 전적으로 위배된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종파가 신라 이후 한국불교사에 등장한 종파의 명칭과 종조를 내세우고는 있으나 그 사법(嗣法)을 잇지 않고 있다. 그 중에 정통불교를 내세울 수 있는 종단은 조계종과 태고종이다. 조계종은 달마 이후의 사법을 중국의 조계(曹溪)에서 이어 받은 신라 도의국사를 종조로,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中興祖)로 하고 있으며, 태고종은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삼고 있다. 이것은 두 종단의 동질성을 의미한다. 또 종지에 "석가세존이 자각각타(自覺覺他)하신 각행원만(覺行圓滿)의 근본정신"을 받들기로 한 것을 보아도 그 동질성을 확인할 수가 있다. 태고종의 창종이 조계종에 대한 반발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고종이 창종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와 같이 오랜 불교분규의 종식에 있고 보면, 그 동질성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어 갈 전망이 짙다.
그리고 이 동질성이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서 한국불교의 명암이 걸려 있다고 할 것이다.
사상과 제도의 통일을 보기까지,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한국불교에 크게 작용한 것은 한국불교의 숙명이라 할 수 있다.「불교재산관리법」이 그 숙명의 연장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불교사에서 볼 수 있듯이 승단(僧團) 스스로 종파의 통일을 꾀하거나 조정에 건의하고 조정이 스스로 정책으로 불교교단을 통합하고자 한 것에 반하여「불교재산관리법」은 다양한 불교종파를 파생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점이다.
정부가 한국불교태고종을 승인함으로써 면면히 이어온 전통불교교단은 양분되었고, 이때까지 불교계는 17개의 종파와 종파에 준하는 8개의 불교단체를 합하여 25개 종파로 늘어났고 1979년 10월까지는 등록된 종단이 26개로 늘어난다.
광복 이후의 신흥종교 붐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불교단체가 이같이「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등록함으로써 불교의 한 종파로 공인된 종파 중에는 이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무속의 요소가 짙고 미신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것으로 지적된 종파도 있다. 따라서 종조가 없는 종단이 있는가 하면 종조와 종지,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상호 모순되는 종파도 있다.
모순을 내포한 종파에는 다소 불교적 요소를 지닌 점에서 불교의 종파로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전혀 불교적 요소는 지니지 않은 채 편의상 불교라고 이름한 종파도 있다. 종조를 석가세존으로 하고『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종조의 가르침이나 소의경전인『화엄경』의 사상과 교리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요소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환희성모(歡喜聖母)를 본존불로 한 단체가 버젓이 불교의 한 종파로 공인되고 있는 넌센스는 법의 맹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법의 맹점은 또 "도덕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륜삼강(五倫三綱)을 주장하여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으로 선(仙) · 불(佛) · 유(儒) 통합과 후세불(後世佛)인 미륵세존……" 하는 교리를 가진 단체를 불교종파로 인정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교리를 가진 단체는 유 · 불 · 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단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의 맹점으로 인한 분별없는 종단의 승인은 한국불교를 정(正) · 사(邪)를 가릴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러한 혼돈은 교리면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막연하게 석가세존이 설한『소설경(所說經)』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용화교(龍華敎)는 비교적 오랜 활동을 해온 종파이지만, 본존인 미륵불과 종조 진표율사(眞表律師), 그리고 종지(宗旨) 사이에 교리적인 연계가 모호하여 교리의 체계가 서 있지 않은 종파이다. 또한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각 종조를 달리하고 있는 종파도 있다. 대한불교법화종과 한국불교법화종은 그 명칭이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종지와 교리를『묘법연화경』의 근본사상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한국의 대각국사를 종조로 하여 대각국사가 개창한 천태종을 계승하고자 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후자는 중국의 천태대사를 종조로 하여 그가 개창한 천태법화종을 계승하고자 한다. 이같이 종조를 달리하고 있는 것은 두 단체가 서로 다른 종단임을 표하기 위한 것일 뿐, 종조가 종파를 세울 때 주창한 종지가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대각국사가 세운 천태종이 뒤에 선종(禪宗)으로 전향한 사실을 감안하면 대한불교법화종의 종지와 종조 사이에는 거리가 현격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두 종단이 함께 구송(口誦)하면서 행하는 염불수행(念佛修行)이 일본의 어느 불교종파와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길흉을 점쳐 재앙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점찰선악경(占察善惡經)』을 소의경전으로 한 종파로 법상종이 있다. 