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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주창자 칼빈을 공격하는 이단들의 오해에 대하여
존 칼빈을 거짓 비판한 진실을 알자
세르베투스 비엔느 공판: 존 칼빈의 관련을 중심으로
라은성 교수님
http://www.eunra.com/ 홈페이지에서 발췌
학력
1982-1985 B.A.고신대학교, 신학과, 부산. 1986-1988 M.Div.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신학 전공, 서울.1994-1995 Th.M.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성경(실천)신학 전공, St. Louis, Missouri.1998-1999 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교회사 전공, Deerfield, Illinois 1999-2001 Ph.D. University of Pretoria, 교회사 전공, Pretoria, South Africa
연구실적
학위 논문: “Michael Servetus: the unfortunate and fair conviction as heretic and seditionary at the trials in Vienne and Geneva, 1553.” Ph.D. diss., University of Pretoria, 2001. 연구 논문: “The Question of Calvin’s Involvement at the Vienne trial of Servetus in 1553.” Verbum et Ecclesia. 2002, 23(1): 168-182. “마이클 서비터스의 공판에 대한 소고.” 「신학지평」14 집 (2001): 270-96.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연관된 템플 기사단의 이단고소사건.” 『신학지남』(겨울 2002): 278-322. “세르베투스 비엔느 공판: 존 칼빈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역사논총』(겨울 2002) 발도파 고대성: 발도와 발도파의 관계 2003년 겨울. “로마 카톨릭주의 ‘사도적 계승’ 비판.” 『국제신학 』 5호 (겨울 2003): 168-91. “영성신학 비판: 관상신학을 중심으로.” 『조직신학연구』(겨울 2004). “카톨릭 칭의에 대한 칼빈의 비판(1).” 『신학지남』278호 (봄 2004): 331-56. “카톨릭 칭의에 대한 칼빈의 비판(2).” 『신학지남』279호 (여름 2004): 273-317. “스페인 종교재판.” 『역사신학논총』7호 (겨울 2004): “페페투아와 페실리타스의 순교.” 『국제신학 』 6호 (겨울 2004): 그 외에도 『국민일보』 『동아일보』 『국제개혁신보』 『월간고신』 『목회와 신학』 『현대종교』 『참 소중한 당신』등등 여러 기독교 잡지에 글들이 실림. “한국교회 영성신학 비판 1: 관상신학을 중심으로.” 『현대종교』 365호 (2005): 22-30. "한국교회 영성신학 비판 2: 관상신학을 중심으로.” 『현대종교』 366호 (2005): 116-124. “개혁자 존 후스.” 『신학지평』(봄 2005): “파코미안 수도원 운동에 끼친 영지주의.” 『성경과 신학』 38권 (2005. 10): 76-115. “2005 세계를 돌아본다: 올해 재난들이 하나님의 심판인가?” 『월간고신』 291호 (2005, 12): 30-33. “개혁신학에서 본 셀교회: 역사성을 중심으로.” 『국제신학』 7호 (겨울 2005): 89-119. “안토니 생애.” 『국제신학』 8호 (겨울 2006): 113~135. “번영신학 바로보기.” 『월간 프리칭』 51호(7월 2008): 18~23.
경력
1986-1990 부 목 사, 강도사, 전도사: 홍릉교회(동평양 노회, 장경두 목사 시무) 서울1990-1992 부 목 사: 온천제일교회(동부산 노회, 장차남 목사 시무) 부산1994-1995 교육목사: 소망교회(미주 총회, 강원용 목사 시무) St. Louis, Missouri1995-1998 담임목사: 에반스빌 한인교회, Evansville, Indiana2000-2001 교 수: 중부 개혁장로회 신학교(Reforme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the Midwest; 미주총회 소속 신학교), Chicago, Illinois2001-현재 시간강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대학원, 그리고 총회신학원 2002-현재 시간강사: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 2003-현재 교 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2004-현재 Columnist: 크리스천투데이(chtoday.co.kr) Editor: 크리스찬 북 뉴스(book-news.co.kr) 2004-현재 KBS 1 TV, CTS TV, CBS 라디오, CGN TV, 북방선교방송, 극동방송 등 출연 및 강의 또 『목회와 신학』 『빛과 소금』 『현대종교』 『국민일보』 『월간고신』 등에 다수의 글들을 기고 2005-2006 기고자: “기독교 고전 2000년” 기획시리즈(www.kidok.co.kr) 2006-현재 외래교수: 세계선교신학교(중국, 조선족을 위한) 2007-현재 외래교수: 대신총회연구원 2007년 3월-현재 ‘교회사학교’ 운영. 2007년 1월-현재 『Guideposts』 ‘술술 풀어가는 교회사’ 기고
저서와 역서
저 서:ㆍ『연구주제부터 포맷까지』(그리심, 2001) ㆍ『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초대교회사편)』(그리심, 2005)ㆍ『신학적 해석학』(이컴 비즈넷, 2005)ㆍ『다빈치 코드의 족보』(동이, 2005)ㆍ『천상의 누이들(중세교회사편)』(그리심, 2006) ㆍ『라은성교수의 교회사 맥(脈)잡기 1, 정통과 이단』(그리심, 2006)ㆍ『라은성교수의 교회사 맥(脈)잡기 2, 초대교회사』(그리심, 2006)ㆍ『라은성교수의 교회사 맥(脈)잡기 3, 중세교회사』(그리심, 2006)ㆍ『라은성교수의 교회사 맥(脈)잡기 1, 정통과 이단』공부교재 (그리심, 2006)ㆍ『라은성교수의 교회사 맥(脈)잡기 4, 종교개혁사』(2007)-가책자ㆍ『기쁠 때와 슬플 때』(프리칭 아카데미, 2006)ㆍ『오소서! 성령이여!』(글누리, 2007), 성령강림절 설교집(공저)역 서: ㆍBrown, O. J. Harold.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그리심, 2001)ㆍBauman, Michael and Martin I. Klauber, eds. 『기독교 역사가들』(이레, 2002)ㆍEstep, R. William.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그리심, 2002)ㆍGeisler, L. Norman, Ralph McKenzie. 『로마 카톨릭주의와 복음주의』(그리심, 2003)ㆍCunningham, William. 『역사신학 (상)』(그리심, 2004)ㆍCunningham, William. 『역사신학 (하)』(그리심, 2006) 시 상: 제 19회 한국기독교 출판문화상, 신학 해외번역부분 최우수상(2002): 윌리암 에스텝 지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라은성역. 시 상: 제 22회 한국기독교 출판문화상, 국내저작부분 최우수상(2005) :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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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베투스 비엔느 공판: 존 칼빈의 관련을 중심으로
