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1. 시작 성가 (발자취 또는 전례에 맞는 성가)
2. 기도 (발자취 158쪽 집회 시작 기도 또는 자유 기도)
3. 출석 확인 및 인사
4. 회칙
5. 생활 묵상
6. 생활 나눔
7. 공지사항
8. 마침 기도(발자취 159쪽 또는 자유 기도)
회개 초기 아무도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때, 프란치스코의 삶에 이정표가 되었던 것은 단 한 줄의 성경 구절이었다. 어느 사도의 축일 미사에 사제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었던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마태 10,9~10)는 성경 말씀은,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주었고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을 계시해 주었다. 이 말씀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이것이먀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진심으로 갈망하던 바이다!"라고 외치며 그 자리에서 신을 벗고 지팡이를 던져 버렸다. (참조 : 대전기 3,1)
지식은 사람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만들지만, 지혜와 현명함이 지식의 양(量)에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 영혼을 일깨우고 삶을 변화시켰던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길이나 돌밭에 뿌려진 백 개의 씨앗보다 옥토 위에 뿌려진 단 하나의 씨앗에서 열 배 백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그 결과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이에게 합당한 태도가 요구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그릇되이 받아들이고 남용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대단히 부끄러운 일(군고 6, v3)이라 탄식하며 그 부정함을 경고한다.
권고 7장에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올바른 지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문자(지식)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음을 경고한다.
사도가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권고 7, v1)
권고 7장은 기본적으로 이 구절의 주제와 구조를 따른다. '사람을 죽이는 문자'(권고 7, v2~3)와 '사람을 살리는 영'(권고 7, v4)을 대비시키며, 형제들로 하여금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한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문자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로, 문자를 남에ㅔ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남들보다 더 우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태도는 남들 위에 서고 싶어 하는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으로, 문자에 마땅히 담겨져 있어야 하는 '문자의 영'을 비우고,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태워 세상의 '영광과 영예'(권고 6,v3)를 얻기 위한 밑천으로 삼는 것이다.
교만한 형제들은 그것을 세상의 성공처럼 생각하겠지만, 프란치스코에게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 그 자체였다. 성인에게 '죽음'은 육신의 생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문자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온전히 그분의 소유임을 망각한 채,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소유하고 자랑'(참고 권고 2, v3)하는 것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성인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수도자)'이라는 표현을 두 차례 반복하며, 형제들의 부적절한 태고다 야기하는 결과의 엄중함을 강조한다.
반면,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문자를 '육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말과 모범으로 돌려 드림"으로써 가능해진다. 흙의 먼지에 '주님의 영'이 불어 넣어졌을 때 비로소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문자 또한 온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영'이 함께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말씀은 오로지 그분께 속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문자를 주 하느님께 "말과 모범"으로 다시 되돌려 드리는 기쁨을 통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권고 7장이 '교만'의 위험에 빠진 형제들을 향한 권고였다면, 8장은 그 반대의 경우이다. 형제회에서 설교는 중요한 사도직이었지만 모든 형제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는 지적 소양(知的 素養)과 글을 읽는 등의 능력도 요구되는 일이었고, 결국 설교의 능력이 없는 형제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작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형제들 안에서 갈등과 분열을 부르는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바로 형제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시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시기'가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이 갖는 감정이며, 자기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시기는 인간 본성에 직접 뿌리내린 원초적 감정이며, 어느 누구도 이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사의 적지 않은 일들이 바로 '시기' 때문에 일어났으며, 성경도 시기와 관련된 무수한 사건들을 전하고 있다. '카인과 아벨'(창세 3장) '야곱의 아들 요셉'(창세 37징),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1사무 18장) 등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관계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시기'가 언급되고 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권고 8,v3)
프란치스코는 형제들 속에서 싹튼 시기심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신성 모독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사실 기시하는 이들도 다른 이가 이룬 좋은 것들이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가능성과 능력을 나에게는 주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시기가 싹트고 자라게 된다. 그런데 '시기'의 가장 밑바닥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 '시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사람이 자신의 교만함으르 충족시키지 못할 때 그 교만은 시기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놀랍게도 시기의 깊은 곳에는 '부러움'이 숨어 있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로서, 구약의 지헤 문학은 '악'을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지적한다.
"너의 마음은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날마다 주님을 열심히 경외하여라."(잠언 23,17)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마라."(잠언24,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격분하지 말고 악인들을 부러워하지 마라."(잠언 24,19)
결론적으로 '교만'과 '시기'는 공동체 안에서 대립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상 그 둘은 같은 아버지를 둔 자녀들이다. 모두 자신을 과시하며 드높이고 찬사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유래하며, 그 마음을 충족하는가 충족하지 못하는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세상의 가치를 두고 영원히 싸울 것이며 마지막에는 모두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려는 사람은' 교만'과 '시기'라는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해야 하며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에 의존하는 사랑(amare)이 아니라, 모든 경우에 존중과 성실함으로 상태방을 대하는 사랑(diligere)이다.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성실할 의무가 있으며, 인준받은 회칙 10장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형제들은 모든 교만과 헛된 영과, 질투와 탐욕, 이 세상 근심과 걱정, 그리고 중상과 불평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한 글 모르는 형제들은 글을 배우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갈망해야 할 것에 집중할 것입니다. 곧,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또한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인준받은 회칙 10,v7~11)
글: 최문기 마티아/ OFM Conv.
생활 나눔
1. 우리가 형제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존경했던 기억을 나누어 보자.
2. 세상의 근심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어떠한 방법들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