전통적인 법상종의 본래의 소의경전은『해심밀경(解深密經)』 ·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 『성유식론(成唯識論)』등임에도 중국에서 찬술한 위경(僞經)인『점찰선악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종명(宗名)이나 교리와는 관계없이 민간에 퍼져 있는 미신과 부응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이며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정부의 종교정책과는 전적으로 위배된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종파가 신라 이후 한국불교사에 등장한 종파의 명칭과 종조를 내세우고는 있으나 그 사법(嗣法)을 잇지 않고 있다. 그 중에 정통불교를 내세울 수 있는 종단은 조계종과 태고종이다. 조계종은 달마 이후의 사법을 중국의 조계(曹溪)에서 이어 받은 신라 도의국사를 종조로,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中興祖)로 하고 있으며, 태고종은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삼고 있다. 이것은 두 종단의 동질성을 의미한다. 또 종지에 "석가세존이 자각각타(自覺覺他)하신 각행원만(覺行圓滿)의 근본정신"을 받들기로 한 것을 보아도 그 동질성을 확인할 수가 있다. 태고종의 창종이 조계종에 대한 반발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고종이 창종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와 같이 오랜 불교분규의 종식에 있고 보면, 그 동질성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어 갈 전망이 짙다.
그리고 이 동질성이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서 한국불교의 명암이 걸려 있다고 할 것이다.
불교행사
한국불교의 모든 종단에서 공통으로 행하는 주요 행사로는 ① 부처님 오신 날(불탄절) 봉축법회 ② 부처님 출가일 봉축법회 ③ 부처님 성도일 봉축법회 ④ 부처님 열반일 봉축법회가 축을 이루고 있다. 이 4대 법회를 중심으로 각 종단은 십재일(十齋日)(음력 1 · 8 · 14 · 15 · 18 · 23 · 24 · 28 · 29 · 30일)에 법회를 갖는다. 그 중에서도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및 지장재일(음 18일) · 관음재일(음 24일)은 각각 기도법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백종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와 음력 정월 15일 · 단오 · 한가위 · 10월 상달, 그리고 12월 15일은 우리 민속과 관계지어진 각종 법회가 다양하게 개최된다. 특히 월남참전 이후에는 각 종단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월남참전 국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법회를 갖는 특색을 갖게 되었다.
이밖에 대한불교조계종은「불교미술공보전」을 해마다 전국 규모로 개최함으로써 불교미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청년회에서는 3 · 1절기념일에 만해백일장을 전국적으로 개최하여 3 · 1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있다.
이밖에 대한불교조계종은「불교미술공보전」을 해마다 전국 규모로 개최함으로써 불교미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청년회에서는 3 · 1절기념일에 만해백일장을 전국적으로 개최하여 3 · 1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있다.
역경
대한불교조계종은 정화사업을 시작하면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가장 긴요한 사업으로 역경 · 포교 · 도제 양성의 3대 사업을 설정하고, 1962년 11월 역경위원회를 구성하고 종정의 직접 지휘 아래 역경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동국대학교에 동국역경원을 개원하였다. 그러나 사업은 부진하였다.
그 중요한 원인은 재원의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다행히도 군사정부는 고전국역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고전의 국역기관으로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법인체로 발족시키고 국고보조를 하게 되었으며, 이 고전국역의 일환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이 추진하는 역경사업에도 일부 국고를 보조하게 되었다. 정부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9,489만 1,000원의 국고를 지원하였고 1976 · 1977년에는 각각 4백만원을 문예진흥원이 지원하였다.
1966년부터 이루어진 정부의 보조금 지원에 의해 추진된 역경사업은 당해년도에『불본행경』2권을 비롯하여『대방광불화엄경』2권,『중아함경』2권,『심밀해탈경』 · 『대반열반경』등을 변역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잡아함경』2권의 역경을 비롯하여『묘법연화경』등 모두 7종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추세로 매년 역경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1979년 현재에 이르러서는『대반야경』6권,『선문염송』4권,『본생경』4권,『유가사지론』4권 등을 비롯하여 약 100여권의 역경사업을 추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역경작업은 일반인이 쉽게 불교경전을 해득할 수 없는 점을 해결하고, 나아가 불교교리의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중요한 원인은 재원의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다행히도 군사정부는 고전국역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고전의 국역기관으로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법인체로 발족시키고 국고보조를 하게 되었으며, 이 고전국역의 일환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이 추진하는 역경사업에도 일부 국고를 보조하게 되었다. 정부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9,489만 1,000원의 국고를 지원하였고 1976 · 1977년에는 각각 4백만원을 문예진흥원이 지원하였다.