The Question of Calvin's Involvement in the Trial of Servetus at Vienne
라은성
1. 서론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09-1553)는 일반적으로 의사, 수학학자, 저술가, 출판업자, 그리고 이단자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는 1553년 10월 27일 제네바 샴펠(Champel)에서 화형을 당한 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자이다. 제네바 시민공판은 그를 마땅히 죽어야할 범죄라고 정죄 하였다. 그 평결은 그의 저술들에서 발췌된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성과 제네바시의 치안 방해라는 범죄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비엔느 공판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재한 것으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집중되어 있다. 비엔느의 공판은 종교재판이었다. 그 공판을 시도한 자들은 세기에 악명 높은 프랑스 종교재판자들이었다. 이 공판과 연관되어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충분한 증거 없는 억지 주장들로 역사적 오명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세르베투스에 대한 사건에 칼빈이 연루되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억지 주장들은 그의 처형이 있은 직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증거 없는 억지 주장들은 세르베투스의 일에 칼빈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추측에서 나왔다. 그 추측은 세르베투스의 일방적 주장을 근거로 한다.
두 공판에서 특히 제네바에서 세르베투스가 내뱉은 위증에 근거하여 증거 없는 여러 비난들은 역사적으로 세바스찬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와 카밀리오 레나토(Camillio Renato)로부터 시작하였다. 특히 카스텔리오는 1544년 제네바에서 추방한 후, 칼빈의 비관용에 대한 글을 써서 그를 비난했다. 세르베투스의 편에 서서 칼빈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기독교인의 양심까지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 했다. 1554년 9월 레나토는 그의 글 「카르멘」(Carmen)에서 이렇게 칼빈을 비난하고 있다:
오 칼빈이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행위와 분명한 증거를 건네주었고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미친 작태를 보여주었구나. 그렇게 무시무시한 죄악을 도발하게 했던 정신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한 행동이 하늘의 평화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 . .
. . . . 오 칼빈이여, 슬프고 캄캄한 그늘 속에 갇혀서 큰 소리로 외치며 불길 속에서 던져져 버려야할 너의 무시무시한 행위는 어떤 세대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한 편에서는 “인문주의적 라틴어로 포장된 성경적인 요소와 미신적인 요소”를 섞은 작품이라고 비판이 빗발쳤다. 위의 비난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레나토가 칼빈에 대해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책임을 비난하고 추궁하면서 그의 행동은 잔인하고 비열한 비 기독교인적인 행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소들은 세르베투스의 사망 350주년에 이르러 한층 부각되면서 그의 화형장, 즉 샴펠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스위스와 프랑스 개혁파 교회는 기념비를 세웠다. 칼빈에 대한 모든 억지주장들은 그가 제네바 의회와 정부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가정아래 세워진 고소들이었다. 그리고 세르베투스 자신이 칼빈을 향해 개인적 적개심을 가진데서 비롯된 추정들에 기초한다. 칼빈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실적 증명을 참고하지 않고 주로 제네바 공판동안 세르베투스가 진술한 거짓 내용과 위증들에만 의존하고 있다.
칼빈에 대한 고소들은 산발적이며, 실제 사실을 무시하며, 개인적 감정에 치우쳐 있다. 지금까지 칼빈에 대한 불명예는 주로 1553년에 있었던 두 공판-비엔느와 제네바-과 관련되어 있다. 그 논쟁들은 비엔느 공판보다 제네바 공판에 논쟁이 집중되어 있지만 그 불명예의 시작점이 된 곳이 비엔느 공판이란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공판의 배경과 진행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비엔느 공판을 통해 칼빈에 대한 억지 주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비엔느 공판에만 집중되어 있다. 제네바 공판과 같은 해에 있었던 비엔느 공판은 로마 카톨릭 종교재판소에 의해 진행되었다. 당시 제네바는 개혁 도시였고 비엔느는 강력한 로마 카톨릭 도시였다. 이 글에서 비엔느 공판과 관련된 칼빈에 대한 연구 주제는 과연 칼빈이 공판의 결정적인 증거를 드 트리(de Trie)에게 건네주었고 세르베투스를 기소하도록 시켰느냐 라는 주장에 대해서이다. 그리하여 칼빈에 대하여 혐의를 던지고 있다. 칼빈의 적대자들은 칼빈이 드 트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세르베투스를 죽이려는 음모였다고 추정한다. 이 혐의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주요한 질문을 가진다: 칼빈이 과연 세르베투스에 대한 비엔느 공판에 연루되었는가? 또 이 질문의 답변을 찾기 위해 두 가지 보충 질문을 던져본다: 드 트리의 서신들은 무슨 내용인가?; 공판은 어떠했는가? 첫 번째 보충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이 글은 먼저 드 트리와 그의 사촌간 주고받았던 서신들의 진상을 살펴본다. 그것을 통해 빚어진 칼빈의 연루에 대한 논쟁을 조명할 것이다. 이어서 빚어진 비엔느 공판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비엔느의 공판일정을 기초하여 세르베투스 비엔느의 종교재판의 진상을 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세르베투스의 증언이 개인적 감정과 거짓이라는 것을 밝히므로 칼빈에 대한 억지주장이 허구임을 밝히고자 한다.
2. 드 트리의 서신
세르베투스가 1553년에 출판한 「기독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은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로 하여금 비엔느 마을에서 은밀하게 숨어있는 그를 수색케 하고, 검거하고, 마침내 정죄토록 했다. 세르베투스는 1531-1532년에 출판한 두 이단작품들로 인해 이미 종교재판자들의 주목대상이 되었었다. 이 곳과 저 곳을 다니며 살다가 1540년부터 자신의 본래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거의 13년 동안 은닉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이 동안의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제네바 공판에서 그의 증언에 의하면, 죽음이 두려워서 은닉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의 정체는 전혀 다른 곳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다. 먼저는 그가 1553년 1월 결정적 이단서적을 출판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종교재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종교재판은 중세적 분위기를 그대로 연상하였다.
비엔느의 추기경 프랑소와 드 투르농(François de Tournon)은 프랑스 남부 지역의 치안 책임자였다. 인정사정 없는 로마 카톨릭사제로서 개혁자들, 혁신자들, 그리고 이단자들을 사정없이 다루고 핍박하는 자였다. “그가 그 자리에 있는 수년 동안 수천 명의 발도파들(Valdensians)과 알비파들(Albigensians)을 죽였다.” 프랑스의 종교재판자가 되었던 마티유 오리(Mattieu Ory)는 드 투르농 아래서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모든 고올 지방의 종교재판소 최고 책임자며 교황청의 교도소장을 겸한 자였다.” 이러한 살벌한 사람들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 세르베투스는 교묘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살고 있었고 이제 그의 신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기독교 회복」의 복사본을 기욤 드 트리(Guillaume de Trie)는 갖게 되었다. 그는 칼빈의 가까운 친구로서 개종한 프로테스탄트였고 제네바에 살고 있었다. 드 트리는 1549년 제네바로 이사오기 전에 프랑스 귀족이고 치안관이었다. 후에 제네바의 200인 의회(Council of Two Hundred)의 의회원이 된다. 제네바에 살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사촌 앤투안 아르네이(Antoine Arneys)는 한 서신을 보냈다. 그는 독실한 로마 카톨릭이었고 사촌 드 트리를 다시 카톨릭으로 재 개종을 시도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1553년 2월 26일 드 트리는 답장을 보낸다. 그 답장에서 아르네이가 “제네바 교회의 기강이나 질서가 엉망이고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곳”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드 트리는 이 문제를 분명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답장을 보내면서 제네바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 훨씬 나은 기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비근한 예로서 비엔느에 신분을 숨기고 은닉하고 있는 세르베투스의 존재를 알렸다. 또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대해서 사촌 아르네이에게 알렸다. 동시에 답장과 함께 세르베투스의 저서 「기독교 회복」의 앞부분 8페이지를 동봉했다.
드 트리는 사촌에게 자신이 왜 로마 카톨릭 교회로 재 전향할 수 없는 이유를 보내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 가운데 이단자를 보존하고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로마 카톨릭으로 전향하게 하는 사촌의 의향을 꺾으려고 했다. 이러한 사실들과 함께 드 트리는 화형을 당할 이단자 세르베투스를 그에게 알렸다. 편지에서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케르베로스(Cerberus), 즉 머리 3개 달린 지옥을 지키는 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이며, 유아 세례를 악마적 고안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렸다. 드 트리는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실제 이름을 거명 하면서 현재 빌레누브(Villeneuve)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는 스페인 사람이라고 밝혔다. 사촌 아르네이가 제네바 개혁 교회를 공격한 것처럼 드 트리는 그의 정체를 알림으로 로마 교회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르네이는 사촌이 보낸 편지 그리고 세르베투스의 책 앞 페이지를 리용의 권위자들에게 전달했다. 드 트리의 편지는 세르베투스를 검거해야될 필요를 제공하였기에 곧장 법원으로 보내졌고 세르베투스의 정체, 그의 행위, 그리고 삶들이 이제 백일하에 밝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르네이는 “이것을 혐오할만한 이단성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편지를 접한 권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편지를 리용의 종교재판자, 도미니칸 탁발 수도사 마티유 오리, 그리고 대주교 대리 법무관 보티에(Bautier)에게 곧 전달했고 검거를 진행시켜야 한다고 서둘렀다. 1553년 3월 12일 오리는 추기경 투르농의 비서 드 빌라르(de Villars)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비밀적으로 이 일을 진행해야할 것이라고 했다. 드 빌라르는 또 다시 이것을 리용의 대리 법무관 바티에와 비엔느의 대감독의 대리 법무관 루이 아르젤리에르(Louis Arzellier)에게 급히 알리고 회의를 소집토록 했다. 긴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은 토의했다. 그 결과를 3월 15일 다피네(Dauphiné)의 치안 책임자 드 마기롱경(Monsieur de Maugiron)에게 서신을 써서 알렸다. 드 마기롱경은 아르젤리에르에게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난 후 조사하라고 명을 내렸다.
보티에는 왕립 검사에게 제시할 증거들, 즉 오리의 편지, 추기경 드 투르농의 편지와 함께 세르베투스가 출판한 「기독교 회복」의 앞 페이지를 모았다. 그리고 3월 16일, 루이 아르젤리에르와 드 마기롱의 부집행관 앤터니(Anthony)는 페이롤리에르(Peyrollier)를 불러 진상을 진행하려고 했다. 또 보고를 받은 왕립 검사는 그에게 빌레누브라 불리는 어떤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비엔느에 구속 명령서를 전달했다. 명령서를 받아든 페이롤리에르에게 추기경 드 투르농은 드 마기롱경에게 그 일을 비밀적으로 진행하면서도 속히 행하라고 했다.