1966년부터 이루어진 정부의 보조금 지원에 의해 추진된 역경사업은 당해년도에『불본행경』2권을 비롯하여『대방광불화엄경』2권,『중아함경』2권,『심밀해탈경』 · 『대반열반경』등을 변역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잡아함경』2권의 역경을 비롯하여『묘법연화경』등 모두 7종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추세로 매년 역경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1979년 현재에 이르러서는『대반야경』6권,『선문염송』4권,『본생경』4권,『유가사지론』4권 등을 비롯하여 약 100여권의 역경사업을 추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역경작업은 일반인이 쉽게 불교경전을 해득할 수 없는 점을 해결하고, 나아가 불교교리의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출판·연구
불교에 관한 연구저서 및 논문은 1960년대 이후 해가 거듭할수록 계속 증가하였다. 연구도서의 수적인 증가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가져왔다. 본 논고에서는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하여 간행된 도서를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1961∼1969년까지의 연구도서 출판은 대략 100여권이 간행되었다.
1963년 동국대학교에서 출판된『불교역사철학』은 불교철학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고, 다음해인 1964년에 홍정식의『불교입문』, 황성기의『불교학개론』등도 개론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1962년 운허의『무량수경』, 1966년 무공의『불법』, 설봉의『선문염송』등은 불법을 수행하는 승려들의 저서로서 의미를 갖는다.
불교저서의 간행은 1970년대에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 1979년까지 약 400여가지의 연구성과를 가져와 1960년대에 비하여 외형적으로 약 4배의 증가를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저서 간행은 동국대학교 내에 있는 동국역경원의 중심적 역할이 두드러지며, 한국불교연구원이나 화엄학연구소 및 각 사찰에서 많은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연구논문의 발표도 1960년대에 비하여 1970년대에 많은 결과물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논문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를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1971년에는 사명대사의 업적 · 생애 · 사상 · 구국의 업적 등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으며, 1973년에는「불교의 국가관」,「불교의 정치사상」,「불교의 사회 · 경제관」,「불교적 치국의 사적 실례」등의 논문을 게재하여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다.
1975년부터는 한국불교학회를 통하여 많은 논문이 배출되었으며, 한국미술사학회에서도 불상의 복원이나 탑의 구성 등에 관한 논문이 나왔다. 1970년대 불교에 관련된 논문양상은 불교사나 불교철학 및 불탑의 분석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연구저변이 확대되었으며,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동국대학교에서 출판된『불교역사철학』은 불교철학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고, 다음해인 1964년에 홍정식의『불교입문』, 황성기의『불교학개론』등도 개론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1962년 운허의『무량수경』, 1966년 무공의『불법』, 설봉의『선문염송』등은 불법을 수행하는 승려들의 저서로서 의미를 갖는다.
불교저서의 간행은 1970년대에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 1979년까지 약 400여가지의 연구성과를 가져와 1960년대에 비하여 외형적으로 약 4배의 증가를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저서 간행은 동국대학교 내에 있는 동국역경원의 중심적 역할이 두드러지며, 한국불교연구원이나 화엄학연구소 및 각 사찰에서 많은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연구논문의 발표도 1960년대에 비하여 1970년대에 많은 결과물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논문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를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1971년에는 사명대사의 업적 · 생애 · 사상 · 구국의 업적 등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으며, 1973년에는「불교의 국가관」,「불교의 정치사상」,「불교의 사회 · 경제관」,「불교적 치국의 사적 실례」등의 논문을 게재하여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다.
1975년부터는 한국불교학회를 통하여 많은 논문이 배출되었으며, 한국미술사학회에서도 불상의 복원이나 탑의 구성 등에 관한 논문이 나왔다. 1970년대 불교에 관련된 논문양상은 불교사나 불교철학 및 불탑의 분석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연구저변이 확대되었으며,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