사건을 맡은 행정관들은 드 마기롱경의 궁궐에 모였다. 동시에 루이 아르젤리에르, 부집행관 앤터니, 그리고 드 마기롱경의 비서 등은 미카엘 드 빌레누브(Michael de Villeneuve)에게 서한을 보내어 문의할 것이 있으니 소환에 응하라고 통고했다. 이단성에 대한 심각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자신의 저서들, 문서들, 그리고 자료들을 소멸하라고 알렸다. 비엔느 종교재판소의 소환 통보를 받아든 세르베투스는 “성직자들과 신학 교수와 좋은 관계를 지금까지 지냈으며 이단성이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응답했다. 두 시간의 여유시간을 달라고 한 그는 그 동안 그는 의심쩍은 자료들을 모두 소멸하여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했다. 그런 후, 그들에게 자신의 방을 조사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단서를 찾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세르베투스와 빌레누브와의 관계를 지을 수도 없었다. 이미 그가 의심스러운 서적들과 증거들을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3월 17일 세르베투스의 이단서적 「기독교 회복」의 인쇄업자 아르놀(Arnoullet)이 툴루제(Toulouse)에 급한 사업의 일로 출타하였기에 그를 대신해서 그 서적의 교정자 구에롤(Guéroult)만을 행정관들은 소환했다. 구에롤에게 묻기를 지난 18개월 동안 인쇄한 목록을 제시하라고 했지만 모든 혐의들을 부인했다. 오래 동안 여러 질문을 물었지만 그들은 확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의 집과 인쇄소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어서 아르놀 밑에서 일하는 종들과 가족들을 심문했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또 인쇄소 일꾼들과 그들의 가족들조차도 이단 서적의 앞 페이지를 인쇄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다음 날, 3월 18일 아르놀이 툴루제에서 돌아온 것을 알게 된 행정관들은 그를 급히 소환했다. 그는 페이지들을 알지도 못하며 그런 것을 인쇄하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론을 내리기를, 의심은 나지만 “제시된 물증들만으로는 종교재판자에게 빌레누브가 이단자 세르베투스라는 고소가 될 수 없었고, 「기독교 회복」의 저자라는 사실도 밝힐 수 없었다.” 행정관들은 피에르 파미에(Pierre Palmier)에게 자신의 주치의, 세르베투스에 대해 문의했지만 그 역시 그가 출판한 서적과 직업에 대하여 이름 외에는 그에 대한 어떤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파미에는 오리를 급히 만나 파미에와 함께 직면한 이단적 이슈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주치의 빌레누브에 대한 처리를 잘 부탁한다고 하고 확증을 더 확보해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리용의 종교재판자 오리는 조사를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아르네이에게 제네바 사촌, 즉 드 트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단서적의 모든 페이지를 제출토록 강요했다. 주저하고 있는 자신에게 서신을 받아쓰도록 까지 하는 오리의 빗발 같은 요구에 견디지 못하고 아르네이는 사촌 드 트리에게 오리가 원하는 대로 알렸다. 자신이 편지를 통해 종교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는 드 트리는 사촌의 편지를 읽고 당황했을 뿐 아니라 혼선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사촌과 주고받는 편지가 비엔느의 종교재판자들에게 전달되고 세르베투스에 종교재판이 진행되면서 그 물증을 요구하는 일까지 확대되었는지 어찌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드 트리는 칼빈에게 이단서적을 요구했지만 칼빈은 완강히 거절할 뿐 아니라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촌에게 편지를 써서 그 영문에 대해 물었고 황당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 요구하는 어떠한 것도 줄 수 없다고 아르네이에게 답장했다. 더욱이 그 책은 이미 2년 전에 로잔에 있는 비레이(Peter Viret)에게 칼빈이 보내었다는 것이다.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추궁을 당하는 사촌이 보낸 편지를 읽고 트리는 그의 사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3월 26일 드 트리는 세르베투스가 칼빈에게 보낸 편지 다발을 보냈다. 그 편지 안에서 그는 그 다발을 얻기 위해 칼빈에게 강한 어투로 말하면서 억지로 받아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종교재판자들은 사촌을 강권하였다. 급전이 또 다시 보내졌다. 하는 수없이 3월 30일에 드 트리는 칼빈이 소유하고 있는 자료 즉,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가장자리에 세르베투스의 서명과 짧은 주해가 있는 자료를 보냈다.
3. 칼빈의 연관
여기에서 칼빈에 대한 증거 불충분한 억지 주장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편지들, 즉 칼빈과 세르베투스 간에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드 트리에게 주어 비엔느 공판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벨파스트(Belfast)의 장로교 목사 포터(Porter)는 칼빈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자로서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편지들과 함께 「세례에 대하여」(De Baptismo)의 421-424 페이지를 보낸 것을 볼 때 그는 세르베투스를 죽이기 위해 로마 카톨릭인들의 종교재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주장하였다. 어떻게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을 공개적으로 타인들에게 넘겨줄 수 있느냐고 칼빈을 비난한다. 하지만 칼빈은 개인의 기밀성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킬렌(Killen)은 칼빈이 개인적 서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다. 세르베투스가 먼저 개인적 서신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기독교 회복」에 공개적으로 인쇄했다. 더욱이 칼빈에게 전달된 서신들은 세르베투스와의 통신을 그만두자고 한 후에도 세르베투스는 지속적으로 일방적으로 칼빈에게 보냈다. 처음 한 두 번 그에게 응답한 후, 칼빈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칼빈은「기독교 회복」이란 이단서적의 저자가 세르베투스라든지 빌레누브라고 언급한 적이 결코 없다. 비록 인쇄하기 7년 전에 그 사본이 칼빈에게 전달되었지만 칼빈은 전혀 그 저자성을 언급하거나 어떤 조치도 꾀하지 않았다. 칼빈은 비엔느에 세르베투스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저자성을 이제야 밝히려고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고발할 의사가 있었다는 억지주장을 설득시키려면 먼저 칼빈이 그의 사는 곳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통로를 통해 고발하지 않고 있었느냐를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칼빈은 결코 세르베투스를 고발하지 않았다.
칼빈에 대한 또 다른 억지 주장이 있다. 드 트리가 아르네이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가 아니라 칼빈이라고 한다. 칼빈의 반대자인 윌리스(Willis)는 드 트리의 개인 편지들이 칼빈의 구술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한다. 라이트(Wright) 역시 “트리가 아르네이의 편지들을 칼빈에게 보여주었고, 칼빈은 그에게 이렇게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편지들의 원본을 찾아내어 출판했던 달티니(D'Artigny)는 칼빈이 윌리엄 트리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고발 편지를 쓰라고 했다. 트리를 이용한 칼빈은 비엔느에 있는 세르베투스에 핍박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럴까? 칼빈의 저자성에 대한 논란은 세르베투스의 비엔느 공판에 가장 열띤 논쟁 이슈이다. 다이어(Dyer)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편으로 보면, 아베 드알티니는 드러난 확증에서 너무 어긋나게 빗나갔다. 트리의 편지가 칼빈의 구술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을 트리의 이름으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지식이 없이도 [트리가] 그러한 편지를 쓸만한 인물이었다고는 가정할 수 없을까? 또 칼빈이 그런 의심을 받을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그렇게 했을까? 그[탈티니]는 로마 카톨릭 종교재판의 무시무시한 이빨에 세르베투스를 덥석 물도록 칼빈이 자행했다는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추정할 뿐이다. 그가 편지 써는 일에 도왔느냐 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할 일이라고 본다.
문제의 진상을 판단할 때 사실적 증거들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판단해야하리라 믿는다. 알다시피 편지는 드 트리의 사촌 아르네이와의 개인적 편지였다. 만일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제거할 의사가 있었다면 드 트리가 먼저 사촌에게 편지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야 위의 억지주장들이 논리적으로 설명될 것이다. 남의 이름을 빌려서 남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부릴 정도의 간교한 칼빈이었다면 이와 같은 자행이 다른 경우에서도 나타나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추정 역시 재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세르베투스의 주장처럼 자신을 음해 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드 트리의 개인적 편지를 칼빈이 구술했다는 주장은 정말 편협된 상상에 불과하다. 드 트리는 칼빈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무식하지 않다. 그는 프랑스 귀족, 지성인, 그리고 200인 의회의 의원이었다. 그런데 개인적 편지를 위해 칼빈의 도움이 필요했겠는가? 어느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억지 주장은 칼빈만이 세르베투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과 드 트리가 칼빈과 가까운 친구라는 것만을 가지고 추론한 것에 불과하다. 스코틀랜드 기독교 역사학자며 칼빈주의자 윌리엄 커닝함(William Cunningham)은 칼빈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생각하는 바를 언제든지 숨기지 않고 나타내는 정직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세르베투스와 같이 위증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또 귀조(Guizot)도 역시 칼빈에 대한 억지주장들은 증거도 불충분할 뿐 아니라 오류로 가득 찼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칼빈]가 자료들을 보내야하는지 갈등했다고 해서 그를 외식하는 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개인적 편지를 공개한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적인 것이기에 그가 망설였던 것이다. 그의 전 생애를 볼 때 그는 가장 정직했고 바른 자였다.” 칼빈이 로마 카톨릭 종교재판자들에게 세르베투스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직접 제시했다는 섣부른 판단은 모두 추정에 불과하고 증거 불충분이다. 칼빈이 아니라 드 트리였다.
심지어 칼빈의 적대자 볼섹(Bolsec)은 칼빈이 직접 편지를 써서 비엔느의 추기경 프랑소와 드 투르농에게 세르베투스가 빌레누브라고 밝혔다고 비난한다. 또 다른 적대자 카스텔리오는 칼빈이 “1552년 9월 19일 제네바를 지나는” 추기경 투르농에게 세르베투스가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야만 한다고 고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칼빈의 반대자 월러스(Wallace)는 세르베투스의 기소를 위해 제시된 물증들은 드 라 로시(de la Roche), 알보에르덴(Allwoerden), 모세임(Mosheim), 보크(Bock), 그리고 트레첼(Trechsel)의 문서에서도 밝히 드러난다고 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대해 커닝함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월러스]에 의하면, 칼빈이 비엔느에서 진행된 세르베투스의 공판의 도발자와 저자라는 증거를 드 라 로키, 알보에르덴, 모세임, 보트, 그리고 트레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모세임과 트레첼[의 글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그 외 사람들에게서는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충분하지도 않다.
세르베투스에 대한 글을 라틴어로 쓴 알보에르덴은 이런 억지주장을 내세우지만 물증이 없다고 솔직히 고백한바 있다. 칼빈의 반대자 툴로크(Tulloch) 역시 “모든 정황을 볼 때, 칼빈에 대한 혐의는 비엔느에서 종교재판에서 진술한 세르베투스의 고소들에만 의존하고 있”지만 칼빈이 그러한 편지를 건넸다느니 구술했다느니 라는 것에 대한 만족할만한 증거가 없다. 칼빈을 반대하는 자들도 칼빈이 드 트리의 편지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관련 있음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도 없이 칼빈을 일방적으로 모욕하려했던 제네바 공판에서의 세르베투스의 편협된 주장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억지 주장에 대한 커닝함의 결론은 이러하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에 대해 개인적 감정이나 보복심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증거불충분이며 설득력 없는 주장일 뿐이다. 칼빈이 공판을 일으켰다거나 시작하기 위해 비엔느의 교황적 권위자들에게 세르베투스건을 설득시켰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공상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로마 카톨릭 종교재판자들에게 세르베투스를 제거하기 위해 물증을 제시하며 기소했다는 것을 부인할 뿐 아니라 무관하다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를 해하는 전문적인 적들 손아귀에 있는 금수들에게 직접 세르베투스를 넘겨주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비엔느에 있는 그를 검거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교황의 수행자들과 내가 친밀해야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개인적 서신들이 그리스도와 벨리알과 같이 전혀 공통점이 없는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이 간단한 답에 독자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자. 이런 일이 있기 4년 전에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편지를 나에게 보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나에 의해 기소되었다면 왜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가 있었을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비엔느의 종교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음흉한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기소하지도 않았다. 드 트리의 개인적 서신이 세르베투스의 정체를 밝히는데 사용된 것과 칼빈은 무관하다. 드 트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부분, 즉 세르베투스의 서명과 주해가 쓰여져 있는 것조차도 칼빈이 마다하였지만 그가 교묘히 뺏어 전달한 것이다. 사촌 아르네이의 처지가 너무나 힘들었기에 그를 구원하는 차원에서 드 트리는 그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여기에 칼빈을 끌어넣은 것은 편협하고, 편파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설득력 없는 억지 주장과 추측에 불과 하다. 칼빈은 무관하다. 그러면 비엔느의 공판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칼빈에 대한 억지주장들이 세르베투스의 증언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그의 증언이 얼마나 거짓되고 가증한 것을 공판을 통해 확연히 들어날 것이다.
4. 비엔느 공판
1553년 4월 4일, 종교재판소장 마티유 오리는 드 투르몽에게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몇 페이지, 즉 세르베투스의 자필이 쓰여진 몇 페이지와 여러 물증들을 제시했다. 드 투르몽(de Tourmon)은 비엔느의 대감독 파미에(Palmier)를 로시용(Rossillon)에 있는 추기경 궁궐로 불러 상의했다. 또 종교재판자 오리, 아르젤리에르(Arzellier), 교회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을 초청했다. 드 트리의 편지들과 함께 칼빈에게 보낸 세르베투스의 편지들,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페이지들을 가지고도 세르베투스로 알려진 빌레누브와 그의 인쇄업자 아르놀을 검거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가졌다고 합의를 보았다.
비엔느와 리용의 두 대감독은 그들을 검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의를 보았다. 그 날 저녁 비엔느로 돌아오자마자 파미에와 그의 대리자 아르젤리에르는 부집행관 앤터니 드 라 코트(Anthony de la Court)를 대감독 궁궐로 급히 불렀다. 검거 명령을 받은 앤터니는 먼저 아르놀을 먼저 검거하고 인쇄소에 남아있는 신약성경 최근판도 취했다. 드 몽트기롱(de Montgiron) 부인을 왕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받은 앤터니는 다피네(Dauphiné) 궁궐 감옥에 중상 당한 사람이 있으니 급히 왕진을 와야겠다고 했다. 감옥에 찾아온 세르베투스는 자신이 이단이라는 혐의로 기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세르베투스를 곧 검거한 앤터니는 세르베투스의 몸종 15세난 베노이 페린(Benoit Perrin)과 다른 방문자들을 허락하여 그를 봉사토록 했고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4.1 첫 심문
다음 날, 4월 5일 세르베투스에 대한 첫 심문이 비엔느에서 열렸다. 대감독 파미에는 종교재판소장 오리를 불러 심문을 시작하도록 했다. 빌레누브와 그의 인쇄업자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오리에 의해 주도된 공판은 저녁에 시작되었다. 진실만을 증언할 것을 선서한 후,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진술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과 교재를 나누었던 사실을 숨겼고, 자신이 쓴 신학적 저서들을 알지 못한다고 시치미를 뗐다. 먼저 자신을 미첼 드 빌레누브임을 주장하면서 44세이고 의사임을 진술했다. 또 나바르의 투델라(Tudéla of Navare)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15-6세에 황제 찰스 5세의 고백자 퀸타나(Quintana)를 섬겼고 27-8세 때에 스페인을 떠났다고 했다. 퀸타나를 봉사한 후 파리에 있는 칼비대학(Collège de Calvi)과 롬바르드 대학(Collège de Lombards)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 후 리용과 아비뇽을 방문했지만 곧 떠나 샬리유(Charlieu)에 2-3년 거하면서 의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 후 비엔느의 대감독 피에르 파미에 집에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스승을 위해 「심프리안 캄페기오를 위한 변증서」(Leonhardum Fuchsium in defensio apologetica pro Symphoriano Campeggio, 1536)와 「시럽에 대한 완전 설명」(Syropporum Universa Ratio, 1537)을 출판했으며 톨러미의 지리서(Ptolemy's Geography)에 주해를 달았다고 시인했다. 이런 작품들 외에는 아무런 작품을 쓰거나 출판하지 않았다고 맹세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르베투스임을 단호하게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툴루제에 살았다는 것도 부인했다. 그 곳의 사람들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단적 책의 저자임을 알고 있었다. 종교재판자들 앞에 이단서적의 저자임을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종교재판자를 속이기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종교재판자가 세르베투스의 자필이 쓰여있는 칼빈의 「세례에 대하여」의 421-24페이지를 세르베투스에게 보였다. 그리고 종교재판자는 그에게 유아세례에 대하여 여러 질문을 물었다. 중생하지 않고 유아들이 어떻게 아담의 죄를 극복하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종교재판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유아세례에 대한 그의 답변을 듣고 그의 자필을 본 종교재판자들은 세르베투스가 저자임을 확신했다. 그러한 반응을 본 그는 당황하였다. 종교재판자들은 그의 저서에서 이단성을 발견하고 난 후, 교회에서 주의해야할 요인물임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그의 모든 진술은 모두 위증이고 간수들의 보고를 함께 종합해 보면 우리의 결론이 옳다고 여긴다. 그의 주요한 목적은 자신이 대이단자(archheretic) 세르베투스의 혐의를 벗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툴루제 대학교에 거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려고 했다. 그 곳에서 그는 세르베또(Serveto) 아니면 레베스(Reves)라는 자신의 실명을 사용했다. 그 이름들은 그가 출판한 첫 작품 겉 페이지에 쓰였던 것이다.
첫 심문에서 그의 대답을 들은 종교재판소는 그에게 “고집스러운 거짓말쟁이”(a persistent liar)이라는 혐의를 붙였고, 재세례자임을 확증 잡았다.
4.2 두 번째 심문
1553년 4월 6일 두 번째 심문에서 세르베투스는 또 다시 복음서에 손을 얹고 진리만 증언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자신이 칼빈에게 보낸 24편의 편지들이 종교재판자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자 자신의 정체를 빠져나가거나 자신의 위증을 주장할만한 상황이 아님을 간파했다. 종교재판자들은 15째 편지를 바탕 하여 첫 질문을 물기를: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카톨릭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하는지, 제네바의 잘못들을 반대하는지, 그리고 믿음의 외투를 벗게 되면 믿음이 완전히 죽게 될까?” 그러자 세르베투스는 “믿음의 외투가 사랑의 실천과 자비를 나타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은 16번째 편지에서 다루어진 자유의지에 대한 것으로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눈물을 흘리며 세르베투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존경하는 지도자님들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25년 전, 이 편지가 쓰여질 때 나는 독일에 거하고 있었습니다[실제는 비엔느에서 썼다]. 세르베투스라 불리는 어떤 스페인 사람이 쓴 작품이 독일에서 인쇄되었습니다. 그가 스페인에서 왔는지, 아니면 독일에 살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의 책이 하게나우(Hagenau)에서 인쇄되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곳은 스트라스부르그 근처에 있습니다. 제가 15-6세 때 독일에서 출판된 책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말씀을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독일을 떠날 때 그와 같은 책을 취하지 않고 프랑스로 왔습니다. 프랑스에서 수학과 의술을 지금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칼빈이 학식인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궁금한 것을 알기 위해 그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으로 시작되었고 형제적 교훈을 얻기 위해 보냈던 것입니다. 왜 내가 그처럼 쉽게 교의들을 수용하지 못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 . . 그가 내 질문을 보았을 때 아마 내가 세르베투스라고 혼돈했을 것입니다. 비록 내가 그가 아니지만, 그 인체 하면서 논쟁을 목적으로 세르베투스의 역할을 대신 했습니다. 그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내 견해만을 일방적으로 피력했습니다. 서신왕래가 뜨거워질 때까지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이에 아무런 교제가 없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교회와 기독교 종교와 반대되는 그 어떤 교리를 교의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에서 볼 때 특이한 것은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고 진술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세르베투스처럼 보이지만 세르베투스가 아니고 세르베투스처럼 행동했을 뿐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오히려 칼빈이 자신을 세르베투스인양 착각했으며 그가 세르베투스에게 쓰는 것처럼 나에게 썼던 것이라고 변명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의 고백이며 뻔뻔한 거짓을 일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빌레누브와 세르베투스간의 정체를 종교재판자들에게 속이려고 하며 혼돈 시키려고 했지만 자신을 이단자 미카엘 세르베투스이며 이단서적들의 저자임을 밝히는 결과를 나타낼 뿐이었다. 위와 같은 거짓과 터무니없는 위증은 제네바 공판에서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그의 거짓된 진술은 오히려 종교재판자들에게 그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며 계속하여 감옥에 가두어야한다는 확신만 더했을 뿐이다.
세 번째 질문은 유아세례에 대한 것이었고 근거는 17번째 편지였다. 그에 의하면 유아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만한 능력이 없다고 했다. 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되자 유아들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18번째 편지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아들의 세대에 대하여 네 번째로 종교재판자들은 그에게 질문했다. 다섯 번째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은 신성의 영광에서 벗어났다”는 그의 명제에 대한 것이었다. 여러 말로 심판자들을 속이려고 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만 줄뿐이었다. 그는 이단적인 요소가 자신의 저서에 있지 않다고 하고 재판자들과 교회가 인정한 것만 시인했다. 결국 그 저서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을 다 들은 후 종교재판자들은 다음 날까지 심문을 연기했다.
자신의 생명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간교한 세르베투스는 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몸종 페린(Perrin)을 시켜 세인트 피에르에 속한 수도원에서 300 에퀴(écus)를 가져오게 했다. 그 돈으로 감수를 매수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렸거나 이런 일을 예상한 오리는 세르베투스와 어느 누구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하지만 감방의 작은 창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세르베투스는 감옥 안에서 언제나 자유로웠고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귀조는 부집행관 앤터니 드 라 코트의 딸이 세르베투스로 인해 병이 낳았기 때문에 그는 세르베투스를 친구처럼 대했던 것이라고 한다.
4.3 세 번째 심문과 도망
1553년 4월 7일 새벽 4시 세르베투스는 일어나 열린 창문을 통해 도주했다. 지난 날 그는 궁궐 뜰을 살피며 도주의 가능성을 이미 탐색한 바 있었다. 매수한 간수에게 열쇠를 달라고 하여 산보를 하겠다고 했다. 간수는 그가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옷 안에 외투를 입고 있었다. 잠옷을 벗어 던지고 담을 넘어 궁궐 뜰을 지나 론 강에 이르렀다. 제네바 공판에서 그의 진술에 의하면 아침 9시 그는 비엔느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간수의 아내는 세르베투스의 도망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자였고, 자녀들과 종들을 구타하면서 진상을 알려고 했다. 그리고 귄위자들은 그의 도망에 보고를 받고 마을 문을 잠그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세르베투스의 도망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심문은 여전히 진행했다. 종교재판자들은 세르베투스의 저서와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10주 동안 더 조사하였다. 오리는 이단 저서들을 인쇄했던 곳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 후, 오리, 앤터니 드 라 코트, 그리고 아르젤리에는 인쇄를 도왔던 세 명을 만나 그들이 「기독교 회복」을 인쇄했다는 자복을 받아 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쇄한 서적이 이단적 요소를 다루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저서들이 라틴어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몰랐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 스트라톤(Thomas de Stranton)은 빌레누브가 자신의 돈으로 인쇄경비를 충원했고 인쇄한 책들을 리용에 있는 피에르 메린(Pierre Merrin)에게 다섯 궤짝을 보냈다고 했다.
오리와 아르제리에는 메린을 심문하기 위해 리용으로 급히 향했다. 그는 비엔느의 사제 쟈크 샤르미에(Jacques Charmier)를 통해 비엔느의 미첼 드 빌레누브의 책 5 궤짝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그 궤짝들을 풀어보라고 하고 그 책들을 비엔느의 대감독 궁궐로 운송했다. 오리와 아르젤리에는 비엔느에 있는 사제 샤르미에를 소환하고 비록 그 내용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빌레누브의 일을 도왔다는 이유로 3년간 가두었다. 그리고 난 후, 오리는 재판관들에게 비밀리에 인쇄된 「기독교 회복」이 이단성 있는 회귀한 책임을 확신시켰다. 세르베투스는 대중의 평화를 위협하고 이단이라는 범죄를 범한 자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종교재판자들은 이러한 범죄사실이 드러나고 증명되자 세르베투스의 부인과 고백이 모두 거짓이고 위증임을 알게 되었다. 시민법정은 세르베투스에 대한 선고를 1553년 6월 17일 다음과 같이 내렸다. 같은 날 정오, 리용에서 수집한 「기독교 회복」의 5 궤짝과 함께 세르베투스의 인형에 형집행장관은 불을 붙였다. 그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인형은 공개적으로 볼 수 있도록 했고 화형을 모두가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재로 남을 때까지 형집행관들은 집행을 지켜보았다. 아르놀은 4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기독교 회복」이 해가 없는 책이라고 구에롤이 증거하고 라틴어를 모른다고 그가 고백했기에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 형집행을 마친 후 그는 리용으로 갔다. 구에롤은 아마도 제네바로 도주했는데 그 이유는 제네바의 알력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제네바 공판에서 세르베투스를 둘러싼 제네바의 정치상황과 세르베투스의 음모를 밝히는데 주요한 인물이 된다.
세르베투스에 대한 남은 심문은 1553년 성탄절 이틀 전, 23일 토요일까지 계속되었다. 세르베투스는 방랑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3개월 6일 후 제네바에서 검거되기 전까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공적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귀조의 생각에는 세르베투스가 6월 17일에 내려진 선고를 듣기 위해 비엔느 근처에서 배회했다고 한다. 그런 후 그는 프랑스나 스위스에 은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5. 결론
비엔느의 공판은 1553년 드 트리와 그의 사촌 아르네이간 서신으로 시작되었다. 그들간의 서신왕래는 개인적이었고 개인적인 문제로 시작되었다. 다시 로마 카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사촌에게 답장을 쓴 드 트리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사실을 밝히므로 사건의 진상은 시작된다. 칼빈의 연관설은 드 트리의 두 번째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이 편지에서 드 트리는 자신의 개인적 편지가 세르베투스를 기소하는 물증이 되었다는 것에 놀랐다. 제네바 공판에서 세르베투스는 칼빈이 자신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자신의 정체를 고발했다고 기소했다. 비엔느 공판과 관련하여 칼빈에 대한 여러 억지 주장들이 있지만 이것은 모두 세르베투스의 상상과 칼빈에 대한 개인 증오심의 발로이다. 칼빈이 그의 공판에 대한 물증을 건네주었다는 것은 그가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칼빈에게 보낸 편지가 물증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드 트리가 마다하는 칼빈의 의지와는 달리 강압적으로 자신의 위신과 사촌의 처지를 생각하여 보냈다. 결코 그도 세르베투스를 고소할 의향은 없었고 카톨릭의 허구성을 지적하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과 의도는 전혀 달랐다. 이것을 볼 때 비엔느 종교재판은 세르베투스에게 매우 불행했던 공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엔느 공판에서 확연히 보았듯이 세르베투스는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종교재판자들마저도 그가 위증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그의 진실성을 믿을 수 없는 데 그가 만들어낸 상상적 억지 주장을 믿기란 쉽지 않다. 그는 거짓만 아니라 다른 공상적인 사실까지도 만들어내어 자신을 변호한다. 자신을 믿고 채용한 대감독까지 속이면서 살았던 그의 인생을 통해 그의 진술을 믿을 만한 것이 못됨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고발하지도 않았고, 드 트리를 통해 편지를 쓰도록 강요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개인적 증오심이 없었다. 굳이 칼빈의 잘못을 찾는다면 부탁하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드 트리에게 결정적 증거들을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칼빈이 건네준 정확한 이유와 의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편지를 보낸 드 트리는 칼빈에게로부터 억지로 뺏었다고 밝혔고, 당사자인 칼빈도 세르베투스를 개인적 감정으로 고발하지도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그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르베투스와는 달리 칼빈은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행할 인물이 아님을 역사가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칼빈에 대한 오해는 모두 세르베투스의 개인적 증오심에서 발로된 것이고, 그의 인간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숭고한 관용정신을 그에게 적용시켰다. 이것은 실수이며 허구일 뿐이다. 비엔느의 공판에서 보듯이 세르베투스의 진술은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 세르베투스는 불리한 처지에 빠지자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13년 동안 자신의 개혁적 신앙을 로마 카톨릭 그늘 아래서 안식을 찾았고, 공판 진술에서도 거짓 진술을 서슴지 않았고, 더욱이 자신의 거짓된 기만이 탄로날 것을 알게되자 도망친 자이다. 그런 자의 고발, 즉 증거 없는 억지 주장을 받아들여 칼빈을 그의 고발자로 연관시킨다는 것은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설득력도 읽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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